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만네르헤임의 출생, 성장 과정, 가족 관계, 그리고 교육 배경을 연대순으로 설명한다.
1.1. 혈통 및 가족
만네르헤임 가문은 원래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사업가이자 제분소 사장이었던 하인리히 마르하인(Heinrich Marhein독일어, 1618년 ~ 1667년)을 선조로 한다. 마르하인은 17세기에 스웨덴의 예블레로 이주하여 이름을 스웨덴식으로 헨리크 아우구스틴 마르하인(Henrik Augustin Marhein스웨덴어)으로 바꾸었다. 헨리크 마르하인의 아들 아우구스틴 마르하인은 1693년 칼 11세에 의해 귀족으로 승격될 때 성을 "만네르헤임"으로 바꾸었다. 아우구스틴 만네르헤임의 아들 요한 아우구스틴 만네르헤임은 포병 대령이자 제분소 공장장이었으며, 1768년에 남작(Vapaaherra핀란드어, Friherre스웨덴어) 작위를 받았다. 만네르헤임 가문은 18세기 후반에 당시 스웨덴 영토였던 핀란드로 이주했다. 오랫동안 헨리크 마르하인이 네덜란드에서 스웨덴으로 이주했다는 통설이 있었으나, 최근 연구 결과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만네르헤임의 증조부 칼 에리크 만네르헤임 백작(1759년 ~ 1837년)은 핀란드가 러시아령으로 편입되어 핀란드 대공국으로서 자치를 누리던 초기 시절 여러 공무원직을 역임했다. 그는 핀란드 원로원 의원이었으며, 초대 원로원 경제부 부장(현 핀란드의 총리직의 전신)을 지냈다. 1825년, 칼 에리크 만네르헤임은 백작(Kreivi핀란드어, Greve스웨덴어)으로 승격했다. 만네르헤임의 조부 칼 구스타브 만네르헤임(1797년 ~ 1854년)은 저명한 곤충학자이자 법률가였으며, 비푸리 항소재판소 재판소장을 지냈다.
만네르헤임의 부친 칼 로베르트 만네르헤임 백작(1835년 ~ 1914년)은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극작가였으며, 동시에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업가이자 경영주였다. 그는 북유럽에서 최초로 윤번 제지에 성공한 유한회사 쿠산코스키(Kuusankoski Ltd.핀란드어)의 사장이었고, 쉬스테마(Systema핀란드어)라는 회사를 통해 근대적인 사업 기계를 수입했다. 로베르트 만네르헤임 백작의 자녀들은 1914년 쉬스테마를 경영자 매수로 매각했다. 만네르헤임의 모친 헤드비히 카를로타 헬레네 폰 율린(Hedvig Charlotta Hélène von Julin독일어, 1842년 ~ 1881년)은 부유한 경영주였던 요한 야콥 폰 율린의 딸이었다. 폰 율린 가문은 피스카르스 철공소와 피스카르스 마을을 소유하고 있었다.
1.2. 어린 시절과 교육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은 1867년 6월 4일 아스카이넨 교구(현재 마스쿠)의 로우히사리 장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7남매 중 셋째였으며, 아버지의 백작 작위는 장남에게만 상속되었으므로 그는 남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의 부친은 사업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1870년대 후반에 조증과 유사한 경조성 인격장애를 앓으며 어려움에 처했다. 로베르트 만네르헤임 백작은 재무 문제에서 지나치게 낙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도박에 빠지면서 결국 1880년 파산했다. 빚을 갚기 위해 그는 로우히사리 장원을 포함한 모든 토지와 미술품을 누이에게 팔았고, 아내를 두고 애인과 함께 파리로 떠나 보헤미안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887년 헬싱키로 돌아와 쉬스테마 사를 설립하고 사망할 때까지 회사를 경영했다.
어머니 헬레네 백작부인은 파산과 남편의 외도에 충격을 받아 정신적으로 쇠약해졌고, 1881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는 수치심과 우울증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만네르헤임 가문의 7명의 자녀들은 친척들에게 맡겨져 각기 다른 곳에서 양육되었다. 만네르헤임의 외삼촌 알베르트 폰 율린(1846년 ~ 1906년)이 그의 법적 후견인이 되었고, 그의 학비를 지원했다.
집안 재정이 악화되고 만네르헤임의 진학 문제가 심각해지자 알베르트 폰 율린은 만네르헤임에게 자립할 수 있는 방법과 직업을 찾으라는 뜻에서 1882년 그를 하미나의 핀란드 사관학교에 보냈다. 사관학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군사 학교로, 귀족 가문의 소년들을 핀란드 대공국군 및 러시아 제국 육군 장교로 훈련시켰다. 만네르헤임은 187cm의 장신으로 학급 친구들보다 훨씬 컸다. 그는 곤궁한 집안 형편 때문에 절약하고 저축하는 법을 일찍이 배웠다. 그는 소액의 구매를 위해 외삼촌에게 번번이 손을 벌려야 하는 것을 수치스러워했으며, 외삼촌을 비롯한 친척들의 절약과 근검에 대한 끊임없는 설교를 들으며 자랐다. 그는 사관학교와 하미나의 좁은 사교계를 끔찍이 싫어했으며, 결국 1886년 무단 외출로 퇴학당했다.
이로써 러시아 제국군의 일부이기는 하나 핀란드의 군대인 핀란드 대공국군에 들어갈 길은 막혀 버렸다. 유일한 선택지는 러시아의 장교 훈련기관을 통해 러시아 제국군에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젊은 만네르헤임은 이 생각을 딱히 꺼리지 않았다. 본래 만네르헤임은 핀란드 사관학교 재학 시절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황립 수습기사학교에 들어가고자 했었으나, 핀란드 사관학교에서 그의 비행을 보고하는 바람에 불가능하게 되었다.
만네르헤임은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서 외삼촌의 동서 에드바르드 베르겐헤임(Edvard Bergenheim스웨덴어)과 얼마 동안 같이 지내며 그곳에서 러시아어를 배웠다. 만네르헤임은 헬싱키 사립 고등학교에 등록하여 1887년 6월 대학 입학 시험을 통과했다. 이제 사관학교 시절보다 훨씬 나은 성적표를 얻게 된 만네르헤임은 러시아 황실에 인맥이 있는 대모 알프힐드 스칼론 드 콜리그니 남작부인에게 편지를 써서 니콜라이 기병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달라고 했다. 만네르헤임의 본래 지망은 친위기사연대에 들어가는 것이었으나 친척들이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포기했다. 1887년 여름, 만네르헤임의 대모는 그를 루키아노브카의 자기 남편 집으로 초대했다. 그곳에서 만네르헤임은 러시아어 실력을 좀 더 쌓고, 추후이브의 군부대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군인을 업으로 삼고자 하는 결정을 굳혔다.
