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기 및 배경
다구치 소의 유년기, 학창 시절, 그리고 프로 입단 이전의 야구 경력은 그의 선수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1.1. 유년기 및 학창 시절
다구치 소는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나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구라레에 근무했으며, 아버지의 전근으로 인해 2세부터 8세까지는 지바현, 8세부터 초등학교 5학년 여름까지는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에서 생활했고,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는 니시노미야시에서 보냈다.
아버지 윤지(允之)는 과거 구라레 오카야마 경식 야구부(1973년 폐부)에서 외야수로 활약했으며, 이러한 영향으로 다구치 소는 두 살 위의 형(포수)과 함께 3세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오카야마 시립 히라후쿠 초등학교에서는 당시 살던 회사 사택 내 소프트볼 팀 소속으로 유격수를 맡아 여러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니시노미야 시립 히라키 중학교와 효고 현립 니시노미야키타 고등학교를 거쳐 간세이가쿠인 대학에 진학했다. 니시노미야키타 고등학교 시절에는 지역에서 가까운 고시엔 구장을 밟지 못하고 졸업했다.
간세이가쿠인 대학에서 경식 야구부에 소속되어 간사이 학생 야구 연맹 공식전에서 101경기에 출장하여 376타수 123안타, 타율.327, 10 홈런, 46 타점이라는 통산 기록을 남겼다. 이 기간 동안 수위타자 1회, 최우수 선수 1회, 베스트 나인 4회를 수상했으며, 통산 123안타는 2019년 11월 현재까지도 연맹 사상 최다 안타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의 수비 포지션은 9세에 오카야마시의 야구팀에 입단한 이후 오릭스 입단 2년차까지 유격수로만 활약했다.
1.2. 프로 입단 이전
1991년 일본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로부터 1위 지명을 받았다. 추첨 결과 오릭스가 교섭권을 획득하여 계약금 1.00 억 JPY(추정)와 연봉 1200.00 만 JPY(추정)에 입단에 합의했다. 오릭스는 그에게 전설적인 선수인 후쿠모토 유타카가 오랫동안 사용했던 등번호 7번을 제안했지만, 그는 "후쿠모토 선수의 등번호이기 때문에 너무나 황공하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대신 아마추어 시절부터 사용했으며 구마노 데루미쓰의 이적 이후 빈 번호가 된 6번을 선택했다.
드래프트 당시 한신 타이거스는 히라타 가쓰오의 후계 유격수를 찾고 있었기에 다구치 소의 지명을 원했으나, 다구치 소는 기자 회견에서 "한신에 가고 싶지 않은 10가지 조항"이라는 문서를 낭독했다가 후에 철회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는 간세이가쿠인 대학 야구부 및 학교 당국과 한신과의 소원한 관계, 그리고 오릭스 소속의 동문 스카우트가 다구치를 한신으로 보내지 않기 위해 조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야구부 감독은 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구치에게 질책을 가했으며, 다구치는 "야구 외적인 일로 화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발언에 대해 한신 타이거스의 오카다 아키노부는 "대우 면에서는 야구계 최고 수준이며, 진정한 한신을 모른다면 경솔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2001년 시즌 종료 후 한신은 다시 FA로 다구치 소를 영입하려 했지만, 그는 MLB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이적하면서 결국 한신 유니폼을 입지 않았다.
2. 선수 경력
다구치 소의 프로 야구 선수 경력은 NPB와 MLB를 넘나들며 다채로운 경험과 기록을 남겼다.
2.1. 일본 프로 야구 (NPB) 시대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뛰었던 다구치 소의 첫 번째 일본 프로 야구 경력은 초기의 어려움과 이후의 성공적인 외야수 전환이 특징이다.
2.1.1. 오릭스 블루웨이브
1992년 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열린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개막전에서 전년도 베스트 나인 유격수이자 올스타 게임에도 출전했던 오가와 히로부미를 제치고 "9번 유격수"로 신인 개막전 선발 출장했다. 이 경기 1회말 수비에서 땅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1루수에게 높은 송구를 하는 실책성 플레이를 보이기도 했다(기록상으로는 1루수가 호수비하여 아웃).
데뷔 초기에는 도이 쇼조 감독의 엄격한 지도로 인해 입스 현상과 돌발성 난청을 겪는 등 심리적, 신체적 어려움을 겪었다. 수비에서도 실책을 거듭하며 내야수로서의 성장이 더뎠다. 하지만 당시에도 이치로가 극찬했던 그의 강견이 강점이었다.
