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모리 모닝 윌스(Maurice Morning Wills모리 모닝 윌스영어, 1932년 10월 2일 ~ 2022년 9월 19일)는 미국의 야구 선수이자 감독이었다. 1959년부터 1972년까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유격수로 활약했으며, 특히 1959년부터 1965년 사이에 세 차례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팀의 핵심 선수였다. 그는 또한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몬트리올 엑스포스에서도 뛰었다. 윌스는 야구 전략의 중요한 부분인 도루 기술을 부활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윌스는 1962년에 내셔널 리그 최우수 선수(MVP)로 선정되었는데, 당시 타이 콥이 1915년에 세운 96도루 기록을 깨고 104도루를 기록하며 새로운 메이저 리그 기록을 세웠다. 그는 5시즌 동안 7번의 올스타전에 출전했으며, 1962년에는 최초의 MLB 올스타전 MVP가 되었다. 또한 1961년과 1962년에는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다. 14년간의 선수 경력 동안 윌스는 1,942경기에서 타율 0.281, 20 홈런, 458 타점, 2,134 안타, 1,067 득점, 177 2루타, 71 3루타, 586 도루, 552 볼넷을 기록했다. 2009년부터 2022년 사망할 때까지 윌스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구단의 일원으로 다저스 레전드 국의 대표로 활동했다.
2. 생애
모리 윌스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운동 재능을 보였으며, 마이너 리그에서의 긴 시간을 거쳐 메이저 리그에 데뷔한 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후 다른 팀을 거쳐 다저스로 복귀하며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윌스는 1932년 10월 2일 워싱턴 D.C.에서 13명의 자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인 가이 윌스와 메이블 윌스는 원래 메릴랜드주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가이는 1900년생으로 워싱턴 해군 공창에서 기계공으로 일했으며, 파트타임 침례교 목사이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 메이블은 1902년생으로 승강기 조작원으로 일했다.
윌스는 14세에 세미프로 야구를 시작했다. 카도조 고등학교에서 그는 야구, 농구, 미식축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는 2학년, 3학년, 4학년 때 각 스포츠에서 올시티(All-City) 영예를 얻었다. 야구팀에서는 3루수와 투수로도 뛰었다. 2009년에는 워싱턴 D.C.와 카도조 고등학교가 과거 배네커 레크리에이션 필드였던 곳을 모리 윌스 필드로 개명하여 그의 이름을 기렸다. 이 필드는 완전히 개조되어 카도조 고등학교 야구팀의 홈 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2.2. 프로 경력 시작
윌스는 고등학교 졸업 후 1950년에 당시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했다. 그는 다저스 산하 마이너 리그에서 8년을 보냈다. 1959년 시즌을 앞두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가 윌스의 계약을 3.50 만 USD에 사들였으나, 스프링 트레이닝 후 그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다저스로 돌려보냈다. 일본어 자료에 따르면, 그는 1956년 오프시즌에 신시내티 레즈 산하 마이너 팀으로 이적했고, 다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산하 마이너 팀으로 이적했으나 메이저 리그 승격 기회를 얻지 못했다. 1959년 시즌 개막 전에 로스앤젤레스로 연고지를 옮긴 다저스로 복귀했으며, 그해 6월 6일 26세 8개월의 나이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2.3.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절

1958년 시즌 후 다저스의 유격수 피 위 리스가 은퇴했다. 다저스는 1959년 시즌을 밥 릴리스를 유격수로 시작했으나 그가 부진하자 돈 짐머로 교체했다. 6월에 짐머가 발가락 부상을 당하자 다저스는 윌스를 마이너 리그에서 승격시켰다. 그는 다저스에서 83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260, 7타점을 기록했다. 1959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6경기 모두 출전하여 20타수 5안타, 1도루, 2득점을 기록하며 다저스의 우승에 기여했다. 1960년 시즌을 앞두고 다저스는 짐머를 트레이드했다. 윌스의 첫 풀시즌이었던 1960년, 그는 148경기에서 타율 0.295, 27타점, 리그 최다인 50도루를 기록했다. 이는 맥스 캐리가 1923년에 51도루를 기록한 이후 내셔널 리그 선수로는 처음으로 50도루를 달성한 것이었다.