1887년 7월 말, 만네르헤임은 니콜라이 기병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자격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시험을 통과하고 1887년 9월 16일 러시아 차르에 대한 충성 맹세를 했다. 만네르헤임은 1889년 학교를 졸업했다. 성적은 10등이었는데, 본래 차석을 할 수 있었으나 술을 마시고 상급 장교와 핀란드의 자치권에 대해 싸움을 벌인 일로 미끄러졌다. 만네르헤임은 다시는 과음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기병소위로 임관하여 러시아-독일 국경지대 칼리시의 제15용기병연대 알렉산드리스키에 배속되었다.
모국어인 스웨덴어 외에도 만네르헤임은 핀란드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배웠다. 그는 또한 약간의 폴란드어, 포르투갈어, 라틴어, 중국어도 구사했다. 그러나 1887년부터 1917년까지 러시아 제국군에 복무하면서 만네르헤임은 어렸을 때 배운 핀란드어를 거의 잊어버렸고, 늦은 나이에 다시 핀란드어를 배워야 했다. 사실 만네르헤임의 핀란드어는 스웨덴식 억양이 너무 강해서 내전기 때 통역사를 의지해야 했다.
2. 군 경력
러시아 제국 육군에서의 복무 경력, 주요 전쟁 참전, 아시아 대륙 횡단 탐험, 핀란드 내전에서의 역할, 그리고 핀란드 국방군 총사령관으로서의 활동을 연대순으로 설명한다.
2.1. 러시아 제국 육군 복무

1891년 1월, 만네르헤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 폐하의 친위기사연대"로 배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187cm에 달하는 장신의 키가 이득이 되었고, 또한 덕분에 1896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때 눈에 띄는 자리에 서기도 했다. 만네르헤임은 대관식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로 회상하며, "형언할 수 없이 웅장한" 대관식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만네르헤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사교계에 잘 어울렸으나, 경제적인 부담이 따랐다. 1892년, 그의 대모 알프힐드 스칼론 드 콜리그니 백작부인의 중개로 그는 러시아-세르비아 혈통의 부유한 귀족 영애 아나스타샤 아라포바(1872년 ~ 1936년)와 결혼했다. 아나스타샤는 러시아 소장 니콜라이 아라포프의 고아가 된 딸로, 농원을 소유한 부유한 귀족이었기에 만네르헤임의 가계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들은 슬하에 아나스타시에(1893년 ~ 1978년)와 소피에(1895년 ~ 1963년) 두 딸을 두었다. 셋째 아이는 아들이었으나 사산되었다. 만네르헤임은 1902년부터 아라포바와 별거했고, 1919년 이혼했다.
만네르헤임은 1904년까지 친위기사연대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1897년부터 1903년 사이에는 황실 마료 관리 일을 맡았다. 만네르헤임은 말에 대한 전문가로, 종마와 육군에서 쓸 수 있는 군마를 구입했다. 1903년, 그는 교도대 대장으로 발령받고 기병연대 훈련소의 승마 담당 교관 중 하나가 되었다.
만네르헤임이 아내와 이혼한 뒤 그의 재정적 상황은 악화되었다. 도박에서 돈을 잃으면서 더욱 궁핍해진 만네르헤임은 우울증에 빠졌고 환경의 변화로써 이를 극복하려 했다. 그는 1904년 러일전쟁에 자원 참전했다. 1904년 10월, 그는 만주의 제52용기병연대 네진으로 배속되며 중령으로 승진했고, 1905년 봉천 전투에서의 용맹을 인정받아 대령으로 승진했다. 이후 잠시 비정규군사인 홍호자 부대를 지휘하며 내몽골 탐사 임무를 떠나기도 했다. 이 전쟁 동안 만네르헤임은 지역 산적들을 이끌고 적 후방을 교란하여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한 만네르헤임은 비밀 첩보 장교로 투르키스탄을 거쳐 베이징으로 향하는 여행을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러시아 제국 총참모장 팔리트신 대장은 청나라의 개혁과 활동에 관한 정확한 현장 첩보를 원했다. 러시아는 서부 중국 침공의 군사적 타당성을 알고 싶어했는데, 이는 중앙아시아 통제권을 놓고 영국과 벌인 "그레이트 게임"의 가능한 움직임 중 하나였다. 민족학 수집가로 위장한 그는 프랑스 고고학자 폴 펠리오의 원정에 사마르칸트(당시 러시아령 투르키스탄, 현재 우즈베키스탄령)에서 합류했다. 그들은 1906년 7월 안디잔의 트란스카스피아 철도 종점에서 출발했으나, 만네르헤임은 보급 문제로 펠리오와 다툰 뒤 원정 기간의 대부분을 혼자 다녀야 했다.


카자크 안내인, 중국어 통역사, 위구르인 요리사 등을 대동한 작은 대열을 이끌고 만네르헤임은 먼저 호탄으로 가서 영국과 일본 간첩들을 찾아냈다. 카슈가르로 돌아온 뒤, 그는 북쪽으로 향해 톈산산맥을 넘어 고갯길을 측량하고 한족에 대한 부족들의 태도를 살폈다. 만네르헤임은 신장성의 성도 우루무치에 도착한 뒤 동쪽으로 향하여 간쑤성으로 들어갔다. 산시성의 불교 성산 오대산에서 그는 달라이 라마 13세를 만났다. 그는 달라이 라마에게 권총 사용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는 만리장성을 따라갔고, 정체불명의 위구족을 조사했다. 간쑤성 성도 란저우에서 만네르헤임은 남쪽으로 길을 돌려 티베트 영토로 향하여 라브랑 사원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제노포빅 승려들에게 돌을 맞았다. 1908년 티베트 여행 중 만네르헤임은 달라이 라마를 만난 세 번째 유럽인이 되었다. 만네르헤임은 1908년 7월 베이징에 도착했으며, 일본과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했다. 그의 보고서는 청나라의 교육, 군사 개혁, 소수 민족 접경 지역의 식민화, 광업 및 산업, 철도 건설, 일본의 영향력, 아편 흡연 등 중국의 근대화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다루었다. 그는 또한 신장 침공의 가능성과 신장이 미래의 대중국 전쟁에서 협상 카드로 사용될 수 있는 역할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그의 아시아 여행은 그에게 평생 아시아 예술에 대한 사랑을 남겼으며, 이후 그는 아시아 예술품을 수집했다.
1909년 러시아로 귀환한 만네르헤임은 니콜라이 2세에게 탐험 결과를 보고했다. 그의 박물관에는 여전히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후 만네르헤임은 폴란드 입헌왕국의 제13 블라디미르 울란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그는 소장으로 진급하며 바르샤바에 주둔한 "황제 폐하의 경호친위창기병연대"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다음으로 만네르헤임은 황실 수행단의 일원이 되었고 기병 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만네르헤임은 독립친위기병여단(제23군단) 여단장으로 복무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및 루마니아 전선에서 싸웠다. 1914년 12월,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의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낸 공로로 4등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았다. 1915년 3월, 만네르헤임은 제12기병사단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만네르헤임은 1917년 초 휴가를 받아 핀란드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들렀다가 2월 혁명이 발발하는 순간을 목격했다. 전선으로 귀환한 뒤 만네르헤임은 1917년 4월 중장으로 승진했고(승진은 1915년 2월로 소급 적용되었다), 1917년 여름 제6기병군단 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만네르헤임은 혁명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간주한 새 정부의 불만을 사게 되었고, 결국 직위에서 해제되었다. 그는 퇴역하여 핀란드로 돌아왔다. 만네르헤임은 사망할 때까지 헬싱키 자택 거실에 니콜라이 2세의 대형 초상화를 걸어두었으며, 로마노프가 전복된 후에도 왜 초상화를 걸어두느냐는 질문에 항상 "그는 나의 황제였다"고 답했다.