1994년 시즌 개막 직후 유격수로 출전하여 두 차례의 악송구를 저지르자, 오기 아키라 감독이 "이제 됐어"라고 말하며 교체를 지시했고, 이 순간부터 선발 기회를 잃었다. 그는 후쿠라 준이치에게 상담을 구했고, 후쿠라는 "프로에서 뛰려면 외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년에는 없을 거야"라고 조언했다. 이에 다구치 자신도 같은 생각으로 오기 감독에게 "외야로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외야수로 전향했다. 당시 외야에는 이미 스타 선수였던 이치로, 후지이 야스오, 다카하시 사토시, 모토니시 아쓰히로가 있었으나, 오기 감독이 "이 멤버들을 이길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답하며 외야수로서의 새로운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다구치 소는 최다 보살, 골든 글러브상 등을 수상하며 리그에서 손꼽히는 수비력을 가진 외야수로 자리매김했다. 이치로, 모토니시 아쓰히로(이후 다니 요시토모)와 함께 형성한 외야수 트리오는 당시 야구계 최고 수준의 수비력으로 평가받았다. 1995년과 1996년에는 오릭스의 퍼시픽 리그 2년 연속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주로 1번이나 3번 타자로 출전했으며, 특히 1996년 후반기에는 이치로와 타순을 바꾸어 1번 타자로 고정되었다.
1997년에는 1번 타자로서 135경기 전 경기에 출전했다. 주로 좌익수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302개의 자살, 17개의 보살, 1개의 실책, 수비율.997, 레인지 팩터.1229라는 뛰어난 수비 기록을 남겼다. 1998년과 1999년에는 2루수나 유격수로 기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1999년, 그는 전처와 이혼했으며, 2001년 3월에는 전 TBS 아나운서인 가가와 에미코와 재혼했다. 같은 해 시즌 종료 후, 그는 알란 니로를 대리인으로 선임하고 FA 권리를 행사하여 메이저 리그 진출을 선언했다.
다구치 소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야구 대표팀에 마쓰자카 다이스케, 나카무라 노리히로 등과 함께 출전했다. 일본 대표팀은 3위 결정전에서 한국에 패해 4위에 머물렀다. 이 올림픽에서 그는 닛폰햄 파이터스의 다나카 유키오 선수와 등번호가 겹치면서 등번호 6번을 양보하고 1번을 착용했다.
2.2. 메이저 리그 (MLB) 시대
다구치 소는 2002년 메이저 리그에 진출하여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카고 컵스에서 뛰었다.
2.2.1.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2002년 1월 9일, 32세의 나이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3년 300.00 만 USD에 계약을 맺고 메이저 리그에 진출했다. 그는 시즌 개막 로스터에 포함되지 못했으나, 마이너 리그 시스템을 거쳐 뉴 헤이븐 레이번스와 멤피스 레드버즈에서 뛰며 타율.262, 6홈런, 51타점을 기록했다. 마침내 2002년 9월 7일 빅 리그로 콜업되어 그날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 2회에 메이저 리그 첫 안타를 기록했다. 그는 카디널스 구단 역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일본인 선수이다.
원래 등번호 6번을 요청했지만, 이는 스탠 뮤지얼을 위해 영구 결번된 번호였다. 6번을 거꾸로 뒤집은 9번도 에노스 슬로터를 위해 영구 결번되어 불가능했다. 시드니 올림픽에서 달았던 등번호 1번 역시 오지 스미스를 위해 영구 결번되어 있었다. 등번호 66번도 릭 안키엘이 그해 로스터에 있었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99번을 선택했다.
2003년에도 잠시 콜업되었으며, 2004년에는 109경기에 출전하며 카디널스에서 더 많은 출전 시간을 얻었다. 그는 2004년 월드 시리즈 카디널스 포스트시즌 로스터에 포함되어 두 경기에 출전했지만, 카디널스는 보스턴 레드삭스에게 4경기 모두 패배하며 우승을 놓쳤다. 이 시즌에 그의 평가는 급상승했으며, 토니 라루사 감독은 "나는 소를 높이 평가한다!"고 여러 번 언급했다. 팀 공식 웹사이트에서 진행된 "팀이 가장 필요로 하는 선수는 누구인가?"라는 설문 조사에서는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시즌 종료 후 여러 구단에서 제안이 있었지만, 그는 "라루사 감독 아래에서 야구를 더 배우고 싶다"며 1년 55.00 만 USD에 카디널스와 재계약했다.
2005년, 외야수 래리 워커와 레지 샌더스의 부상으로 토니 라루사 감독의 라인업에 기회가 열리면서 다구치 소는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그는 396타석에서 타율 .288, 8홈런, 53타점을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고, 세 외야 포지션 모두에서 뛰어난 수비로 팀에 기여했다. 카디널스는 100승을 거두며 내셔널 리그 최고 기록을 세웠다. 카디널스 라디오 아나운서 마이크 섀넌은 그를 "소맨(So-man)"이라 부르며 그의 노고와 극도로 예의 바른 태도를 칭찬했다. 다구치 소는 습관적으로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심판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였다. 영어 인터뷰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으며 수줍어하는 모습과 겸손하고 행복한 태도는 세인트루이스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2006년에는 출전 시간이 다소 감소하여 전년도 396타석에서 316타석으로 줄었다. 그러나 그는 3년 연속 카디널스의 플레이오프 로스터에 포함되었고, 영웅적인 포스트시즌 순간을 만들어냈다.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2차전이 열린 2006년 10월 13일, 그는 9회초에 빌리 와그너를 상대로 결승 홈런을 쳐냈다. 이 홈런은 카디널스에게 7-6 리드를 안겨주었고, 경기는 9-6으로 승리했다. 다구치 소는 카디널스의 2006년 월드 시리즈 5경기 중 4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182를 기록했고, 카디널스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4승 1패로 꺾고 우승하면서 월드 시리즈 반지를 획득했다. 그는 2007년 시즌을 위해 카디널스와 92.50 만 USD의 1년 계약에 합의했다.
