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노구치 켄의 어린 시절과 교육은 그의 삶과 이후의 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외교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여러 나라를 오가며 성장했으며, 이는 그의 초기 등반 경력과 사회 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노구치 켄은 1973년 8월 21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전 외교관인 노구치 마사아키野口雅昭노구치 마사아키일본어이며, 어머니는 그리스계 이집트인인 노구치 모나野口モナ노구치 모나일본어이다. 그는 아버지의 일본인 혈통과 어머니의 그리스, 이집트, 프랑스, 레바논 혈통을 모두 이어받았다.
그의 아버지가 외교관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가족과 함께 여러 국가를 이주하며 보냈다. 뉴욕과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중동 지역에서 유년기를 보냈으며, 4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일본에 왔을 때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고 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했고, 카이로 일본인 학교カイロ日本人学校카이로 일본인 학교일본어 초등부에서 영국에 위치한 릿쿄 영국 학원立教英国学院릿쿄 영국 학원일본어 초등부로 전학했다.
그는 스스로를 "문제아"이자 "낙오자"로 묘사하며, 어린 시절 여러 문제 행동을 저질렀다고 고백했다. 공기총으로 고양이나 비둘기를 쏘아 죽이거나, 주차된 차량의 타이어를 펑크 내고 벤츠 엠블럼을 뜯어내는 등 반복적인 문제를 일으켰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학교 선배를 때려 한 달간 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 이 정학 기간 동안 혼자 여행하며 세계적인 일본인 모험가 우에무라 나오미의 저서 『청춘을 산에 걸고』青春を山に賭けて청춘을 산에 걸고일본어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등산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주변에 등반을 하는 사람이 없어 등산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 수단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노구치 켄은 아시아 대학亜細亜大学아시아 대학일본어 국제관계학부를 졸업했으며, 2000년에 졸업했다. 또한 아오모리 대학에서 환경 교육을 공부하기도 했다.
1.2. 초기 등반 경력
우에무라 나오미의 저서에 영감을 받은 노구치 켄은 1989년 8월, 16세의 나이로 몽블랑 등정에 성공하며 본격적인 등반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우에무라 나오미에게서 등산가로서의 모습보다도 꾸준히 도전하고 성취하는 삶의 방식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졸업 후 자위대에 입대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고, 사진작가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결국 칠대륙 최고봉 등정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아시아 대학에 특기자 전형으로 합격했다. 주변에 등반가가 없는 상황에서 등산은 그에게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천성적인 등산가"라기보다는 등산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2. 주요 업적 및 활동
노구치 켄은 등반가로서의 뛰어난 성과뿐만 아니라, 환경 보호와 사회 공헌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2.1. 칠대륙 최고봉 등정
노구치 켄은 1989년 12월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산 등정을 시작으로 칠대륙 최고봉 도전을 시작했다. 그는 칠대륙 최고봉 중 코지우스코산을 포함하는 배스 리스트를 따랐다. 1992년 9월 코지우스코산을 등정했고, 1992년 12월에는 아콩카과, 1993년 6월에는 매킨리산(데날리)을 등정했다.
1994년 12월 빈슨 산괴 등정에 성공하면서, 그는 5개 대륙의 최고봉을 등정한 최연소 인물이 되었다. 1996년 1월 엘브루스산을 등정하며 6개 대륙 최고봉 등정 최연소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리고 1999년 5월 13일, 세 번째 시도 끝에 에베레스트산 정상에 도달하며 칠대륙 최고봉 등정을 완료했다. 킬리만자로산 등정부터 에베레스트산 등정까지 총 9년 163일이 걸렸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25세 265일로, 칠대륙 최고봉 최연소 등정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2001년 23세의 이시카와 나오키石川直樹이시카와 나오키일본어에 의해 갱신되었고, 2011년에는 15세의 미국인 조던 로메로Jordan Romero조던 로메로영어가 갱신했다. 현재 기록은 2006년 5월 17일 20세 생일에 등정을 마친 영국의 리스 마일즈 존스Rhys Miles Jones리스 마일즈 존스영어가 보유하고 있다. 노구치 켄은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1999년 도쿄 시민 명예 문화상Tokyo Citizens' Honorary Award for Culture도쿄 시민 명예 문화상영어을 수상했다. 그는 자신의 등반 여정을 책 『낙오되어 에베레스트로落ちこぼれてエベレスト낙오되어 에베레스트로일본어』로 출간했다.
