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엘리자베스 앤젤라 마그리트 보우스-라이언(Elizabeth Angela Marguerite Bowes-Lyon영어, 1900년 8월 4일 ~ 2002년 3월 30일)은 조지 6세 국왕의 왕비이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어머니이다. 1936년 12월 11일부터 1952년 2월 6일까지 영국의 왕비였으며, 1936년부터 1947년 8월 15일 영국령 인도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는 마지막 인도 황후이기도 했다. 남편 사후에는 딸 엘리자베스 2세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엘리자베스 왕태후(Queen Elizabeth The Queen Mother영어)로 불렸다.
영국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는 1923년 조지 5세와 테크의 메리 왕비의 차남인 요크 공작 앨버트 왕자와 결혼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요크 공작 부부와 그들의 두 딸인 엘리자베스와 마거릿 공주는 전통적인 가족상과 공공 봉사의 가치를 구현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요크 공작부인은 다양한 공적 활동을 수행하며 항상 밝은 표정으로 '미소 짓는 공작부인'으로 알려졌다.
1936년, 남편의 형인 에드워드 8세가 미국인 이혼녀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하면서 앨버트 왕자가 예기치 않게 조지 6세로 즉위했고, 엘리자베스는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 프랑스와 북미 지역으로 남편과 함께 외교 순방을 떠났다. 전쟁 중 그녀의 불굴의 정신은 영국 국민에게 도덕적 지지를 제공했으며, 아돌프 히틀러는 그녀를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전쟁 후 남편의 건강이 악화되어 51세에 과부가 되었고, 25세의 큰딸이 새로운 군주가 되었다.
1953년 테크의 메리 왕비가 서거한 후, 엘리자베스는 영국 왕실의 여성 최고 연장자로 여겨졌다. 말년에도 그녀는 다른 왕족들이 대중의 낮은 지지율로 고통받는 시기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사랑받는 왕실 구성원이었다. 그녀는 101세의 나이로 서거하기 불과 몇 달 전까지 활발한 공적 활동을 이어갔으며, 이는 그녀의 막내딸 마거릿 공주가 서거한 지 7주 만의 일이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총명한 유년기를 보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글래미스 성을 부상병 요양원으로 운영하며 봉사 활동에 참여했다.
2.1. 출생 및 가족
엘리자베스 앤젤라 마그리트 보우스-라이언은 1900년 8월 4일, 클로드 보우스-라이언, 제14대 스트라스모어와 킹호른 백작과 그의 아내 세실리아 캐번디시-벤팅크의 열 자녀 중 아홉째이자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윌리엄 캐번디시-벤팅크, 제3대 포틀랜드 공작과 리처드 웰즐리, 제1대 웰즐리 후작의 후손이었는데, 리처드 웰즐리 후작은 아서 웰즐리, 제1대 웰링턴 공작의 형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의 출생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녀는 부모의 웨스트민스터 자택인 벨그레이브 맨션스(Belgrave Mansions), 그로스베너 가든스에서 태어났거나, 병원으로 가는 도중 마차 구급차 안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다른 가능성으로는 그녀의 외할머니 루이사 캐번디시-벤팅크의 집인 햄 (런던)의 포브스 하우스(Forbes House)도 거론된다. 그녀의 출생은 하트퍼드셔주 히친에 등록되었으며, 스트라스모어 가문의 영국 컨트리 하우스인 세인트 폴스 월든 베리 근처에 위치한 이곳은 1901년과 1911년 인구 조사에서도 그녀의 출생지로 기재되었다. 그녀는 1900년 9월 23일 지역 교구 교회인 올 세인츠(All Saints)에서 세례를 받았다.
일부에서는 엘리자베스의 생모가 가문의 요리사 마그리트 로디에르(Marguerite Rodiere)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이는 당시 귀족 가문에서 흔치 않던 대리모 출산 방식이었다는 설과 함께 왕실 전기 작가들에 의해 일축되었다. 또한 1997년 키티 켈리는 그녀의 어머니가 웨일스인 하녀였다고 주장했으나, 이 역시 부정적인 견해가 강하다.
2.2. 유년기 및 교육
엘리자베스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세인트 폴스 월든과 스코틀랜드에 있는 백작의 선조 대대로 내려오는 저택인 글래미스 성에서 보냈다. 그녀는 8세까지 가정교사에게 홈스쿨링을 받았으며, 야외 스포츠, 조랑말, 개를 좋아했다. 런던의 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녀는 크세노폰의 저서 『아나바시스』에 나오는 두 그리스어로 에세이를 시작하여 교사들을 놀라게 했다. 그녀가 가장 잘했던 과목은 문학과 성경이었다. 독일계 유대인 가정교사 캐테 퀴블러(Käthe Kübler) 밑에서 사교육을 받은 후, 13세에 옥스퍼드 지역 시험(Oxford Local Examination)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엘리자베스의 14번째 생일인 1914년 8월 4일,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녀의 네 오빠가 육군에서 복무했다. 큰오빠 퍼거스 보우스-라이언은 1915년 루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또 다른 오빠 마이클 보우스-라이언은 1917년 4월 28일 전투 중 실종되었다고 보고되었으나, 3주 후 부상당한 채 포로로 잡혔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글래미스 성은 부상병 요양원으로 바뀌었고, 엘리자베스는 이 운영을 도왔다. 특히 1916년 9월 16일 심각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성 내부의 물품들을 구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가 치료했던 병사 중 한 명은 그녀의 사인첩에 "다이아몬드에 매달리고,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에 태워지고, 이 땅 최고의 집에 머무를" 것이라고 썼다. 1916년 11월 5일, 그녀는 포르파르의 세인트 존 스코틀랜드 성공회 교회에서 견진성사를 받았다.
