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경력
히가시오 오사무는 어린 시절부터 프로 선수로서의 전성기, 그리고 감독과 해설가로서의 활동에 이르기까지 일본 프로 야구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1.1.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히가시오 오사무는 와카야마현 아리다군 기비정(현재의 아리다가와정)에서 태어나 기비 중학교를 졸업했다. 원래 교토의 헤이안 고등학교에 합격하여 이미 교토에서의 하숙집까지 마련하는 등 생활 준비를 마쳤으나, 그의 명성을 들은 와카야마현립 미노시마 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비토 다다시가 직접 설득하여 미노시마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미노시마 고등학교에서 에이스이자 4번 타자로 활약하며 1967년 가을 긴키 대회에서는 1회전에서 도잔 고등학교, 준준결승에서 고카 고등학교를 각각 노히트 노런으로 막아내며 주목받았다. 결승에서는 인연이 깊은 헤이안 고등학교의 이케다 노부오와 맞붙었으나 패배하여 준우승에 머물렀다. 1968년 봄 선발 고시엔에 미노시마 고등학교의 첫 출전을 이끌었으며, 준결승까지 진출하여 이 대회 우승팀인 오미야 공업 고등학교와 대결했으나 3대5로 역전패했다. 같은 해 여름 고시엔 현 예선에서는 2회전에서 패했다. 비토 감독은 후에 고시엔에서 춘계 대회 3회, 하계 대회 1회 우승이라는 실적을 남겼지만, "1968년 팀이 최강이었고, 우승하지 못한 것은 나 자신의 경험 부족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1968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니시테쓰 라이온스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았다. 드래프트 전에는 다른 구단에서도 접촉이 있었고, 일부 구단은 1위 지명을 암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니시테쓰의 지명은 사전에 아무런 접촉도 없이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이 때문에 히가시오의 부모는 "도쿄나 오사카 팀이라면 몰라도, (당시 한 번도 방문한 적 없는) 규슈의 팀에 아들을 입단시킬 수는 없다"며 니시테쓰 입단을 맹렬히 반대하며 대학 진학을 권유했다. 히가시오 본인도 니시테쓰의 일방적인 지명에 화가 나 한때 호세이 대학 진학을 거의 결정하기도 했다. 그는 이전에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테스트를 타자로서 받은 적이 있어, 만약 게이오에 입학했다면 야수로 전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니시테쓰도 프로 팀이고, 그 프로가 1위 지명을 해 주었다"고 생각을 고쳐 부모님을 설득하여 니시테쓰에 입단했다. 히가시오는 후에 "1위 지명이었기 때문에야말로 입단했다. 니시테쓰는 1위 지명으로 나의 프라이드를 지켜주었다. 1위 지명이 아니었다면 니시테쓰에 입단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자신의 저서에서는 "2위라도 들어갔을 것이고, 3위라도 들어갔을지도 모른다"고도 언급했다. 계약금은 1000.00 만 JPY, 연봉은 180.00 만 JPY였다.
1.2. 프로 입단과 초기 경력
프로 입단 초, 히가시오는 주변 선수들의 높은 수준에 적응하지 못했다. 1년차인 1969년 여름에는 "이대로는 프로에서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구단 수뇌진에게 야수 전향을 요청하기도 했다. 2군에서도 부진하여 자신감을 잃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1969년 일본 프로 야구의 승부 조작 사건인 일명 '검은 안개 사건'이 터지면서 팀의 에이스 투수 이케나가 마사아키를 비롯한 주력 투수들이 대거 야구계에서 영구 제명되어 팀은 심각한 투수 부족에 시달렸다. 이로 인해 히가시오는 1군 투수로서 강제적으로 풀 시즌을 소화하게 되었다. 그는 투수 코치였던 가와무라 히데후미에게 슈트볼을 배우고 가토 하지메와 함께 매일 350구에서 400구에 달하는 투구 훈련을 소화했다. 히가시오는 검은 안개 사건이 자신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라고 느끼며 내심 기뻐했다고 말했으며, 후에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최대의 기회이자 전환점이었다"고 회고했다.
경험 부족으로 인해 1969년 시즌 40경기에서 5.1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몇 년간 개선을 보였지만, 1971년과 1972년에는 리그 최다 패전 투수가 되었다. 특히 1972년 시즌에는 300이닝 이상을 던지며 패전뿐만 아니라 피안타, 실점, 피홈런에서도 리그 최다를 기록했다. 또한 1971년부터 3년 연속으로 100개 이상의 볼넷을 허용했다.
검은 안개 사건의 여파와 관중 동원 급감 등으로 니시테쓰 구단은 1972년 오프 시즌에 매각되었고, 1973년에는 태평양 클럽 라이온스, 1977년에는 크라운 라이터 라이온스로 팀명이 바뀌는 등 불안정한 경영 상태에 놓였다. 히가시오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기에 팀의 에이스로 부상했다. 1975년 시즌에는 2.3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리그 최다승(23승)을 거두었다. 1978년에도 다시 23승을 기록하며 통산 세 번째로 300이닝 이상을 소화했다. 라이온스 구단은 1979년 코쿠도에 의해 인수되어 '세이부 라이온스'로 재탄생하며 사이타마현도코로자와시로 연고지를 이전하며 재정적 안정을 찾았다. 당시 감독이었던 네모토 리쿠오는 구단 프런트의 요직도 겸임하며 트레이드 등으로 선수들을 대폭 교체했고, 니시테쓰 시대부터 세이부까지 라이온스 구단에 계속 소속했던 선수는 히가시오와 오타 다쿠지 단 두 명뿐이었다.
1.3. 현역 선수 시절
히가시오 오사무는 라이온스 구단의 격동기 속에서도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수많은 기록과 상을 남겼다.
1.3.1. 에이스로서의 활약
1982년, 구단 관리 부장으로 전임한 네모토의 후임으로 히로오카 다쓰로가 세이부 감독으로 부임했다. 히로오카 감독은 팀 플레이를 중시하는 수비 야구를 전개했고, 1982년 5월 경기에서 히가시오의 1루 베이스 커버가 늦었다고 판단하여 그를 선발 로테이션에서 제외하는 방침을 내세웠다. 이듬해 1983년에는 히로오카 감독이 히가시오의 투구에 대해 경기 직후 기자들에게 "승부 조작을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발언한 내용이 스포츠 신문에 보도되자, 이 소식을 들은 히가시오가 격노하기도 했다.
