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피터 실턴의 어린 시절은 레스터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곳에서 축구 선수로서의 잠재력을 일찍이 드러냈다.
1.1. 어린 시절 및 교육
피터 실턴은 1949년 9월 18일에 태어났다. 13세의 나이에 레스터의 킹 리처드 3세 남자 학교에 다니던 그는 1963년부터 지역 클럽인 레스터 시티에서 스쿨보이 수준의 훈련을 시작했다. 당시 1군 골키퍼였던 고든 뱅크스는 실턴의 유망함을 알아보고 코치에게 그의 잠재력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1.2. 초기 경력
1966년 5월, 16세의 실턴은 에버턴과의 경기에서 레스터 시티 데뷔전을 치렀다. 그의 잠재력은 빠르게 주목받았고, 레스터 시티 구단은 어린 신동인 실턴의 편을 들어 월드컵 우승자인 뱅크스를 스토크 시티로 이적시켰다. 이후 실턴은 1군 생활에 적응했으며, 1967년 10월 사우샘프턴과의 경기에서는 상대 골대에서 직접 골을 넣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사우샘프턴의 골키퍼 캠벨 포사이스가 실턴의 긴 펀팅을 잘못 판단하여 공이 그의 머리 위로 날아가 골문으로 들어갔고, 레스터는 이 경기에서 5대1로 승리했다.
그 다음 시즌 레스터는 1부 리그에서 강등되는 혼란스러운 시즌을 보냈지만, 웸블리에서 열린 FA컵 결승에 진출했다. 당시 19세였던 실턴은 FA컵 결승에 출전한 가장 어린 골키퍼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맨체스터 시티의 닐 영이 경기 초반에 터뜨린 한 골로 레스터는 패배했다. 실턴은 이후 많은 영예를 얻었지만, 다시는 FA컵 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다. 1974년 레스터와 함께 FA컵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리버풀과의 재경기에서 패했다.
2. 클럽 경력
피터 실턴은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동안 활약한 선수 중 한 명으로, 여러 클럽을 거치며 인상적인 경력을 쌓았다.
2.1. 레스터 시티
실턴은 1966년 5월 16세의 나이로 레스터 시티에서 프로 데뷔를 했다. 그의 잠재력을 알아본 구단은 당시 주전 골키퍼였던 고든 뱅크스를 이적시키고 실턴을 1군 주전으로 기용했다. 1967년 10월 사우샘프턴과의 경기에서는 자신의 골문에서 찬 공이 상대 골문으로 직접 들어가는 골을 기록하며 팀의 5대1 승리에 기여했다. 1968-69 시즌에는 팀이 1부 리그에서 강등되었지만, FA컵 결승에 진출하여 19세의 나이로 결승 무대를 밟았다. 비록 맨체스터 시티에게 0대1로 패했지만, 이는 그의 초기 경력에서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레스터 시티는 두 시즌 후 2부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1부 리그로 승격했고, 1971년에는 채리티 실드에서 우승했다. 1974년 FA컵 준결승에 다시 진출했지만 리버풀에 패하며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
2.2. 스토크 시티
1974년 11월, 실턴은 당시 골키퍼 역대 최고 이적료인 32.50 만 GBP에 스토크 시티로 이적했다. 그는 1974-75 시즌에 26경기에 출전하며 팀이 리그 우승을 아깝게 놓치는 데 기여했다. 1975-76 시즌에는 팀의 48경기에 모두 출전하며 꾸준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76년 1월, 심각한 폭풍으로 인해 홈구장인 빅토리아 그라운드가 큰 피해를 입었고, 수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스토크 시티는 선수들을 매각해야 했다. 1976년 여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실턴에게 27.50 만 GBP를 제시했지만, 실턴의 높은 주급 요구로 인해 이적이 무산되었다. 그는 1976-77 시즌에도 스토크 시티에 남았지만, 젊고 경험 없는 팀은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결국 그는 1977년 9월 노팅엄 포레스트로 이적했다.
2.3. 노팅엄 포레스트
1977년 9월, 노팅엄 포레스트는 실턴에게 25.00 만 GBP를 제시했고, 실턴은 새 시즌이 시작된 지 한 달 만에 계약을 맺었다. 당시 노팅엄 포레스트는 브라이언 클러프 감독의 지휘 아래 1부 리그로 막 승격하여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실턴은 당시 컵 대회 출전 자격이 없어 리버풀과의 리그컵 결승 재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했지만, 팀은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팀은 1부 리그 승격 첫 시즌 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실턴은 코번트리 시티와의 우승 확정 경기에서 믹 퍼거슨의 강력한 헤딩슛을 막아내는 등 뛰어난 선방을 선보였다. 이 시즌 동안 실턴은 37번의 리그 경기에서 단 18골만을 허용하며 맹활약했고, 동료 선수들의 투표로 P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1979년, 노팅엄 포레스트는 사우샘프턴을 3대2로 꺾고 다시 한번 리그컵 우승을 차지했으며, 뮌헨에서 열린 유러피언컵 결승에서는 말뫼를 트레버 프랜시스의 골로 꺾고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실턴은 3년 연속 리그컵 결승에 진출했지만, 울버햄프턴 원더러스와의 경기에서 실턴과 수비수 데이비드 니덤의 의사소통 오류로 인해 앤디 그레이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우승을 놓쳤다.
