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스 크나퍼츠부슈(Hans Knappertsbusch독일어, 1888년 3월 12일 ~ 1965년 10월 25일)는 독일의 저명한 지휘자로,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 안톤 브루크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해석에 있어 20세기 가장 중요한 지휘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거친 휴머니스트'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강직하고 솔직한 성격과 동시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깊은 존경과 관대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엘버펠트(현재의 부퍼탈)의 증류주 제조업자 가문에서 태어나 철학을 공부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지휘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1922년 독일 최연소 총음악감독으로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에 부임하며 명성을 쌓았습니다. 나치 독일 정권 시기에는 당 가입을 거부하고 정권을 비판하여 뮌헨에서 해임되기도 했으나, 예술적 역량과 독일 문화에 대한 헌신으로 오스트리아와 해외에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 지휘로 전설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사후에도 그의 음반들은 많은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으며 지휘의 모범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문서는 그의 생애와 예술적 특징, 그리고 당대 정치 상황 속에서의 고뇌를 중도좌파적 관점에서 상세히 다룹니다.
2. 생애 및 경력
한스 크나퍼츠부슈는 독일 음악계의 전통적인 경로를 따라 초기 경력을 시작하여 점차 주요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개인적인 배경과 전문적인 경력 발전이 시간 순서에 따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2.1. 어린 시절 및 교육


한스 알프레트 크나퍼츠부슈는 1888년 3월 12일, 현재의 부퍼탈에 속하는 엘버펠트에서 증류주 제조업자인 구스타프 크나퍼츠부슈와 율리아 비겐트 부부의 두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조상은 158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대지주 게르하르트 아우프 뎀 크나펜으로부터 시작하며, 1834년 이후 푸크슈트라세 97번에서 99번지에 콘 등의 증류 공장인 '크나퍼츠부슈 증류소'를 운영해왔습니다. 이 증류소는 2000년 5월 18일에 부퍼탈 기념 건축물로 지정되었습니다. 크나퍼츠부슈는 1888년 4월 22일 칼뱅파 개혁교회에서 유아 세례를 받았고, 1903년 3월 10일 견진성사를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형 발터 구스타프(1886-1965)와 여동생 마르가레테 에밀리 율리(1891-1945)가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린과 코넷을 연주했으며, 12세에는 김나지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도시에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아들이 음악 경력을 쌓는 것을 반대했고, 그를 아비투어에 응시시켜 1908년 본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게 했습니다. 이후 그는 뮌헨에서도 철학을 공부했으며, 졸업 논문은 '파르지팔에 나오는 쿤드리'였다고 전해집니다. 부모의 뜻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학과 병행하여 쾰른 음악원에서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쾰른 음악원에서 그는 원장 프리츠 슈타인바흐에게 지휘를, 쾰른 오페라 극장의 수석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오토 로제에게 작곡을, 클라라 슈만과 요아힘 라프의 제자인 라차로 우치엘리에게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2.2. 초기 경력 및 성장
크나퍼츠부슈는 1909년부터 카펠마이스터(악장)로서 뮐하임안데어루르, 보훔, 엘버펠트, 라이프치히를 거점으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1912년까지 그는 당시 바이로이트 축제의 예술 감독이었던 지크프리트 바그너와 이 축제에서 활약한 바그너 지휘자 한스 리히터의 조수로 활동했습니다. 이 시기는 그의 음악 해석 방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국제적인 바그너 지휘자로서 그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13년 9월 15일, 그는 엘버펠트 극장에서 루이-에메 마이야르의 오페라 코믹 '빌라르의 용기병'을 지휘하며 정식 오페라 극장 데뷔를 했습니다. 이후 1914년에는 네덜란드 바그너 음악제를 지휘하며 처음으로 이목을 끌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비전투원 음악가로 복무한 후, 1919년 데사우의 프리드리히 극장(현: 안할트 극장)에서 프란츠 미코라이의 후임으로 독일 최연소 총음악감독이 되었습니다.
