1. 개요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이븐 알하산 이븐 파르카드 앗샤이바니(أبو عبد الله محمد بن الحسن بن فرقد الشيباني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이븐 알하산 이븐 파르카드 앗샤이바니아랍어; 749/750년 ~ 805년)는 이슬람 하나피 학파의 중요한 법학자 중 한 명으로, 흔히 '이맘 무함마드'로 불린다. 그는 아부 하니파, 말리크 이븐 아나스, 아부 유수프의 제자였으며, 특히 이슬람 국제법(시야르) 분야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여 '무슬림 국제법의 아버지' 또는 '이슬람의 그로티우스'로 불린다. 앗샤이바니는 하나피 학파의 법학 이론을 체계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의 저술은 전쟁의 원칙, 비전투원 및 포로의 대우, 난민과 외교관의 지위, 조약의 체결 등 국제 관계에 대한 이슬람 법률의 기초를 다졌다. 그의 학문적 기여는 후대 이슬람 법학, 특히 하나피 학파의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앗샤이바니의 생애는 그의 학문적 성장과 경력의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준다.
2.1. 출생과 어린 시절
무함마드 이븐 알하산은 750년에 이라크 와시트에서 태어났으나, 곧 아부 하니파의 고향인 쿠파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 그는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군사 경력보다는 학문적 추구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2.2. 교육
앗샤이바니는 쿠파에서 아부 하니파의 제자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부 하니파는 그를 2년 동안 가르친 후 767년에 사망했다. 이후 앗샤이바니는 아부 하니파의 수석 제자이자 선배였던 아부 유수프 밑에서 훈련을 계속했다. 그는 또한 수피얀 앗사우리와 알아우자이와 같은 다른 저명한 스승들에게서도 배웠다. 앗샤이바니는 나중에 메디나를 방문하여 말리크 학파의 창시자인 말리크 이븐 아나스와 2~3년 동안 공부했다. 이러한 교육 덕분에 앗샤이바니는 매우 어린 나이에 법학자가 될 수 있었다. 아부 하니파의 손자 이스마일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20세(서기 770년경)에 이미 쿠파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2.3. 경력 및 사법 활동
앗샤이바니는 바그다드로 이주하여 학문을 계속 연마했다. 그의 명성은 매우 높아 아바스 칼리파 하룬 알라시드는 그를 수도 라카의 사법관(판사)으로 임명했다(796년 이후). 앗샤이바니는 803년에 이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바그다드로 돌아와 교육 활동을 재개했다. 이 시기에 그는 가장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그의 가장 저명한 제자 중 한 명인 앗샤피이를 가르쳤다. 앗샤피이는 나중에 스승과 의견을 달리하여 『키타브 앗라드 알라 무함마드 이븐 알하산』(무함마드 이븐 알하산에 대한 반박서)을 저술했지만, 여전히 스승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유지했다.
하룬 알라시드는 앗샤이바니를 다시 사법직에 임명했다. 앗샤이바니는 칼리프를 따라 호라산으로 갔고, 805년 레이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사법관으로 봉직했다. 그는 저명한 쿠파의 언어학자이자 문법학자인 알키사이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사망했다. 이에 하룬 알라시드는 "법과 문법을 나란히 묻었다"고 말했다.
3. 주요 활동 및 업적
앗샤이바니는 이슬람 법학, 특히 국제법 분야에서 중요한 학문적, 법률적 기여를 남겼다.
3.1. 하나피 법학 체계화
앗샤이바니는 하나피 학파의 법학 이론을 발전시키고 체계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하나피 법학의 실정법적 측면을 완성했으며, 그의 저술은 이 학파의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3.2. 이슬람 국제법(시야르) 정립
앗샤이바니는 8세기 말에 『국제법 서론』(Introduction to the Law of Nations)을 저술했으며, 이 책은 비무슬림에 대한 지하드 수행 지침과 무슬림 통치하의 비무슬림 신민 대우에 대한 상세한 지침을 제공했다. 그는 이 주제에 대한 두 번째의 더 진보된 논문을 저술했으며, 다른 법학자들도 곧 여러 권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저술은 공법과 국제사법을 모두 다루었다.
