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박승진(朴承振, Pak Seung-zin영어, パク・スンジンPakusun-jin일본어)은 북한의 전 축구 선수로, 주로 미드필더 포지션에서 활약했다. 그는 1966년 FIFA 월드컵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으로 참가하여 두 골을 기록하며 팀의 8강 진출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칠레와의 경기에서 터뜨린 동점골은 FIFA 월드컵 역사상 아시아 국가 선수로는 최초의 득점이자 월드컵 통산 700번째 골로 기록되며 역사적인 순간을 장식했다. 월드컵에서의 활약 이후 그를 둘러싼 요덕 정치범수용소 수감설 등 다양한 논란과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2. 생애
2.1. 출생 및 성장 과정
박승진은 1941년 1월 11일에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는 원산시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11년 8월 5일에 사망했다.
2.2. 개인 정보
박승진은 미드필더 포지션에서 뛰었으며, 키는 168 cm, 몸무게는 68 kg이었다.
3. 축구 경력
3.1. 클럽 경력
박승진은 모란봉체육단 소속으로 1965년부터 1974년까지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2. 국가대표팀 활동
박승진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며 총 12경기에 출전하여 6골을 기록했다. 그는 특히 1966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주장으로 참가하여 팀을 이끌었다. 당시 대표팀의 감독은 명례현이었다.
3.2.1. 1966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단
박승진은 1966년 FIFA 월드컵에 참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으로, 다음 선수들과 함께 활약했다.
등번호 | 선수 이름 | 포지션 |
---|---|---|
1 | 리찬명 | 골키퍼 |
2 | 박리섭 | 수비수 |
3 | 신영규 | 수비수 |
4 | 강봉칠 | 수비수 |
5 | 림중선 | 수비수 |
6 | 임성휘 | 수비수 |
7 | 박두익 | 미드필더 |
8 | 박승진 | 미드필더 (주장) |
9 | 리근학 | 공격수 |
10 | 강룡운 | 미드필더 |
11 | 한봉진 | 공격수 |
12 | 김승일 | 공격수 |
13 | 오윤경 | 골키퍼 |
14 | 하정원 | 공격수 |
15 | 양성국 | 미드필더 |
16 | 리동운 | 공격수 |
17 | 김봉환 | 미드필더 |
18 | 계승운 | 미드필더 |
19 | 김영길 | 수비수 |
20 | 류창길 | 골키퍼 |
21 | 안세복 | 미드필더 |
22 | 리치안 | 수비수 |
3.3. 주요 경기 및 득점
박승진은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총 4경기에 출전했다. 그는 조별리그 2차전에서 전 대회 3위팀인 칠레를 상대로 후반 88분에 동점골을 기록하며 1대1 무승부를 이끌었다. 이 득점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월드컵 본선 첫 골이자, 아시아 선수로는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득점이었으며, 월드컵 통산 700번째 골로 기록되었다. 이 골은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및 아시아 국가의 첫 월드컵 토너먼트 진출에 기여했다. 8강전에서는 에우제비우가 활약하던 포르투갈을 상대로도 한 골을 추가했지만, 팀은 3대5로 패배했다.
다음은 박승진의 국가대표팀 득점 기록이다.
# | 개최일 | 개최지 | 상대국 | 결과 | 대회 |
---|---|---|---|---|---|
1 | 1965년 11월 21일 | 프놈펜, 캄보디아 | 오스트레일리아 | 6-1 | 1966년 FIFA 월드컵 아프리카·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 |
2 | 1965년 11월 21일 | 프놈펜, 캄보디아 | 오스트레일리아 | 6-1 | 1966년 FIFA 월드컵 아프리카·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 |
3 | 1965년 11월 24일 | 프놈펜, 캄보디아 | 오스트레일리아 | 3-1 | 1966년 FIFA 월드컵 아프리카·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 |
4 | 1966년 7월 15일 | 미들즈브러, 잉글랜드 | 칠레 | 1-1 | 1966년 FIFA 월드컵 |
5 | 1966년 7월 23일 | 리버풀, 잉글랜드 | 포르투갈 | 3-5 | 1966년 FIFA 월드컵 |
6 | 1973년 5월 11일 | 테헤란, 이란 | 이란 | 1-2 | 1974년 FIFA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 |
3.4. 훈련 방식
박승진은 독특하고 헌신적인 훈련 방식으로도 알려져 있다. 동료 선수였던 한봉진의 증언에 따르면, 박승진은 발목에 고무줄을 묶고 손으로 잡은 채 오른발과 왼발을 각각 1,000번씩 차는 연습을 반복하며 하체를 단련했다고 한다.
3.5. 주요 대회 성적
- 1966년 FIFA 월드컵 8강
4. 사망
박승진은 2011년 8월 5일에 사망했다.
5. 평가 및 논란
박승진은 1966년 FIFA 월드컵에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월드컵 이후 그의 행적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5.1. 비판 및 의혹
1966년 FIFA 월드컵 이후 박승진이 요덕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탈북자 강철환은 자신의 저서 《평양의 어항》에서 요덕 정치범수용소에서 박승진을 만났다고 주장했다. 강철환에 따르면, 박승진과 다른 1966년 월드컵 대표팀 선수들은 이탈리아전 승리를 축하하며 술집에서 파티를 벌인 것이 북한 당국에 의해 "부르주아적 퇴폐의 징후"로 간주되어 수감되었으며, 박승진은 20년 이상 수용소에 있었다고 한다. 이는 갑산파 숙청의 영향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박승진이 간첩 혐의로 12년간 강제 노동을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2002년 대니얼 고든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천리마 축구단》(영어 제목: The Game of Their Lives영어)에서는 박승진을 비롯한 당시 선수들이 인터뷰에 응하여 어떠한 보복도 없었다고 부인했다. 한국어 출처의 정보에 따르면, 박승진은 영화 출연 당시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고위층으로 출세하여 잘 살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가 실제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처럼 박승진의 수감 여부에 대해서는 상반된 증언과 주장이 존재하며, 이는 북한 체제 하의 인권 문제와도 연결될 수 있는 민감한 사안으로 남아있다.
6. 영향
박승진의 1966년 FIFA 월드컵에서의 활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뿐만 아니라 아시아 축구 역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칠레전에서 기록한 골은 아시아 선수 최초의 월드컵 득점이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시아 국가 최초로 월드컵 8강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아시아 축구의 잠재력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의 역사적인 순간과 함께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