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후쿠모토 유타카는 오사카부 오사카시 이쿠노구 하라미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히가시오사카시로 이주했으며, 학창 시절부터 야구에 두각을 나타내 사회인 야구에서 활약한 후 프로에 입단했다.
1.1. 출생 및 유년 시절
오사카시 이쿠노구 하라미초에서 태어난 후쿠모토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고무공을 손이나 각목으로 치는 '삼각 베이스볼'을 통해 처음 야구를 접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이 라면 가게와 이불 수선업을 시작하면서 히가시오사카시로 이사했고, 이후에는 배달을 돕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요미우리의 팬이었다고 회고했다.
1.2. 학창 시절
후쿠모토는 부세 시립 부세 제3중학교 (현 히가시오사카시립 가나오카 중학교) 시절 준경식 야구부에 소속되어 2학년까지는 주로 후보 선수였으며, 연습 중 강에 빠진 공을 찾으러 갔다가 물고기를 쫓기도 했다. 3학년 때 1루수로 주전이 되어 오사카 중학교 우승 대회에 출전했다.
어머니의 사촌이 스모부 감독이었던 인연으로 다이테쓰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상급생들의 제재로 1학년 부원들이 줄어드는 가운데, 감독이 1학년들을 아침 연습에 불렀고, 이때의 프리 배팅에서 그의 미트 능력을 높이 평가받아 '1군' 연습에 참여가 허락되었다. 우익수 수비 연습 중 내야 땅볼이 나올 때마다 "송구가 빗나가면 공을 주울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1루 베이스 커버에 들어갔는데, 감독으로부터 "야구를 잘 아는구나"라는 칭찬을 들으며 여름 지구 예선에서 1학년임에도 우익수 주전으로 발탁되었다. 2학년 가을부터는 중견수 포지션을 맡았고, 타순도 1번으로 변경되었다.
1965년 고등학교 3학년 여름, 제47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며 다이테쓰 고등학교의 첫 고시엔 대회 출전을 이끌었다. 1회전에서 이 대회 4강에 오른 아키타 고등학교와 맞붙었으나, 연장 13회말 후쿠모토와 2루수가 타구를 "서로에게 미루는" 실수를 저질러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 후쿠모토는 이때의 경험을 통해 "연계 플레이를 소홀히 했고, 후퇴해야 할 2루수가 아닌 전진할 수 있는 중견수가 잡아야 할 타구였다"는 것을 깨달으며 "내 실수였다", "좋은 경험을 쌓았다"고 회고했다. 1년 후배 팀 동료로는 니시테쓰와 롯데에서 외야수로 활약한 다카하시 후미히코가 있었다.
1.3. 사회인 야구 시절
고등학교 졸업 후 후쿠모토는 마쓰시타 전기 (현 파나소닉) 야구부에 입단했다. 여러 대학에서도 입학 제의가 있었으나, 그는 대학 야구의 체육회계적 분위기, 특히 철권 제재를 싫어하여 그러한 문제가 적을 것이라 생각하고 마쓰시타를 선택했다. 빠른 발이 주무기였기에 감독으로부터 "히로세 요시노리처럼 되라"는 말을 들었고, 당시 히로세의 등번호인 12번을 달고 히로세의 경기를 자주 관전했다고 한다. 후쿠모토는 훗날 "히로세는 신이었다. 프로에 입단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구름 위의 존재였다"고 회고했다.
입단 첫 해인 1966년부터 외야수 주전으로 발탁되었다. 같은 해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2번 타자로 출전하여 3루타를 치는 등 활약했다. 사회인 3년차인 1968년에는 동료인 가토 히데지 (훗날의 에이지)와 오카다 미쓰오 (전 긴테쓰)와 함께 후지 제철 히로하타의 보강 선수로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출전했다. 오카다와 진보 도시야의 호투에 힘입어 결승에 진출, 가와이 악기를 꺾고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8월에는 알래스카 골드패너스와의 미일 친선 야구 경기에 출전했다. 같은 해 사회인 베스트 나인 타이틀을 획득했지만, 후쿠모토는 "아마추어 시절에는 주목받는 선수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2. 프로 경력
후쿠모토 유타카는 1968년 한큐 브레이브스에 지명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으며, 20년간의 선수 생활 동안 수많은 도루 기록과 함께 한큐의 황금 시대를 이끌었고, 이후 극적인 은퇴를 맞이했다.
2.1. 드래프트 및 입단
1968년 가을 드래프트 회의에서 한큐 브레이브스에 7순위로 지명되었다. 당시 등번호는 40번이었다. 이 해의 드래프트는 "역사상 가장 풍작이었던 드래프트"로 불리며, 한큐는 1순위 야마다 히사시, 2순위 가토 히데지와 함께 후쿠모토까지 훗날 명구회에 입성할 선수 3명을 영입했다. 난카이 호크스도 일찍부터 후쿠모토의 빠른 발에 주목했지만, 168cm의 작은 키가 걸림돌이 되어 쓰루오카 가즈토 감독에 의해 영입이 철회되었다.
프로 입단의 계기는 마쓰시타 전기 시절 이미 아마추어 야구의 스타 선수였던 후배 가토를 보러 온 스카우트의 눈에 띈 것이었다. 스카우트가 온 경기에서 홈런을 치거나, 도시 대항 야구에서 홈으로 좋은 송구를 하는 등의 플레이가 인정받은 것이었다. 후쿠모토는 이에 대해 "우연히 그때만 가장 좋은 플레이가 나왔다"고 말했다. 다른 저서에서는 1968년 여름 일본생명구장에서 열린 경기에 한큐 구단 매니저 야가타 가쓰히로와 스카우트 후지이 미치오가 가토를 시찰하러 왔을 때 "덤으로" 리스트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한큐 외에 접촉이 있었던 것은 긴테쓰 버펄로스 스카우트가 "혹시 몰라" 주소와 전화번호를 물어본 것 (그 이후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고 한다)과, 도시 대항 야구 출전 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다마가와 그라운드에서 연습했을 때 요미우리 스카우트가 "자네는 좋은 선수지만 아쉽네. 키가 5cm만 더 컸으면..."이라고 말하고 돌아간 일뿐이었다고 기록했다.
본인은 스카우트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드래프트 지명 사실을 전혀 몰랐고, 다음날 아침 회사 선배가 스포츠 신문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뭐 재밌는 거 실렸나요?"라고 묻자 "재밌는 거라니, 자네 지명됐다네"라는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지명된 것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드래프트 지명 후에도 한큐에서 연락이 오지 않은 채 며칠이 지나자 동료들도 본인도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사실 한큐는 마쓰시타 전기에 여러 번 연락을 취했지만, 후쿠모토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마쓰시타 측이 한큐의 면담 요청을 모두 거절했고, 한편 후쿠모토에게는 "자네는 작아서 프로에 가봤자 무리다"라며 프로 입단을 단념하도록 권유했던 것이 진실이었다. 이를 알게 된 후쿠모토가 "한 번만 이야기라도 들어보게 해주세요"라고 마쓰시타에 간청하여 한큐와의 면담이 성사되었다고 한다.
겨우 면담이 성사된 한큐 구단 직원으로부터 고기 요리를 대접받았고, "프로가 되면 이렇게 맛있는 고기를 먹을 수 있나!"라고 생각했지만, 여러 이유로 태도를 보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번 식사 초대를 받으면서 거절하기 어려워졌다고 한다. 결국 4번째 식사 때 입단을 결심했다. 처음에는 계약금 500.00 만 JPY, 연봉 15.00 만 JPY의 조건을 제시받았으나, 마쓰시타 전기에서는 "조금 너무 싸니 프로 입단은 그만두라"는 의견이 많았고, 급여와 상여금이 매년 오르고 있었던 점 (당시 월급은 2.80 만 JPY였다고 한다)을 협상에서 전달하자, 계약금 75.00 만 JPY, 연봉 18.00 만 JPY의 조건으로 변경되어 계약했다.
이러한 경위로 후쿠모토는 "마쓰시타 전기에 가토가 있었던 덕분에 나도 한큐 브레이브스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고 저서에 기록했다. 당시 후쿠모토의 아버지는 긴키 닛폰 철도의 사원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후쿠모토의 한큐 입단이 결정되자 "아들이 라이벌 관계가 될 긴테쓰에게 미안하다"며 퇴직하고, 한큐 다카라즈카 본선 쇼나이역 근처에 라면 가게를 열었다고 한다. 그의 부인은 야구에 대한 흥미가 없어 후쿠모토가 야구 선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후쿠모토도 부인에게 "마쓰시타에서 한큐로 전직한다"는 말밖에 설명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부인은 후쿠모토가 한큐 전철의 역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각 역을 찾아 헤매던 중 역무원으로부터 "혹시 당신이 찾고 있는 것은 도루왕 후쿠모토인가요?"라는 말을 듣고서야 야구 선수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고 한다.
2.2. 선수 생활
프로 입단 초기에는 전혀 기대를 받지 못했으며, 한큐 선배들에게 "그 몸 (작고 비실비실한)으로 잘도 왔네. 누가 스카우트했어, 이런 애를 뽑으면 불쌍하잖아"라는 혹평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입단 첫 해인 1969년부터 1군에 출전했다. 첫 출전은 1969년 4월 12일 개막전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으로, 나가이케 도쿠지의 대주자로 도루를 시도했으나 미야자키 쇼지와 스즈키 노리오 배터리에게 도루를 저지당했다. 다음날 같은 카드 더블헤더 2차전에서 프랜시스 애그윌리의 대주자로 기용되었을 때, 사쿠라이 겐과 다네모 마사유키 배터리로부터 프로 첫 도루를 기록했다. 다네모는 훗날 1972년 트레이드로 한큐에 입단하여 후쿠모토는 "인연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1969년 4월 20일에는 대 난카이 호크스 3차전에서 1번 중견수로 선발 출장하여 프로 첫 선발 출장을 기록했으며, 같은 경기 5회말에는 이즈미 요시로로부터 우익 선상 2루타를 쳐내며 프로 첫 안타를 기록했다. 1969년 10월 9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25차전에서는 모리야스 도시아키로부터 2점 홈런을 쳐내며 프로 첫 홈런과 첫 타점을 기록했다. 이 때문에 프로 데뷔는 허리 부상 치료를 기다려 8월에 입단한 야마다나, 첫 해 2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가토 (1969년 공식전 출장 9경기)보다 빨랐다. 하지만 올스타전 전에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으로부터 "한 번 2군에 가서 도루 연습이라도 하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2군에서는 오로지 타격 연습 (기숙사에서도 "나무 잎 끝에 배트를 맞히는 스윙"을 했다고 한다)에 매진했다. 입단 초 후쿠모토는 주변의 높은 수준을 보고 "나는 (드래프트) 7순위로 그렇게 기대받지 못한다. 3년만 참고 그럭저럭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프로 야구를 포기하자"고 생각했다. 1969년 10월에는 오쿠마 다다요시가 좌익수로 이동하면서 그 후임으로 중견수에 기용되었다.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도 출전했다.