히로오카 감독이 이끄는 세이부는 1982년과 1983년 2년 연속 리그 우승 및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1985년에도 다시 리그 우승을 제패했다. 히가시오는 이 세 차례의 일본 시리즈에서 모두 중간 계투로 투입되었다. 이는 당시 주전 마무리 투수 모리 시게카즈의 부진 때문이었다. 1982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1차전과 5차전에서 롱 릴리프로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고, 일본 시리즈 MVP에 선정되며 우승 헹가래 투수(상대 오시마 야스노리를 삼진 처리)가 되었다. 투수가 구원 등판만으로 일본 시리즈 MVP를 획득한 것은 일본 시리즈 역사상 최초의 기록이었으며, 2017년 데니스 사파테가 MVP를 획득하기 전까지는 유일한 기록이었다. 1983년에는 두 번째 최다승과 최우수 방어율, 베스트 나인, 퍼시픽 리그 MVP 등 수많은 타이틀을 획득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 시리즈 7차전에서는 7회 2사 만루 상황에서 타자 하라 다쓰노리를 상대로 슛볼을 던져 삼진을 잡아냈고, 이후 테리 휘트필드의 주자 일소 적시타로 역전하며 일본 제일을 차지했다. 당시 외야를 지키고 있던 오타 다쿠지가 며칠 후 히가시오에게 "톤비, 하라에게 던진 그 1구는 위험했어"라고 말하자, 히가시오는 "그 정도는 타자가 피한다"고 평연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1984년에는 개인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 1985년에는 개인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했지만 17승 3패의 호성적을 기록하며, 21승을 거둔 한큐 브레이브스의 사토 요시노리를 제치고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라이온스는 1985년부터 1988년까지 4년 연속 퍼시픽 리그 우승(이 중 3차례 일본 시리즈 우승 포함)을 차지했으며, 히가시오는 1987년 두 번째 퍼시픽 리그 MVP를 수상했다.
1988년 6월, 마작 도박 사건으로 인한 근신에서 복귀하여 긴테쓰전에서 완봉승을 거두는 등 건재함을 과시했으나, 로테이션에서 제외되었다. 같은 해 6승을 추가하여 통산 251승을 달성했다.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일본 시리즈 1차전(나고야 구장)에서는 4대1로 앞선 8회 무사 1,2루 상황에서 주니치 타자 히코노 도시카쓰를 상대로 선발 와타나베 히사노부를 구원 등판했다. 히가시오는 당연히 끝까지 던질 생각으로 마운드에 올랐으나, 모리 요시아키 감독의 지시는 "이 한 명만 막아달라"는 것이었다. 다음 타자에는 좌타자 다쓰나미 가즈요시가 있었고, 불펜에서도 좌완 투수가 준비 중이었다. 모리 감독으로서는 단순히 승리를 위한 최선의 수단으로 한 명을 확실히 막아주길 바랐던 것이지만, 히가시오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는 히코노를 초구 몸쪽 슈트볼로 3루 땅볼 병살 처리하고, 2사 3루에서 다쓰나미를 3구 삼진으로 잡아내며 단 4구만에 위기를 넘겼다. 9회도 마저 던졌지만, 모리 감독의 말은 히가시오의 마음에 강하게 남아 그날 밤 지인에게 은퇴 의사를 밝혔다. 9회초에는 우에하라 아키라에게 희생 플라이를 쳐 타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5차전에도 등판하여 팀의 3년 연속 일본 제일에 기여했다.
같은 해 오프 시즌인 11월 1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 야마우치 다카노리와의 맞트레이드가 내정되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이는 히가시오에게 1978년 크라운 라이터 라이온스 시절 이후 10년 만의 '후쿠오카 유턴'으로도 보도되었다. 그러나 당시 쓰쓰미 요시아키 오너는 "MVP도 획득한 공로자이며, 히가시오 이상의 요원이 아니면 트레이드는 있을 수 없다. 금전 트레이드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는데, 이는 사실상의 은퇴 권고로도 해석되었다. 당시 다이에의 나카우치 이사오 오너도 히가시오 영입에 직접 나섰고, 심지어 다이요와 거인도 영입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러한 소동 속에서 히가시오 본인은 "세이부에서 불태우고 싶다"고 발언했고, 결국 스스로 은퇴를 결정하여 11월 22일 기자회견을 열고 현역 생활을 마쳤다. 히가시오는 당시 "센트럴 리그를 포함한 여러 구단에서 투수 제안이 있었고, 다른 퍼시픽 리그 팀에서 세이부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다소 있었으나, 규슈 시절부터 '라이온스'의 일원으로서 팀이 바닥일 때도 던져온 자부심이 있어 '동료와는 싸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다. 이나오 가즈히사의 통산 276승에 25승 못 미친 것은 아쉽지만, 251승보다 247패에야말로 자신의 투수로서의 삶이 더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1.3.2. 투구 스타일과 특징
히가시오는 롯데 오리온스의 기타루 마사아키, 나리타 후미오 등의 투구 폼을 참고하여 예리하고 날카로운 슈트볼과 슬라이더를 축으로 한 좌우 흔들기, 그리고 타자의 몸쪽을 파고드는 강한 투구 스타일을 확립했다. 그를 지도했던 가와무라 히데후미 또한 현역 시절 몸쪽 공격에 능했다. 히가시오는 사구를 주면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넉살 좋은 성격으로 인해 '켄카 투구법'(ケンカ投法일본어, 싸움 투구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통산 165개의 사구로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중 132개(82%)가 우타자에게 던진 것이었다.
히가시오는 이러한 공격적인 투구 스타일에 대해, 자신이 잘 던지는 슬라이더와 슈트볼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시행착오 끝에 고안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나도 사실은 직구로 멋있게 정면 승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프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면 안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니시테쓰의 에이스였던 이케나가 마사아키를 목표로 삼았고, 스승이라고도 이야기했다. 히가시오는 우타자에게는 맞추지만 좌타자에게는 맞추지 않는다는 자신만의 프라이드가 있었으며, 구리하시 시게루에게 사구를 던졌을 때는 사과했다고 한다.