2007년, 다구치 소는 카디널스에서 또 다른 준수한 시즌을 보냈다. 130경기에 출전하여 307타석에서 타율 .290을 기록하며 파트타임 선수로 활약했다. 그는 토니 라루사 감독이 가장 아끼는 대타 중 한 명이었으며, 2007년 46경기에서 단 1타석만을 소화했음에도 불구하고 15개의 안타를 기록했다. 수비에서는 617이닝을 소화했으며, 짐 에드먼즈의 부상으로 인해 중견수로 41번(그 외 22회) 선발 출장했고, 좌익수로 21번(그 외 20회) 선발 출장했다. 우익수로는 간헐적으로 출전했으며(2번 선발, 6회 출전), 2루수로는 한 경기의 일부에 출전하기도 했다. 시즌 종료 후 카디널스는 2008년 옵션을 거부하고, 다구치 소의 에이전트가 요청한 대로 2007년 12월 5일 그를 방출했다.
2.2.2. 필라델피아 필리스

2007년 시즌이 끝난 후, 카디널스는 다구치 소에 대한 2008년 옵션을 거부했고, 그의 에이전트가 방출을 요청한 후 2007년 12월 5일 중재를 포기하고 그를 방출했다.
2007년 12월 23일, 다구치 소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2009년 옵션이 포함된 1년 계약을 맺었다.
2008년 시즌에는 NPB와 MLB를 통틀어 1500안타를 달성했으나, 주로 대주자나 수비 전문 선수로 출전 기회가 제한적이었다. 시즌 후반에는 이적해온 에릭 브런틀렛에게 그 포지션을 빼앗기면서 메이저 리그 데뷔 후 최저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는 필리스의 포스트시즌 로스터에 포함되었고, 팀이 2008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면서 두 번째 우승 반지를 획득했다. (다구치 소는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대타로 4타수 무안타를 기록했으며, 월드 시리즈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월드 시리즈 우승 직후 필리스는 다구치 소에 대한 옵션을 거부하고 그를 자유 계약 선수로 만들었다.
2.2.3. 시카고 컵스

2009년 시즌을 앞두고 다구치 소는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고 스프링 트레이닝에 초청 선수로 참가했다. 그는 컵스 외야수 후쿠도메 고스케를 위한 일본인 동료를 제공하는 역할도 부분적으로 기대되었다. 다구치 소는 컵스 로스터에 합류하지 못하고 트리플 A로 강등되었다. 시즌 대부분을 마이너 리그에서 보냈던 그는 마이너 리그 85경기에서 타율 .248, 4홈런, 24타점을 기록한 뒤 2009년 9월 16일 부상당한 샘 풀드의 대체자로 컵스에 콜업되었다. 그는 12경기에 출전하여 11타석에서 3개의 안타를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 자유 계약 선수로 통보되었다.
2.3. 오릭스 복귀 및 은퇴
메이저 리그 생활을 마친 다구치 소는 친정팀인 오릭스로 복귀하여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보냈다.
2.3.1. 오릭스 버펄로스 복귀
2010년 1월, 다구치 소의 옛 소속팀인 오릭스 블루웨이브(이후 긴테쓰 버펄로스와 합병하여 오릭스 버펄로스가 됨)는 다구치 소를 2010년 시즌에 복귀시키기 위해 계약했다고 발표했다. 2010년 1월 23일, 오릭스 버펄로스와 1년 8000.00 만 JPY에 성과급 2000.00 만 JPY가 추가된 계약을 맺었다. 등번호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시절 팀 동료였던 래리 워커가 달았던 등번호를 본떠 33번을 선택했다. (과거 블루웨이브 시절에 달았던 6번은 오무라 나오유키가 착용하고 있었으며, 구단으로부터 5번도 제시받았지만 고사했다.)
주로 대타나 좌완 투수 선발 시에는 선발 타자로 기용되었다. 5월 30일에 열린 "간바로우 고베 데이"에서는 1995년 우승을 경험한 유일한 오릭스 현역 선수로서 복각된 블루웨이브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섰다. 9월 7일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열린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경기에서는 대타로 나와 역전 2점 홈런을 때려내며 9년 만에 친정팀의 수훈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4월 21일 왼쪽 허벅지 통증으로 인해 등록이 말소되었고, 이후에도 부진과 컨디션 난조로 7월 17일 다시 등록이 말소되는 등 시즌 내내 53경기에만 출전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그의 성실한 훈련 태도와 주변 선수들에 대한 조언 등 정신적 지주로서의 면이 높이 평가되어 이듬해에도 재계약에 성공했다.