1918년 5월, 그는 엘버펠트 출신인 엘런 셀마 노이하우스와 결혼하여 딸 아니타(1919-1938)를 낳았지만, 이 결혼은 1925년에 끝났습니다. 이듬해인 1926년, 그는 프로이센 육군 대령 에리히 폰 라이프치히의 딸이자 독일 농장 영주이자 인지학자인 한스-하소 폰 펠트하임의 이복 여동생인 마리온 폰 라이프치히와 재혼했으며, 이 결혼은 평생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2.3. 뮌헨 국립 오페라 총음악감독 시절
1922년 브루노 발터가 뮌헨을 떠나 뉴욕으로 가자, 크나퍼츠부슈는 그의 뒤를 이어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과 오데온의 아카데미 콘서트의 총음악감독으로 취임하여 1935년까지 11년간 재직했습니다. 그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토머스 비첨 경과 같은 저명한 객원 지휘자들을 초청했으며, 자신의 지휘에 대해서도 높은 찬사를 받았습니다. 1931년 '파르지팔' 공연 후, 한 평론가는 "이 오페라를 충분히 느리게 연주할 용기를 가진 지휘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크나퍼츠부슈 교수는 철저히 균형 잡힌 해석을 선사했습니다. ...생명력과 철학, 매력으로 가득했습니다"라고 평했습니다. 같은 평론가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바이로이트에서의 크나퍼츠부슈의 경험이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같은 경쟁 지휘자들보다 우위에 서게 했다고 언급했습니다.
크나퍼츠부슈는 음악적으로는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지만, 뮌헨 재직 기간 동안 발터 브라운펠스의 '녹색 바지의 돈 길', 에르만노 볼프-페라리의 '천상의 의상', 앨버트 코츠의 '새뮤얼 페피스', 야로미르 바인베르거의 '사랑하는 목소리', 비토리오 잔니니의 '루세디아', 그리고 한스 피츠너의 '마음' 등 7개의 오페라 초연(피츠너 작품은 지역 초연)을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영국 지휘자 에이드리언 볼트는 크나퍼츠부슈의 모차르트 연주가 리듬의 정확성이 부족하다고 평가했지만, 바그너 작품 지휘에 대해서는 아르투어 니키슈조차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그토록 압도적인 연주를 만들어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는 또한 국제적으로도 큰 인기를 누려 레닌그라드에서 마드리드까지, 스톡홀름에서 나폴리까지 유럽 전역의 오페라 극장에 객원 지휘자로 초청되었습니다.
2.4. 나치 정권 시기 (1933-1945) 활동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독일에서 집권한 후, 1936년 크나퍼츠부슈의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종신 계약은 나치 정권에 의해 취소되었습니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는 나치당 가입을 거부했고 정권에 대해 자주 무례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콘서트 시작 전에 나치당의 찬가인 '깃발을 높이 쳐들어라' 연주를 거부하며 히틀러의 분노를 샀습니다. 히틀러는 크나퍼츠부슈의 느린 템포 연주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를 "군악대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캐나다계 독일인 역사가 미하엘 한스 카터는 1996년 연구에서 크나퍼츠부슈의 나치에 대한 이념적 적대감은 그리 강하지 않았으며, 그의 해임은 주로 오페라 운영에 대한 나치의 불만과 히틀러의 개인적인 반감 때문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후임으로는 히틀러에게 호의적이고 정권에 순종적인 클레멘스 크라우스가 임명되었습니다.
1933년, 리하르트 바그너 서거 50주년을 맞아 작가 토마스 만이 뮌헨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고뇌와 위대함'이라는 강연을 통해 바그너를 비판하자, 바그너 숭배자였던 크나퍼츠부슈는 작곡가 한스 피츠너와 함께 '리하르트 바그너 도시 뮌헨의 항의'를 작성하여 만을 비난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만의 지지를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이 항의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포함한 뮌헨 시의 약 40명의 저명한 문화인과 정치인 명의로 라디오와 일간지에 발표되었으며, 이는 만의 망명 계획을 촉진하는 정치적 움직임이 되었습니다.
뮌헨에서의 사건 이후, 크나퍼츠부슈는 활동 거점을 오스트리아로 옮겼습니다. 1936년 그는 빈 국립 오페라에 처음 출연하여 상임 객원 지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공식 직책은 없었지만 1944년까지 국립 오페라 운영에 크게 관여했으며, 1929년에 데뷔했던 잘츠부르크 축제에도 1937년부터 다시 출연했습니다. 1937년 잘츠부르크 축제에서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브루노 발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함께 출연하여 이 네 명의 거장이 한자리에 모인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후로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종생 여러 차례 지휘했습니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면서 그는 다시 독일 영토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 점령국 및 동맹국에서 주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콘서트를 여러 차례 진행했습니다. 이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거부했던 일입니다.
