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마크 대처는 마거릿 대처 총리의 아들로서, 그의 삶은 항상 논란과 어머니의 명성을 이용한다는 비판에 휩싸였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학업에 흥미를 보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추구했으며, 이는 이후 그의 직업 활동과 연이은 스캔들로 이어졌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마크 대처는 그의 쌍둥이 누나 캐롤 대처와 함께 1953년 8월 15일, 런던 해머스미스에 있는 퀸 샬럿과 첼시 병원에서 6주 조산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는 그의 어머니가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해이기도 하다. 그들의 어린 시절은 런던 첼시에서 보냈다. 그의 어머니는 1955년 올핑턴 보궐선거에서 보수당 후보가 되려는 시도에서 아깝게 패배했고, 1959년 총선에서 처음으로 의회에 당선되었다. 당시 6살이었던 자녀들은 그의 어머니의 첫 텔레비전 인터뷰에 출연했다. 캐롤 대처는 어머니에 대해 "어린 시절의 모든 기억 속 어머니는 '슈퍼우먼'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기 전의 슈퍼우먼이었다. 늘 바쁘셨고, 결코 휴식을 취하지 않으셨으며, 의회 서신에 답하거나 연설 준비를 위해 가사일을 맹렬한 속도로 처리하셨다"고 회고했다.
마크는 8살 때 벨몬트 스쿨 기숙사로 보내졌고, 이후 해로우 스쿨에 진학했으나 1971년 3개의 O 레벨 시험만을 통과한 채 졸업했다. 그는 회계학을 공부했으나 투셰 로스투셰 로스영어에서 치른 회계사 시험에 세 번이나 낙방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 마크를 차세대 영국 총리로 만들기 위해 대학에서 공부하고 정계에 입문하라고 권유했지만, 마크 대처는 이를 거절하고 "놀고 먹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후 자동차 운전에 재미를 느껴 카레이서가 되었다.
1.2. 초기 경력
회계사 시험에 세 차례 낙방한 후, 마크 대처는 여러 단기 직업을 전전하다가 홍콩으로 건너가 중동 및 자동차 경주 분야에서 사업적 인맥을 쌓았다. 1977년 그는 마크 대처 레이싱마크 대처 레이싱영어이라는 회사를 설립했으나 재정난에 부딪혔다. 그는 카레이서로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자 유명 정치인의 아들이라는 점을 내세워 영국 및 해외의 이권에 개입하거나 부적절한 처신을 하여 여러 차례 물의를 빚었다.
2. 주요 활동 및 경력
마크 대처는 어머니의 명성을 이용한 사업 활동과 국제적인 행적, 그리고 그를 둘러싼 수많은 논란들로 인해 평생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경력은 비윤리적인 사업 방식과 정치적 이해 충돌 의혹으로 점철되어 있다.
2.1. 사업 경력 및 국제 활동
마크 대처는 홍콩에서 사업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으며, 특히 중동 지역과 자동차 경주 분야에서 인맥을 구축했다. 1977년 설립한 마크 대처 레이싱영어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마크 대처의 사업 활동은 그의 어머니가 영국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이해 충돌과 특혜 의혹에 휩싸였다. 그는 어머니의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그의 사업적 이해관계와 어머니의 정치적 방문 사이에 잠재적인 이해 충돌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자주 제기되었다. 1984년 그의 어머니는 영국 하원에서 오만에 대학을 건설하려는 영국 기업 시멘테이션시멘테이션영어의 입찰 건에 그의 아들이 개입한 것과 관련하여 질문에 직면했다. 당시 총리인 그의 어머니는 오만에 영국산 제품 구매를 촉구하고 있었다. 2016년, 대처와 오만에 관한 역사적 문서가 30년 규칙에 따라 공개될 예정이었으나 정부에 의해 보류되었다. 더 가디언더 가디언영어은 당시 존 위팅데일존 위팅데일영어이 마거릿 대처의 전 정치 비서였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1985년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가 사우디아라비아에 약 450.00 억 GBP 규모의 무기를 판매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알 야마마 무기 거래와 관련하여 수백만 파운드의 수수료를 받았다는 주장을 부인했다. 그러나 그는 1987년 런던 벨그레이비아에 있는 집이 이 거래의 중개인이었던 와픽 사이드와픽 사이드영어가 지배하는 역외 회사에 의해 100.00 만 GBP에 구매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이라크에 장거리 곡사포를 판매하는 등 무기 밀매에 연루되었다는 의혹도 받았다. 1986년 그의 어머니는 영국 하원에서 아들의 브루나이 술탄과의 관계에 대해 또다시 질문에 직면했다.
