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초기 경력
시게미쓰 마모루는 1887년 7월 29일 일본 오이타현 분고오노시 미에정에서 사족이자 오노군수를 지낸 아버지 시게미쓰 나오노리(重光直愿)와 어머니 마쓰코(松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친정인 시게미쓰 본가에 자식이 없어 양자로 입적되어 시게미쓰 가문의 26대 당주가 되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그는 구제 기쓰키 중학교와 제5고등학교 독법과를 거쳐 1911년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1.2. 외무성 입성과 초기 외교 활동
대학 졸업 직후인 1911년 9월, 외무성에 입성하여 외교관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그는 독일 주재 외교관보, 영국 대사관 3등 서기관, 미국 시애틀 및 포틀랜드 영사, 파리 강화 회의 일본 전권단원, 조약국 제1과장, 중화민국 공사관 1등 서기관, 독일 대사관 참사관, 상하이 총영사를 거쳐 1930년에는 주중화민국 공사로 부임했다.
2. 전쟁 이전의 외교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 시게미쓰 마모루는 일본의 국제적 고립을 막고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기 위해 다양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2.1. 만주사변 및 상하이 사건 관련 활동
1931년 9월 일본 육군의 일부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제압하면서 국제 문제가 되자, 시게미쓰는 유럽 각국을 돌며 일본군의 만주 활동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메이지 이래 쌓아온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하루아침에 파괴되고, 우리의 국제적 신용이 급속히 소모되는 것은 외교를 담당하는 자로서 견디기 어려운 일"이라고 비판하며 외교를 통한 협조 노선을 통해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1932년 1월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자, 시게미쓰는 서방 국가들의 도움을 받아 중화민국군과 일본군 간의 정전 협상을 성공적으로 중재했다.
2.2. 홍커우 공원 폭탄 테러 사건
정전 협정을 마무리하고 조인만을 남겨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쇼와 천황의 천장절 축하 식전에서 조선 독립운동가 윤봉길이 투척한 폭탄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오른쪽 다리를 잃어 평생 의족과 지팡이에 의지하게 되었다. 시게미쓰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정전을 성립시키지 않으면 국가의 앞날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질 것"이라고 말하며, 사건 발생 7일 후인 5월 5일 오른쪽 다리 절단 수술 직전에 상하이 정전 협정에 서명했다. 당시 그의 옆에서 함께 폭탄 공격을 받아 한쪽 눈을 잃었던 노무라 기치사부로 해군 대장 역시 훗날 외무대신과 주미 대사를 지내며 일미 협상의 최전선에 서게 된다. 폭탄이 던져졌을 때 도망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는 "국가 제창 중이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중화민국이 국제 연맹에 제소한 것을 계기로, 1933년 2월 24일 국제 연맹에서 일본군의 만주에서의 행동을 부당하다고 판단하는 결의안(리튼 보고서)이 찬성 42개국 대 반대 1개국(일본)으로 채택되었다. 이에 불복한 일본은 국제 연맹 탈퇴를 선언하며 국제사회에서 고립의 길을 걷게 된다. 시게미쓰는 당시 "유럽과 미국 국가들은 유럽에 민족주의를 실현하는 데 노력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거의 아시아에는 향하지 않았다. 유럽과 미국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대부분을 식민지로 삼고 아시아 민족의 국제적 인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기록을 남기며 백인에 의한 아시아 지배는 용납될 수 없다고 분노했다.
2.3. 주요 대사 임무
이후 시게미쓰는 주소련 특명전권공사를 역임하며 장고봉 사건과 건자자도 사건에 관여했다. 1938년에는 하산호 전투 후의 국경 분쟁 해결을 위한 협상을 맡았다. 이어서 주영국 대사로 부임했으나, 영일 관계가 악화되던 시기였고 특히 1939년 톈진 사건으로 일본이 영국과의 전쟁 직전까지 가는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그는 영국과의 관계 개선과 장제스 정권에 대한 원조 중단 요청 등에 힘썼으며, 유럽 정세에 대한 정확한 보고를 본국에 보냈다. 시게미쓰는 일본이 유럽 전쟁에 절대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수차례 도쿄에 전보를 보냈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듣지 않았다. 1941년 6월 그는 소환되었다.
1940년 9월 27일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대신(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독일 및 이탈리아와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하자, 시게미쓰는 이 조약이 미국 내 반일 감정을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영국에서 귀국하는 길에 2주간 워싱턴 D.C.에 머물며 노무라 기치사부로 대사와 협의하여 고노에 후미마로 일본 총리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간의 직접 대면 협상을 주선하려 시도했다.