그는 전력으로 던지는 직구가 프로에서는 2군에서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좌절하여, "이대로는 내년에 해고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을 캠프에서 변화구 위주 스타일 습득에 매진했다고 한다. 그는 "고교 시절에는 속구 투수라고 불렸지만, 전성기에도 142 km/h에서 143 km/h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 깨달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회고했다.
히가시오는 현역 시절부터 일관되게 "고의로 맞춘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주장했다. 다만 "예외적인 경우"로 팀 플레이 상의 보복 사구는 던진 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그는 1978년 루키였던 팀 동료 야마모토 류조가 사구를 맞았을 때 "내가 복수해주겠다"고 생각하고 던졌던 것을 예로 들며, 다음 타자가 데이터상 타력이 없을 때만 던졌다고 설명했다. 반면 다른 팀의 사구에는 엄격했다. 감독 시절 나이토 나오유키가 기요하라 가즈히로에게 사구를 던지자 다음날 롯데의 오바나 코치를 불러 "적당히 해라, 용서 안 한다"고 따졌고, 나이토의 사과를 무시하기도 했다.
후쿠모토 유타카와는 상성이 좋지 않아, 특히 구속이 느린 변화구로 많은 도루를 허용했다. 후쿠모토에게 직접 히가시오의 투구 습관을 배워 한때 극복했으나, 곧바로 후쿠모토에게 다른 습관을 간파당했다. 후쿠모토는 히가시오의 습관을 "홈으로 빨리 던지고 싶은 마음이 왼쪽 어깨에 나타났다"고 표현했다.
니시테쓰 시절, 팀 사정상 실력이 부족한 젊은 시절부터 주전 투수로 시즌 내내 등판했기 때문에 패전 수가 많았다. 1년차인 1969년부터 1972년까지 4년 연속으로 패전 수가 가장 많았고, 20년간의 현역 생활 중 9시즌에서 패전 수가 승리보다 많았으며, 절반 이상인 14시즌에서 두 자릿수 패전을 기록했다. 리그 최다 패전 투수가 된 시즌은 5차례였으며, 가장 많은 패전을 기록한 시즌은 1972년의 25패로, 이는 퍼시픽 리그 기록이다. 또한 통산 200승보다 먼저 통산 200패를 달성했으며(가지모토 다카오에 이어 일본 프로 야구 사상 두 번째), 200승을 달성한 1984년 시즌 종료 시점에서는 통산 201승 215패로 패전 수가 더 많았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85년에 17승 3패라는 호성적을 기록하며 14패전 차이를 한 번에 만회했고, 이후 3시즌 동안 33승 29패를 기록하며 은퇴 시에는 통산 251승 247패로 승리 수가 패전 수를 앞서게 되었다. 현재 200승 투수 중 통산 패전이 승리보다 많은 투수는 가지모토 다카오밖에 없다. 히가시오는 2018년 현재, 시즌 300이닝 등판과 20패를 기록한 마지막 투수이기도 하다. 그의 투구폼은 오른손 오버스로였으며, 구종은 스트레이트, 슬라이더, 슈트의 횡변화에 더해 가끔 포크볼도 던졌다.
1.3.3. 주요 기록 및 수상
히가시오 오사무는 현역 시절 다음과 같은 주요 기록과 수상 경력을 남겼다.
- 타이틀
- 최다승: 2회 (1975년, 1983년)
- 최우수 방어율: 1회 (1983년)
- 최다 탈삼진: 1회 (1975년)
- 당시 연맹 표창은 없었으며, 퍼시픽 리그에서는 1989년부터 타이틀로 제정되었다.
- 표창
- 최우수 선수 (MVP): 2회 (1983년, 1987년)
- 베스트 나인: 2회 (1983년, 1985년)
- 골든 글러브상: 5회 (1983년 ~ 1987년)
- 5년 연속 수상은 투수 부문 퍼시픽 리그 최장 기록이다.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경기자 표창 (2010년)
- 일본 시리즈 MVP: 1회 (1982년)
- 월간 MVP: 2회 (1980년 8월, 1982년 4월)
-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1회 (1983년)
- 기록
- 통산 165 사구 (일본 프로 야구 기록)
- 시즌 25패: 1972년 (퍼시픽 리그 기록)
- 올스타전 출장: 10회 (1972년, 1973년, 1975년, 1976년, 1978년, 1982년,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 통산 200승: 1984년 9월 15일, 대 난카이 호크스전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9회 완봉승 (역대 20번째)
- 통산 250승: 1988년 9월 4일, 대 난카이 호크스전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9회 3실점 완투승 (역대 10번째)
- 통산 4000 투구 이닝: 1988년 (역대 8번째, 2022년 종료 시점 마지막 달성자)
- 등번호
- 21 (1969년 ~ 1988년)
- 78 (1995년 ~ 2001년)
연도 소속 등판 선발 완투 완봉 무4구 승리 패전 세이브 홀드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고의사구 몸맞 탈삼진 폭투 보크 실점 자책점 평균자책점 WHIP 1969 니시테쓰
태평양
크라운
세이부8 4 0 0 0 0 2 -- -- .000 73 15.0 16 2 14 0 1 11 1 0 14 14 8.40 2.00 1970 40 31 3 0 0 11 18 -- -- .379 786 173.1 183 22 90 2 7 94 4 0 107 99 5.14 1.58 1971 51 31 3 0 0 8 16 -- -- .333 964 221.1 198 20 118 3 15 109 5 0 110 92 3.74 1.43 1972 55 41 13 2 0 18 25 -- -- .419 1313 309.2 313 37 110 6 12 171 4 0 152 126 3.66 1.37 1973 48 37 14 5 2 15 14 -- -- .517 1088 257.1 250 22 91 8 13 104 6 0 107 94 3.29 1.32 1974 27 19 7 1 1 6 9 0 -- .400 513 123.0 116 12 46 2 7 58 1 0 55 47 3.44 1.32 1975 54 31 25 4 1 23 15 7 -- .605 1281 317.2 