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도고 시게노리는 1882년 12월 10일 가고시마현 히오키군 나에시로가와촌(현 히오키시 히가시이치키 정 미야마)에서 조선계 일본인 박수승과 박토메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에 의해 일본으로 연행되어 규슈에 정착한 조선인 도공들의 후예이다. 특히 그의 증조부는 도공 박평의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사쓰마번의 나에시로가와에 집성촌을 이루어 대대로 도자기를 제작하며 생활했으며, 에도 막부 말기까지 조선어와 조선의 풍습을 유지하며 조선인의 정체성을 지켰다.
사쓰마번은 나에시로가와 주민들에게 조선 풍속 유지, 일본 이름 사용 금지, 타 지역과의 혼인 제한 등의 통제 정책을 시행하는 동시에, 외부인으로부터의 폭행에 대해서는 엄벌을 가하는 등 보호와 통제를 겸한 정책을 펼쳤다. 대부분의 나에시로가와 주민들은 향사보다 낮은 신분이었으나, 이러한 보호책 덕분에 나름의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신분제가 해체되고 1872년 임신호적이 시행되면서 이들은 '평민'으로 분류되었고, 차별은 더욱 심화되었다.
1880년, 그의 할아버지 박이구를 포함한 나에시로가와 마을 남자 364명은 가고시마현청에 사족 편입을 탄원했으나, 1885년 마지막 탄원까지 모두 거부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의 아버지 박수승은 가업인 도자기 사업을 산업화하여 요코하마의 외국인 등 현 외부로 도자기를 판매하며 재산을 모았다. 그리고 1886년, 박수승은 사족이었던 '도고' 가문의 호적을 매입하여 당시 4세였던 시게노리를 '도고 시게노리'로 입적시키며 성을 바꿨다. 이는 가문의 신분 상승과 함께 조선 혈통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참고로 가고시마에서 '도고'라는 성은 흔한 편이었고, 박수승이 입적한 도고 가문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과는 무관하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도고 시게노리는 1888년 시모이슈인 촌립심상고등소학교에 입학했으며, 사숙에서 공자의 《논어》 등을 배우며 독서 지도를 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대단한 공부벌레로 유명했으며, 늘 포켓용 영어사전을 가지고 다니며 단어를 외우고 한 페이지를 다 외우면 해당 페이지를 찢어 삼킬 정도로 학문에 매진했다. 그의 과묵하고 필요한 말만 하는 성격은 일찍부터 형성되었고, 조선인 혈통이라는 점 때문에 일본인 동급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부의 아들인 사키모토 요시오가 그의 유일한 친구였다. 요시오의 증언에 따르면, 사족 자제들의 차별에 대한 저항감 때문에 둘은 공부에 더욱 매달렸다고 한다.
1901년 가고시마현 심상중학교를 거쳐 가고시마 대학의 전신인 제7고등학교 조시칸에 진학했다. 이곳에서 가타야마 마사오에게 사사하며 독일 문학에 대한 이해를 깊이했다. 아버지 박수승은 그가 법학과에 진학하여 내무성 관리가 되어 현 지사를 역임하기를 원했으나, 도고는 아버지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04년 도쿄 제국대학 문과대학 독어독문학과에 진학했다.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린 선택이었기에 한동안 진학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대학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주임 교수가 독일 문헌 중심의 훈고학적 방식을 강조하고 회화체를 중시했으나, 도고는 독일어 회화에 능숙하지 못했고 본래의 문학적 꿈과도 맞지 않아 수업 성적이 좋지 않았다. 결국 그는 수업에 거의 참여하지 않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는 데 몰두했다. 1908년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는데, 병으로 인해 1년을 더 다닌 끝에 졸업했으며, 졸업 성적은 동급생 6명 중 꼴찌였다. 게다가 하숙집에 화재가 발생하여 모든 책을 잃는 불운을 겪으며 독일 문학가, 문예평론가의 꿈을 접게 되었다.
이후 메이지 대학에서 독일어 강사로 재직하기도 했으며, 1912년 세 번째 시도 끝에 외교관 및 영사관 시험에 합격하여 외무성에 입성했다. 아들 시게노리가 신분을 바꾸는 큰일을 해냈다는 소식에 아버지 박수승은 크게 기뻐하며 일주일간 잔치를 열었다. 합격자 발표 후, 박수승은 본적지를 가고시마시 니시센고쿠초로 옮겨 나에시로가와 마을과의 300년 가까운 인연을 완전히 끊었다.
1.2. 외교관 경력 시작
외무성에 임용된 도고는 신장염으로 잠시 입원 후 정무국과 통상국에서 7개월간 근무했다. 그는 한문, 중국어, 영어, 라틴어, 독일어에 능통했으며 특히 고전 실력이 뛰어나 필력과 문제 파악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을 받았다. 과묵하고 고집을 내세우지 않는 성격 덕분에 고위 상사들이 그를 편하게 여겨 자주 업무를 지시했으나, 그는 불평 없이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다. 동기생 기타다 마사모토는 그를 "서구적 사상과 동양적 인격 수양, 유교적 단련, 그리고 문학적 소양까지 겸비한 친구"라고 회고했다.
1913년 중국 선양 총영사관 영사관보로 첫 해외 발령을 받았다. 이후 1916년 스위스 베른 공사관 3등 서기관으로 부임했으며, 1919년에는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 바이마르 공화국 하의 혼란기에 베를린 주재 일본대사관으로 부임했다. 이 시기에도 일독 관계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베를린 근무 중인 1919년, 그는 건축가 게오르그 데 라란데의 미망인인 카를라 빅토리아 에디타 알베르티나 안나 기제케(1887-1967)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게오르그 데 라란데는 한국의 조선총독부 청사를 설계한 건축가로도 알려져 있다. 에디타는 유대인 어머니 안나 기제케와 독일 귀족 아버지 사이의 사생아로 태어나 생후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를 여의고 외숙모 부부에게 입양되어 '피츠케'라는 성을 사용했다. 15세에 양아버지의 러청은행 일본 지점 전근으로 일본에 왔으나 양아버지가 급사하면서 양어머니와 함께 고베에서 민박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었다. 17세에 16세 연상의 유대인 건축가 게오르그 데 라란데와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9년 후 남편과 사별하고 독일에 귀국했다. 도고와 에디타는 괴테의 낭만시집을 매개로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도고는 자신의 조선계 혈통에 대한 깊은 고민과 함께 일본인 부모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일본인 여성과의 결혼에 번번이 좌절했다. 결국 불혹의 나이에 독일인 미망인 에디타와 결혼했으며, 1922년 도쿄 제국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에디타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네 명의 딸(우르줄라, 오틸리에, 유키, 하이디)과 한 명의 아들(귀도)을 두었고, 도고와의 사이에서는 딸 도고 이세를 낳았다.