3. 제2차 세계 대전 중 외무대신으로서의 역할
시게미쓰 마모루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외무대신 및 대동아대신으로 재직하며 일본의 외교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했고, 전쟁 종결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1. 외무대신 및 대동아대신 재임
시게미쓰의 수많은 전쟁 회피 노력은 도쿄의 군국주의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진주만 공습 이틀 후 그는 일본이 후원하는 중화민국 국민정부 대사로 좌천되었다. 중국에서 시게미쓰는 제안된 대동아공영권의 성공은 일본이 중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데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1943년 4월 20일, 일본이 추축국의 붕괴에 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는 움직임으로 도조 히데키 총리는 외무대신 다니 마사유키를 시게미쓰로 교체했다. 시게미쓰는 군국주의자들에 대한 확고한 반대 입장을 유지해왔다. 이로써 시게미쓰는 대동아회의 기간 동안 외무대신을 맡았다. 1944년 7월 22일부터 1945년 4월 7일까지 그는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에서 외무대신과 대동아대신을 겸임했다. 이후 일본의 항복 직전인 1945년 8월,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내각에서 잠시 외무대신을 다시 역임했다.
3.2. 군국주의와 전쟁에 대한 입장
시게미쓰는 마쓰오카 요스케의 외교 정책, 특히 삼국 동맹 조약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이 조약이 미국 내 반일 감정을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일본은 감히 동아시아 민족을 짓밟고 압박하여 그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무력적 발전은 동아시아 민족의 이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대동아성 설치에 반대했다. 그러나 도조 히데키 총리의 브레인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현실화하기 위해 1943년 11월 대동아회의 개최를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이 회의에서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로 자주독립을 존중하고 차별 없이 대등한 입장에서 협력할 것을 선언하는 대동아 공동 선언이 발표되었다.
3.3. 항복 문서 조인


일본의 패전 직후 구성된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재임명된 시게미쓰는 일본 정부의 전권대사로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중책을 맡았다.
1945년 9월 2일 아침, 도쿄만에 정박한 미국 해군의 전함 미주리 갑판에서 항복 문서 조인식이 거행되었다. 시게미쓰는 대본영 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와 함께 전권단 대표로서 문서에 서명했다. 그는 이 조인을 "불명예의 종착점이 아니라, 재생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였으며, 당시의 심경을 "원하건대 내 나라의 앞날이 번영하여 내 이름을 헐뜯는 사람이 많기를"이라고 읊었다. 조인식 하루 전, 쇼와 천황은 시게미쓰에게 "이 애도의 날을 새로운 일본의 탄생일로 삼도록 하자.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고개를 들고 식전에 참석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전후 일본을 점령한 GHQ는 점령하에서도 일본의 주권을 인정하기로 한 포츠담 선언을 뒤집고 행정·사법·입법의 삼권을 빼앗아 군정을 실시할 방침을 밝혔다. 공용어도 영어로 하겠다고 했다. 시게미쓰 마모루는 더글러스 맥아더를 상대로 "점령군에 의한 군정은 일본의 주권을 인정한 포츠담 선언을 일탈하는 것", "독일과 일본은 다르다. 독일은 정부가 괴멸했지만 일본에는 정부가 존재한다"고 맹렬히 항의하며 포고의 즉시 철회를 요구했다. 그 결과, 점령 정책은 일본 정부를 통한 간접 통치로 변경되었다.
4. 전후 처리 및 도쿄 재판
시게미쓰 마모루는 전쟁 범죄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며,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재판을 받고 판결을 받은 후 석방되었다.
4.1. 전쟁 범죄 혐의와 수감
외무대신직 사임 후, 그는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외무성 관련 용의자들의 변호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6년 4월 13일 일본에 온 소련 대표 검사 세르게이 A. 고룬스키가 조셉 키넌 수석 검사에게 시게미쓰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도조 내각과 고이소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지냈다는 이유로 그를 A급 전범으로 기소할 것을 강경하게 요구했다.