그는 비록 뮌헨에서 활동이 금지되었지만, 나치 독일 통치 하에서 지휘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1944년 6월 30일, 그는 몇 시간 후 폭격으로 파괴될 예정이던 옛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의 마지막 공연을 지휘했습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단장 오토 슈트라서는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빈에 대한 포격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이미 6월에는 도시 외곽에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고, 오케스트라의 모든 단원들은 이것이 옛 극장에서의 마지막 공연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러 면에서 '신들의 황혼'이었습니다. 한 시대의 끝이었습니다. ...모두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크나퍼츠부슈가 지휘했고, 저는 그것이 그의 생애 최고의 공연 중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나치주의자들과의 긴장된 관계에도 불구하고, 크나퍼츠부슈는 1943년과 1944년 아돌프 히틀러의 생일을 축하하는 두 차례의 콘서트 등 나치 관련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1943년 10월 19일과 20일에는 환희력행단이 주최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연주회에서 스와 네지코와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습니다. 그는 1943년 1월 30일 히틀러로부터 검이 없는 전공십자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이처럼 나치 독일 시대 크나퍼츠부슈의 상황은 동료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유사했습니다. 그는 독일 문화와 예술에 깊이 뿌리내려 이주를 상상할 수 없었고, 나치 독일에서의 예술 활동을 위해 유명 지휘자들도 정권의 수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아 결국 협력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944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의 최종 단계에서 그의 이름은 히틀러가 승인한 '신이 내린 예술가 목록'의 최중요 지휘자 부문에 올라, 결과적으로 그를 총후의 재앙으로부터 구했습니다.
2.5. 전후 활동 및 바이로이트
전후 뮌헨에서는 크나퍼츠부슈의 복귀를 바라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나치 독일 정권 하에서 활동했던 다른 주요 음악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비나치화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미국 점령군은 1945년 가을, 나치 정권 시기의 예술 활동을 이유로 그에게 연주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이 금지령은 1946년 12월에 철회되었으나, 점령군 미군은 전쟁 중 스위스에 망명했던 젊은 유대인 음악가 게오르크 솔티를 뮌헨 오페라 극장의 총감독으로 임명했습니다. 솔티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전후 뮌헨에서 제가 임명된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질 만한 이유가 있었을 모든 사람들 중에서, 그 누구보다 더 큰 이유를 가졌던 사람이 바로 한스 크나퍼츠부슈였습니다. 사실, 경험 없는 저를 정말로 도와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한스 크나퍼츠부슈였습니다. 그는 저에게 아버지와 같았습니다."
크나퍼츠부슈는 1947년 밤베르크 교향악단을 지휘하며 활동을 재개했고, 뮌헨과 빈을 중심으로 지휘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복귀 후에는 더 이상 영구적인 직책을 맡지 않고 대부분 프리랜서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초청을 거절했지만, 빈과 다른 곳에서 객원 예술가로 계속 출연하며 바이로이트 축제의 핵심 인물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전후 바이로이트 축제 재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51년 전후 축제 재개 당시, 그는 '니벨룽의 반지'의 첫 공연들을 지휘했습니다. 그는 빌란트 바그너의 검소하고 미니멀리즘적인 연출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드러냈지만, 생애 대부분의 해 동안 축제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특히 '파르지팔'과 가장 깊이 연관되어 있었는데, 바이로이트에서의 95회 출연 중 55회가 '파르지팔' 지휘였습니다. 그는 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했지만, 때때로 파리에서도 지휘했는데, 1956년 아스트리드 바르나이와 함께 파리 오페라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1954년 그는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로 복귀하여 생애를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지휘를 계속했습니다. 1955년에는 빈 국립 오페라로 돌아와 극장 재개관을 기념하는 공연 중 하나로 '장미의 기사'를 지휘했습니다.
그의 말년에는 건강이 악화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961년 1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위천공을 앓아 위 절제술을 받는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회복 후에도 2 m에 가까운 장신에 체중이 60 kg까지 떨어져 곁에서 보기에도 쇠약해진 모습이었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 또한 그의 지휘에서 어딘가 이별을 예견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63년 11월 21일에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피해를 입었던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뮌헨 국립 극장)의 재건 기념 콘서트에서 베토벤의 '헌당식 서곡'을 지휘했습니다.
