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나단 앤서니 위스니스키(Jonathan Anthony Wisniski)는 1951년 9월 20일에 태어난 은퇴한 미국의 프로레슬러로, 그렉 "더 해머" 발렌타인(Greg "the Hammer" Valentine그렉 "더 해머" 발렌타인영어)이라는 링네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전설적인 프로레슬러 조니 발렌타인의 아들이다.
50년이 넘는 프로레슬링 경력 동안 발렌타인은 NWA US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WWC 유니버설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WWF 인터콘티넨탈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NWA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 WWF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 등 40개가 넘는 챔피언십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는 미드-애틀랜틱 챔피언십 레슬링, 월드 레슬링 페더레이션(WWF), 월드 챔피언십 레슬링(WCW) 등 여러 주요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2004년 WWE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16년에는 프로레슬링 명예의 전당 박물관에도 이름을 올렸다. 특히 그의 강력한 엘보우 드롭과 피겨 포 레그락은 트레이드마크 기술로 유명하며, 일본에서는 '금발의 요귀'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그렉 발렌타인은 프로레슬링 경력을 시작하기 전의 어린 시절과 프로레슬링에 입문하게 된 과정을 거쳤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조나단 앤서니 위스니스키는 1951년 9월 20일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났다. 십대 시절에는 아버지인 프로레슬러 조니 발렌타인을 따라 텍사스주를 여러 곳을 여행하며 성장했다. 학생 시절에는 아르바이트로 링에 오르기도 했다. 여름 방학 중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프로레슬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아들의 결정을 만류했지만, 결국 아들의 뜻에 따라 1970년 캐나다 캘거리로 보내 스튜 하트 밑에서 훈련을 받게 했다.
2.2. 프로레슬링 훈련 및 데뷔
위스니스키는 스튜 하트에게 프로레슬링 훈련을 받았으며, 1970년 7월 안젤로 모스카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으나 5분 만에 패배했다. 6개월 후, 그는 미시간주 디트로이트로 이주하여 더 셰이크 밑에서 훈련을 마쳤다.
3. 프로레슬링 경력
그렉 발렌타인은 1970년 데뷔 이후 수많은 프로레슬링 단체를 거치며 다양한 링네임과 캐릭터로 활동했다. 특히 WWF와 NWA에서 주요 타이틀을 획득하며 당대 최고의 악역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3.1. 초기 경력 (1970-1976)
위스니스키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링네임을 사용하는 것을 꺼려하며 '베이비 페이스 넬슨'이라는 링네임으로 활동했다. 이후 1971년부터 1974년까지 돈 파고와 함께 '파고 브라더스' 또는 더 패뷸러스 파고스(The Fabulous Fargos더 패뷸러스 파고스영어)의 일원인 '조니 파고'로 활동했다. 파고 브라더스는 뉴욕주 버팔로와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를 기반으로 한 내셔널 레슬링 페더레이션에서 활동하며 1972년 5월 11일 도미닉 데누치와 토니 파리시의 이탈리안 커넥션으로부터 NWF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을 획득했고, 총 4차례 이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후 텍사스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1974년 파고 브라더스가 해체된 후, 위스니스키는 플로리다주로 가서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고자 '조니 발렌타인 주니어'라는 링네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링네임을 '그렉 "더 해머" 발렌타인'으로 변경했으며, 아버지 조니 발렌타인이 너무 나이가 많아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될까 우려하여 아들이 아닌 '동생'으로 홍보되었다. 발렌타인은 1975년부터 1976년 초까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와 안토니오 이노키가 이끄는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활동하며 1년간 플로리다에 머물렀다. 1975년 2월 14일 로스앤젤레스의 올림픽 오디토리움에서 에드워드 카펜티어로부터 NWA 아메리카스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획득하며 주목을 받았고, 4월 25일에는 당시 잭 브리스코가 보유하고 있던 NWA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에 처음으로 도전했다.
3.2. 미드 애틀랜틱 챔피언십 레슬링 (1976-1978)
1975년 아버지 조니 발렌타인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부상을 입어 은퇴하게 되자, 그렉 발렌타인은 1976년 8월 짐 크로켓 주니어의 미드-애틀랜틱 챔피언십 레슬링에 데뷔했다. 그는 은퇴한 아버지를 대체하기 위해 고용되었으며, 데뷔하자마자 조니 위버와 대립하여 자신의 주특기인 탑 로프 엘보우 드롭으로 그를 '은퇴'시켰다. 발렌타인의 엘보우 드롭은 치명적인 기술로 홍보되었고, 그의 데뷔 전에는 나무판을 팔꿈치로 부수는 영상이 관중들에게 상영되기도 했다.