2011년 2월 춘계 캠프에서 오른쪽 어깨를 다쳐 개막전에 출전하지 못했으나, 5월 10일 1군에 승격되었다。5월 18일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열린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는 "3번 우익수"로 출전하여 이와타 미노루를 상대로 선제 적시타를 때려내며 두 번째로 수훈 선수로 선정되었다. 이후에도 저조한 팀 타율과 고토 미쓰타카의 2군 강등 상황 속에서 3번 타자로서 팀을 이끌었다. 고토의 복귀 후에는 주로 2번 타자로 기용되었고, 교류전에서는 후배인 사카구치 도모타카에 이어 전체 2위인 타율 .363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후 부진에 빠져 8월 29일 등록 말소되었다. 이후 부상당한 오른쪽 어깨의 영향으로 1군에 다시 승격되지 못했으며, 결국 2011년 10월 13일 전력 외 통보를 받고 오릭스를 떠났다. 다음 날인 14일에는 오른쪽 어깨 수술을 받았다. 12월 2일, 자유 계약 선수로 공시되었다.
2.3.2. 현역 은퇴
2012년, 다구치 소는 재활 치료에 전념하며 현역 생활을 이어가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신규 계약 마감일인 7월 31일까지 어떤 구단으로부터도 영입 제안을 받지 못하자, 같은 날 자신의 공식 블로그를 통해 현역 은퇴를 발표했다. 그의 아내는 은퇴 경기를 치르지 못하고 선수 생활을 마감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3. 선수 특징 및 플레이 스타일
다구치 소는 선수로서 강한 어깨와 빠른 발을 지녔으며, 투수들의 움직임에 대한 뛰어난 예측 능력을 바탕으로 한 수비와 중요한 순간에 강한 타격 능력을 겸비한 유틸리티 플레이어였다.
그는 대학생 시절부터 명유격수로 주목받았으나, 오릭스 시절 송구 입스를 겪으며 입단 3년차에 본격적으로 외야수로 전향했다. 외야 수비에서는 이치로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특히 그는 강견을 자랑했으며, 이닝 사이에는 좌익수 위치의 다구치 소와 우익수 위치의 이치로가 캐치볼을 자주 주고받기도 했다. 도이 쇼조 감독 시절뿐만 아니라 오기 아키라 감독 시절에도 외야뿐만 아니라 내야를 지키는 경우도 있었다.
카디널스 이적 후에도 주전 선수들의 공백을 메우는 "슈퍼 서브"이자 "10번째 선발"이라는 유틸리티 플레이어로서 활약했다. 포스트시즌과 같은 중요한 경기에서 트레버 호프먼이나 빌리 와그너를 상대로 홈런을 터뜨리는 등 큰 경기에 강한 타격 능력을 보여주었다. 클러치 히터로서의 승부 근성 또한 그의 강점이었다. 2005년에는 득점권 타율.407(OPS.936)을 기록했으며, 메이저 리그 통산으로도 전체 타율 .279, OPS .717에 비해 득점권에서는 타율 .331, OPS .835라는 높은 수치를 남겼다. 또한, 메이저 리그 통산 만루 시 타율은 .512(41타수 21안타, 출루율.510, 장타율.707, OPS 1.217)에 달했다.
2009년, 지역 신문인 세인트루이스 포스트-디스패치 전자판이 2000년대 카디널스 베스트 나인을 독자 투표로 선정했을 때, 다구치 소는 "최고의 벤치 요원" 부문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이 신문은 "팀을 떠난 후에도 기립 박수로 환영받는 등, 지금도 팬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며 다구치 소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했다. 이처럼 그는 팬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았으며, 마이너 리그 시절에는 현지 팬들을 위한 다구치 소 개인 상품이 판매되기도 했다.
4. 선수 은퇴 이후 활동
선수 은퇴 후 다구치 소는 야구 해설가, 방송인, 그리고 코치로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며 야구계에 기여하고 있다.
4.1. 야구 해설가 및 방송 활동
2012년 9월 6일, 당시 소속사를 통해 현역 은퇴를 공식 발표함과 동시에 호리프로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새로 체결하고, 호리프로의 스포츠 문화부에 소속되어 야구 해설가로 활동할 것이라고 밝혔다.