2.6. 말년 및 사망
1964년, 그는 젊은 시절부터 앓았던 삼반규관 질환으로 인해 심하게 넘어지면서 고관절이 골절되어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지만,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12월에 퇴원하여 자택에서 요양을 계속했지만, 1965년 4월 주치의의 권유에 따라 그해 바이로이트 축제 출연을 포기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이듬해인 1965년 10월 25일 77세의 나이로 급성 심부전과 순환 부전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20명 남짓의 극히 가까운 사람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노래나 악기 연주 없이 조용히 장례식이 치러졌으며, 그는 보겐하우젠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그의 뜻에 따라 소박한 단철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습니다. 1967년 음반 프로듀서 존 컬쇼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사이에 진정한 애정의 유대가 있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특히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처럼 길고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진 오케스트라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이 든 단원들은 여전히 푸르트벵글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에리히 클라이버, 클레멘스 크라우스, 브루노 발터의 기억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표합니다. 아직 살아 있는 다른 지휘자들에 대해서는 혐오에서부터 감탄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스 크나퍼츠부슈에게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는 제가 함께 일했던 지휘자 중 가장 친절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동료들에게 한결같이 관대했습니다. 그는 명성과 영예를 위한 쥐 경주에 결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극장에서 저는 그가 최고의 능력을 가진 바그너 지휘자였다고 생각합니다. 오케스트라가 그를 사랑한 이유를 압니다. 왜 우리가 그를 사랑했는지도 압니다."
그의 사망 이후, 1965년 10월 30일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는 추모식이 거행되어 마인하르트 폰 찰링거 지휘로 브람스 교향곡 제3번 3악장이, 로베르트 헤거 지휘로 바그너 '파르지팔' 3막 일부가, 요제프 카일베르트 지휘로 바그너 '신들의 황혼' 중 지크프리트의 장송 행진곡이 연주되었습니다. 11월 11일에는 빈 음악협회 홀에서 솔티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회가 열려 바그너 '신들의 황혼' 중 지크프리트의 장송 행진곡과 브루크너 교향곡 제7번 2악장이 연주되었습니다. 11월 17일에는 뮌헨 시청에서 추모식이 열려 로베르트 헤거가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모차르트 세레나데 제10번 '그랑 파르티타' 중 3악장 아다지오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이 연주되었습니다.
3. 주요 레퍼토리 및 예술적 특징
크나퍼츠부슈는 특유의 지휘 스타일과 음악적 선호도로 유명했습니다. 그의 음악 해석은 특히 독일 낭만주의 음악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3.1. 핵심 레퍼토리 및 해석

크나퍼츠부슈는 리하르트 바그너, 안톤 브루크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품에 대한 명성 높은 해석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특히 바그너 해석자로서 20세기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바그너 작품이 그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후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무상으로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는 '파르지팔'을 가장 사랑했는데, 바이로이트에서 그가 지휘한 95회 공연 중 55회가 이 작품이었습니다. 1962년 8월 5일의 '파르지팔' 공연 녹음은 애호가들에게 참고할 만한 녹음으로 여겨지며, 1964년 프랑스에서 ACC 디스크 대상을, 일본에서는 같은 해 레코드 아카데미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축제를 위해 바이로이트를 방문할 때마다 항상 바그너의 묘소를 찾았습니다.
크나퍼츠부슈의 지휘는 느린 템포, 직관, 그리고 전통적인 접근 방식이 특징이었습니다. 그는 리허설을 매우 소박하게 진행하는 것을 선호했으며, 연주 중에는 직관에 의존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한 번은 1955년 재건된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재개 기념 공연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를 공연할 때, 연습 장소에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여러분은 이 작품을 저처럼 잘 압니다. 저도 잘 압니다. 그럼 연습을 왜 합니까?"라고 말하며 돌아갔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그의 제스처는 대체로 절제되었지만, 그의 암시적인 성격 덕분에 오케스트라를 최고의 연주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시선이나 표정만으로도 단원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는 음악 작품의 재현에서 순간적인 자발성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바흐부터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차이콥스키,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시벨리우스, 프란츠 슈미트, 레스피기, 바르토크, 스트라빈스키, 테오도르 베르거에 이르는 폭넓은 레퍼토리를 소화했습니다. 오페라에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외에 베르디나 푸치니, 코른골트, 한스 피츠너, 볼프-페라리 등의 작품도 지휘했습니다. 또한, 크나퍼츠부슈는 작곡가 한스 피츠너, 코른골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지휘자 레오 블레히와 우정을 유지했습니다.
