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Amateur Career
후루타 아쓰야는 효고현 가와니시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야구와 깊은 인연을 맺었으며, 아마추어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1. Childhood and Youth
후루타 아쓰야는 효고현 가와니시시에서 태어났다. 가와니시 시립 가모 초등학교 3학년 때 지역 소년 야구팀인 '가모 브레이브스'에 입단했다. 당시 몸집이 통통하다는 이유로 포수를 맡게 된 것이 야구 인생의 시작이었다. 어린 시절 그가 좋아했던 선수는 나시다 마사타카였다.
가와니시 시립 가와니시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야구를 계속했으나, 상급생들의 심한 괴롭힘(폭력, 1리터 콜라 강요, 과도한 벌칙 달리기 등)으로 인해 야구를 그만두고 싶어 했다. 부모님의 노력으로 여름방학이 끝난 후 2학기부터 다카라즈카 시립 미나미히바리가오카 중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주목받아 고등학교 진학 시 사립 학교들의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지만, 집에서 가까운 공립 학교인 효고현립 가와니시메이호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그는 거의 무명으로 지냈다. 고등학교 3학년 8월부터 수험 공부를 시작하여 간사이 대학 상학부와 리쓰메이칸 대학 경영학부 경영학과에 모두 합격했다. 당시 간사이 학생 야구 리그에서는 간사이 대학이 리쓰메이칸 대학보다 강팀이었기 때문에 그는 간사이 대학으로 진학을 결정했었다. 하지만 리쓰메이칸 야구부 감독인 나카오 다쿠이치의 적극적인 권유와, 교토 기온의 밤거리에 매료되어 마음을 바꿔 1984년 봄 리쓰메이칸 대학에 입학하며 야구부에 입단하게 되었다.
1.2. University and Social Baseball
리쓰메이칸 대학 재학 시절, 후루타는 고등학교 때 0.5였던 나안 시력이 수험 공부로 인해 0.1까지 떨어지자 안경을 착용하게 되었다. 그는 "선배들에게 인사할 때 안 보였다고 변명할 수 없어서 안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간사이 학생 야구 리그는 긴키 대학의 전성기였으나, 3학년 때인 1986년에는 에이스 이와모토 도시히토와 배터리를 이뤄 팀을 춘계 및 추계 리그 연속 우승으로 이끌었다. 4학년이던 1987년에는 주장을 맡았고 미일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팀에 선출되는 등 프로 구단들의 주목을 받으며 프로 입단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7년 11월 18일 드래프트 회의 당일, 리쓰메이칸 대학은 기자회견장까지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명 확약을 받았던 구단을 포함해 어느 구단으로부터도 지명받지 못했다. 당시 닛폰햄 파이터스 구단 전무였던 오사와 게이지는 후에 후루타가 '야맹증'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 때문에 닛폰햄이 지명을 철회했다고 밝혔다. 후루타 자신은 난시 때문에 드래프트에서 탈락했다고 회고하며, 이러한 굴욕이 "프로에서 기필코 성공하겠다"는 강한 반골 정신을 키웠다고 말했다.
프로 입단이 좌절된 후루타는 1988년 3월 리쓰메이칸 대학 경영학부를 졸업하고 토요타 자동차에 입사했으며, 동시에 토요타 자동차 경식 야구부에 입단했다. 그는 인사부에 배치되어 야구 연습 시간 외에는 직원 문제 처리와 사내 레크리에이션 기획 등을 담당했다. 이러한 사회인 야구 시절의 경험을 통해 그는 일반적인 금전 감각을 익혔고, 이는 프로 생활에도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토요타 자동차에서 1년차부터 주전 포수를 맡아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서 활약했다. 1년차 도시 대항에서는 NTT 도카이의 보강 선수로 팀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1988년 8월 서울 올림픽 야구(당시 시범 종목) 일본 국가대표팀으로 발탁되어, 노모 히데오, 시오자키 데쓰야 등과 배터리를 이뤘다. 그는 올림픽 출전이 프로 입단에 필수적이라고 판단, 감독의 야구관을 철저히 분석하여 활발하고 끈기 있는 모습을 적극적으로 보여주어 일본 대표팀에 합류했다. 비록 결승에서 미국에 패했지만 은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이듬해 1989년에는 팀을 9년 만에 도시 대항 본선으로 이끌었으나, 2회전에서 우승팀인 프린스 호텔에 아쉽게 패했다.
1989년 드래프트 회의를 앞두고 후루타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또는 야쿠르트를 희망한다고 보도되었다. 야쿠르트는 1987년 드래프트에서도 후루타를 지명 후보에 올렸으나, 2순위 이하로는 프로에 가지 않겠다는 정보 때문에 포기했었다. 하지만 당시 야쿠르트의 야수진은 이케야마 다카히로, 히로사와 가쓰미 등 젊은 선수들이 성장하고 있었음에도 포수 포지션이 취약했다. 베테랑 야에가시 유키오의 뒤를 이을 주전 포수를 놓고 하타 신지와 나카니시 지카시가 경쟁하고 있었으나, 두 선수 모두 도루 저지율이 낮아 강한 어깨와 수비력을 갖춘 즉전력 포수 영입이 시급했다. 자신도 포수 출신인 가타오카 히로오 스카우트 부장은 올림픽을 통해 기량이 발전한 후루타의 플레이에 반해 그의 영입을 추진했고, 구단 수뇌부의 승인을 받아 후루타를 2순위로 지명하기로 내정했다.
그러나 10월, 와카마쓰 쓰토무 대신 야쿠르트 본사 사장 구와바라 준이 지지하는 노무라 가쓰야가 신임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노무라 감독은 "대학 졸업생 중에 명포수는 없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안경을 쓴 포수는 마스크가 밀려 좋지 않다"는 의견을 피력하며 후루타의 지명을 반대했다. 하지만 가타오카 부장은 "후루타와의 약속을 깰 수 없다"며 반발했고, 구단 간부들도 후루타 지명 방침을 고수했다. 결국 야쿠르트는 노무라 감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후루타를 2순위로 지명했다. 노무라 감독은 후에 자신의 저서에서 자신이 오히려 후루타의 지명을 지시했고, 안경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며 가타오카의 주장과 상반된 주장을 펼쳤다. 당시 야쿠르트 스카우트였던 도리하라 고지 역시 노무라 감독이 드래프트 회의 전까지 후루타 지명 약속 자체를 몰랐으며, 안경 때문에 반대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고 증언하여 두 사람의 주장은 엇갈린다.
2. Professional Playing Career
후루타 아쓰야는 1990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입단한 이후, 뛰어난 공수 겸장 포수로 활약하며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2.1. Early Success and Dominance (1990-2000)
1990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입단한 후루타는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1순위 지명자 니시무라 류지와 함께 유마의 1군 캠프 멤버로 선발되었다. 언론에서는 그를 "즉전력감"으로 평가했지만, 노무라 가쓰야 감독은 "어깨는 일류지만 타격은 2류, 리드는 3류"라고 혹평하며 안경 때문에 마스크가 밀린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시즌 초에는 하타 신지가 주전 포수로 나섰지만, 하타가 수비 불안을 노출하자 4월 28일 후루타가 처음으로 선발 출전했다. 노무라 감독은 당시 "하타와 나카니시의 리드에 불만을 느껴 어쩔 수 없이 후루타에게 기회를 줬다"고 밝혔다. 6월 초까지 하타와 병용되었으나, 하타가 외야수로 전향하면서 후루타는 주전 포수로 자리 잡았다. 그는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감독 추천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등 라이벌 팀 감독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경기 출전 후 노무라 감독의 꾸중이 잦았지만, 후루타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감독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가르침을 얻으려 노력했다. 시즌 후반에는 나카니시 지카시와 병용되었으나, 공수 양면에서 우위를 점하며 주전 자리를 굳혔다. 신인 포수로는 오야 아키히코 이후 처음으로 도루 저지율 리그 1위(0.527)를 기록하며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고, 타격에서도 334타석에서 타율 0.250, 26타점을 기록하며 합격점을 받았다. 선배 포수 야에가시 유키오는 후루타의 합류 이후 투수와 포수 간의 소통이 활발해지고 팀 전체의 야구 수준이 향상되었다고 평가했다.