이후 발렌타인은 릭 플레어와 태그팀을 결성하여 NWA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을 두 차례 획득했다. 1976년 12월 26일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에서 진 앤더슨과 올레 앤더슨을 꺾고 첫 타이틀을 차지했으며, 1977년 10월 30일에는 다시 앤더슨 형제를 꺾고 타이틀을 되찾았다. 또한 1977년 6월 30일부터 8월 22일까지 NWA 미드-애틀랜틱 태그팀 챔피언십을 보유하기도 했다. 1978년 4월, NWA 회장 에디 그레이엄이 그들의 "비전문적인 행동"을 이유로 타이틀을 박탈하면서 팀은 해체되었다. 이후 플레어는 NWA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에 집중했고, 발렌타인은 1978년 배런 본 라시크와 함께 다시 한번 NWA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동시에 발렌타인은 와후 맥다니엘과 NWA 미드-애틀랜틱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놓고 대립했다. 1977년 6월 11일 노스캐롤라이나주 롤리에서 맥다니엘을 꺾고 그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발렌타인은 맥다니엘의 다리가 너무 두꺼워 자신의 주특기인 피겨 포 레그락을 사용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레그/앵클 수플렉스를 사용하여 그의 발목을 부러뜨렸다. 이후 발렌타인은 "내가 와후의 다리를 부러뜨렸다"는 문구가 앞면에, "더 이상 와후는 없다"는 문구가 뒷면에 쓰인 티셔츠를 입고 다녔다. 맥다니엘은 1977년 8월 9일 복귀하여 타이틀을 되찾았다. 발렌타인은 9월 10일 맥다니엘을 다시 꺾고 타이틀을 한 번 더 획득했으나, 1978년 4월 9일 켄 파테라에게 타이틀을 잃었다.
3.3. 월드 와이드 레슬링 페더레이션 (1978-1979)
발렌타인은 1978년 11월부터 당시 빈센트 J. 맥마흔이 소유했던 월드 와이드 레슬링 페더레이션(WWWF)에서 비정기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더 그랜드 위자드의 매니지먼트 하에 그는 치프 제이 스트롱보우를 포함한 모든 상대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냉혹한 레슬러라는 기믹을 부여받았다. 1979년 2월, 그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당시 WWWF 헤비웨이트 챔피언 밥 백클런드와 1시간 시간 제한 무승부를 기록했다.
3.4. 미드 애틀랜틱 챔피언십 레슬링 복귀 (1979-1981)
발렌타인은 1979년 말 NWA로 복귀하여 플레어에게 태그팀 재결성을 요청했다. 당시 선역이었던 플레어는 이를 거절했다. 발렌타인은 1980년 레이 스티븐스와 함께 다시 한번 NWA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승리 4일 후, 프로모터 데이비드 크로켓은 발렌타인과 스티븐스에게 태그 매치에서 불법적인 선수가 핀을 당했음을 증명하는 필름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승리를 무효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크로켓이 필름을 NWA 회장 밥 가이젤에게 보내 승리를 번복할 것이라고 위협하자, 스티븐스와 발렌타인은 그를 공격하고 주머니칼로 필름을 잘라 증거를 인멸했다.

발렌타인은 이후 "개과천선"했다고 주장하며 플레어와 팀을 재결성했고, 플레어는 발렌타인이 선역으로 전환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미 스누카와 아이언 쉬크와의 태그 매치에서 발렌타인은 플레어를 버리고 떠나 플레어가 수적으로 불리하게 만들었다. 플레어는 구타당했고, 발렌타인은 진 앤더슨의 히코리 지팡이를 플레어의 머리에 부러뜨려 그의 코를 실제로 부러뜨리고 입술을 찢었다. 이전 파트너들은 플레어의 NWA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놓고 대립하기 시작했으며, 발렌타인은 7월 26일 플레어의 고향인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서 마침내 플레어를 꺾고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는 11월 24일 플레어에게 패배할 때까지 타이틀을 보유했으며, 플레어는 미드-애틀랜틱 지역에서 발렌타인의 주요 상대 중 한 명이 되었다.
3.5. 월드 레슬링 페더레이션 (1981-1982)
발렌타인은 1981년 월드 레슬링 페더레이션(WWF)으로 1년간 다시 돌아와 타이틀을 계속해서 추구했다. 10월 19일, 그는 백클런드에게 핀을 당했으나, 혼란스러운 심판으로부터 타이틀 벨트를 건네받았다. 타이틀은 보류되었고, 백클런드는 11월 23일 재경기에서 발렌타인을 깨끗하게 꺾었다. 1982년 1월, 발렌타인은 백클런드와 필라델피아 스펙트럼에서 WWF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놓고 다시 한번 철창 매치에서 맞붙었으나, 백클런드가 승리했다.
그는 또한 페드로 모랄레스와 WWF 인터콘티넨탈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놓고 대립했으며, 경기장 콘크리트 바닥에 수플렉스를 사용하여 모랄레스에게 부상을 입혔다. 발렌타인은 이 타이틀도 획득하지 못했고, 1982년 중반에 단체를 떠났다.