2.2. 환경 보호 활동
노구치 켄은 에베레스트 등반 중 산 곳곳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환경 보호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가기 전에는 늘 TV에서 아름다운 에베레스트의 이미지를 보았는데, 막상 가보니 곳곳에 쓰레기가 널려 있었다"고 언급했다.
그는 등정 완료 후에도 2000년부터 2003년까지, 그리고 2007년, 2008년, 2011년에 에베레스트산에서 쓰레기 수거 활동을 조직했다. 첫 번째 활동에서는 약 8톤의 쓰레기(400개 이상의 산소통 포함)를 수거했으며, 2001년에는 1.6톤(산소통 84개 포함)을 추가로 수거했다.
그는 이러한 환경 보호 노력을 일본 국내에도 확산시키기 위해 후지산 청소 활동을 시작했다. 후지산의 상태를 "국가 상징의 수치"라고 반복적으로 언급하며, 관광객들이 버린 많은 쓰레기를 수거하는 데 힘썼다. 그의 노력은 일본 내에서 환경 보호 인식을 높이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많은 강연을 통해 더 나은 환경 실천을 장려했다. 또한 정부가 환경 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정규 교육 과정에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5년부터는 일본 등반 역사와 깊은 인연이 있는 마나슬루산 청소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당시 일본 총리였던 하시모토 류타로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노구치 켄은 2006년, 2007년, 2019년에 마나슬루산 청소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자신의 지속적인 환경 활동을 담은 두 번째 책 『백만 번의 이 빌어먹을100万回のコンチクショー백만 번의 이 빌어먹을일본어』을 2002년에 출간했다.
2002년에는 비영리단체 PEAK+AID(PEAK+AID피크+에이드영어) (설립 당시 명칭은 세븐서미츠 지속가능사회기구)를 설립하여 환경 보호 활동을 체계화했다. 2018년에는 히말라야에 숲을 만들자는 목표로 마나슬루산 기슭 사마 마을에 소나무, 전나무, 낙엽송 세 종류의 묘목을 심는 '히말라야 숲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2020년까지 3만 그루 식재를 목표로 했다.
2.3. 재해 구호 및 사회 공헌
노구치 켄은 등반 및 환경 활동 외에도 다양한 사회 공헌 및 재해 구호 활동에 참여해왔다.
2000년, 그는 등반 중 조난사한 셰르파족 아이들을 위한 교육 지원을 위해 '셰르파 기금'을 설립했다. 2006년에는 마나슬루산 기슭의 사마 마을 교육 지원을 위한 '마나슬루 기금'을 추가로 설립했다.
2007년에는 도쿄 베르디 1969의 환경 고문으로 위촉되어, 팀 서포터들과 함께 국립경기장 주변에서 쓰레기를 줍는 활동을 진행했다. 같은 해 니가타시 주최의 '제2회 안고상安吾賞안고상일본어'을 수상했으며, 료토쿠지 대학了徳寺大学료토쿠지 대학일본어 객원 교수로 취임했다. 2008년에는 우에무라 나오미 모험상植村直己冒険賞우에무라 나오미 모험상일본어을 수상했다.
또한 2008년부터 비영리단체 '쿠엔타이空援隊쿠엔타이일본어'에 참여하여 주로 필리핀에 있는 제2차 세계 대전 일본군 전몰자들의 유해 발굴 및 수집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2010년 이 단체에서 필리핀인의 유골이 섞여 있다는 비판 기사가 나오면서 이사장과 갈등을 빚었고, 결국 단체를 떠났다. 이후에는 자신이 대표로 있는 비영리단체 PEAK+AID의 활동으로 오키나와에서 전몰자 유해 수집 활동을 이어갔다.
2009년에는 오카야마현 소자시에서 '노구치 켄 환경학교'를 시작했다. 2010년에는 사마 마을에 학교가 개교하는 데 기여했다. 2014년에는 소자시 환경 관광대사로 취임했고, 랜드로버 앰버서더로도 임명되었다.