287 14 63 8 7 154 3 0 101 84 2.38 1.10 1976 43 22 15 2 1 13 11 5 -- .542 1013 243.1 256 14 52 8 7 93 2 0 97 86 3.18 1.27 1977 42 31 17 1 3 11 20 4 -- .355 1018 241.2 259 30 56 4 14 108 1 0 119 104 3.87 1.30 1978 45 35 28 1 1 23 14 1 -- .622 1225 303.1 299 25 53 8 16 126 1 0 110 99 2.94 1.16 1979 23 22 10 1 3 6 13 0 -- .316 666 155.0 181 19 32 3 7 61 0 1 90 78 4.53 1.37 1980 33 33 18 1 4 17 13 0 -- .567 988 235.1 258 28 41 1 12 84 0 1 117 99 3.79 1.27 1981 27 27 11 1 2 8 11 0 -- .421 768 181.0 192 24 51 6 7 55 1 1 83 77 3.83 1.34 1982 28 25 11 2 0 10 11 1 -- .476 763 183.2 179 20 49 3 3 59 1 1 76 67 3.28 1.24 1983 32 29 11 3 2 18 9 2 -- .667 873 213.0 198 14 51 4 6 72 0 1 76 69 2.92 1.17 1984 32 32 20 3 3 14 14 0 -- .500 986 241.1 227 24 53 5 8 84 2 0 103 89 3.32 1.16 1985 31 23 11 3 2 17 3 1 -- .850 721 174.1 164 19 46 0 7 74 1 0 71 64 3.30 1.20 1986 31 22 8 0 2 12 11 2 -- .522 703 168.1 183 29 27 6 7 52 1 0 85 79 4.22 1.25 1987 28 27 17 3 6 15 9 0 -- .625 904 222.2 215 16 29 6 6 85 3 0 81 64 2.59 1.10 1988 19 15 5 1 0 6 9 0 -- .400 463 105.2 121 21 30 2 3 30 2 0 63 57 4.85 1.43 통산: 20년 697 537 247 34 33 251 247 23 -- .504 17109 4086.0 4095 412 1102 85 165 1684 39 5 1817 1588 3.50 1.27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성적.
- 니시테쓰(니시테쓰 라이온스)는 1973년에 태평양(태평양 클럽 라이온스), 1977년에 크라운(크라운 라이터 라이온스), 1979년에 세이부(세이부 라이온스)로 구단명을 변경했다.
1.3.4. 사건 및 논란
히가시오 오사무는 현역 시절 몇 차례의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1986년 6월 13일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경기(세이부 구장)에서, 6회 1사 상황에서 리처드 데이비스에게 던진 몸쪽 슈트볼이 데이비스의 왼쪽 팔꿈치를 맞혔다. 이에 격분한 데이비스는 마운드로 달려와 히가시오에게 주먹과 발길질을 가하는 난투극이 벌어졌다. 데이비스는 당시 "컨트롤 좋은 투수가 저런 곳에 던지는 것은 고의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노리고 맞춘 것"이라고 소리쳤다. 데이비스는 퇴장당했지만, 히가시오는 "여기서 내려가면 꼴사납다"며 계속 투구하여 완투승을 거두었다. 이 사건 이후 많은 팬들이 데이비스에게 동정심을 표하며 히가시오에게도 많은 사구를 던진 것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다. 다른 팀 감독들은 히가시오가 컨트롤이 뛰어나므로 우연히 타자를 그렇게 자주 맞출 리 없다며 고의 사구를 던졌다고 비난했다. 닛폰햄의 다카다 시게루 감독은 "이번만큼은 히가시오에게 동정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제멋대로였다"고 말했다. 반면 한큐의 우에다 도시하루 감독도 "우리 팀도 당하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는데, 이에 히가시오는 "화가 났다"며 "당시 한큐는 난수표를 써서 사구 사인이 있었는데, 그런 팀의 감독이 무슨 말을 하느냐"고 후에 반박했다. 히가시오는 이어진 한큐전에서 몸쪽 공격을 일절 하지 않고 바깥쪽 공으로만 완투승을 거두었다. 히가시오는 데이비스 사건 이후에도 자신이 고의로 타자를 맞힌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주장해왔다.
1987년 시즌 종료 후, 12월 14일에는 마작 도박에 가담한 사실이 밝혀져 경찰 조사를 받았다. 히가시오는 다음 날 구단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나의 미숙함과 경솔함이 일으킨 일이다. OB, 팀 동료들을 생각하면 할 말이 없다"며 "사안의 중대성에 깊이 반성하고 있다. 많은 분들께 큰 폐를 끼쳤다. 구단에는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어떤 처분도 달게 받겠다"고 사과했다. 12월 15일, 세이부 구단의 사카이 야스유키 대표가 히가시오를 조사한 오사키 경찰서와 도쿄 지방 검찰청을 방문하여 설명을 듣고, 히가시오가 이 건으로 직접 야쿠자와 관련이 없다는 인식을 표명했다. 12월 21일, 구단은 히가시오에게 6개월의 근신 처분과 2500.00 만 JPY의 감봉 처분을 내렸다. 오픈전과 공식전 출장은 금지했지만, 합동 자율 훈련과 캠프 참가는 허용했다. 히가시오는 전년도에 오치아이 히로미쓰와 함께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연봉 1.00 억 JPY를 받는 선수가 되었고, 1987년 시즌 성적에 따라 다음 시즌에는 연봉이 인상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사건 발각 전에는 1.10 억 JPY 제시를 보류), 사건 발각으로 인해 25%가 삭감되어 최종적으로 연봉 7500.00 만 JPY에 재계약했다.
1.4. 감독 경력
선수 은퇴 후 히가시오 오사무는 세이부 라이온스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팀을 이끌었다.