3.2. 초연 및 국제 무대 활동
크나퍼츠부슈는 뮌헨 재직 기간 동안 7개의 오페라 초연(또는 지역 초연)을 지휘했으며, 유럽 주요 도시에서 객원 지휘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의 국제적인 인기는 대단하여 레닌그라드에서 마드리드까지, 스톡홀름에서 나폴리까지 폭넓게 활동했습니다. 전후에도 그는 종종 파리에서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럽 이외의 도시로부터의 초청은 거절했으며,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제안도 거절했습니다. 이는 주로 제2차 세계 대전 후 그의 활동을 금지했던 미국인들에 대한 그의 반감 때문이었습니다.
3.3. 브루크너 악보 선택에 대한 입장
브루크너의 교향곡 또한 크나퍼츠부슈가 즐겨 연주했던 레퍼토리였지만, 그는 원전판 대신 기존의 개정판을 사용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크나퍼츠부슈의 젊은 시절에는 브루크너 악보가 소위 '개정판'만 출판되어 있었습니다. 이 개정판에는 브루크너 외의 인물에 의한 변경이나 삭제가 있었는데, 이를 재검토하기 위해 1935년부터 로베르트 하스에 의해 교정된 '원전판'이 출판되었고, 이후 하스의 뒤를 이어 레오폴트 노바크에 의해 교정된 새로운 원전판도 계속 출판되었습니다. 그러나 크나퍼츠부슈는 브루크너 교향곡 연주 시 교정된 원전판을 채택하지 않고 구판 개정판을 고수했습니다. 그가 당시 입수 가능했던 원전판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3.4. 작곡 활동
크나퍼츠부슈는 몇몇 곡들을 직접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사후 50년이 되는 2015년 11월 29일에는 도쿄 고토구 문화센터에서 그의 작품 연주를 곁들인 심포지엄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 피아노를 위한 타란텔라 작품7 (Tarantelle op.7): 현재 시라이시 미쓰타카의 피아노 연주 녹음 CD가 존재합니다.
- 오케스트라 반주에 의한 3개의 가곡 작품13 (3 Lieder mit Orchestra. op.13): 이 작품의 악보는 소실되었습니다.
- Über allen Gipfeln Ist Ruh "모든 산봉우리에 평화가 (방랑자의 밤노래)" 시: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So regnet es sich langsam ein "천천히 비가 내린다" 시: 체사르 플라이슐렌
- Ich lag von sanften Traum umflossen "나는 부드러운 꿈에 잠겨 있었다" 시: 프리드리히 뤼케르트
4. 녹음
크나퍼츠부슈는 녹음 작업에 대해 특별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주요 녹음들은 그의 예술성을 잘 보여줍니다.
4.1. 녹음에 대한 태도

크나퍼츠부슈는 동료들처럼 음반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1931년 뮌헨에서 녹음된 베토벤 교향곡 7번('흔들리지 않는 불꽃의 기념비'라고 한 평론가가 평함)과 같은 녹음으로 칭찬받았지만, 녹음 스튜디오 환경에는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음반 프로듀서 존 컬쇼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진실은 크나퍼츠부슈가 녹음 조건에 매우 비협조적이었고,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가 극장에서 분명히 드러냈던 천재성이 스튜디오에서는 살아나기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 페인트 냄새와 무대 뒤에서 불어오는 공기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는 극장에서의 불확실성과, 극장에서는 지휘자로서 큰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재앙으로 끝난다고 해도 소수의 관객만이 그것을 알아챌 것이고, 오케스트라는 무슨 일인지 이해하고 용서해줄 것이라는 편안함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녹음에 적용되지 않으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제약은 그에게 너무 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나퍼츠부슈가 항상 녹음이나 리허설을 완강히 거부했던 것은 아닙니다. 1961년에는 웨스트민스터 레코드 녹음 세션 중 스튜디오 컨트롤 룸에서 동료들과 녹음 엔지니어들과 함께 플레이백을 듣는 모습이 사진에 포착되었으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리허설 음성도 남아 있습니다.
4.2. 주요 녹음
크나퍼츠부슈는 데카에서 주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녹음했지만,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와도 스튜디오 녹음을 진행했습니다. 바그너의 작품, 특히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스튜디오 완전 녹음이 주를 이루었으며,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 슈베르트, 슈트라우스(요한 슈트라우스 일가 및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차이콥스키, 베버의 작품도 포함되었습니다. RIAS를 위해 제작된 녹음에서는 크나퍼츠부슈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베토벤(제8번), 브루크너(제8번과 제9번), 하이든('놀람 교향곡'), 슈베르트('미완성 교향곡')의 교향곡 녹음이 뛰어났습니다. 같은 연주진이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과 빈 왈츠, 오페레타 음악도 녹음했습니다.