2. 외교관 경력
1923년 외무성 구미국 제1과장으로 부임한 도고는 주로 소련과의 교섭을 담당했다. 1935년에는 북만주 철도를 소련으로부터 일본으로 양도받는 데 관여했다. 이후 1926년 워싱턴 D.C.의 주미 일본 대사관 수석 서기관으로 부임했으며, 1929년 귀국 후 잠시 만주 출장을 거쳐 다시 주독 일본 대사관 참사관으로 부임했다.
1932년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 군축 회의에 일본 대표부 사무총장으로 참석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33년 일본으로 귀국하여 외무성 구미국장으로 취임했으나, 이 해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해 한 달 넘게 입원하기도 했다. 이후 유럽아프리카국장을 역임했다.
2.1. 주요 외교 임무
1937년, 도고 시게노리는 다시 주독 일본 대사로 부임하여 1938년까지 베를린에서 근무했다. 이 시기 나치 독일이 정권을 잡으며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고, 베를린의 시나고그가 불타는 등 유대인 박해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원래 독일 문학에 조예가 깊고 독일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도고는 나치즘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느꼈다. 그는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고자 하는 일본 육군의 의지를 대변하던 주독 육군 무관 오시마 히로시나, 일본과의 동맹을 원했던 나치 외교 담당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대립하며 결국 주독 대사직에서 경질되었다.
1938년 도고는 소련 대사로 부임하여 1940년까지 모스크바에서 근무했다. 당시 일본 제국은 1936년 체결된 방공 협정의 영향으로 소련과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상태였다. 그러나 도고는 당시 소련 외무인민위원(외상)이었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소련-일본 어업 협정을 체결하고, 노몬한 사건 이후의 평화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며 양측의 신뢰를 구축했다. 몰로토프는 도고를 "일본의 국익을 열렬히 주장한 외교관"으로 높이 평가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관계 개선을 바탕으로 도고는 악화되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 및 중일 전쟁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소련-일본 중립 조약 협상을 개시했다. 일본 측은 소련의 장제스 정권에 대한 원조 중단을, 소련 측은 일본의 북부 사할린 이권 포기를 조건으로 거의 타결 직전까지 나아갔다.
2.2. 주요 외교 성과
도고 시게노리는 소련-일본 중립 조약을 거의 타결 직전까지 이끌어내는 성과를 보였다. 그러나 1940년 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수립되고 마쓰오카 요스케가 외무대신이 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마쓰오카는 일본 육군의 의지를 받아 북부 사할린 이권 포기에 반대하며 도고에게 귀국 명령을 내렸다. 마쓰오카는 도고에게 은근히 자진 사퇴를 권했으나, 도고는 오히려 정식 징계 절차를 밟으라며 이를 거부했다.
이후 마쓰오카가 주도하여 체결된 소련-일본 중립 조약은 삼국 동맹 조약이 이미 성립된 상황에서, 그리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 진주로 인해 미국의 대일 경제 제재가 강화된 상황에서 체결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조약은 도고가 의도했던 미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소련이 나치 독일의 침공에 대비하는 의미와 일본의 대륙 남진을 간접적으로 원조하는 의미만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일본 측의 북부 사할린 이권 포기 조건이 삭제된 대신, 소련 측의 장제스 정권 원조 중단 조항도 포함되지 않아 도고에게는 불만족스러운 결과로 남았다. 외무대신을 역임했던 사이고온지 긴모치는 도고가 마쓰오카에 의해 소련 대사직에서 해임되어 외무성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깊이 개탄했다고 전해진다.
3. 정치 경력 및 정부 활동
도고 시게노리는 외교관 경력 이후 일본의 주요 정치적 직책을 수행하며 전시 외교를 책임졌다.
3.1.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외교

1941년 10월 18일, 도고는 도조 히데키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입각했다. 일부에서는 쇼와 천황이 도조 히데키에게 직접 미국과의 참전을 피하라고 지시했고, 이에 도조가 태도를 바꿔 대미 협조파인 도고를 외무대신으로 기용했다고 보고 있다. 외무성 내부에서 도고는 직업 외교관으로서의 역량은 높이 평가받았으나, 폐쇄적인 성격으로 인해 인맥이 적고 주류파는 아니었다. 그는 외무대신 취임 후 니시 하루히코를 차관으로, 야마모토 쿠마이치를 미국국장으로, 카세 토시카즈를 미국과장으로 임명하며 대미 협상 체제를 갖추고, 내부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일부 강경파 대사 및 관료에게 사표를 요구하는 등 조직을 장악했다. 1941년 10월 18일부터 1941년 12월 2일까지는 식민지 대신을 겸임했다.
도고는 천황과 도조의 뜻을 받들어 미일 개전을 피하기 위한 협상에 돌입했다. 그는 먼저 북중국, 만주, 하이난섬에서는 5년 이내, 기타 지역에서는 2년 이내 철병을 조건으로 하는 "갑안"을 제시했으나, 육군의 강경한 반대와 미국 측의 강경한 태도 때문에 타결이 어려웠다.
이에 시데하라 기주로가 입안하고 요시다 시게루와 도고가 수정한 "을안"이 제출되었다. 이 안은 미국의 대일 자산 동결 이전 상태로 복귀를 목표로, 일본의 남부 인도차이나 철수와 미국의 석유 대일 공급 약속을 조건으로 했다. 여기에 일본군 최고 통수부는 "미국 정부가 중일 평화에 관한 노력을 하고 중국 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추가했다. 이 수정안은 특사 쿠루스 사부로와 주미 대사 노무라 키치사부로를 통해 미국의 코델 헐 국무장관에게 제시되었다.
