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신미 마사이치(新見 政一, 新見 政一니이미 마사이치일본어)는 일본 제국 해군의 해군 중장이자 저명한 해전사 연구가이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홍콩 공략 작전에 참여했으며, 전후에는 해상자위대 강사로 활동하고 '해군 반성회'의 최고 고문을 맡는 등 평생을 전사 연구에 헌신했다. 106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일본 제국 해군 최후의 중장으로 기록되었으며, 그의 독창적인 전략 사상과 통찰력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및 해군 경력
신미 마사이치는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아사키타구에서 농업 및 간장 제조업을 하던 신미 센고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내 스미는 고바야시 세이조 해군 대장의 여동생이다. 그는 온화한 성품으로 타인과 다투지 않았으며, 후배 해군 장교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신미 마사이치는 1887년 2월 4일 히로시마현 아키군 가와우치촌(현재의 히로시마시 아사키타구)에서 태어났다. 그는 구제 히로시마현립 주다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1905년 12월 2일 해군병학교 제36기로 입학했다. 입학 당시 200명 중 35위였으며, 졸업 시에는 191명 중 14위 또는 15위(자료에 따라 상이)를 기록했다. 그의 해군병학교 동기인 미토 하루조 해군 중장은 중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2.2. 해군사관학교 및 초기 경력
1908년 11월 21일 해군병학교를 졸업한 신미는 소위 후보생으로서 장갑순양함 아소에 승선했다. 1909년 3월 14일에는 연습함대의 원양 항해에 참여하여 호놀룰루, 히로, 샌프란시스코, 에스키몰트, 밴쿠버, 타코마, 시애틀, 하코다테, 오미나토 등을 거쳐 8월 7일 귀항했다. 이후 8월 12일에는 이즈모에 승선했다. 1910년 1월 15일 해군 소위로 임관하여 사세보 진수부에 배속되었고, 1911년 4월 20일에는 아소에 소위 후보생 지도관 부로 다시 승선했다. 1911년 11월 25일에는 다시 연습함대의 원양 항해에 참여하여 괌, 수바, 오클랜드, 시드니, 타운즈빌, 바타비아, 싱가포르, 마닐라, 오롱가포 등을 거쳐 1912년 3월 28일 귀항했다. 같은 해 12월 1일에는 해군 중위로 승진했다. 1912년 7월 5일에는 구축함 야요이에 승선했다.
2.3. 해군 대학 및 전문 교육
신미는 1910년에 해군 포술학교와 해군 수뢰학교의 보통과 학생으로 교육을 받았다. 1913년 12월 1일 해군대학교 갑종 학생으로 입학했으며, 1914년 5월 27일에는 해군 포술학교 고등과 제13기 학생으로 입학하여 11월 26일 수료했다. 그는 포술 전문 장교로서 해군 포술학교의 교관을 역임했다. 1917년 4월 1일에는 해군 포술학교 교관 겸 분대장으로 근무했다. 1917년 12월 1일 해군대학교 갑종 제17기로 다시 입학하여 1919년 11월 26일 24명 중 4위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또한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국제법을 전공하여 일본 해군 내에서 손꼽히는 지영파(知英派) 인사로 알려졌다. 해군대학교에서는 총 5년간 전사 교관으로 근무했다.
2.4. 주요 해군 경력 및 지휘
1914년 12월 1일 해군 대위로 승진하여 전함 가토리, 순양전함 이부키, 전함 가와치, 구축함 우미카제의 분대장을 역임했다. 1919년 12월 1일에는 전함 이세의 부포장 겸 분대장으로 근무했다. 1920년 12월 1일 해군 소좌로 승진하여 해군 포술학교 교관을 맡았다. 1922년 12월 1일에는 군령부 참모로 임명되었고, 전쟁 시 상선 보호의 중요성에 대한 보고서를 해군 군령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영국 주재 일본 대사관 해군 무관 보좌관으로 파견되어 근무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사 연구를 수행했으며, 1924년 12월 1일 해군 중좌로 승진했다. 귀국 후 1926년 3월 20일 경순양함 구마의 부장으로 임명되었고, 1926년 12월 1일에는 해군대학교 교관으로 다시 부임했다. 1929년 11월 27일에는 육군대학교 병학 교관을 겸임했으며, 11월 30일 해군 대좌로 승진했다.
1930년 12월 1일에는 요코스카 진수부 부로 발령받았다. 1931년 4월 1일 경순양함 오이의 함장으로 부임하며 첫 함정 지휘를 맡았다. 이후 1931년 10월 15일에는 병학교 훈련용 해방함 야쿠모의 함장을 역임했다. 1933년 3월 6일에는 연습함대를 이끌고 시애틀, 타코마, 에스키몰트, 밴쿠버,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아카풀코, 발보아, 호놀룰루, 얄루이트, 트루크, 사이판, 팔라우 등을 거치는 원양 항해를 떠났으며 7월 26일 귀항했다. 1933년 11월 15일에는 중순양함 마야의 함장을 맡았다. 1934년 11월 15일 해군대학교 교관으로 다시 부임했다.