이 초기 이슬람 법률 논문들은 이슬람 윤리, 이슬람 경제법, 이슬람 군사법을 국제법에 적용하는 것을 다루었으며, 다음과 같은 현대 국제법 주제들을 포함했다:
- 조약법
- 외교관, 인질, 난민, 전쟁 포로의 대우
- 망명권
- 전장에서의 행위
- 여성, 어린이, 비전투원 민간인의 보호
- 전선 너머의 계약
- 독극물 무기 사용
- 적대 영토의 황폐화
앗샤이바니의 『시야르』는 "언제 전투가 정당화되는가", "누가 전투의 대상인가", "어떻게 전투가 수행되는가"와 같은 질문에 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앗샤이바니에게 정당한 전쟁의 원인은 이슬람 제국을 확장하는 것, 즉 무슬림 국가의 영토를 늘리거나 다른 국가를 종속국으로 삼는 것이었다. 다른 정당한 원인으로는 반란 진압(무슬림, 딤미, 배교자), 도적떼 처벌, 폭력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의 안전 보장이 포함되었다. 오직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을 가하는 자들만이 치명적인 무력 사용의 정당한 대상이었다. 따라서 여성, 어린이, 노인, 장애인, 정신 질환자의 살해는 금지되었다. 전쟁 포로는 전투원 지위에 따라 구별되었다: 남성 포로는 지휘관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판단하는 바에 따라 살려두거나 살해될 수 있었다. 앗샤이바니는 또한 비전투원을 의도치 않게 살해할 수 있는 무기(예: "투석기")의 사용을 탐구했다. 그는 전투원을 목표로 하고 비전투원을 살해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한 이러한 무기 사용이 허용된다고 보았다. 앗샤이바니의 『시야르』에 대한 의견은 하나피 학파에서 영향력이 있었지만, 여러 면에서 샤피이의 의견과는 달랐다.
3.3. 주요 저서와 법리
앗샤이바니의 주요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 『대집성』(الجامع الكبير알자미 알카비르아랍어): 『기본의 서』(Kitab al-Asl)를 중심으로 한 학설집이다.
- 『소집성』(الجامع الصغير알자미 앗사기르아랍어)
- 『대 시야르』(كتاب السير الكبير키타브 앗시야르 알카비르아랍어): 이슬람 국제법에 대한 그의 주요 저서 중 하나이다.
- 『소 시야르』(كتاب السير الصغير키타브 앗시야르 앗사기르아랍어)
- 『보충』(al-Ziyadat)
- 『메디나 학자들에 대한 반박서』(Kitab al-Radd 'ala Ahl al-Madina)
이 저서들은 그의 깊은 법리적 사상과 하나피 학파의 특징적인 법률적 접근 방식을 담고 있다.
3.4. 법적 술책(히얄) 연구
앗샤이바니는 '히얄'(الحيل히얄아랍어)에 대한 연구를 남겼다. 히얄은 합법적인 틀 안에서 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술책을 의미한다. 이는 일련의 합법적인 행위를 통해 본래 불법으로 간주될 수 있는 행위를 수행하는 방법으로, 하나피 학파 법학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로 꼽힌다.
4. 영향력과 평가
앗샤이바니의 학문적, 법률적 업적은 후대 이슬람 법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4.1. 주요 제자들과 학파 전파
앗샤이바니의 가장 저명한 제자 중 한 명은 샤피이 학파의 창시자인 앗샤피이였다. 앗샤이바니는 호라산에 머무는 동안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는데, 이는 하나피 학파가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4.2. 후대 이슬람 법학에 대한 기여
그의 국제법 관련 저술은 이슬람 법학 내에서 공법과 국제사법 분야의 발전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전쟁법, 조약, 외교관 및 포로 대우에 대한 그의 상세한 규범은 후대 이슬람 법학자들이 국제 관계를 다루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그의 인도주의적 접근 방식은 이슬람 법이 전쟁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4.3. 역사적 위상과 평가
앗샤이바니는 '무슬림 국제법의 아버지' 또는 '이슬람의 그로티우스'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이슬람 법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하룬 알라시드 칼리프가 앗샤이바니와 알키사이가 같은 날 사망했을 때 "법과 문법을 나란히 묻었다"고 말한 것은 그의 학문적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하나피 학파의 3대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이슬람 법학의 이론적, 실천적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5. 개인사
앗샤이바니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정보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학문에 전념하며 지적인 경력을 쌓았다. 그의 결혼이나 가족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소스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6. 사망
앗샤이바니는 805년에 레이에서 사망했다. 그는 저명한 쿠파의 언어학자이자 문법학자인 알키사이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