2015년 4월, 네팔 체류 중 2015년 네팔 지진을 겪은 그는 '히말라야 대지진 기금'을 조성하여 재건 지원 활동을 펼쳤다. 같은 해 7월 '제1회 안도 타다오 문화재단상'을 수상했다. 2016년 4월 2016년 구마모토 지진 발생 시에는 친분이 있는 셰르파들로부터 "일본에 보답하고 싶다"는 송금을 받아 이를 바탕으로 구마모토현 마시키정에 피난민들을 위한 텐트촌을 건설하는 활동을 벌였다.
2017년 4월에는 그가 이끄는 PEAK+AID와 소자시가 재해 지역의 텐트촌 개발 등 지원에 적극 협력하는 협정을 맺었다. 같은 해 6월 미쓰비시 자동차 앰버서더로 취임했다. 2018년에는 사마 마을과 에베레스트 지역 학교에 책가방 기부를 추진하여 300개를 전달했다. 또한 2018년 홋카이도 이부리 동부 지진과 서일본 호우 피해 지역에 구호 물품을 보내고 청소 봉사 활동을 벌이는 등 다양한 재난 구호 활동에 참여했다. 2018년 7월 26일 나가노현 치노시로부터 '조몬 고향대사'로 위촉되었다.
2019년에도 네팔의 여러 마을에 책가방과 학용품을 전달하는 프로젝트를 이어갔고, 사마 마을과 마나슬루의 청소 활동, 학교 시설 확충, 산림 재생 프로젝트, 농업 지도 등에 주력했다. 2020년에는 네팔 포카라의 마헨드라 자나사하요그 초등학교 재건을 위한 크라우드펀딩을 진행했으며, 2021년에도 현지 복구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3. 견해 및 논란
노구치 켄은 대중적 활동과 특정 정치·산업계와의 관계로 인해 다양한 평가와 비판에 직면해 왔다. 특히 그의 등반 철학, 개인적인 윤리 문제, 환경 문제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 그리고 정치 및 산업계와의 연관성은 지속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3.1. 등반 철학 및 "알피니스트" 논쟁
노구치 켄은 자신의 등반 철학에 대해 우에무라 나오미의 꾸준한 도전 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등산을 통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는다고 밝혔다. 그는 스스로를 '천성적인 등산가'라기보다는 등반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사람으로 본다.
그는 '알피니스트'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된 계기가 광고 출연 당시 '등산가' 대신 제안받은 것으로, 원래 '등산가'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알피니스트' 호칭 사용은 전문 산악인들 사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산악 잡지 『가쿠진岳人가쿠진일본어』의 편집위원이자 등산가인 핫토리 후미아키服部文祥핫토리 후미아키일본어는 후지 TV의 한 프로그램에서 노구치 켄을 "시민 마라토너"나 "3.5류 등산가"라고 폄하하며 "알피니스트라고 자칭하는 것은 진정한 알피니스트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알피니스트가 알피니즘에 기반하여 곤란한 스타일로 등반하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노구치 켄의 등반 방식인 대규모 원정대, 고정 로프, 일반 루트 이용 등은 알파인 스타일의 정반대이며, 따라서 그를 알피니스트라고 부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노구치 켄은 방송 노출이 많고 환경 보호 활동을 포함한 다방면의 활동이 "이름을 알리기 위한 행위"라는 비판에 대해, 아무리 좋은 일도 선의만으로는 지속될 수 없기 때문에 "일로서의 매니지먼트"가 필요하다고 반박했다.
2012년 9월, 방송인 이모토 아야코イモトアヤコ이모토 아야코일본어가 마터호른 등정 후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하산한 것에 대해 노구치 켄은 "조난이나 컨디션 난조가 아니라면 통상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선택지"라며 "나 같으면 등산을 중단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산행이라는 것은 자력으로 하산하는 것까지가 산행"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을 밝혔다.
3.2. 개인적 행실 및 윤리적 논란
노구치 켄은 그의 사생활 및 윤리적 결정과 관련하여 여러 논란에 휘말렸다.