총리의 언론 비서인 버나드 잉엄 경은 그가 1987년 총선에서 정부가 승리하는 데 가장 잘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영국을 떠나는 것이라고 시사했다. 마거릿 대처의 전기 작가인 데이비드 캐나딘은 마크 대처가 "어머니의 이름을 부끄럼 없이 팔아넘겼다"며, 그가 "세무 당국으로부터 계속해서 논란과 조사를 불러일으켰고", 이는 어머니에게 큰 당혹감을 안겨주었다고 말했다. 앨런 클라크는 그의 출판된 일기에서 "마크 문제"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텍사스주로 이주하여 로터스 자동차와 브리티시 카 옥션의 데이비드 위킨스데이비드 위킨스영어 밑에서 일했으며, 1987년 첫 번째 부인을 만났다. 미국에서 그는 위스키와 의류를 판매하는 수익성 좋은 회사인 몬티글 마케팅몬티글 마케팅영어을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세금 피난처를 위해 스위스에서 한동안 거주했으나, 스위스 당국이 그의 거주 자격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자 떠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운영하던 보안 경보 사업이 실패했고, 1996년에는 세금 탈세 혐의로 기소되자 아내와 두 자녀와 함께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의 콘스탄티아로 이주했다.
1998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당국은 대처 소유의 회사가 사채업을 운영했다는 의혹으로 조사를 벌였다. 요하네스버그 스타요하네스버그 스타영어에 따르면, 이 회사는 수백 명의 경찰관, 군인, 공무원에게 비공식 소액 대출을 제공한 후 채권 추심원을 통해 이들을 추격했다. 그는 경찰관들이 자신을 사기쳤다고 주장했고 혐의는 기각되었다. 또한 그는 여러 아프리카 국가에 항공유를 공급하는 계약으로 이익을 얻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2003년 아버지의 사망 후, 그는 '경(Sir)'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대처 준남작위를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이듬해 그는 2004년 적도 기니 쿠데타 시도와 관련하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2005년 1월 반용병법 위반 혐의를 인정했다. 이 시기에 더 선데이 타임스영어는 그의 개인 자산이 약 6000.00 만 GBP에 달하며, 그 대부분이 역외 은행 계좌에 있다고 보도했다.
2016년, 그는 파나마 페이퍼스 스캔들에 이름이 올랐는데, 바베이도스에 있는 주택의 소유주가 신탁의 수익자로서 그의 소유로 드러났다.
