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메리 공주는 1897년 4월 25일 노퍽주 샌드링엄 저택 내 요크 코티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증조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 기간에 태어났으며, 당시 요크 공작 부부였던 조지 5세와 테크의 메리의 셋째 아이이자 외동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에드워드 7세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웨일스 공 부부의 유일한 생존 아들이었으며, 어머니는 테크 공작 프랜시스와 케임브리지의 메리 아델레이드 공주 테크 공작 부부의 맏딸이자 외동딸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증조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 아버지의 할머니인 웨일스 공비 알렉산드라, 어머니의 할머니인 테크 공작 부인 메리 아델레이드, 그리고 생일이 같은 아버지의 고모인 헤세 대공비 앨리스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알렉산드라 앨리스 메리라고 명명되었다. 그녀는 마지막 이름인 메리로 불렸다. 태어날 당시 그녀는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오빠들인 에드워드 8세와 조지 6세에 이어 영국 왕위 계승 순위에서 5위였으나, 이후 남동생들인 글로스터 공작 헨리 왕자, 켄트 공작 조지 왕자, 존 왕자의 출생으로 순위가 내려갔다.
메리 공주는 1897년 6월 7일 샌드링엄 근처 성 메리 막달레나 교회에서 요크 대주교 윌리엄 달림플 맥라간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그녀의 대부모는 증조할머니인 여왕, 아버지의 증조부인 헬라스 국왕, 아버지의 증조모인 러시아 황태후 마리아 표도로브나, 아버지의 조부모인 웨일스 공 부부, 어머니의 할머니인 테크 공작 부인, 아버지의 고모인 웨일스의 빅토리아 공주, 그리고 어머니의 삼촌인 테크의 프랜시스 왕자였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메리가 세 살이던 1901년에 왕위에 올랐다.
메리 공주는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으나, 오빠들인 에드워드, 앨버트, 헨리와 일부 수업을 함께 들었다. 그녀는 독일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하게 되었고, 평생 동안 말과 경마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그녀의 첫 공식 석상 등장은 1911년 6월 2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부모님인 조지 5세 국왕과 테크의 메리 왕비의 대관식이었다.

2. 주요 활동 및 공헌
메리 공주는 왕실의 일원으로서 다양한 공무와 사회 공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자선 활동, 군 복무, 그리고 왕실 공무 및 문화 후원 분야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했다.
2.1. 자선 활동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메리 공주는 어머니와 함께 병원과 복지 단체를 방문하며 영국군 장병과 그 가족들을 위로하고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도왔다. 이 프로젝트 중 하나는 '메리 공주 크리스마스 선물 기금'으로, 1914년 크리스마스에 현역 영국 육군 및 해군 장병들에게 총 10.00 만 GBP 상당의 선물을 보냈다. 이는 2023년 물가 기준으로 약 1210.00 만 GBP에 해당한다.
그녀는 걸스카우트 운동, VADs, 그리고 여성 토지군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데 참여했다. 1918년 6월, 젠틀우먼지에 발표된 후 그녀는 그레이트 오몬드 스트리트 병원에서 간호학 과정을 시작하여 알렉산드라 병동에서 일주일에 이틀씩 근무했다.
1918년 11월 20일, 메리 공주는 휴전 협정 이후 프랑스를 방문한 최초의 왕실 구성원이 되었다. 그녀는 알렉산드라 왕립 육군 간호 군단 또는 자원봉사 지원 분대와 관련된 센터와 부상당한 군인들이 있는 병원을 방문했다.
메리 공주의 공적 임무는 간호, 걸스카우트 운동, 그리고 여성 서비스에 대한 그녀의 관심을 반영했다. 그녀의 결혼을 앞두고 영국 제국 내의 메리 또는 그 변형된 이름(마리, 메이, 미리엄 포함)을 가진 소녀들과 여성들은 "제국의 메리들"을 결성하여 결혼 선물 기금을 기부했다. 그녀는 이 기금을 걸스카우트 협회에 폭슬리스 부동산 매입을 위해 기증했으며, 결혼 선물 전시회 이후에도 수익의 절반을 같은 목적(유지 보수)으로 기부하여 총 1.00 만 GBP를 기부함으로써 프로젝트가 진행될 수 있도록 했다.