이후 미국 측이 제시한 헐 노트를 읽은 도고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실망에 휩싸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헐 노트를 "최후통첩"이라고 상주했으며, 어전회의의 결정에 따라 태평양 전쟁이 개시되었다. 실제로 헐 노트에는 '최후통첩'이라는 문구는 없었으며, 시안(試案)으로 '향후 협상 내용을 구속하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도고는 자신의 변호 과정에서 이 헐 노트의 조건으로는 일본이 자살하거나 전쟁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헐 노트 = 미국의 최후통첩'이라는 주장의 시초 중 하나로 평가된다.
요시다 시게루는 도고에게 사임을 압박했으나, 도고는 이번 개전이 자신이 외교 책임자로서 진행한 협상의 결과이므로 타인에게 선전포고 문서의 서명 책임을 지우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보았다. 또한 자신이 사임하더라도 친군파의 새로운 외무대신이 임명될 뿐이라고 판단하여 사임을 거부하고, 조기 강화 실현에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1941년 12월 1일 어전회의에서 쇼와 천황이 도조 히데키 총리에게 "최종 통고서 전달 전에 공격이 개시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주미 일본 대사 노무라 키치사부로도 11월 27일자 전보에서 "협상 중단 의사를 표시하지 않으면 역선전에 이용될 수 있고 대국으로서의 신의에도 어긋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이에 도고는 나가노 오사미 군령부 총장, 이토 세이이치 군령부 차장 등 해군 측과 협상하여 공격 전에 통보할 것을 결정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사령장관 역시 "무통고 공격에는 절대 반대"를 표명했다고 알려져 해군 측도 사전 통보에 동의했다. 원래 계획은 워싱턴 D.C. 시간 12월 7일 오후 1시(일본 시간 12월 8일 오전 3시)에 통고하고, 워싱턴 시간 12월 7일 오후 1시 20분에 공격을 개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통보 시점은 진주만 공격 개시 1시간 후인 워싱턴 시간 12월 7일 오후 2시 20분으로 지연되었다. 이는 주미 일본 대사관의 행정상 미숙 때문이라는 것이 일본 측의 통설이지만, 다른 설도 존재한다.
당시 일본이 미국에 전달한 "제국 정부의 대미 통첩 각서"는 실제로는 선전포고나 어떤 형태의 최후통고도 아니었다. 그러나 전후 도쿄 재판에서 도고는 자신의 변호 과정에서 이 통고를 선전포고와 동일하게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이 도고의 발언이 "일본은 선전포고를 개전 전에 하려 했으나 실수로 통고가 지연되었다"는 주장의 시초가 되었다.
개전 직전까지 미일 협상을 지속한 것은 미국 측에서 전쟁을 속이려는 "비열한 기만 전술"로 간주되었고, 이는 종전 후 도고가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기소되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도고는 처음에는 국제 검사국의 심문에서 해군이 무통고 공격을 주장했음을 진술했으나, 법정에서 나가노 오사미의 변호인 존 브래넌의 끈질긴 추궁이 이어지자 "재판이 개정된 이래 시마다 시게타로와 나가노가 해군이 기습을 원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자신을 협박했다"고 폭로하며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시마다는 이를 인정했으나, 문자 그대로 도고의 신변을 염려해서 한 말이라고 주장했다. 언론에서는 이를 "오징어 먹물 논쟁"으로 비꼬아 보도했다.
도고는 개전 후에도 "조기 강화"의 기회를 모색하기 위해 외무대신직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듬해 1942년 9월 1일, 대동아성 설치 문제를 두고 도조 히데키 총리와 대립하다 사임했다. 그는 외무성과 별도로 대동아성을 설치할 경우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처럼 다룬다고 내외적으로 비춰질 것을 우려했으며, 이는 조기 강화에 소극적인 도조 내각에 대한 일종의 도각 운동으로도 해석된다. 이후 1942년 9월 1일부터 1946년 4월 13일까지 귀족원 의원으로 칙선되어 무소속 구락부에 입회하며 대부분의 전쟁 기간을 은퇴 상태로 보냈다.
3.2. 종전 협상 및 포츠담 선언
1944년 7월 9일 사이판섬 함락을 계기로 일본의 패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도고는 각국의 패전사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옥중에서 집필한 회고록 《시대의 일면》에서 "일본의 천황제는 어떤 경우에도 옹호해야 한다. 패전으로 인한 형벌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정도가 문제다. 치명적인 조건을 부과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국력이 완전히 소모되기 전에 종전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기록했다.
1945년 4월 9일, 도고는 종전 내각인 스즈키 간타로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재차 취임했다. 그는 처음에는 취임을 고사했으나, "전쟁의 전망은 당신의 생각대로 좋다. 외교는 모두 당신의 생각으로 움직여 달라"는 스즈키 간타로 총리의 간곡한 설득에 입각했다. 스즈키 총리는 전쟁 종결 처리는 도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이미 나치 독일의 패전이 확실시되어 미국이 태평양 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가능성, 그리고 소련의 참전 가능성 등 일본에 불리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음에도, 일본 육군을 중심으로 본토 결전이 주장되며 사태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1945년 4월 9일부터 1945년 8월 17일까지 대동아 대신을 겸임했다.
3.2.1. 대소 협상
도고는 평화를 위한 의견 교환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총리, 외무대신, 육해군 대신 및 통수부장(참모총장, 군령부 총장) 등 6인의 회합을 제안했다. 당시 최고 의사 결정 기관은 이 6인에 차관급이 참석하는 최고 전쟁 지도 회의였으나, 이곳에서는 군의 강경한 초안이 주로 논의되고 추인되는 경향이 있었다. 도고는 최고위층이 하위 부서의 압력 없이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는 회의를 원했던 것이다. 다른 5인도 이에 찬동하여, 내용은 일체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 조건으로 최고 전쟁 지도 회의 구성원 회합이 개최되었다.