1962년, 윌스는 104도루를 기록하며 타이 콥이 1915년에 세운 96도루의 현대 야구 기록을 깼다. 그는 그해 어떤 팀보다도 많은 도루를 기록했는데, 당시 워싱턴 세너터스의 팀 최다 도루가 99개였다. 윌스는 단 13번만 도루에 실패하여 89%의 높은 성공률을 보였다. 그는 시즌을 타율 0.299, 6홈런, 48타점으로 마쳤으며, 내셔널 리그에서 10개의 3루타와 179개의 단타로 1위를 차지했다. 1962년 시즌 후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감독 앨빈 다크는 윌스의 도루 시도를 방해하기 위해 베이스 경로에 물을 뿌려 진흙탕으로 만들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윌스는 1962년에 정규 시즌 162경기 전 경기에 출전했고, 자이언츠와의 3전 2선승제 플레이오프 3경기에도 모두 출전하여 총 165경기에 출전했는데, 이는 단일 시즌 최다 출전 MLB 기록으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의 104도루 기록은 1974년 루 브록이 118도루를 기록하기 전까지 메이저 리그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그는 윌리 메이스를 제치고 내셔널 리그 MVP를 수상했으며, 팀 동료 토미 데이비스는 3위를 차지했다.
1963년 월드 시리즈에서 윌스는 16타수 2안타(타율 0.133), 1도루를 기록했으며, 다저스는 뉴욕 양키스를 4경기 만에 꺾고 우승했다. 1965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7경기 모두 출전하여 30타수 11안타(타율 0.367), 3득점, 3도루를 기록하며 다저스의 힘든 승리에 기여했고, 이는 그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월드 시리즈 우승이었다. 다저스에서 뛰는 동안 윌스는 1961년과 1962년에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으며, 내셔널 리그 올스타에 5번 선정되었고, 올스타전에는 7번 출전했다 (1961년과 1962년에는 두 번의 올스타전이 열렸다).
1966년 시즌, 윌스는 38도루를 기록했고 24번 도루에 실패했다. 1966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13타수 1안타(타율 0.077), 1도루를 기록했으며, 다저스는 4경기 만에 스윕당했다.
2.4. 피츠버그 파이러츠 및 몬트리올 엑스포스 시절
1966년 시즌 후, 다저스는 일본에서 포스트시즌 친선 투어를 가졌다. 이 투어 도중 무릎 부상으로 고통받으며 경기에 나설 수 없다고 느낀 윌스는 투어 중간에 팀을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다저스 구단주 월터 오말리에게 무단 이탈 및 불충으로 비춰졌고, 이미 은퇴한 투수 샌디 코팩스를 잃은 것에 불만이 많았던 오말리는 윌스를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트레이드했다. 이 트레이드에서 다저스는 밥 베일리와 진 마이클을 받았다.
1967년 시즌, 윌스는 149경기에 출전하여 186안타, 29도루(1961년 35도루 이후 최저 기록), 3홈런, 45타점, 타율 0.302를 기록했다. 다음 시즌에는 153경기에 출전하여 174안타, 31타점, 52도루를 기록했으나, 21번 도루에 실패했으며 타율은 0.278이었다.
1968년 10월 14일, 몬트리올 엑스포스는 1968년 MLB 확장 드래프트에서 윌스를 21번째로 지명하여 영입했다. 윌스는 1969년 4월 8일 엑스포스의 창단 첫 경기에서 1번 타자로 나섰다. 그는 6타수 3안타, 1타점, 1도루를 기록하며 11대 10 승리에 기여했다. 그러나 그는 엑스포스에서 47경기만 뛰었으며, 42안타, 8타점, 15도루, 타율 0.222를 기록했다. 5월 19일에는 몬트리올 가제트의 테드 블랙맨 기자가 쓴 기사에 불만을 품고 블랙맨을 때려 헤드라인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달 말 윌스의 해이한 플레이는 몬트리올 팬들의 야유를 불러일으켰다. 몬트리올에 불만을 느낀 윌스는 6월 3일 잠시 은퇴를 선언했으나, 48시간 만에 엑스포스로 복귀했다.