1991년, 올스타전 1차전(도쿄 돔)에서 상대 주자의 도루 3번을 모두 저지하며 MVP를 수상했다。정규 시즌에서는 타율 0.340을 기록하며 수위 타자에 등극했다. 포수로서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한 것은 노무라 가쓰야 이후 역대 2번째이자 센트럴 리그 최초의 기록이었다. 특히 이 수위 타자 경쟁은 주니치 드래건스의 오치아이 히로미쓰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0월 12일 기준으로 후루타가 0.3390, 오치아이가 0.3352였으며, 야쿠르트는 2경기, 주니치는 4경기를 남겨두고 있었다. 10월 13일 두 팀의 직접 대결에서 노무라 감독은 오치아이에게 전 타석 고의사구를 지시했고, 오치아이는 한 경기 6사구라는 일본 신기록을 세웠다(후루타는 결장). 오치아이는 이후 타율이 0.3315까지 떨어졌다가, 최종전에서 5타석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타율을 0.3396으로 끌어올려 잠시 후루타를 역전했다. 하지만 10월 16일 마지막 경기에서 후루타는 첫 타석에서 안타를 쳐 사실상 수위 타자 타이틀을 확정 지었다.
1992년, 6월 6일부터 7월 11일까지 24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했다. 올스타전 2차전(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는 올스타전 사상 첫 사이클링 안타를 기록하며 다시 MVP를 수상했다. 시즌에서는 전 경기 출장을 달성하며 타율 0.316(리그 3위), 개인 최다인 30홈런(리그 공동 2위), 86타점(리그 5위)을 기록하는 등 공수 양면에서 맹활약하며 야쿠르트의 1978년 이후 14년 만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세이부 라이온스와 맞붙었으나 3승 4패로 패했다.
1993년, 5월 27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오쿠보 히로모토가 다카쓰 신고의 투구에 왼손목을 맞은 뒤 파울이라고 주장한 것이 발단이 되어 다음 대결인 6월 8일 경기 전 거인 벤치에서 보복성 사구가 예고되었다. 실제로 그 경기에서 후루타는 첫 타석에서 미야모토 가즈토모의 투구에 사구를 맞았고, 이후 홈으로 돌진하는 과정에서 요시하라 고스케의 끈질긴 태그로 인해 잭 하웰이 분노하여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즌 전 경기 출장을 달성하며 리그 우승의 주역이 되었고 시즌 MVP에 선정되었다. 이 해의 도루 저지율 0.644는 2024년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일본 기록이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전년도와 동일하게 세이부 라이온스와 맞붙어 이토 쓰토무와의 포수 대결이 화제가 되었다. 팀은 4승 3패로 일본 시리즈를 제패했다.
1994년, 첫 CD 데뷔를 했으나 발매 6일 후인 4월 14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에서 마에다 도모노리의 파울 팁을 맞고 오른손 검지 손가락 골절상을 입어 시즌 초반부터 장기 이탈했다. 6월 14일 1군에 복귀했지만 타격 부진이 심해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결국 76경기 출전, 타율 0.238, 3홈런, 19타점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고, 팀은 4위에 그쳤다.
1995년, 정규 시즌 전 경기(130경기)에 출전했다.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이치로와의 대결이 큰 주목을 받았다. 미팅에서 이치로 대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경기에서도 치밀한 배구로 이치로를 억제하며 팀의 4승 1패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그해 오프 시즌에는 당시 후지 TV 아나운서였던 나카이 미호와 결혼했다.
1997년, 전 경기에 출전하여 4번 타자로서 리그 3위 타율 0.322, 9홈런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강한 타격으로 리그 6위 86타점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했다.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3승 3패 동점인 8회말 와타나베 히사노부로부터 결승 홈런을 터뜨리며 팀의 4승 1패 우승을 이끌었다. 포수로서 처음으로 센트럴 리그 시즌 MVP와 일본 시리즈 MVP를 동시에 수상했고,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1998년에는 통산 1000경기 출장을 달성했으나 타격이 다소 부진했고 팀도 4위에 머물렀다. 그해 스승인 노무라 가쓰야 감독이 야쿠르트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오프 시즌에 자유 계약 권리를 행사하여 야쿠르트와 5년 계약을 맺었으며,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와카마쓰 쓰토무가 감독으로 취임한 1999년 시즌에는 5번째로 타율 3할을 달성했다. 같은 해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야구 경기 아시아 최종 예선인 제20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팀에 팀 내 최고령 선수로 선발되어 15살 연하의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배터리를 이뤘다. 2000년에는 야쿠르트가 올림픽 본선 진출이 어려워 올림픽 본선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팀은 3년 연속 4위를 기록했지만, 후루타는 개인적으로 두 번째로 시즌 도루 저지율 6할을 달성했다.
2.2. Later Career and Milestone Achievements (2001-2005)
2001년, 팀의 선두 경쟁 중이던 8월 28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메이지 진구 야구장) 9회초 수비 중 왼쪽 무릎 뒤십자인대 손상으로 전치 3주의 중상을 입었다. 8월 30일 선수 등록이 말소되어 9월 17일까지 19경기에 결장했다. 복귀 초에는 주로 대타로 출전했으며, 9월 24일 선발 복귀 시에는 무릎 관절이 과도하게 꺾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특수 제작된 정강이 보호대를 착용했다. 10월 6일, 4년 만에 팀의 리그 우승을 확정 지었다. 시즌 타율 0.324로 마쓰이 히데키와 수위 타자 경쟁을 벌였고, 이는 본인에게 2번째로 높은 타율이자 리그 2위 기록이었다.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14타수 7안타, 타율 0.500, 1홈런, 7타점을 기록했으며, 긴테쓰의 '이테마에 타선'을 타율 0.171로 억제하며 팀의 4승 1패 우승에 기여했다. 그는 이 시리즈에서 개인 통산 두 번째로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2002년, 4년 만에 10홈런을 넘기지 못했지만 타율 3할을 기록했다. 또한 만루 상황에서 11타수 8안타(타율 0.727)를 기록하는 등 만루에서의 강한 승부 근성을 보여주었다.
2003년, 시즌 개막 직전에 오른손 약지 손가락 골절상을 입었으나 완치되지 않은 상태로 개막전에 강행 출전했다. 6월 28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에서 일본 타이 기록인 1경기 4홈런과 4타수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 시즌 동안 선발 포수 마스크는 단 1경기만 결장했을 뿐이며, 타율은 2년 만에 3할 밑으로 떨어졌지만 1995년 이후 처음으로 20홈런 이상을 기록했다.
2004년, 시즌 초반 타격 컨디션이 좋았고 타격 타이틀 경쟁에도 가담했으나, 구단 재편 문제로 인한 선수회 활동이 격무로 이어지면서 점차 성적이 하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산 8번째로 시즌 타율 3할(0.306)을 기록했는데, 이는 그의 마지막 규정 타석 도달 시즌이었다. 39세 시즌에 타율 3할을 달성한 것은 역대 3번째이자 포수로서는 사상 최초였다. 타율 0.306은 이와모토 요시유키와 가도타 히로미쓰에 이어 39세 시즌 타율 역대 3위였고, 148안타는 이와모토와 함께 39세 시즌 안타 역대 1위였다. 반면 도루 저지율은 리그 최하위인 0.259를 기록하며 어깨의 노쇠화가 확연히 드러났다.
2005년 4월 24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봇짱 스타디움)에서 노무라 가쓰야에 이어 역대 2번째 포수이자, 대졸 및 사회인 야구 출신 선수로는 사상 최초로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그러나 4월 27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왼쪽 고환 부위 타박상으로 전치 1주의 부상을 입었고, 이를 계기로 컨디션이 나빠져 편도선염이 발병하면서 선수 등록이 말소되었다. 8월 19일에는 왼쪽 대퇴부 뒷근육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는 등 이 시즌 두 차례나 전력에서 이탈하며 11년 만에 규정 타석에 미달했고, 오노 고세이나 요네노 도모히토 등 후배 포수들에게 출전 기회를 양보했다. 10월 5일에는 통산 1000타점을 달성했다.
3. Player-Manager Era (2006-2007)
2005년 시즌 종료 후 와카마쓰 쓰토무 감독이 퇴임하자, 후루타 아쓰야가 야쿠르트의 차기 감독으로 지명되었다. 10월 18일, 그는 야쿠르트와 선수로서 1년 계약, 감독으로서 2년 계약을 체결하며, 과거 스승인 노무라 가쓰야 이후 29년 만에 일본 프로 야구에서 선수 겸 감독이라는 독특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감독으로서의 첫 임무 중 하나는 다음 시즌에 계약을 맺지 않을 선수들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구단으로부터 명단을 건네받아 "필요 없는 선수들에게 X표 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그는 나중에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팬 서비스 개선책 마련을 위해 구단과 지속적으로 협상했고, 카카쿠컴 사장(당시)인 아키타 요시키 등을 구단 외부에서 영입했다. 11월 1일 'F-프로젝트'를 발족하여 다양한 팬 서비스 및 지역 밀착 정책을 추진했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후루타는 구단명에 도시명을 포함할 것을 제안했고, 12월 19일 프로 야구 실행 위원회에서 신구단명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로의 변경이 승인되었다.