1980년, 노팅엄 포레스트는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마드리드에서 열린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SV 함부르크와 맞붙었다. 1979년 결승과 마찬가지로 팽팽한 경기였으며, 존 로버트슨의 한 골로 노팅엄 포레스트가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함부르크 선수 중에는 국제 무대에서 실턴의 주장이었던 케빈 키건도 있었다.
이후 실턴의 축구 생활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노팅엄 포레스트는 더 이상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 못했고, 실턴은 오랜 기간 지속될 도박 중독에 빠져 가족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또한 혼외정사 및 음주운전 유죄 판결로 350 GBP의 벌금을 내기도 했다. 이 모든 문제들이 1982년 실턴이 노팅엄 포레스트를 떠나 새로운 시작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2.4. 사우샘프턴
1982년, 실턴은 노팅엄 포레스트를 떠나 사우샘프턴으로 이적했다. 이곳에서 그는 예전 국제 경기 팀 동료였던 앨런 볼과 함께 뛰었다. 실턴은 1984년 FA컵 준결승에서 에버턴의 에이드리언 히스에게 막판 헤딩골을 허용하며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고, 1986년에도 리버풀에게 0대2로 패하며 다시 한번 준결승에서 고배를 마셨다. 그는 1987년 여름 더비 카운티로 이적했다.
1986년 3월, 실턴은 런던 워털루역에서 이먼 앤드루스에게 깜짝 놀라며 디스 이즈 유어 라이프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2.5. 더비 카운티
실턴은 1987년 여름 더비 카운티에 합류하여 마크 라이트, 딘 손더스, 테드 맥민 등과 함께 팀이 리그 5위를 기록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헤이젤 참사로 인한 잉글랜드 클럽의 유럽 대회 출전 금지(1985년~1990년)로 인해 UEFA컵 출전 기회를 놓쳤다. 1991년 더비 카운티가 강등되자 실턴은 선수 생활의 미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시 42세였던 그는 코치나 감독이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91년 초, 그는 지리적 이유로 스탠 터넨트의 후임으로 헐 시티 감독직 제안을 거절했다.
2.6. 후기 클럽 경력
실턴은 1992년 2월 플리머스 아가일의 선수 겸 감독 제안을 수락하며 더비 카운티를 떠났다. 당시 플리머스는 2부 리그 강등권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실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강등을 피하지 못했다. 그가 30.00 만 GBP의 이적료로 영입한 피터 스완은 팀 동료와 팬들 모두와 관계가 좋지 않아 실패한 영입으로 평가되었다.
1994년, 그는 오로지 감독직에만 집중하기 시작했고, 플리머스는 디비전 2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준결승에서 번리에게 패했다. 1994년 1월, 그는 이언 브랜풋의 후임으로 사우샘프턴 감독직에 복귀할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결국 그 자리는 앨런 볼에게 돌아갔다. 이듬해 2월, 플리머스가 강등 위기에 처하자 그는 팀을 떠났고, 45세의 나이로 다시 선수로 복귀할 의사를 밝혔다.