2.5. 다저스로 복귀
1969년 6월 11일, 엑스포스는 윌스와 매니 모타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트레이드하고, 론 페얼리와 폴 포포비치를 받았다. 로스앤젤레스에서 104경기에 출전한 윌스는 타율 0.297, 4홈런, 39타점, 25도루를 기록했다. 시즌 후 내셔널 리그 MVP 투표에서 11위를 차지했다. 다음 해에는 132경기에 출전하여 141안타, 34타점, 28도루, 타율 0.270을 기록했다. 1971년에는 149경기에 출전하여 169안타, 3홈런, 44타점, 15도루, 타율 0.281을 기록하며 내셔널 리그 MVP 투표에서 6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윌스는 1972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파업 기간 동안 훈련을 하지 않았고, 시즌이 시작되자마자 반사 신경과 타이밍에 어려움을 겪었다. 엑스포스와의 경기에서 칼 모튼에게 고전한 후, 윌스는 벤치로 돌아와 월터 올스턴 감독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독님이 저를 빼는 것은 당연합니다"라고 말했다. 올스턴 감독은 실제로 4월 29일 빌 러셀로 윌스를 교체했고, 윌스는 남은 시즌 동안 백업 선수로 뛰었으며 러셀은 이후 몇 년간 주전 유격수 자리를 지켰다.
윌스는 1972년에 71경기에 출전하여 17안타, 4타점, 1도루, 타율 0.129를 기록했다. 1972년 10월 4일 그의 마지막 MLB 출전 경기에서, 그는 9회 초 론 세이의 대주자로 나서 스티브 예거의 홈런으로 득점했으며, 9회 말에는 3루수로 수비했다. 1972년 10월 24일, 그는 다저스에서 방출되었다.
3. 주요 활동 및 업적
모리 윌스는 도루 기술을 현대 야구에 부활시킨 선구자였으며, 특히 1962년에는 단일 시즌 최다 도루 기록과 최다 경기 출전 기록을 동시에 세우는 등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3.1. 도루 기술의 부활과 기록 경신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유격수 루이스 아파리시오와 함께 윌스는 도루 전술에 새로운 중요성을 부여했다. 토미 존은 "모리는 거의 혼자 힘으로 야구를 느리고 일차원적인 강타자들의 사랑에서 벗어나 순수한 스피드를 진지한 공격 및 수비 무기로 고려하게 만들었다"고 언급했다. 이는 아마도 로스앤젤레스에서의 더 큰 미디어 노출, 다저스의 더 큰 성공, 또는 생산적인 타자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투수력, 수비, 그리고 윌스의 스피드에 극도로 의존하는 저득점 전략 때문이었을 것이다. 윌스는 도루를 시도하지 않더라도 항상 위협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투수들에게 상당한 방해 요소였다. 그가 베이스에 나갈 때마다 다저 스타디움의 팬들은 "가! 가! 가, 모리, 가!"라고 외쳤다. 메이저 리그에서 가장 빠른 주자는 아니었지만, 윌스는 놀라운 가속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한 베이스에 나가지 않을 때에도 투수들의 견제 동작을 끊임없이 연구했다. 그리고 베이스로 돌아가야 할 때에도 그의 맹렬한 경쟁심은 그를 도루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게 했다. 한번은 뉴욕 메츠 투수 로저 크레이그를 상대로 1루에 있었을 때, 윌스는 크레이그가 메츠 1루수에게 12번 연속으로 견제구를 던지게 만들었다. 크레이그가 다음 투구를 던졌을 때, 윌스는 2루를 훔쳤다. 일본어 자료에 따르면, 윌스는 크로스 오버 스텝이라는 도루 기술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2년, 윌스는 104도루를 기록하며 타이 콥이 1915년에 세운 96도루 기록을 경신했다. 그의 기록적인 시즌 이후 도루 성공률은 급격히 떨어졌다. 비록 베이스에 나가면 여전히 투수들을 위협했지만, 1963년에는 40도루, 1964년에는 53도루에 그쳤다. 1965년 7월에는 1962년의 도루 페이스를 앞서고 있었다. 그러나 32세의 윌스는 후반기에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슬라이딩으로 인한 통증 때문에 매 경기 전에 다리에 붕대를 감아야 했고, 1965년 시즌을 94도루로 마쳤다. 윌스의 104도루 기록은 1974년 루 브록이 118도루를 기록하기 전까지 메이저 리그 기록이었다. 스위치 히터 최다 도루 기록은 현재까지도 윌스가 보유하고 있다.