1995년, 그는 네팔에서 셰르파족의 미성년자 소녀와 결혼했음을 자신의 저서 『낙오되어 에베레스트로』에서 밝혔다. 소녀의 나이는 15세(정확한 출생 기록 없음)로, 법적으로 결혼 가능 연령에 미달하여 정식적인 혼인 신고는 이루어지지 않은 '아동혼'의 형태였다. 당시 소녀는 외국어를 전혀 하지 못해 두 사람의 대화에는 통역이 필요했다. 결혼 후 소녀는 고향을 떠나 카트만두에 거주했지만, 노구치 켄이 네팔을 방문하는 몇 달에 한 번 정도 만나는 관계였다. 그는 2년 후 이혼했는데, 이혼 사유로 "카트만두에 살면서 점점 더 화려한 여자가 되었다"는 설명을 하여 비판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저서 『확실히 살다: 10대를 위한 메시지』確かに生きる~10代へのメッセージ~확실히 살다: 10대를 위한 메시지일본어에서 아시아 대학 입학 논문에 대해 논문 내용 조작 사실을 고백했다. 그는 예멘의 사나에서 부모님이 살던 집이 폭탄 테러를 당한 사건을 서술하면서, 자신이 현장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허위 내용을 기재했다고 밝혔다.
2008년에는 잡지 『세이론正論 (雑誌)세이론일본어』에서 토츠카 요트 스쿨戸塚ヨットスクール토츠카 요트 스쿨일본어의 교장인 토츠카 히로시戸塚宏토츠카 히로시일본어와 대담을 가졌다. 노구치 켄은 토츠카의 저서 『본능의 힘』을 읽고 공감하여 대담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는 강연을 갔던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에 긴장감이 없고, 강연 중에 소란을 피우는 학생에게 교사가 주의를 주지 않아 소리를 지른 경험을 언급하며, 유토리 교육의 폐해를 비판했다. 그는 "가정 폭력이나 등교 거부 등 부모가 감당할 수 없었던 많은 아이들이 구제받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토츠카의 교육 방침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3.3. 환경 문제에 대한 견해
노구치 켄은 에베레스트 청소 활동을 시작한 이래 환경 문제의 어려움을 절감했다고 밝혔다. 2003년 4월 15일의 공식 블로그에서는 "원자력 발전이나 화력 발전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 이상론을 넘어 현실적인 시야에서 에너지 문제를 파악해야 한다"며 자신의 활동이 내포한 자기 모순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환경 문제에 대한 그의 발언과 행동에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영국의 인기 록 밴드 콜드플레이가 비행기 이동으로 인한 이산화탄소 배출량 때문에 월드 투어를 중단한 것에 대해 노구치 켄은 "단순한 퍼포먼스"라며 "환경 문제든 에너지 문제든 '현실성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고 비판적인 트윗을 남겼다.
또한 2019년 12월 13일, 노벨상 후보이자 환경 운동가인 그레타 툰베리가 기차를 이용하는 것에 대해 그는 "기차를 이용하신다고요? 비행기가 안 된다는 분은 물론 자동차도 안 될 것이고, 마차로 이동하시는 것을 상상하고 있었습니다만..."이라고 비꼬는 트윗을 올렸다. 이 트윗은 1,100개 이상의 답글에서 "어른답지 못하다", "그녀를 비난해서 무엇을 얻으려는가" 등의 비난을 받았다.
3.4. 정치 및 산업계와의 관계
노구치 켄은 여러 정치인 및 정당과의 관계, 그리고 특정 산업과의 연관성으로 인해 대중적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2004년, 그는 자민당으로부터 참의원 의원 선거 비례대표 출마를 제안받았고, 본인도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주변의 반대와 당시 소속사에서 독립하여 자신의 활동 기반을 다져야 했던 시기였던 점, 그리고 이시하라 도쿄도지사에게 '도쿄도 레인저 제도'를 직소하며 그 출범에 기여해야 했기 때문에 불출마를 결정했다고 한다. 2007년 참의원 선거 출마설도 있었으나 출마하지 않았으며, 2008년 10월 15일 공식 블로그를 통해 2009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 출마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그는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많은 응원 활동을 펼쳤지만, 특정 정당을 응원하기보다는 "정치인 개인(함께 활동했던 동료)을 응원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환경 보호 관련으로 노구치 켄의 활동에 이해를 보인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의 비서나 측근들의 선거를 지원했으며, 2005년 9월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와 2016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는 고이케 유리코의 선거 운동 및 응원 연설에 참여하기도 했다.