그는 프리미어리그의 윔블던에 단기간 합류하여 주전 골키퍼 한스 세게르스의 부상 공백을 메웠지만, 1군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이후 볼턴 원더러스와 계약하여 몇 경기에 출전했는데, 울버햄프턴 원더러스와의 몰리뉴에서 열린 디비전 1 플레이오프 준결승 경기도 포함되었다. 볼턴은 이 경기에서 1대2로 패했지만, 2차전에서 울버햄프턴을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그러나 실턴은 2차전에 출전하지 않았고, 키스 브래너건이 대신 출전했다. 이후 코번트리 시티와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에 합류했지만, 두 팀 모두에서 1군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다만 웨스트햄에서는 여러 차례 교체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996번의 풋볼 리그 경기에 출전한 실턴은 1,000경기 출전을 간절히 원했고, 1996년 11월 39세의 레스 실리와 트레이드되어 레이턴 오리엔트에 합류하면서 그 목표를 달성했다. 그의 1,000번째 리그 경기는 1996년 12월 22일 브라이턴 & 호브 앨비언과의 경기였으며, 이 경기는 스카이 스포츠를 통해 생중계되었고, 경기 전에는 풋볼 리그로부터 특별판 기네스 세계 기록 책을 선물 받았다. 그는 1996-97 시즌이 끝날 때까지 5경기를 더 뛰었고, 47세의 나이로 총 1,005번의 리그 경기를 기록하며 은퇴했다. 은퇴 당시 그는 풋볼 리그 또는 프리미어리그에서 뛴 역대 5번째 최고령 선수였다. 실턴은 사업 실패와 도박으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후에는 유명한 강연자로 활동했다. 그는 또한 FIFA 10, FIFA 12의 클래식 XI 팀과 프로 에볼루션 사커 (2002-2009)의 클래식 잉글랜드 팀에 등장했다. 2010년에는 BBC의 스트릭틀리 컴 댄싱 시리즈에 출연하기도 했다.
3. 국가대표 경력
피터 실턴은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 길고 뛰어난 경력을 쌓으며 수많은 국제 대회에 참가했다.
3.1. 데뷔 및 초기 국가대표 경력
비록 당시 하위 리그에서 뛰고 있었지만, 실턴은 잉글랜드 감독 앨프 램지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1970년 11월 동독과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는 3대1로 승리했다. 6개월여 만에 레스터는 다시 1부 리그로 승격했다. 그의 두 번째 잉글랜드 대표팀 출전은 웸블리에서 열린 웨일스와의 득점 없는 무승부 경기였다. 국가대표팀 첫 경쟁 경기는 1972년 유럽 선수권 대회 예선에서 스위스와 1대1로 비긴 경기였다. 이 시기에는 고든 뱅크스가 여전히 잉글랜드의 주전 골키퍼였지만, 1970년 월드컵의 나머지 백업 골키퍼였던 피터 보네티와 알렉스 스텝니는 램지 감독에 의해 제외되어 22세의 실턴은 잉글랜드의 넘버 투 골키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실턴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잉글랜드 대표팀 출전은 1972년 말에 이루어졌으며, 이후 비극적인 사건으로 실턴은 갑자기 잉글랜드의 주전 골키퍼로 부상하게 되었다. 1972년 10월, 고든 뱅크스가 자동차 사고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어 선수 생활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한 달 뒤 리버풀의 골키퍼 레이 클레멘스가 1974년 월드컵 예선 웨일스전(1대0 승리)에서 데뷔전을 치렀지만, 실턴은 클레멘스의 61경기보다 훨씬 많은 100경기 이상을 출전하게 되었다.
1973년 여름, 실턴은 북아일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세 차례의 클린시트를 기록했다. 스코틀랜드전에서는 케니 달글리시의 슛을 몸을 날려 막아냈는데, 실턴은 이를 자신의 최고의 선방 중 하나로 꼽았다. 체코슬로바키아와의 무승부로 실턴은 10번째 국가대표팀 경기를 치렀고, 일주일 뒤 호주프에서 열린 폴란드와의 중요한 월드컵 예선 경기를 위한 워밍업이 되었다. 이 경기는 잉글랜드에게 좋지 않게 흘러갔고, 실턴은 두 골을 모두 막지 못하며 0대2로 패했다. 따라서 4개월 뒤 웸블리에서 같은 상대와 치러지는 마지막 예선 경기에서 승리해야만 본선 진출이 가능했다. 이 경기에서 실턴의 실책으로 얀 도마르스키가 폴란드의 결정적인 골을 넣었고, 실턴의 밤은 폴란드 골키퍼 얀 토마셰프스키의 활약과 대조를 이루었다. 토마셰프스키는 브라이언 클러프 (이후 실턴의 노팅엄 포레스트 감독)에게 "광대"라고 조롱당했지만, 폴란드가 1974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데 필요한 무승부를 얻는 데 결정적인 선방을 여러 차례 보여주었다.