3. 요크 공작과의 결혼
엘리자베스는 요크 공작 앨버트 왕자의 끈질긴 구애 끝에 결혼을 승낙했으며, 이 결혼은 왕실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받았다.
3.1. 구애와 약혼

조지 5세 국왕의 차남인 요크 공작 앨버트 왕자(가족들은 "버티"라고 불렀다)는 1921년 엘리자베스에게 처음 청혼했으나, 그녀는 "다시는 내가 진정으로 해야 한다고 느끼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자유가 없을까 봐" 두렵다며 거절했다. 앨버트가 다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테크의 메리 왕비는 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엘리자베스를 직접 보기 위해 글래미스 성을 방문했다. 메리 왕비는 엘리자베스가 "버티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소녀"라고 확신했지만, 간섭하지는 않았다. 동시에 엘리자베스는 앨버트의 시종이자 훗날 제1대 스튜어트 오브 파인드혼 자작 제임스 스튜어트로부터도 구애를 받았는데, 그는 미국 석유 사업에서 더 좋은 보수를 받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왕자의 시종직을 그만두기 전까지 엘리자베스를 쫓아다녔다.
1922년 2월, 엘리자베스는 앨버트의 누이인 메리 공주와 제6대 헤어우드 백작 헨리 라셀스의 결혼식에서 신부 들러리를 섰다. 다음 달, 앨버트는 다시 청혼했지만, 그녀는 또다시 거절했다. 마침내 1923년 1월, 엘리자베스는 왕실 생활에 대한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앨버트와의 결혼에 동의했다. 앨버트가 왕족이 아닌 평민(귀족의 딸이었지만)인 엘리자베스를 선택한 것은 정치적 근대화를 지지하는 제스처로 여겨졌다. 이전에는 왕자들이 다른 왕실 가문의 공주들과 결혼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들은 카슈미르 사파이어와 양쪽에 두 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플래티넘 약혼반지를 선택했다.
3.2. 결혼
두 사람은 1923년 4월 26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예상치 못하게도, 엘리자베스는 사원에 들어서면서 무명 용사의 묘에 자신의 부케를 바쳤다. 이는 오빠 퍼거스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후 왕실 결혼식에서 신부들이 무명 용사의 묘에 부케를 바치는 전통이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이후 '요크 공작부인 전하'라는 칭호를 받았다. 버킹엄 궁전에서 가브리엘 추미(Gabriel Tschumi) 셰프가 준비한 결혼 피로연 후, 엘리자베스와 앨버트는 서리주의 저택 폴스던 레이시에서 신혼여행을 보냈다. 그 후 스코틀랜드로 갔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낭만적이지 않은" 백일해에 걸렸다.
4. 요크 공작부인
요크 공작부인으로서 엘리자베스는 활발한 공적 활동과 해외 순방을 수행했으며, 두 딸의 탄생으로 가정을 꾸렸다.
4.1. 공적 활동 및 해외 순방

1924년 7월 북아일랜드 방문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당시 노동당 정부는 앨버트와 엘리자베스가 1924년 12월부터 1925년 4월까지 동아프리카를 순방하는 것을 승인했다. 11월 총선에서 노동당 정부가 보수당에 패배하고(엘리자베스는 어머니에게 이를 "놀라운 일"이라고 표현했다), 3주 후 영국-이집트 수단 총독 리 스택 경이 암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순방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그들은 아덴 보호령, 케냐 식민지, 우간다 보호령, 수단을 방문했으나, 정치적 긴장으로 인해 이집트는 피했다.
앨버트는 말더듬이 증세가 있어 연설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1925년 10월 이후 엘리자베스는 라이오넬 로그가 고안한 치료법을 통해 그를 돕는 데 조력했다. 이 일화는 2010년 영화 『킹스 스피치』에 묘사되었다.

1927년 앨버트와 엘리자베스는 딸 없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하여 캔버라의 옛 국회의사당 개원식에 참석했다. 그녀는 "아기를 두고 떠나게 되어 매우 비참했다"고 회고했다. 자메이카, 파나마 운하, 태평양을 거쳐 해상으로 이동하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영국에 두고 온 아기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했지만, 그들의 여정은 대중 관계에서 성공적이었다. 피지에서는 긴 줄의 공식 손님들과 악수하던 중 길 잃은 개가 의식에 들어오자 그 개의 발도 흔들어 대중을 매료시켰다. 뉴질랜드에서는 감기에 걸려 일부 행사에 불참했지만, 호주 스포츠 낚시꾼 해리 안드레아스와 함께 베이 오브 아일랜즈에서 낚시를 즐겼다. 모리셔스, 수에즈 운하, 몰타, 지브롤터를 거쳐 귀국하던 중, 그들이 탑승한 HMS 리나운 호에 화재가 발생하여 불이 진압되기 전 배를 버릴 준비를 하기도 했다.