1970년에는 개막 직후부터 1번 타자로 자리 잡았고, 같은 해 규정 타석 (12위, 타율 .274)에도 도달, 75도루를 기록하며 첫 도루왕을 획득했다. 2년차에는 힘 있는 타구를 날릴 수 있게 되어 홈런도 8개를 기록했다. 2년차 캠프 때 몰라보게 달라진 스윙을 본 니시모토 감독이 "누구한테 배웠냐?"고 묻자, "아니에요, 감독님이죠. 감독님 말씀대로 스윙 연습을 했더니 이렇게 됐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1972년부터 등번호를 7번으로 변경했고, 같은 해 타율 .301 (리그 5위)로 첫 3할을 넘겼다.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유일한 세 자릿수, 달성 당시에는 MLB 기록 (모리 윌스의 104도루)도 깨는 시즌 106도루를 기록하며, 사상 최초로 MVP와 도루왕을 동시 석권했다. 이 기록은 2년 후인 1974년 루 브록 (118도루)에 의해 경신되었고, 현재는 리키 헨더슨이 1982년에 기록한 130도루가 최고 기록이다. 1974년에는 하리모토 이사오, 돈 뷰포드와 수위 타자를 다투며 리그 3위의 타율 .327을 기록했다.
1975년 한큐는 플레이오프를 제패하며 3년 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일본 시리즈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를 꺾고 처음으로 일본 챔피언이 되었다. 1975년 5월 14일에는 통산 450도루를, 9월 21일에는 통산 500도루를 달성했다.
1977년 5월 15일, 오사카 구장에서 열린 대 난카이 호크스전에서 모리구치 마스미쓰로부터 안타를 쳐내며 정확히 100번째로 1,000안타를 달성했다. 7월 6일 대 난카이 호크스전 (니시노미야 구장) 4회에 2루 도루에 성공하며 당시 히로세 요시노리가 보유했던 통산 최다 도루 일본 기록 (596개)을 경신했다. (이때 히로세는 중견수 수비 중이었고, 그라운드에서 기록 경신을 목격했다.) 기록 경신 후 후쿠모토는 2루에서 견제사했다. 1977년 7월 19일에는 통산 600도루를, 8월 5일에는 통산 1,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그 후에도 1982년까지 13년 연속으로 도루왕을 획득했다. 처음 도루왕을 획득한 후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벤치에서 도루 지시 (사인)가 나오지 않게 되었고, 후쿠모토의 판단으로 뛸 수 있게 되었다 (이른바 그린라이트). 출루하면 "자동적으로 2루타와 같은 의미"를 가졌고, 가토 히데지는 "삼진만 안 당하면 어떤 형태로든 3루에서" 득점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1976년 6월 20일 대 난카이 더블헤더에서는 두 경기 모두 1회에 "볼넷 출루 → 2루 도루 → 희생 번트로 3루 진루 → 가토의 내야 플라이로 득점"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후쿠모토 자신은 이 기록에 대해 어떤 아나운서로부터 듣기 전까지는 "솔직히 말해 잊고 있었다"고 했지만, "상대가 틈을 보이면 하나라도 앞 루를 차지하려 했다"는 자신의 의식은 명확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후쿠모토는 1971년부터 8년간 6번의 리그 우승, 그리고 3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한큐가 처음으로 요미우리를 이긴 1976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타율 .407 (11안타), 2홈런으로 시리즈 MVP에 선정되었다. 후쿠모토는 이 수상에 대해 최종전에서 승리한 아다치 미쓰히로나 자신과 같은 11안타에 4도루를 성공시킨 버니 윌리엄스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고 기록했다. 1977년 일본 시리즈 2차전에서는 1회에 볼넷으로 출루하자마자 도루와 두 번의 내야 땅볼로 노히트 선취점을 올렸으며, 저서에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공식전에서 해왔던 평상복 야구"라고 기록했다.
1978년 6월 7일에는 통산 650도루를 달성했다. 1978년에는 타율 .325를 기록하며 사사키 교스케에 이어 리그 2위를 차지했다. 1980년에는 당시 퍼시픽 리그 기록인 시즌 112득점을 수립했다 (1964년 히로세 요시노리의 리그 기록을 경신, 1985년 오치아이 히로미쓰가 다시 경신). 1979년 4월 10일에는 통산 700도루를, 4월 22일에는 통산 100홈런을, 9월 11일에는 통산 750도루를 달성했다. 1980년 6월 6일에는 통산 1,500안타를, 9월 13일에는 통산 800도루를 달성했다. 1981년 7월 11일에는 통산 1,500경기 출장을, 8월 26일에는 통산 850도루를, 9월 21일에는 통산 300 2루타를 기록했다. 1982년 4월 16일에는 통산 150홈런을, 8월 6일에는 통산 900도루를 달성했다.
1983년 6월 3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전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9회에 3루 도루를 성공시키며 당시 루 브록이 보유했던 MLB 기록을 넘어서는 통산 939도루를 기록했다. 1983년 6월 25일에는 통산 3,000루타를, 7월 3일에는 통산 350 2루타를, 8월 2일에는 통산 950도루를 달성했다. 후쿠모토는 신기록을 홈구장인 "니시노미야 구장의 접전 경기에서 만들겠다"고 다짐했고, 구단에서도 "니시노미야에서의 달성"을 요구했다. 경기는 이미 큰 점수 차로 뒤지고 있어 뛸 생각도 없었지만, 세이부의 유격수 이시게 히로미치가 계속 견제 베이스 커버에 들어오자 "그만 화가 나서" 뛰었다고 한다. 후쿠모토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무거운 세계 기록이 되어버렸다"고 기록했다. 기록을 달성한 순간, 그 구장에서는 처음으로 세이부 외의 선수를 축하하기 위한 불꽃이 터졌다.
도루 MLB 기록을 넘어선 후, 당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로부터 국민영예상을 제안받았으나 고사했다. 이때 "서서 오줌도 못 누게 된다"고 말했다고 보도되었다. 2021년 인터뷰에서는 기자와의 잡담에서 나온 말이었다고 밝혔다. 진정한 의도로는 상의 첫 수상자였던 오 사다하루와 같은 "야구인의 모범"이 될 자신이 없었고, 마작이나 흡연도 즐겼기에 다른 수상자들에게 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2013년 취재에서 밝혔다. 2021년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이유를 들며 "지금도 안 받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생존 인물이 수상을 고사한 것은 후쿠모토가 처음이었고, 2021년 현재 이치로와 오타니 쇼헤이를 포함해 3명뿐이다.) 다만 오사카부 지사 표창 (현 감동 오사카 대상)은 받아 기시 아키라 오사카부 지사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오사카부 지사 표창은 오사카 시민 영예상에 해당하는 상으로, 시민의 영예와 기쁨을 기리며 수여되는 말이다. 훗날 하시모토 도루 지사가 감동 오사카 대상으로 개명했다. 후쿠모토는 이 상의 첫 수상자이다.) 또한 기록 달성을 기념하여 특례에 의한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 입회가 인정되었으나 이 역시 고사했고, 같은 해 9월 1일 대 롯데 오리온스전에서 다무라 이사오로부터 중전 안타를 쳐내며 역대 17번째로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여 정식으로 입회했다.
이 시즌의 도루는 55개에 그쳐 60도루를 기록한 오이시 다이지로 (긴테쓰)에게 13년 연속 도루왕 기록을 저지당했다. 후쿠모토에 따르면 939도루 달성 전 "힘들었다"는 점과 오이시가 자신과 같은 유형의 선수이며 "니시모토 감독의 제자"이기도 하기에 "이제 못 뛰겠으니 (타이틀을) 너에게 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연속 기록에 "집착은 없었다"고 했지만, 상대가 오이시가 아니었다면 "분명 14년 연속을 목표로 열심히 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1984년 8월 7일에는 1,000도루에 도달했다. 그 후 기록을 1,065개까지 늘렸다. 1,000도루를 넘긴 후에는 생일 (11월 7일)에 맞춰 통산 1,107도루를 개인적인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1985년 6월 12일에는 통산 2,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1985년에는 37세의 나이로 경력 최고인 95볼넷을 얻어 리그 2위를 기록했다. 같은 시기부터 좌익수를 맡는 기회가 늘었고, 더그아웃에서 도루 사인이 나오기 시작했다. 1986년 5월 9일에는 통산 3,500루타를, 6월 7일에는 통산 1,050도루를, 6월 12일에는 통산 400 2루타를, 8월 17일에는 통산 200홈런을, 10월 10일에는 통산 1,000삼진을 기록했다.
1987년 4월 18일 대 롯데전 (가와사키 구장, 선발 야마다 히사시)에서 사토 겐이치의 라인 드라이브를 무리하게 잡으려다 오른쪽 어깨를 탈구했다. 응급실 진단은 "전치 2개월"이었지만, 단골 정골사 (아이치현 거주)에게 "맡겨서 안 되면 은퇴하겠다"는 각오로 이틀에 한 번씩 진찰을 받아 2주 만에 복귀했다. 후쿠모토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큰 부상 이탈이었다. (그 이전에는 1971년 5월 22일 오른쪽 발목을 삐어 9경기 결장, 1973년 6월 8일 타격 연습 중 오른쪽 무릎을 삐어 5경기 결장한 적이 있다.) 이 해 올스타전에는 감독 추천으로 출전, 도루를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에 대해 "모르는 사이에 발이 움직이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것이 후쿠모토가 출전한 마지막 올스타전이었다.