3.6. 미드 애틀랜틱 챔피언십 레슬링 복귀 (1982-1984)
발렌타인은 NWA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챔피언십을 두 번 더 획득했으며, 1982년 와후 맥다니엘과의 대립을 재개하여 11월 4일 그의 매니저인 서 올리버 험퍼딩크의 도움으로 타이틀을 획득했다. 로디 파이퍼가 타이틀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파이퍼가 발렌타인에게 개 목걸이가 들어있는 케이크를 준 후, 두 사람은 일련의 잔혹한 도그 칼라 매치를 벌였다. 특히 스타케이드 1983에서는 파이퍼가 강철 사슬로 발렌타인을 반복해서 채찍질한 후 비타이틀전에서 핀을 따냈다. 이 대립은 발렌타인이 파이퍼의 귀에 집중하는 경향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는데, 파이퍼의 귀는 그의 경력 초기에 부상당하여 쉽게 피를 흘렸다. 파이퍼는 결국 1983년 4월 16일 발렌타인을 꺾었지만, 발렌타인은 4월 30일 그린즈버러에서 타이틀을 되찾았고, 경기 후 딕 슬레이터에게 타이틀을 내주기 직전인 12월 14일 월드 레슬링 페더레이션으로 떠났다.
3.7. 월드 레슬링 페더레이션 (1984-1992)
발렌타인은 1984년 빈스 맥마흔의 전국 확장 계획이 성공할 것이라고 예측하며 WWF로 돌아왔다. 그의 첫 매니저는 캡틴 루 알바노였고, 이후 지미 하트의 매니지먼트를 받았다.
3.7.1. 인터콘티넨탈 챔피언 (1984-1985)

1984년 9월 24일 온타리오주 런던에서 발렌타인은 티토 산타나를 꺾고 인터콘티넨탈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경기 내내 산타나의 부상당한 무릎에 집중했다. 산타나는 처음에는 자신이 경기를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투 카운트만 얻었을 뿐이었다. 산타나가 축하하는 동안, 발렌타인은 그를 롤업하여 핀을 따내 타이틀을 획득했다. 승리 후, 발렌타인은 산타나에게 피겨 포 레그락을 걸어 그를 재부상시켰다. 산타나가 다리 수술로 활동을 중단하는 동안, 발렌타인은 정키야드 도그와 대립했으며,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첫 레슬매니아에서 인터콘티넨탈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타이틀 매치에서 그와 맞붙었다. 발렌타인은 로프를 사용하여 정키야드 도그를 핀했지만, 산타나가 링사이드로 와서 심판에게 알렸고, 심판은 경기를 재개했다. 발렌타인은 경기장을 떠나 카운트아웃으로 패배했지만 타이틀은 유지했다. 산타나는 결국 회복하여 발렌타인과 여러 경기를 치렀다. 발렌타인은 챔피언십 기간 동안 지미 스누카, 정키야드 도그, 이반 푸츠키, 토니 애틀러스, 서전트 슬로터, 리키 스팀보트, 배리 윈덤 등의 도전을 물리쳤다. 그는 1985년 7월 6일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열린 철창 매치에서 타이틀을 되찾았고, 이로써 발렌타인의 285일간의 인터콘티넨탈 타이틀 통치는 인터콘티넨탈 타이틀 역사상 다섯 번째로 긴 기록으로 막을 내렸다. 발렌타인은 챔피언십 벨트를 잃은 것에 격분하여 철창 안에서 벨트를 파괴했고, WWF는 새로운 인터콘티넨탈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벨트를 제작해야 했다. (실제로는 WWF가 이미 새롭고 현대적인 인터콘티넨탈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벨트를 제작해두었기 때문에, 오래된 타이틀 벨트를 파괴하는 것이 새로운 벨트를 소개하는 완벽한 방법으로 여겨져 미리 계획된 각본이었다.)
3.7.2. 드림 팀; 뉴 드림 팀 (1985-1987)

발렌타인은 이후 브루터스 비프케이크와 함께 '더 드림 팀'이라는 태그팀을 결성했으며, 조니 V가 매니저를 맡았다. 초기에는 지미 하트와 조니 V가 함께 매니저를 맡았지만, WWF는 하트를 그룹에서 제외했고 그는 하트 파운데이션의 매니저가 되었다. 1985년 8월 24일 필라델피아의 스펙트럼에서 드림 팀은 U.S. 익스프레스를 꺾고 WWF 태그팀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비프케이크가 조니 V의 불붙은 시가를 윈덤의 눈에 비벼 핀을 따낼 수 있었다. 그들은 1986년 4월 7일 레슬매니아 2에서 브리티시 불독스(데비 보이 스미스와 다이너마이트 키드)에게 패배할 때까지 타이틀을 보유했다. 레슬매니아 III에서 드림 팀은 조니 V와 디노 브라보의 방해로 루조 브라더스를 꺾었다. 경기 중 비프케이크의 실수에 화가 난 발렌타인은 브라보와 함께 비프케이크를 버리고 떠났고, 이로 인해 브루터스는 이후 선역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비프케이크를 디노 브라보로 교체하며 발렌타인은 '뉴 드림 팀'을 결성했다. 발렌타인은 브라보와의 팀워크에 불만이 많았다. WWF가 브리티시 불독스의 마스코트인 불독 마틸다를 "납치"해달라고 요청하자, 발렌타인은 이에 반발하여 사임했다. 그는 곧 다시 복귀했으며, 지미 하트가 다시 그의 새로운 매니저가 되었다 (마틸다 "납치" 각본은 디 아일랜더스에게 재할당되었다). 그러나 1987년부터 1990년까지 그의 역할은 크게 축소되었다.