4.2. 자녀
부부의 첫째 딸인 엘리자베스 공주 (훗날 엘리자베스 2세)는 1926년에 태어났으며, 가족들은 그녀를 "릴리벳"이라고 불렀다. 둘째 딸인 마거릿 공주는 1930년 글래미스 성에서 태어났다. 부부는 처음에는 리치먼드 공원의 화이트 로지에 살다가 이후 피카딜리 145번지로 이사했다.
5. 왕비 (1936-1952)
엘리자베스는 남편 조지 6세의 즉위와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왕비로서 국민과 함께하며 강력한 정신적 지주 역할을 수행했다.
5.1. 조지 6세 즉위와 에드워드 8세의 퇴위

1936년 1월 20일, 조지 5세가 서거하고 그의 장남인 웨일스 공 에드워드가 에드워드 8세로 즉위했다. 엘리자베스의 남편 앨버트는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에드워드 8세의 통치 몇 달 만에, 그가 미국인 이혼녀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려는 결정은 에드워드 8세의 퇴위 위기를 야기했고, 결국 그의 퇴위로 이어졌다. 앨버트는 마지못해 1936년 12월 11일 조지 6세라는 칭호로 영국 국왕이자 인도 황제로 즉위했다. 엘리자베스는 왕비이자 황후가 되었다.
5.2. 대관식
그들의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의 대관식은 1937년 5월 1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는데, 이 날짜는 원래 에드워드 8세의 대관식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왕관은 백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있었다.
에드워드는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여 윈저 공작과 공작부인이 되었으나, 에드워드가 왕실 전하 칭호를 유지한 반면, 조지 6세는 월리스에게는 이 칭호를 부여하지 않았고, 엘리자베스는 이 결정을 지지했다. 엘리자베스는 나중에 월리스를 "그 여자"라고 불렀다고 전해지며, 월리스는 엘리자베스를 "쿠키"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녀가 뚱뚱한 스코틀랜드 요리사와 닮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월리스에게 계속해서 원한을 품었다는 주장은 그녀의 친한 친구들에 의해 부인되었다. 휴 피츠로이, 제11대 그래프턴 공작은 그녀가 "윈저 공작부인에 대해 나쁜 말을 한 적이 없다. 단지 그녀가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고 말했을 뿐이다"라고 썼다.
5.3. 제2차 세계 대전 중 역할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국왕 부부는 파시즘에 맞서는 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전쟁 선포 직후, 『왕비의 적십자 책』이 기획되었다. 50명의 작가와 예술가가 이 책에 기고했으며, 세실 비튼이 촬영한 엘리자베스의 초상화가 표지를 장식했고, 판매 수익금은 적십자를 위해 사용되었다. 그녀는 또한 어린이 대피와 전투 연령 남성들의 동원 기간 동안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전국에 방송했다. 엘리자베스는 블리츠 기간 동안 영국 내각이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런던을 떠나거나 아이들을 캐나다로 보내는 것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그녀는 "아이들은 저 없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국왕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국왕은 결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
엘리자베스는 군대, 병원, 공장, 그리고 독일 루프트바페의 표적이 된 영국 지역, 특히 런던 독랜즈 근처의 이스트 엔드를 방문했다. 그녀의 방문은 처음에는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쓰레기가 그녀에게 던져지고 군중은 야유를 보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그녀가 전쟁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 괴리감을 느끼게 하는 값비싼 옷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대중이 자신을 보러 올 때 가장 좋은 옷을 입을 것이므로 자신도 그에 상응하게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노먼 하트넬은 그녀에게 "희망의 무지개"를 상징하기 위해 부드러운 색상을 입히고 검은색을 피했다. 버킹엄 궁전 자체가 폭격의 절정기에 여러 차례 피폭되었을 때, 엘리자베스는 "폭격당해서 기쁩니다. 이로써 이스트 엔드를 당당히 마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국왕 부부는 낮에는 버킹엄 궁전에서 업무를 보냈지만, 부분적으로는 보안 및 가족 문제로 인해 밤에는 런던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약 32 km 떨어진 윈저 성에서 딸들과 함께 머물렀다. 궁전은 많은 직원을 군대에 잃었고, 대부분의 방은 폐쇄되었다. 창문은 폭탄 폭발로 깨져서 판자로 막아야 했다. "가짜 전쟁" 동안 왕비는 임박한 침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리볼버 훈련을 받기도 했다.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엘리자베스를 "자신이 왕비로 남기 위해 세상의 다른 모든 나라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지나치게 야심적인 젊은 여성"이라고 평가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녀의 인기가 독일의 이익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녀를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전쟁 전 그녀와 남편은 대부분의 의회와 영국 대중처럼, 제1차 세계 대전의 경험 후 전쟁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해야 한다고 믿으며 유화 정책과 네빌 체임벌린 총리를 지지했다. 체임벌린이 사임한 후, 국왕은 윈스턴 처칠에게 정부를 구성하도록 요청했다. 국왕은 처음에는 처칠의 성격과 동기에 대해 의심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국왕 부부는 그를 존경하고 칭찬하게 되었다.