4.2. 극동 국제 군사 재판

당초 GHQ는 시게미쓰를 전범으로 기소할 의사가 전혀 없었고, 키넌을 비롯한 미국 측 검사단도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민주당 정권은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재판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소련 측의 흔들림에 굴복하는 형태가 되었고, 더글러스 맥아더도 요구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4월 29일 기소 당일에 체포 기소되었고, 1948년 11월 12일 유죄 판결을 받아 금고 7년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에서는 다카야나기 겐조와 조지 A. 퍼니스 변호사의 노력 등으로 금고 7년형이라는 A급 전범 중 가장 가벼운 형량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일본뿐만 아니라 당시 서구 언론들도 시게미쓰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었기에, 유죄 판결은 소련을 만족시키기 위한 GHQ의 정치적 타협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실제로 당시 스가모 구치소에서 헌병을 지냈던 불룸 대위는 "놀랐다. 귀하의 무죄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고 분노를 표했으며, 헌병대장 켄워시 중령은 "판결은 반드시 뒤집힐 것"이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또한 수석 검사 키넌은 "어처구니없는 판결이다. 시게미쓰는 평화주의자다. 무죄가 당연하다. 마쓰이 이와네, 히로타 고키가 사형이라니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마쓰이의 죄는 부하의 죄이므로 종신형이 적합하다. 히로타도 교수형은 부당하다. 아무리 무거운 형벌을 생각해도 종신형까지는 아니다"라고 시게미쓰 등의 판결을 비판했다.
4.3. 가석방 및 사면
시게미쓰는 4년 7개월의 복역 후 1950년 11월 21일 스가모 구치소에서 가석방되었다. 다카야나기, 퍼니스 두 변호사가 마중 나온 가운데 구치소의 데이비스 중령과 악수했다. 직원들이 박수로 배웅하는 가운데 구치소를 떠나 자택으로 돌아왔다. 가석방 처분은 1952년 연합국과 일본의 강화 조약 발효 후, 조약 규정에 따라 일본 정부와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 참여한 모든 국가 정부와의 합의에 의해 사면되어 형 집행이 종료되었다.
5. 전후 정치 활동 및 외교 재건
석방 후 시게미쓰 마모루는 정치계에 복귀하여 일본의 민주주의 재건과 국제사회 복귀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5.1. 정계 복귀와 정당 활동
시게미쓰는 강화 조약 발효와 공직 추방 해제 후 일본 중의원 의원으로 세 차례 선출되었다. 그는 단명한 개진당을 창당하여 총재를 지냈으며, 1952년 10월 중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54년 일본민주당이 창당되자 부총재를 맡았다. 개진당 총재였던 1952년에는 야당 수반으로서 요시다 시게루와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 경쟁하여 중의원에서 2위를 차지했다. 이어진 1953년 총선 후 소수 여당이 된 요시다의 자유당으로부터의 연립 제안을 거부했다. 야당의 수반 후보로서 시게미쓰의 내각총리대신 지명이 현실화될 뻔했으나 야당의 발걸음이 흐트러져 좌우 사회당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결선 투표에서 패배했다. 요시다와의 회담을 통해 각외 협력을 받아들였다.
1953년 9월 27일, 요시다와의 회담에서 보안대에서 자위대로의 전환, 장기 방위 계획에 합의했다. 이후 하토야마 이치로 파와 합당하여 일본민주당을 결성했다. 1955년 보수 합동에 의한 자유민주당 결성에 참여했다.
5.2. 부총리 및 외무대신으로서의 역할
1954년 12월부터 1956년 12월까지 제1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부터 제3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 부총리를 겸임하며, 전쟁 중 세 차례에 이어 네 번째로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1955년 자유민주당이 결성된 후에도 내각은 계속되었고, 시게미쓰는 1956년까지 부총리직을 유지했다.
5.3. 주요 국제 외교 활동

1955년 4월, 그는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된 반둥 회의에 일본 대표로 참석했다. 이는 국제 연맹에서 탈퇴한 이래 일본이 국제회의에 다시 참여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시게미쓰는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을 추진하기 위해 고위급 일본 대표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했으나, 조약의 주요 설계자였던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으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얻어 성과를 내지 못했다. 덜레스는 시게미쓰에게 조약 개정 논의는 일본이 "새로운 조약 체결 하에 운영될 통합, 결속,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시기상조"라고 단호하게 말했고, 시게미쓰는 빈손으로 일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1956년 7월, 시게미쓰는 소련과의 국교 정상화와 쿠릴 열도 분쟁 해결을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그러나 북방 영토 문제가 난항을 겪어 협상을 타결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시게미쓰는 "일소평화조약 체결을 위해서는 하보마이 군도와 시코탄섬 두 섬만을 반환받는 소련 측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전보를 도쿄에 보냈다. 그러나 하토야마는 시게미쓰의 제안을 거부하고, 시게미쓰를 수에즈 회의에 보낸 후 자신이 직접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협상에 임했다. 하지만 북방 영토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고, 미국으로부터는 유약한 외교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하토야마는 일소평화조약 체결 및 북방 영토 문제 해결을 보류하기로 하고, 10월 19일 소련과의 국교 회복을 의미하는 일소 공동 선언만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 일본은 소련으로부터 '유엔 가입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내락을 얻었다.