이 경험으로 인해 새로 부임한 잉글랜드 감독 돈 레비는 레이 클레멘스를 더 선호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75년, 클레멘스는 9번의 경기 중 8번을 출전했지만, 잉글랜드는 이 기간 동안 1976년 유럽 선수권 대회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1977년부터 새로운 감독 론 그린우드는 실턴과 클레멘스를 번갈아 기용하기 시작했으며, 결국에는 둘 중 한 명을 선택하지 못하고 번갈아 출전시키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우유부단함은 일부 평론가들로부터 그린우드 감독의 최고 수준 관리 능력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실턴은 잉글랜드가 10년 만에 처음으로 국제 대회인 1980년 유럽 선수권 대회 본선에 진출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실턴은 1980년 3월 스페인과의 2대0 승리 경기에서 30번째 잉글랜드 대표팀 경기를 치렀다. 그의 31번째 경기는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이탈리아에게 0대1로 패한 경기였으며, 이 패배는 잉글랜드가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3.2. 주요 대회 참가
실턴은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주전 골키퍼로서 여러 주요 국제 대회에 참가하며 팀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3.2.1. 1982년 FIFA 월드컵
실턴은 개인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1982년 월드컵에 집중해야 했다. 그는 잉글랜드 예선 조인 UEFA 4조의 절반 경기에 출전했다. 노르웨이와 스위스를 상대로 홈에서 승리했고, 루마니아와는 득점 없이 비겼으며, 헝가리를 상대로 1대0의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헝가리전은 예선 마지막 경기였고, 노르웨이 원정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경기 결과 덕분에 무승부만으로도 8년 전의 예선 탈락을 피할 수 있었다. 잉글랜드는 이번에는 좋은 결과를 얻어 12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으며, 실턴은 32세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스페인에서 열린 첫 월드컵 본선 무대에 섰다.
대회 전 친선 경기에서는 레이 클레멘스가 출전했지만, 빌바오에서 열린 프랑스와의 조별리그 첫 경기에는 실턴이 선발 출전했다. 잉글랜드는 3대1로 승리했고, 실턴은 남은 두 조별리그 경기에도 골문을 지키며 세 번의 승리로 잉글랜드는 조 1위로 2라운드에 진출했다.
3.2.2. UEFA 유로 1984 및 1986년 FIFA 월드컵 예선
보비 롭슨이 잉글랜드 대표팀을 맡으면서 실턴의 국제 경력은 더욱 빛을 발했다. 그는 롭슨 감독의 첫 10경기에 모두 출전했으며, 브라이언 롭슨과 레이 윌킨스의 부재로 인해 이 중 7경기에서 주장 완장을 차기도 했다. 스코틀랜드를 2대0으로 꺾은 경기에서 실턴은 50번째 국가대표팀 경기를 치렀다.
레이 클레멘스는 1984년 유럽 선수권 대회 예선 룩셈부르크전에서 복귀했지만, 이 경기는 클레멘스의 61번째 국가대표팀 경기이자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잉글랜드는 유럽 선수권 대회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그러나 실턴은 이제 국가대표팀의 확고한 주전 골키퍼가 되었고, 국제 경력을 마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그의 국제 경기 출전 기록의 거의 절반(125경기 중 61경기)은 35세 이후에 달성되었다. 1985년이 되어서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골키퍼 게리 베일리가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친선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실턴은 1986년 월드컵 예선에서도 골키퍼로 활약했으며, 3경기에서 3승을 거두고 무실점을 기록했다.
햄던 파크에서 열린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 1대0으로 패하며 실턴은 70번째 국가대표팀 경기를 치렀다. 이후 잉글랜드는 멕시코에서 열린 투어 경기에서 서독을 3대0으로 꺾었는데, 실턴은 안드레아스 브레메의 페널티킥을 막아냈다. 잉글랜드는 월드컵을 위해 1년 뒤 멕시코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잉글랜드는 예선 전 경기를 무패로 마쳤다. 대회 전 멕시코와의 적응 경기를 치를 무렵, 실턴은 잉글랜드 대표팀 경력 80경기를 기록했으며, 전년도 튀르키예전에서 뱅크스의 골키퍼 최다 출전 기록인 73경기를 넘어섰다.
3.2.3. 1986년 FIFA 월드컵
월드컵 본선에서 잉글랜드는 포르투갈과의 첫 조별리그 경기에서 패하고, 모로코와의 경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하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 이 기간 동안 보비 롭슨은 부상으로 실려 나갔고, 레이 윌킨스는 퇴장당했다. 이들의 부재 속에 실턴은 주장 완장을 차고 폴란드를 3대0으로 꺾는 마지막 조별리그 경기에서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게리 리네커가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잉글랜드는 2라운드에 진출했다.
2라운드에서는 파라과이를 만났는데, 실턴이 전반전에 한 차례 손끝으로 선방을 해야 했지만, 잉글랜드는 거의 위협받지 않았다. 리네커가 두 골, 피터 비어즐리가 한 골을 넣으며 잉글랜드는 3대0으로 승리하고 아르헨티나와의 8강전으로 진출했다. 이 경기는 실턴의 경력 전체에 걸쳐 전설의 일부가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주장 디에고 마라도나는 대회 내내 최고의 선수였지만, 팽팽한 전반전 동안 잉글랜드는 그의 창의성을 잘 막아냈다. 그러나 후반전 초반, 마라도나는 실턴의 분노를 자아내며 경기를 바꿨다.