5.4. 해외 순방

1938년 여름, 국왕 부부의 프랑스 국빈 방문은 엘리자베스 어머니의 사망으로 인해 3주 연기되었다. 2주 만에 노먼 하트넬은 애도 기간 중 색깔 있는 옷을 입을 수 없었던 엘리자베스를 위해 순백의 예복을 만들었다. 이 방문은 나치 독일의 침략에 맞서 영불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프랑스 언론은 연기되었지만 성공적이었던 방문 기간 동안 왕실 부부의 태도와 매력을 칭찬했으며, 하트넬의 의상도 한몫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의 침략은 계속되었고, 정부는 전쟁에 대비했다. 1938년 뮌헨 협정이 무력 충돌을 막는 것처럼 보인 후,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 국왕 부부와 함께 나와 환영 인파의 환호를 받았다. 대중에게는 널리 인기가 있었지만, 히틀러에 대한 체임벌린의 정책은 영국 하원에서 일부 반대에 부딪혔고, 이로 인해 역사가 존 그리그는 조지 6세가 정치인과 그렇게 두드러지게 자신을 연관시킨 행동을 "현 세기 영국 군주의 가장 비헌법적인 행위"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국왕이 항상 장관의 조언을 따랐으며 헌법적으로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1939년 5월과 6월, 엘리자베스와 남편은 캐나다 전역을 순방했으며, 이는 재임 중인 군주가 캐나다를 순방한 첫 사례였다. 그들은 또한 미국을 방문하여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백악관 및 그의 허드슨 밸리 저택에서 시간을 보냈다. 엘레노어 루스벨트 영부인은 엘리자베스가 "왕비로서 완벽하고, 우아하며, 지적이고, 올바른 말을 하며 친절하지만, 다소 자의식적으로 위엄 있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이 순방은 전쟁 시 대서양 횡단 지원을 강화하고, 캐나다가 영국과 동일한 군주를 공유하는 독립 왕국으로서의 지위를 확인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왕실 부부가 군중과 처음 만난 자리 중 한 곳에서 보어 전쟁 참전 용사가 엘리자베스에게 "스코틀랜드인이십니까, 아니면 잉글랜드인이십니까?"라고 묻자, 그녀는 "저는 캐나다인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캐나다와 미국 대중의 열광적인 환영은 에드워드 8세의 부족한 대체자라는 잔여 감정을 대부분 해소시켰다. 엘리자베스는 캐나다 총리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에게 "그 순방이 우리를 만들었다"고 말했으며, 공식 순방과 개인적인 방문 모두로 캐나다를 자주 다시 찾았다.
5.5. 전후 활동 및 조지 6세의 건강 악화

1945년 영국 총선에서 처칠의 보수당은 클레멘트 애틀리의 노동당에게 완패했다. 엘리자베스의 정치적 견해는 거의 공개되지 않았지만, 1947년에 그녀가 쓴 편지에는 애틀리의 "사회주의 지상 천국에 대한 높은 희망"이 사라지고 있으며, 그에게 투표한 사람들을 "가난한 사람들, 너무나도 반쯤 교육받고 혼란스러운 사람들. 저는 그들을 정말 사랑합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우드로 와이어트는 그녀가 다른 왕실 구성원들보다 "훨씬 더 보수당 지지자"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나중에 그에게 "저는 친애하는 옛 노동당을 좋아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또한 포춘 피츠로이, 그래프턴 공작부인에게 "저는 공산주의자들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947년 남아프리카 연방 왕실 순방 중, 엘리자베스의 침착한 대중 행동은 예외적으로 깨졌는데, 그녀가 자신의 열정을 적대감으로 착각하여 왕실 차량에서 일어나 우산으로 한 숭배자를 때렸을 때였다. 1948년 호주와 뉴질랜드 왕실 순방은 국왕의 건강 악화로 인해 연기되었다. 1949년 3월, 그는 오른쪽 다리의 혈액 순환을 개선하기 위한 성공적인 수술을 받았다. 1951년 여름,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딸들은 국왕을 대신하여 공적 업무를 수행했다. 9월, 그는 폐암 진단을 받았다. 폐 절제술 후 회복하는 듯 보였으나, 연기되었던 호주와 뉴질랜드 방문은 1952년 1월 엘리자베스 공주와 그녀의 남편 에든버러 공작 필립이 국왕 부부를 대신하여 가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조지 6세는 1952년 2월 6일 잠결에 서거했으며, 엘리자베스 공주와 에든버러 공작이 캐나다에서 영연방 순방 중이었을 때였고, 조지 6세의 서거와 함께 그의 딸은 즉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되었다.
6. 왕태후 (1952-2002)
조지 6세 서거 후 엘리자베스는 왕태후로서 광범위한 공적 활동을 지속했으며, 장수와 함께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6.1. 과부가 된 후

조지 6세 서거 직후, 엘리자베스는 '엘리자베스 왕비'라는 일반적인 왕의 미망인 칭호가 큰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칭호와 너무 유사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왕태후 폐하'로 불리기 시작했다. 대중적으로는 '왕태후' 또는 '퀸 맘'으로 불렸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스코틀랜드로 은퇴했다. 그러나 윈스턴 처칠 총리와의 만남 후, 그녀는 은퇴를 깨고 공적 업무를 재개했다. 결국 그녀는 왕비 시절만큼이나 바쁜 왕태후가 되었다. 1953년 7월, 그녀는 마거릿 공주와 함께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을 방문하며 장례식 이후 첫 해외 방문을 수행했다. 그녀는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대학(현 짐바브웨 대학교)의 주춧돌을 놓았다. 1957년 이 지역을 다시 방문했을 때, 엘리자베스는 대학 총장으로 취임했으며, 의도적으로 다인종으로 기획된 다른 행사에도 참석했다. 1953년에서 1954년에 걸친 딸의 광범위한 영연방 순방 기간 동안, 엘리자베스는 국가고문 역할을 수행하며 손주인 찰스 3세와 앤 공주를 돌보았다. 1959년 2월에는 케냐와 우간다를 방문했다.