은퇴 발표 후 약 한 달 뒤인 2012년 10월 2일부터는 MBS 라디오에서 2012년 야간 오프시즌 기간에 방송된 4시간 이상의 생방송 프로그램인 『with... 밤은 라디오로 정해둡니다(with...夜はラジオと決めてます)』 화요일 코너의 진행을 맡으며 정규 라디오 진행자로서 첫 데뷔를 했다. 이와 관련하여 2012년 12월 MBS 라디오의 "청취율 조사 주간 스페셜 위크"에서는 해당 방송국의 진행자 대표로 "스페셜 위크 홍보 대사"로도 활동했다. 또한 2012년 11월 25일에 개최된 제2회 고베 마라톤에서는 아사히 방송의 프로그램 기획의 일환으로 생애 첫 풀 마라톤에 도전하여 5시간 51분 20초의 기록으로 완주했다. 당시 그는 방송국이나 TV, 라디오를 불문하고 (뉴스 프로그램의 스포츠 코너를 포함하여) 다수의 스포츠 중계 및 프로그램에 게스트 해설자로 출연했다.
2013년 프로 야구 시즌부터는 NHK의 야구 해설자로도 활동했다.
4.2. 지도자 경력
2015년 10월 1일, 2016년부터 오릭스 버펄로스의 2군 감독으로 복귀한다고 발표되었다. 또한 다구치 소의 블루웨이브 시절 팀 동료이자 2015년 시즌 중반부터 1군 감독 대행을 맡았던 후쿠라 준이치가 1군 감독으로 정식 취임하는 것도 확정되었다. 그의 등번호는 81번이다.
2군 감독 1년차인 2016년에는 1군과 2군 모두 리그 최하위로 부진했다. 다구치 소 자신도 시즌 중인 7월에 시각 장애와 언어 장애를 겪어 일시적으로 휴양하며 입원하기도 했다 (MRI 검사 결과 이상은 없었다). 그는 현역 시절과는 의식이 크게 다른 젊은 선수들과의 소통 방식을 "프로 야구 중간 관리직"이라는 입장에서 모색했다.
2017년에는 2군 감독과 타격 코치를 겸임했다. 또한 2017년 3월 30일에는 전년도의 경험을 담은 저서 『프로 야구 2군 미스터리(プロ野球・二軍の謎)』를 겐토샤에서 출간했다.
2018년에는 다시 2군 감독에 전념했다.
2019년부터는 1군 야수 종합 겸 타격 코치로 취임했다.
2021년부터는 외야 수비/주루 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2024년 10월 7일, 오릭스 버펄로스를 퇴단하는 것이 발표되었다.
5. 개인 생활 및 인물상
다구치 소의 개인적인 삶은 그의 아내와 자녀를 중심으로 한 가족 관계, 그리고 그의 성실하고 진솔한 인물상이 특징이다.
5.1. 가족 관계 및 사생활
다구치 소는 전 TBS 아나운서이자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가진 아내 가가와 에미코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그는 또한 니모를 찾아서와 몬스터 주식회사와 같은 영화를 보면서 영어 연습을 했다. 가족은 여전히 세인트루이스에 집을 소유하고 있다.
부부에게는 2003년 12월 24일 태어난 아들 칸(Kan)이 있다. 칸은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있는 그랜드 캐니언 대학교 야구팀 소속 선수이다.
5.2. 인물상 및 철학

다구치 소는 성실하고 진솔한 성격으로 오릭스 시절부터 인망이 두터웠으며, 선수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시드니 올림픽 당시, 이치로의 출전을 바라는 대표팀의 요청에 대해 그는 "올림픽은 아마추어 선수들의 꿈의 무대"라며 출전을 주저하는 이치로의 심경을 헤아려, 이치로의 선발 회피를 탄원하고 자신이 대역으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그는 사카구치 도모타카와는 메이저 리그 시절부터 이어진 사제 관계였으며, 비시즌에는 함께 합동 자율 훈련을 진행하기도 했다.
현역 선수 시절에는 자신의 공식 웹사이트에 『무엇이든 참는 일기(何苦楚日記)』를 직접 집필했다. 이 내용을 편집한 동명의 서적이 2004년 주부와 생활사에서 출간된 것을 시작으로, "프로 작가에 필적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높은 구성력을 가진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여 "글 쓰는 프로 야구 선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마이너 리그 팀에서 활동하던 시절에는 "일기밖에 쓸 줄 모르는 마이너리거"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후에는 "일기도 쓸 줄 아는 메이저리거"로 불리게 되었다. 『무엇이든 참는 일기』의 제목에 사용된 '何苦楚(나니쿠소)'는 오릭스 시절 나카니시 후토시에게 받은 좌우명으로, 같은 나카니시에게 지도를 받은 이와무라 아키노리 역시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말이다. 오릭스 2군 감독으로 취임한 2016년부터는 『거의 매일 이토이 신문(ほぼ日刊イトイ新聞)』에서 「야구인 다구치 소의 새로운 장, 첫 2군 감독(野球の人・田口壮の新章 はじめての二軍監督)」을, 『니혼게이자이신문』 전자판에서 「2군 감독 다구치 소!(2軍監督 田口壮!)」라는 칼럼을 정기적으로 연재했다。 앞서 언급된 저서 『프로 야구 2군 미스터리』는 2016년 연재분 「2군 감독 다구치 소!」에 시즌 종료 후 내용을 추가한 것이다.