윌스가 1962년에 콥의 단일 시즌 도루 기록을 깼지만, 그해 내셔널 리그는 팀당 경기 수를 154경기에서 162경기로 늘렸다. 윌스의 97번째 도루는 그의 팀이 154번째 경기를 치른 후에 발생했다. 그 결과, 포드 프릭 커미셔너는 윌스의 104도루 시즌과 콥의 1915년 96도루 시즌을 별개의 기록으로 규정했다. 이는 그 전 해 아메리칸 리그 역시 경기 수를 162경기로 늘린 후 로저 매리스가 베이브 루스의 단일 시즌 홈런 기록을 깼을 때와 같은 조치였다. 두 도루 기록 모두 1974년 루 브록의 118도루에 의해 깨졌다. 브록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154번째 경기를 마치기 전에 97번째 도루를 성공시키며 콥의 도루 기록을 깼다.
3.2. 시즌 165경기 출전 기록
1961년과 1962년 구단 수 확장 이후, 메이저 리그의 연간 경기 수는 무승부 재경기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162경기로 정해졌다. 또한 1969년에 지구제가 도입되기 전에는 정규 시즌에서 두 팀이 동률 1위를 기록할 경우, 내셔널 리그는 최대 3경기(2선승제), 아메리칸 리그는 1경기의 우승 결정전을 치르는 규정이 있었으며, 이 우승 결정전의 기록은 해당 시즌의 개인 성적에도 반영되었다. 1962년, 내셔널 리그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다저스는 162경기 종료 시점에서 동률 1위를 기록하여 3경기 우승 결정전이 열리게 되었다. 양 팀 중 우승 결정전 3경기를 포함하여 유일하게 모든 경기에 출전한 선수가 바로 윌스였다. 결국 자이언츠와의 우승 결정전에서는 패했지만, 이 해 윌스는 타이 콥의 시즌 96도루 기록을 경신하며 104도루를 기록, 사상 처음으로 세 자릿수 도루를 달성했고, 그해 내셔널 리그 MVP에 선정되었다.
4. 지도자 및 코치 경력
선수 은퇴 후, 모리 윌스는 야구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감독으로서 메이저 리그 팀을 이끌기도 했다. 또한 여러 팀에서 코치로 활동하며 후배 선수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수했다.
윌스는 프로 야구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 후 1973년부터 1977년까지 NBC에서 야구 분석가로 활동했다. 그는 또한 멕시코 태평양 리그에서 4시즌 동안 감독을 맡았으며, 1970-71 시즌에는 나란헤로스 데 에르모시요를 리그 챔피언으로 이끌었다. 윌스는 자신이 메이저 리그 팀을 이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알렸다. 그의 저서 『페넌트를 훔치는 방법(How To Steal A Pennant)』에서 윌스는 어떤 최하위 팀이라도 4년 안에 챔피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그에게 1년 계약을 제안했지만, 윌스는 이를 거절했다. 1980년 8월, 시애틀 매리너스는 대럴 존슨 감독을 해고하고 윌스를 새 감독으로 임명했다.

시애틀 포스트-인텔리전서의 스티브 러드먼에 따르면, 윌스는 여러 실책을 저질렀다. 불펜에 아무도 몸을 풀고 있지 않은데 구원 투수를 호출하거나, 대타를 찾느라 경기를 10분 동안 지연시키고, 심지어 스프링 트레이닝 경기 6회에 캘리포니아로 비행하기 위해 자리를 뜨기도 했다.