2.2. 핀란드 내전에서의 역할

1917년 12월, 핀란드는 독립을 선언했으며, 이는 10월 혁명으로 임시 정부를 전복시킨 볼셰비키가 통치하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소련은 핀란드를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독립을 인정했으며, 또한 핀란드에서 러시아 혁명과 유사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핀란드 의회는 패르 에빈드 스빈후부드를 새로 독립한 대공국의 섭정 정부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1918년 1월, 군사 위원회는 당시 지역적으로 조직된 백위대에 불과했던 핀란드군을 강화하는 임무를 맡았다. 만네르헤임은 이 위원회에 임명되었으나, 곧 위원회의 우유부단함에 항의하며 사임했다. 1월 13일, 그는 군대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당시 그에게는 갓 입대한 24,000명의 병력만이 있었으며, 대부분 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공산주의 지도자 쿨레르보 만네르가 이끄는 핀란드 적위대는 30,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을 받았으며, 핀란드에는 70,000명의 적군 러시아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만네르헤임의 군대는 은행가들이 제공한 1500.00 만 FIM의 신용 대출로 재정을 조달했으며, 그의 신병들은 무기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병력을 이끌고 42,500명의 적군 러시아 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바사로 진군했다. 그는 대규모 병력으로 러시아 주둔군을 포위했고, 방어군은 최전방 병력만이 무장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항복하여 절실히 필요한 무기를 제공했다. 추가 무기는 독일에서 구매되었다. 84명의 스웨덴 장교와 200명의 스웨덴 부사관이 핀란드 내전(백군 사이에서는 자유 전쟁으로 알려짐)에 참전했다. 다른 장교들은 독일에서 예거 대대로 훈련받은 핀란드인들이었다. 1918년 3월, 이들은 핀란드에 상륙하여 헬싱키를 점령한 독일군의 지원을 받았다.
피비린내 나는 핀란드 내전에서 백군이 승리한 후, 만네르헤임은 총사령관직을 사임했다. 그는 1918년 6월 친척들을 방문하기 위해 핀란드를 떠나 스웨덴으로 갔다. 스톡홀름에서 만네르헤임은 연합국 외교관들과 회담하며 핀란드 정부의 정책에 대한 자신의 반대 입장을 강조했다. 핀란드 지도자들은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프리드리히 카를 폰 헤센 공자를 핀란드 국왕으로 선언한 상태였다. 한편 스빈후부드는 신생 왕국의 초대 섭정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만네르헤임과 연합국과의 관계는 1918년 10월 핀란드 정부가 그를 영국과 프랑스로 보내 핀란드 독립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인정을 받으려 했을 때 인정받았다. 12월, 그는 핀란드로 소환되었는데, 프리드리히 카를이 왕위를 포기했고, 그 대신 만네르헤임이 섭정으로 선출되었다. 섭정으로서 만네르헤임은 종종 자신의 세례명인 구스타프의 핀란드어 형태인 쿠스타(Kustaa)를 사용하여 공식 문서에 서명했는데, 이는 러시아군에서의 배경과 핀란드어 사용의 어려움 때문에 그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핀란드인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만네르헤임은 자신의 마지막 세례명인 에밀을 싫어하여 C. G. 만네르헤임 또는 단순히 만네르헤임으로 서명했다.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서는 구스타프라고 불렸다.
만네르헤임은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핀란드 독립을 인정받았다. 1919년 7월, 그가 새로운 공화주의 헌법을 확정한 후, 만네르헤임은 의회가 선거인단이 되는 초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국민연합당과 스웨덴 인민당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에게 2위를 차지하며 패배했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2.3. 핀란드 국방군 총사령관

핀란드 국방위원회 의장으로서 만네르헤임은 처음부터 소련과의 전쟁에 반대했다. 소련이 핀란드에게 영토 할양을 요구했을 때, 그는 핀란드군이 소련의 공격을 격퇴할 만큼 강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핀란드 정부가 이 요구를 수용할 것을 권고했다. 1939년 소련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임박한 전쟁을 인지하고 군대의 장비와 준비 부족을 한탄하며 만네르헤임은 1939년 10월 17일 군사 위원회에서 사임했다. 그는 핀란드군 총사령관으로만 복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1939년 11월 30일 소련의 공격 이후 72세의 나이로 공식적으로 군대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딸 소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나는 총사령관의 책임을 맡고 싶지 않았다. 나의 나이와 건강이 그것을 허락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공화국 대통령과 정부의 호소에 응할 수밖에 없었고, 이제 네 번째로 나는 전쟁 중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전쟁이 시작된 날 국방군에게 종종 논란이 되는 첫 번째 일일 명령을 내렸다.
"공화국 대통령은 1939년 11월 30일 나를 이 나라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핀란드의 용감한 병사들이여! 나는 우리의 오랜 적이 다시 우리 나라를 공격하는 시점에 이 임무를 맡는다. 지휘관에 대한 신뢰는 성공의 첫 번째 조건이다. 그대들은 나를 알고 나도 그대들을 알며, 모든 계급의 병사들이 죽음까지도 자신의 의무를 다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안다. 이 전쟁은 우리의 독립 전쟁의 연속이자 마지막 행동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 우리의 신념, 그리고 우리의 나라를 위해 싸운다."
그들이 방어했던 야전 요새는 만네르헤임선으로 알려졌다.
육군 원수 만네르헤임은 미켈리에 신속하게 사령부를 조직했다. 그의 참모장은 악셀 아이로 중장이었고, 그의 친한 친구인 루돌프 발덴 장군은 1939년 12월 3일부터 1940년 3월 27일까지 사령부 대표로 내각에 파견되었고, 그 후 국방부 장관이 되었다.
만네르헤임은 겨울 전쟁과 계속 전쟁의 대부분을 미켈리 사령부에서 보냈지만, 전선을 여러 번 방문했다. 전쟁 사이 기간에도 그는 총사령관직을 유지했다. 만네르헤임의 주된 임무는 전쟁을 지휘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또한 병사들의 전투 의지를 강화하고 유지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인용문으로 유명하다.