1988년 시즌에는 선발 출장이 23경기에 그쳤고, 출장 경기 수도 92경기로 줄었다 (주로 후쿠라 준이치, 댈러스 윌리엄스 등이 1번 타자를 맡았다). 그럼에도 후쿠모토는 현역 생활을 계속할 의사가 있었고, 야마다가 은퇴를 선언 (10월 10일)한 지 며칠 후, 센리 한큐 호텔에서 우에다 도시하루 감독과 구단 상무 야가타 가쓰히로에게 불려 면담했을 때 이를 "전달했다고 생각했다"고 했지만, 그 자리에 기자가 왔을 때 야가타의 지시로 테이블 밑에 숨었다고 한다. 후쿠모토는 나중에 "신문 기자들 앞에서 의사를 분명히 말했어야 했다"고 기록했다. 시즌 종료 직전인 10월 19일, 브레이브스가 오리엔트 리스에 매각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훗날 후쿠모토의 회상에 따르면, 그날은 다음 시즌 신분을 선수 겸 코치와 전임 코치 중 어느 것으로 할지 구단으로부터 답변을 들을 예정이었으나, 매각으로 인해 백지화되었다고 한다. 한큐 구단이 제작한 1989년 달력에는 1월 부분에 "외야수"로 타석에 선 후쿠모토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10월 23일, 한큐 브레이브스로서의 니시노미야 구장 최종전이 있었고, 경기 후 인사에서 우에다 감독이 "떠나는 야마다 히사시, 그리고 남을 후쿠모토"라고 말하려던 것을 실수로 "떠나는 야마다, 그리고 후쿠모토"라고 말해 팀뿐만 아니라 팬과 언론을 아우르는 대소동으로 발전했다. 후쿠모토는 쇄도하는 언론 앞에서 "우에다 감독이 말했다면 그만두겠습니다"라고 말하며 40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후쿠모토는 2021년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올린 영상에서, 우에다 감독이 몇 년 만에 지방 구장에 와서 지난 경기에서의 실책을 그 자리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거나, 주례를 맡은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의 이력을 종이도 보지 않고 막힘없이 읽는 것을 본 경험을 들어, 우에다가 "말실수"를 했을 리 없다고 말했다. 일찍부터 은퇴를 시사했던 야마다와 달리, 갑자기 은퇴를 결정한 후쿠모토는 (은퇴 경기도 없이 그만두었기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냉정한 녀석"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훗날 이 일에 대해 "은퇴를 취소하는 것이 귀찮았다"고도, "체력적으로는 3년은 더 할 수 있었다"고도 말했다. 또한 『베이스볼 매거진』 등 일부 언론에서는 전날 코치 제의를 받고 한큐도 없어지는 상황에서 은퇴를 결심했다고 보도했다. 『주간 베이스볼』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처음에는 자유 계약을 희망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임의 은퇴 형태로 (혹은 강제로) 은퇴하게 되었고, 그렇다면 코치 겸임을 희망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결국 지인의 조언으로 은퇴를 결심했다. 한때 한신 타이거스로의 이적도 생각했다고 한다. 2021년 인터뷰에서는 우에다가 "머리 좋은 사람"이라 "말실수는 없었다"고 말하는 한편, "노무라 가쓰야처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하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다"고 은퇴에 대해 이야기했다. 현역 말년의 후쿠모토는 도루 수가 극단적으로 줄었는데, 이는 출루해도 "기다려라"라는 사인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며, 이것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혀 은퇴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1989년 3월 12일 은퇴 경기 (대 요미우리 시범 경기·니시노미야 구장)에서는 야마다와 함께 한큐 유니폼을 입고 출전하여 고다 이사오와 대결했다. 그 후 코치로 활동할 오릭스 브레이브스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베이스 코치를 담당했다.
2.3. 주요 기록 및 업적
후쿠모토 유타카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에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의 통산 1,065도루는 NPB 역대 1위이자 세계 2위 기록이며, 통산 115개의 3루타와 통산 299개의 도루실패 역시 NPB 역대 1위이다. 시즌 최다 도루 기록은 1972년의 106개로 NPB 역사상 유일한 세 자릿수 기록이다. 1경기 최다 5도루 (1972년 5월 3일)는 퍼시픽 리그 기록이며, 11경기 연속 도루를 두 번 (1971년, 1974년) 기록했다. 1980년 6월 19일에는 1경기 3도루 실패로 타이 기록을 세웠다.
그는 13차례의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이는 NPB 최다 기록이자 13년 연속으로 가장 긴 연속 기록이다. 또한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12차례 수상하여 이 역시 NPB 최다 기록이자 12년 연속 수상 기록이다. 14년 연속 시즌 50도루 이상을 기록하며 꾸준함을 보여주었다 (1970년~1983년).
타격에서는 통산 2,543안타, 208홈런, 449개의 2루타를 기록했다. 통산 2루타는 역대 2위 기록이며, 퍼시픽 리그 기록이다. 통산 타율은 .291로 8,000타수 이상 선수 중 역대 4위이다. 특히 1회 선두 타자 홈런을 통산 43개 기록하여 이 역시 일본 기록이다 (1회초 24개는 일본 타이 기록, 1회말 19개는 퍼시픽 리그 기록). 통산 2루타와 3루타를 합친 수는 564개로 역대 1위이다. 시즌 20 2루타 이상을 14회 기록했으며, 시즌 3루타 리그 1위를 8회 (1971년, 1973년, 1974년, 1977년 ~ 1979년, 1982년, 1983년) 달성했고, 3년 연속 시즌 3루타 리그 1위 (1977년 ~ 1979년)는 타이 기록이다. 2년 이상 연속 최다 3루타는 3번으로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유일하다.
수비에서는 통산 외야수 척살 5,102개와 통산 외야수 수비 기회 5,272차례를 기록하여 모두 NPB 역대 1위이다.
그 외 주요 기록으로는 통산 1,656득점 (퍼시픽 리그 기록), 시즌 득점 리그 1위 10회 (1972년 ~ 1980년, 1982년), 9년 연속 시즌 득점 리그 1위 (1972년 ~ 1980년), 시즌 100득점 이상 4회 (1973년, 1978년 ~ 1980년), 3년 연속 시즌 100득점 이상 (1978년 ~ 1980년)이 있다. 또한 17년 연속 규정 타석 도달 (퍼시픽 리그 타이 기록), 8차례의 시즌 전 경기 출장 (퍼시픽 리그 타이 기록), 시즌 100안타 이상 18회 (1970년 ~ 1987년), 18년 연속 시즌 100안타 이상, 한큐/오릭스 프랜차이즈 선수 중 유일하게 2,000안타와 2,000경기 출장을 달성한 점 등이 있다. 통산 맹타상은 178회로 역대 5위이며, 통산 도루 성공률은 .781 (1,065도루 성공, 299도루 실패)로 300도루 이상 선수 중 역대 4위이다. 사이클링 히트를 1회 (1981년 5월 21일) 기록했고, 30경기 연속 안타 (1977년)와 2경기 연속 1회 선두 타자 홈런 (1980년) 기록도 가지고 있다. 시즌 볼넷 리그 1위는 6회 (1976년, 1978년 ~ 1980년, 1982년, 1983년)로, 2년 이상 연속 최다 볼넷은 2번으로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유일하다. 동일 구장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1,000안타를 기록했다.
일본 시리즈 통산 도루는 14개로 역대 1위이며, 올스타전 통산 도루 17개, 통산 득점 26개도 모두 역대 1위 기록이다. 올스타전 9연속 도루 성공 (1976년 2차전 ~ 1979년 1차전) 기록도 가지고 있다.
2.4. 수상 경력
후쿠모토 유타카는 선수 시절 수많은 영예를 안았다.
- 최우수 선수 (MVP): 1회 (1972년)
- 베스트 나인: 10회 (1972년 ~ 1974년, 1976년 ~ 1982년)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12회 (1972년 ~ 1983년)
-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02년)
- 일본 시리즈 MVP: 1회 (1976년)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2회 (1977년, 1984년)
- 일본 시리즈 타격상: 1회 (1976년)
- 일본 시리즈 기능상: 1회 (1975년)
- 올스타전 MVP: 3회 (1973년 2차전, 1974년 2차전, 1982년 1차전)
- 정규 시즌, 올스타전, 일본 시리즈 MVP를 모두 석권한 것은 가와카미 데쓰하루, 오시타 히로시에 이어 프로 야구 역대 3번째 기록이다 (후에 토마스 오말리, 후루타 아쓰야, 마쓰이 히데키, 우치카와 세이이치, 아베 신노스케도 달성).
- 효고현 스포츠 우수 선수 특별상: 1회 (1988년) - 세계 신기록인 1,065도루를 기려 수여되었다.
2.5. 은퇴
1988년 10월 23일, 한큐 브레이브스의 니시노미야 구장 최종전이 끝나고, 우에다 도시하루 감독이 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떠나는 야마다 히사시, 그리고 남을 후쿠모토"라고 말하려던 것을 실수로 "떠나는 야마다, 그리고 후쿠모토"라고 말해 큰 해프닝이 발생했다. 후쿠모토는 이에 대해 "우에다 감독이 말했다면 그만두겠다"고 말하며 40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는 은퇴 경기도 없이 갑작스럽게 은퇴하여 주변으로부터 "냉정한 녀석"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훗날 후쿠모토는 당시 은퇴 결정에 대해 "은퇴를 취소하는 것이 귀찮았다"고 말하거나, "체력적으로는 3년은 더 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또한 처음에는 자유 계약을 희망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임의 은퇴 형태로 은퇴하게 되었고, 코치 겸임을 희망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밝혔다. 결국 지인의 조언으로 은퇴를 결심했으며, 한때 한신 타이거스로의 이적도 고려했다고 한다. 2021년 인터뷰에서는 우에다 감독이 "머리 좋은 사람"이라 "말실수는 없었다"고 말하는 한편, "노무라 가쓰야처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하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다"고 은퇴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현역 말년, 후쿠모토의 도루 수가 극단적으로 줄어든 것은 출루해도 "기다려라"라는 사인이 나왔기 때문이며, 이것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혀 은퇴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은퇴 이듬해인 1989년 3월 12일 시범 경기 (대 요미우리, 니시노미야 구장)에서는 야마다와 함께 한큐 유니폼을 입고 타석에 들어서 고다 이사오와 대결했다. 그 후 코치로 활동할 오릭스 브레이브스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베이스 코치를 담당했다.
3. 선수로서의 특징
후쿠모토 유타카는 독보적인 도루술, 꾸준한 타격 능력, 그리고 넓은 수비 범위를 바탕으로 일본 야구사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상대 팀의 전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3.1. 도루술
후쿠모토는 루키 시절 한큐 전철에서 파견된 아사이 기요시 (1964년 도쿄 올림픽 400미터 릴레이 대표, 매니저 겸 트레이닝 코치)에게 지도를 받아 팔이 흔들리지 않는 주법을 배웠다고 기록했다. 그의 발은 팀 내에서 가장 빠른 것은 아니었지만, 주루 시 좌우 보폭이 일정하고 옆으로 벌어지지 않는 육상 단거리 선수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달리기 방식이었다고 발자취를 담은 영상으로 검증되기도 했다. 첫 도루왕 타이틀에 대해서는 "단순히 기세로 얻은 것"이라고 말했다.
타격 능력이 향상되고 주전으로 자리 잡았지만, 출루해도 도루 타이밍을 전혀 알지 못해 견제사, 도루 실패를 반복했다. 결과에 따라 3년 만에 프로 야구를 그만둘 가능성도 있었기에, 자신이 프로에 있었다는 증거를 남기고자 친구 (고교 야구 동료)에게 8mm 카메라로 경기를 촬영해 달라고 부탁했다. 1969년 오프 시즌에 집에서 그 영상을 빨리 감기로 보다가 투수들의 개성이 보였다고 한다. 이를 실전에서 확인한 것은 3년차 시즌이었다. 후쿠모토는 "상대 투수의 버릇이 아니라, 나는 투구 리듬을 훔쳤다"고 기록했다. 이를 통해 도루를 시도할 타이밍을 잡았다. 이 연구가 인정되어 이후 필름 촬영은 구단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긴테쓰의 진보 도시야와 스즈키 게이시 두 투수만은 좀처럼 특징을 파악할 수 없어 여러 번 필름을 돌려봤다. 진보는 축발 (발뒤꿈치가 몇 밀리미터 들리면 투구), 스즈키는 얼굴 (턱이 내려가면 견제, 주자를 한 번 보면 투구)에 "버릇"이 있다는 것을 마침내 발견하여 두 투수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히가시오 오사무는 투구 시 왼쪽 어깨가 홈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간파하여 "처음에는 모션을 훔치기 쉬웠다"고 말했다. 1972년 오프 시즌, 미즈노가 주최한 자문 스태프와의 간담회에서 히가시오의 부탁으로 "바로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이 "버릇"을 알려주었다. 다음 시즌이 되자 히가시오는 그 점을 수정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부러 왼쪽 어깨를 흘리면서 견제구를 던지는 "보크 직전"의 방법도 섞어 사용했다. 히가시오는 캠프에서 심판들을 모아 "어깨가 들어가지 않았다"고 어필했고, 후쿠모토는 루에 나가면 심판에게 히가시오의 왼쪽 어깨에 주의해달라고 부탁하는 공방도 펼쳤다.