1.4.1.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 시절
1994년 일본 시리즈 종료 후 모리 요시아키 감독이 퇴단하고, 이시게 히로노리에게 감독직을 제안했으나 이시게가 현역 생활 지속을 위해 11월 5일 거절했으며, 구도 기미야스가 프런트와 갈등 끝에 FA를 선언하는 등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히가시오에게 감독 취임 요청이 들어왔고, 그는 쓰쓰미 요시아키 오너가 자신을 강력히 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절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95년 세이부 감독으로 취임했다. 감독 취임 직후 그는 구도와 만나 잔류를 요청했으나, 구도는 "1주일만 빨랐으면"이라며 다이에로 이적했다. 전임 모리 감독이 9년간 8차례 리그 우승을 차지했기에, 히가시오는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내야 수비 주루 코치였던 이하라 하루키와 논의하여 "모리 감독 때처럼 복잡한 부분은 이하라 씨가 해달라"고 요청하며 주루와 수비 작전을 이하라에게 맡겼다. 또한 배터리 코치 오이시 요시토모와 2군 투수 코치 가토 하지메를 영입했다. 오이시는 이미 주니치 드래건스의 1군 배터리 코치로 내정되어 11월 가을 캠프에도 참가했으나, 히가시오의 희망으로 12월에 구단 간 협의를 통해 세이부 코치로 취임했다. 가토와 오이시를 영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러운 취임 요청으로 인해 처음부터 원하는 코치진을 구성하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감독으로서 그는 드래프트에서 니시구치 후미야, 다카기 히로유키, 오제키 다쓰야 등을 영입했고, 메이저리그로 복귀했던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를 세이부로 복귀시키고 현역 메이저리거 대린 잭슨을 영입하는 등 전력 보강을 단행했다. 그러나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타율 0.245에 홈런 25개로 부진했고, 데스트라데도 부진에 빠졌다. 구도의 공백은 신타니 히로시나 이시이 다케히로 등이 어느 정도 메웠지만, 와타나베 히사노부가 부진하여 릴리프로 전환해야 했던 것도 오산이었다.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상대 전적에서 15연패를 포함해 5승 21패로 크게 뒤쳐지며, 감독 부임 첫 해인 1995년 팀은 3위로 마감했다. 오릭스전을 제외한 성적은 62승 6무 36패로, 오릭스의 61승 42패 1무를 상회하는 것이었다.
이듬해 1996년에는 기요하라의 부활을 위해 쓰쓰미 요시아키가 과거 마작 도박 사건으로 퇴단했던 기요하라의 은사인 도이 마사히로를 1군 타격 코치로 복귀시켰다. 또한 히로시마에서 가와다 유스케, 주니치에서 시미즈 마사지와 마에하라 히로유키를 트레이드로 영입했고, 드래프트에서 다카기 다이세이, 오토모 스스무, 하라이 가즈야 등을 영입하며 전력을 보강했다. 전년과 마찬가지로 3위를 기록했으나, 이는 감독 재임 7년간 유일하게 패전 수가 더 많았던 시즌이었다. 개막 후 20경기에서 6승 14패를 기록했고, 6월, 7월, 8월에도 패전 수가 많아 팀은 16년 만에 패전 시즌을 맞았다. 그러나 니시구치 후미야가 16승, 마쓰이 가즈오가 타율 0.283에 50도루, 도요다 기요시, 이시이 다카시 등 젊은 선수들이 크게 성장한 해이기도 했다. 당시 기요하라에 대해 히가시오는 "기요하라를 재생할 수 있는 건 도이 씨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도이 씨조차 기요하라의 빛을 되찾지 못했다. 하와이 캠프 숙소에서 난동을 부려 방을 부순 적도 있었다. 팀은 이미 니시구치, 마쓰이 가즈오, 오토모 스스무, 다카기 다이세이, 오제키 등으로 세대교체를 해야 할 단계였는데, 기요하라가 벤치에 뚱하게 앉아 있으면 주변 젊은 선수들이 위축된다. 기요하라는 왼쪽 어깨 탈구 버릇이 있어 야수의 1루 송구가 조금만 어긋나도 싫은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다카기 히로유키는 입스에 걸렸다"고 언급했다. 기요하라가 FA 이적할 때는 막지 않았고, 그는 거인으로 이적했다. 도이의 영입은 투수에서 유격수로 전향한 마쓰이를 스위치 히터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도이의 타격 기술 지도는 마쓰이를 급성장시켰다. 당시 레귤러 포수였던 이토 쓰토무는 1996년 92경기 출장에 그쳤는데, 그는 "히가시오 오사무 감독이 된 95년 드래프트에서 세이부가 1위로 다카기 다이세이를 지명했다. 내가 부족한 건 없다고 생각했지만, 96년 시즌에 들어서면서 선발에서 자주 제외됐다. 코치에게 아무 설명도 없었다. 물어보면 항상 너를 밀고 있다고 했다. 다시 화가 치밀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1997년, 1군 헤드 코치로 나가시마 거인의 일본 제일을 지탱했던 스도 유타카를 영입했고, 기요하라의 후임으로 도밍고 마르티네스를, 드래프트에서 모리 신지, 와다 가즈히로, 다마노 히로마사 등을 영입했다. 기요하라가 빠진 후 마쓰이, 오토모, 다카기 다이세이 등 젊은 1~3번 타선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스즈키 겐과 마르티네스가 4, 5번 타순에서 해결하는 패턴이 완성되었다. 타선은 오히려 강해져 팀 도루 수는 12개 구단 중 압도적인 200개를 기록했고, 장타도 마르티네스 31개, 스즈키 겐 19개뿐만 아니라 하위 타순의 사사키 마코토와 이토 쓰토무가 각각 13홈런을 기록했다. 히가시오는 "다른 구단에게는 상당히 싫은 타선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투수진은 니시구치가 15승, 선발로 전향한 시오자키 데쓰야가 12승, 도요다가 10승으로 3본주가 고정되었고, 마무리 투수로는 하시모토 다케히로, 루키 모리 신지, 데니 도모리가 이어주고 10승 9세이브의 이시이 다카시가 마무리하며 패턴이 확립되었다. 이로써 히로오카, 모리 세대로부터의 세대교체가 드디어 완성되었다. 팀은 3년 만에 리그 제패를 달성했으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야쿠르트 스왈로스에게 1승 4패로 패했다. 와타나베 히사노부는 0승에 그쳤고, 구단 경영 악화로 프런트가 전력 외로 판단하자 히가시오가 와타나베에게 직접 전력 외 통보를 했다.