"요새, 대포, 그리고 외국의 원조는 모든 병사 자신이 자신의 나라를 지키는 파수꾼임을 알지 못한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만네르헤임은 아돌프 히틀러 정부와의 관계를 가능한 한 형식적으로 유지했다. 만네르헤임은 히틀러를 실제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으며, 비록 처음에는 그의 권력 장악에 관심을 표명했지만, 만네르헤임이 독일을 방문하여 히틀러가 어떤 종류의 "이상 국가"를 건설하고 있는지 깨달았을 때 히틀러에 대한 그의 태도는 부정적으로 변했다. 그는 독일에서 히틀러의 부상을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의 부상과 비교했다. 계속 전쟁 이전에 독일은 만네르헤임에게 핀란드 주둔 독일군 8만 명에 대한 지휘권을 제안했다. 만네르헤임은 자신과 핀란드를 나치의 전쟁 목표에 묶어두지 않기 위해 이를 거절했다. 만네르헤임은 소련의 위협 때문에 이념적인 이유보다는 실용적인 이유로 히틀러의 독일과 협력하고 형제애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41년 7월, 핀란드 카렐리아군은 독일 제163보병사단에 의해 강화되었다. 그들은 겨울 전쟁 이후 소련에 합병된 핀란드 영토를 되찾았고, 더 나아가 동카렐리야를 점령했다. 핀란드군은 872일간 지속된 레닌그라드 공방전에 참여했다.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윈스턴 처칠에게 핀란드에 대한 선전포고를 압박했는데, 이는 처칠에게 특히 어려운 결정이었다. 처칠은 선전포고를 미루고 만네르헤임에게 개인적인 서한을 보내 과거 만남을 상기시키며 임박한 선전포고에 대해 경고했다. 만네르헤임은 처칠의 배려에 감사하며 자신의 임무가 핀란드의 안보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1942년 6월 20일, 만네르헤임은 포벤네츠에서 핀란드 최전선 부대를 시찰하던 중 그의 참모진과 함께 소련의 대전차포의 직접 사격을 받았다. 한 포탄이 만네르헤임 근처에서 폭발했고, 만네르헤임은 참호나 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핀란드군의 대포병 사격이 공격자를 무력화시켰다. 시찰 중이던 아흐티 페트라마아 대위는 파편에 손가락을 잃었고, 구호소로 후송되어 만네르헤임에 의해 소령으로 진급했다.
만네르헤임의 75세 생일인 1942년 6월 4일은 국가적인 축하 행사였다. 정부는 그에게 유일무이한 핀란드의 원수(Suomen Marsalkka핀란드어, Marskalk av Finland스웨덴어) 칭호를 수여했다. 현재까지 이 칭호를 받은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히틀러의 깜짝 생일 방문은 그가 "용감한 핀란드인들(die tapferen Finnen독일어)"과 그들의 지도자 만네르헤임을 방문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만네르헤임은 자신의 사령부나 헬싱키에서 그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하면 공식적인 국빈 방문처럼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회동은 핀란드 남동부 이마트라 근처에서 비밀리에 준비되었다. 임몰라 비행장에서 히틀러는 뤼티 대통령과 함께 만네르헤임이 기다리고 있는 철도 측선으로 이동했다. 히틀러의 연설 후 생일 식사와 그와 만네르헤임 간의 협상이 이어졌다. 전반적으로 히틀러는 핀란드에서 약 5시간을 보냈으며, 핀란드인들에게 소련에 대한 군사 작전을 강화할 것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구체적인 요구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방문 중 핀란드 방송국 YLE의 엔지니어 토르 다멘(Thor Damen핀란드어)은 히틀러와 만네르헤임의 사적인 대화 중 처음 11분을 녹음하는 데 성공했다. 히틀러는 비공식적인 녹음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했다. 다멘은 공식 생일 연설과 만네르헤임의 답변을 녹음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이를 위해 일부 열차 객차에 마이크를 설치했다. 그러나 만네르헤임과 그의 손님들은 마이크가 없는 객차로 이동하기로 했다. 다멘은 신속하게 행동하여 마이크를 객차 창문을 통해 히틀러와 만네르헤임이 앉아 있는 곳 바로 위 선반에 밀어 넣었다. 히틀러와 만네르헤임의 사적인 대화가 11분간 지속된 후, 히틀러의 SS 경호원들이 창문 밖으로 전선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핀란드 엔지니어가 대화를 녹음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들은 즉시 녹음을 중단하라는 손짓을 보냈고, 다멘은 이에 따랐다. SS 경호원들은 테이프를 파기할 것을 요구했지만, YLE는 봉인된 용기에 보관하겠다고 약속한 후 릴을 보관할 수 있었다. 이 테이프는 국가 검열관 쿠스타 빌쿠나(Kustaa Vilkuna핀란드어)에게 넘어갔다가 1957년 YLE로 반환되었고, 몇 년 후 대중에 공개되었다. 이 녹음은 히틀러가 공식적인 자리 외에서 말하는 것이 기록된 유일한 자료이다.
히틀러와의 대화 중 만네르헤임이 시가에 불을 붙였다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만네르헤임은 히틀러가 핀란드에게 소련에 대한 더 많은 도움을 요청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만네르헤임은 이를 원하지 않았다. 만네르헤임이 시가에 불을 붙이자, 히틀러의 흡연 혐오는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참석자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침착하게 대화를 계속했으며,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 시험을 통해 만네르헤임은 히틀러가 강한 위치에서 말하는지 약한 위치에서 말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었다. 그는 히틀러가 약한 위치에 있음을 알고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었다. 얼마 후 만네르헤임은 동프로이센에 있는 히틀러의 사령부를 방문하여 답방했다.
2.4. 군 계급 및 보직
만네르헤임은 러시아 제국 육군과 핀란드 국방군에서 복무하며 다음과 같은 군사 계급과 주요 보직을 획득했다.
계급 | 소속 | 연도 |
---|---|---|
부사관 | 러시아 제국 육군 | 1888년 |
기병소위 | 러시아 제국 육군 | 1889년 |
친위기병소위 | 러시아 제국 육군 | 1891년 |
친위중위 | 러시아 제국 육군 | 1893년 |
친위대위 | 러시아 제국 육군 | 1902년 |
중령 | 러시아 제국 육군 | 1904년 |
대령 | 러시아 제국 육군 | 1905년 |
소장 | 러시아 제국 육군 | 1911년 |
중장 | 러시아 제국 육군 | 1917년 |
기병대장 | 핀란드 방위군 | 1918년 |
육군 원수 | 핀란드 방위군 | 1933년 |
핀란드의 원수 | 핀란드 방위군 | 1942년 |
보직 | 소속 | 기간 |
---|---|---|
제15용기병연대 "알렉산드리스키" | 러시아 제국 육군 | 1889년 ~ 1891년 |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 폐하의 친위기사대 | 러시아 제국 육군 | 1891년 ~ 1904년 |
황실 마료 관리 | 러시아 제국 육군 | 1897년 ~ 1903년 |
기병학교 교도대 대장 | 러시아 제국 육군 | 1903년 ~ 1904년 |
제52용기병연대 "네진" | 러시아 제국 육군 | 1904년 ~ 1909년 |
제13울란 연대장 | 러시아 제국 육군 | 1909년 |
황제 폐하의 경호친위창기병연대 연대장 | 러시아 제국 육군 | 1911년 |
독립친위기병여단 여단장 | 러시아 제국 육군 | 1913년 |
제12기병사단 사단장 | 러시아 제국 육군 | 1917년 |
제6기병군단 군단장 | 러시아 제국 육군 | 1917년 |
백위대 총사령관 | 핀란드 방위군 | 1918년 1월 ~ 1918년 5월 |
핀란드 방위군 최고사령관 | 핀란드 방위군 | 1918년 12월 ~ 1919년 7월 |
국방평의회 의장 | 핀란드 방위군 | 1931년 ~ 1939년 |
핀란드 방위군 총사령관 | 핀란드 방위군 | 1939년 ~ 1946년 |
3. 정치 경력
핀란드 섭정으로서의 활동, 전간기의 다양한 사회 활동, 그리고 대통령으로서의 재임 기간 동안의 주요 업적과 도전을 설명한다.