2006년, 언론과 평론가들은 그간의 견실한 플레이 스타일을 바탕으로 후루타 감독이 "견실한 야구를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는 1번 아오키 노리치카, 2번 애덤 리그스, 3번 이와무라 아키노리, 4번 알렉스 라미레스, 5번 그렉 라로카로 이어지는 공격적인 타선을 구축했다. 이 해 팀의 총 홈런 161개는 리그 최다였고, 총 득점 669점은 주니치 드래건스와 함께 리그 최다 타이였다. 반면 투수진은 선수층이 얇았고, 특히 중간 계투진은 이시이 히로토시와 이가라시 료타의 부상과 부진으로 인해 고정되지 못했다. 감독으로서 70승 73패 3무로 승률 0.490을 기록하며 리그 3위로 시즌을 마쳤으나, 선수로서는 36경기 출전에 그치며 개인 최저 성적을 기록했다. 그해 오프 시즌 계약 협상에서는 선수 연봉이 대폭 삭감되어 당시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대 삭감 폭인 1.80 억 JPY(75% 삭감)가 감소한 6000.00 만 JPY에 계약을 갱신했다.
2007년, 알렉스 라미레스와 아오키 노리치카가 시즌 종반 수위 타자 경쟁을 벌였고, 최종적으로 라미레스가 센트럴 리그 최다(프로 야구 역대 5위)인 204안타를 기록하며 타이틀을 획득했다. 한편 후루타는 4월 19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의 경기에서 통산 2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이 경기에서 요코하마의 이시카와 다케히로가 큰 점수 차 상황에서 도루를 시도한 것이 발단이 되어 엔도 마사타카의 위험구 판정에 대한 심판과의 논쟁 끝에 "상식 없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퇴장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전년부터 앓던 오른쪽 어깨 통증 회복이 지연되어 8월까지 출전한 경기는 단 3경기뿐이었다. 선수 등록 말소도 두 차례나 되는 등 벤치에서 작전에만 전념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9월 17일, 야쿠르트의 B클래스(리그 6위)가 확정되어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 가능성이 사라지자, 그는 사의를 굳혔다. 9월 19일 메이지 진구 가이엔에 있는 메이지 기념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팀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다"며 현역 은퇴와 감독직 사임을 동시에 발표했다. 그는 회견에서 퇴임 이유에 대해 "사장님으로부터 '1년 더 하는 건 어떠냐'는 제안도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은퇴 및 퇴임 발표 후에는 야쿠르트 팬뿐만 아니라 다른 구단 팬들로부터도 "떠나지 마세요",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등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9월 27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에서 시즌 첫 안타를 기록했다. 상대 팀 홈구장인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경기였으나, 경기 후 히로시마 감독인 마티 브라운으로부터 꽃다발을 받으며 후루타가 양팀 팬들에게 사인볼을 던지는 소박한 세레모니가 진행되었다. 소속팀이 아닌 상대 구단의 홈 경기에서 은퇴 세레모니가 열린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의 마지막 출전 경기가 된 10월 7일, 후루타의 은퇴 경기가 열렸다. 상대는 공교롭게도 히로시마였다. 진구에서의 마지막 타석이 된 8회말 4번째 타석에서는 전날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은퇴 경기를 치른 사사오카 신지가 등판했다(사사오카는 전날 직접 등판을 자청했으며, 이것이 그의 현역 마지막 등판이 되었다). 후루타는 유격수 땅볼로 물러났다. 그는 훗날 "사사오카가 등판할 줄 알고 있었다"며 "공이 느렸다. (사사오카도 선수로서 전성기는 지났고) 프로의 공이 아니었다. 너무 느려서 '이거 걸리겠네' 싶더니 유격수 땅볼이었다"고 회고했다. 또한 이 경기 8회에는 이시이 가즈히사, 9회에는 다카쓰 신고와 배터리를 이뤄 현역 마지막 포수 마스크를 썼다. 은퇴 경기 이틀 후인 10월 9일 야쿠르트의 시즌 최종전(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애덤 리그스의 대타로 마지막 타석에 들어서 요시미 유지로부터 좌중간을 가르는 현역 통산 2097번째 안타를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10월 11일, 감독으로서의 마지막 업무인 시즌 종료 보고를 위해 야쿠르트 본사를 방문하여 호리 스미야 구단주와 면담했다. 그 자리에서 그의 등번호 '27'번을 구단 최초의 '명예 번호'로 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또한 구단으로부터 공로금으로 5000.00 만 JPY을 받았다. 한편, 전날인 10월 10일 구단이 다카쓰 신고에게 갑작스럽게 방출 통보를 한 것에 대해 구단 프런트로부터 사전 통보나 논의 기회가 전혀 없었던 점 등을 언급하며, 마지막까지 프런트와의 갈등이 남아있었다.
4. Retirement and Post-Playing Career
선수와 감독으로서 은퇴한 후루타 아쓰야는 야구 해설가, 방송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야구계와 사회에 계속해서 영향력을 미 미치고 있다.
2007년 11월 21일자로 임의 은퇴가 공시되어 야쿠르트를 떠났다. 11월 23일 팬 감사 데이에는 다카쓰 신고와 마찬가지로 불참했지만, 11월 25일 신호도 프리미어A에 코멘테이터로 복귀했다. 11월 28일 방송된 트리비아의 샘 2007 가을 SP에 출연한 이후 코멘테이터로서 텔레비전 출연을 시작했다. 해설자로서 첫 출연은 2007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야구 일본 대표팀 경기(TV 아사히)였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재팬 컨소시엄의 야구 해설이 아닌 후지 TV 중계의 종합 캐스터로 출연했다(그는 특정 방송국과 전속 계약을 맺지 않고 프리랜서로 활동한다).
2015년 1월 23일, 야구 명예의 전당에 255표를 얻어 플레이어 부문으로 헌액되었다. 그는 헌액 당시 "가장 자랑스러운 기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기록이라기보다는, 안경을 쓰고 야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답했다. "눈이 나빠서 안경을 쓴 프로 야구 선수는 안 된다고 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고등학생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안경 덕분에 야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해줘서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노무라 가쓰야는 그를 축하하며 "내가 야쿠르트 감독으로 9년간 있으면서 4번 우승했는데, '우승팀에는 명포수가 있다'는 나의 지론을 구현해냈다. 후루타의 성장과 함께 야쿠르트가 강해졌다. 명예의 전당 헌액은 자랑스러운 일이며, 당시 선수 중 첫 헌액은 당연하다"고 언급했다.
2016년에는 '제11회 BFA U-18 야구 선수권 대회', '제7회 여자 야구 월드컵', '제1회 U-23 야구 월드컵'의 홍보대사를 이나무라 아미와 함께 맡았다.
2019년 4월부터 시즈오카현 야이즈시 내 여러 기업이 연합한 사회인 야구 클럽팀 '야이즈 마린즈'의 자문위원으로 취임했다。이는 클럽 대표인 도자키 요시히토가 토요타 자동차 시절 팀 동료였던 인연 때문이었다.
2021년에는 야쿠르트의 춘계 캠프 두 번째 기간부터 임시 코치를 맡으며 14년 만에 현장에 복귀했다. 그는 불펜 포수로서 이시카와 마사노리와 14년 만에 배터리를 이뤘고, 타격 투수로서 공을 던지는 등 열정적인 지도를 펼쳤다. 같은 해 3월 20일에는 일본 여자 소프트볼 리그 기구 이사에 취임하는 것이 발표되었다.
2023년 2월, 3년 연속으로 야쿠르트의 춘계 캠프 임시 코치를 맡은 후, 2월 15일부터 월말까지 MLB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임시 코치를 맡는 것이 발표되었다. 2024년에도 임시 코치로 다이아몬드백스 스프링 캠프에 참가했으며,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과거에는 연습을 안 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엄청나게 연습한다"고 하루 6시간의 맹연습을 증언했다.
5. Player Profile
후루타 아쓰야는 포수로서 뛰어난 수비 능력과 타격 기술을 겸비했으며, 특히 그의 높은 야구 지능과 리더십은 일본 야구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5.1. Defensive Skills
일본 야구계에는 한때 "안경을 쓴 포수는 대성하지 못한다"는 징크스가 있었고, 난시가 심해 당시 콘택트렌즈가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안경을 착용했던 후루타도 이러한 편견에 직면했다. 대학 시절 수위 타자를 기록했음에도 드래프트에서 지명되지 않았고, 사회인 야구에서 프로에 입단할 때도 안경이 '최대의 단점'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그는 프로 입단 후 즉전력으로 활약하며 이러한 징크스를 깨고 일본 야구계를 대표하는 포수가 되었다.