2012년 12월 1일, 그는 "행복실현당의 정책은 늘 명확하다. 전부 다는 아니지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트윗하여 특정 종교 단체 기반의 정당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노구치 켄은 원자력 발전 산업 및 석유 산업과의 관계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그는 원자력 발전에 대한 계몽 활동을 하는 일본 에너지 회의日本エネルギー会議일본 에너지 회의일본어의 발기인 중 한 명이다.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최종 처분을 담당하는 NUMO (원자력 발전 환경정비기구)의 홍보 DVD에 출연하여 원자력 발전과 방사성 폐기물 처리에 대해 교육하는 내용을 전달했다. 또한 도쿄 전력의 홍보 프로그램에 출연했으며, 에베레스트-후지산 동시 청소 등반에서 도쿄 전력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
코스모 석유는 그의 환경 보호 활동의 스폰서로 지원하고 있으며, 도쿄 FM이 2001년부터 전개하는 환경 보호 활동 '코스모 어스 콘샤스 액트コスモ アースコンシャス アクト코스모 어스 콘샤스 액트일본어'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다.
또한 그는 다단계 판매 기업인 일본 암웨이로부터 에베레스트-후지산 동시 청소 등반에 대한 협찬을 받았다. 전국 각지의 해안을 중심으로 쓰레기 줍기 활동을 하는 암웨이 클린업에 게스트로 참여했으며, 암웨이 심포지엄에서 기조 강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4. 개인 생활
노구치 켄의 개인적인 삶은 그의 대중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복잡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1995년 네팔에서 셰르파족의 미성년자 소녀와 비법적으로 결혼했지만, 2년 후에 이혼했다. 그는 소녀가 결혼 가능 연령에 미달했으며, 호적이나 출생 신고서 등 서류가 없어 법적인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결혼 당시 소녀는 외국어를 전혀 하지 못했고, 두 사람은 통역 없이는 대화가 불가능했다. 소녀는 결혼 후 고향 마을을 떠나 카트만두에 살았으며, 노구치 켄이 네팔을 방문할 때만 몇 달에 한 번씩 만나는 관계였다. 이혼 사유는 소녀가 도시 생활에 물들어 "점점 더 화려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2003년 7월 일본인 여성과 재혼했다. 2004년 2월 21일에는 첫째 딸인 노구치 에이코野口絵子노구치 에이코일본어를 낳았다. 2019년 기준으로, 일본에서의 결혼 생활 16년 중 15년 동안 아내와 별거했으며, 딸은 아내의 집에서 자랐다. 딸 노구치 에이코는 2020년 기준으로 뉴질랜드에 유학 중이며, 같은 해부터 히타치 세계 불가사의 발견!日立 世界・ふしぎ発見!히타치 세계 불가사의 발견!일본어의 '미스터리 헌터'로 활동했다. 이후 딸은 유학을 마치고 2023년 4월부터 게이오기주쿠 대학에 재학 중이다.
노구치 켄의 부모님은 그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아버지의 두 번째 이집트 근무 시기에 이혼했다. 이후 부모님 모두 재혼했다. 아버지와 친어머니 사이에는 형이 한 명 있다.
그의 아버지 노구치 마사아키는 아이즈와카마쓰시 출신으로, 이집트 공사, 이탈리아 공사, 예멘 대사, 시드니 총영사, 튀니지 대사 등을 지낸 전직 외교관이다. 그는 정부 개발 원조(ODA) 사업에 참여했으며, 노구치에게 "겉으로 보이는 A면뿐만 아니라 노력해야만 보이는 B면을 보라"고 가르쳤다. 셰르파 기금은 노구치가 "히말라야의 B면을 본 결과"라고 한다.
그의 친어머니 노구치 모나(결혼 전 성 타도로스)는 헬리오폴리스 출신으로, 이집트와 레바논 혼혈이며 이집트의 소수 종교인 콥트교를 믿는 아버지와 튀르키예 출신으로 그리스와 프랑스 혼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4개국 혈통을 물려받았다. 일에 몰두하는 남편과 맞지 않아 이혼한 후, 재혼 상대와도 이혼하여 빈곤해진 그녀는 이복 동생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생활비를 보냈다고 노구치 켄이 언급했다. 이후 친어머니는 캐나다로 이주했으며, 2007년 TV 아사히의 '그레이트 마더 이야기'グレートマザー物語그레이트 마더 이야기일본어 기획으로 한 번 일본을 방문했다.