다구치 소는 MLB로 이적했을 당시, 그의 모교인 간세이가쿠인 대학이 기독교주의에 입각한 교육 방침을 가지고 있었던 영향 등으로 팀 동료들과 함께 교회에 자주 방문했다. 다만, 현재까지도 세례를 받지는 않아 엄밀히 말해 기독교인은 아니다. 그는 "마음에 울림이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있었고,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진짜라고 알게 되었어요... 아내와의 관계나 인생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지금은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카디널스에는 존 로드리게스, 브레이든 루퍼, 알버트 푸홀스 등 독실한 신앙심으로 알려진 선수들이 있었다. 다구치 소는 "푸홀스는 매우 친절하게 대해줍니다. 그는 언어의 어려움을 이해해주고, 신앙의 모범이 되는 기독교인입니다. 모두 매우 친절하게 대해줍니다"라고 언급했다.
6. 수상 및 영예
다구치 소는 선수 생활 동안 NPB와 MLB에서 다양한 수상과 영예를 얻었다.
6.1. 일본 프로 야구 (NPB) 수상
- 베스트 나인 : 1회 (1996년)
- 골든 글러브상 : 5회 (1995년, 1996년, 1997년, 2000년, 2001년)
- 월간 MVP : 1회 (1998년 9월)
- JA 전농 Go·Go상 (강견상) : 1회 (2000년 9월)
- 출신지별 동서 대항전 우수 선수 : 1회 (2000년)
6.2. 메이저 리그 (MLB) 수상
- 하트 & 허슬상 : 2007년 (팀 내 수상. 30개 구단 중 최종 수상자에는 선정되지 않음)
7. 주요 기록
7.1. 타격 및 수비 기록
연 도 | 소 속 | 시 합 | 타 석 | 타 수 | 득 점 | 안 타 | 2 루 타 | 3 루 타 | 본 루 타 | 루 타 | 타 점 | 도 루 | 도 루 사 | 희 타 | 희 비 | 볼 넷 | 고 사 | 사 구 | 삼 진 | 병 살 타 | 타 율 | 출 루 율 | 장 타 율 | O P S |
---|---|---|---|---|---|---|---|---|---|---|---|---|---|---|---|---|---|---|---|---|---|---|---|---|
1992년 | 오릭스 | 47 | 141 | 123 | 12 | 33 | 10 | 0 | 1 | 46 | 7 | 5 | 0 | 9 | 0 | 8 | 0 | 1 | 26 | 1 | .268 | .318 | .374 | .692 |
1993년 | 31 | 90 | 83 | 12 | 23 | 7 | 1 | 0 | 32 | 5 | 3 | 2 | 4 | 0 | 3 | 0 | 0 | 12 | 2 | .277 | .302 | .386 | .688 | |
1994년 | 108 | 364 | 329 | 55 | 101 | 17 | 1 | 6 | 138 | 43 | 10 | 3 | 5 | 4 | 23 | 1 | 3 | 62 | 6 | .307 | .354 | .419 | .773 | |
1995년 | 130 | 574 | 495 | 76 | 122 | 24 | 2 | 9 | 177 | 61 | 14 | 7 | 25 | 7 | 43 | 0 | 4 | 80 | 7 | .246 | .308 | .358 | .665 | |
1996년 | 128 | 569 | 509 | 74 | 142 | 24 | 1 | 7 | 189 | 44 | 10 | 4 | 23 | 4 | 29 | 4 | 4 | 61 | 15 | .279 | .321 | .371 | .692 | |
1997년 | 135 | 643 | 572 | 92 | 168 | 32 | 4 | 10 | 238 | 56 | 7 | 1 | 16 | 3 | 49 | 1 | 3 | 74 | 4 | .294 | .351 | .416 | .767 | |
1998년 | 132 | 573 | 497 | 85 | 135 | 26 | 2 | 9 | 192 | 41 | 8 | 8 | 23 | 2 | 48 | 2 | 3 | 68 | 13 | .272 | .338 | .386 | .724 | |
1999년 | 133 | 569 | 524 | 77 | 141 | 21 | 1 | 9 | 191 | 56 | 11 | 6 | 14 | 1 | 29 | 0 | 1 | 91 | 9 | .269 | .308 | .365 | .673 | |
2000년 | 129 | 578 | 509 | 77 | 142 | 26 | 3 | 8 | 198 | 49 | 9 | 2 | 11 | 0 | 55 | 1 | 3 | 80 | 12 | .279 | .353 | .389 | .742 | |
2001년 | 134 | 524 | 453 | 70 | 127 | 21 | 6 | 8 | 184 | 42 | 6 | 6 | 26 | 1 | 43 | 2 | 1 | 88 | 7 | .280 | .343 | .406 | .750 | |
2002년 | STL | 19 | 19 | 15 | 4 | 6 | 0 | 0 | 0 | 6 | 2 | 1 | 0 | 2 | 0 | 2 | 0 | 0 | 1 | 0 | .400 | .471 | .400 | .871 |