1945년 5월 독일 패전 후, 일본 국내에서는 소련을 통한 "무조건 항복이 아닌 평화" 중재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5월 중순 첫 회합에서 우메즈 요시지로 육군 참모총장이 독일 패전 후 일본과 중립 관계에 있던 소련이 극동에 대규모 병력을 이동하기 시작했음을 지적하며, 소련의 참전을 방지하기 위한 대소 협상의 필요성이 논의되었다. 이에 도고는 소련을 중재자로 삼아 평화 협상을 모색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은 일본이 패배한 것이 아니므로 평화 협상보다는 소련의 참전 방지를 주 목적으로 한 대소 협상을 해야 한다며 도고의 견해에 반대했다. 결국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대신이 중재하여, 우선 소련의 참전 방지와 우호적 중립 확보를 최우선 목표로 하고, 평화 협상은 소련의 태도를 봐가면서 진행하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소련의 참전 방지를 위해 사할린 반환, 어업권 양도, 남만주 중립화 등을 용인하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이 결정에 따라 도고는 소련 전문가인 히로타 코키 전 총리를 하코네에 체류 중이던 야코프 말리크 주일 소련 대사에게 파견하여 소련의 의향을 타진했다. 말리크와 히로타는 구면이었다. 그러나 두 번의 회담에서 양측은 구체적인 요구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상대방의 구체적인 요구를 탐색하는 데 그쳤다. 말리크는 소련의 대일 참전 의향을 알지 못했으나, 몰로토프 외무인민위원에게 회담 보고서에 "구체적인 요구를 받지 않는 한 어떤 발언도 할 수 없다고 답변할 것"이라고 기록했다. 몰로토프는 이 입장을 지지하며, 앞으로는 히로타의 요청이 있을 때만 회담을 하고, 일반적인 문제 제기라면 외교 쿠리에르 편으로만 보고하라고 훈령했다. 이오시프 스탈린도 이 훈령을 승인했으며, 역사학자 하세가와 츠요시는 소련 수뇌부가 일본의 전쟁을 장기화하기 위해 히로타-말리크 회담을 이용했다고 기록했다. 이후 히로타와 말리크는 두 차례 더 회담을 가졌으며, 6월 29일 마지막 회담에서는 일본의 철병을 포함한 만주국의 중립화, 소련의 석유와 일본의 어업권 교환, 기타 소련이 원하는 조건에 대한 논의 준비를 제시했으나,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모스크바에서 소련의 동향을 살피던 사토 나오타케 소련 대사는 소련을 중재로 한 평화 협상 알선을 요구하는 도고의 훈령에 반대 의견을 개진했으나, 도고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최고 전쟁 지도 회의 구성원 회합의 대소 협상 결정으로, 그동안 스웨덴, 스위스, 바티칸 시국 등에서 육해군과 외무성 등의 비밀 루트를 통해 진행되던 강화 협상은 모두 중단되었다. 소련 대사 시절 소련 외교의 간교함을 잘 알던 도고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는 소련에 기대하는 외교를 펼쳤던 셈이다. 이에 대해 소련 대사 시절부터 마음이 통하던 몰로토프 외무인민위원의 심정에 기대했다는 설도 있으나, 당시 외무성에서 도고를 직접 모셨던 카세 토시카즈가 증언하듯이, 강경파인 육군이 (중립 유지 협상이라는 전제 하에) 소련과의 협상만을 묵인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도고가 이에 따랐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또한 쇼와 천황이 소련과의 협상에 호의적이었던 점도 도고의 생각에 영향을 미쳤다. 도고 본인은 포츠담 선언 수락 후 8월 15일 추밀원에서 행한 설명에서, 미영이 "무조건 항복이 아닌 평화", "협상을 통한 평화"를 거부하는 태도였기에 협상으로 사태를 이끌고 싶었으나, 바티칸, 스위스, 스웨덴을 통한 협상은 거의 확실히 무조건 항복이 전제된다고 보아 포기하고, 소련에 이익을 제공하여 일본의 이익에 부합하는 형태로 종전을 이끌어내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소련 측의 태도가 불분명한 채 시간은 흘러갔고, 6월 22일, 천황이 참석한 최고 전쟁 지도 회의 구성원 회합에서 참전 방지뿐 아니라 평화 협상까지 소련에 요구하는 국가 방침이 천황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스즈키, 도고, 육해군은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를 모스크바에 특사로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7월 들어 소련 측에 이를 타진했다. 그러나 소련 측은 곧 개최될 포츠담 회담 준비로 바쁘다는 이유로 고노에 특사 파견안에 대한 답변을 계속 미루었다. 결국 일본은 7월 26일 포츠담 선언에 직면하게 된다.
포츠담 선언을 접한 도고는 "1. 이 선언은 기본적으로 수락하는 것이 좋다. 2. 단, 소련이 선언에 참여 서명하지 않았고 내용에 모호한 점이 있으므로, 소련과 이 선언의 관계를 탐색하고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모호한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천황과 논의했다. 당시 쇼와 천황이 포츠담 선언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불분명하다. 도고 본인의 메모에는 "이대로 수락할 수는 없지만, 협상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도고의 부하였던 카세 토시카즈는 "원칙적으로 수락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기록했지만, 고케츠 아츠시는 이 발언은 확인 불가능하며 "천황은 특히 선언에 중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천황은 선언의 구체적인 점은 소련을 통한 절충으로 명확히 하고 싶다는 도고의 의견에 찬성했으며, 키도 코이치와의 회담 후 모스크바에서의 협상 결과를 기다리겠다는 도고의 의견을 인정했다.
그러나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은 도고의 견해에 맹렬히 반대하며 포츠담 선언의 전면 거부를 주장했다. 또한 원래 평화파적 입장이었던 스즈키 총리와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대신은 "이 선언을 경시해도 큰일이 나지 않을 것이다. 소련과의 협상으로 평화를 실현하자"는 안일한 인식 하에 포츠담 선언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포츠담 선언에 대해서는 "수락도 거부도 하지 않고 당분간 상황을 지켜본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미국 단파 방송이 이미 선언 내용을 널리 전달했으므로 이를 무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논평 없이 간단한 뉴스로 국내에 보도하기로 했다. 하지만 7월 28일자 조간에는 "우스꽝스럽다"(요미우리 신문), "묵살"(아사히 신문)과 같은 표현이 등장했다. 28일 오전에 도고가 불참한 대본영과 정부의 연락 회의에서는 아나미와 도요다 소에무 군령부장, 우메즈 요시지로 참모총장이 정부의 포츠담 선언 비난 성명 발표를 강하게 주장했고, 요나이 해군대신이 타협안으로 "선언을 무시한다"는 성명을 내는 것을 제안하여 이것이 승인되었다. 같은 날, 스즈키 총리의 회견은 "삼국 공동 성명은 카이로 회담의 재탕이라고 생각한다. 정부로서는 아무런 중대한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며, 그저 묵살할 뿐이다. 우리는 전쟁 완수에 끝까지 매진할 뿐이다"라는 표현으로 보도되었다. 연합국은 이 일본어 표현을 "reject(거부)"로 번역했다. 도고는 스즈키의 발언이 각의 결정 위반이라고 항의했다.