3.7.3. 돈 무라코 및 론 가빈과의 대립 (1988-1990)
발렌타인은 레슬매니아 IV에서 열린 WWF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토너먼트에 참가하여 1라운드에서 리키 스팀보트를 꺾었으나, 8강전에서 결국 우승자인 랜디 새비지에게 패배했다.
1988년 5월, 지미 하트는 발렌타인의 왼쪽 정강이에 정강이 보호대를 장착시켰고, 그의 레슬러에게 신비한 부상이 있다고 주장하며 이 보호대가 발렌타인의 "골드로 가는 길"이라고 선언했다.
1988년 후반, 발렌타인은 1년 전 선역으로 전환했던 돈 무라코와 대립했다. 이 대립은 발렌타인이 무라코의 매니저이자 전 WWF 헤비웨이트 챔피언인 슈퍼스타 빌리 그레이엄을 잔인하게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지팡이를 짚고 있던 그레이엄은 발렌타인이 이미 경기를 이긴 후에도 잡 레슬러 리키 아타키에게 피겨 포 레그락을 걸고 있자 개입하려 했다. 발렌타인은 플라스틱 엉덩이를 가진 그레이엄에게 피겨 포 레그락을 걸었다. 이 대립은 무라코가 WWF에서 해고되면서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1989년 4월, 그는 론 가빈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레슬매니아 V에서 혼키 통크 맨과 팀을 이루어 당시 선역이었던 하트 파운데이션에게 패배한 지 2주 후, 그는 WWF 슈퍼스타즈 오브 레슬링에서 가빈을 꺾고 은퇴 매치에서 승리했다. 가빈은 심판이 되었으나 발렌타인과 하트가 그를 해고시켰다. 가빈은 이후 링 아나운서가 되어 발렌타인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섬머슬램 1989에서 헤라클레스와의 경기에서 가빈은 발렌타인을 헤라클레스의 "소위 상대"라고 소개하고, 링으로 다가오는 그가 113 kg (249 lb)으로 보이며 14 kg (30 lb) 과체중이라고 말했다. 경기 후, 발렌타인이 속임수로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이 발렌타인의 승리를 선언하자 가빈은 헤라클레스를 승자로 발표했다. 발렌타인은 가빈을 링 밖으로 밀쳐냈고, 가빈이 다시 링으로 올라와 발렌타인을 가격하기 전에 헤라클레스와 주먹다짐을 벌였다. 발렌타인과 지미 하트는 결국 가빈이 링에서 싸울 수 있도록 복귀시켜달라고 요구했다.
한동안 발렌타인은 정강이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피겨 포 레그락의 압력을 높이기 위해 (정강이가 아닌 종아리를 덮도록) 돌려 사용했다. 그는 이 보호대를 "하트브레이커"라고 불렀다. 발렌타인은 또한 (불법적으로) 이 보호대를 팔에 부착하여 엘보우 드롭을 강조하기도 했다. 대립 과정에서 가빈은 자신만의 회전 가능한 정강이 보호대를 "해머 재머"라고 부르며 맞섰다. 이 대립은 1990년 로얄 럼블에서 서브미션 매치로 절정에 달했다. 가빈은 경기 중 "해머 재머"를 사용하여 발렌타인이 자신에게 피겨 포 레그락을 걸었을 때 이를 "반격"했다 (고통스러워하는 대신 가빈은 발렌타인에게 미소를 짓고 표정을 지었다). 지미 하트가 가빈의 다리에서 "해머 재머"를 제거한 후, 발렌타인은 체계적으로 가빈의 다리를 약화시켰지만, 결국 가빈이 "하트브레이커"로 그를 가격하고 샤프슈터를 걸어 발렌타인이 항복하면서 패배했다.
3.7.4. 리듬 앤 블루스 (1990-1991)

얼마 후, 발렌타인은 혼키 통크 맨과 태그팀을 결성했다. 약 8개월 동안 발렌타인은 머리를 검게 염색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이는 제시 벤투라의 아이디어였다), 결국 양보했고 혼키 통크 맨이 엘비스 프레슬리와 닮았기 때문에 발렌타인은 로이 오비슨과 닮은 모습이 되었고, 팀은 '리듬 앤 블루스'로 알려졌으며 지미 하트가 매니저를 맡았다. 리듬 앤 블루스는 부시왜커스(부치 밀러와 루크 윌리엄스) 및 하트 파운데이션과 대립하며 타이틀 샷을 받았지만, 당시 태그팀 디비전을 지배하고 있던 리전 오브 둠에 가려졌다. 리듬 앤 블루스 시절, WWF 아나운서 고릴라 몬순은 발렌타인이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를 때마다 (기타를 연주하려고 시도하면서) "만약 해머가 노래를 잘해서 교수형에 처해진다면 무고한 사람이 교수형에 처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12월 중순, 그의 파트너 혼키 통크 맨이 WWF를 떠났다. 1990년 12월 28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사바 심바에게 패배하는 각본이 녹화되었는데, 이는 지미 하트의 기타에 우연히 맞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매니저를 공격하려 했고 팬들의 환호를 받기 시작했다. 1991년 1월 7일, 각본은 더욱 심화되었다. 데비 보이 스미스가 디노 브라보를 꺾는 경기에서 발렌타인은 다시 한번 지미 하트의 메가폰에 우연히 맞았다. 이번에는 발렌타인이 지미 하트를 공격하며 선역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발렌타인은 갑작스럽게 회사를 떠났고, 혼키 통크 맨의 WWF 탈퇴와 함께 발렌타인과의 계획된 대립은 사실상 취소되었다.