1981년 4월 25일, 윌스는 톰 파시오렉이 타석 밖에서 타격한다는 불만을 받은 후, 매리너스 구장 관리팀에 타자 박스를 규정보다 1피트 더 길게 만들라고 지시했다. 추가된 1피트는 마운드 방향이었다. 그러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감독 빌리 마틴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주심 빌 쿤켈에게 조사를 요청했다. 쿤켈의 질문에 매리너스의 수석 구장 관리인은 윌스가 변경을 지시했음을 인정했다. 윌스는 선수들이 타자 박스 안에 머무는 것을 돕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했지만, 마틴은 애슬레틱스 투수진에 변화구 투수가 많다는 점을 고려할 때 윌스가 선수들에게 이점을 주려 했다고 의심했다. 아메리칸 리그는 윌스에게 2경기 출장 정지 처분과 500 USD의 벌금을 부과했다. 아메리칸 리그 심판 감독관 딕 버틀러는 윌스의 행동을 베이스 간 거리를 27 m (90 ft)에서 27 m (88 ft)로 줄이는 것에 비유했다.
1980년 시즌을 20승 38패로 마친 시애틀을 이끈 후, 새로운 구단주 조지 아기로스는 1981년 5월 6일 윌스를 해고했다. 당시 매리너스는 6승 18패로 최하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감독 경력 기록은 26승 56패로 승률 0.317이었는데, 이는 비임시 감독으로서는 최악의 기록 중 하나였다.
그러나 본인도 뛰어난 도루 선수였던 훌리오 크루스는 윌스가 왼손 투수를 상대로 2루를 훔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고 말했다. 데이브 로버츠 또한 2004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4차전에서의 결정적인 도루를 포함하여 압박 상황에서 도루하는 방법을 윌스가 코치해 주었다고 말했다. 로버츠는 "그는 'DR, 언젠가 너는 경기장의 모든 사람이 네가 도루할 것을 알 때 중요한 도루를 해야 할 거야. 하지만 너는 그 도루를 해야 하고, 도루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돼.'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날 밤 필드로 나갈 때, 나는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한쪽에서 '이것이 너의 기회야'라고 말하고 있었고, 내 다른 쪽 뇌에서는 '아웃당할 거야, 아웃당하지 마.'라고 말하고 있었다. 다행히 내 머리 속에서는 모리의 목소리가 이겼다."라고 회상했다.
윌스는 1996년부터 1997년까지 팀 코치로 활동했으며, 2017년까지 파고-무어헤드 레드혹스의 라디오 컬러 코멘테이터로 활동했다. 그는 2000년부터 다저스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2016년까지 스프링 트레이닝의 객원 강사로 일했다. 일본어 자료에 따르면, 그는 1978년부터 한큐 브레이브스의 임시 코치로 초청된 적이 있으며, 한큐에서 정식 코치가 될 예정이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또한 현역 은퇴 후 난카이 호크스의 노무라 가쓰야 선수 겸 감독과 돈 블레이저 헤드 코치가 선수 겸 코치로 영입을 추진했고 본인도 입단에 기울었으나, 당시 구단 사장이었던 신야마 시게루가 나이 문제로 선수 겸임에 난색을 표하고 코치 전임으로의 입단을 주장하여 실현되지 않았다.
5. 선수 생활 이후 활동
모리 윌스는 선수 생활 은퇴 후에도 야구계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야구 외적으로도 연예계 활동을 통해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였다.
윌스는 메이저 리그 선수 생활 대부분 동안 오프시즌에 보컬리스트이자 악기 연주자(밴조, 기타, 우쿨렐레)로 광범위하게 활동하며 수입을 보충했다. 그는 가끔 텔레비전에 출연했으며 나이트클럽에서도 자주 공연했다。 그는 이 시기에 최소 두 장의 음반을 발매했는데, 하나는 자신의 이름으로, 다른 하나는 라이오넬 햄프턴의 피처링 보컬리스트로 참여했다. 1968년 10월 24일부터 약 2년 동안 윌스는 피츠버그의 골든 트라이앵글에 위치한 나이트클럽 '더 스톨른 베이스(The Stolen Base)'의 공동 소유자이자 운영자, 그리고 주요 공연자였다. 이 클럽은 "밴조, 생맥주, 야구"의 조합을 제공했다.