이로써 8월 6일 미국의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8월 8일 소련의 대일 참전이라는 절망적인 상황 변화가 일본에 닥치게 된다.
3.2.2. 종전의 실현
사태의 급변에 따라 8월 9일 오전, 최고 전쟁 지도 회의가 개최되었다. 도고는 "황실의 안녕"만을 조건으로 포츠담 선언 수락을 주장했고,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대신과 히라누마 기이치로 추밀원 의장이 이에 찬성했다. 그러나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은 황실의 안녕 외에, 무장 해제는 일본 측에서 실행할 것, 점령은 최소한으로 하고 도쿄를 점령 대상에서 제외할 것, 전범은 일본인의 손으로 처벌할 것 등 4가지 조건을 주장했고, 우메즈 요시지로 육군 참모총장과 도요다 소에무 해군 군령부 총장이 이에 동의하면서 논의는 평행선을 달렸다. 특히 도고-요나이와 아나미 사이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다. 아나미가 "전황은 오대오"라고 주장하자, 요나이는 "개별적인 무용담은 별개로 치고 부건빌, 사이판, 필리핀, 레이테, 이오지마, 오키나와에서 우리 측은 완전히 패배했다"고 반박했다. 또한 "본토 결전은 승산이 있다"는 아나미와 우메즈의 주장에 대해 도고는 "만약 상륙 부대의 1차 공격을 격파한다 해도 우리 측은 거기서 전력이 소진되는 것이 명백하다. 적은 이어서 2차 상륙 작전을 감행할 것이 틀림없다. 그 이후까지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이 회의 중 나가사키시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회의는 심야까지 이어져 천황이 참석한 어전회의로 전환되었다. 스즈키 총리는 논의가 수습되지 않는다고 천황에게 진언하며, 결론을 천황의 성단에 맡긴다고 밝혔다. 천황은 외무대신의 안건에 동의한다고 발언하며, 그 이유로 육해군의 본토 결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점, 이대로 전쟁을 계속하면 일본이라는 국가가 사라질 것이라는 점 등을 언급했다. 이로써 포츠담 선언 수락이 결정되었다. 수락안에서 도고는 "황실의 안녕"이라는 내용을 (국체 호지를 강화의 절대 조건으로 주장하는 항전파의 인상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천황의 국법상 지위를 변경하는 요구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이해 하에"라고 했으나, 히라누마의 이의를 받아들여 "천황의 국가 통치 대권에 변경을 가하는 요구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이해 하에"로 변경된 후 천황이 수락을 결정했다.
도고는 원폭 투하에 대해 스위스 정부 등을 통해 항의하도록 주스위스 공사 카세 슌이치에게 지시했으며, "대대적으로 언론 캠페인을 지속하여 미국의 비인도적 잔인 행위를 폭로 공격하는 것이 시급하다... 죄 없는 30만 시민 전체를 지옥에 던졌다. 그것은 '나치'의 잔인함에 몇 배나 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또한 선전포고를 통고해온 말리크 소련 대사에게 직접 중립 조약을 위반한 소련의 국제법 위반에 대해 엄중히 항의했다.
일본의 항복과 관련하여, 천황과 황실이 종전 후 일본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은 연합국 정부에도 적지 않게 존재했다. 그러나 "천황의 통치 대권에 변경을 가하지 않는다"는 수락안은 미국 수뇌부 사이에 파문을 일으켰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열린 회의에서 "천황제를 유지하면서 일본의 군국주의를 말살할 수 있는가, 조건부 선언 수락을 고려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참석자 중 제임스 포레스탈 해군장관, 헨리 스팀슨 육군장관, 윌리엄 리히 해군 원수는 일본 측 답변 수락을 주장했으나, 외교의 중심 인물인 제임스 F. 번스 국무장관이 "왜 일본 측에 타협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반박했고, 트루먼이 이에 동의했다. 포레스탈이 "연합국 측이 항복 조건을 정의하는 형태로 일본의 수락을 받아들인다"는 타협안을 제시했고, 트루먼이 이를 받아들여 번스에게 답변문 작성을 명령했으며, 천황과 황실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이를 인정하는 답변문이 일본 측에 8월 12일 제시되었다.
이 "번스 답변"에 따르면 천황은 "연합군 최고 사령관의 권한에 종속된다"는 것과 "천황 제도 등 일본 정부의 형태는 일본 국민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결정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이는 교묘한 형태로 천황·황실의 유지를 인정하는 애매한 문장이었다.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 우메즈 요시지로 참모총장 등은 이 답변에 대해 천황과 황실에 대해 모호하므로 연합국에 재확인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다시 정부 수뇌부는 논쟁에 빠졌다. 도고와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대신은 재확인은 협상 결렬을 의미한다며 반박했지만, 처음에는 포츠담 선언 수락에 찬성했던 히라누마 기이치로 추밀원 의장이 육군에 동의하는 등 사태는 혼란에 빠졌고, 8월 12일 심야, 실의와 피로에 지친 도고는 한때 사임을 표명하기도 했다. 도고의 사임 의사에 놀란 스즈키 총리는 재차 어전회의를 통해 사태를 수습하겠다고 도고에게 약속하며 사임을 번복시켰다.