후루타는 'ID 야구의 총아'라는 별명으로 명성을 떨쳤다. 투수에게 초구부터 결정구를 요구하거나, 세 번째 스트라이크를 잡을 때 스트라이크 존 중앙에 직구를 요구하는 등 타자의 허를 찌르는 배구를 구사했다. 특유의 강한 어깨와 더불어, 송구 전 동작, 포구 후 즉각적인 송구 동작으로의 전환 기술, 정확하고 빠르며 강력한 송구를 철저히 연마했다.
1991년에는 12명 연속 도루 저지를 기록했으며(기록은 오카다 아키노부에게 허용하며 중단), 1993년에는 시즌 도루 저지율 0.644라는 일본 기록을 세웠다. 1993년 시즌 외에도 2000년 시즌에 도루 저지율 6할 이상을 기록했고, 선수 생활 동안 도루 저지율 리그 1위를 통산 10회 기록했다. 그는 입단 이후 13년 연속으로 도루 저지율 4할 이상을 유지하는 등 매우 높은 수준의 안정적인 저지율을 오랫동안 유지했으며, 통산 도루 저지율에서도 0.462라는 일본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높은 포구 및 송구 능력의 이유로 하반신의 유연성이 자주 언급된다. 후루타 자신은 고관절의 유연성에 대해 "타고난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여자처럼 앉을 수 있었다. 무릎 관절과 인대도 느슨한 편이다. 잘 늘어난다고 할까, 부드럽다고 할까... 특히 무릎은 느슨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트를 움직이지 않고도 볼로 판정될 만한 공을 스트라이크처럼 보이게 하는 캐칭 기술도 가지고 있었다. 야노 아키히로는 "후루타의 캐칭은 손으로 잡는 것보다 하반신으로 잡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낮은 자세는 중심을 이용해 공을 올리는 데 유리하며, 심판에게도 모두 스트라이크로 보이게 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단순히 공이 미트에 잘 들어간다는 이유로 큰 미트를 선호했다. 수비와 타격 양면에서 기존의 정설로 여겨지던 기술에 대해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독자적인 이론을 구축했다. 과거에는 "포수는 포구 시 겨드랑이를 조여 자세를 잡아야 한다"는 이론이 있었지만, 후루타는 오히려 양팔을 느슨하게 하고 검지 손가락을 약 45도 각도로 자세를 잡았다. 이는 겨드랑이를 조이면 팔꿈치 자유도가 떨어지는 단점을 우려했기 때문이며, 낮은 공을 잡을 때 미트를 위에서 덮는 방식으로밖에 잡을 수 없어 볼로 판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미트를 아래에서 퍼 올리는 포구를 추구한 결과 '겨드랑이를 벌리는 자세'로 이어졌다. 신인 시절 노무라 감독이 이 자세를 보고 "다시 한번 해봐라"고 한 뒤 "네가 그렇게 하는구나. 과연, 배웠다"고 말했다고 한다.
미야모토 신야의 말에 따르면, 수비 체계 지시는 포수인 후루타가 모두 담당했다. 그로 인해 후루타의 포수 출전이 급감한 2006년 이후부터는 이전까지 수비망에 걸렸던 타구들이 간발의 차이로 외야로 빠져나가는 빈도가 높아졌다고 한다. 포수 외에 1993년 리그 우승 확정 후 다음 경기에서는 외야수(좌익수)로, 1997년에는 노무라 가쓰노리와 수비 위치를 바꾸는 형태로 1루수로 출전한 적도 있다. 현역 시절 포구로 인해 엄지와 검지 사이의 힘줄을 혹사하여 은퇴 후에는 손바닥을 펴면 엄지손가락이 손목 부근까지 축 처지게 되었다. 그는 2021년 5월 자신의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이 모습을 담은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5.2. Batting Skills
후루타 아쓰야는 포수로서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다인 통산 8차례 시즌 타율 3할을 기록했다. 수비 부담이 큰 포수를 맡으면서도 기록한 통산 타율 0.294는 7000타수 이상 선수 중 역대 9위에 해당한다. 프로 2년차인 1991년에는 수위 타자를 획득했으며, 그 해의 타율 0.3398은 2012년 아베 신노스케가 0.3405를 기록하기 전까지 2리그제 이후 포수 시즌 타율 역대 최고 기록이었다.
그는 신인 시절 오치아이 히로미쓰의 타격을 포수 시점에서 보고 참고하여 자신의 타격에 접목시켰다고 한다. 타격에서도 자신만의 독자적인 이론을 가지고 있었는데, 2스트라이크 이후에는 삼진으로 인해 타율이 크게 떨어지므로 초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현역 시절 투수에 맞춰 배트를 바꿔가며 사용했으며, 자신을 '야구계에서 가장 배트를 많이 바꾼 남자'라고 주장했다。예를 들어 느린 커브에는 짧은 배트가 먼저 맞지만, 긴 배트로는 정타를 칠 수 있다는 단순한 이유로 상대에 따라 배트를 선택했다. 배트를 자주 바꾼 것은 의도적으로 배트 탓을 함으로써 기분 전환을 꾀하는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현역 시절 이세 다카오 타격 코치로부터 "강요하자면, 너는 무수히 많은 유파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으며, 은퇴 후 자신의 저서에서도 정해진 타격 폼이 없었음을 인정했다.
그는 2021년 5월 자신의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홈런을 못 치는 건 아니지만, 타율 위주, 안타를 노리는 단타자"라고 자신의 타격 성향을 설명했다. 은퇴 후 그는 "뒷다리에 체중을 너무 싣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스웨이(밀려 나가는 동작)함으로써 까다로운 공에 손목이 꺾이지 않도록 한다", "스웨이하면서 타격할 때 앞 팔꿈치를 빼듯이 하고, 몸을 뒤로 돌려 오른발을 축으로 회전하여 치면 몸쪽 공에 덜 막힌다"고 타격론을 설명했다. 후루타 자신의 젊은 시절에는 지도자들이 모두 "겨드랑이를 조여라"고 지도했지만, 2020년대에는 겨드랑이를 조이는 것에 구애받지 않는 지도자들이 늘어났다고 말했다.
5.3. Leadership and Game Intelligence
후루타 아쓰야는 경기 중 뛰어난 판단력과 전략적 사고를 바탕으로 팀을 이끄는 리더십과 야구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한 지능적인 플레이로 정평이 나 있었다. 특히 노무라 가쓰야 감독의 'ID 야구'를 가장 잘 구현해낸 선수로 평가받는다. 그는 단순히 수비와 타격에서 뛰어난 것을 넘어, 투수와의 치밀한 호흡, 상대 타자 분석, 그리고 경기 상황에 따른 유연한 전략 변화를 통해 팀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야쿠르트의 황금기에는 후루타가 마스크를 쓰고 있을 때 팀의 수비력이 극대화되었다는 평가가 많았다.
6. Philosophy and Ideology
후루타 아쓰야는 야구뿐만 아니라 인생에 대한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고방식과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유유결단'이라는 독특한 철학을 강조했다.
6.1. Baseball Theory
후루타 아쓰야는 야구에 대한 깊이 있는 이론과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 팀 콘셉트와 소통:** 팀의 콘셉트를 기본적으로 따라야 하지만, 서로가 지나치게 조심하여 소통이 끊기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베테랑이 된 후 신인 선수들에게 "다르다고 생각하면 고개를 저어라"고 지도했다. 고개를 저어 의사를 표명한 이상 책임감이 생기고, 투수는 필사적으로 던지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 약점 극복:** 특기를 살리고 싶다면 단점을 없애야 하며, 그렇게 하지 못하면 언제까지나 주전 선수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 배구의 중요성:** 배구에서는 허를 찌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스트라이크에서 볼이 되는 바깥쪽 변화구로 쉽게 헛스윙 삼진을 잡으려 하면, 중요한 순간에 배구를 읽히는 경우가 늘어나므로 권장하지 않았다. 그는 포수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홈런을 맞는 것 자체가 아니라 중요한 상황에서 홈런을 맞는 것이라고 말했다.
- '번트 없는 2번 타자':** 감독 시절, 애덤 리그스를 '번트하지 않는 2번 타자'로 중용한 것은 번트로 아웃을 내주는 것보다 2번 타자가 안타를 쳐 1번 타자와 함께 주자 2명을 만드는 상황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리그스가 발이 빨라 병살타의 위험이 적었다. 당시 야쿠르트에서는 후배 포수도 성장하지 못했고, 투수진도 신뢰할 만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타격으로 이기는 야구'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역 시절부터 '희생 번트만 하는 2번 타자'에 대해 "2번 타자가 치는 게 더 싫지 않나"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감독 시절 한 젊은 기자가 "그곳은 번트가 세이프티(정석) 아닌가요?"라고 물으며 자신의 2번 타자 기용에 대해 불만을 표하자, 후루타는 항변했지만 기자가 계속해서 물고 늘어지자 화를 냈고, 이에 기자는 '후루타 감독, 역정'이라는 보복 기사를 썼다고 한다.