엘리자베스는 스코틀랜드 북부 해안에 있는 외딴 메이 성의 복원을 감독했는데, 그녀는 매년 8월에 3주, 10월에 10일 동안 "모든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곳을 이용했다. 그녀는 1949년 아마추어 기수 로드 밀드메이에게 영감을 받아 경마, 특히 장애물 경주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그녀는 약 500번의 경주에서 우승한 말들을 소유했다. 소문과는 달리 그녀는 도박을 하지 않았지만, 경마 중계가 런던 저택인 클라렌스 하우스로 직접 연결되어 경주를 지켜볼 수 있었다. 미술품 수집가로서 그녀는 클로드 모네, 오거스터스 존, 파베르제 등의 작품을 구입했다.
1964년 2월, 엘리자베스는 응급 맹장 수술을 받아 1966년으로 예정되었던 호주, 뉴질랜드, 피지 순방이 연기되었다. 그녀는 왕실 요트 브리타니아 호를 타고 카리브해 크루즈를 하며 회복했다. 1966년 12월, 그녀는 결장암 진단을 받은 후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다. 이후 퍼진 소문과는 달리, 그녀는 인공 항문 수술을 받지 않았다. 1984년에는 유방암 진단을 받고 유방에서 덩어리를 제거했다. 그녀의 암 투병 사실은 생전에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과부 시절에도 엘리자베스는 40회 이상의 공식 해외 방문을 포함하여 광범위하게 여행을 계속했다. 1975년에는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샤의 초청으로 이란을 방문했다. 당시 영국 대사와 그의 아내 앤서니와 실라 파슨스는 이란인들이 그녀가 지위나 중요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말을 거는 습관에 당황했지만, 샤의 수행원들이 그녀의 방문을 통해 일반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법을 배우기를 바랐다고 언급했다. 1976년부터 1984년까지 그녀는 매년 여름 프랑스를 방문했으며, 이는 1963년부터 1992년 사이에 유럽 대륙으로 떠난 22번의 개인 여행 중 일부였다.
1982년, 엘리자베스는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려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어 제거 수술을 받았다. 열렬한 낚시꾼이었던 그녀는 수술 후 침착하게 "연어들이 복수했네요"라고 농담했다. 비슷한 사건은 1986년 8월 밸모럴 성에서도 발생했는데, 그녀는 애버딘 왕립 병원에 하룻밤 입원했지만 수술은 필요 없었다. 1993년 5월에도 그녀는 전신 마취 하에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1987년,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두 조카인 네리사 보우스-라이언과 캐서린 보우스-라이언이 심각한 학습 장애로 인해 1941년 레드힐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버크스 피어리지』에는 이 자매들이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었는데, 이는 그들의 어머니 페넬라(엘리자베스의 시누이)가 "양식을 작성할 때 '매우 모호하게' 작성하여 가족 기록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했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네리사가 1986년에 사망했을 때, 그녀의 묘비는 원래 플라스틱 태그와 일련번호로만 표시되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시설 수용 소식을 듣고 놀랐다고 말했다.
6.2. 건강 문제 및 장수

엘리자베스 왕태후는 2002년 3월 30일 서거하기 불과 몇 주 전까지도 활발한 공적 활동을 이어갔다. 말년에는 엘리자베스는 장수로 유명해졌다. 1990년 8월 4일 그녀의 90세 생일은 6월 27일 그녀가 후원하는 300여 개 단체 중 다수가 참여한 퍼레이드로 기념되었다. 1995년에는 50년 전 전쟁 종식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했으며, 왼쪽 눈의 백내장 제거 수술과 오른쪽 고관절 교체 수술을 두 차례 받았다. 1998년에는 샌드링엄 하우스 마구간 방문 중 미끄러져 넘어져 왼쪽 고관절이 골절되어 교체 수술을 받았다.
엘리자베스의 100번째 생일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축하되었다. 노먼 위즈덤 경과 존 밀스 경이 참여하여 그녀의 삶의 하이라이트를 기념하는 퍼레이드가 열렸고, 스코틀랜드 왕립 은행은 그녀의 초상화가 새겨진 기념 20 GBP 지폐를 발행했다. 그녀는 런던 길드홀에서 열린 오찬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캔터베리 대주교 조지 캐리가 실수로 그녀의 와인잔을 마시려 하자, 그녀가 재빨리 "그건 제 거예요!"라고 꾸짖어 큰 웃음을 자아냈다. 2000년 11월, 그녀는 넘어져 쇄골이 부러져 크리스마스와 새해 연휴 동안 집에서 요양해야 했다.
2001년 8월 1일, 엘리자베스는 가벼운 열사병으로 인한 빈혈로 수혈을 받았지만, 사흘 뒤 101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클라렌스 하우스 밖에 전통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만큼 건강했다. 그녀의 마지막 공식 행사로는 2001년 11월 8일 추모의 들판에 십자가를 심는 행사, 11월 15일 왕립 보조 공군 제600 비행대대 재편성 기념 런던 길드홀 리셉션, 그리고 11월 22일 HMS 아크 로열 호의 재취역식 참석 등이 있었다.