2003년 | 43 | 59 | 54 | 9 | 14 | 3 | 1 | 3 | 28 | 13 | 0 | 0 | 1 | 0 | 4 | 1 | 0 | 11 | 2 | .259 | .310 | .519 | .829 | |
2004년 | 109 | 206 | 179 | 26 | 52 | 10 | 2 | 3 | 75 | 25 | 6 | 3 | 10 | 3 | 12 | 1 | 2 | 23 | 6 | .291 | .337 | .419 | .756 | |
2005년 | 143 | 424 | 396 | 45 | 114 | 21 | 2 | 8 | 163 | 53 | 11 | 2 | 2 | 4 | 20 | 2 | 2 | 62 | 11 | .288 | .322 | .412 | .734 | |
2006년 | 134 | 361 | 316 | 46 | 84 | 19 | 1 | 2 | 111 | 31 | 11 | 3 | 9 | 2 | 32 | 1 | 2 | 48 | 9 | .266 | .335 | .351 | .686 | |
2007년 | 130 | 340 | 307 | 48 | 89 | 15 | 0 | 3 | 113 | 30 | 7 | 4 | 3 | 1 | 23 | 0 | 6 | 32 | 10 | .290 | .350 | .368 | .718 | |
2008년 | PHI | 88 | 103 | 91 | 18 | 20 | 5 | 1 | 0 | 27 | 9 | 3 | 0 | 4 | 0 | 8 | 0 | 0 | 14 | 2 | .220 | .283 | .297 | .580 |
2009년 | CHC | 6 | 12 | 11 | 1 | 3 | 1 | 0 | 0 | 4 | 0 | 0 | 0 | 0 | 0 | 1 | 0 | 0 | 4 | 0 | .273 | .333 | .364 | .697 |
2010년 | 오릭스 | 53 | 131 | 119 | 17 | 31 | 6 | 0 | 3 | 46 | 10 | 1 | 0 | 2 | 2 | 7 | 0 | 1 | 28 | 4 | .261 | .302 | .387 | .689 |
2011년 | 62 | 239 | 198 | 27 | 54 | 10 | 0 | 0 | 64 | 15 | 3 | 1 | 23 | 0 | 15 | 1 | 3 | 36 | 5 | .273 | .333 | .323 | .657 | |
NPB:12년 | 1222 | 4995 | 4411 | 674 | 1219 | 224 | 21 | 70 | 1695 | 429 | 87 | 40 | 181 | 24 | 352 | 12 | 27 | 706 | 85 | .276 | .332 | .384 | .716 | |
MLB:8년 | 672 | 1524 | 1369 | 197 | 382 | 74 | 7 | 19 | 527 | 163 | 39 | 12 | 31 | 10 | 102 | 5 | 12 | 195 | 40 | .279 | .332 | .385 | .717 |
연 도 | 구 단 | 외야 | 중견 (CF) | 좌익 (LF) | 우익 (RF) | 2루 (2B) | |||||||||||||||||||||||||
---|---|---|---|---|---|---|---|---|---|---|---|---|---|---|---|---|---|---|---|---|---|---|---|---|---|---|---|---|---|---|---|
경 기 | 자 살 | 보 살 | 실 책 | 병 살 | 수 비 율 | 경 기 | 자 살 | 보 살 | 실 책 | 병 살 | 수 비 율 | 경 기 | 자 살 | 보 살 | 실 책 | 병 살 | 수 비 율 | 경 기 | 자 살 | 보 살 | 실 책 | 병 살 | 수 비 율 | 경 기 | 자 살 | 보 살 | 실 책 | 병 살 | 수 비 율 | ||
2002년 | STL | - | 6 | 8 | 2 | 0 | 0 | 1.000 | 8 | 3 | 0 | 1 | 0 | .750 | - | - | |||||||||||||||
2003년 | - | 16 | 19 | 2 | 0 | 1 | 1.000 | 11 | 6 | 0 | 0 | 0 | 1.000 | 13 | 5 | 0 | 0 | 0 | 1.000 | 2 | 0 | 0 | 0 | 0 | .--- | ||||||
2004년 | - | 31 | 43 | 0 | 0 | 0 | 1.000 | 53 | 40 | 0 | 2 | 0 | .952 | 28 | 16 | 1 | 0 | 0 | 1.000 | - | |||||||||||
2005년 | - | 50 | 58 | 0 | 0 | 0 | 1.000 | 52 | 50 | 2 | 0 | 1 | 1.000 | 57 | 75 | 3 | 2 | 0 | .975 | - | |||||||||||
2006년 | - | 59 | 90 | 2 | 5 | 0 | .948 | 70 | 87 | 1 | 1 | 0 | .989 | 7 | 5 | 0 | 0 | 0 | 1.000 | 1 | 1 | 1 | 0 | 0 | 1.000 | ||||||
2007년 | - | 63 | 118 | 1 | 1 | 1 | .982 | 41 | 49 | 2 | 2 | 1 | .962 | 8 | 5 | 0 | 0 | 0 | 1.000 | 1 | 1 | 0 | 1 | 0 | .250 | ||||||