그러나 8월 14일, 쇼와 천황이 "전과 같이, 나의 의견은 외무대신에게 찬성한다"는 두 번째 "성단"으로 도고 지지를 눈물을 흘리며 표명함으로써, 육군의 강경파도 마침내 꺾여 포츠담 선언 수락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나미는 종전 절차에 서명한 후 논적이었던 도고를 찾아가 "격론을 반복했지만, 육군대신으로서의 직책 때문입니다. 여러모로 신세를 졌습니다"라고 웃으며 인사했고, 도고 또한 "무사히 끝나서 정말 다행입니다"라고 아나미에게 답례했다. 모든 면에서 꼼꼼했던 도고는 선언 수락에 앞서 연합군 측에 일본 육군의 무장 해제를 최대한 명예로운 형태로 해달라고 엄중히 주의 통고했으며, 아나미는 도고에게 그 점을 감사한다고 말하며 떠났다. 아나미는 스즈키 총리에게도 작별 인사를 고한 뒤, 이튿날 8월 15일 새벽 "한 목숨으로 대죄를 사죄하나이다. 신주 불멸을 확신하며"라는 유서를 남기고 할복했다. 사람들 앞에서 눈물 한 번 보인 적 없던 도고는 아나미의 자결 소식에 "그랬나, 배를 갈랐나. 아나미는 정말 좋은 남자였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4. 전후 및 전범 재판
전쟁 종결 후, 도고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유임 요청을 받았으나, "전범으로 기소되면 새 내각에 폐가 된다"며 이를 거절하고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정의 여름 별장으로 은거했다.
9월 11일, 도조 히데키 전 총리와 함께 가장 먼저 전범 혐의로 소추 대상에 이름이 올랐다. 그는 해외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8월 9일 회의에서 종전 결정을 이끌어냈으며, 도조 내각에는 미일 현안 해결에 노력하겠다는 조건으로 외무대신직을 수락했다고 밝혔다. 해외 기자들이 "전쟁 중에 의견을 바꾼 것이냐"고 묻자, 그는 자신은 시종일관 대영미 개전 반대론자였다고 주장했다. 도고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헐 노트를 보고 개전으로 방향을 바꾼 것은 단순한 자기 보신 때문이 아니라, 내각에 남아 개전 후에도 조기 휴전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로부터 체포 명령이 내려졌으나, 지병으로 인해 즉시 구속은 면했고, 회복 후 9월 말 출두하여 조사를 받았다. 종전 이듬해인 1946년 4월 17일 전범 재판 대상이 확정되고 4월 29일 기소되었으며, 5월 1일 스가모 구치소에 구금되었다. 이어서 5월 3일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이 개정되었다. 그는 최종적으로 대영미 네덜란드 전쟁뿐만 아니라 침략 전쟁 전체의 공동 모의 및 대중국 전쟁 수행 책임, 그리고 통례의 전쟁 범죄 및 그 방지 태만 책임으로 연합국 측으로부터 소추되었다.
변호인으로는 같은 가고시마현 출신이자 첫 외무대신 재임 당시의 외무차관이었던 니시 하루히코(훗날 주영 대사)와 미국인 변호단 중 유일한 일본계 미국인인 조지 야마오카 등이 선임되었고, 그의 사위 도고 후미히코가 사무를 담당했다.
재판은 1947년 12월 15일 도고의 개인 반증에 들어갔다. 이 날 그는 "전광영리, 춘풍참루(電光影裏, 春風を斬る)"라는 심경을 담은 글을 휘호하며 법정에 임했다. 검사 측과 도고-변호인 측의 격렬한 공방이 이어졌다. 도고는 개전을 주장한 인물로 도조 히데키 총리, 시마다 시게타로 해군대신, 스즈키 사다이치 기획원 총재 등 세 명을 지목했다. 특히 스가모 구치소에서 시마다 시게타로 전 해군대신과의 논쟁(개전 당시 증언에서 "협의를 요구받았다"고 도고가 받아들인 건)이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개전 및 종전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도고는 대미 개전 시 해군이 무통고 공격을 주장했으나 "나는 격렬하게 싸운 후 해군 측의 요구를 국제법이 요구하는 궁극의 한계까지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나는 내 책임을 조금도 회피하지 않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그 책임을 나에게 떠넘기려 한다 해도 이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진술서에 밝혔다. 이에 대해 나가노 오사미의 담당 변호인 존 브래넌의 끈질긴 추궁이 이어지자, 도고는 "나는 이 사람들의 기억력을 신뢰하지 않는다. 현아래 그토록 중대한 11월 5일 어전회의(대미 협상 요구가 통하지 않을 경우 12월 초 개전 결정 회의)를 내가 말하기 전까지 잊고 있었지 않은가"라고 반박했다. 또한 브래넌이 해군이 무통고 공격을 주장했다는 증거가 있느냐고 묻자, 도고는 "재판이 개정된 후 시마다와 나가노가 해군이 기습을 원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말하면 좋지 않을 것이라고 협박했다"고 폭로했다. 언론은 이를 재판 시작 후 첫 중대한 대립으로 보도했으며, 시마다의 변호인 다카하시가 "이것으로 모든 것이 날아갔다"며 망연자실했다고 일부 언론은 보도했다. 이 발언에 대해 시마다는 이듬해 1월 증언대에서 자신의 발언은 인정했지만 그것은 문자 그대로 도고의 신변을 염려해서 한 말이며 "그의 마음에 떳떳하지 못한 부분이 없었다면 나의 말을 협박으로 받아들일 리 없다. 즉 그의 마음에 떳떳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 한 가지 해석이다", 또한 "참으로 말하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그는 외교적 수단을 썼다. 즉, 오징어가 먹물을 내뿜고 도망치는 방법을 썼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매우 곤란해져서 결국 자신의 도피처를 찾기 위해 터무니없고 보통은 쓸 수 없는 '협박'이라는 말을 써서 도망쳤다는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언론은 이를 "오징어 먹물 논쟁"이라고 부추겼다. 도고 개인은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을 공표함으로써 일본과 자신의 행동이 연합국 측이 지적하는 "평화에 대한 죄"에 해당하지 않음을 부정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고, 결코 악의적인 의도가 없었으나, 피고인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달랐던 경우가 많아 시마다의 변호인인 법제사학자 타키가와 마사지로를 비롯해 피고인 및 변호인들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그 외에도 키도 코이치가 천황이 평화를 원하는 발언을 자신에게 전달하지 않았던 점, 우메즈 요시지로가 앞서 언급했듯이 본토 결전을 주장하며 평화를 계속 거부했던 점 등을 밝혔다. 특히 우메즈와는 고성을 지르며 다투는 장면도 있었고, 키도에게도 키도의 담당 변호인 윌리엄 로건이 심문을 시작해도 발언을 멈추지 않아, 지친 로건이 "당신은 키도를 좋아하지요"라고 말하는 장면도 있었다. 이처럼 결과적으로 자신의 입장만을 정당화하는 주장에 그쳤다고 평가받았는데, 시게미쓰 마모루는 도고와 재직 중 개인적인 불화가 있었다는 설과 함께 "죄를 물으려는 자 있고, 달아나려 조바심 내는 자 있으니, 어리석은 자여"라는 노래로 도고를 비판했다. 재판소는 도고의 형을 시게미쓰 다음으로 가볍게 선고했다.