2.2. 1982년 파리-다카르 랠리 실종 사건
1982년 1월 9일, 마크 대처는 프랑스인 운전자 애니-샬럿 버니애니-샬럿 버니영어와 정비사와 함께 푸조 504를 타고 1982년 파리-다카르 랠리에 참가하던 중 사하라 사막에서 6일 동안 실종되었다. 이들은 1월 12일 실종자로 선언되었다. 그의 아버지인 데니스 대처는 다카르로 날아갔고, 세 국가의 군용기 6대와 알제리 지상군을 포함한 대규모 수색이 시작되었다. 1월 14일, 알제리 인민민족군은 대처 일행을 경로에서 50 km 벗어난 지점에서 발견했다. 총리였던 그의 어머니는 수색 비용으로 개인적으로 2000 GBP를 지불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경주에 참가하기 전 그는 "나는 이제 르망과 다른 경주에도 참가해 봤으니, 이 랠리는 아무 문제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2004년 그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나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라고 회고했다. 또한 그는 "우리는 분명 무엇인가에 부딪혔을 것이다... 우리는 멈췄다. 다른 사람들도 멈춰서 우리의 위치를 기록하고 계속 갔다. 하지만 그 바보들은 - 구간을 마쳤을 때 우리가 서쪽으로 40234 m (25 mile) 떨어져 있었다고 말하는 대신, 동쪽으로 40234 m (25 mile) 떨어져 있었다고 말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래서 보스(총리)는 전적으로 옳은 일을 했다. 알제 주재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봐 줄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대사는 그 지역의 현청에 전화했고, 그곳에서 네 명이 실종되었고 내가 그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모국인 영국을 뒤집어 놓고 아프리카 현지에서도 많은 인력이 자신을 찾느라 고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조된 후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는 말은 하지 않고 "이런 대환영은 처음"이라고 비꼬는 투의 말을 하여 영국 내 여론을 악화시켰다. 다만 구조 비용 전액을 영국의 국가 예산이 아닌 어머니인 마거릿 대처의 개인 재산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비판은 일단락되었다.
2.3. 2004년 적도 기니 쿠데타 시도 가담
마크 대처는 적도 기니에서 발생한 쿠데타 시도에 개입하여 국제적인 논란을 일으킨 범죄자이다. 2004년 8월,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콘스탄티아에 있는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거주자가 해외 군사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남아프리카 외군사지원법의 두 조항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 혐의는 마크 대처의 친구인 사이먼 만이 조직한 적도 기니 쿠데타와 관련하여 자금 지원 및 물류 지원을 제공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200.00 만 ZAR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2004년 11월 24일, 케이프타운 고등법원은 그가 쿠데타 시도 혐의와 관련하여 적도 기니 당국의 질문에 선서하고 답변해야 한다는 남아프리카 법무부의 소환장을 지지했다. 그는 2004년 11월 25일 남아프리카 외군사지원법 위반 혐의에 대해 심문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이 절차는 나중에 2005년 4월 8일로 연기되었다. 결국, 플리 바게닝 과정을 거쳐 마크 대처는 2005년 1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반용병법을 위반한 혐의를 인정했다. 그는 비행기에 투자하면서 그 용도에 대해 적절한 조사를 하지 않았다고 인정했지만, 법정에서는 가난한 아프리카인들을 돕기 위한 항공 앰뷸런스 서비스에 투자하는 것으로 알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그의 설명을 기각하고 그에게 300.00 만 ZAR의 벌금과 4년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 적도 기니 대통령의 고문은 BBC 포커스 온 아프리카BBC의 '포커스 온 아프리카'영어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정의가 구현되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으며, 적도 기니가 마크 대처의 인도를 요구할 의사가 없음을 시사했다.
2008년 6월 적도 기니에서 열린 사이먼 만의 재판에서 만은 대처가 "단순한 투자자가 아니라, 쿠데타 계획의 관리 팀에 완전히 합류하여 그 일부가 되었다"고 증언했다. 2024년, 만은 더 데일리 텔레그래프더 데일리 텔레그래프영어에 추가 정보를 담은 이메일과 미출판 회고록에 대한 접근을 허용했다. 쿠데타 시도 20주년에 맞춰 신문은 이 이메일들이 "마크 경이 이익 분배 계약을 협상했음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마크 대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자신의 회사를 차리고 중동과 아프리카 대륙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무기 밀매와 용병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1996년 적도 기니에서 그에게 의뢰가 들어왔는데, 사이먼 만이라는 또 다른 영국 출신 용병이 자신과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적도 기니의 대통령인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를 퇴진시키고 당시 스페인에서 따로 망명정부를 차리고 있던 적도 기니 야당 대표 세베로 모토세베로 모토스페인어를 옹립하기로 한 것이었다. 사이먼 만은 마크 대처에게 적도 기니 본토의 석유를 마음껏 캐가도 좋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에 마크 대처는 동의하고 사이먼 만과 함께 적도 기니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했다.