5.4. 국제 연합 가입 추진
1956년 12월 18일, 국제 연합 총회는 76개 회원국의 만장일치로 일본의 유엔 가입을 승인했다. 시게미쓰는 일본의 유엔 가입이 인정된 것에 대한 가입 수락 연설에서 "일본은 동서양의 가교가 될 수 있다"고 표명했고, 유엔 총회에 참석한 회원국 대표단으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그 직후 유엔 본부 앞뜰에 직접 일장기를 높이 게양한 시게미쓰는 당시의 심경을 "안개 걷히고 유엔 탑은 빛나는데 높이 걸린 일장기"라고 읊었다.
6. 개인사

시게미쓰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결점이 없는 것이 결점"이라고 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훙커우 공원 폭탄 테러로 오른쪽 다리를 잃은 후, 공식 석상에서는 10 kg의 의족을 착용했다. 의족을 착용한 상태에서의 보행은 매우 어려웠고 실제로 100 km나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기도 했지만, 그는 스스로 그 사실을 개의치 않는 듯했다. 훗날 미주리호 갑판 위에 시게미쓰를 들어 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미국 수병들을 뒤로하고, 시게미쓰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그저 의연하게 서 있었다고 한다. 다만, 지팡이를 떨어뜨리는 등 서명에 다소 지체하여 이를 "보기 흉한 지연"으로 멋대로 해석한 홀시에게 일갈을 들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가 공무에 복귀했을 때, 히로타 고키 외무대신(사이토 마코토 내각)은 시게미쓰의 건강을 염려하여 당시 외교 현안이 적었던 주소련 대사로 임명하고, 주소련 대사로 예정되어 있던 도고 시게노리를 주독 대사로 보냈다. 그러나 장고봉 사건 처리 등을 놓고 시게미쓰와 소련 외무부가 대립했고, 심지어 소련 언론으로부터 "무능한 외교관"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마쓰오카 요스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시게미쓰에게 동정심을 느꼈고, 훗날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대신 아래에서 이루어진 주요국 대사 일괄 해임 때도 시게미쓰 주영 대사만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한편,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시게미쓰의 기소를 가장 강경하게 요구한 것은 소련 정부였다고 전해진다. 급히 주독 대사가 된 도고 시게노리 역시 나치 독일에게 미움을 받아 주독 대사직에서 물러났고, 도쿄 재판에서는 "친독파"라는 의심을 받게 되어 히로타의 배려가 둘 다에게 좋지 않은 결과로 돌아왔다.
전후 진주군이 아쓰기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시게미쓰는 외무대신 겸 대동아대신(히가시쿠니 나루히코 내각)으로서 요코하마시에 "영미군을 절대로 수도에 들이지 말 것, 직접 군정을 시키지 말 것, 군표를 사용시키지 말 것"을 엄명했다.
스가모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장애인이면서도 사회 복지 사업가로 활약했던 헬렌 켈러의 두 번째 일본 방문 소식이 들려오자, 전직 장군들이 "저 사람은 맹인임을 팔아먹는 것"이라고 폄하한 것에 대해 시게미쓰는 "그들이야말로 불쌍한 마음의 맹인, 어찌 저런 망언을 하는가. 일본인을 위해 슬퍼해야 할 일이다"라고 전직 장군들을 통렬히 비판하며 그들의 편협한 시각을 한탄했다.
고노에 후미마로와는 친분이 있었지만, 패전 후 고노에가 전쟁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천황이나 군부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언동을 일삼은 것에 대해서는 "전쟁 책임 용의자들의 태도는 모두 추악하다. 고노에 공 같은 이는 특히 그렇다..."라고 말하며 고노에를 특별히 엄하게 비판했다.
전후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 외무대신 겸 부총리를 지낼 때, 하토야마가 "관료 정치인이 아닌 당인 정치인에 의한 정권 운영을 하고 싶다"고 무신경하게 발언하여 외교관 출신인 시게미쓰와 하토야마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또한 하토야마가 일소 국교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운 반면, 시게미쓰는 대소 강경론자였다.
7. 사망
소련 방문 이듬해인 1957년 1월 26일, 시게미쓰 마모루는 가나가와현 유가와라정의 별장에서 69세의 나이로 심근경색으로 급서했다.