마라도나가 공격을 시작했고, 스티브 호지가 공을 건드리면서 잉글랜드 페널티 박스 가장자리에서 공격이 무산되는 듯 보였다. 공은 페널티 지역으로 다시 향했고, 마라도나는 초기 패스에서 이어지는 움직임으로 공을 쫓아갔고, 실턴은 공을 펀칭하기 위해 나왔다. 마라도나는 실턴 위로 공을 주먹으로 쳐서 골망을 흔들었다. 실턴과 그의 팀 동료들은 마라도나가 손을 사용했다고 항의했지만, 튀니지 출신 심판 알리 빈 나세르는 골을 인정했다. 이후 공개된 사진에는 마라도나가 실턴보다 높이 뛰어올라 주먹으로 공을 명확히 맞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마라도나는 나중에 이 골이 신의 손에 의해 득점되었다고 말했다. 나세르 심판은 그 후 다시는 그 정도 수준의 경기를 주관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라도나는 거의 모든 잉글랜드 수비수와 실턴을 제치고 빈 골대에 슛을 날려 합법적인 세기의 골을 기록했다. 2002년, 이 골은 FIFA 웹사이트의 2002년 FIFA 월드컵 홍보의 일환으로 "세기의 골"로 선정되었다. 리네커가 한 골을 만회했고 경기 막판 동점골을 넣을 뻔했지만, 잉글랜드는 탈락했다.
3.2.4. UEFA 유로 1988
실턴은 계속해서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뛰었으며, 서독에서 열린 1988년 유럽 선수권 대회의 순조로운 예선 통과에 기여했다.
실턴은 유럽 선수권 대회 예선에서 북아일랜드를 2대0으로 꺾은 경기에서 90번째 잉글랜드 대표팀 경기를 치렀다.
실턴의 99번째 경기는 유럽 선수권 대회 본선 2조의 첫 경기였다. 이 경기는 아일랜드 공화국에게 레이 호턴의 이른 헤딩골로 0대1로 패했다. 실턴의 100번째 경기는 네덜란드와의 경기였는데, 네덜란드도 첫 경기에서 패한 상태였다. 마르코 판 바스턴이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잉글랜드는 이 경기에서 1대3으로 패해 토너먼트에서 탈락했다. 롭슨 감독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 조별리그 경기가 무의미해지자 실턴을 제외했고, 잉글랜드는 이 경기에서도 1대3으로 패했다. 실턴의 오랜 백업 골키퍼였던 크리스 우즈 (10년 전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실턴이 컵 대회 출전 자격이 없을 때 리그컵 결승에 뛰었던 십대 백업 선수)가 드물게 경기에 출전했다.
3.2.5. 1990년 FIFA 월드컵
실턴은 이후 18개월 동안 잉글랜드의 모든 경기에 출전했으며, 그가 결장한 한 경기에서는 미래 잉글랜드의 주전 골키퍼가 될 퀸즈 파크 레인저스의 데이비드 시먼이 데뷔전을 치렀다. 1989년 6월, 실턴은 코펜하겐에서 열린 덴마크와의 친선 경기에서 109번째 국가대표팀 경기를 치르며 옛 잉글랜드 주장 보비 무어의 108경기 출전 기록을 경신했다. 경기 전 그는 앞면에 '109'가 새겨진 액자형 잉글랜드 골키퍼 유니폼을 선물 받았다. 그는 이 무렵 1990년 월드컵 예선 3경기에서 3번의 클린시트를 기록했으며, 결국 이탈리아에서 열릴 본선 진출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단 한 골도 허용하지 않았다.
실턴은 1990년 월드컵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선수였으며, 1940년대에 태어난 마지막 선수였다. 그의 119번째 국가대표팀 경기는 아일랜드 공화국과의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1대1 무승부로 끝났다. 잉글랜드는 조별리그를 통과하고 2라운드에서 벨기에를 1대0으로 꺾었으며, 8강전에서는 카메룬에게 2대1로 뒤지다가 리네커의 두 번의 페널티킥으로 3대2 역전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준결승에서 서독을 만났는데, 이는 실턴의 124번째 잉글랜드 경기였다.
전반전은 득점 없이 끝났지만, 재개 직후 실턴은 안드레아스 브레메의 굴절된 프리킥에 골을 허용했다. 공은 폴 파커의 정강이를 맞고 굴절되어 실턴의 머리 위로 넘어갔다. 리네커의 막판 동점골로 잉글랜드는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실턴은 승부차기에서 독일 선수들이 찬 어떤 페널티킥에도 가까이 가지 못했고, 잉글랜드는 두 번의 실축으로 토너먼트에서 탈락했다.