2001년 12월, 101세의 나이로 엘리자베스는 넘어져 골반이 골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음 해 2월 6일 남편의 추모 예배에서 국가가 연주될 때 기어코 일어서서 경의를 표했다. 불과 사흘 뒤, 그녀의 둘째 딸 마거릿 공주가 서거했다. 2002년 2월 13일, 엘리자베스는 샌드링엄 하우스의 거실에서 넘어져 팔을 다쳤다. 구급차와 의사가 불려왔고, 상처는 치료되었다. 그녀는 이틀 뒤인 그 주 금요일 윈저 성의 성 조지 예배당에서 열린 마거릿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로 결심했는데, 여왕과 다른 왕실 가족들은 왕태후가 노퍽에서 윈저까지 이동하는 것에 대해 걱정했다. 그녀는 거의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헬리콥터를 타고 윈저로 향했으며, 휠체어에 앉은 모습이 사진에 찍히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언론으로부터 가려지기를 주장하며 검은 창문이 달린 피플 캐리어를 타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 차량은 이전에 마거릿이 사용했던 것이었다.
2002년 3월 5일, 엘리자베스는 이튼 비글스(Eton Beagles) 연례 잔디밭 파티 오찬에 참석하고 텔레비전으로 첼트넘 경마를 시청했다. 그러나 그녀의 건강은 마지막 몇 주 동안 급격히 악화되었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로열 로지로 물러났다.
7. 서거 및 장례
엘리자베스 왕태후는 101세의 나이로 서거했으며, 성대한 국장으로 애도 속에 영원한 안식처에 안장되었다.
7.1. 서거

2002년 3월 30일 15시 15분(GMT), 엘리자베스는 윈저의 로열 로지에서 101세의 나이로 잠결에 서거했다. 그녀의 생존한 딸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왕태후는 2001년 크리스마스 이후부터 감기를 앓고 있었다. 101세 238일의 나이로 그녀는 당시 영국 왕실 구성원 중 100세를 넘겨 살았던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녀는 서거 당시 영국 왕실에서 가장 오래 산 구성원이었다. 그녀의 생존한 시누이인 글로스터 공작부인 앨리스는 2004년 10월 29일 102세의 나이로 서거하며 이 기록을 경신했다. 그녀는 모든 왕실 구성원 중 가장 오래 산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모든 정원에 동백나무를 심었으며, 그녀의 깃발로 덮인 관이 윈저에서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웨스트민스터 홀로 옮겨지기 전, 그녀의 정원에서 따온 동백꽃이 관 위에 놓였다. 3일 동안 약 20만 명의 사람들이 영국 의회의 웨스트민스터 홀에 안치된 그녀의 관 앞을 지나갔다. 왕실 기병대와 다른 군대의 병사들이 캐터펄크의 네 모퉁이를 지켰다. 한때 그녀의 네 손자, 즉 찰스 3세, 앤드루 왕자, 에든버러 공작 에드워드, 데이비드 암스트롱-존스, 제2대 스노든 백작이 왕자들의 철야 기도와 유사하게 경의를 표하며 경비를 섰다.
7.2. 장례
엘리자베스의 장례식이 열린 4월 9일, 캐나다 총독 에이드리언 클락슨은 캐나다인들에게 그날 엘리자베스의 기억을 기릴 것을 요청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호주에서는 호주 총독 피터 홀링워스가 시드니의 성 앤드류 대성당에서 열린 추모 예배에서 성경을 낭독했다.
런던에서는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웨스트민스터 사원 밖과 런던 중심부에서 윈저 성의 성 조지 예배당에 있는 남편과 어린 딸 옆 최종 안식처까지 약 37 km에 이르는 길을 가득 메웠다. 그녀의 요청에 따라, 장례식 후 그녀의 관 위에 놓였던 화환은 무명 용사의 묘에 놓였는데, 이는 79년 전 그녀의 결혼식 날 헌사를 되새기는 제스처였다.
8. 유산 및 평가
엘리자베스 왕태후는 대중적 인기와 매력으로 왕실의 안정에 기여했으며, 비판과 논란에도 불구하고 문화 전반에 걸쳐 큰 영향력을 남겼다.
8.1. 대중적 인기 및 이미지

개인적이고 대중적인 매력으로 유명했던 엘리자베스는 영국 왕실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구성원 중 한 명이었으며, 영국 군주제 전체의 인기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엘리자베스의 비평가 중에는 키티 켈리가 있었는데, 그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엘리자베스가 영국의 배급 제도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고 거짓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공식 기록에 의해 반박되었으며, 엘레노어 루스벨트는 전쟁 중 버킹엄 궁전에서 머물렀을 때 궁전에서 배급된 음식이 제공되었고 허용되는 목욕물도 제한적이었다고 명시적으로 보고했다. 엘리자베스가 흑인을 비하하는 인종차별적 용어를 사용했다는 주장은 메이저 콜린 버제스(Major Colin Burgess)에 의해 강력히 부인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인종에 대해 공개적인 언급을 한 적이 없지만, 로버트 로즈 제임스에 따르면, 사적으로 그녀는 "인종 차별을 혐오했으며" 아파르트헤이트를 "끔찍하다"고 비난했다. 우드로 와이어트는 자신의 일기에 그가 비백인 국가들이 "우리"와 공통점이 없다는 견해를 표명했을 때, 그녀가 "저는 영연방에 매우 열심입니다. 그들은 모두 우리와 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그녀는 독일인들을 불신했으며, 와이어트에게 "그들을 절대 믿지 마세요, 절대 믿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비록 그녀가 그러한 견해를 가졌을지라도, 이는 독일과의 두 차례 잔혹한 전쟁을 경험한 그녀 세대의 영국인들에게는 일반적인 것이었다고 주장된다.