3.1. 핀란드 섭정

내전 이후 백군의 승리를 이끈 만네르헤임은 1918년 6월 총사령관직을 사임하고 스웨덴으로 떠났다. 스웨덴에서 그는 연합국 외교관들과 만나 핀란드 정부의 친독일 정책에 반대하고 연합국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1918년 10월, 핀란드 정부는 그를 영국과 프랑스로 보내 핀란드 독립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인정을 받도록 했다. 12월, 그는 핀란드로 소환되어 핀란드의 임시 섭정(Valtionhoitaja핀란드어; Riksföreståndare스웨덴어)으로 선출되었다. 섭정으로서 만네르헤임은 종종 자신의 세례명인 구스타프의 핀란드어 형태인 쿠스타(Kustaa)를 사용하여 공식 문서에 서명했는데, 이는 러시아군에서의 배경과 핀란드어 사용의 어려움 때문에 그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핀란드인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만네르헤임은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핀란드 독립을 인정받았다. 1919년 7월, 그는 새로 제정된 공화주의 헌법을 승인하고 초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국민연합당과 스웨덴 인민당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의회에서 이루어진 간접 선거의 결과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에게 패배했고, 만네르헤임은 공직에서 물러났다.
3.2. 전간기 활동

전간기 동안 만네르헤임은 아무런 공직도 맡지 못했다. 이는 그가 볼셰비키에 공공연한 반대를 표출함으로써 논쟁적 인물이 된 상태에서 중앙 정계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는 러시아 내전에 핀란드가 백군의 편을 들어 참전하기를 원했고, 핀란드의 사회주의자들은 그를 적대했다. 그들은 만네르헤임을 "부르주아"나 "백군의 장군"으로 보았다. 만네르헤임은 현대의 정당 기반 정치가 핀란드나 다른 곳에서 원칙적이고 수준 높은 지도자를 배출할 수 있는지 의문을 품었다. 그의 비관적인 견해로는 조국의 이익이 종종 민주주의 정치인들에 의해 당파적 이익을 위해 희생되었다.
공직을 맡지 못하게 된 만네르헤임은 대신 인도주의 활동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핀란드 적십자사에 들어갔고(1919년 ~ 1951년까지 총재 역임), 국제적십자사 위원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 뒤에는 만네르헤임 아동 복지 연맹(Mannerheimin Lastensuojeluliitto핀란드어)을 설립했다. 그는 또한 상업은행인 리토팡키 연합은행(Liittopankki-Unionsbanken핀란드어)의 감사회 회장직을 맡다가, 리토팡키 은행이 헬싱키 은행에 합병되자 헬싱키 은행 감사회로 옮겨가서 1934년까지 회장을 지냈다. 또한 만네르헤임은 노키아 이사회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는 리프 전쟁(1925년 ~ 1926년)에서 프랑스 외인부대에 복무할 것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사이에는 아시아로 가서 열정적으로 여행과 수렵을 다녔다. 1927년의 첫 수렵여행 때는 소련 영토를 피하기 위해 런던에서 뭄바이로 배를 타고 갔다가, 거기서 육상으로 버마까지 갔다. 그는 양곤과 만달레이에서 한 달을 보냈다. 그는 이어서 시킴으로 갔다가 자동차와 비행기로 핀란드로 돌아왔다.

두 번째 여행은 1936년이었다. 그는 아덴(남아라비아의 영국 영토)에서 뭄바이로 배를 타고 갔다. 인도에 머무는 동안 만네르헤임은 유럽에서 온 많은 옛 친구들과 지인들을 만났다. 여행과 사냥 원정 중 그는 마드라스, 델리, 네팔을 방문했다. 네팔에 갔을 때는 라나 총리 틴 마하라자 경 주다 슘셰르 장 바하두르 라나에게 호랑이 사냥 초대를 받기도 했다. 같은 해, 만네르헤임은 영국을 개인적으로 방문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경호원들의 동행을 받았다. 이 경호원들은 윈스턴 처칠 총리가 직접 만네르헤임에게 제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만네르헤임은 경호원들의 존재에 불편함을 느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가 기본적으로 운명론자로서 불시에 죽음이 찾아와야 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으며, 또한 자신의 권위를 강력히 신뢰했기 때문이다. 1936년, 만네르헤임은 영국 조지 5세 국왕의 장례식에 핀란드 정부 대표로 참석했다.
1929년, 만네르헤임은 극우 급진주의자들의 사실상 군사 독재자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거부했지만, 라푸아 운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지를 표명했다. 1931년 패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대통령이 당선된 후, 그는 만네르헤임을 핀란드 국방위원회 의장으로 임명하고 전쟁 시 그가 핀란드군 총사령관이 될 것이라는 서면 약속을 주었다. (스빈후부드의 후임인 퀴외스티 칼리오는 1937년 이 약속을 갱신했다.) 1933년, 만네르헤임은 육군 원수(sotamarsalkka핀란드어, fältmarskalk스웨덴어) 계급을 받았다. 이 무렵 만네르헤임은 일부 전 사회주의자들을 포함한 대중에게 "백군 장군"이라기보다는 비당파적인 인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는 내전의 반대편 간의 화해와 국가적 통합 및 국방에 집중할 필요성을 촉구하는 그의 공개적인 발언, 즉 "우리는 어떤 사람이 15년 전에 어디에 서 있었는지 물을 필요가 없다"는 말로 더욱 강화되었다. 만네르헤임은 핀란드의 군수 산업을 지원했고, 스웨덴과의 군사 방위 동맹을 얻으려 했으나 헛수고였다. 그러나 핀란드군의 재무장은 그가 희망했던 만큼 신속하거나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는 전쟁에 대해 열정적이지 않았다. 그는 여러 내각과 많은 의견 불일치를 겪었으며, 여러 차례 사직서에 서명했다.
1920년 암살 시도가 있었다. 내전에서 패배한 일부 적위대원들이 만네르헤임을 암살하려 했다. 암살 시도자 중 한 명인 에이노 라흐야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 적군 장교 학교의 책임자였다. 그는 이를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8개 그룹의 핀란드 적위대원을 모아 암살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 시도는 1920년 4월 탐페레의 해메카투에서 열린 백위대 퍼레이드 중에 일어났는데, 만네르헤임 장군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룹은 4월 3일 해메카투의 파크 카페에 모였고, 이 단계에서 그룹 멤버 칼 살로가 사격수로 지정되어 콜트 권총을 받았다. 그러나 살로의 망설임으로 암살 시도는 실패했다. 군중 속에서 살로의 경호 임무를 맡았던 알렉산더르 베크만과 알렉산테리 수오카스는 발터와 콜트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살로를 놓쳐 만네르헤임을 쏠 시간이 없었다.