실턴은 3위 결정전에서도 골키퍼로 출전했는데, 이 경기는 개최국 이탈리아의 2대1 승리로 끝났다. 실턴은 백패스 처리에서 머뭇거리다가 로베르토 바조에게 공을 빼앗겨 실점하는 굴욕적인 순간을 겪기도 했다. 이 경기는 그의 125번째 국가대표팀 경기였으며, 대회가 끝난 후 그는 이 경기가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팀 경기는 국제 데뷔 20주년을 불과 4개월 앞두고 이루어졌으며, 이는 역대 가장 긴 국제 경력 중 하나이다. 그는 국제 경기에서 단 한 번도 경고나 퇴장을 당하지 않았다.
4. 플레이 스타일
실턴은 전성기 시절 세계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이자 동세대 최고의 슛 스토퍼로 평가받았으며, 잉글랜드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일부 언론에서는 그를 역대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실턴은 지능적이고 효율적인 골키퍼였으며, 무엇보다도 뛰어난 신체적 존재감, 볼 핸들링, 위치 선정 능력, 침착함, 꾸준함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또한 팀 동료들과 소통하고 수비를 조직하며 후방 라인에 자신감을 불어넣는 능력도 뛰어났다. 그는 상당한 신체적 힘을 가지고 있어 골키퍼치고는 키가 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페널티 지역에서 위협적인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또한 민첩하고 뛰어난 반사 신경과 슛 방어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훈련에 대한 성실함, 정신력, 규율, 그리고 신체적 컨디션 관리 능력은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40년에 걸친 경력 동안 보여준 탁월한 장수로도 두드러졌다. 그는 47세의 나이에 은퇴했으며, 1,000번 이상의 프로 경기에 출전했다.
그러나 실턴은 후기 경력에서 나이가 들면서 속도와 민첩성이 점차 부족해지는 점에 대해 잉글랜드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점은 그의 타이밍과 골키퍼치고는 비교적 작은 키와 함께 페널티킥 방어에 제한을 주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특히 1990년 월드컵 준결승에서 서독과의 승부차기 패배에서 두드러졌다. 실제로 그의 국제 경력 동안 페널티킥 방어 기록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으며,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페널티킥 선방은 1985년 서독의 안드레아스 브레메를 상대로 한 것이었다.
5. 지도자 경력
선수 은퇴 후 피터 실턴은 플리머스 아가일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며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1992년 2월부터 1995년 1월까지 플리머스 아가일의 감독을 맡았다. 당시 플리머스는 2부 리그에서 강등권 싸움을 하고 있었지만, 실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강등을 피하지 못했다. 1994년에는 오로지 감독직에만 집중하여 팀을 디비전 2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으나 준결승에서 번리에게 패했다. 1995년 2월, 플리머스가 강등 위기에 처하자 그는 팀을 떠나 다시 선수로 복귀할 의사를 밝혔다.
6. 개인 생활
실턴은 1970년 9월 수 플리트크로프트와 결혼하여 두 아들 마이클과 샘 실턴을 두었으며, 샘 또한 프로 축구 선수가 되었다. 2011년 12월, 실턴은 40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아내와 헤어졌다고 발표했다.
2013년 3월, 실턴은 음주운전 혐의로 기소되었고, 20개월의 면허 정지와 1020 GBP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2015년 3월, 실턴은 2014년에 약혼한 재즈 가수 스테파니 헤이워드와 재혼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두 사람은 2016년 12월 10일 웨스트 머시의 성 베드로와 성 바울 교구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실턴은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2020년 1월, 실턴은 아내 스테프의 도움으로 45년간의 도박 중독을 극복했다고 밝혔다. 그는 도박 중독과 관련된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영국 정부와 협력해왔다.
실턴은 1986년 MBE, 1991년 OBE에 이어 2024년에는 축구와 도박 피해 예방에 기여한 공로로 CBE를 수훈했다.
7. 수상 및 영예
피터 실턴은 그의 오랜 경력 동안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수많은 수상과 영예를 얻었다.