1997년 7월 10일 긴테쓰전, 9회초 무사 1,2루 세이부 공격 상황에서 나라하라 히로시가 견제사 당하자, 나라하라는 심판 단바 고이치에게 항의하며 가슴을 밀쳐 퇴장당했다. 히가시오가 항의했으나 단바 심판이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자, 히가시오는 단바의 가슴을 밀치며 퇴장 선고를 받자 단바를 발로 차는 등 폭력 행위를 저질렀고, 퍼시픽 리그 관계자들이 중재에 나서는 소동이 벌어졌다. 다음날 히가시오는 3경기 출장 정지와 벌금 10.00 만 JPY 처분을 받았다. 단바 심판은 왼쪽 하퇴부 좌상 진단을 받았다. 출장 정지 기간 동안 감독 대행은 스도 1군 헤드 코치가 맡았다.
1998년, 본거지가 세이부 구장에서 세이부 돔으로 개칭되었으나, 당시에는 지붕이 미완성 상태였다. 닛폰햄에서 트레이드로 이시이 다케히로와 나라하라를 내주고 니시자키 유키히로를 영입했으며, 오릭스에서 FA로 나카지마 사토시를 영입하는 등 전력을 보강했다. 전년 1997년까지 모리 시게카즈 1명 체제였던 1군 투수 코치를 모리·스기모토 다다시 2명 체제로 변경했으나, 6월 15일 팀 방어율이 4.26으로 저조하자, 같은 날 2군 투수 코치 가토 하지메를 1군 투수 코치로 승격시키고 모리를 2군 투수 코치로 강등시켰다. 개막 후 10경기에서 2승 8패로 시작이 좋지 않아 전반전 내내 힘겨운 경기를 이어갔다. 이 해 대혼전 속에서 퍼시픽 리그 2연패를 달성했다. 오제키가 2번 타순에 정착하여 타율 0.283에 15도루로 신인왕을 차지했고, 니시구치는 2년 연속 최다승, 마쓰이는 2년 연속 도루왕을 기록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세이부가 우세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에게 2승 4패로 패배하며 2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 달성에 실패했다.
같은 해 오프 시즌, 수비와 주루에 큰 약점이 있었지만 2년 연속 30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주포로 활약했던 마르티네스를 "일본 시리즈에서 이기는 팀을 목표로 한다"는 이유로 해고했다. 이는 1997년과 1998년 일본 시리즈에서 DH제가 없는 센트럴 리그 홈 구장에서 수비에 약점이 있는 마르티네스를 기용할 수 없었던 것이 영향을 미쳐 모두 일본 제일을 놓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1999년 입단한 아키 시안프록코, 그레그 블로서 등은 전혀 타격에서 활약하지 못했고, 결국 리그 우승을 놓쳤다. (1998년 마르티네스 혼자 30홈런을 쳤지만, 1999년 외국인 야수 4명의 합계 홈런은 25개에 불과했다.) 또한 4번 타자로 기용했던 스즈키 겐도 후속 타자들이 부진하면서 마르티네스 퇴단 이후 성적이 하락했고, 2000년 이후에는 4번 타순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늘었다.
1999년에는 '떠오르는 신인'으로 불리던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활약으로 다이에 호크스와 우승 경쟁을 벌였고, 9월 한때 0.5경기차까지 추격했으나 끝내 역전하지 못했다. 마르티네스 퇴단으로 공격력이 저하되고 타선이 부진하여 팀 득점은 리그 최하위를 기록했으며, 결국 2위로 마감했다. 이듬해 2000년에는 마쓰자카가 2년 연속 최다승, 니시구치와 이시이도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고, 마무리로 돌아간 모리 신지가 23세이브를 올리는 등 팀 방어율이 리그 유일의 3점대를 기록하며 투수진은 뛰어난 진용을 갖추었다. 그러나 스즈키 겐, 다카기, 오토모가 부진했고, 팀 타율과 홈런은 리그 최저를 기록했다. 팀 최다 홈런은 마쓰이의 23개였다. 8월 말 12개였던 승차를 승부처인 9월에 3승 11패로 날려버렸고, 다이에는 9월 9연승을 달리며 모든 팀에 승리했고 긴테쓰에 12승 앞서며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여 세이부는 2.5경기차 2위에 그쳤다. 타선 보강의 필요성이 명확해지자 프런트는 알렉스 카브레라와 스코트 맥클레인을 영입했다.
2001년에는 헤드 겸 타격 코치로 사사키 교스케를 영입했다. 카브레라가 49홈런, 맥클레인이 39홈런, 마쓰이가 24홈런, 스즈키 겐이 18홈런, 포수에서 외야수로 전향한 와다가 16홈런을 기록하며 장타 부족 문제가 단숨에 해소되었다. 마쓰자카가 최다승, 니시구치가 14승, 쉬밍지에가 11승을 기록했고, 모리 신지의 부진으로 도요다를 마무리로 전환하여 28세이브를 기록했다. 그러나 긴테쓰 버펄로스와 다이에 호크스와의 우승 경쟁에서 패배하여 3년 연속 우승을 놓친 책임을 느끼고 오너에게 사의를 표명하며 이 시즌을 끝으로 퇴임했다.
연도 | 구단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게임차 | 타율 | 홈런 | 방어율 | 연령 |
---|---|---|---|---|---|---|---|---|---|---|---|---|
1995 | 세이부 | 3위 | 130 | 67 | 57 | 6 | .540 | 12.5 | .246 | 117 | 2.98 | 45세 |
1996 | 3위 | 130 | 62 | 64 | 4 | .492 | 13.0 | .258 | 141 | 3.58 | 46세 | |
1997 | 1위 | 135 | 76 | 56 | 3 | .576 | - | .281 | 110 | 3.63 | 47세 | |
1998 | 1위 | 135 | 70 | 61 | 4 | .534 | - | .270 | 115 | 3.66 | 48세 | |
1999 | 2위 | 135 | 75 | 59 | 1 | .560 | 4.0 | .258 | 89 | 3.58 | 49세 | |
2000 | 2위 | 135 | 69 | 61 | 5 | .531 | 2.5 | .255 | 97 | 3.68 | 50세 | |
2001 | 3위 | 140 | 73 | 67 | 0 | .521 | 6.0 | .256 | 184 | 3.88 | 51세 | |
통산: 7년 | 937 | 489 | 425 | 23 | .535 | A클래스 7회 |
- 1995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제.