3.7.5. 페이스 턴 (1991-1992)
1991년 1월 19일, 발렌타인은 네 번째 로얄 럼블 매치에 참가하여 44분 동안 버텼다. 1991년 2월 17일 레슬링 챌린지에서는 1990년 말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지미 하트와의 사건 영상이 방영되었다. 이는 그의 선역 전환 과정을 TV로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발렌타인은 레슬매니아 VII에서 지미 하트가 매니저를 맡은 어스퀘이크에게 패배했고, 1991년 섬머슬램에서는 어윈 R. 시스터에게 다시 패배했다. 그는 공석이 된 WWF 챔피언십을 위한 1992년 로얄 럼블에 참가하여 옛 라이벌 릭 플레어를 공격했지만, 레포 맨에게 탈락당했다. 같은 달 시카고에서 열린 하우스 쇼에서 스키너를 꺾으며 1월 25일 WWF에서의 활동을 마무리했다.
3.8. 유니버설 레슬링 페더레이션 (1991)
허브 에이브럼스는 자신의 유니버설 레슬링 페더레이션(UWF)에 대해 공격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앙드레 더 자이언트, 스티브 윌리엄스, 더 킬러 비스, 밥 오턴과 같은 유명 레슬러들의 계약을 발표했다. 이 명단에 그렉 발렌타인도 추가되어 1991년 1월 9일 UWF에 합류했다. 그는 그날 밤 뉴욕시 펜타 호텔에서 열린 TV 녹화에서 소니 블레이즈를 꺾고 데뷔했다. 그는 같은 녹화에서 마이크 더럼을 꺾었고, UWF TV의 "캡틴 루스 코너" 코너에서 그의 전 WWF 매니저였던 캡틴 루 알바노와 인터뷰를 했다. 그러나 그의 UWF 체류는 기술적으로 그 TV 녹화에만 해당되었다. 앙드레 더 자이언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빈스 맥마흔은 에이브럼스의 발표에 대응하여 그렉 발렌타인을 다시 WWF로 유인했다. 2000년 인터뷰에서 발렌타인은 에이브럼스가 UWF 출연료를 지급하지 않아 보복했다고 밝혔다. 이 기간 동안 발렌타인은 이집트를 방문하여 현지 챔피언 맘두 파라그에게 도전하기도 했다.
3.9. 월드 챔피언십 레슬링 (1992)
자신의 위상이 줄어들고 있음을 의식한 발렌타인은 WWF를 떠나 1992년 월드 챔피언십 레슬링(WCW)과 계약했다. 그는 1992년 2월 4일 버지니아주 노퍽에서 열린 하우스 쇼에서 데뷔했다. 테리 테일러와 팀을 이룬 그는 마커스 알렉산더 백웰과 톰 젠크를 꺾었다. 1992년 2월 15일 TV에 데뷔했다. 2주 후, 그는 다시 테리 테일러와 팀을 이루어 론 시몬스와 빅 조쉬를 꺾고 WCW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태그팀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봄 내내 이 듀오는 다양한 하우스 쇼에서 젠크와 백웰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타이틀을 방어했다. 1992년 5월 17일 레슬워 92에서 그들은 더 프리버즈에게 타이틀을 잃었다. 비치 블래스트에서 발렌타인은 마커스 백웰을 핀했다. 7월, 그는 더스티 로즈와 더스틴 로즈와의 각본에 휘말려 WCW 월드와이드에서 부자 듀오와 대립했다. 로즈 부자는 발렌타인을 공격했지만, 딕 슬레이터와 더 바바리안의 보복을 받았다.
발렌타인은 그 여름 여러 하우스 쇼에서 더스틴 로즈와 맞붙었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이 시리즈 동안 발렌타인은 딕 슬레이터와 정기적으로 팀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 듀오는 프리버즈와 배리 윈덤 & 더스틴 로즈와 경기를 치렀다. 클래시 오브 더 챔피언스 XX에서 바비 이튼 & 안 안데르손이 슬레이터와 발렌타인을 꺾었는데, 이는 희귀한 악역 대 악역 경기였다. 1992년 9월 발렌타인은 밴 해머와 하우스 쇼 대립을 벌였으며 무패를 기록했다. 가을에는 슬레이터와 계속 팀을 이루어 스타이너 브라더스와 경기를 치렀다. TV에서 발렌타인의 운세는 계속해서 쇠퇴했다. 1992년 10월 11일 WCW 프로에서는 셰인 더글러스에게 패배했다. 1992년 10월 19일 WCW 새터데이 나이트 녹화에서 그는 그날 밤 스팅에게 패배할 예정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는 향후 이벤트에 예정되어 있지 않았고, 발렌타인은 단체에서 사임했다.