마크 대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용병 70명을 헬기에 실어 적도 기니로 이동시키고 있었으나, 이동 도중 용병을 실은 헬기가 짐바브웨에 억류되는 바람에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다. 마크 대처는 그대로 도주했으나 200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터폴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에 마거릿 대처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털어 보석금을 마련했고, 그 거액의 보석금을 낸 뒤 마크 대처는 유죄 인정 대신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그는 미국의 입국 불허자 명단에 등록되어 영원히 미국에 갈 수 없게 되었고, 문제는 그의 가족들이 모두 미국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3. 개인 생활
마크 대처는 그의 결혼과 자녀, 그리고 끊임없이 변동하는 거주지로 인해 많은 주목을 받았다. 특히 그의 생활 방식은 어머니의 검소하고 책임감 있는 이미지와는 대조를 이루며 지속적인 논란을 야기했다.
3.1. 결혼 및 자녀
1980년대 중반 텍사스주 댈러스로 이주한 마크 대처는 1987년 첫 번째 부인인 다이앤 버그도프(제임스 베켓의 부인)를 만났다. 그들은 1989년 첫 자녀를, 1994년 둘째 자녀를 낳았다. 18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2005년 9월 이혼할 의사를 발표했다. 같은 해, 그가 적도 기니 쿠데타 시도와 관련하여 유죄를 인정한 후, 그의 전 부인은 자녀들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2005년 유죄 인정과 이혼 후,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떠나 모나코로 가서 1년간의 임시 거주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모나코 거주 허가는 '비호감 인물' 명단에 올라 갱신되지 않았으며, 2006년 중반까지 모나코를 떠나야 했다. 그는 스위스에서도 거주 허가를 거부당했고, 2008년 3월 지브롤터에 정착하여 두 번째 부인인 사라-제인 러셀과 결혼했다. 러셀은 부동산 개발업자 테렌스 J. 클레멘스테렌스 J. 클레멘스영어의 딸이자 클라우디아, 로더미어 자작부인클라우디아, 로더미어 자작부인영어의 여동생이다. 그녀는 이전에 존 러셀 제13대 베드포드 공작의 막내아들인 프랜시스 헤이스팅스 러셀 경과 결혼한 적이 있다. 2019년에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2005년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유죄 판결로 인해 미국 비자를 받지 못하여 미국 입국이 금지되어 있다.
2013년 어머니 마거릿 대처의 사망 소식을 바베이도스에서 접했으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상주 역할을 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왔다. 장례식은 2013년 4월 17일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고, 이 자리에서 그는 오랜만에 가족들과 재회했다.
4. 작위 및 호칭
마크 대처는 그의 어머니가 1992년 남작 작위를 받으면서 선행 호칭인 "디 아너러블"(The Honourable)을 사용할 자격을 얻었다. 그는 이 호칭을 쌍둥이 누나인 캐롤 대처와 공유했다.
2003년 아버지의 사망 후, 그는 1990년 아버지에게 수여되었던 대처 준남작위를 상속받아 '마크 대처 경 제2대 준남작'이 되었다. 이 준남작위는 1964년 이후로 창설된 유일한 준남작위였다는 점에서 이례적이었다.
그의 작위 및 호칭 변화는 다음과 같다.