크나퍼츠부슈의 가장 호평받은 녹음 중 일부는 1950년대와 1960년대 바이로이트 라이브 공연 중에 이루어졌습니다. 1951년 '파르지팔'은 데카에서 발매되었고, 1962년 공연은 필립스에서 녹음되었습니다. 두 녹음 모두 현재까지도 발매되고 있으며, 1962년 세트가 CD로 발매되었을 때 앨런 블라이스는 그라모폰지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이것은 '파르지팔'의 녹음 중 가장 감동적이고 만족스러운 연주이며, 여러 가지 이유로 쉽게 능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 누구도... 크나퍼츠부슈의 선율과 감정적 힘의 조합에 필적할 수 없습니다."
음악학자 데릭 쿡은 1962년판의 템포 설정이 '파르지팔' 초연을 지휘한 헤르만 뢰비의 그것에 가장 가깝다고 언급하며, 느리고 넓은 템포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자유자재로 표정을 변화시키는 점이 크나퍼츠부슈의 뛰어난 특성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한편, 데카 팀은 1951년 크나퍼츠부슈가 지휘한 '니벨룽의 반지'도 녹음했지만, 당시 계약상의 이유로 발표할 수 없었고, 1999년에 이 사이클에서 '신들의 황혼'이 발매되었습니다.
연도 | 작곡가 | 작품 | 연주단체 | 비고 |
---|---|---|---|---|
1924 | 하이든 | 교향곡 92번 '옥스퍼드' | 베를린 주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 | 최초 녹음 (어쿠스틱 녹음) |
1924 | 클레멘스 폰 프랑켄슈타인 | 마이어베어 주제에 의한 변주곡 | 베를린 주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 | 최초 녹음 (어쿠스틱 녹음) |
1928 | 요한 슈트라우스 2세 | '박쥐' 서곡 | 베를린 주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 | 전기 녹음 |
1929 | 베토벤 | 교향곡 7번 | 베를린 주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 | 11월 19일 스튜디오 녹음 |
1940 | 바그너 | '리엔치' 서곡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스튜디오 녹음 |
1940 | 베르디 | '아이다' 중 개선 행진곡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스튜디오 녹음 |
1940 | 모차르트 |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5월 12일 스튜디오 녹음 (독일 제국 방송 녹음) |
1940 | 바그너 | '신들의 황혼' 중 지크프리트의 라인 여행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5월 12일 스튜디오 녹음 (독일 제국 방송 녹음) |
1943 | 베토벤 | 교향곡 3번 '영웅'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3월 31일, 4월 1일 스튜디오 녹음 |
1944 | 브람스 | 교향곡 2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3월 26일 라이브 녹음 |
1949 | 브루크너 | 교향곡 7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8월 30일 라이브 녹음 (로트-바이스-로트 방송 녹음) |
1950 | 슈베르트 | 교향곡 8번 '미완성'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월 라이브 녹음 |
1951 | 바그너 | '파르지팔' 전곡 | 바이로이트 축제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 7월 30일 라이브 녹음 |
1951 | 바그너 | '신들의 황혼' 전곡 | 바이로이트 축제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 8월 4일 라이브 녹음 |
1952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알프스 교향곡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4월 20일 라이브 녹음 |
1956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돈 환, 죽음과 변용 |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 | 5월 7일~8일 스튜디오 녹음 (스테레오 녹음) |
1957 | 베토벤 |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 클리퍼드 커즌,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6월 10일~15일 스튜디오 녹음 (스테레오 녹음) |
1959 | 바그너 | '트리스탄과 이졸데' 발췌 | 비르기트 닐손, 그레이스 호프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9월 22일~25일 스튜디오 녹음 (스테레오 녹음) |
1961 | 베토벤 | '피델리오' 전곡 | 세나 유리나츠, 잔 피어스, 구스타프 나이틀링거, 바이에른 주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 12월 스튜디오 녹음 (스테레오 녹음) |
1962 | 바그너 | '파르지팔' 전곡 | 제스 토마스, 런던, 아이린 달리스, 바이로이트 축제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 8월 5일 라이브 녹음 (스테레오 녹음) |
1963 | 브루크너 | 교향곡 8번 |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월 29일 스튜디오 녹음 (스테레오 녹음, 생애 마지막 스튜디오 녹음) |
1964 | 바그너 | '파르지팔' 전곡 | 존 비커스, 토머스 스튜어트, 바르브로 에릭손, 바이로이트 축제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 8월 13일 라이브 녹음 (생애 마지막 연주회) |
5. 개인적인 삶과 성격
크나퍼츠부슈는 강렬한 개성과 독특한 대인 관계를 통해 대중과 동료들 사이에서 특별한 이미지를 구축했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삶은 그의 음악적 행보만큼이나 다채로웠습니다.