1948년 11월 4일, 재판소는 도고의 행위를 "유럽아프리카국장 시절부터 전쟁 공동 모의에 참여하여 외교 협상 면에서 전쟁 개시를 돕는 기만 공작을 벌였고, 개전 후에도 직위에 남아 전쟁 수행에 진력했다"고 인정하여 유죄로 판단하고 20년 금고형을 선고했다.
도고는 후에 "법의 소급 적용"을 언급하며 "나에게는 죄가 있다. 전쟁을 막지 못한 죄다. 그러나 도쿄 재판에서 들춰낸 죄는 아무것도 저지르지 않았다. 전쟁이 죄라고 한다면 영국의 인도 병합, 미국의 하와이 병합 죄도 재판하라"며 도쿄 재판을 "패전국을 승전국이 재판하는 복수·본보기"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동시에 그는 국제 사회가 법적 틀에 의해 전쟁을 회피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며, 새로운 일본국 헌법 제9조가 그 흐름의 첫걸음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표명했다. 그러나 1960년 미일 안전 보장 조약 개정 논의 과정에서 헌법 제9조의 정신을 존중하고 군사적 동맹으로는 평화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 니시 하루히코나 이시구로 타다아츠(도고의 친구, 당시 참의원 의원)와, 일본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서는 조약 개정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 도고 후미히코(도고의 사위) 등이 격렬하게 대립하여, 훗날 후미히코가 저서에서 암묵적으로 니시를 비난하는 등 도고의 유지를 잇고자 하는 사람들이 대립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도고는 이전부터 문명사를 집필하여 전쟁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해명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심장병 악화와 옥중 생활로 이를 단념하고, 대신 후일의 문명사학자에게 도움이 되도록 자신의 외교관 생활에 대한 회고록을 옥중에서 집필하여 《시대의 일면》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원고가 거의 완성될 무렵 병세가 악화되어 전원된 미육군 제361병원(현 도아이 기념 병원)에서 1950년 7월 23일 담낭염과 동맥경화성 심장 질환의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향년 69세(만 67세). 그의 회고록은 사후 출간되었으며, 그의 변호인이었던 벤 브루스 블레이크니가 편집했다.
5. 개인 생활

도고 시게노리는 1922년 가족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그 데 라란데(1872-1914)의 미망인인 카를라 빅토리아 에디타 알베르티나 안나 기제케(1887-1967)와 결혼했다. 그들의 결혼식은 도쿄 제국호텔에서 거행되었다. 에디타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네 명의 딸(우르줄라, 오틸리에, 유키, 하이디)과 한 명의 아들(귀도)을 두었고, 도고 시게노리와의 사이에서는 딸 도고 이세를 낳았다.
1943년, 딸 이세는 일본 외교관 혼조 후미히코와 결혼했는데, 후미히코는 아내의 가문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처가 성인 도고를 택했다. 도고 후미히코(1915-1985)는 훗날 1976년부터 1980년까지 주미 일본 대사를 역임했다. 부부의 아들인 도고 가즈히코(1945년생)는 일본의 외교관이자 국제 관계학자이다. 또한 도고 시게노리의 손자로는 전 워싱턴 포스트 기자였던 도고 시게히코와 전 네덜란드 대사이자 외무성 구미국장(후에 교토 산업대학 교수)을 지낸 도고 가즈히코 쌍둥이가 있다.
도고의 어머니 박토메는 기억력이 뛰어나 남편의 돈 거래 장부도 정확히 기록하고 처리했으며, 글을 배우지 못했음에도 타고난 지력과 노력으로 글을 깨쳤다고 한다. 도고 시게노리는 3년 터울의 누나가 있었는데, 그가 태어나기 전에는 증조모가 첫 아이가 아들이 아닌 딸이라며 서운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의 증조모는 도고 시게노리가 태어나자 동네 사람들이 흉을 볼 정도로 기뻐했다고 한다.
도고 시게노리는 겉으로는 도공 박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숨겼지만, 한편으로는 가보지 못한 조선을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 외무성 국장 시절,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여 일본 외무성 과장으로 부임했던 한 직원에게 자신도 조선인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고백하며 격려하기도 했다. 그는 경주시 출신인 이 외교관에게 독립된 한국을 위해 봉사하려면 열심히 배우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6. 저술, 평가 및 영향
도고 시게노리는 자신의 외교 및 정치적 행보에 대해 깊은 성찰을 남겼으며, 그의 삶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평가와 비판을 받았다.