2.5. 제2차 세계 대전 중 활동
1935년 11월 15일 해군 소장으로 승진하여 구레 진수부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36년 4월 1일에는 제2함대 참모장을 역임했으며, 같은 해 12월 1일에는 해군 군령부 출사(出仕)로 발령받았다. 1937년 1월 8일, 조지 6세 국왕의 대관식 참석을 위해 영국으로 떠나는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부부를 수행했다. 이들은 3월 18일 출발하여 4월 12일 영국에 도착했으며, 7월 28일에는 프랑스, 독일, 미국을 경유하여 귀국했다. 1937년 8월 3일 대중국 봉쇄 작전 연구에 종사했으며, 12월 1일에는 해군성 교육국장으로 임명되었다.
1939년 11월 15일 해군 중장으로 승진하며 해군병학교장으로 부임했다. 1941년 4월 4일에는 제2견지함대 사령장관으로 임명되어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와 홍콩 공략 작전에 협력했다. 홍콩 공략 작전에서는 주로 소형 초계정과 몇 척의 경순양함을 이용한 홍콩 항구 봉쇄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사카이 다카시 육군 중장과 함께 홍콩 일본 점령군 총책임자 직위를 명목상 공유했지만, 그의 권한은 해상 지역에 한정되었다.
2.6. 고위직 및 퇴역
1942년 7월 8일 훈일등서보장을 수훈했다. 같은 해 7월 14일에는 마이즈루 진수부 사령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 12월 1일 군령부 출사(出仕)를 거쳐 1944년 3월 15일 대명(待命) 상태가 되었고, 3월 20일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예비역 편입 후 3월 25일에는 대일본학도해양교련진흥회 부회장 겸 중앙본부장을 맡았으며, 6월 1일에는 해군성 사무 촉탁으로도 일했으나, 1946년 3월 1일 사임했다. 1947년 11월 28일에는 공직 추방 가(假)지정 대상이 되었다.
3. 전략 사상 및 견해
신미 마사이치는 제1차 세계 대전 전사 연구를 통해 독자적인 전략적 통찰력을 발전시켰다. 그는 귀국 후 '해군 중앙 군령 기관 정비 의견서'와 '지구전(持久戰)에 관한 의견서'를 당국에 제출했다. 이 보고서들은 다음 세계 대전이 총력전이 될 것이며, 결정적인 함대 결전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또한, 대본영이 정략(政略)과 군략(軍략)이 일치하는 기관이 되어야 하며, 해상 교통로 보호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당시에는 그의 견해가 이단으로 취급되었으나, 태평양 전쟁의 전개는 그의 예측이 현실이었음을 증명했다.
그는 해군성 교육국장 재임 중 해상 교통로 방어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해군 방위학교를 창설하려 했으나, 해군성 군무국의 반대로 인해 결국 해군기뢰학교 설립에 그쳤다. 당시 군무국장은 이노우에 시게미였는데, 이노우에의 반대는 학교 명칭에 관한 것이었으며, 기뢰학교 설립은 신미와 이노우에가 직책을 떠난 후에 이루어졌다. 신미와 이노우에는 친영미 노선에서는 일치했지만, 해군대학교 교관 시절의 수업 방침과 병기 일원화 문제를 두고 의견이 대립하기도 했다.
독일-일본 방공 협정 체결 이후에도 신미는 조지 6세 대관식에 수행했을 때 영국이 일본과 협력하기를 원한다고 판단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드러난 미국의 국력을 고려할 때 일본은 미영과 협조해야 하며, 독일 및 이탈리아에 더 이상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견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4. 저술 활동
신미 마사이치는 전후에도 활발한 전사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82세부터 84세에 걸쳐 《第二次世界大戦戦争指導史제2차 세계 대전 전쟁 지도사일본어》를 저술했으며, 이 책은 그가 97세가 되어서야 일반에 판매되었다. 이 저서는 쇼와 천황에게 헌정되었는데, 쇼와 천황은 "신미의 책이 나왔는가"라며 기뻐했고, 당시 황태자 아키히토 친왕에게도 증정되었다.
그의 또 다른 주요 저작으로는 '제독 신미 마사이치 간행회'가 편찬한 자서전 및 추억록인 《日本海軍の良識 提督 新見政一 自伝と追想일본 해군의 양식: 제독 신미 마사이치 자전과 추억일본어》이 있다.
5. 전후 활동
신미는 전후 해상자위대 간부학교의 특별 강사로 활동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또한 재건된 수교회에서 '해군 반성회'의 최고 고문을 맡아 과거 일본 해군의 경험을 반성하고 교훈을 얻는 데 기여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제2차 세계 대전사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며 자신의 전략적 통찰력을 바탕으로 역사적 평가에 기여했다.
6. 개인사 및 성격
신미 마사이치는 온화하고 타인과 다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성품 덕분에 그는 오이 아쓰시 등 많은 후배 해군 장교들에게 깊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의 아내 스미는 고바야시 세이조 해군 대장의 여동생이었다.
7. 사망 및 유산
신미 마사이치는 1993년 4월 2일 10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일본 제국 해군의 최후 생존 중장으로서 장수했으며, 그의 사망은 일본 해군 역사의 한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상징했다. 그의 삶과 업적, 특히 선견지명 있는 전략 사상과 전후 반성 활동은 일본 해군사와 전사 연구에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8. 수상 및 영예
- 1910년 3월 22일: 정팔위
- 1915년 2월 10일: 정칠위
- 1942년 7월 8일: 훈일등서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