3.10. 월드 레슬링 페더레이션 (1993-1994)
그는 1993년 서바이버 시리즈에서 '블루 나이트'라는 가면을 쓰고 숀 마이클스와 그의 세 "나이트"(레드 나이트는 배리 호로위츠, 블랙 나이트는 제프 게이로드)가 하트 패밀리와 맞붙는 제거 매치에 재등장했다. 그는 1994년 로얄 럼블에 그렉 발렌타인으로 다시 돌아와 20분 이상 버텼으나 릭 마텔에게 탈락당했다. 그해 여름 발렌타인은 7월 하우스 쇼 투어에서 세 차례 밥 백클런드와 맞붙었다.
3.11. 인디 서킷 (1994-1996)
발렌타인은 이후 인디 서킷을 순회하며 일본, 온타리오주 해밀턴을 기반으로 한 인터내셔널 챔피언십 레슬링 프로모션, 그리고 아메리칸 레슬링 페더레이션에서 활동했다.
3.12. 월드 챔피언십 레슬링 (1996-1998)
1996년 여름부터 발렌타인은 향후 2년간 WCW에 여러 차례 출연했다. 그는 출연 건당 지급 방식으로 고용되었으나 거의 활용되지 않았고 인디 서킷에서 계속 레슬링을 할 수 있었다. 1996년 7월 1일, 발렌타인은 메릴랜드주 랜도버에서 열린 WCW 먼데이 나이트로에서 랜디 새비지와 맞붙었다. 발렌타인은 주로 TV에서 빅 쇼, 할렘 히트, 렉스 루거와 대결했다. 다음 해에도 그는 TV에서 드물게 활용되었지만 6승 2패를 기록하며 마이크 이노스, 바비 이튼, 빌리 키드먼을 꺾었다. 발렌타인은 1998년 WCW에서 네 차례 경기를 치러 3승 1패를 기록했다. 그는 1998년 2월 17일 팻 타나카를 꺾으며 WCW 활동을 마무리했다.
3.13. 말년 경력 및 활동 (1998-2019)
1999년 10월 10일, 그는 악명 높은 히어로즈 오브 레슬링 페이퍼뷰에 출연하여 셰리 마텔의 도움으로 조지 스틸을 핀했다. 그는 요코즈나가 사망한 2000년 영국 투어에 참가했다. 그는 또한 WWC에도 참전하여 1993년 8월 8일 토너먼트 결승에서 호세 곤잘레스를 꺾고 WWC 유니버설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이 타이틀은 전 챔피언 카를로스 콜론의 은퇴로 공석이 된 것이었다. 그는 또한 단명한 X 레슬링 페더레이션에 투자자이자 링 내 선수로 참여했다. 2000년대에는 부동산 경력을 추구하기 위해 인디 단체 출연을 줄이기 시작했다.
2004년 3월 13일, 발렌타인은 그의 전 매니저인 지미 하트에 의해 2004년 WWE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다음 날 밤,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레슬매니아 XX에서 2004년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이 소개될 때 발렌타인은 큰 박수를 받았다. WWE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직후, 발렌타인은 자신이 받은 명판을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바치며 "이것은 아버지를 위한 것입니다, 조니 발렌타인"이라고 말했다.

2005년 1월 29일 레슬리유니언에서 발렌타인은 17인 배틀 로얄에서 우승하여 IWA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그는 같은 해 8월 27일 레슬리유니언 #2에서 티토 산타나에게 타이틀을 잃었다. 발렌타인은 또한 뉴잉글랜드를 순회하는 AWA 슈퍼스타즈 오브 레슬링을 포함한 여러 인디 단체에서 활동했다. AWA 슈퍼스타즈 오브 레슬링에서 발렌타인은 정기적으로 토니 애틀러스와 맞붙었다.
2005년 10월 3일, 발렌타인은 WWE 홈커밍에 출연했으며, 10월 23일에는 랜디 오턴의 "레전드 킬러" 기믹과 유사한 기믹을 사용하던 롭 콘웨이에게 WWE 히트 에피소드에서 패배했다. 이는 유진이 그를 위해 개입하여 심판이 콘웨이에게 실격 승리를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2007년 5월, 발렌타인은 온타리오주 모리스버그에서 퀸슨 발렌티노를 꺾고 캐나다 그랑프리 레슬링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2007년 8월 24일, 발렌타인은 온타리오로 돌아와 코코 B. 웨어를 상대로 CGPW 챔피언십을 방어했다. 전날 오타와에서 코코가 비타이틀전에서 발렌타인을 꺾었음에도 불구하고, 발렌타인은 콘월에서 코코를 꺾는 데 성공했으나, 활동 부족으로 인해 타이틀은 공석이 되었다.
2007년 후반, 발렌타인은 저글로 챔피언십 레슬링에 출연하여 브루터스 비프케이크와 함께 드림 팀을 재결성했다. 그들은 당시 공석이던 JCW 태그팀 챔피언십을 위한 8팀 제거 매치에 참가했으며, 네크로 부처의 약간 엉성한 선셋 플립 이후 첫 번째로 탈락했다.