2008년 | PHI | - | 1 | 0 | 0 | 0 | 0 | .--- | 38 | 22 | 0 | 2 | 0 | .917 | 11 | 11 | 0 | 0 | 0 | 1.000 | - | ||||||||||
2009년 | CHC | - | - | 3 | 1 | 1 | 0 | 0 | 1.000 | 1 | 1 | 0 | 0 | 0 | 1.000 | - | |||||||||||||||
2010년 | 오릭스 | 30 | 32 | 0 | 1 | 0 | .970 | - | - | - | - | ||||||||||||||||||||
2011년 | 46 | 74 | 2 | 0 | 0 | 1.000 | - | - | - | - | |||||||||||||||||||||
MLB 총계 | - | 226 | 336 | 7 | 6 | 2 | .983 | 276 | 258 | 6 | 8 | 2 | .971 | 125 | 118 | 4 | 2 | 0 | .984 | 3 | 2 | 1 | 1 | 0 | .750 |
7.2. 개인 통산 기록
- NPB 첫 출장 및 첫 선발 출장 : 1992년 4월 4일, 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열린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1차전, "9번 유격수"로 선발 출장.
- NPB 첫 안타 : 1992년 4월 11일, 그린 스타디움 고베에서 열린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1차전, 5회말 다카야나기 이즈미로부터 좌익선상 2루타.
- NPB 첫 도루 : 1992년 5월 1일, 그린 스타디움 고베에서 열린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3차전, 8회말 2루 도루 (투수: 가네이시 쇼인, 포수: 다무라 후지오).
- NPB 첫 타점 : 1992년 9월 8일, 기타큐슈 시민 구장에서 열린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23차전, 8회초 이케다 지카노부로부터 2점 적시 2루타.
- NPB 첫 홈런 : 1992년 9월 23일, 그린 스타디움 고베에서 열린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25차전, 3회말 다카야나기 이즈미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
- NPB 통산 1000안타 : 2000년 10월 6일, 그린 스타디움 고베에서 열린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26차전, 4회말 니시구치 후미야로부터 중전 안타 (역대 203번째).
- NPB 통산 1000경기 출장 : 2001년 4월 28일, 그린 스타디움 고베에서 열린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7차전, "6번 좌익수"로 선발 출장 (역대 367번째).
- NPB 올스타전 출장 : 4회 (1995년, 1996년, 1997년, 2001년).
- MLB 시즌 득점권 타율 1위 : .407 (2005년).
8. 저서 및 출연
다구치 소는 선수 은퇴 후에도 저술 활동과 다양한 방송 매체 출연을 통해 대중과 소통했다.
8.1. 저서
- 『무엇이든 참는 일기(何苦楚日記)』 (2004년 1월 초판, 주부와 생활사)
- 『태그바나(タグバナ。)』 (2007년 5월 11일 초판, 세계문화사)
- 『조연의 힘(脇役力<ワキヂカラ>)』 (2010년 4월 16일 초판, PHP 연구소)
- 『야구와 여담과 베이스볼(野球と余談とベースボール)』 (2013년 2월 26일 초판, 마이내비)
- 『프로 야구 2군 미스터리(プロ野球・二軍の謎)』 (2017년 3월 20일 초판, 겐토샤)
8.2. 방송 및 기타 출연
- 텔레비전:
- 메이저 리그 (NHK BS1, 수시 출연) - 해설자
- 월드 스포츠 MLB (NHK BS1) - 메이저 리그 코멘테이터
- 라디오:
- 『with... 밤은 라디오로 정해둡니다(with...夜はラジオと決めてます)』 (MBS 라디오, 2012년 10월 2일 ~ 2013년 3월 26일) - 화요일 퍼스낼리티
- NHK 프로 야구 (NHK 라디오, 주로 한신·오릭스 홈 경기 위주로 수시 출연) - 해설자
- 영화:
- 『달려라! 이치로(走れ!イチロー)』 (2001년 4월 28일 개봉, 도에이, 감독: 오모리 가즈키) - 본인 역으로 출연
9. 등번호
다구치 소가 프로 경력 동안 소속 팀에서 사용했던 등번호는 다음과 같다.
- 6 (오릭스 블루웨이브: 1992년 ~ 2001년)
- 99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카고 컵스: 2002년 ~ 2009년)
- 33 (오릭스 버펄로스: 2010년 ~ 2011년)
- 81 (오릭스 버펄로스 코치: 2016년 ~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