그녀는 1920년 영국 걸스카우트 협회의 명예 회장이 되었고,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그녀는 걸스카우트 운동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걸스카우트의 최고 성인 명예인 실버 피시 상을 받았다. 2013년 7월, 브리티시 파테는 1927년 뉴스릴 필름에서 캐서린 미들턴의 조상들이 리즈의 시장으로서 리즈 훈슬렛의 기독교여자청년회에서 메리 공주를 맞이하는 모습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찰스 럽턴 경과 그의 형제 휴 럽턴은 웨일스 공주의 증조할머니인 올리브 미들턴의 삼촌들이었다. 1921년, 공주는 낫 포가튼 협회의 첫 후원자가 되었고, 1965년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이 자선 단체의 첫 크리스마스 티 파티는 메리가 조직하여 1921년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열렸으며, 600명의 부상당한 군인들을 초청하여 오후 차를 대접했고, 이 행사는 그 이후 매년 개최되었다. 1926년, 메리 공주는 영국 적십자사 분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1920년대에 그녀는 리즈 3년제 음악제의 후원자였다. 1940년대에는 메리 공주와 그녀의 아들 조지, 그리고 그의 아내인 전 콘서트 피아니스트 헤어우드 백작 부인 매리언 스타인이 음악제의 개막식과 많은 공연에 참석했다. 조지는 리즈 3년제 음악제의 예술 감독 역할을 포함한 경력을 가진 저명한 음악 평론가였다.
1931년, 그녀는 요크셔 여성 교육 위원회의 후원자로 임명되었다. 그녀는 또한 여학생 애국 연합의 후원자였다.
1927년 7월, 헤딩리 크리켓 경기장에서 열린 가든 파티에서 공주는 미들턴 가문의 구성원들을 포함한 고위 인사들과 함께 차를 대접받았는데, 웨일스 공주 캐서린의 증조할머니인 올리브 미들턴도 그중 한 명이었다. 공주와 그녀의 아들 조지 라셀스, 제7대 헤어우드 백작은 요크셔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후원자였으며, 이 오케스트라는 그들의 집인 헤어우드 하우스에서 열리는 야회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이 콘서트에 참석한 오케스트라의 공동 설립자 리처드 노엘 미들턴은 공주와 친분이 있었다. 미들턴의 아내 올리브는 리즈 종합 병원을 위한 공주의 모금 위원회 위원이었다. 올리브의 사촌은 동료 위원회 위원인 엘리노어 G. 럽턴이었는데, 그녀는 1933년에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고 알려졌다. 위원회의 부회장 중에는 공주의 시누이인 에드워드 라셀스 부인도 있었는데, 그녀는 올리브 미들턴과 그녀의 친척인 제시 비어트리스 키트슨과 함께 봉사했다. 메리 공주는 1936년 리즈 병원의 후원자가 되었다.
2.2. 군 복무 및 역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프린세스 로열은 보조여단(ATS)의 최고 통제관이 되었고, 이후 1949년 여성육군부(WRAC)로 명칭이 변경된 후에는 통제관 사령관이 되었다. 이 직책을 수행하면서 그녀는 전국을 여행하며 부대와 전시 식당, 기타 복지 단체들을 방문했다. 1942년 남동생 켄트 공작 조지 왕자가 사망한 후, 그녀는 파프워스 병원의 회장이 되었다. 프린세스 로열은 1950년 프린세스 메리 왕립 공군 간호 서비스의 공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1956년에는 영국 육군의 명예 육군 대장 계급을 받았다. 또한 1949년에는 제10 구르카 소총 연대가 그녀를 기리기 위해 '제10 프린세스 메리 소유 구르카 소총 연대'로 개칭되었다.