도루의 3요소로 불리는 '3S', 즉 스타트, 스피드, 슬라이딩 중 스타트는 이와 같은 철저한 투수 버릇 연구로, 스피드는 천부적인 준족과 젊은 시절의 폼 교정으로 연마되었다. 남은 슬라이딩에 대해서는 발끝부터 부드럽게 베이스에 닿는 슬라이딩을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고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스피드를 죽이지 않고 발에 부담도 적은 슬라이딩이었다.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은 부상 위험이 높다고 싫어하여 거의 하지 않았다.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은퇴 후에도 여러 번 해설에서 언급했다. 또한 야수를 피하는 슬라이딩을 고교 시절 시도하다 염좌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포수로부터의 송구를 피하지 않고, 베이스 정면에서 왼발을 뻗고 오른발을 접어들어 돌진하는 스트레이트 슬라이딩만 했다.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단호히 거부하고, 팀 동료들에게도 이를 지키도록 당부하는 태도였지만, 한때 팀 동료였던 다카하시 요시히코는 "우리 수준에서는 역시 손부터 돌아가지 않으면 리드를 잡을 수 없다"며 기술적으로 후쿠모토의 조언을 지키기 어려웠던 사정을 설명했다.
스파이크도 특주품으로, 평소 신발 사이즈 (25 cm)보다 작은 24.5 cm를 사용했으며, 400 g 미만으로 매우 가볍게 제작되었다. 또한 팀 동료였던 마쓰나가 히로미에 따르면, 이빨의 위치나 개수, 길이가 다른 스파이크를 여러 개 소지하고 구장의 흙 질에 맞춰 바꿔 사용했다고 한다.
후쿠모토의 도루에는 뛰어난 2번 타자의 존재도 컸다. 후쿠모토 자신은 "유능한 서포터가 없으면 도루는 하나도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사카모토 도시조, 이어서 오쿠마 다다요시가 그 역할을 맡았다. 오쿠마는 타석에서 후쿠모토를 보면서 파울볼이나 헛스윙을 하는 등 교묘한 어시스트를 했다. 1975년 시즌, 도루를 노리고 1루에서 좋은 스타트를 끊었음에도 오쿠마가 그 투구를 파울로 만들자 "놓아줬으면 2루는 쉽게 세이프였는데"라고 말했고, 이로 인해 오쿠마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화가 난 오쿠마의 제안으로 다음날부터 2번 타자가 윌리엄스로 바뀌었다. 윌리엄스는 직구를 치러 나갔기 때문에 후쿠모토는 일주일 내내 도루를 전혀 할 수 없었다. 어시스트가 없으면 뛸 수 없다고 사과하자 오쿠마는 원래의 2번으로 돌아와 주었다. 1978년부터는 미노다 고지가 두각을 나타냈는데, 미노다는 자신도 준족임을 활용하여 이 해부터 1983년까지 25도루 이상을 기록했다.
이처럼 후쿠모토의 도루술은 철저한 연구와 고도의 기술로 완성된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감함이라고 한다. 후쿠모토의 도루 성공률은 106도루를 기록한 1972년에 .809, 통산 .781로 우수하지만 압도적으로 높지는 않으며, 통산 도루실패 299개도 일본 기록이다. 또한 일본 시리즈 사상 최다인 한 시리즈 3도루실패 기록 (1984년 대 히로시마)도 가지고 있으며, 2018년 현재에도 1953년 요나미네 가나메 (요미우리), 2018년 다나카 고스케 (히로시마)와 함께 최다 기록 타이이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볼 때, 도루 수의 많음은 동시에 도루 시도 횟수의 많음을 나타내며, 과감함이 드러난다. 후쿠모토 이전의 통산 일본 기록 보유자였던 히로세 요시노리는 "이기기 위해 뛴다", "팀이 필요할 때 뛴다"는 자신의 자세와 (도루 기술 습득의 일환으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뛰어야 한다"는 후쿠모토의 생각을 비교하며 "나의 생각과 상반된다"고 하면서도, "경기 속에서 뛰는 것을 통해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도루 기술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내가 왈가왈부할 선수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후쿠모토는 히로세의 일본 기록을 경신했을 때 "스승님 (히로세)에게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다. 그중 하나는 나의 스타트가 완벽하지 않다. 결정적인 순간의 심리 상태도 미치지 못한다", "스승님 앞에서 기록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편, "의미 없는, 쓸데없는 도루" (후쿠모토가 시즌 일본 기록을 경신한 직후 계속해서 3루 도루를 성공시킨 것을 이렇게 평가했다고 전해졌다)라는 히로세의 말에 대해서는 "'쓸데없는 도루'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고 말했다.
1979년 올스타전 때, 역시 빠른 발을 주무기로 했던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다카하시 요시히코가 후쿠모토에게 도루술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자, 대답은 단 한마디 "기합이다"여서 당황했다고 한다 (참고로 다카하시는 역대 5위의 통산 477도루를 기록했지만, 후쿠모토에 이어 역대 2위의 통산 206도루실패를 기록했다). 또한 1차전 3회말, 안타로 출루한 후쿠모토는 곧바로 도루에 성공했고, 다카하시도 9회에 3루 도루에 성공했다.
노무라 가쓰야는 후쿠모토에 대해 "(우리가) 뛸 것이라고 생각하면 뛰지 않고, 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뛴다. 그 녀석에게 단련되었다"고 평가했다. (후쿠모토는 노무라가 마스크를 썼을 때 162번 도루를 시도하여 138번 성공, 24번 실패로 성공률 .852를 기록했다. 포수별로 봤을 때 시도 횟수와 성공 횟수 모두 노무라가 가장 많다.) 또한 호리우치 쓰네오는 "후쿠모토는 크로스 플레이도 능숙하다. 크로스 플레이 시 상대 포수가 베이스를 가리고 있으면, 상대방 다리의 관절을 스파이크 밑창으로 차는 것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다리가 움직여 가려져 있던 홈 베이스가 드러난다"고 말했다.
1972년 구단은 홍보를 위해 후쿠모토의 다리에 1.00 억 JPY의 보험을 들었다. 보험료는 25.00 만 JPY였고, 후쿠모토가 부상으로 플레이할 수 없게 되면 구단에 1.00 억 JPY가 지급되는 것이었다. 훗날 언급하겠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컨디션 관리, 부상 방지, 강인한 신체 만들기에 신경을 썼고, 무엇보다 "이렇게 돈을 들였으니 절대로 소중히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현역 시절 경기 중에는 한 번도 다리를 다치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경기 외에서의 다리 부상으로 인한 결장은 두 번 경험했다.) 보험은 3년 만에 중단되었다고 한다.
오쿠마는 후쿠모토의 도루 후 희생 번트나 땅볼을 쳐서 3루로 진루시켜 주었기 때문에, 후쿠모토는 홈으로 생환할 수 있는 기술도 연마했다. 허리를 숙인 자세로 타구가 헬멧의 챙 위아래 중 어느 쪽으로 갈지를 스타트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통산 1,065도루의 내역은 2루 도루 915개 (실패 265개), 3루 도루 149개 (실패 27개), 홈 도루 1개 (실패 6개)이다. 3루 도루에 대해서는 "2루에서 안타 하나로 홈에 들어갈 수 있는데,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도 없고, 2루 도루처럼 밀고 당기기도 없어서 재미없다"고 말했다. 한편 "3루 도루는 마크되지 않아서 쉽다"고도 말했다. 유일하게 성공한 홈 도루는 시즌 최다 도루를 기록한 1972년 7월 1일 대 긴테쓰전이었다. 이때 후쿠모토는 "좀처럼 없는 TV 중계가 있어서 노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홈 도루에서는 드물게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했는데, 경기 후 그 이유에 대해 "간발의 차이를 다투는 플레이. 손부터 가면 터치는 위에서 누르는 형태가 된다. 이쪽이 세이프 확률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홈 도루에 대해서는 타자가 배트를 휘두를 가능성 때문에 "정말 무섭다"고 저서에 기록했으며, 성공한 1회도 타석의 타자에게 사인을 보내지 않고 뛰었다고 한다.
후쿠모토 유타카의 도루에 대한 대책으로 퀵 모션이 적극적으로 사용된 것은 유명하며, 이를 주도한 것이 노무라 가쓰야였기 때문에 "노무라가 퀵 모션의 원안자"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가장 큰 계기를 만든 의미에서는 "후쿠모토가 퀵 모션을 만들었다"고 불리기도 한다.
3.1.1. 타 구단의 후쿠모토 대책
후쿠모토의 도루가 위협으로 인식되자, 각 구단은 본격적으로 대책 마련에 나섰다. 후쿠모토는 도루를 허용하는 것은 투수의 책임이 7할, 포수의 책임이 3할이라고 말했다.
- 롯데 오리온스
후쿠모토에 따르면, 방해책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팀은 롯데였다고 한다. 블로킹을 위해 야수의 발에 플라스틱 프로텍터를 장착시키거나, 홈구장이었던 미야기 구장의 주루로 (1루 앞과 2루 직전)에 물을 먹인 흙을 넣은 "모래밭"을 만들어 뛰기 어렵게 만들었다. (주루로에 모래를 넣어 부드럽게 하는 것은 일본생명구장이나 오사카 구장 등 다른 대전 팀의 구장에서도 이루어졌다고 후쿠모토는 말했다.) 그라운드 키퍼로부터 "후쿠모토 씨, 발 조심하세요"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후자에 대해서는 본래의 주루로 외 (베이스라인 안과 밖)를 달리는 "실험"을 하여, 안쪽으로는 견제구가 거의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투수로부터 보이는 각도의 차이), 두 가지 주루로를 번갈아 사용하는 방법을 익혔다고 한다. 또한 후쿠모토는 이이즈카 요시히로나 히로타 스미오, 아리토시 미치요 등 롯데의 준족 선수들도 이 때문에 뛰지 못하게 되어 "한큐보다 더 큰 손해를 본 것 같다"고 기록했다. (후쿠모토는 다른 저서에서 이 사실을 롯데 감독이었던 가네다 마사이치에게 직접 전했다고 말했다.)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1년 일본 시리즈 직전에는 마키노 시게루 코치의 발안으로, 견제구로 1루에 일부러 강한 악송구를 던져 1루 쪽 내야 펜스에 튀어 오른 공을 송구하여 2루에서 후쿠모토를 주루사시키는 연습을 반복했지만 실행되지는 않았다. 또한 모리 마사히코도 2루 베이스에 공을 맞히는 연습을 반복했다. 자신이 투수로부터 받은 공을 2루 베이스를 향해 송구하고, 2루수가 2루 베이스 위에서 포구한 곳에 후쿠모토의 발이 들어오는 형태로 보살하기 위함이었다 (후쿠모토의 경우 터치로는 아웃시키기 어렵다고 생각되었기 때문). 이 작전은 성공하여 일본 시리즈 1차전 9회말, 1루 주자였던 후쿠모토는 초구부터 도루를 시도했지만 2루 베이스 위에서 견제사했다 (후쿠모토가 슬라이딩한 곳은 송구를 받은 도이 쇼조의 글러브였다). 후쿠모토는 경기 후 "아웃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그거밖에 없었어요, 단 하나, 그 플레이로 한큐는 죽은 거나 다름없었죠. 바늘구멍을 통과시키지 못한 제 책임이 컸습니다"라고 말했다.