윌스는 완벽한 거장은 아니었지만, 1966년 베이신 스트리트 이스트 공연에서 1965년 월드 시리즈의 적수 머드캣 그랜트와 함께 공연한 것을 평가한 뉴스데이의 스탠 아이작스는 "좋다; 아마도 위대하지는 않지만 좋다"고 평했다. (아이작스는 "밴조로 몇몇 짓궂은 코러스를 연주했다"고 특별히 언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스의 주 악기 연주 실력은 두 차례에 걸쳐 미국 음악가 연맹에 의해 인정받았다. 첫째는 1962년 12월, 로스앤젤레스 지역 47 지부장이 몇 분간의 밴조 연주를 들은 후 윌스의 회원 가입 시험 나머지를 즉시 면제해 주었을 때였다. 그리고 5년 후, 트럼펫 연주자 찰리 티가든은 "모리의 밴조 연주 능력"을 특별히 언급하며 (윌스가 이미 회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음에도) "음악가 연합을 대표하여 그에게 명예 평생 회원 자격을 수여했다."
1969년, 윌스는 텔레비전 시리즈 『겟 스마트』의 "분노의 원숭이들(Apes of Wrath)" 에피소드(시즌 5, 에피소드 10)에 출연했다. 1965년, 윌스는 앨범 『더 사운드 오브 더 다저스』를 위해 "다저 스타디움" (팀 동료 윌리 데이비스와 코미디언 스터비 케이와 함께)과 "누군가 득점을 기록하고 있어(Somebody's Keeping Score)" 두 곡을 녹음했다.
6. 개인사
모리 윌스의 개인적인 삶은 가족 관계, 약물 및 알코올 의존 문제 등 다양한 면모를 포함하고 있다.
6.1. 가족 및 관계
윌스는 전 메이저 리그 선수 범프 윌스의 아버지이다. 범프 윌스는 6시즌 동안 텍사스 레인저스와 시카고 컵스에서 뛰었다. 아버지 윌스의 자서전에 실린 외설적인 일화 때문에 둘은 사이가 틀어졌지만, 2004년 기준으로 가끔 대화를 나누는 사이였다. 일본어 자료에 따르면, 범프 윌스는 1983년과 1984년에 아버지 윌스가 임시 코치를 맡았던 인연으로 일본의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뛰기도 했다.
1962년 히콕 벨트를 수상한 후, 윌스는 국세청으로부터 신고 소득 및 수상 공제액에 대한 미납액이 있다고 통보받았다. 미국 조세 법원은 국세청의 주장을 지지했고, 이 세금 소송은 미국 제9항소법원으로 상고되었으나, 항소법원도 원심을 확정했다.
1992년 자서전 『도주 중: 모리 윌스의 지루할 틈 없고 종종 충격적인 삶(On the Run: The Never Dull and Often Shocking Life of Maury Wills)』에서 윌스는 여배우 도리스 데이와의 연애 관계를 언급했다. 데이는 이전에 1976년 자서전 『도리스 데이: 그녀 자신의 이야기(Doris Day: Her Own Story)』에서 이를 부인한 바 있다.
6.2. 약물 및 알코올 의존
윌스는 1989년까지 알코올과 코카인을 남용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3년 반 동안 코카인에 100만 달러 이상을 썼다"고 밝혔다. 1983년 12월, 윌스는 전 여자친구 주디 올드리치가 자신의 차를 도난당했다고 신고한 후 코카인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다. 차량 수색 중 경찰은 약 0.06그램의 코카인과 물담배가 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병을 발견했다. 이 혐의는 3개월 후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되었다. 다저스 구단은 약물 치료 프로그램을 지원했지만, 윌스는 도중에 그만두고 계속 약물을 사용했다. 그러나 앤젤라 조지와 관계를 시작하면서 그녀의 격려로 비타민 치료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두 사람은 나중에 결혼했다.
7. 수상 및 명예
모리 윌스는 선수 생활 동안 뛰어난 활약으로 수많은 개인상과 영예를 얻었으며, 은퇴 후에도 야구계에 미친 영향력을 인정받았다.