휴 캐슨 경은 엘리자베스를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와 같다"고 묘사했다. "그녀는 상냥하고 예쁘고 매력적이지만, 강인함과 끈기의 기본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힐 때, 햇빛에 반짝이는 거품과 물방울의 화려한 놀이를 보여주지만, 그 아래에는 단단하고 강인한 바위가 있다. 그녀의 경우, 강한 원칙, 육체적 용기, 그리고 의무감에서 융합된 것이다." 피터 유스티노프 경은 1968년 던디 대학교에서 학생 시위 중 그녀를 묘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엄숙한 행렬로 도착했을 때 학생들이 우리에게 화장지를 던졌다. 그들은 한쪽 끝을 잡고 공의 리본처럼 다른 쪽 끝을 던졌다. 왕태후는 멈춰 서서 마치 누군가 잘못 놓은 것처럼 그것들을 주웠다. [학생들에게 돌려주며 그녀는 말했다,] '이게 당신 것인가요? 아, 가져가 주시겠어요?' 그리고 그녀의 침착함과 이에 전혀 충격받지 않는 절대적인 태도가 즉시 모든 학생들을 침묵시켰다. 그녀는 그런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안다. 그녀는 전혀 야유에 반응하지 않았다. 단지 그것이 시위하는 사람들의 실수였던 것처럼 가장했을 뿐이다. 그녀의 반응 방식은 그녀의 침착함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가장 열광적인 요소에게도 너무나 매력적이고 무장해제시키는 것이어서, 그녀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평화를 가져왔다."
엘리자베스는 건조한 재치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에드위나 마운트배튼이 바다에 수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사랑스러운 에드위나, 그녀는 항상 파장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했지"라고 말했다. 1970년대 보수당 장관으로부터 동성애자를 고용하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을 때, 엘리자베스는 그들이 없으면 "우리는 셀프서비스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들이 휴일에 오지 않더라도 20 병 분량의 샴페인 '네부카드네자르'를 선물로 받은 것에 대해 그녀는 "혼자서 다 마셔버릴 거예요"라고 말했다. 『가디언』지의 에민 사네르는 엘리자베스가 정오에 진과 뒤보네, 점심 식사 때 레드 와인, 오후 6시에 포트 와인과 마티니, 저녁 식사 때 두 잔의 샴페인을 마셨다고 추정하며,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그녀가 일주일에 마신 알코올 양은 70 alcohol units에 달한다"고 밝혔다. 그녀의 생활 방식은 언론인들을 즐겁게 했는데, 특히 그녀가 쿠츠 은행에 수백만 파운드의 마이너스 통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더욱 그러했다.
엘리자베스의 습관은 1980년대 풍자적인 영국 텔레비전 프로그램 『스피팅 이미지』에 의해 패러디되었다. 이는 텔레비전에서 처음으로 풍자적으로 묘사된 것이었다. 제작자들은 처음에는 그녀를 등장시키는 것을 주저했는데, 이는 대부분의 시청자들에게 금기시될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항상 술에 취한 베릴 리드와 비슷한 목소리로 묘사되었다. 그녀는 『버티와 엘리자베스』에서 줄리엣 오브리가, 『더 퀸』에서 실비아 심스가, 『W.E.』에서 내털리 도머가, 『하이드 파크 온 허드슨』에서 올리비아 콜먼이, 『더 크라운』에서 빅토리아 해밀턴 (시즌 1, 2), 매리언 베일리 (시즌 3, 4), 마샤 워렌 (시즌 5, 6)이 연기했으며, 『킹스 스피치』에서는 헬레나 보넘 카터가 연기하여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고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8.2. 영향력 및 문화적 묘사

큐나드 라인의 RMS 퀸 엘리자베스 호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녀는 1938년 9월 27일 스코틀랜드 클라이드뱅크에서 이 배를 진수했다. 소문에 따르면, 엘리자베스가 공식적으로 진수식을 시작하기도 전에 배가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녀는 재빨리 행동하여 배가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기 직전에 호주산 레드 와인 병을 선미에 부딪혀 깨뜨리는 데 성공했다. 1954년,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이름을 딴 배를 타고 뉴욕으로 항해했다.
조각가 필립 잭슨이 제작한 엘리자베스 동상은 2009년 2월 24일 런던 더 몰의 조지 6세 기념관 앞에 공개되어 조지 6세 국왕과 엘리자베스 왕비 기념비를 완성했다.
2011년 3월, 엘리자베스의 폭넓은 음악적 취향이 공개되었는데, 이는 메이 성에 보관된 그녀의 작은 음반 컬렉션의 세부 사항이 공개되면서였다. 그녀의 음반에는 스카 음악, 지역 민속 음악, 스코틀랜드 릴, 뮤지컬 『오클라호마!』와 『왕과 나』, 그리고 요들러 몬태나 슬림, 토니 핸콕, 더 군스, 노엘 코워드와 같은 예술가들의 음반이 포함되어 있었다.