- 1953년 8월 15일 - 1992년 6월 26일: 마크 대처 에스콰이어(Mark Thatcher Esq영어)
- 1992년 6월 26일 - 2003년 6월 26일: 디 아너러블 마크 대처(The Hon. Mark Thatcher영어)
- 2003년 6월 26일 - 현재: 디 아너러블 마크 대처 경 제2대 준남작(The Hon. Sir Mark Thatcher, 2nd Bt영어)
2004년 적도 기니 쿠데타 시도와 관련된 유죄 판결 이후, 그에게서 이 작위를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5. 평가 및 논란
마크 대처의 삶과 활동은 끊임없는 논란과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인 마거릿 대처의 명성을 이용하여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려 했다는 의혹에 시달렸으며, 그의 사업 활동은 불투명성과 비윤리성으로 얼룩졌다.
5.1. 비판 및 논란
그를 둘러싼 주요 비판과 논쟁은 다음과 같다.
- 어머니의 명성 이용**: 마크 대처는 어머니의 영국 총리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업적 이득을 취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데이비드 캐나딘은 그가 "어머니의 이름을 부끄럼 없이 팔아넘겼다"고 비난했다. 오만 대학 건설 입찰, 알 야마마 무기 거래, 브루나이 술탄과의 관계 등에서 그의 사업 활동이 어머니의 정치적 영향력과 얽혀 이해 충돌을 야기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2016년에는 오만 관련 문서가 정부에 의해 비공개 처리되어 논란을 더욱 키웠다.
- 사업상의 의혹**: 그는 세금 탈세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그가 소유한 회사가 비공식적인 사채업을 운영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또한 아프리카 국가들에 항공유를 공급하는 계약에서 이득을 취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특히 2003년 그의 재산 대부분이 역외 은행 계좌에 보관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2016년 파나마 페이퍼스 스캔들을 통해 그의 역외 자산 소유 사실이 드러나며 그의 사업 활동의 불투명성이 다시 한번 부각되었다. 이라크에 장거리 곡사포를 판매했다는 의혹 또한 그의 도덕성을 의심케 하는 부분이다.
- 카레이서 실종 사건**: 1982년 파리-다카르 랠리 실종 사건 이후 그의 경솔한 발언은 영국 국민의 공분을 샀다. 자신을 찾기 위해 많은 인력과 비용이 투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환영은 처음"이라는 비꼬는 투의 말을 하여 비판을 받았다. 비록 어머니가 개인적으로 수색 비용을 지불하여 논란은 일단락되었지만, 그의 무책임한 태도는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 쿠데타 연루**: 2004년 적도 기니 쿠데타 시도에 자금을 지원하고 핵심적인 역할을 한 혐의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그의 경력에서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았다. 법정에서 그가 주장한 "항공 앰뷸런스 서비스 투자"라는 해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사이먼 만의 증언을 통해 그가 단순한 투자자가 아니라 쿠데타 계획의 "관리 팀에 완전히 합류"하여 "이익 분배 계약을 협상"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의 개입이 더욱 명확해졌다. 이 사건으로 그는 미국 입국이 영구히 금지되었고, 모나코에서도 '비호감 인물'로 분류되어 거주 허가를 갱신하지 못하는 등 국제적으로 지탄받는 인물이 되었다.
- 작위 박탈 논의**: 적도 기니 쿠데타 시도 유죄 판결 이후, 그가 아버지로부터 승계받은 준남작 작위를 박탈해야 한다는 논의가 영국 의회와 언론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이는 그의 행동이 작위의 명예와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인식을 반영한다.
마크 대처는 일평생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으며, 그의 행동은 종종 "망가진 아들", "어머니의 명성을 이용하는 자" 등으로 묘사되었다. 그의 삶은 유명 정치인의 아들이라는 배경이 어떻게 부적절한 행위와 결합하여 사회적 비판을 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6. 관련 항목
- 마거릿 대처
- 데니스 대처
- 캐롤 대처
- 2004년 적도 기니 쿠데타 시도
- 알 야마마 무기 거래
- [https://www.pbs.org/wnet/wideangle/episodes/once-upon-a-coup/full-episode/?p=5496 옛날 옛적 쿠데타] (Once Upon a Coup영어), PBS, 2009년 8월 (다큐멘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