후쿠모토는 요미우리와의 일본 시리즈에서 발이 묶인 원인으로 "요미우리의 에이스 호리우치 쓰네오의 존재가 컸다"고 회고했다. 호리우치는 모리와 대책을 논의하며, 자신은 퀵 모션으로 던지고 견제도 할 테니 모리에게 2루에 정확히 던져달라고 부탁했고, 모리는 토스된 공을 2루에 던지는 연습을 반복했다. 또한 후쿠모토에 따르면 호리우치의 견제구는 "1구마다 타이밍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자신은 단기전의 압박감으로 경직되어 있었다고 한다. 후쿠모토는 호리우치를 "일본에서 가장 뛰기 어려운 투수", "퀵 모션도 견제도 잘하고, 버릇도 찾을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호리우치는 그 이유에 대해 무게 중심 이동이 좋고 세트 포지션에서 왼쪽 어깨를 1루 방향으로 약간 연 채로 홈으로 투구할 수 있었던 점을 들었다. 1971년 일본 시리즈에서 후쿠모토는 이후 한 번도 도루를 시도하지 못했다. 포수 모리도 젊은 시절 퀵 모션의 명수 호리모토 리쓰오 투수와 배터리를 이룬 경기에서, 1960년부터 1962년 3년 동안 저지율 .706 (51회 시도에 36회 도루 저지)이라는 경이적인 숫자를 남겼고, 특히 1960년 6월 1일 다이요전에서는 한 경기 5도루 저지 (시도된 5회 모두 저지)를 기록하는 등 퀵 모션의 유효성을 몸으로 알고 있었다. 참고로 요미우리 감독이 나가시마 시게오로 바뀌고 포수도 요시다 다카시로 바뀐 1977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2차전 1회에 호리우치의 퀵 모션을 피하고 도루에 성공했다.
- 난카이 호크스
노무라 가쓰야는 후쿠모토의 도루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후쿠모토를 이닝 선두 타자로 맞이하지 않기 위해 2사 주자 없는 상태에서 9번 투수를 볼넷으로 내보내고 1번 후쿠모토와 승부하는 책략 (당시 퍼시픽 리그는 아직 지명 타자 제도 도입 전이었다)이나, 후쿠모토가 2루 도루를 시도하면 2루에 일부러 원바운드 송구를 던져 다리에 맞히는 것도 생각했다. 그러나 전자는 한 번은 성공했지만, 두 번째에는 노림수가 들통나 한큐 감독 니시모토 유키오가 투수에게 도루를 시켰기 때문에 포수 노무라는 도루를 저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후자는 "다리에 공을 맞혀 부상시키려 했지만, 실제로는 등에 공이 맞아 (부상시키려는) 노림수가 들통나 크게 혼났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임시방편으로는 후쿠모토를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노무라는 근본적인 대책으로 퀵 모션 개량에 착수하여 코치진과 논의를 거듭한 끝에 발을 거의 들지 않고 던지는 "스리아시 퀵"을 고안했다. 후쿠모토는 이 난카이식 퀵 투구법에 대해 "모션 자체가 작고 빠른 것은 노무라 씨 때의 난카이가 처음이다. 발을 들고 던져주면 타이밍을 잡기 쉬운데, 거의 스리아시 상태로 던져온다. 과감하게 스타트를 끊어도 잡히는 경우가 늘었다"고 말했다. 난카이식 퀵 모션의 보급으로 투수 데이터가 "모두 백지화되었다"고 하며, 노무라가 없었다면 도루는 "1,500개를 넘었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2020년 2월 노무라가 사망했을 때, 후쿠모토는 (노무라의 대책이 자신의) "수준을 높여주었다", "젊은 시절에는 타석에서의 대화로 집중력을 흐트러뜨려 당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추모했다.
- 긴테쓰 버펄로스
나시다 마사타카는 2루 송구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후쿠모토가 출루하면 오른발을 반 보 뒤로 빼고 자세를 취했다고 한다. 한큐와 긴테쓰 경기 전, 후쿠모토와 나시다는 누가 이길지 내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후쿠모토는 특별한 버릇이 없는 투수조차도 버릇을 훔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아무리 강견인 나시다라도 후쿠모토가 이기는 경우가 많았다. 나시다는 위에서 언급한 자세 외에도, 포구부터 2루 송구까지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공을 미트의 손바닥 부분에 맞춰 튀어 오른 것을 오른손으로 잡고 던지거나,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2루에 정확히 던지는 훈련을 하거나, 당황하지 않도록 후쿠모토의 스타트를 보지 않고 벤치에서의 목소리로 송구하는 등의 대책을 거듭했다.
- 니시테쓰 라이온스
이나오 가즈히사 감독의 발안으로, 후쿠모토의 스타트가 어려워지도록 1루 베이스 부근이 질퍽해질 정도로 물을 뿌렸다.
3.2. 타격
도루뿐만 아니라 타격에서도 우수한 선수였음은 178회의 맹타상, 7번의 3할 타율, 2,500안타, 200홈런 달성, 그리고 8,000타수 이상 선수 중 역대 4위인 통산 타율 .291의 기록으로도 증명된다. 그러나 신인 시절에는 프로의 스피드에 밀려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었고, 후쿠모토는 타격 연습 시 3루 쪽으로 "대충 맞춰 도망치는" 타격을 반복했다. "발이 빠르니 3루 쪽으로 굴리면 내야 안타가 됩니다"라고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에게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니시모토는 "그런 쉬운 연습만 해서는 실력이 절대 늘지 않는다", "아무리 몸이 작아도 제대로 휘두르는 타격을 해야 한다. 오프 시즌에 배트를 제대로 휘두를 수 있는 몸을 만들지 않으면 주전으로 쓸 수 없다", "제대로 맞으면 홈런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프로에서는 오래가지 못한다"며 심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1970년에는 돈 블레이저가 "후쿠모토는 정말 아깝다. 그 발로 더 많은 유격수 땅볼을 치면 확실히 수위 타자가 될 수 있는데"라고 말한 기사를 보고, 세이프티 번트를 유격수 쪽으로 굴리는 연습을 했는데, 니시모토로부터 "그런 식으로 치면 너 대신 쇼가키나 도긴을 쓸 거야"라며 또다시 꾸중을 들었다.
후쿠모토는 프로 입단 초기부터 960~980g의 무거운 배트를 사용했다. 그 후 후지와라 미쓰루 (난카이)가 사용하던 지름이 굵은 "쓰치노코 배트"를 오쿠마 (긴키 대학에서 후지와라의 선배)가 구했고, 그중 하나를 모델로 미즈노에서 자신의 배트를 만들었다. 이 유형의 배트로 타격 연습을 하면 "코옹" 하고 좋은 소리가 나며 강하고 빠른 타구를 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후쿠모토는 "쓰치노코 배트"로 제대로 휘두르는 연습을 반복했다. 이때의 훈련이 효과를 발휘하여 작은 체격에도 불구하고 장타력도 붙어, 시즌 두 자릿수 홈런을 20년 동안 11번 기록 (최다 21홈런)했으며, 2007년 다카하시 요시노부에게 경신되기 전까지는 시즌 1회 선두 타자 홈런 일본 타이 기록 (1972년 8개) 보유자이기도 했다. (통산 43개는 현재도 일본 기록이다. 미일 통산에서는 이치로가 경신했다.) 이 전법은 훗날 준족 타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어 와카마쓰 쓰토무 (야쿠르트)와 오이시 다이지로 (긴테쓰) 등도 쓰치노코 배트를 애용했다. 1976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투수 야마구치 다카시와 야마다도 후쿠모토의 배트를 사용하여 안타를 쳤으며, 후쿠모토는 저서에서 이 배트라면 "투수라도 공을 맞히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쓰치노코 배트"의 무게는 처음에는 1,200g이었고, 10년차 무렵에 1,080g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야구 전당 박물관에 전시된 후쿠모토의 배트는 다른 타자들의 배트에 비해 굵고 짧고 무겁다.
도루에서는 투수의 버릇을 훔치는 데 몰두했던 후쿠모토지만, 타격은 자연스럽게 임했다고 한다. 오카자키 미쓰요 (『스포츠 그래픽 넘버』 초대 편집장)에게 "(버릇을 훔치는 연구를) 타격에도 활용하지 않았나요?"라고 질문받았을 때, "타격에서는 아무래도 잘 안 됐습니다. 버릇을 훔쳐서 구종 등을 읽을 수 있었던 덕분에 오히려 의욕이 앞서 폼이 무너져버리더군요"라고 답했다.
준족과 교타를 살린 플레이로 러닝 홈런도 4번 기록하여 일본 프로 야구 역대 3위 타이 기록이다. 통산 4회의 최다 안타는 1998년 이치로에게 추월되기 전까지 퍼시픽 리그 기록이었다. 2011년 현재 에노모토 기하치, 부머 웰스와 함께 퍼시픽 리그 역대 2위 기록이다. 또한 1977년에는 프로 야구 역대 4위 타이, 퍼시픽 리그 역대 3위인 30경기 연속 안타를 달성했다.
1985년에 3루타, 현역 마지막 해인 1988년에 2루타의 통산 기록을 경신하여 한때 도루와 함께 3개의 일본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중 2루타는 2005년 주니치의 다쓰나미 가즈요시에게 깨졌지만, 2017년 현재에도 퍼시픽 리그 기록이다. 다쓰나미는 기록 경신 시 "후쿠모토 씨의 발이 조금만 더 느렸다면 이 기록 경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일반적인 선수라면 3루타가 어렵고 2루타가 되는 타구도 3루타로 만들 수 있는 후쿠모토의 주루 능력의 높이를 의미한다. 통산 2루타와 3루타를 합친 수 (564개)는 역대 1위이다. 후쿠모토는 "스릴과 도전이라는 점에서 타자로서는 3루타가 가장 재미있다"고 기록했다. (나가시마 시게오도 3루타를 선호했다는 발언을 했다.) 2009년 저서에서는 자신이 현역 시절 좁은 구장에서 기록을 세운 것과 비교하여, 구장이 넓은 요즘 선수들이 3루타를 노리지 않는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200개 이상의 홈런도 기록했지만, 후쿠모토 자신은 "1번 타자의 임무는 출루이며, 홈런을 노리는 것은 이상하다. 풀카운트에 몰려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은데도 홈런을 노리는 것은 역시 이상하다"고 말하며, 홈런을 노리는 1번 타자가 많은 헤이세이 시대의 프로 야구 선수들에 대해 쓴소리를 했다. 다만 자신의 기록에 대해서는 작은 자신이 208개나 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내가 자랑하고 싶은" 숫자라고 말했다. 200개 이상의 통산 홈런을 기록한 것은 노무라 가쓰야로부터도 "네가!?"라며 놀림을 받는 등, 본인의 이미지와는 다른 것으로 프로 야구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인식되고 있다.