- '정교한 야구'의 정의:** 감독 시절 그는 오로지 타격으로 이기는 야구를 추구했기 때문에, 신문 기자들로부터 "더 정교한 야구를 할 줄 알았는데"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후루타에게는 '없는 소매는 휘두를 수 없다'는 상황에서 나온 그 야구야말로 가장 정교한 야구였다고 설명했다. 그의 감독 시절 '대략적인 야구'로 비칠 수 있는 전술에 대해 노무라 가쓰야는 자신의 저서에서 "그는 나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야구를 하고 있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 젊은 선수들의 결단력:** 그는 최근 젊은 선수들(2009년 저서 발매 당시 1980년대생 선수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임)이 너무나 상냥한 사람들 밑에서 과보호 속에 자랐기 때문에 결단력이 없다고 분석했다. 그래서 후루타는 그런 선수들에게는 오히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등 다소 거칠게 대하는 것이 결과에 신경 쓰지 않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2009년 당시). 반면, 2021년 7월에 업로드된 자신의 공식 영상에서는 현역 시절 아군 투수가 경기에서 잘 던지지 못하고 교체되어 생각에 잠겨 있으면, "세심한 성격의 투수에게는 거짓말이라도 세심하게 답하는" 방식으로 납득시켰다고 언급했다.
- 선수의 자질:** 시즌 내내 매 경기 80% 정도의 힘을 아끼면서 출전할 수 있는 선수가 뛰어난 선수이며, 관객에게 경기를 보여주는 프로로서 적격이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서는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온오프 전환이 가능한 것이 중요하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강조했다.
- 야구의 로망:** 그는 프로 야구 선수는 '로망을 주는 것'이 일이라고 생각하며, 선발 투수를 조기 강판시키기 위해 초구부터 커트하는 타자를 "그런 짓을 하면 프로 야구가 아니다"라며 못마땅해했다. 또한 일본 야구 시절 한때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좌익수 폴대를 노리는 경우가 많았던 마쓰이 히데키에게 올스타전 때 벤치에서 만나 "마쓰이... 뜻이 낮다"고 충고한 적도 있다. 그는 과거 투수들은 로망을 추구하며 직구에 집착했지만, 2022년 시즌 현재는 컷 패스트볼 등을 던지는 투심 계열 투수가 늘었다고 증언했다.
- 훈련론:** 그는 러닝을 긍정하는 입장이며, 웨이트 트레이닝보다 러닝을 통한 부하가 더 크다고 주장한다.
- 캐칭 기술의 습득:** 높은 캐칭 기술이 배양된 요인으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은 것"을 꼽았다. 그는 포수라는 포지션에 대해 "가르쳐주기 어려운 반면 기술이 필요하다"고 표현했다.
- 독서의 필요성:** 그는 프로 야구 선수에게 독서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아마추어 시절부터 야구에만 몰두했던 선수 중에는 글자 자체를 거부하는 이들도 많고, 그런 선수들이 프로에 와서 미팅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특히 노무라 가쓰야는 '바보 같은 놈'을 싫어했기 때문에, 노무라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후루타는 독서로 교양을 쌓았다고 한다. 그는 토요타 자동차 시절 선배들로부터 "너희들은 이제 대학을 졸업했으니 만화나 주간지는 졸업하라"는 교육을 받았는데, 이를 "그 시절 사회의 흐름"이라고 후에 분석했다. 반면, 이가라시 료타는 후루타에게 20세기 소년을 추천받았다고 언급하여 만화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6.2. "Yujukettan" Philosophy
후루타 아쓰야는 2009년 자신의 저서에서 '정보 과다' 시대의 젊은 선수들이 정보는 많지만 경험이 부족하다고 우려하며, 자신만의 철학인 '유유결단(優柔決断)'을 제시했다. 이는 언뜻 보기에 '우유부단(優柔不斷)'과 비슷해 보이지만, '정보를 충분히 수집하고 숙고한 뒤 명확하게 결단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가 제시하는 '유유결단'의 핵심 원칙은 다음과 같다.
- 정보 수집:** 선입견이나 호불호에 따라 정보를 걸러내지 않고, 책, 인터넷, 사람들의 조언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 환경 활용:** 현재 환경에 불평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어떻게 최대한의 힘을 발휘할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
- 변화 추구:**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발전이 필요하다면 성공 경험에 얽매이지 않고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 경험을 통한 체득:** 야구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경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 정보 체계화:** 15초에서 20초 안에 정보를 취사선택할 수 있도록 머릿속에 파일을 만들고,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한다.
- 약점 분석:** 프로 야구 선수는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면 주전 자리를 지킬 수 없으므로, 상대방의 약점이 2년 전 정보라면 그 정보를 버릴 줄 알아야 한다.
- 과도한 상상 자제:** 성공 이미지를 너무 구체적으로 그리면 오히려 그것에 얽매여 자신의 플레이를 제대로 하지 못할 수 있으므로, 과도한 상상을 피해야 한다.
- 주변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기:**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 결단력:** 즉각적으로 결단하는 습관을 들이고, 마지막에는 배짱을 부리는 것이 중요하다.
7. Social Impact and Legacy
후루타 아쓰야는 뛰어난 선수 경력뿐만 아니라 일본 야구계와 사회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선수 권익 보호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7.1. Role in the 2004 Baseball Strike
2004년 일본 프로 야구 재편 문제 당시, 후루타 아쓰야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 회장으로서 선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초의 파업을 주도했다. 이 파업은 2004년 9월 18일부터 19일까지 이틀간 진행되었다.
파업은 12개 일본 프로 야구 팀 구단주들과 선수회(당시 후루타가 회장)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는데, 주된 쟁점은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와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합병 문제였다. 구단주들은 재정난에 처한 버펄로스를 없애고, 1958년부터 유지되어 온 두 개의 프로 야구 리그(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를 통합하여 1리그 체제로 전환하려 했다. 센트럴 리그 팀들이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한신 타이거스 같은 인기 팀을 보유하며 퍼시픽 리그보다 훨씬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수회와 구단주들 간의 갈등은 점점 고조되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주 와타나베 쓰네오가 후루타를 "겨우 선수 따위가"라고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을 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이는 선수들이 다음 시즌 리그 구도에 대해 발언할 권리가 없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파업은 원래 9월 11일부터 주말 경기에 모두 예정되어 있었으나, 9월 10일 선수회와 구단주 간의 추가 회의 합의로 인해 일주일 연기되었다. 하지만 협상에서 진전이 없자 선수들은 다음 주에 파업에 돌입했다.
파업은 즉각적으로 양측 간의 타협으로 이어졌다. 비록 긴테쓰 버펄로스는 블루웨이브와 합병되었지만(오릭스 버펄로스로 재탄생), 기존 6개 팀 리그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신설되었다. 이 분쟁은 대대적인 언론 보도를 받았으며(대부분 후루타와 선수회에 우호적이었다), 일본 야구 역사상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 기간 동안 선수회와 구단주 간에는 인터리그 경기, 선수 드래프트, 구단 운영 등에 대한 제안과 수정안도 논의되었다. 분쟁은 2004년 9월 23일 양측이 합의에 도달하며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후루타는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선수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2006년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선수들의 권리를 신장시키고 프로 리그와 아마추어 야구 협회 간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2004년 파업은 전국적인 사건이 되었고, 파업 후 후루타가 등장했을 때 모든 팀의 팬들이 그를 응원했다.
7.2. Public Image and Reception
후루타 아쓰야는 선수 시절 '안경 포수', '미스터 스왈로스' 등의 별명으로 대중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안경 포수'라는 별명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안경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당시 안경 쓴 포수가 성공하기 어렵다는 징크스를 깨뜨린 그의 상징이 되었다. 야쿠르트 구단은 팬들을 위한 이벤트로 '안경 데이'를 개최하기도 했으며, 만화가 아다치 미쓰루의 야구 만화 《H2》의 주인공 모델 중 한 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미스터 스왈로스'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상징적인 존재로 평가받는 후루타의 위상을 보여주는 별명이다. 2014년 마이 나비 뉴스에서 실시한 '미스터 스왈로스' 설문 조사에서는 후루타가 47.5%의 득표율로 2위 이하를 크게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그는 냉철한 경기 지능과 강렬한 리더십으로 'ID 야구'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팬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깐깐하고 독특한 성격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했다. 스승인 노무라 가쓰야 감독은 후루타에 대해 "매우 강단 있고 자신감 넘치며, 튀고 싶어 하는 경향도 있다"고 분석하면서도, "포수의 본능과 투수에 가까운 생각을 동시에 가진 드문 유형"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노무라 감독은 만년에 후루타가 야쿠르트 감독 시절 식사비를 직접 지불한 적이 없을 정도로 인색했으며, 이로 인해 선수들 사이에서의 인망이 매우 낮았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그는 후루타가 현역 포수로는 성공했지만 감독으로는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이러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 야구계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남아있으며, 특히 선수회 회장으로서 보여준 리더십과 헌신은 그의 유산으로 높이 평가된다.