그의 계모는 노구치 켄이 에베레스트 등반에 두 번 실패하고 세 번째 도전을 할 때 베이스캠프로 "언제까지나 등정하지 못한다면 안 된다. 질질 끌며 도전하면 에베레스트의 스토커다. 결판을 내고 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5. 저서 및 출연
노구치 켄은 등반가 및 환경운동가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서적을 출판하고 미디어에 출연했다.
5.1. 저서 및 사진집
그는 여러 저서와 사진집을 통해 자신의 경험과 철학을 공유했다.
- 『낙오되어 에베레스트로落ちこぼれてエ베레스트낙오되어 에베레스트로일본어 7대륙 최고봉 세계 최연소 등정』 (1999년, 슈에이샤 인터내셔널)
- 『대모험술 우리는 왜 세계에 도전하는가』 (공저자: 시라이시 고지로) (2000년, 분게이슌주)
- 『백만 번의 이 빌어먹을100万回のコンチクショー백만 번의 이 빌어먹을일본어』 (2002년, 슈에이샤)
-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모험이다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것도 모험, 쓰레기 줍는 것도 모험!』 (2006년, 가쿠슈켄큐샤)
- 『중학생을 위한 숏 스토리 2 패크마쿤이 고른 여행과 모험 이야기 모음집』 (2007년, 가쿠슈켄큐샤) - 공저
- 『확실히 살다~10대를 위한 메시지~』 (2007년, 크리타샤)
- (개정판) 『확실히 살다 낙오했다면 기어 올라가면 된다』 (2009년, 슈에이샤 문고)
- 『100 Remains 등산가 노구치 켄이 산에서 주운 쓰레기. 미술가 다나카 아사코가 모은 노구치 켄의 말.』 (공저자: 다나카 아사코) (2007년, 고마쇼보)
- 『후지산을 더럽히는 것은 누구인가 청소 등반과 환경 문제』 (2008년, 가도카와 쇼텐)
- 『자연과 국가와 인간과』 (2009년, 니혼케이자이신문 출판사)
- 『고다와리 인물전 8·9월 지학유학 시리즈/수요일 NHK TV 텍스트』 (2010년, NHK 출판)
- 『그래도 나는 「현장」에 간다』 (2011년, PHP 연구소)
- 『세계유산이 되어 후지산은 울고 있다』 (2014년, PHP 연구소)
- 『재해 발생 후 죽지 않기 위해 「피난소에 텐트촌」이라는 선택지』 (2017년, PHP 연구소 PHP 신쇼)
- 『계속 오르는 것. 산을 오르고 학교를 짓고 재해와 싸우다』 (2021년, 가켄플러스)
- 『부자가 생각한 「나의 길」을 찾는 법 「정답」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고른 길을 「정답」으로 만들면 된다!』 (2022년, 세이분도 신고샤)
- 사진집**
- 관련 서적**
5.2. 미디어 출연
노구치 켄은 다양한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광고에 출연하며 대중과의 접점을 넓혔다.
- 산악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 뉴스 프로그램**
-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및 기타**
- 광고**
6. 주요 등반 기록
등반일 | 나이 | 산 이름 | 고도 | 대륙 | 비고 |
---|---|---|---|---|---|
1989년 8월 | 16세 | 몽블랑 | 4810 m | 유럽 | |
1989년 12월 | 16세 | 킬리만자로산 | 5895 m | 아프리카 | |
1992년 9월 | 19세 | 코지우스코산 | 2228 m | 오스트레일리아 | |
1992년 12월 | 19세 | 아콩카과 | 6960 m | 남아메리카 | |
1993년 6월 | 19세 | 매킨리산 (데날리) | 6168 m | 북아메리카 | |
1994년 12월 | 21세 | 빈슨 산괴 | 4892 m | 남극 | |
1996년 1월 | 22세 | 엘브루스산 | 4892 m | 유럽 (러시아) | |
1996년 9월 | 23세 | 초오유 | 8201 m | ||
1999년 5월 | 25세 | 에베레스트산 | 8844 m | 아시아 | 네팔 측, 당시 칠대륙 최고봉 최연소 등정 기록 수립 |
2007년 5월 | 33세 | 에베레스트산 | 8844 m | 아시아 | 티베트 측, 청소 등반. 네팔과 티베트 양쪽에서 등정 성공한 일본인 8번째. |
7. 같이 보기
- 등산가 목록
- 우에무라 나오미
- 녹색 보수주의
- 도쿄도 레인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