타격 트리플 크라운 타이틀과는 인연이 없었다. 1978년에는 시즌 후반까지 타율 선두를 지키며 수위 타자 가능성이 있었지만, 종반에 규정 타석을 채운 사사키 교스케 (긴테쓰)가 추월하여 타이틀을 놓쳤다. 후쿠모토는 사사키에 대해 "암행 순찰차처럼 나타났다"고 기록했다.
3.3. 수비
준족과 판단력은 수비에도 활용되었다. 사회인 시절부터 팔꿈치에 부상을 안고 있어 송구에 다소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를 보완하고도 남을 넓은 수비 범위를 자랑하며, 통산 수비 기회 5,272회, 통산 척살 5,102회는 2017년 현재에도 프로 야구 기록이다. 1974년 7월 22일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 2차전에서는 한신 다부치 고이치가 날린 홈런성 타구를 펜스 위로 기어올라 캐치하여 아웃시켰다. 이를 본 요미우리의 나가시마 시게오는 "마치 원숭이 같네"라고 평가했다. 물론 후쿠모토 자신은 "기본대로 공의 낙하점으로 일직선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어떤 외야수라도 할 수 있다"고 기록했다. (7년 후, 후쿠모토가 수비 연습을 도와준 야마모리 마사후미가 공식전 (9월 16일, 대 롯데전)에서 비슷한 플레이를 선보였고, 중견수에서 수비하던 후쿠모토는 자신의 플레이를 연상하며 "해냈다!"고 외쳤다고 한다.) 이 경기에서 그는 호수비 외에 홈런도 1개 쳐서 MVP를 수상했다.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현 골든 글러브상)을 역대 최다인 12회나 수상하는 등 '외야 수비의 명수'로 불리는 후쿠모토지만, 신인 시절 캠프에서는 수비 연습에서 만세를 반복하는 등 프로의 벽에 부딪혔던 시기가 있었다 (마쓰시타 전기 시절까지는 빠른 발로 제멋대로 판단하여 달려나가도 포구할 수 있었지만, 프로는 달랐다고 말했다). 니시모토 감독은 외야 수비와 타격을 담당하는 코치 나카타 마사히로 (현역 시절 홈런왕 획득)에게 "살아있는 타구를 익히게 해달라"며 후쿠모토 전용 노커가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후쿠모토는 빠르고 "갑자기 늘어나거나 휘어지는" 타구의 노크를 매일 200개 가까이 받으면서, 낙하점을 예상하여 그곳까지 직선적으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나카타는 상대 팀의 타격 연습을 관찰하여 타자별 타구 경향을 파악하는 것도 의무화했다. 이러한 나카타의 가르침과 연습, 경험의 축적으로 후쿠모토는 외야 수비의 명수로 성장했다. 다른 구단 야수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수비 범위가 넓었다"며 "중견수로 쳐도 안타가 안 된다"는 상황이었다.
어깨는 "어느 정도 자신 있었다" (1976년에는 중견수 앞에서 2루 주자를 4번이나 아웃시켰다)고 했지만, 프로 입단 후 약 10년차 무렵 캠프에서 무리한 송구를 하다 왼쪽 팔꿈치에 유리 연골을 일으켜, 송구에서의 제약을 유격수 오하시 조의 컷 플레이로 보완하게 되었다. ("한큐는 (백홈보다) 컷 플레이를 중시했다"고도 기록했다.) 현역 말년 (1984년 이후)에는 좌익수로 이동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강견·송구의 우열을 나타내는 지표인 보살 수를 보면, 통산 109보살 (2,293경기)을 기록했지만, 1보살당 경기 수를 강견 중견수로 평가가 높은 다른 중견수와 비교하면 상당히 떨어진다 (후쿠모토가 21.0인 반면, 예를 들어 야마모토 고지는 14.8이다).
현역 종반에는 좌익수를 맡았지만, 고교·사회인·프로 시절 중견수만 맡았기 때문에, 중견수보다 펜스가 정위치에서 가까운 점 등 중견수 경험칙이 통하지 않는 것에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본인은 "다른 (포지션)에 가면 서툴다"며 중견수 외의 포지션에는 적응하지 못했음을 자인했다. 후쿠모토는 오릭스에 대해 자신들 이후에도 야마모리 마사후미, 혼니시 아쓰히로, 다구치 소, 이치로 등 뛰어난 외야수들이 배출되었고, 수비 연습의 기초도 계승되었기 때문에 "선수들은 귀엽다"고 말했다.
3.4. 기록 등
후쿠모토 유타카는 17년 연속 규정 타석 도달 (퍼시픽 리그 타이 기록), 시즌 전 경기 출장 8회 (퍼시픽 리그 타이 기록)라는 두 가지 퍼시픽 리그 타이 기록을 가지고 있다. 또한 2017년 현재, 한큐·오릭스 프랜차이즈 선수로서 유일하게 2,000안타와 2,000경기 출장을 기록하고 있다. 한큐의 두터운 외야수 선수층 속에서 주전 자리를 잡을 무렵, 오쿠마 다다요시로부터 부상으로 쉬면 포지션을 빼앗긴다는 충고를 받았고, 작은 부상으로는 쉬지 않는 강인한 몸을 만드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오쿠마가 이 충고를 한 것은 『한큐 브레이브스 황금의 역사』의 야마다와의 대담에서는 "경기 중 사구를 맞았을 때", 『한큐 브레이브스 빛을 넘은 그림자』에서는 "프리 배팅 타구를 왼발에 맞았을 때"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전이었던 시절에도 풀 출장하지 않은 시즌이 여러 번 있지만, 후쿠모토에 따르면 우에다 도시하루 감독이 우승 후 젊은 선수들에게 교체하도록 요구하여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의식하지 않고) 출전 기회를 양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누가사 사치오의 연속 경기 출장 기록 (2,215경기)에는 경의를 표하면서도, 기록이 될 줄 알았다면 "반드시 도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쿠모토가 1973년 시즌 중 복귀부터 오른쪽 어깨 탈구 전인 1986년까지 전 경기에 출장했다면 1,769경기가 되어, 2018년 시즌 종료 시점에서 역대 3위에 해당한다.) 니시모토 감독 시절, 시즌 도루 기록을 경신한 1972년에는 우승 결정 후 "다치면 안 되니 쉬어라"라는 말을 듣고, 출전할 생각이었지만 결장했다고 한다.
통산 홈런은 208개로, 이는 일본 프로 야구 통산 안타수 베스트 10에 드는 선수들 (2017년 시즌 종료 시점 하리모토 이사오, 노무라 가쓰야, 오 사다하루, 가도타 히로미쓰, 기누가사 사치오, 후쿠모토, 가네모토 도모아키, 다쓰나미 가즈요시, 나가시마 시게오, 도이 마사히로 10명. MLB에서 활약한 이치로, 마쓰이 히데키, 마쓰이 가즈오 3명은 제외) 중에서는 다쓰나미 (171홈런)에 이어 가장 적다. 또한 시즌 20홈런에 도달한 것도 1980년의 1회뿐이다. 그러나 프로 1년차부터 최종년까지 홈런이 없었던 시즌은 한 번도 없다. 타격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한 적이 없는 선수 중 최다 안타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현역 시절 등번호 "7"은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준 영구 결번 대우를 받았지만, 은퇴 전후로 모회사가 한큐 전철에서 오릭스로 바뀌는 등의 이유로 정식 영구 결번은 되지 않았다. 1991년 드래프트 1순위로 입단한 다구치 소에게 등번호 7번이 제안되었지만, 다구치가 고사했다 (다구치의 등번호는 6번이 되었다). 또한 이치로도 시즌 210안타를 기록한 1994년 오프 시즌에 등번호 7번으로의 변경을 제안받았지만 고사했다. 2001년에는 본인 공인 하에 같은 해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에서 이적해 온 신도 다쓰야가 등번호 7번을 달았다. 신도가 은퇴한 후에는 히다카 쓰요시가 등번호 7번을 달았고, 2004년 구단이 긴테쓰와 합병하여 오릭스 버펄로스가 되면서 준 영구 결번 대우도 상실되었다. 야마다가 "7번과 (야마다의) 17번은 영구 결번으로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하자, 후쿠모토는 "그것과 (가토 에이지의) 10번. 이 세 개는 지금이라도 돌려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4. 지도자 및 해설가 시절
후쿠모토 유타카는 선수 은퇴 후 코치로서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서 팬들에게 깊이 있는 야구 지식을 전달하고 다양한 기타 활동을 통해 야구계에 지속적으로 기여했다.
4.1. 지도자 경력
은퇴 후 1989년에는 오릭스의 1군 타격 코치를 맡았고, 1990년부터 1991년까지 같은 구단의 2군 감독을 역임했다. 1989년에 이적해 온 가도타 히로미쓰를 "다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큰 존재"라는 이유로 맡게 되었지만, 동갑내기 현역 선수인 가도타를 보면서 "나도 야구를 계속하고 싶었는데..."라며 아쉬움이 커졌다고 회고했다.
1998년에는 한신 타이거스의 1군 타격 코치로 취임했다. 이는 요시다 요시오 감독으로부터 타격 코치로 초빙받았고, 젊은 선수들에게 타격을 가르치고 싶다는 오랜 희망이 이루어지는 것이었기에, 수비 주루 코치로 먼저 제안이 왔던 요미우리를 거절하고 수락한 것이었다. 그러나 노무라 가쓰야가 감독으로 부임한 이듬해인 1999년에는 1군 외야 수비·주루 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고, 그 해를 끝으로 퇴임했다.
4.2. 야구 해설 및 평론
1992년부터 1997년까지 6년간 아사히 방송 (현 아사히 방송 텔레비전)과 선 텔레비전의 야구 해설자를 맡았다. 2000년부터는 아사히 방송과 선 텔레비전의 야구 해설자, 스포츠 호치의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해설 스타일은 기술적인 설명을 요구받으면 "고옹", "카앙", "뱌앗" 등의 의음어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후쿠모토는 저서에서 "그 자리에서 떠오른 표현이라도 좋으니, 누구에게나 알기 쉬운 말로 툭툭 전달하고 싶다. 시청자들이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라고 맞장구쳐 줄 만한 방송을 하고 싶다"고 해설의 철학을 밝혔다.