4월 6일, 작전 책임자 베크만은 살로가 일주일 안에 만네르헤임이나 전쟁 장관이자 우시마 주지사인 브루노 잘란데르를 암살하지 않으면 살로를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이 시도 또한 실패했는데, 당국이 정보를 입수하여 만네르헤임과 잘란데르가 헬싱키 보수당 축하 행사에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로는 권총을 반납하고 도주했다. 베크만과 수오카스는 두 명의 조수와 함께 소련으로 도주하려 했으나, 4월 21일 밤 헬싱키-비보르크 열차에서 체포되었다. 살로는 4월 23일 에스포에서 체포되었다.
3.3. 핀란드 대통령 재임

1944년 6월, 만네르헤임 남작은 소련의 대규모 공세가 핀란드를 위협하는 동안 독일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요구하는 협정에 동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도 만네르헤임은 협정으로부터 거리를 두려 했고, 협정에 서명하는 일은 리스토 뤼티 대통령에게 맡겨졌다. 그래서 이 협정은 뤼티-리벤트로프 협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만네르헤임은 1944년 8월 초 뤼티 대통령의 사임과 함께 협정을 철회할 수 있게 되었다. 만네르헤임은 뤼티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독일이 충분히 약화되고, 6월의 독일과의 협정 덕분에 소련의 여름 공세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탈리-이한탈라 전투 참조), 핀란드 지도자들은 소련과 평화를 이룰 기회를 보았다. 처음에는 만네르헤임에게 총리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나이와 민간 정부 운영 경험 부족을 이유로 거절했다. 다음 제안은 그를 국가원수로 선출하는 것이었다. 리스토 뤼티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의회가 만네르헤임을 섭정으로 임명하는 계획이었다. '섭정'이라는 칭호는 만네르헤임의 선출이 예외적인 상황임을 반영했을 것이다. 만네르헤임과 뤼티 모두 동의했고, 뤼티는 8월 1일 사임 통보를 제출했다. 핀란드 의회는 1944년 8월 4일 특별법을 통과시켜 만네르헤임에게 대통령직을 부여했다. 그는 같은 날 취임 선서를 했다.

만네르헤임이 취임한 지 한 달 후, 계속 전쟁은 가혹한 조건으로 종결되었지만, 결국 소련과 접경한 다른 국가들에 부과된 조건보다는 훨씬 덜 가혹했다. 핀란드는 주권, 의회 민주주의, 그리고 시장 경제를 유지했다. 영토 손실은 상당했다. 카렐리야의 일부와 페차모 전역이 상실되었다. 수많은 카렐리야 난민들이 재정착해야 했다. 전쟁 배상금은 매우 막대했다. 핀란드는 또한 북부에서 후퇴하는 독일군에 맞서 라플란드 전쟁을 치러야 했으며, 동시에 자체 군대를 해산해야 했기 때문에 독일군을 축출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만네르헤임은 얄마르 실라스부오 중장을 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이 작전을 수행하게 했다. 핀란드 국민들이 휴전의 가혹한 조건, 소련이 지배하는 연합국 통제위원회의 이행 요구, 그리고 전후 재건이라는 과제를 받아들여야 했던 이 어려운 시기를 만네르헤임만이 핀란드를 이끌 수 있었다는 데 널리 동의한다.
소련의 요구를 수용하기 전에 만네르헤임은 히틀러에게 직접 서한을 썼다.
"우리 독일인 전우들은 영원히 우리의 마음 속에 남아있을 거요. 핀란드의 독일군은 외세의 폭정의 대변자가 아니라 도와주는 이들이었고 또 전우들이었음이 확실하오. 그러나 그런 경우일지라도 외국인이란 요령을 요구하는 어려운 위치에 놓이게 되오. 과거 몇 년간 독일군을 침입자나 압제자라고 여길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일어나지 않았음을 장담할 수 있소. 북핀란드의 독일군이 그 지역 인구와 기관에 대해 가질 태도가 올바르고 화목한 특이사례로 역사에 남기를 바라오 ... 나는 나의 민중들을 앞장서서 전쟁으로부터 데리고 나오는 것을 나의 의무라고 여기고 있소. 그대가 관대하게도 베풀어준 무기들을 독일을 향해 돌릴 수도 없고 돌리지도 않을 거요. 나는 그대가 설사 나의 태도에 불쾌하였다 하더라도, 나를 비롯한 다른 핀인들이 우리의 과거 관계를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고 청산하는 것을 그대도 바라고 또 노력해주길 바랄 뿐이오."

만네르헤임의 대통령 임기는 그에게 힘겨웠다. 비록 그는 완전한 6년 임기로 선출되었지만, 1944년에 이미 77세였고 마지못해 직책을 수락한 것이었다. 잦은 건강 문제, 연합국 통제위원회의 요구, 그리고 핀란드 전쟁 책임 재판으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대통령 재임 기간 대부분 동안 위원회가 자신을 평화에 반한 죄로 기소할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만네르헤임 원수에 대해 존경과 감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1947년 모스크바에서 핀란드 대표단에게 핀란드인들은 그들의 늙은 원수에게 많은 빚을 졌다고 말했다. 만네르헤임 덕분에 핀란드는 점령되지 않았다. 만네르헤임은 통제위원회의 일부 요구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핀란드의 휴전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는 또한 전쟁 후 핀란드 재건 작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만네르헤임은 1945년 내내 반복되는 건강 문제로 고통받았고, 그해 11월부터 1946년 2월까지 대통령 직무에서 의료 휴가를 냈다. 그는 건강 회복을 위해 포르투갈에서 6주를 보냈다. 2월 전쟁 범죄 재판의 판결이 발표된 후, 만네르헤임은 사임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자신이 선출되어 수행해야 할 임무를 완수했다고 믿었다. 전쟁은 끝났고, 휴전 의무는 이행되었으며, 전쟁 책임 재판도 마무리되었다.
만네르헤임은 건강 악화와 자신이 수행해야 할 임무를 완수했다는 판단을 이유로 1946년 3월 4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그는 보수 성향의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총리에 의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4. 개인 생활
만네르헤임의 결혼 생활, 자녀, 그리고 공개된 개인적인 삶의 단면들을 소개한다.
4.1. 결혼과 딸들

1892년, 만네르헤임은 러시아-세르비아 혈통의 부유한 귀족 아나스타샤 아라포바(1872년 ~ 1936년)와 결혼했다. 그들은 슬하에 아나스타시에("스타시에", 1893년 ~ 1978년)와 소피아("소피", 1895년 ~ 1963년) 두 딸을 두었다. 아나스타시에는 나중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런던에서 가르멜회 수녀가 되었다. 만네르헤임과 아나스타샤 부부는 1902년에 별거에 들어갔고, 1919년에 이혼했다.