7.3. Awards and Honors
후루타 아쓰야는 현역 생활 동안 수많은 상과 영예를 얻으며 일본 프로 야구의 전설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 MVP (최우수 선수):** 2회 (1993년, 1997년)
- 수위 타자:** 1회 (1991년)
- 최다 안타:** 1회 (1993년)
- 베스트 나인:** 9회 (1991년~1993년, 1995년, 1997년, 1999년~2001년, 2004년) - 포수 부문 9회 수상은 센트럴 리그 최다 타이 기록이다.
- 골든 글러브상:** 10회 (1990년~1993년, 1995년, 1997년, 1999년~2001년, 2004년) - 포수 부문 10회 수상은 역대 2위, 센트럴 리그 최다 기록이다. 4년 연속 수상은 센트럴 리그 포수 중 최장 타이 기록이다.
- 센트럴 리그 연맹 특별 표창:** 2회 (회장 특별상: 2003년, 특별 공로상: 2007년) - 2003년 수상은 1경기 4홈런의 프로 야구 타이 기록에 대한 공로였다.
-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15년 (경기자 표창)
- 쇼리키 마쓰타로상:** 1회 (1997년) - 선수로서 수상.
- 일본 시리즈 MVP:** 2회 (1997년, 2001년)
- 월간 MVP:** 4회 (1991년 5월, 1993년 8월, 1997년 5월, 1997년 9월)
- 최우수 배터리상:** 6회 (1991년, 1992년, 1995년, 1997년, 2000년, 2001년) - 6회 선정은 역대 최다 타이 기록이다.
- 1991년 투수: 니시무라 류지
- 1992년 투수: 오카바야시 요이치
- 1995년 투수: 테리 브로스
- 1997년 투수: 다바타 가즈야
- 2000년 투수: 이가라시 료타
- 2001년 투수: 후지이 슈고
- 최우수 배터리상 특별상:** 1회 (1993년)
- 올스타전 MVP:** 2회 (1991년 1차전, 1992년 2차전)
- 최우수 JCB·MEP상:** 1회 (1993년)
- JA 전농 Go·Go상:** 2회 (강한 어깨상: 1993년 9월, 최다 2·3루타상: 2000년 8월)
-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3회 (1992년, 1997년, 2001년)
-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수훈상:** 3회 (1993년, 1997년, 2001년)
- 마이니치 스포츠인상:**
- 팬상 (1997년)
- 문화상 (2004년)
- 골든 애로우상:** 1회 (스포츠상: 2004년)
- 효고현 스포츠 우수 선수 특별상:** 1회 (2005년) - 2000안타 달성에 따른 표창이었다.
- 가와니시시민 영예상:** 1996년
- 가와니시시 명예 시민:** 2005년 - 가와니시시 최초의 명예 시민으로 선정되었다.
- 일본 PR 대상:** 2004년
- GQ MEN OF THE YEAR 2006:** 스포츠 부문 (2006년)
국제 대회에서의 활약으로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야구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8. Personal Life
후루타 아쓰야는 후지 TV의 전 아나운서이자 현 프리랜서 아나운서 및 탤런트인 나카이 미호와 결혼했으며,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아나운서 커플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그의 취미는 쇼기, 골프, 독서, 영화 감상, 투자 등이며, 음악적으로는 U2의 열렬한 팬이다. 서예는 유단자이며, 특히 쇼기에서는 일본 쇼기 연맹으로부터 1995년 8월에 초단, 2004년 11월에는 3단 면허를 받았다. 그는 NHK의 연속 TV 소설 《후타릿코》에 '기사' 타이틀 보유자 모리 모토히코 역으로 특별 출연하기도 했다. 그의 아내 나카이 미호도 NHK의 쇼기 강좌에서 보조 진행자를 맡은 적이 있다. 독서는 원정 경기 이동 중에 우연히 책을 읽는 모습을 본 노무라 가쓰야 감독이 "만화나 주간지 외의 제대로 된 책을 읽는 야구 선수는 본 적이 없다"며 칭찬한 것을 계기로 시작했다고 한다(후루타는 칭찬받은 이후로는 만화나 주간지를 읽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노무라 자신도 만년에 독서가 '인간학, 사회학을 단련하는' 최선의 방법이자, 특히 포수에게는 '두뇌를 단련하는' 의미도 있다고 강조하며 후배들에게 독서를 강력히 권했다.
그의 종사촌에는 탤런트 오키 본진이 있다. 또한 혈연은 아니지만, 야쿠르트 시절 동료였던 조이시 노리유키와는 친척 관계(서로의 사촌끼리 부부)이다. 조이시의 전 부인인 오하시 미호에게 조이시와의 교제를 추천하기도 했다.
대학 시절에는 가정교사 등의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있다. 4학년 세미나(현대 일본 중소기업 문제)에서는 드래프트 직전 담당 교수에게 진로를 묻자 "드래프트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레이싱 드라이버 다나카 데쓰야는 대학 야구부 동기인데, 후루타의 활약을 보면서 야구의 길을 포기하고 레이스계로 전향하여 일본을 대표하는 탑 레이싱 드라이버로 활동하게 된다.
프로 입단 후 사용한 등번호 '27'번은 "(동경했던) 나시다 마사타카의 등번호 8번 + 노무라 가쓰야 감독의 등번호 19번 = 27번"이라고 설명하며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그의 은퇴 후 27번은 준 영구 결번처럼 취급되었으나, 2022년부터 나카무라 유헤이가 이어받게 되었고, 후루타는 그에게 직접 보고를 받은 뒤 응원을 보냈다.
1993년에는 모교 리쓰메이칸 대학의 이미지 캐릭터로 선정되어 "내 팀도 대단하지만, 내 모교도 대단하다"는 캐치프레이즈로 홍보했다. 2008년에는 교토의 료안지에서 리쓰메이칸 대학 총장 가와구치 기요시와 대담하는 내용의 모교 광고에 다시 등장했다.
1994년에는 싱글 CD 'Xeno ~미지의 사람~'을 발매했다. 1995년 노모 히데오가 메이저 리그에 도전하기 시작했을 때, 국제 대회에서 활약했던 노모를 알았던 후루타는 일본 언론과 여러 야구 평론가들이 노모를 "무모하다", "제멋대로다"라고 비판하는 와중에도 그의 활약을 믿었다.
2001년 리그 우승 당시, 우승구를 잡고 다카쓰 신고를 끌어안으며 기쁨을 나눌 예정이었으나, 이시이 가즈히사가 먼저 공을 잡고 달려들어 후루타는 마운드에서 혼자 남겨지는 해프닝이 있었다. 일본 시리즈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2005년 1월 5일, 고향인 효고현 가와니시시에서 동시 제1호 '명예 시민'으로 선정되었고, 기념 강연에서 "아이들이 큰 꿈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 조성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2005년부터 공식 블로그를 개설했다. 그는 블로그의 여왕으로 불리던 마나베 가오리의 블로그를 의식하며 "타도 마나베 가오리"를 선언하기도 했다. 마나베가 블로그를 책으로 냈을 때는 후루타가 홍보용 띠지를 담당했고, 후루타가 책을 냈을 때는 마나베가 홍보용 띠지를 썼다. 공식 블로그 개설 전에는 '요시다 아쓰야'라는 가명으로 블로그를 몇 번 시험 삼아 썼는데, 사진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조회수가 매우 적었지만, 후루타의 공식 블로그에서 소개하자마자 조회수가 급증했다고 한다.
안경을 쓴 채 표정 변화가 적은 모습 때문에 프로 입단 초에는 노비타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언론에서도 종종 언급되었다. 2006년과 2007년에는 'F-프로젝트' 데이 이벤트 기획의 일환으로 후루타 본인이 기획한 '안경 데이'가 열리기도 했다。당일 안경(안경도 가능)을 착용하고 입장한 팬들에게는 기념품이 증정되었고, 경기장 내에는 후루타가 착용했던 역대 안경들이 전시되었다. 또한 경기 전과 이닝 사이에는 '재미있는 안경 콘테스트' 등의 이벤트도 진행되었다. 선수, 코치, 구단 직원, 마스코트들도 안경을 착용하고 팬 서비스에 임했으며, 보도 관계자들도 안경을 쓰고 동참했다.