5.1. 대중적 이미지 및 대인 관계

크나퍼츠부슈는 독일 본토에서 '크나(der Kna독일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그의 솔직하고 꾸밈없는 엄격한 성격은 그가 발산하는 일종의 아우라와 어우러져 노년기에는 인간적인 매력이 되어 뮌헨과 빈에서 단순한 음악가를 넘어 특별한 존재로 존경받고 '인기 있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1963년 11월 21일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 재건 기념 콘서트에서 베토벤의 '헌당식 서곡' 한 곡만 지휘했지만, 그의 오페라 공연을 기대했던 뮌헨 시민들은 시 당국에 대해 시위 행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오토 슈트라서는 크나퍼츠부슈가 완전히 독창적인 인물이었으며, 어떤 잣대로도 그를 측정할 수 없었다고 언급했습니다. 많은 예술가적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크나퍼츠부슈에게도 상반되는 두 가지 면이 있었는데, 그의 성격은 강한 의지와 거친 견고함에 지배되면서도 높은 감수성과 약간의 여유로 중화되었습니다. 그의 소박하고 다소 겸손한 성격 또한 청중과 오케스트라로부터 인기를 얻었습니다. 연주회가 끝나면 그는 먼저 오케스트라에게 고개를 숙여 단원들이 연주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표명했으며, 단원들을 부하가 아닌 협력자로 대우했습니다. 또한 그는 전후 혼란기에 어려움을 겪던 단원들을 돕기 위해 많은 사재를 기부했습니다. 훗날에는 그가 나치 독일 시대에 박해받던 사람들을 지원했던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음반 프로듀서 존 컬쇼는 1967년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사이에 진정한 애정의 유대가 있는 경우는 드뭅니다. 특히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처럼 길고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진 오케스트라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이 든 단원들은 여전히 푸르트벵글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에리히 클라이버, 클레멘스 크라우스, 브루노 발터의 기억에 깊은 존경심을 표합니다. 아직 살아 있는 다른 지휘자들에 대해서는 혐오에서부터 감탄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스 크나퍼츠부슈에게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는 제가 함께 일했던 지휘자 중 가장 친절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동료들에게 한결같이 관대했습니다. 그는 명성과 영예를 위한 쥐 경주에 결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극장에서 저는 그가 최고의 능력을 가진 바그너 지휘자였다고 생각합니다. 오케스트라가 그를 사랑한 이유를 압니다. 왜 우리가 그를 사랑했는지도 압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거칠고 불쾌하며 격정적인 성격 또한 잘 알려져 있었고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마에스트로의 분노는 쉽게 터져 나왔고, 상당히 직설적인 언어적 탈선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저명한 소프라노 가수 비르기트 닐손이 보고한 바와 같이, 성악가들은 종종 연주 중에도 실수 때문에 그로부터 큰 소리로 상스러운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는 실제 공연에서의 문제 해결에 능숙했지만, 한 번은 '지크프리트' 공연에서 2막 개막 시 금관 섹션의 일부 단원이 휴식에서 돌아오지 않자, 그는 눈길도 주지 않고 지휘대에 돌아와 튜바나 첫 트럼펫이 없는 채로 지휘를 시작했습니다. 곧 이상을 감지하고 연주를 멈추고 단원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지만, 그 후 1년 동안 마에스트로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치 독일 통치자들에 대한 그의 모욕 또한 유명했지만, 그의 특별한 지위 덕분에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에 처하지는 않았습니다. 크나퍼츠부슈가 내뱉은 특이한 비올라 농담도 있습니다.
"비올라는 교황청과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것이다."
오스트리아 언론인 안드레아스 노바크는 크나퍼츠부슈를 "기분 나쁜 인본주의자"라고 부르며 매우 적절하게 특징지었습니다.