2.3. 왕실 공무 및 후원
남편이 1947년에 사망한 후, 프린세스 로열은 큰아들과 그의 가족과 함께 헤어우드 하우스에서 살았다. 그녀는 1951년 리즈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고, 국내외에서 공식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 그녀는 1953년 6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에 참석했으며, 이후 1962년 트리니다드 토바고 독립 기념식과 1964년 잠비아 독립 기념식에서 여왕을 대표했다. 그녀의 마지막 공식 임무 중 하나는 1965년 3월 초 스웨덴의 루이세 왕비의 장례식에서 여왕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프린세스 로열은 1965년 3월 런던 클리닉에서 최근 안과 수술에서 회복 중이던 오빠 윈저 공작을 방문했다. 공주는 또한 윈저 공작의 부인인 윈저 공작 부인을 만났는데, 이는 공작 부인이 남편의 직계 가족과 만난 몇 안 되는 만남 중 하나였다.
2.4. 학술 및 문화 활동
메리 공주는 학술 및 문화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녀는 1951년에 리즈 대학교의 총장으로 임명되어 1965년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하며 대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그녀는 리즈 음악제의 오랜 후원자였으며, 1920년대부터 이 음악제를 지원했다. 1940년대에는 음악제의 개막식과 다수의 공연에 직접 참석하며 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녀의 아들 조지 또한 저명한 음악 평론가이자 리즈 3년제 음악제의 예술 감독으로 활동하며 어머니의 문화적 유산을 이어갔다. 메리 공주는 1931년에 요크셔 여성 교육 위원회의 후원자로도 임명되어 지역 교육 발전에 기여했다. 그녀는 또한 요크셔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후원자로서 오케스트라의 공동 설립자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문화 예술계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3. 결혼 및 가족

1922년 2월 28일, 메리 공주는 라셀스 자작과 결혼했다. 라셀스 자작은 제5대 헤어우드 백작과 그의 아내 플로렌스 브리지먼 여사의 장남이었다. 신부는 24세였고, 신랑은 39세였다.
그들의 결혼식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렸으며, 버킹엄 궁전으로 가는 길을 따라 많은 인파가 몰렸다. 이 결혼식은 보그를 포함한 패션 잡지에서 다뤄진 최초의 왕실 결혼식이었다. 신부의 가운은 라빌 씨가 디자인했으며, 영국과 인도의 상징이 특징이었다. 메리 공주의 친구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이 신부 들러리 중 한 명으로 참여한 첫 왕실 행사였다. 그녀는 나중에 메리의 남동생인 앨버트 왕자와 결혼하여 1936년 그의 즉위와 함께 영국 왕비가 되었다.
메리 공주와 라셀스 경은 두 아들을 두었다.
- 조지 라셀스, 제7대 헤어우드 백작 (1923년 2월 7일 ~ 2011년 7월 11일); 1949년 매리언 스타인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으며, 1967년 이혼했다. 1967년 패트리샤 엘리자베스 터크웰과 재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제럴드 라셀스 (1924년 8월 21일 ~ 1998년 2월 27일); 1952년 안젤라 다우딩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으며, 1978년 이혼했다. 엘리자베스 콜링우드와 재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3.1. 가족 주택 및 관심사
공주와 그녀의 남편은 런던(체스터필드 하우스, 웨스트민스터)과 요크셔에 집을 가지고 있었다(처음에는 골즈버러 홀, 나중에는 헤어우드 하우스). 골즈버러 홀에 머무는 동안, 메리 공주는 건축가 시드니 키트슨에게 내부 개조를 의뢰하여 두 자녀의 양육에 적합하게 만들었고, 남쪽 테라스에서 약 0.4 km 길이의 라임 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너도밤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긴 화단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 라임 나무들은 1920년대 내내 홀을 방문했던 그녀의 친척들, 즉 아버지 조지 국왕과 어머니 메리 왕비를 포함한 사람들이 심었다.