2006년 11월 21일, 남성 잡지 GQ JAPAN 독자 투표를 통해 'GQ JAPAN Men of the Year 2006' 스포츠 부문에서 선정되었다.
프로 야구 현장에서 은퇴한 후 여러 마라톤 대회에 출전했다. 2009년 3월 22일 도쿄 마라톤을 완주했고, 2010년 5월 16일 호놀룰루 트라이애슬론을 완주했다. 2011년 9월 18일 아이언맨 70.3 센트레아 도코나메 재팬을 완주했으며, 2011년 12월 4일에는 서호주에서 아이언맨 레이스를 완주했다.
은퇴 후에는 탤런트로도 활약하며 프로그램 기획부터 진행까지 소화하고 있다. '후루타의 방정식', '후루타 아쓰야의 프로 야구 베스트 게임', '스포츠 크로스' 등 그의 이름을 내건 프로그램이 다수 있다.
2000안타 이상을 기록한 포수로는 그 외에 노무라 가쓰야, 다니시게 모토노부, 아베 신노스케가 있다. 노무라, 다니시게, 아베는 현역 은퇴 후 전업 감독을 맡은 경험이 있지만, 포수 출신 2000안타 이상 기록자 중 후루타만이 전업 감독 경험이 없다. 또한 대졸 및 사회인 야구 출신으로 2000안타를 달성한 것은 후루타가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처음이다.
9. Publications
후루타 아쓰야는 선수 및 감독 시절의 경험과 야구 철학을 담은 여러 저서를 집필했다.
9.1. 단독 저서
- 《후루타의 느긋한 ID 야구》(학연, 1993년)
- 《후루타의 블로그》(아스키, 2005년)
- 《후루타의 방정식》(아사히 신문 출판, 2009년)
- 《'유유결단'의 권유》
(PHP 연구소, 2009년) - 《후루타의 방정식 배터즈 바이블》(아사히 신문 출판, 2010년)
- 《후루타식 원랭크 업 프로 야구 관전술》 <아사히 신서 506>(아사히 신문 출판, 2015년)
- 《잘 풀리지 않을 때의 심리술》
(PHP 연구소, 2016년)
9.2. 공저
- 《후루타식》(스오 마사유키와 공저, 오타 출판, 2001년)
- 《마음을 읽고, 흥정에 이기는 사고법》(다니가와 고지와 공저, PHP 연구소, 2002년) - 2004년 《'승부뇌'를 단련한다》로 개정되어 문고판으로 출간.
- 《승리의 팀 메이크》(오카다 다케시, 히라오 세이지와 공저, 일본 경제 신문사, 2003년) - 2008년 문고판으로 출간.
- 《결의! 합병·1리그제 NO! 선언》(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 공동 편저, 후타바샤, 2004년)
- 《육아 캐치볼》(스즈키 히로시와 공저, 도쿠마 쇼텐, 2007년)
- 《베스트 게임 프로 야구 최고의 명승부》(NHK 취재반과 공저, 요시모토 북스, 2017년)
10. Other Activities
후루타 아쓰야는 야구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며 대중과의 접점을 넓혔다.
10.1. 방송 출연
후루타는 현역 은퇴 후 주로 스포츠 캐스터와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며 여러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 정보·보도 프로그램:**
- NEWS23 (TBS)
- 신호도 프리미어A (후지 TV·간사이 TV) - 2007년 10월 7일 은퇴 경기에 등장했으며, 11월 25일에는 코멘테이터로 출연했다.
- 베이징 올림픽 중계 (후지 TV) - 아이부 사키와 함께 종합 캐스터를 담당했다.
- 선데이 LIVE!! (2017년 10월 1일 ~ , TV 아사히·아사히 방송·메~테레 공동 제작) - 코멘테이터 및 코너 담당으로 고정 출연했다.
-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 스포츠맨 No.1 결정전 (1998년 ~ 2001년, 2003년 ~ 2005년, TBS) - 제4회 프로 스포츠맨 대회에 참가했으며, 대회를 "1년에 한 번의 자기 확인"으로 여기며 특히 MONSTER BOX의 자기 기록 경신에 매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제6회 프로 스포츠맨 대회에서는 14단에서 자기 기록을 2단 경신한 16단을 성공시켰다. 또한 두뇌 게임인 THIRTY에서는 매회 종목별 No.1을 목표로 했으나 준결승에서 패배하며 No.1을 놓쳤지만, 마지막 출전이었던 제11회 프로 스포츠맨 대회에서 마침내 THIRTY 종목별 No.1을 획득하며 숙원을 이뤘다. 인터뷰에서 밝은 면모를 자주 보여주며 대회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도 자처했다.
- 크림 퀴즈 미라클9 (부정기 출연, TV 아사히 계열)
- 교양·다큐멘터리 프로그램:**
- 아인슈타인의 눈 (2010년 4월 ~ 2012년 3월, BS 프리미엄) - 메인 캐스터로 고정 출연했다.
- 후루타 아쓰야의 스포츠 트라이앵글 (2012년 3월 ~ 2012년 9월, NHK BS1) - 메인 프레젠터로 출연하며, 붓글씨 재능도 선보였다.
- 나카무라 도루·후루타 아쓰야가 쫓는 유신의 볼 (2012년 10월 27일, 에히메 아사히 텔레비전)
- 후루타 아쓰야의 프로 야구 베스트 게임 (2013년 5월 3일·11월 7일 ~ 2014년 3월 14일·2015년 3월 20일, NHK BS1) - 사회(프레젠터)를 담당했다.
- 야구혼 (2014년 8월 12일, NHK BS1) - 내비게이터.
- 어른의 사회과 견학 (2015년 4월 14일 ~ 2016년 9월 27일, BS 아사히) - 내비게이터.
- 스포츠 프로그램:**
- 후루타의 방정식 (TV 아사히) - 첫 개인 이름을 내건 프로그램으로 월 1회 방송되었다.
- F1 그랑프리 (후지 TV) - 2009년 영국 GP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 속보! 스포츠 LIVE (TV 아사히) - 고정 코멘테이터로 출연했다.
- 나카이 마사히로의 프로 야구혼 (2011년 12월 30일·2013년 12월 24일·2021년 3월 27일 ~, 부정기 특방, TV 아사히)
- SPORTS X (2012년 4월 14일 ~ 2019년 9월 27일, BS 아사히)
- 스포츠 술집 이야기방 (2013년 4월 27일·2014년 4월 4일·2014년 10월 5일, NHK BS1) - 야구를 주제로 한 회차에 단골 게스트로 출연했다.
- 열투 고시엔 (2015년 ~ ,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 기간 중<매년 8월>, 아사히 방송·TV 아사히 공동 제작)
- 2020 고시엔 우리들의 여름 (2020년 8월 8일 ~ 17일, 2020년 고시엔 고등학교 야구 교류전 기간 중, 아사히 방송 텔레비전)
- 드라마:**
- 연속 TV 소설후타릿코 (1996년 10월 ~ 1997년 3월, NHK 종합) - 제129화·130화에 기사 모리 모토히코 역으로 출연했다.
- 아스트로 구단 (2005년 8월 ~ 10월, TV 아사히) - 제1화와 최종화에 본인 역으로 출연했다.
- 배우혼! (2006년 10월 ~ 12월, 후지 TV) - 제6화(2006년 11월 21일 방송)에 사쿠라코의 담임 교사 모리 역으로 출연했다.
- 갈릴레오 제2시즌 제4장 '곡구' (2013년 5월 6일, 후지 TV) - 다나베 세이이치가 연기한 전 프로 야구 투수 야나기사와 타쿠야의 피칭 파트너 소다 유스케 역으로 출연했다.
- 파란 하늘 다시 (2019년 8월, 전 10화, ABC TV) - 제2화에 학교 교장 역으로 출연했다.
- 바다와 하늘과 연꽃과 (2021년 8월, 전 11화, ABC TV) - 여자 매니저 가와다 렌의 아버지인 가와다 쇼헤이 역으로 출연했다.
- 8월은 밤의 배팅센터에서. 8회 '팀 리더' (2021년 9월 2일, TV 도쿄) - 본인 역으로 출연했으며, 선수 겸 감독을 맡았던 현역 시절과 마찬가지로 감독으로 등장했다.
- DCU 제2화 (2022년 1월 23일, TBS) - 기타노토 시의회 의원 오카베 쇼조 역으로 출연했다.