발렌타인은 2008년 3월 31일 WWE Raw에서 열린 오랜 친구 릭 플레어의 은퇴식에 참석했다.
2011년 1월 29일, 발렌타인은 웨스트버지니아주 휠링에서 열린 레전드 프로 레슬링의 연례 "LPW 오버 더 엣지" 행사에서 잭 블레이즈에 의해 레전드 프로 레슬링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발렌타인은 2018년에 두 번의 경기에 출전했는데, 모두 태그팀 매치였다.
3.14. 일본에서의 활동
그렉 발렌타인은 1975년 5월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골든 파이트 시리즈'에 처음으로 일본에 방문했다. 그는 안토니오 이노키, 사카구치 세이지, 스트롱 고바야시와 싱글 매치로 대결했으며, 특별 참가한 앙드레 더 자이언트와 타이거 젯 싱의 파트너로도 기용되었다. 이후에도 신일본에 자주 참전하여, 같은 해 12월 4일 재방문 시에는 이반 콜로프와 팀을 이루어 이노키와 사카구치의 NWA 북미 태그팀 챔피언십에 도전했다. 1979년 11월 16일에는 마사 사이토와 팀을 이루어 새로운 챔피언 팀인 사카구치와 조슈 리키에게 다시 한번 북미 태그팀 챔피언십에 도전했다. 같은 해 12월 4일 오사카부립체육회관에서는 후지나미 타츠미가 보유하고 있던 WWF 주니어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에 체중을 줄여 도전하며 명경기를 펼쳤다.
1984년 9월에는 WWF 인터콘티넨탈 헤비웨이트 챔피언 자격으로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블러디 파이트 시리즈' 후반전에 특별 참가했다. 시리즈 최종전인 9월 20일 오사카부립체육회관 대회에서는 비타이틀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WWF 인터내셔널 헤비웨이트 챔피언이었던 후지나미와의 인터 챔피언 간의 대결이 성사되었다 (결과는 역사다리 핀폴로 후지나미의 승리).
1990년대에는 일미 레슬링 서밋, SWS, 바트라츠, 초기 대일본 프로레슬링 등에도 방문했으며, 1990년 4월 13일 일미 레슬링 서밋에서는 더 그레이트 카부키와 싱글 매치로 대결했다.
4. 개인 생활
그렉 발렌타인은 1995년 2월 14일 줄리와 결혼했다. 그는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 바네사와 로메인이라는 두 딸을 두었다. 첫 번째 아내는 1984년 WWF TV에 출연하여 발렌타인의 등 마사지를 해주었는데, 발렌타인은 이것이 자신의 성공 비결이라고 주장했다. 바네사는 1990년대 후반 하트 브라더스 밑에서 훈련을 시작했으나, 2014년 암으로 사망했다. 발렌타인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며, 가끔 테드 디비아시와 함께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강연을 한다. 그는 또한 기독교 레슬링 단체인 월드 임팩트 레슬링의 일원이기도 하다. 그는 레슬러 브라이언 노브스의 처남이다.
5. 미디어 출연
발렌타인은 헐크 호건의 리얼리티 쇼 호건 노즈 베스트의 한 에피소드에 헐크의 파티 손님 중 한 명으로 출연했다. 또한 퓨즈 채널의 인세인 클라운 파시 시어터에 인세인 클라운 파시 멤버인 바이올런트 제이와 섀기 2 도프와 함께 공동 주연으로 출연했다. 이 쇼에서 발렌타인은 손님들의 시간이 다 되면 극장에서 쫓아내는 안내원 역할을 맡았다.
그는 레전드 오브 레슬링, 레전드 오브 레슬링 II, WWE 데이 오브 레코닝, 쇼다운: 레전드 오브 레슬링, WWE 레전드 오브 레슬매니아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했다. 또한 WWE 2K17의 다운로드 콘텐츠였으며, WWE 2K18에서는 브루터스 비프케이크와 함께 드림 팀으로 등장한다. WWE 2K19에도 출연했다.
2008년 발렌타인은 조지 스틸과 함께 단편 영화 섬싱 피시에 공동 주연으로 출연했다. 이 영화에서 두 전직 레슬러는 낚시 캠프를 구매하는데, 이 영화는 더 이상 개발되지 않은 코미디 시리즈의 파일럿 역할을 했다.
6. 주요 기술
- 엘보우 드롭
- 엘보우 배트
- 피겨 포 레그락
7. 챔피언십 및 수상 경력

그렉 발렌타인은 그의 프로레슬링 경력 동안 수많은 챔피언십 타이틀과 수상 경력을 쌓았다.