- 1997년부터 2000년까지는 135경기제.
- 2001년부터 2003년까지는 140경기제.
- 통산 성적은 1997년 출장 정지 처분을 받은 3경기를 포함하지 않는다.
1.4.2. 감독 퇴임 이후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히가시오는 TV 아사히 (2010년까지), 분카 방송, 스포츠닛폰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복귀하여 평론가로 활동했다. 2006년 9월부터 2009년 8월까지 bj 리그 구단인 도쿄 아파치의 구단 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1995년에 전 팀 동료 호라이 아키히코와 함께 중학 경식 야구팀 '세타가야 리틀 시니어'를 설립했다. 이는 프로 야구 선수의 눈으로 볼 때 근처에 아이를 다니게 하고 싶은 소년 야구팀이 없었던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현재 이 팀은 프로 야구 선수를 배출할 정도로 강호가 되었으며, 재적 인원도 매년 약 150명에 달해 팀 내 경쟁이 치열한 상황이다. 히가시오는 명예 회장으로서 선수를 직접 지도하지는 않는다.
2010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선수 부문 헌액자로 선정되었다. 2012년 10월 10일에는 야구 일본 대표팀의 투수 종합 코치로 취임했으며, 11월 13일 등번호 '78'이 발표되었다. 그는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일본 대표팀의 투수 코치로 활동했다. 2016년부터는 분카 방송과 병행하여 후쿠오카 방송의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다. 2019년에는 여자 경식 야구 클럽팀 '와카야마 레지나'의 명예 고문으로 취임했다.
2. 개인사
히가시오 오사무는 젊은 시절부터 밤놀이를 즐겨 매일 밤 유흥가에 드나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분카 방송 라이온스 나이터에서 오랫동안 벤치 리포트를 맡았던 프로 야구 코멘테이터 나카가와 주시로는 히가시오가 등판 전날에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회고했지만, 여배우 나카오 미에는 등판 전날에도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구단이 후쿠오카에서 도코로자와시로 이전했을 때, 그는 후쿠오카에 집을 산 지 얼마 안 되어 단신 부임했고, 한신에서 이적한 다부치 고이치와 의기투합하여 자주 술을 마셨다고 한다. 장녀 히가시오 리코는 "아버지가 큰 부상이나 장기 이탈 없이 20년간 던진 것은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술을 퍼마시고 밤놀이하고 땀 흘려 알코올을 빼는 전형적인 '쇼와 시대의 프로 야구 선수'였다. 엄청난 스피드나 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분이 200승이 넘는 승리를 거뒀으니, 나는 프로가 되어 다시 아버지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1974년 8월 27일 니혼햄과의 더블헤더 경기(진구 구장)에서, 가토 하지메와 함께 선발 예정이었으나 전날 가토와 트럼프를 하며 밤을 새워 한숨도 못 자고 구장에 도착했다. 그는 가토에게 1차전 선발을 양보했고, 가토는 2안타 1실점 완투승을 거두었다. 이에 자극받은 히가시오도 에너지 절약 투구법으로 4안타 2실점 완투승을 거두었고, 당시 이나오 가즈히사 감독은 "훌륭한 투구술이다"라고 극찬했다.
히로세 데쓰로는 자신의 저서 '프로 야구 나만 아는 비밀 이야기'에서, 경기 중 히로세가 히가시오와 대결할 때 계속 커트 파울을 만들자 히가시오가 마운드에서 내려와 "꼬마야, 언제까지 파울만 낼 거냐. 빨리 범퇴해라, 이 자식아!!"라고 고함쳤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히가시오 본인도 이를 인정하며 "손님이 질려 한다. '네 파울 누가 좋아하냐'고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고 회고했다.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신인 시절 통금을 어겨 구단으로부터 고액의 벌금을 청구받았을 때, 히가시오가 구단과 협의하여 벌금을 감액해 준 적도 있었다. 타자의 몸쪽을 공격하는 '켄카 투구법'은 종종 난투로 이어지기도 하여 "아이들 교육에 좋지 않다"는 비판도 있었으나, 히가시오는 이에 대해 "이건 프로 야구다. 교육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2010년 '베스트 파더상 인 간사이'에서 '베스트 파더 오브 더 브라이드'를 수상했으며, 2014년에는 '이쿠멘 오브 더 이어 2014' 스포츠 부문에서 수상했다.
3. 평가 및 영향력
히가시오 오사무는 일본 프로 야구계에서 선수와 지도자로서 독특한 평가를 받았다.