시아버지가 사망한 후 헤어우드 백작 부인이 된 메리 공주는 헤어우드 하우스로 이사했고, 라셀스 가문의 본가 내부 장식 및 개조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농업 분야에서도 메리 공주는 소 사육 전문가가 되었으며, 남편이 회장이었던 영국 왕립 농업 학회의 이사회에 참여했다. 2012년 12월, 공주의 소지품 중 일부는 크리스티가 주관한 "헤어우드: 왕실 전통 수집품" 경매에서 판매되었다.
20세기 전반기 동안, 그녀는 가끔 브람햄 무어 사냥단과 함께 말을 탔는데, 헤어우드 경은 사냥단의 마스터였다. 그녀는 웨더비와 요크에서 열리는 경마 행사를 위해 헤어우드 하우스 파티에서 많은 경마 애호가들을 접대했다.
4. 프린세스 로열 작위
1929년 10월 6일, 결혼과 동시에 가터 훈장 기사가 되었던 라셀스 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6대 헤어우드 백작, 라셀스 자작, 그리고 헤어우드 남작이 되었다. 1932년 1월 1일, 조지 5세는 그의 외동딸이 1년 전 사망한 고모 루이세 공주, 파이프 공작 부인의 뒤를 이어 프린세스 로열이라는 칭호를 갖도록 선포했다.
프린세스 로열은 특히 그녀의 큰 오빠인 웨일스 공과 매우 가까웠는데, 그는 가까운 가족들에게 데이비드로 알려져 있었고, 1936년 아버지의 사망 후 에드워드 8세가 되었다. 퇴위 위기 이후, 그녀와 남편은 빈 근처 엔체스펠트 성에서 당시 윈저 공작이 된 전 에드워드 8세와 함께 머물렀다. 나중에 1947년 11월, 그녀는 조카인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 마운트배튼 중위의 결혼식에 윈저 공작이 초대받지 못했기 때문에 참석을 거부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건강상의 이유를 불참의 공식적인 이유로 들었다. 1953년 3월, 그녀는 서인도 제도 순방을 단축하고 런던으로 돌아오기 전에 뉴욕으로 깜짝 방문하여 윈저 공작 부부를 만났다. 그녀는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후, 그녀와 공작은 병든 어머니 메리 왕비를 방문하기 위해 함께 배에 탑승했다.
5. 작위, 칭호 및 영예
메리 공주는 평생 동안 다양한 작위와 칭호를 사용했으며, 영국 및 해외에서 수많은 영예와 훈장을 받았다. 또한 그녀의 공식 문장(紋章)은 그녀의 왕실 지위와 결혼을 상징했다.
5.1. 작위 및 칭호
메리 공주는 출생부터 '프린세스 로열' 작위를 받기까지 다음과 같은 공식적인 작위와 칭호를 사용했다.
- 1897년 4월 25일 - 1898년 5월 28일: 요크 공녀 메리 전하 (Her Highness Princess Mary of York영어)
- 1898년 5월 28일 - 1901년 1월 22일: 요크 공녀 메리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Mary of York영어)
- 1901년 1월 22일 - 1901년 11월 9일: 콘월 요크 공녀 메리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Mary of Cornwall and York영어)
- 1901년 11월 9일 - 1910년 5월 6일: 웨일스 공녀 메리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Mary of Wales영어)
- 1910년 5월 6일 - 1922년 2월 22일: 메리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Mary영어)
- 1922년 2월 22일 - 1929년 10월 6일: 라셀스 자작 부인 메리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Mary, Viscountess Lascelles영어)
- 1929년 10월 6일 - 1932년 1월 1일: 헤어우드 백작 부인 메리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Mary, Countess of Harewood영어)
- 1932년 1월 1일 - 1965년 3월 28일: 프린세스 로열 헤어우드 백작 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Royal, Countess of Harewood영어)

5.2. 영예
메리 공주에게 수여된 주요 훈장, 상, 명예직 등은 다음과 같다.