7.1. 클럽 수상
- 레스터 시티
- 풋볼 리그 2부: 1970-71
- FA 채리티 실드: 1971
- FA컵 준우승: 1968-69
- 노팅엄 포레스트
- 풋볼 리그 1부: 1977-78
- 풋볼 리그 1부 준우승: 1978-79
- 풋볼 리그 컵: 1978-79
- FA 채리티 실드: 1978
- 유러피언컵: 1978-79, 1979-80
- 유럽 슈퍼컵: 1979
- 유럽 슈퍼컵 준우승: 1980
- 인터콘티넨탈컵 준우승: 1980
- 사우샘프턴
- 풋볼 리그 1부 준우승: 1983-84
- 트로페오 시우다드 데 비고: 1983
7.2. 국가대표 수상
- 잉글랜드
- FIFA 월드컵 4위: 1990
- 러스 컵 우승: 1986, 1988, 1989
- 러스 컵 준우승: 1985, 1987
- 1985 아즈테카 2000 토너먼트 준우승: 1985
7.3. 개인 수상
- PFA 1부 리그 올해의 팀: 1974-75, 1977-78, 1978-79, 1979-80, 1980-81, 1981-82, 1982-83, 1983-84, 1984-85, 1985-86 (역대 최다 선정)
- PFA 세기의 팀 (1977-1996): 2007
- PFA 올해의 선수: 1977-78
- 월드 XI: 1978, 1982, 1983, 1985, 1989, 1990
- 옹즈 몽디알: 1979, 1980
- 노팅엄 포레스트 올해의 선수: 1981-82
- 사우샘프턴 올해의 선수: 1984-85, 1985-86
- FWA 트리뷰트 어워드: 1991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2년 헌액
- 풋볼 리그 100 레전드
- 대영 제국 훈장 (MBE): 1986
- 대영 제국 훈장 (OBE): 1991
- 대영 제국 훈장 (CBE): 2024
- IOC 유럽 올해의 선수: 1979-80
- 발롱도르 투표 10위: 1978
- 발롱도르 투표 5위: 1989
8. 통산 기록
8.1. 클럽
클럽 | 시즌 | 리그 | FA컵 | 리그컵 | 기타 | 합계 | ||||||
---|---|---|---|---|---|---|---|---|---|---|---|---|
디비전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
레스터 시티 | 1965-66 | 1부 리그 | 1 | 0 | 0 | 0 | 0 | 0 | 0 | 0 | 1 | 0 |
1966-67 | 1부 리그 | 4 | 0 | 0 | 0 | 0 | 0 | 0 | 0 | 4 | 0 | |
1967-68 | 1부 리그 | 35 | 1 | 4 | 0 | 0 | 0 | 0 | 0 | 39 | 1 | |
1968-69 | 1부 리그 | 42 | 0 | 8 | 0 | 3 | 0 | 0 | 0 | 53 | 0 | |
1969-70 | 2부 리그 | 39 | 0 | 5 | 0 | 7 | 0 | 0 | 0 | 51 | 0 | |
1970-71 | 2부 리그 | 40 | 0 | 5 | 0 | 5 | 0 | 0 | 0 | 50 | 0 | |
1971-72 | 1부 리그 | 37 | 0 | 2 | 0 | 1 | 0 | 2 | 0 | 42 | 0 | |
1972-73 | 1부 리그 | 41 | 0 | 2 | 0 | 1 | 0 | 3 | 0 | 47 | 0 | |
1973-74 | 1부 리그 | 42 | 0 | 7 | 0 | 2 | 0 | 4 | 0 | 55 | 0 | |
1974-75 | 1부 리그 | 5 | 0 | 0 | 0 | 1 | 0 | 0 | 0 | 6 | 0 | |
합계 | 286 | 1 | 33 | 0 | 20 | 0 | 9 | 0 | 348 | 1 | ||
스토크 시티 | 1974-75 | 1부 리그 | 25 | 0 | 1 | 0 | 0 | 0 | 0 | 0 | 26 | 0 |
1975-76 | 1부 리그 | 42 | 0 | 5 | 0 | 1 | 0 | 0 | 0 | 48 | 0 | |
1976-77 | 1부 리그 | 40 | 0 | 1 | 0 | 2 | 0 | 0 | 0 | 43 | 0 | |
1977-78 | 2부 리그 | 3 | 0 | 0 | 0 | 1 | 0 | 0 | 0 | 4 | 0 | |
합계 | 110 | 0 | 7 | 0 | 4 | 0 | 0 | 0 | 121 | 0 | ||
노팅엄 포레스트 | 1977-78 | 1부 리그 | 37 | 0 | 6 | 0 | 0 | 0 | 0 | 0 | 43 | 0 |
1978-79 | 1부 리그 | 42 | 0 | 3 | 0 | 8 | 0 | 10 | 0 | 63 | 0 | |
1979-80 | 1부 리그 | 42 | 0 | 2 | 0 | 10 | 0 | 11 | 0 | 65 | 0 | |
1980-81 | 1부 리그 | 40 | 0 | 6 | 0 | 3 | 0 | 5 | 0 | 54 | 0 | |