아카호시 노리히로에 대해서는 종종 엄격한 평가를 내렸다. 물론 좋고 싫음으로 평가한 것이 아니라, 주루, 타격, 수비 모두에서 높은 수준의 플레이를 요구했던 표현이었으며, 특히 도루 및 외야 수비에 대해서는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었다. (후쿠모토는 아카호시의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이나 다이빙 캐치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달려 나가는 것이 더 빠르다", "부상 위험도 높아진다", "능숙한 외야수는 뛰어들지 않고 낙하점에서 정확히 잡는다"고 자주 발언했다.) 후쿠모토는 아카호시의 현역 말년 (2009년) 저서에서, 2루 베이스 근처에서 슬라이딩하는 아카호시는 발에 힘이 들어가기 쉽고, 목 부상도 있었던 점을 감안하여 "조만간 큰코다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20년에 자신이 보유했던 연속 경기 도루 기록을 경신한 슈토 우쿄에 대해서는 "슈토가 루에 나가면 나도 그라운드에 있는 것처럼 설렌다. 팬들의 기대대로 뛰어주고, 진정한 프로"라고 평가했다.
해설 중에는 독특한 발언을 하기도 한다. 1992년 5월 27일 선 텔레비전 박스석에서 중계된 한신 대 다이요전에서 투수전으로 0의 행진이 이어지자, 실황 아나운서 구스노키 준세이가 "후쿠모토 씨, 점수가 안 나네요?"라고 묻자 "타코야키 같네요"라고 답했다. 15회말 한신이 1점을 내며 끝내기 승리하자 "타코야키에 이쑤시개가 꽂혔네요"라고 말해 '타코야키 사건'으로 불리며 회자되었다. 구스노키 아나운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후쿠모토의 해설이 더욱 재밌어졌다고 평가했다. 또한 장시간 경기가 되었을 때 "가코가와 너머 사람들은 못 돌아가겠네"라고 발언하여 훗날 인터넷 밈이 되었고,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에는 "가코가와 사람"이 트위터 트렌드에 오르기도 했다. 선 텔레비전 박스석 전시회에서는 후쿠모토의 발언을 모은 "후쿠모토 유타카 명!?언집 보드"가 제작되기도 했다. 2008년 7월 29일 ABC 프레시업 베이스볼에서 진구에서 중계된 야쿠르트 대 한신전은 5회 종료 후 악천후로 경기가 중단되자, 2층 가설 방송석에서 들이닥치는 비를 피해 도망가는 디렉터에게 구스노키 준세이 아나운서와 함께 "너 혼자 도망가지 마!"라고 농담을 던졌다. 구스노키가 다른 구장 소식을 전하는 동안에도 "천둥이다, 천둥이야!"라고 소란을 피웠고, 구스노키가 "쓸데없는 업무 연락 그만두세요"라고 타박하자 "바보, 옷 젖잖아"라고 답했다. 방송석 주변에 관객들이 모인 가운데 "춥네~ 이런 일 없었으면 마작이나 하고 있었을 텐데~"라고 말하거나, 콜드 게임으로 한신이 이기자 승리 투수 라이언 보글슨을 "벌어들인 승리네"라고 평가하는 등, 구스노키 말로는 "즉흥 만담을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2021년 시즌 종료 후, 최근 NPB의 도루에 대해 "웃음이 나온다", "최소 40개는 해야 한다", "적다. 좀 더 뛰어야 한다. 경기 수는 140경기 (2021년은 143경기)나 되는데. 20몇 개 (로 도루왕)는... 혼나겠지만, 나는 한 달 만에 했다"며 24도루로 4명의 선수가 도루왕을 나눠 가진 2021년 시즌 퍼시픽 리그를 언급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4.2.1. 방송 및 저술 활동
후쿠모토 유타카는 선수 은퇴 후 다양한 방송 및 저술 활동을 통해 야구계에 기여했다.
- 방송 활동:**
- 현재:**
- 슈퍼 베이스볼 (아사히 방송 텔레비전 제작분 한신전 중계, BS아사히의 TV아사히 제작분에도 출연)
- 선 텔레비전 박스석 (선 텔레비전)
- ABC 프레시업 베이스볼 (아사히 방송 라디오)
- 오하요 아사히 도요비데스 (아사히 방송 텔레비전) - 2019년 2월부터 스포츠 코멘테이터로 출연. 과거 평일판 '오하요 아사히데스'에서도 스포츠 캐스터를 담당.
- 후쿠모토 유타카의 프로 야구 틀림없다! (선 텔레비전) - 비정기 방송.
- 오프시즌 한정:**
- 열혈!! 타이거스당 (선 텔레비전) - 2대 당수로 출연.
- 과거 TV:**
- 퀴즈! 신스케군 (아사히 방송) - 레귤러 해답자.
- 토라반 (아사히 방송) - 프로그램 시작부터 2012년까지 코멘테이터로 출연.
- 과거 라디오:**
- 다치하라 히로유키 소문의 다이얼 1008 (아사히 방송)
- 히루도키! 와이드 1008 (아사히 방송)
- 겐키 이치반!! 붓치기리 플레이볼 (아사히 방송) - 목요일 코멘테이터.
- 스포츠니 피탓토. → 다케다 와카코의 피탓토. 후반전 (아사히 방송) - 목요일 코멘테이터.
- 후쿠모토 유타카의 토라타마 디럭스! (아사히 방송 2015년 ~ 2017년) - 메인 진행자.
- 이토 후미타카의 라디오노오토 (아사히 방송 라디오) - 2018, 2019년 수요일 '토라반 파트너'.
- 현재:**
- 저술 활동:**
- 아사히 신문 오사카 본사 조간 "미오쓰쿠시 가타리쓰쿠시" (2013년 4월 6일 ~ 5월 18일 오사카판 연재, 총 30회)
- 선 텔레비전 홈페이지 "후쿠모토 당수의 열혈 블로그" (비정기 연재)
- 아사히 예능 "세계의 도루왕 후쿠모토 유타카 프로 야구 발공폭담!"
4.3. 기타 활동
후쿠모토 유타카는 유튜브 채널 "세계의 도루왕 후쿠모토 유타카 채널"을 운영하고 있으며 (2020년 12월 31일 개설, 2021년 1월 6일부터 활동), 한신 고시엔 구장 근처에 있는 베이스볼 바 "G.LOVE"의 오너를 맡고 있다 (현재 이 본점을 포함해 총 3개 점포를 운영). 가게 안에는 본인의 한큐 시절 유니폼이나 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의 좌석 등이 전시되어 있다. 2006년 1월부터는 한난 대학 야구부 특별 코치로 취임했다. 2007년에는 제5회 굿 에이저상을 수상했다.
현역 시절부터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했으며, 일본 신체장애자 야구 연맹의 명예 이사장도 맡고 있다. 2006년 1월부터는 한난 대학 야구부 특별 코치를 맡고 있다.
5. 개인사
후쿠모토 유타카는 야구 외적으로도 다양한 개인적인 일화와 사회 활동을 통해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팬 사랑을 보여주었다.
후쿠모토의 결혼 당시,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은 기용의 공정성 때문에 선수들의 주례를 서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후쿠모토는 먼저 주례로 니시모토의 이름이 적힌 청첩장을 인쇄한 뒤 "이미 모두에게 돌렸습니다"라고 니시모토에게 부탁하여 주례를 맡게 했다. (훗날 야마다와 가토도 니시모토가 주례를 맡았다.)
1983년 4월 30일, 대 긴테쓰전 경기 전에 범프 윌스와 함께 경주마 (징크 피어리스)와 경주하는 이벤트에 출전했다. 이 행사는 구단이 미노다 고지를 포함한 "쾌속 트리오 이벤트"라는 이름으로 선수들에게 타진하기 전에 언론에 발표했고, 미노다는 즉시 거절했으며 후쿠모토도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구단 사장으로부터 "공개한 이상 취소할 수 없다. 니시노미야 구장에 와줄 팬들을 위해서라도..."라는 부탁을 받고 "밤새 고민 끝에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후쿠모토는 "나는 옛날 사람이라, 구단에게는 다루기 쉬운 선수였던 것 같다"고 기록했다. "경주"는 징크 피어리스가 발을 헛디뎌 제대로 된 승부가 되지 못했고, 결과는 범프의 승리였다. 그럼에도 이 이벤트를 위해 니시노미야 스타디움에는 약 2만 8천 명의 관객이 찾아왔고, 그 자체는 "기뻤다"고 후쿠모토는 훗날 말했다.
또한 시즌 도루 MLB 기록 경신이 걸린 1972년 경기에서는 구단 영업팀으로부터 "도루 예고"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상대에게 미안하니 싫다"고 답했지만, 관객 서비스라고 생각하여 볼넷으로 출루했을 때 손을 들었다. 훗날 회상에서 "상대 포수에게 미안한 짓을 했다. 정말 실례되는 짓을 했고,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고 말했다.
1976년 일본 시리즈에서 한큐가 요미우리에 3연승을 거둔 후, 후쿠모토는 "긴테쓰나 롯데도 우리랑 세 경기 하면 하나는 이긴다"고 발언하여 자만심으로 비난을 받았다. 이후 요미우리에 3연패하며 역전패 직전까지 몰렸으나, 7차전에서 승리하며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후쿠모토는 훗날 이 발언에 대해 "말이 부족해서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롯데는 강했고, 나리타 후미오 같은 투수도 있었다. 그때까지 요미우리를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데 '약하다'고 말할 리가 없다"고 해명했다.
한큐에서는 신인 선수들이 오프 시즌에 양호 시설과 요양 시설을 위문하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었는데, 후쿠모토는 의무가 면제되는 2년차 이후에도 오릭스 코치직을 그만둘 때까지 23년간 매년 이를 계속했다. 신체장애인 요양 시설에서는 후쿠모토가 입소자들을 초대하여 야구를 한 덕분에 퇴소한 장애인들이 각지에 야구팀을 만들었고, 훗날 발족한 일본 신체장애자 야구 연맹의 명예 이사장에 취임했다. 또한 동경하던 나가시마 시게오를 본받아 최대한 구장에서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거나, 오프 시즌에 불필요해진 전년도 가이드북을 구단으로부터 받아 무코가와 강변에 오는 야구 소년들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등 팬 서비스에도 열심이었다.
그는 다카라즈카 가극단을 매우 좋아하는 "즈카팬"이다. 원래 다카라즈카 가극단과 한큐 브레이브스는 같은 한큐 계열이라 가까운 존재였지만, 이전에는 "여성들이 보는 것"이라는 인식 때문에 꺼려했다. 그러나 2006년에 처음 관람한 후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다"고 한다. 2014년 저서의 "후기"에서는 "규율과 예의 바름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무대에 매료되어, 지금은 완전히 다카라즈카 가극의 팬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스스로 "나를 만나고 싶으면 월요일에 다카라즈카로 오면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극단 창립 100주년인 2014년에 열린 "다카라즈카 대운동회"에서는 대미를 장식하는 "조 대항 릴레이"의 스타터를 맡았다.
또한 라쿠고를 좋아하여 자신의 가게에서도 친분이 있는 라쿠고가 (쇼후쿠테이 긴페이 등)를 초청하여 정기적으로 라쿠고회를 열고 있다. 특히 쇼후쿠테이 진치는 후쿠모토를 소재로 한 창작 라쿠고를 여러 편 발표했다.
낚시를 취미로 하며, 현역 시절에는 아마가사키시나 니시노미야시의 해안, 포트 아일랜드와 같은 곳에 "기분 전환"이나 "기분 전환"을 위해 다녔다. 브레이브스 매각 소식이 전해진 1988년 10월 19일 밤에는 보도 기자들을 피하기 위해 무코가와 하구의 이치몬지 부두에 밤낚시를 왔지만, "롯데-긴테쓰전 라디오 중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낚시를 즐길 마음 상태가 아니었다"고 기록했다.