7.1. 주요 수상 경력
윌스는 1962년에 내셔널 리그 최우수 선수(MVP)로 선정되었다. 그는 1961년과 1962년에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으며, 1962년에는 최초의 MLB 올스타전 MVP가 되었다. 그는 또한 5시즌 동안 7번의 올스타전에 선정되었다 (1961년과 1962년에는 두 번의 올스타전이 열림). 1962년에는 더 스포팅 뉴스 MLB 올해의 선수상을 돈 드라이스데일과 공동 수상했다.
그는 또한 다음의 상과 영예를 받았다.
- 히콕 벨트 상 (1962년)
- 야구 유물 보관소의 영원한 성소 (2011년 입성)
- "다저스 야구의 전설들" (2022년)
7.2. 명예의 전당 후보 자격
윌스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후보로 1978년부터 1992년까지 15년 동안 미국 야구 기자 협회 (BBWAA) 투표에 올랐지만, 당선에 필요한 75%의 득표율을 한 번도 넘지 못하고 최대 40.6%에 그쳤다. 1982년 이후 그의 득표율은 절반으로 떨어졌고, 1983년 코카인 소지 혐의로 체포된 사건이 그의 득표율이 회복되지 못한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2014년, 윌스는 2015년 명예의 전당 입성을 위한 골든 시대 위원회 선거 투표 용지에 처음으로 후보로 이름을 올렸으나, 12표가 필요한 상황에서 3표 차이로 당선되지 못했다. 투표 용지에 오른 다른 모든 후보들도 당선되지 못했다. 골든 시대 위원회는 2016년에 1950년부터 1969년까지의 기간을 다루는 골든 데이즈 위원회를 포함한 4개의 위원회로 대체되었다. 윌스는 2022년 투표에도 후보로 올랐지만, 입성에 필요한 충분한 표를 얻지 못했다.
8. 영향력 및 평가
모리 윌스는 야구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도루를 단순한 개인 기술이 아닌 팀 전략의 핵심 요소로 격상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의 혁신적인 플레이 스타일은 야구의 흐름을 바꾸고 후대 선수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윌스는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유격수 루이스 아파리시오와 함께 도루 전술에 새로운 중요성을 부여하며 야구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토미 존은 "모리는 거의 혼자 힘으로 야구를 느리고 일차원적인 강타자들의 사랑에서 벗어나 순수한 스피드를 진지한 공격 및 수비 무기로 고려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그의 존재는 투수들에게 끊임없는 위협이 되었고, 이는 다저스의 저득점 전략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윌스는 단순히 빠른 주자가 아니라, 투수들의 견제 동작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맹렬한 경쟁심으로 도루를 성공시키는 예술가였다. 그는 1962년 단일 시즌 104도루라는 전례 없는 기록을 세우며 도루의 가치를 재정의했고, 이는 루 브록이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메이저 리그의 상징적인 기록으로 남았다. 그의 도루는 팬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고, "가! 가! 가, 모리, 가!"라는 응원 구호는 그의 상징이 되었다.
선수 생활 이후 감독으로서의 경력은 다소 아쉬웠지만, 훌리오 크루스와 데이브 로버츠와 같은 후배 도루 전문가들은 윌스의 코칭이 자신들의 플레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증언하며 그의 지도자로서의 영향력을 입증했다. 특히 로버츠는 2004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의 중요한 순간에 윌스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결정적인 도루를 성공시켰다고 밝혔다. 이는 윌스가 단순한 기록 경신자를 넘어, 도루 기술의 철학과 정신을 다음 세대에 전수한 진정한 멘토였음을 보여준다.
그의 개인적인 어려움, 특히 약물 및 알코올 의존 문제는 그의 명예의 전당 입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과 야구계에 대한 지속적인 기여는 그의 강인한 의지와 야구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보여준다. 모리 윌스는 도루의 예술을 부활시키고 야구 전략의 지평을 넓힌 혁신가이자, 그라운드 안팎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로 야구 역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9. 사망
윌스는 2022년 9월 19일, 90번째 생일을 불과 2주 앞두고 애리조나주 세도나에 있는 자택에서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