서거 8년 전,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재산(약 1900.00 만 GBP로 추정) 중 3분의 2를 증손자들을 위해 신탁에 맡겼다고 전해진다. 생전에 그녀는 민간 목록에서 연간 64.30 만 GBP를 받았으며, 엘리자베스 왕태후의 가계를 운영하는 데 연간 100.00 만 GBP에서 200.00 만 GBP를 지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1990년대 말에는 그녀의 마이너스 통장이 약 400.00 만 GBP에 달했다고 한다. 그녀는 그림, 파베르제 달걀, 보석, 말 등을 포함하여 5000.00 만 GBP에서 7000.00 만 GBP로 추정되는 대부분의 재산을 생존한 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남겼다. 1993년에 합의된 바에 따르면, 군주에게서 군주로 넘어가는 재산은 영국 상속세가 면제되며, 이전 군주의 배우자에게서 현 군주로 넘어가는 재산도 마찬가지여서, 2800.00 만 GBP (재산 가치의 40%)로 추정되는 세금 부담이 발생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미술품들은 엘리자베스 2세에 의해 왕실 컬렉션으로 이전되었다. 그녀의 서거 후, 여왕은 어머니의 유언장 세부 사항을 비밀로 유지하기 위해 고등법원에 성공적으로 신청했다. 이는 노동당 정치인들과 대중의 일부로부터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여왕은 결국 어머니의 유언장 개요를 공개했다.
9. 작위, 칭호 및 문장
엘리자베스는 출생부터 결혼, 그리고 왕태후로서의 삶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위와 칭호를 받았으며, 그녀의 문장은 왕실과 가문의 상징을 결합한 형태였다.
9.1. 작위 및 칭호

엘리자베스는 백작의 딸로 태어나 요크 공작과의 결혼을 통해, 그리고 훗날 국왕 겸 황제가 됨에 따라 수많은 작위를 가졌다. 그녀는 마지막 인도 황후였으며, 과부 시절에는 영국 왕태후였다.
- 1900년 8월 4일 - 1904년 2월 16일: 존경하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The Honourable Elizabeth Bowes-Lyon)
- 1904년 2월 16일 - 1923년 4월 26일: 레이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Lady Elizabeth Bowes-Lyon)
- 1923년 4월 26일 - 1936년 12월 11일: 왕실 전하 요크 공작부인 (Her Royal Highness The Duchess of York)
- 1936년 12월 11일 - 1952년 2월 6일: 폐하 왕비 (Her Majesty The Queen)
- 1936년 - 1947년 (영국령 인도): 황실 폐하 황후 (Her Imperial Majesty The Queen-Empress)
- 1952년 2월 6일 - 2002년 3월 30일: 폐하 엘리자베스 왕태후 (Her Majesty Queen Elizabeth The Queen Mother)
9.2. 문장
엘리자베스의 문장은 영국 왕실 문장 (잉글랜드 또는 스코틀랜드 버전)과 그녀의 아버지인 스트라스모어 백작의 문장이 합쳐진 문장이었다. 후자는 다음과 같다: 1사분면과 4사분면은 아르장 바탕에 아주르 색의 램펀트 사자가 그려져 있고, 두 번째는 굴레스 색의 혀와 발톱을 가졌으며, 두 번째 색상의 이중 테서가 플로리-카운터-플로리 형태로 둘러싸여 있다 (리옹 가문). 2사분면과 3사분면은 에르민 바탕에 세 개의 활이 페일 방식으로 적절하게 그려져 있다 (보우스 가문). 방패 위에는 제국 왕관이 얹혀 있으며, 왕관을 쓴 잉글랜드 사자와 오르와 굴레스 색의 페스 방식으로 램펀트 사자가 지지하고 있다.
요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의 문장 (1923-1936) | 엘리자베스 왕비의 문장 | 엘리자베스 왕비의 문장 (스코틀랜드) | 엘리자베스 왕비의 왕실 문장 |
10. 자녀 및 후손
엘리자베스 왕태후는 두 딸, 엘리자베스 2세와 마거릿 공주를 두었으며, 이들의 삶과 후손들은 영국 왕실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10.1. 자녀
{| class="wikitable"
|-
! rowspan="2" | 이름 !! rowspan="2" | 출생 !! rowspan="2" | 사망 !! colspan="2" | 결혼 !! rowspan="2" | 자녀 !! rowspan="2" | 손주
|-
! 날짜 || 배우자
|-
| rowspan="4" | 엘리자베스 2세 || rowspan="4" | 1926년 4월 21일 || rowspan="4" | 2022년 9월 8일 || rowspan="4" | 1947년 11월 20일 || rowspan="4" | 에든버러 공작 필립 || 찰스 3세 || 웨일스 공 윌리엄
서식스 공작 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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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 공주 || 피터 필립스
자라 틴달
|-
|| 요크 공작 앤드루 || 베아트리스 공주
유제니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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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든버러 공작 에드워드 || 레이디 루이즈 마운트배튼-윈저
제임스 마운트배튼-윈저, 웨식스 백작
|-
| rowspan="2" | 마거릿 공주 || rowspan="2" | 1930년 8월 21일 || rowspan="2" | 2002년 2월 9일 || rowspan="2" | 1960년 5월 6일
(1978년 7월 11일 이혼) || rowspan="2" | 제1대 스노든 백작 앤서니 암스트롱-존스 || 제2대 스노든 백작 데이비드 암스트롱-존스 || 찰스 암스트롱-존스, 린리 자작
레이디 마거릿 암스트롱-존스
|-
|| 레이디 사라 채토 || 새뮤얼 채토
아서 채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