8. 평가 및 유산
시게미쓰 마모루는 격동의 시대에 일본 외교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며 긍정적 평가와 비판적 논란을 동시에 받은 인물이다.
8.1. 긍정적 평가와 기여
그는 외교관으로서의 뛰어난 전문성과 국제 정세에 대한 정확한 판단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쟁 이전에 만주사변과 상하이 사변 등 군부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한 일본의 국제적 고립을 막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며, 전쟁 중에도 군국주의 정책에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며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다.
특히 전후에는 일본의 국제사회 복귀와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 부총리 겸 외무대신으로서 반둥 회의 참석, 미국과의 관계 개선 시도, 소련과의 국교 정상화 추진, 그리고 국제 연합 가입을 실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일본이 전후 국제 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복귀하고 민주적 국제 질서에 편입되는 데 중요한 기반을 마련했다. 시게미쓰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결점이 없는 것이 결점"이라고 평할 정도로 완벽주의적이고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고 보았다.
8.2. 비판 및 논란
시게미쓰 마모루는 전쟁 중 외무대신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비판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비록 그가 군국주의에 비판적이었고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지만, 전시 내각의 일원으로서 일본의 외교 정책을 담당했다는 책임이 따랐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그를 둘러싼 가장 큰 논란 중 하나다. 비록 그의 형량이 다른 A급 전범들에 비해 가벼웠고, 미국 측 검사단조차 그의 기소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강경한 요구로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는 점에서 이는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당시 많은 이들은 시게미쓰의 무죄를 예상했기에, 그의 유죄 판결은 전후 일본의 법적, 정치적 청산 과정에서 나타난 국제적 역학 관계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8.3. 저술 및 회고록
시게미쓰 마모루는 자신의 경험과 사상을 담은 여러 저술을 남겼다. 그의 주요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 《쇼와의 동란》(昭和の動乱일본어, 1952년): 상하권으로 나뉘어 출간되었으며, 일본의 격동적인 쇼와 시대를 외교관의 시각에서 회고한 책이다.
- 《외교회상록》(外交回想録일본어, 1953년): 그의 외교관으로서의 생애와 주요 외교 활동을 상세히 기록한 회고록이다.
- 《스가모 일기》(巣鴨日記일본어, 1953년): 스가모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기간 동안의 일기로,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의 뒷이야기와 당시 그의 심경을 엿볼 수 있다.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문서집들이 있다.
- 《혁명외교 시게미쓰 주지공사 보고서》(革命外交 重光駐支公使報告書일본어, 1931년): 주중화민국 공사 시절 작성한 외교 보고서.
- 《시게미쓰 외무대신 주요 연설집》(重光外務大臣主要演説集일본어, 1955년)
- 《시게미쓰 외무대신 방미 언설집》(重光外務大臣訪米言説集일본어, 1955년)
- 《시게미쓰 아오이 수기》(重光葵手記일본어, 1986년, 1988년): 그의 개인적인 기록과 생각을 담은 수기.
- 《시게미쓰 아오이 최고 전쟁 지도 회의 기록·수기》(重光葵 最高戦争指導会議記録・手記일본어, 2004년)
- 《시게미쓰 아오이·외교 의견서집》(重光葵・外交意見書集일본어, 2007년~2010년): 주소련 대사, 주영국 대사, 주중화민국 대사, 외무대신 시절의 외교 의견서 모음.
8.4. 훈장 및 기념
사후 1957년 1월 26일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이 추서되었다. 이전에는 1916년 4월 1일 훈6등 서보장과 대정34년 종군기장, 1920년 9월 7일 훈5등 쌍광욱일장, 1924년 5월 31일 훈4등 서보장, 1930년 4월 22일 훈3등 서보장, 1940년 4월 29일 훈1등 욱일대수장, 1941년 9월 13일 훈1등 서보장을 받았다.
외국 훈장으로는 1934년 5월 9일 만주국의 훈2위 경운장, 1935년 9월 21일 만주국 황제 방일 기념장, 1938년 8월 2일 만주국 훈1위 주국장, 1943년 6월 2일 중화민국 정부의 특급 동광훈장, 1943년 7월 27일 나치 독일의 독일 독수리 훈장 대십자장을 수여받았다.
그의 생가인 무세키안(無迹庵)에는 시게미쓰의 유품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9. 관련 항목
- 일본 외무성
- 제2차 세계 대전
- 일본의 항복 문서
- 극동 국제 군사 재판
- 하토야마 이치로
- 국제 연합
- 반둥 회의
- 쿠릴 열도 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