5. 사상 및 철학
만네르헤임의 국가 방위와 통합에 대한 실용적인 접근 방식, 정치적 신념, 그리고 리더십 철학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5.1. 통치 및 국가 통합에 대한 견해
전간기 동안 만네르헤임은 공직을 맡지 못했다. 이는 그가 볼셰비키에 공공연한 반대 때문에 논쟁적인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러시아 내전에 핀란드가 백군 편으로 개입하기를 원했으며, 핀란드의 사회주의자들은 그를 적대했다. 그들은 만네르헤임을 "부르주아"이자 "백군 장군"으로 보았다. 만네르헤임은 현대의 정당 기반 정치가 핀란드나 다른 곳에서 원칙적이고 유능한 지도자를 배출할 수 있는지 의문을 품었다. 그의 비관적인 견해에 따르면, 조국의 이익은 종종 민주주의 정치인들에 의해 당파적 이익을 위해 희생되었다.
그는 문민통제 원칙을 따르는 군인이었지만, 핀란드의 핵심 인물이었다. 특히 중요한 문제는 언제 소련과 평화 협정을 맺을 것인가였다. 너무 이르면 독일의 보복적인 예방 점령을 초래할 수 있고, 너무 늦으면 소련에 핀란드가 점령될 수 있었다. 1942년 소련의 우위가 명확해지자, 국가의 주권을 지키고 평화로 이끌기 위해 만네르헤임은 군사력을 비축했다.
6. 사망 및 말년
대통령직 사임 후의 삶, 회고록 집필 과정, 그리고 사망 및 장례 절차를 설명한다.
6.1. 퇴직과 회고록

대통령직에서 사임한 후, 만네르헤임 원수는 로햐의 키르크니에미 장원을 구입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다. 1946년 6월, 그는 소화성 궤양 수술을 받았고, 같은 해 10월에는 십이지장 궤양 진단을 받았다. 1947년 초, 그는 건강을 회복하고 회고록을 집필할 겸 스위스 몽트뢰의 발몽 요양원으로 여행할 것을 권유받았다. 발몽은 만네르헤임이 남은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주요 거주지가 되었지만, 그는 정기적으로 핀란드로 돌아왔고, 스웨덴, 프랑스, 이탈리아도 방문했다.
만네르헤임은 나이가 많고 병약했기 때문에 회고록의 일부만을 직접 쓸 수 있었다. 그는 다른 부분들을 구술했다. 나머지 부분들은 만네르헤임의 다양한 조수들, 예를 들어 알라다르 파소넨 대령, 에리크 하인리히스 장군, 그란델 및 올레니우스, 마르톨라 장군, 그리고 전쟁 역사가인 빌랴넨 대령 등에 의해 그의 회상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만네르헤임은 읽을 수 있는 동안은 회고록의 타이핑된 초안을 직접 교정했다. 그는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완전히 침묵했으며, 대신 핀란드의 역사, 특히 1917년에서 1944년 사이의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1951년 1월, 만네르헤임이 치명적인 장 폐쇄로 고통받았을 때, 그의 회고록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회고록은 그의 사망 후에 출판되었다.
6.2. 사망 및 장례
만네르헤임은 1951년 1월 27일(핀란드 시간으로는 1월 28일) 스위스 로잔의 칸톤 병원(현 로잔 대학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1951년 2월 4일 헬싱키의 히에타니에미 묘지에 모든 군사적 예우를 갖춘 국장으로 매장되었다.
7. 유산과 평가
핀란드 국민으로서의 위상, 국가 독립과 발전에 끼친 영향,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비판, 그리고 기념 사업들을 종합적으로 다룬다.
7.1. 국가적 영웅 및 "핀란드의 아버지"

오늘날 만네르헤임은 핀란드의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서 존경을 받고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가 당파적 정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비록 그의 성향은 좌파보다는 우파에 가까웠지만), 이기적인 동기 없이 항상 조국을 위해 봉사했다고 주장한 점, 최전선을 방문하는 개인적인 용기, 70대 후반까지도 부지런히 일할 수 있었던 능력, 그리고 소련의 핀란드 침공이 발생하기 수년 전부터 이에 대비한 외교적 선견지명 때문일 수 있다. 핀란드가 계속 전쟁 동안 나치 독일과 함께 싸웠고 따라서 추축국과 협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의 여러 지도자들은 여전히 만네르헤임을 존경했다. 이들 중에는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도 포함되었다. 2017년 런던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전쟁 역사가 테리 차먼은 스탈린의 요구에 따라 처칠이 핀란드에 선전포고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말했다. 이는 처칠과 만네르헤임 간에 이전에 복잡하지 않은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처칠과 만네르헤임은 서로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에 대해 정중하고 사과하는 서신을 교환했다.
만네르헤임의 생일인 6월 4일은 핀란드 방위군의 국기일로 기념된다. 이 결정은 1942년 그의 75세 생일을 맞아 핀란드 정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때 그는 핀란드의 원수 칭호도 받았다. 국기일은 국가 퍼레이드와 국방군 장병에 대한 포상 및 승진으로 기념된다. 만네르헤임의 삶과 시대는 만네르헤임 박물관에 기념되어 있다. 핀란드 수도의 가장 유명한 대로인 만네르헤임로는 이미 그의 생전에 원수를 기려 이름이 바뀌었다. 이 도로를 따라 캄피 지구에는 그를 기려 이름 붙여진 호텔 마르스키가 있다. 만네르헤임의 옛 사냥 오두막이자 휴식처로 "원수의 오두막"(Marskin Maja핀란드어)으로 알려진 곳은 현재 박물관이자 레스토랑으로 사용되며, 핀란드 로피의 푸넬리아 호수 기슭에 위치해 있다.

핀란드 전역의 여러 랜드마크들이 만네르헤임을 기리고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헬싱키 만네르헤임로에 위치한 만네르헤임 원수 기마상으로, 현대미술관 키아스마 앞에 세워져 있다. 투르쿠와 세이내요키의 만네르헤임 공원에도 그의 동상이 있다. 탐페레의 만네르헤임 동상은 내전 승리 장군인 백군 총사령관을 묘사하고 있으며, 도시 외곽 몇 킬로미터 떨어진 숲 속에 설치되었다(이는 만네르헤임의 내전 역할에 대한 지속적인 논란 때문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미켈리와 라흐티에 동상이 세워졌다. 2004년 12월 5일, 만네르헤임은 수우레트 수오말라이세트("위대한 핀란드인들") 콘테스트에서 역대 가장 위대한 핀란드인으로 선정되었다.
1937년부터 1967년까지 최소 5종의 핀란드 우표 또는 우표 시리즈가 만네르헤임을 기려 발행되었다. 1960년에는 미국이 마하트마 간디와 시몬 볼리바르와 같은 다른 저명한 인물들을 포함하는 자유의 옹호자 시리즈의 일부로, 만네르헤임을 "핀란드의 해방자"로 기려 일반 1등 국내 및 국제 우표(당시 각각 4 USD 및 8 USD)를 발행했다.