1981-82 | 1부 리그 | 41 | 0 | 1 | 0 | 5 | 0 | 0 | 0 | 47 | 0 | |
합계 | 202 | 0 | 18 | 0 | 26 | 0 | 26 | 0 | 272 | 0 | ||
사우샘프턴 | 1982-83 | 1부 리그 | 39 | 0 | 1 | 0 | 5 | 0 | 2 | 0 | 47 | 0 |
1983-84 | 1부 리그 | 42 | 0 | 6 | 0 | 2 | 0 | 0 | 0 | 50 | 0 | |
1984-85 | 1부 리그 | 41 | 0 | 3 | 0 | 7 | 0 | 2 | 0 | 53 | 0 | |
1985-86 | 1부 리그 | 37 | 0 | 6 | 0 | 6 | 0 | 3 | 0 | 52 | 0 | |
1986-87 | 1부 리그 | 29 | 0 | 1 | 0 | 8 | 0 | 2 | 0 | 40 | 0 | |
합계 | 188 | 0 | 17 | 0 | 28 | 0 | 9 | 0 | 242 | 0 | ||
더비 카운티 | 1987-88 | 1부 리그 | 40 | 0 | 1 | 0 | 2 | 0 | 2 | 0 | 45 | 0 |
1988-89 | 1부 리그 | 38 | 0 | 3 | 0 | 3 | 0 | 3 | 0 | 47 | 0 | |
1989-90 | 1부 리그 | 35 | 0 | 2 | 0 | 5 | 0 | 2 | 0 | 44 | 0 | |
1990-91 | 1부 리그 | 31 | 0 | 1 | 0 | 5 | 0 | 1 | 0 | 38 | 0 | |
1991-92 | 2부 리그 | 31 | 0 | 3 | 0 | 3 | 0 | 0 | 0 | 37 | 0 | |
합계 | 175 | 0 | 10 | 0 | 18 | 0 | 8 | 0 | 211 | 0 | ||
플리머스 아가일 | 1991-92 | 2부 리그 | 7 | 0 | 0 | 0 | 0 | 0 | 0 | 0 | 7 | 0 |
1992-93 | 2부 리그 | 23 | 0 | 1 | 0 | 6 | 0 | 2 | 0 | 32 | 0 | |
1993-94 | 2부 리그 | 4 | 0 | 0 | 0 | 0 | 0 | 0 | 0 | 4 | 0 | |
합계 | 34 | 0 | 1 | 0 | 6 | 0 | 2 | 0 | 43 | 0 | ||
윔블던 | 1994-95 | 프리미어리그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볼턴 원더러스 | 1994-95 | 1부 리그 | 1 | 0 | 0 | 0 | 0 | 0 | 1 | 0 | 2 | 0 |
코번트리 시티 | 1995-96 | 프리미어리그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 1995-96 | 프리미어리그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레이턴 오리엔트 | 1996-97 | 3부 리그 | 9 | 0 | 1 | 0 | 0 | 0 | 0 | 0 | 10 | 0 |
커리어 합계 | 1005 | 1 | 87 | 0 | 102 | 0 | 55 | 0 | 1249 | 1 |
8.2. 국가대표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전 | 득점 |
---|---|---|---|
잉글랜드 | 1970 | 1 | 0 |
1971 | 2 | 0 | |
1972 | 2 | 0 | |
1973 | 11 | 0 | |
1974 | 4 | 0 | |
1975 | 1 | 0 | |
1976 | 0 | 0 | |
1977 | 2 | 0 | |
1978 | 3 | 0 | |
1979 | 3 | 0 | |
1980 | 4 | 0 | |
1981 | 2 | 0 | |
1982 | 10 | 0 | |
1983 | 10 | 0 | |
1984 | 11 | 0 | |
1985 | 9 | 0 | |
1986 | 13 | 0 | |
1987 | 6 | 0 | |
1988 | 8 | 0 | |
1989 | 11 | 0 | |
1990 | 12 | 0 | |
합계 | 125 | 0 |
8.3. 지도자
팀 | 시작 | 종료 | 기록 | ||||
---|---|---|---|---|---|---|---|
경기 | 승 | 무 | 패 | 승률 | |||
플리머스 아가일 | 1992년 3월 2일 | 1995년 1월 11일 | 151 | 62 | 31 | 58 | 41.1 |
합계 | 151 | 62 | 31 | 58 | 41.1 |
9. 관련 항목
- A매치 100경기 이상 출전한 축구 선수 명단
-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 노팅엄 포레스트 FC
- 디에고 마라도나
- 신의 손
- FIFA 월드컵
- UEFA 챔피언스리그
- 대영 제국 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