펀치 사토 (전 오릭스)는 현역 시절, 휴일 전날 연습 종료 후 동료 몇 명과 함께 당시 2군 감독이던 후쿠모토에게 불려 "내일이 휴일이라고 스마 해안에 가서 바다에 들어가면 안 된다. 몸이 식으니까"라는 주의를 들었다. 다음날 후쿠모토의 주의를 무시하고 동료들과 스마 해안에 놀러 갔다가, 선글라스를 쓰고 해수욕복 차림의 후쿠모토가 일광욕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현역 시절 선수 응원가는 미국의 애국가 "양키 두들"의 개사곡이었고, 훗날 가사를 개변한 것이 이치로에게 유용되기도 했다. 야구에서는 좌투좌타이지만, 펜은 오른손으로 잡는다. 젓가락은 왼손으로 사용한다.
6. 평가 및 영향
후쿠모토 유타카는 그의 뛰어난 재능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일본 야구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단순한 선수 이상의 상징적인 존재로 평가받는다.
6.1. 야구계에 미친 영향
후쿠모토 유타카는 그의 위협적인 도루 능력으로 인해 상대 팀들이 퀵 모션과 같은 새로운 수비 전술을 개발하게 만들었다. 특히 노무라 가쓰야가 "스리아시 퀵"을 고안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며 투수들의 투구 방식에 혁신을 가져왔다. 후쿠모토 자신도 노무라의 이러한 대책이 자신의 도루 기술을 더욱 발전시키는 자극이 되었다고 인정했다.
그의 타격 철학, 즉 1번 타자는 출루에 집중해야 하며 홈런을 노리는 것은 본연의 임무가 아니라는 생각은 현대 야구의 1번 타자상과는 대조를 이룬다. 그는 자신의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208개의 홈런을 기록한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득점 기회를 극대화하는 것이 1번 타자의 역할임을 강조했다.
또한 후쿠모토는 철저한 자기 관리와 부상 방지에 대한 의식으로 후배 선수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1억 엔 보험에 가입된 다리 부상 없이 20년간 현역 생활을 유지한 것은 그의 프로 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팬 서비스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경기장에서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거나, 오프 시즌에 야구 소년들에게 무료로 가이드북을 나눠주는 등 팬들과의 소통을 중요시했다. 무엇보다 그의 가장 큰 사회 공헌 활동은 신체장애인 야구 연맹의 명예 이사장으로서 23년간 꾸준히 양호 시설과 요양 시설을 위문하며 신체장애인 야구의 발전에 기여한 점이다. 그의 노력으로 많은 신체장애인들이 야구를 통해 삶의 활력을 찾고 팀을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스포츠가 사회에 미칠 수 있는 긍정적인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6.2. 수상 및 영예
후쿠모토 유타카는 2002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그의 위대한 업적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이는 그가 단순한 기록 보유자를 넘어 일본 야구의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선수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1983년 통산 939도루로 MLB 기록을 경신했을 때 국민영예상을 고사한 일화는 그의 겸손함과 야구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회자된다. 대신 그는 오사카부 지사 표창을 받는 등 지역 사회의 영웅으로 존경받았다. 그의 등번호 7번은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이어지며 준 영구 결번 대우를 받았고, 이는 구단과 팬들이 그에게 보내는 존경의 상징이었다.
7. 기록 및 통계
후쿠모토 유타카는 현역 시절 동안 일본 프로 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기록과 통계를 남겼다.
7.1. 연도별 타격 성적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번트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4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69 | 한큐 | 38 | 41 | 39 | 8 | 11 | 3 | 0 | 2 | 20 | 4 | 4 | 1 | 0 | 0 | 2 | 0 | 0 | 6 | 0 | .282 | .317 | .513 | .830 |
1970 | 127 | 489 | 423 | 92 | 116 | 23 | 3 | 8 | 169 | 41 | 75 | 15 | 3 | 3 | 55 | 0 | 5 | 71 | 4 | .274 | .362 | .400 | .762 | |
1971 | 117 | 481 | 426 | 82 | 118 | 18 | 5 | 10 | 176 | 45 | 67 | 14 | 0 | 4 | 50 | 4 | 1 | 49 | 2 | .277 | .351 | .413 | .764 | |
1972 | 122 | 542 | 472 | 99 | 142 | 25 | 6 | 14 | 221 | 40 | 106 | 25 | 3 | 2 | 62 | 3 | 3 | 69 | 2 | .301 | .384 | .468 | .852 | |
1973 | 123 | 566 | 497 | 100 | 152 | 29 | 10 | 13 | 240 | 54 | 95 | 16 | 0 | 2 | 65 | 3 | 2 | 56 | 3 | .306 | .387 | .483 | .870 | |
1974 | 129 | 539 | 477 | 84 | 156 | 19 | 7 | 8 | 213 | 52 | 94 | 23 | 1 | 1 | 58 | 1 | 2 | 57 | 2 | .327 | .401 | .447 | .848 | |
1975 | 130 | 549 | 491 | 79 | 127 | 26 | 4 | 10 | 191 | 51 | 63 | 12 | 1 | 3 | 50 | 1 | 4 | 74 | 3 | .259 | .330 | .389 | .719 | |
1976 | 129 | 567 | 489 | 88 | 138 | 23 | 9 | 8 | 203 | 46 | 62 | 17 | 0 | 3 | 73 | 0 | 2 | 66 | 8 | .282 | .376 | .415 | .791 | |
1977 | 130 | 597 | 541 | 89 | 165 | 21 | 9 | 16 | 252 | 54 | 61 | 13 | 1 | 2 | 49 | 3 | 4 | 74 | 6 | .305 | .366 | .466 | .832 | |
1978 | 130 | 595 | 526 | 107 | 171 | 35 | 10 | 8 | 250 | 34 | 70 | 21 | 3 | 1 | 60 | 4 | 5 | 65 | 4 | .325 | .399 | .475 | .874 | |
1979 | 128 | 587 | 493 | 101 | 142 | 27 | 9 | 17 | 238 | 67 | 60 | 24 | 7 | 3 | 79 | 3 | 5 | 63 | 2 | .288 | .390 | .483 | .873 | |
1980 | 128 | 603 | 517 | 112 | 166 | 29 | 6 | 21 | 270 | 58 | 54 | 20 | 4 | 3 | 78 | 5 | 1 | 64 | 3 | .321 | .409 | .522 | .931 | |
1981 | 130 | 584 | 495 | 90 | 142 | 22 | 7 | 14 | 220 | 48 | 54 | 15 | 6 | 2 | 80 | 2 | 1 | 65 | 3 | .287 | .386 | .444 | .830 | |
1982 | 127 | 575 | 476 | 97 | 144 | 31 | 7 | 15 | 234 | 56 | 54 | 20 | 8 | 1 | 88 | 1 | 2 | 46 | 4 | .303 | .413 | .492 | .905 | |
1983 | 130 | 587 | 493 | 89 | 141 | 26 | 7 | 10 | 211 | 59 | 55 | 20 | 7 | 1 | 85 | 7 | 1 | 40 | 5 | .286 | .391 | .428 | .819 | |
1984 | 130 | 585 | 488 | 93 | 126 | 22 | 2 | 9 | 179 | 41 | 36 | 17 | 8 | 2 | 85 | 1 | 2 | 41 | 3 | .258 | .369 | .367 | .736 | |
1985 | 130 | 531 | 425 | 95 | 122 | 15 | 7 | 11 | 184 | 51 | 23 | 10 | 5 | 6 | 95 | 0 | 0 | 40 | 5 | .287 | .412 | .433 | .845 | |
1986 | 130 | 520 | 454 | 75 | 120 | 18 | 2 | 8 | 166 | 29 | 23 | 12 | 5 | 3 | 55 | 1 | 3 | 55 | 2 | .264 | .346 | .366 | .712 | |
1987 | 101 | 386 | 349 | 53 | 100 | 25 | 3 | 5 | 146 | 33 | 6 | 3 | 2 | 2 | 33 | 1 | 0 | 35 | 0 | .287 | .346 | .418 | .764 | |
1988 | 92 | 206 | 174 | 23 | 44 | 12 | 2 | 1 | 63 | 21 | 3 | 1 | 0 | 0 | 32 | 1 | 0 | 18 | 4 | .253 | .369 | .362 | .731 | |
통산: 20년 | 2401 | 10130 | 8745 | 1656 | 2543 | 449 | 115 | 208 | 3846 | 884 | 1065 | 299 | 64 | 44 | 1234 | 41 | 43 | 1054 | 65 | .291 | .379 | .440 | .819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숫자는 일본 프로 야구 역대 최고 기록.
- NPB에서는 1984년까지 희생 플라이를 고려하지 않고 출루율을 계산했기 때문에 당시 계산 방식으로는 리그 1위가 아니었지만, 현재 계산 방식으로는 리그 1위가 된다.
7.2. 연도별 수비 성적
연도 | 구단 | 경기 | 척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
1969 | 한큐 | 29 | 23 | 1 | 1 | 0 | .960 |
1970 | 122 | 271 | 8 | 2 | 1 | .993 | |
1971 | 115 | 296 | 7 | 4 | 2 | .987 | |
1972 | 122 | 287 | 8 | 6 | 1 | .980 | |
1973 | 121 | 292 | 13 | 7 | 3 | .978 | |
1974 | 126 | 281 | 6 | 3 | 1 | .990 | |
1975 | 128 | 331 | 6 | 4 | 1 | .988 | |
1976 | 129 | 341 | 9 | 4 | 2 | .989 | |
1977 | 130 | 351 | 7 | 7 | 6 | .981 | |
1978 | 129 | 340 | 3 | 4 | 0 | .988 | |
1979 | 127 | 306 | 6 | 2 | 3 | .994 | |
1980 | 128 | 289 | 9 | 5 | 2 | .983 | |
1981 | 130 | 313 | 8 | 3 | 2 | .991 | |
1982 | 126 | 281 | 3 | 0 | 1 | 1.000 | |
1983 | 130 | 300 | 2 | 2 | 0 | .993 | |
1984 | 129 | 215 | 7 | 1 | 2 | .996 | |
1985 | 115 | 198 | 1 | 0 | 0 | 1.000 | |
1986 | 124 | 177 | 4 | 5 | 1 | .973 | |
1987 | 96 | 164 | 1 | 1 | 0 | .994 | |
1988 | 37 | 47 | 0 | 0 | 0 | 1.000 | |
통산 | 2293 | 5103 | 109 | 61 | 28 | .988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숫자는 NPB 외야수 역대 최고 기록
- 굵은 글씨 연도는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수상
8. 저서 및 저술 활동
- 『맹호습래: 한신 타이거스 우승을 향한 14가지 열쇠』 (고마북스, 2000년 5월)
- 『뛰어라!』 (베이스볼 매거진사, 2009년 5월)
- 『한큐 브레이브스 빛을 넘은 그림자』 (베이스볼 매거진사, 2014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