그는 스포츠닛폰에 연재된 칼럼에서 현역 시절 상대 타자 9명에 이어 10번째 적으로 당시 세이부 감독이었던 히로오카 다쓰로의 이름을 올리며, 히로오카에게 프라이드를 짓밟혔다고 언급했다. 캠프 시 알코올이 금지되었을 때, 그는 팀 최고령 선수였던 다부치 고이치와 함께 지인 의사가 넣어준 소형 냉장고에 맥주를 넣어 주전자에 담긴 맥주를 찻잔에 따라 마셨다고 한다. 1982년에는 베이스 커버 중 공을 놓친 문제로 선발에서 제외되었고, 1983년 히로오카의 '승부 조작' 발언에 대해서는 "아직도 용서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1985년 히로오카의 감독 사임 소식을 들었을 때 만세 삼창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히로오카 씨의 엄격한 지도 아래 젊은 선수들이 성장하고 팀이 강해진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세이부 라이온스 30년사' 인터뷰에서는 히가시오와 다부치 모두 "세이부 라이온스 창성기에 히로오카 감독은 필요 불가결한 존재였다"고 말했다. 2023년 출판한 저서 '지지 않는 힘'에서는 "네모토 씨가 모은 전력에 히로오카 씨가 기술과 전술을 심어주고, 모리 씨가 성숙시키는 순서로 세이부가 황금기를 구축했다고 생각한다. 감독으로서의 네모토 씨는 방임주의에 가까웠지만, 전력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히로오카의 관리 야구는 팀에 심각한 마찰을 초래했을 것이고, 히로오카 체제에서 미움받는 역할을 모리 씨는 감독이 되어 배려를 발휘했기에 상비군이 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감독으로 취임할 당시 세이부는 황금기의 주력 선수들이 이적하거나 노쇠화하는 등 전력 저하가 심각했으나, 히가시오는 투수진에 관해서는 마쓰자카 다이스케, 니시구치 후미야, 이시이 다카시, 도요다 기요시 등의 '선발 4본주'와 중간 계투 모리 신지 등을 육성하여 세대교체에 성공했다. 또한 세이부 황금 시대에 릴리프 투수였던 시오자키 데쓰야를 선발로 전환시키고, 닛폰햄에서 거의 전력 외로 이적해 온 니시자키 유키히로를 구원 투수로 재생하는 등 베테랑 기용에도 수완을 발휘했다. 야수진은 발이 빠르고 타격 기술과 수비력이 좋은 선수가 많았으나 장타력이 부족했는데, 특히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거인으로 이적한 이후에는 외국인 선수들의 활약에 따라 타선의 힘이 크게 좌우되었다. 그는 전형적인 1번 타자 유형이었던 마쓰이 가즈오를 일찍부터 클린업, 때로는 4번 타자로 기용했다. (다만 마쓰이 외에 장타를 기대할 수 있는 선수가 적었던 것도 사실이며, 마쓰이는 후에 트리플 쓰리를 달성했다.) 또한 스즈키 겐, 다카기 다이세이, 오제키 다쓰야, 오토모 스스무, 다카기 히로유키 등 주력 선수들이 좌타자에 치우쳐 있어 상대 좌완 투수에게 약점을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다이에 호크스는 2001년에 이미 외국인 투수枠이 채워져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세이부 공략을 위해 좌완 투수 크리스 헤이니를 영입할 정도였다.) 야수나 타격 지휘 면에서 완벽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황금기가 끝나고 전력상 과도기였던 상황에서 세대교체를 이루면서도 꾸준히 A클래스를 유지했다. 이러한 약점은 스도 유타카, 이하라 하루키 등의 코칭 스태프들이 보완한 점이 컸다. 1999년까지 투수 코치를 맡았던 모리 시게카즈는 자신의 저서에서 "같은 투수 출신인 히가시오 감독 밑에서 피칭 코치는 어려운 면도 있었다"고 기록했다. 2000년 외에 히가시오 밑에서 코치를 맡았던 이하라 하루키는 "맡긴 이상 끝까지 맡긴다. 그 점에서는 전혀 흔들림 없는 감독이었다. 다만 자신의 전문 분야인 배터리에 관해서는 담당 코치도 여러모로 배웠다. 투수 지도에 뛰어나, 예를 들면 1997년 요코하마에서 이적해 온 데니 도모리에게 '어차피 150 km/h 정도 나오는 공이 있으니, 그렇다면 한가운데를 겨냥해 던져라. 그러면 어디든 스트라이크 존에는 갈 테니 볼넷은 없을 것이다.'라고 어바웃한 피칭을 요구했다. 그 전까지 데니가 받았던 '10구 중 8구 노린 곳에 안 가면 1군에서 못 쓴다.'는 지도와는 정반대 생각이다. 눈앞의 안개가 걷힌 데니는 세이부의 중간 계투 주축으로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고 언급했다.
2000년에는 영입한 거물 메이저리거 레지 제퍼슨이 8월 25일 경기 9회에 수비 실수를 하자, 히가시오는 즉시 그를 교체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선수의 실수 직후 교체하는 행위가 선수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되어 미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지휘였고, 이에 격분한 제퍼슨은 항의했다. 히가시오는 이를 지휘 비판으로 간주하여 2군 강등을 명령했고, 제퍼슨은 즉시 귀국했다. 감독 시절에도 그는 선수들과 함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게임을 즐기는 등, 좋든 나쁘든 '상사'였던 히로오카나 모리 요시아키 감독과는 정반대의 형님·두목 같은 존재로 팀을 이끌었다.
1997년 일본 시리즈에서 맞붙었던 당시 야쿠르트 스왈로스 감독 노무라 가쓰야는 경기 전 기미가요 제창 시 세이부의 선발 투수나 포수가 정렬하지 않은 것, 노무라가 주심에게 항의하러 갔을 때 세이부 벤치에서 더러운 야유가 날아온 것, 세이부에 염색 머리 선수들이 있던 것 등에 대해 "옛날 세이부는 이런 팀이 아니었다", "이런 팀에게 져서는 안 된다"고 한탄했다. 노무라는 일본 시리즈 종료 후 모리와의 대담에서 "지금까지 모리 감독이 이끄는 세이부, 오기 아키라 감독이 이끄는 오릭스와 일본 시리즈에서 대결했지만 특별한 의식은 없었다. 1997년 일본 시리즈는 이 팀에게는 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언급했고, 모리도 "그 마음 알겠다"고 동조했다. 노무라는 또한 "자유분방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개성이라는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히가시오는 자신의 감독 시절에 대해 "황금 시대로부터의 탈피를 꾀하면서 리그 연패를 달성한 3년차, 4년차까지는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일본 시리즈는 이기지 못했고 마지막 해는 좀 더 싸울 수 있는 전력이었다고 생각한다. 선수나 코치의 희망이나 생각을 존중하며 팀워크를 강화할 수 있었던 것도 달성감이 있었지만, 히로오카 씨나 노무라 씨처럼 냉철하게 승리를 추구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고 소회를 밝혔다.
프로 야구 해설자로서 히가시오의 해설은 "이자카야 중계", "한 잔 걸치고 해설하러 온 것 아니냐" 등이라는 야유를 받기도 했다. 이는 그의 독특한 말투와 부정확한 발음이 술 취해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각한 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해설이 특징이며, 중계에서 히가시오와 콤비를 이룬 분카 방송 아나운서 사이토 가즈미는 "배려는 있지만 사양은 없다"를 히가시오의 캐치프레이즈로 사용했다. TV 아사히 야구 해설자 시절의 캐치프레이즈는 "히가시오의 즈바리 해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