5.2.1. 영국, 대영 제국 및 영연방
- CI: 인도 제국 훈장 컴패니언, 1919년 4월 25일
- GCStJ: 예루살렘 성 요한 기사단 데임 그랜드 크로스, 1926년 5월 12일
- GBE: 대영 제국 최고 훈장 데임 그랜드 크로스, 1927년 6월 3일
- GCVO: 로열 빅토리아 훈장 데임 그랜드 크로스, 1937년 5월 11일
- RRC: 로열 적십자 훈장 회원
- 조지 5세 왕가 훈장
- 조지 6세 왕가 훈장
-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왕가 훈장
- 1952년: 요크 시 명예 시민
5.2.2. 해외
- 스페인 왕정복고: 마리아 루이사 여왕 훈장 데임 그랜드 크로스, 1926년 7월 12일
5.2.3. 명예 군직
- 1935년: 왕립 통신대 총장
- 1939년: 보조여단 최고 통제관 및 이후 통제관 사령관
- 1950년: 프린세스 메리 왕립 공군 간호 서비스 공군 총사령관
5.2.4. 군 계급
- 1956년: 영국 육군 대장
5.3. 문장 (Arms)
1931년, 프린세스 로열 헤어우드 백작 부인 메리 공주는 자신만의 개인 문장을 받았다. 이 문장은 왕실 문장을 바탕으로, 세 개의 은색 점이 있는 라벨(label)을 추가하고 각 점에 붉은색 십자가를 배치하여 차이를 두었다.
문장 | 기(旗) | 스코틀랜드 기 | 결합 문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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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망 및 유산
1965년 3월 28일, 프린세스 로열은 헤어우드 하우스 영지에서 큰아들 헤어우드 경과 그의 자녀들과 산책하던 중 치명적인 심장마비를 겪고 사망했다. 향년 67세였다. 그녀는 요크 민스터에서 사적인 가족 장례식을 치른 후 올 세인츠 교회, 헤어우드에 있는 라셀스 가문의 납골당에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는 추모 예배가 열렸다. 그녀의 유언장은 사망 후 런던에서 봉인되었으며, 유산은 34.76 만 GBP (2023년 물가 기준으로 약 850.00 만 GBP)로 평가되었다.
메리 공주의 생애 동안 여섯 명의 영국 군주가 통치했다: 증조할머니 빅토리아 여왕, 할아버지 에드워드 7세, 아버지 조지 5세, 오빠들인 에드워드 8세와 조지 6세, 그리고 조카인 엘리자베스 2세였다. 그녀는 일반적으로 왕실의 논란 없는 인물로 기억된다. 메리 공주는 2019년 영화 다운튼 애비에서 케이트 필립스가 연기했다.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시기, 예루살렘 구시가지 옆의 주요 거리 중 하나가 '프린세스 메리 스트리트'로 불렸다. 이스라엘 건국 후, 이 거리의 이름은 유대인 여왕을 기념하기 위해 '슐롬치온 여왕 스트리트'로 변경되었다.
7. 가계 및 혈통
메리 프린세스 로열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1. 메리 프린세스 로열 | 2. 조지 5세 영국 국왕 | 4. 에드워드 7세 영국 국왕 | 8. 앨버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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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빅토리아 영국 여왕 | |||
5.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 10. 크리스티안 9세 덴마크 국왕 | ||
11. 헤센카셀의 루이세 공주 | |||
3. 테크의 빅토리아 메리 공주 | 6. 프랜시스 테크 공작 | 12. 뷔르템베르크 공작 알렉산더 | |
13. 클라우디네 레데이 폰 키스-레데 백작 부인 | |||
7. 케임브리지의 메리 아델레이드 공주 | 14.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왕자 | ||
15. 헤센카셀의 아우구스타 공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