5.2. 가족 관계

개인적인 삶에서 크나퍼츠부슈는 두 번 결혼했습니다. 1918년 엘버펠트 출신인 엘런 셀마 노이하우스와 결혼하여 딸 아니타 클라라 율리(1919년 5월 22일 ~ 1938년 6월 2일)를 낳았지만, 아니타는 뇌종양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엘런과의 결혼 생활은 1925년에 끝났고, 1926년에는 프로이센 육군 대령 에리히 폰 라이프치히의 딸이자 독일 농장 영주이자 인지학자인 한스-하소 폰 펠트하임의 이복 여동생인 마리온 폰 라이프치히와 결혼하여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했습니다.
볼프강 바그너에 따르면, 크나퍼츠부슈는 자택 서재에 아내 외의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서재에 마련된 아니타의 영묘 열쇠를 목걸이로 걸고 다니며, 항상 딸의 사진을 옆에 두었습니다. 아니타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 여행으로 뮌헨을 방문한 오토 슈트라서는 마우엘키르허 거리의 크나퍼츠부슈 저택으로 조문하러 갔고, 부부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크나퍼츠부슈는 직접 손님을 대접하고 저녁 식사 후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 1막 3장의 발트라우테 장면을 피아노로 연주해주었습니다.
마리온은 크나퍼츠부슈 사후인 1966년 1월, 고인의 유언에 따라 악보 등 유품 200여 점을 바이에른 주립도서관에 기증했지만, 사적인 서한 등은 폐기했습니다. 조각가 한스 비머가 제작한 뮌헨 시의 기념비 건립 제안도 거절했습니다. 마리온은 어떤 추모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이후로도 생전의 남편에 대한 취재에 응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으며, 남편과 같은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6. 유산 및 평가
크나퍼츠부슈는 20세기 서양 음악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를 기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6.1. 역사적 위상 및 영향
크나퍼츠부슈는 특히 독일 낭만주의 레퍼토리에서 20세기 가장 중요한 지휘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후대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중후하고 깊이 있는 연주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이후 최고의 존재로 여겨지며, 독일 낭만파, 특히 후기 낭만주의, 그중에서도 바그너의 지휘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표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바그너 작품 중에서도 유연한 무한성을 지닌 후기 악극류에서 비할 데 없는 솜씨를 보여주었습니다. 다른 작곡가로는 바그너의 영향이 짙은 브루크너 작품이 특히 평판이 높습니다. 그의 말년에는 쇠약해진 모습에도 불구하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조차 '고별'을 예감케 하는 분위기를 풍겼으며, 그의 지휘는 독일 음악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있습니다.
6.2. 수상, 영예 및 추모
크나퍼츠부슈는 생전에 다양한 상과 영예를 받았으며, 사후에도 그를 기리는 추모 활동들이 이어졌습니다.
- 1943년 - 전공십자훈장 수훈.
- 1944년 - 검 없는 성 야고보 기사단 사령관으로 임명.
- 1953년 - 바이로이트 명예 시민으로 선정.
- 1958년 - 바이에른 공로 훈장 및 뮌헨 명예 금메달 수여. 70세 생일에 뮌헨 필하모닉으로부터 명예의 반지(Ehrenring der Münchner Philharmoniker)를 수여받았습니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로 임명.
- 1963년 - 뮌헨 명예 시민으로 선정. 오스트리아 과학 예술 십자 훈장 수훈.
- 1937년 독일 조각가 베른하르트 블레커는 크나퍼츠부슈의 흉상을 제작했으며, 이 흉상 사진은 1957년 녹음된 브람스 작품집 음반 재킷에도 사용되었습니다. 블레커는 1958년에도 초상 메달을 제작하여 크나퍼츠부슈의 70세 생일에 뮌헨 시로부터 그에게 증정되었습니다.
-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 로비에는 화가 한스 위르겐 칼만이 그린 크나퍼츠부슈의 초상화가 걸려 있습니다.
- 크나퍼츠부슈 사후, 바이로이트, 보겐하우젠, 포르츠하임에 크나퍼츠부슈 거리(Knappertsbuschstraße)가 제정되었습니다. 보겐하우젠에는 크나퍼츠부슈 거리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습니다.
- 1993년 - 크나퍼츠부슈의 생가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문화 기념 건축물 및 부퍼탈 기념 건축물로 지정되었습니다.
- 2000년 - 대대로 크나퍼츠부슈 가문이 경영했던 크나퍼츠부슈 증류소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문화 기념 건축물 및 부퍼탈 기념 건축물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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