6.1. 저술 활동
도고 시게노리는 옥중에서 자신의 외교관 생활을 회고하며 『시대의 일면』이라는 제목의 미완성 회고록을 집필했다. 이 책은 그의 사후인 1952년 일본에서 출간되었고, 1956년에는 벤 브루스 블레이크니와 도고 후미히코가 번역하여 『The Cause of Japan』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이 외에도 독일어판 『Japan im Zweiten Weltkrieg』, 러시아어판 『Воспоминания японского дипломата』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저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일본의 외교 정책과 종전 과정에 대한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6.2. 긍정적 평가
도고 시게노리는 평생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적 해결을 모색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외무대신으로서 전쟁 결정에 서명했음에도, 전쟁이 시작된 후에도 조기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특히 전쟁 말기 스즈키 간타로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재취임하여, 포츠담 선언 수락을 강력히 주장하고 천황의 성단을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전쟁을 종결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는 일본의 파멸적인 본토 결전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의 조선계 혈통과 그로 인한 차별에도 불구하고 외교관으로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고, 과묵하지만 확고한 신념으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주체적인 목소리를 냈다는 점도 높이 평가된다. 가고시마현 제1중학교 출신의 역사 연구가 하라구치 도라오는 "시게노리는 그 마을 출신이기 때문에 자기 출신 배경을 내세울 수도, 누군가에게 기댈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항상 눈을 크게 뜨고 세계를 바라보며, 주변의 속평에 연연하거나 휘둘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교만하지도 않았다. 아첨하지 않고, 다른 이에게 위화감이나 위협을 주는 일도 없었다. 점점 스스로의 지력과 기력, 신념만을 믿는 사람으로 변했다. 이렇게 보면 차별받고 서러움 당하는 가고시마의 나에시로가와 출신이라는 사실이 시게노리에게는 오히려 (대성으로 이어진) 행운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고 평했다. 그의 고등학교 동기생 기시모토 하지메는 "한 반에서 시게노리는 인격이나 인품 면에서 단연 빛나는 존재였다"고 회고했다.
6.3. 비판 및 논란
도고 시게노리는 평화주의자이자 평화파로 알려져 있지만, 소련을 중재자로 삼아 평화 협상을 추진한 그의 외교 정책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그는 소련이 얄타 회담에서 대일 참전 비밀 조약을 미국 및 영국과 맺었음을 알지 못한 채 히로타 코키 전 총리를 통해 야코프 말리크 주일 소련 대사와의 협상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이 회담은 6월 3일 시작되어 7월 14일 중단될 때까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에 대해 주소련 대사를 지낸 사토 나오타케는 전후 "귀중한 한 달을 허비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또한 7월 26일 발표된 포츠담 선언에 대해 도고가 선언을 거부하지 않고 적어도 소련으로부터 회신이 올 때까지 답변을 미루자는 의견을 내어 그것이 채택되었으나, 결과적으로 대응이 늦어져 연합국은 이를 "묵살"로 간주했고, 이는 두 차례의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대일 참전으로 이어졌다.
간략히 말해, 도고는 코이소 구니아키 내각에서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이 추진하던 스웨덴을 통한 평화 협상을 중단시키고, 오히려 가상 적국이자 대일 참전을 노리던 소련을 중재자로 선택했다. 포츠담 선언 발표 후에도 이에 계속 고집했으나, 소련은 얄타 회담의 비밀 조약이 있었기에 당연히 이 평화 중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8월 9일의 대일 선전포고로 모든 평화 공작은 수포로 돌아갔다.
도고 본인은 전후 회고록 『시대의 일면』에서, 미국 측에서 조셉 그루 등이 작성한 대일 강화 선언안이 포츠담에 가져와졌을 때, 소련 측으로부터 일본에 강화 의사가 전달되었기 때문에 준비된 안이 포츠담 선언으로 나왔다고 들었다고 언급했다. 그는 "그렇다면 천황의 뜻은 소련 수뇌부뿐만 아니라 연합국 수뇌부에도 전달되어 포츠담 선언이라는 '유조건 강화'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으므로, 그때의 (소련에 대한) 제안은 결과적으로 대체로 성공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국 측은 소련으로부터 소식을 듣기 전, 도고와 사토 주소련 대사 간의 외교 전보를 도청-해독하여 일본이 소련을 통한 평화 협상에 나섰음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중재를 통해 "무조건 항복"이 아닌 더 나은 조건의 강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도고 개인뿐 아니라 스즈키, 요나이, 키도, 그리고 쇼와 천황 자신을 포함한 정부의 "평화파"에 공통된 견해였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역사학자 하세가와 츠요시는 "모스크바의 알선은 일본의 통치자들에게 가혹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아편이었다"며 "천황제 유지에 대해 더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내려는 욕심스러운 기대가 그들(평화파)을 모스크바로 가는 길이라는 유혹에 빠뜨렸다"고 기록했다.
6.4. 영향력
도고 시게노리의 활동은 일본의 외교 정책과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개전과 종전의 핵심 시점에 외무대신으로서 일본의 대외 관계를 조율하려 노력했으나, 군부의 강경한 입장과 국제 정세의 복잡성 속에서 한계를 경험했다. 그러나 그의 포츠담 선언 수락 주장은 일본의 본토 결전을 피하고 조기에 전쟁을 종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그의 조선계 혈통은 일본 사회에서 소수 민족 출신 인물이 최고위직에 오르기까지 겪어야 했던 차별과 그 속에서의 개인적인 고뇌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그는 광주광역시 출신인 한 조선계 외교관에게 독립된 한국을 위해 봉사하려면 열심히 배우라고 충고하며 자신의 혈통적 배경에 대한 고민과 조선에 대한 애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그의 사위 도고 후미히코는 훗날 김대중 납치 사건과 육영수 저격 사건 당시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반일 및 반한 감정 확산을 막고 사태 수습에 힘쓰는 등 한일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도고는 전범 재판에서 "법의 소급 적용"을 비판하면서도, 일본국 헌법 제9조와 같은 국제 평화 유지 장치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전후 일본의 평화헌법 정신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러나 훗날 미일 안전 보장 조약 개정을 둘러싸고 그의 친구와 사위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는 등, 그의 평화 추구 정신이 후대에 다르게 해석되거나 적용되는 복잡한 양상을 낳기도 했다. 그의 삶은 전쟁과 평화, 개인의 신념과 국가적 책임, 그리고 인종차별이라는 복잡한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남아있다.
7. 사망
도고 시게노리는 동맥경화를 앓고 있었으며, 1950년 7월 23일 스가모 구치소에서 담낭염으로 사망했다. 향년 69세(만 67세)였다. 그의 회고록인 《시대의 일면》은 사후에 출간되었고, 그의 전 변호인이었던 벤 브루스 블레이크니가 편집을 맡았다.
도고의 시신은 도쿄 아오야마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사후 1978년 10월 17일 야스쿠니 신사에 '쇼와 순난자'로 합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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