단체 | 챔피언십 | 획득 횟수 | 파트너 |
---|---|---|---|
앨라배마 레슬링 페더레이션 | AWF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 1 | |
AWF 태그팀 챔피언십 | 1 | 브루터스 비프케이크 | |
아메리칸 레슬링 어소시에이션 | AWA 미드웨스트 태그팀 챔피언십 | 2 | 제리 밀러 |
아메리칸 레슬링 페더레이션 | AWF 태그팀 챔피언십 | 1 | 토미 리치 |
배드 보이스 오브 레슬링 | BBOW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 1 | |
캐나다 그랑프리 레슬링 | CGPW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 1 | |
국제 월드 클래스 챔피언십 레슬링 | IWCCW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 1 | |
국제 레슬링 어소시에이션 | IWA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 1 | |
메이플 리프 레슬링 | NWA 캐나디안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토론토 버전) | 1 | |
미드-애틀랜틱 챔피언십 레슬링 / 월드 챔피언십 레슬링 | NWA 미드-애틀랜틱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 2 | |
NWA 미드-애틀랜틱 태그팀 챔피언십 | 1 | 릭 플레어 | |
NWA 미드-애틀랜틱 텔레비전 챔피언십 | 2 | ||
NWA 텔레비전 챔피언십 | 2 | ||
NWA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 3 | ||
NWA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 (미드-애틀랜틱 버전) | 4 | 배런 본 라시크 (1), 레이 스티븐스 (1), 릭 플레어 (2) | |
WCW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태그팀 챔피언십 | 1 | 테리 테일러 | |
내셔널 레슬링 얼라이언스 | NWA 북미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 2 | |
NWA 할리우드 레슬링 | NWA 아메리카스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 2 | |
NWA "비트 더 챔프" 텔레비전 챔피언십 | 2 | ||
노스 스테이트 레슬링 얼라이언스 | NSWA 그레이트 레이크스 텔레비전 챔피언십 | 1 | |
NSWA 태그팀 챔피언십 | 1 | 혼키 통크 맨 | |
NWA 텍사스 | NWA 북미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 1 | |
NWA 트라이-스테이트 | NWA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태그팀 챔피언십 (트라이-스테이트 버전) | 2 | 빌 와츠 (1), 고저스 조지 주니어 (1) |
NWA 웨스턴 스테이츠 스포츠 | NWA 웨스턴 스테이츠 태그팀 챔피언십 | 1 | 돈 파고 |
내셔널 레슬링 페더레이션 | NWF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 | 4 | 돈 파고 |
프라임 레슬링 | 프라임 태그팀 챔피언십 | 1 | 짐 나이드하트 |
포틀랜드 레슬링 | 포틀랜드 퍼시픽 노스웨스트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 2 | |
프로페셔널 레슬링 페더레이션 | PWF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 1 | |
프로 레슬링 오하이오 | PWO 태그팀 챔피언십 | 1 | 짐 나이드하트 |
프로 레슬링 레볼루션 | PWR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 1 | |
윈디 시티 프로 레슬링 | WCPW 리그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 1 | |
월드 레슬링 카운실 | WWC 캐리비안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 1 | |
WWC 유니버설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 1 | ||
월드 레슬링 페더레이션 / 월드 레슬링 엔터테인먼트 | WWF 인터콘티넨탈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 1 | |
WWF 태그팀 챔피언십 | 1 | 브루터스 비프케이크 |
- 수상 경력**
- 콜리플라워 앨리 클럽: 남자 레슬링상 (2018)
- 레전드 프로 레슬링: LPW 명예의 전당 (2011년 기수)
- 뉴 잉글랜드 레슬링 얼라이언스: NEWA 명예의 전당 (2013년 기수)
- 프로레슬링 명예의 전당 박물관: 2016년 기수
- 프로 레슬링 일러스트레이티드
- PWI 올해의 가장 미움받는 레슬러 (1975, 1979, 1983)
- 1992년 PWI 500에서 싱글 레슬러 중 49위
- 2003년 "PWI 이어즈"에서 싱글 레슬러 중 119위
- 세인트루이스 레슬링 명예의 전당: 2025년 기수
- WWE 명예의 전당: 2004년 기수
8. 레거시 및 평가
그렉 "더 해머" 발렌타인은 프로레슬링 역사상 가장 일관되고 효과적인 악역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강력한 엘보우 드롭과 특히 상대의 다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마무리하는 피겨 포 레그락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으며, 많은 레슬러들이 그의 기술을 모방하거나 영향을 받았다. 그는 경기 내내 상대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냉혹한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하며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프로 레슬링 일러스트레이티드에서 1975년, 1979년, 1983년에 세 차례나 '올해의 가장 미움받는 레슬러'로 선정된 것은 그가 악역으로서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는 팬들이 그를 진정으로 미워하게 만들었으며, 그의 경기가 항상 큰 관심을 받도록 했다.
그는 WWE 명예의 전당(2004년), 프로레슬링 명예의 전당 박물관(2016년), 레전드 프로 레슬링 명예의 전당(2011년), 뉴 잉글랜드 레슬링 얼라이언스 명예의 전당(2013년), 그리고 세인트루이스 레슬링 명예의 전당(2025년)에 헌액되며 그의 뛰어난 업적과 프로레슬링계에 미친 영향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그의 아버지 조니 발렌타인의 뒤를 이어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는 점은 그의 레거시를 더욱 빛나게 한다. 발렌타인은 단순한 챔피언을 넘어, 경기력과 캐릭터 연기로 시대를 풍미한 진정한 프로레슬링 아이콘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