- 웹 텔레비전:**
- 밥 삽 긴급 내한! 제1회 Abema배 5종 경기 HAOOO5! (2017년 10월 14일, 10월 22일, AbemaTV)
- 기타 텔레비전 프로그램:**
- 제46회 NHK 홍백가합전 (1995년 12월 31일, NHK 종합·라디오 제1) -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 라디오 프로그램:**
- 후루타 아쓰야 라디오도 하고 있습니다 (2008년 4월 ~ 2010년 3월, 닛폰 방송)
- CM:**
- 아이메트릭스 재팬 (1992년 ~ 2007년) - 후루타는 1992년 7월 이 회사와 계약한 이후 이 회사 안경을 계속 애용했다. 2006년과 2007년에는 F-프로젝트의 '안경 데이' 협찬사로도 참여했다.
- 동일본 여객 철도 (JR 동일본) (1993년·건널목 사고 박멸 캠페인) - 요코하마 선 후치노베역 근처 건널목에서 촬영되었다. 이 CM에는 당시 야쿠르트 감독인 노무라 가쓰야도 내레이션에 참여했다.
- 도쿄 디지털폰 (현 소프트뱅크) (1994년) - 야쿠르트 선수들을 가상의 기업 '츠바메 상사' 직원들로 설정한 스토리였다. 사장 역의 노무라를 비롯해 영업부 직원으로 동료 히로사와 가쓰미, 아라이 유키오, 아라키 다이스케, 이케야마 다카히로 등과 함께 출연했다.
- 마린푸드 핫케이크 (1995년)
- 야쿠르트 본사 (1996년, 2006년 3월 외 다수) - 현역 시절 야쿠르트 CM에 여러 번 출연했다. 1996년 CM에서는 부인 나카이 미호와 함께 출연했다. 2006년 CM은 블록 사인을 활용한 독특한 내용이었다.
- 토요타 홈 (1996년) - 후루타가 모기업 토요타 자동차 OB였기 때문에 출연이 성사되었다. 이 CM 역시 부인과 함께 출연했다(부인은 1998년까지 출연).
- 삿포로 구로라벨 (2002년)
- 제트 (2003년) - 기업 이미지 CM '더 잘하고 싶다.' 편에 등장했다. 후루타는 현역 시절 이 회사와 자문 계약을 맺고 이 회사의 배트, 미트, 프로텍터 등을 사용했다.
- 후지 사진 필름 (2005년 4월) - 기업 이미지 CM '내일로 이어지는 사진' 제4편에 등장했으며, 후루타는 '추억의 한 장'으로 리쓰메이칸 대학 4학년 때 찍은 사진을 선택하고 당시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 미쓰이 다이렉트 손해 보험 (2005년 4월 ~ )
- 화이트 밴드 프로젝트 (2005년)
- 유니덴 (2006년 ~ 2007년)
- 닌텐도 'Wii Fit' (2007년 ~ ) - 이로 인해 Mii 콘테스트 채널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 삿포로 맥주 비어파인 (2008년)
- 일본항공 (2008년 ~ , JAL 카드편, 클래스J편) - 클래스J편에서는 후루타의 현역 은퇴 경기 장면이나 소년 야구팀을 지도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 하우스도 (2013년 ~ )
- 콜로플 프로 야구 PRIDE (2013년)
- 산토리 프리미엄 몰츠 향긋한 에일 (2019년)
- PV:**
- RYO 『HOMARE』 (2016년) - 야구 중계로 위로받는 샐러리맨 역으로 출연했다.
- 게임:**
- 후루타 아쓰야의 시뮬레이션 프로 야구 2 (1996년 8월 24일 발매) - 헥트에서 판매한 슈퍼 패미컴용 소프트웨어이다.
- 기타 활동:**
- 일반 재단 법인 후지모토 육영 재단 이사
- 가타오카 아쓰시 채널 (2020년 5월 3일 배포)
- 메차 코믹 오리지널 만화 『후루타 아쓰야가 안경으로 전생한 건』 (작화: 도센 코이루, 원안: 오토노/쿠스카제 나츠)
-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타마요미』 예습 대작전! 신코시 나인의 키라라 야구다요? (2020년 3월 6일 ~ 2020년 4월 1일까지 부정기 배포) - 에이벡스 픽처스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제2회, 제3회, 제4회, 제5회에 게스트(특별 강사)로 출연했다.
11. Statistics
마쓰야마 봇짱 스타디움에 있는 후루타 아쓰야 2000안타 달성 기념비. 11.1. Batting Statistics
연도 소속 경기 타석 타수 득점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루타 타점 도루 도루자 희생 번트 희생 플라이 볼넷 고의 사구 사구 삼진 병살타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1990 야쿠르트 106 334 280 32 70 12 1 3 93 26 1 1 3 4 43 3 4 44 11 .250 .353 .332 .686 1991 128 485 412 58 140 23 5 11 206 50 4 5 4 3 62 7 4 59 10 .340 .428 .500 .928 1992 131 568 474 87 150 27 3 30 273 86 3 2 1 4 78 10 11 87 12 .316 .422 .576 .997 1993 132 595 522 90 161 29 0 17 241 75 11 4 9 2 59 0 3 83 15 .308 .381 .462 .842 1994 76 287 260 24 62 9 0 3 80 19 3 0 1 3 20 2 3 40 11 .238 .297 .308 .605 1995 130 551 487 88 143 18 1 21 226 76 6 0 5 7 46 0 6 51 24 .294 .357 .464 .821 1996 119 492 437 57 112 24 2 11 173 72 5 1 4 1 46 1 4 68 22 .256 .332 .396 .728 1997 137 598 509 74 164 32 2 9 227 86 9 4 3 4 69 4 13 64 11 .322 .413 .446 .859 1998 132 552 491 58 135 19 1 9 183 63 5 4 3 4 46 4 8 62 14 .275 .344 .373 .717 1999 128 548 483 79 146 26 2 13 215 71 10 3 4 7 51 4 3 41 8 .302 .368 .445 .813 2000 134 562 496 65 138 31 0 14 211 64 5 5 6 4 45 5 11 54 15 .278 .349 .425 .774 2001 121 503 441 59 143 23 0 15 211 66 1 0 3 7 43 2 9 41 17 .324 .390 .478 .868 2002 120 458 420 49 126 24 1 9 179 60 3 0 3 1 28 3 6 47 15 .300 .352 .426 .778 2003 139 576 509 69 146 27 1 23 244 75 2 0 4 3 49 6 11 77 14 .287 .360 .479 .840 2004 133 532 483 72 148 23 0 24 243 79 1 2 0 3 36 2 10 66 11 .306 .365 .503 .868 2005 96 357 329 29 85 15 0 5 115 33 1 0 1 3 19 0 5 54 8 .258 .306 .350 .656 2006 36 98 90 11 22 5 0 0 27 8 0 0 1 0 7 2 0 13 4 .244 .299 .300 .599 2007 10 19 18 2 6 1 0 0 7 0 0 0 0 0 1 1 0 0 1 .333 .368 .389 .757 통산: 18년 2008 8115 7141 1003 2097 368 19 217 3154 1009 70 31 55 60 748 56 111 951 223 .294 .367 .442 .808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을 의미한다.
11.2. Defensive Statistics
연도 구단 포수 경기 시도수 허용 도루 도루 저지 도루 저지율 포일 1990 야쿠르트 106 55 26 29 .527 5 1991 127 83 35 48 .578 12 1992 130 60 31 29 .483 2 1993 132 45 16 29 .644 7 1994 76 24 12 12 .500 2 1995 130 67 35 32 .478 6 1996 118 60 36 24 .400 7 1997 137 61 33 28 .459 7 1998 132 68 38 30 .441 10 1999 127 59 32 27 .458 13 2000 134 73 27 46 .630 7 2001 116 43 22 21 .488 2 2002 113 52 30 22 .423 8 2003 139 71 44 27 .380 5 2004 130 58 43 15 .259 8 2005 87 32 24 8 .250 1 2006 21 10 9 1 .100 1 2007 6 5 5 0 .000 1 통산 1959 926 498 428 .462 104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을 의미한다. (경기 수는 포수로서의 전 경기 출장)
- 붉은 굵은 글씨는 일본 기록을 의미한다.
- 굵은 글씨 연도는 골든 글러브상 수상 연도를 의미한다.
11.3. Managerial Statistics
연도 구단 순위 경기 승리 패전 무승부 승률 게임차 팀 홈런 팀 타율 팀 평균 자책점 연령 2006 야쿠르트 3위 146 70 73 3 .490 18 161 .269 3.91 41세 2007 6위 144 60 84 0 .417 20.5 139 .269 4.07 42세 통산: 2년 290 130 157 3 .448 A클래스 1회, B클래스 1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