만네르헤임은 일마리 투리야의 1966년 연극과 1970년 영화 각색작 사령부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연극과 영화 모두에서 만네르헤임은 요엘 린네가 연기했다. 만네르헤임은 또한 2001년 벨리-마티 사이코넨이 감독한 텔레비전 영화 1940년 8월의 권력 게임에서 아스코 사르콜라가 연기했다.
7.2. 핀란드 사회에 미친 영향
만네르헤임은 핀란드의 독립을 수립하고 보존하는 데 있어 비할 데 없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핀란드와 전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오랫동안 현대 핀란드의 아버지로 불려왔으며, 뉴욕 타임스는 헬싱키의 만네르헤임 박물관을 "국민적 성지에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묘사했다. 그의 리더십은 핀란드가 소련의 점령을 피하고 주권, 의회 민주주의, 시장 경제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7.3. 비판과 논란
만네르헤임은 전간기 동안 많은 중도 및 좌파 정치인들에게 논란의 인물로 여겨졌다. 이는 그가 볼셰비키에 대한 가차 없는 투쟁을 벌였고, 러시아 내전에서 핀란드가 백군 편에 개입하기를 원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핀란드 사회주의자들은 그를 부르주아 "백군 장군"으로 보며 반감을 가졌다. 만네르헤임은 현대의 정당 기반 정치가 핀란드나 다른 곳에서 원칙적이고 유능한 지도자를 배출할 수 있는지 의문을 품었다. 그의 비관적인 견해에 따르면, 조국의 이익은 종종 민주주의 정치인들에 의해 당파적 이익을 위해 희생되었다.
만네르헤임의 핀란드 최고사령관으로서의 전시에 대한 평가는 간단하지 않다. 오늘날에도 만네르헤임의 큰 명성에 맞서 전쟁 중 지휘 내용이 거의 국가 반역에 가깝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이러한 비판은 주로 소련이나 핀란드의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나온다. 아마도 가장 간단한 방법은 만네르헤임의 역할을 정치인과 군사령관의 두 가지로 나누는 것일 것이다.
군사령관으로서 만네르헤임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그의 지도 아래 핀란드 방위군은 핀란드를 소련의 점령으로부터 지켜냈다. 만네르헤임은 병사들의 생명을 낭비하지 않도록 주의했고, 불필요한 위험을 피했다. 아마도 그의 가장 큰 단점은 사람을 통해 보고를 듣는 것을 싫어했다는 점이다. 악셀 아이로와 같은 많은 유능한 부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총사령부의 부서 책임자들이 만네르헤임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에, 참모총장인 보병 대장 에리크 하인리히스는 역할이 거의 없었다. 만네르헤임은 업무에 압도되었고, 그 결과 총사령부 내 부서 간의 조율에 어려움을 겪었다. 1944년 6월 소련의 카렐리야 공세를 예측하지 못한 것은 만네르헤임이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던 것이 한 가지 원인으로 지적된다.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작전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다른 권한자가 없었다.
겨울 전쟁과 계속 전쟁 동안 만네르헤임과 다른 핀란드 지도자들 사이에는 여러 차례 문제가 있었다. 뤼티는 적어도 한 번, 만네르헤임이 가능한 한 좋은 역사적 평가를 유지하려고 행동했다고 비난했다. 에드빈 린코미에스 총리는 사후 출판된 회고록에서 그를 유명한 예술가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변덕스럽고 변덕스러운 행동을 비난했다. 만네르헤임이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총리를 지냈고, 나중에 제7대 대통령이 된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는 만네르헤임이 이미 노령이었고 항상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7.4. 기념물 및 추모
만네르헤임의 생일인 6월 4일은 핀란드 방위군의 국기일로 기념된다. 이 결정은 1942년 그의 75세 생일을 맞아 핀란드 정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때 그는 핀란드의 원수 칭호도 받았다. 국기일은 국가 퍼레이드와 국방군 장병에 대한 포상 및 승진으로 기념된다. 만네르헤임의 삶과 시대는 만네르헤임 박물관에 기념되어 있다. 핀란드 수도의 가장 유명한 대로인 만네르헤임로는 이미 그의 생전에 원수를 기려 이름이 바뀌었다. 이 도로를 따라 캄피 지구에는 그를 기려 이름 붙여진 호텔 마르스키가 있다. 만네르헤임의 옛 사냥 오두막이자 휴식처로 "원수의 오두막"(Marskin Maja핀란드어)으로 알려진 곳은 현재 박물관이자 레스토랑으로 사용되며, 핀란드 로피의 푸넬리아 호수 기슭에 위치해 있다.
핀란드 전역의 여러 랜드마크들이 만네르헤임을 기리고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헬싱키 만네르헤임로에 위치한 만네르헤임 원수 기마상으로, 현대미술관 키아스마 앞에 세워져 있다. 투르쿠와 세이내요키의 만네르헤임 공원에도 그의 동상이 있다. 탐페레의 만네르헤임 동상은 내전 승리 장군인 백군 총사령관을 묘사하고 있으며, 도시 외곽 몇 킬로미터 떨어진 숲 속에 설치되었다(이는 만네르헤임의 내전 역할에 대한 지속적인 논란 때문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미켈리와 라흐티에 동상이 세워졌다. 2004년 12월 5일, 만네르헤임은 수우레트 수오말라이세트("위대한 핀란드인들") 콘테스트에서 역대 가장 위대한 핀란드인으로 선정되었다.
1937년부터 1967년까지 최소 5종의 핀란드 우표 또는 우표 시리즈가 만네르헤임을 기려 발행되었다. 1960년에는 미국이 마하트마 간디와 시몬 볼리바르와 같은 다른 저명한 인물들을 포함하는 자유의 옹호자 시리즈의 일부로, 만네르헤임을 "핀란드의 해방자"로 기려 일반 1등 국내 및 국제 우표(당시 각각 4 USD 및 8 USD)를 발행했다.
만네르헤임은 일마리 투리야의 1966년 연극과 1970년 영화 각색작 사령부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연극과 영화 모두에서 만네르헤임은 요엘 린네가 연기했다. 만네르헤임은 또한 2001년 벨리-마티 사이코넨이 감독한 텔레비전 영화 1940년 8월의 권력 게임에서 아스코 사르콜라가 연기했다.
8. 수상 및 영예
만네르헤임은 평생 동안 82개의 군사 및 민간 훈장을 수훈했으며, 그의 문장에는 '명예로운 목적을 위하여 명예로운 검으로'라는 모토가 새겨져 있다.
훈장명 | 등급 | 수여국 | 수여 연도 |
---|---|---|---|
프란츠 요제프 훈장 | 기사 | 오스트리아-헝가리 | 1895년 |
성 안나 훈장 | 3급 | 러시아 제국 | 1900년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기사 | 프랑스 | 1902년 |
성 마우리체 라자로 훈장 | 장교 | 이탈리아 | 1902년 |
구세주 훈장 | 장교 | 그리스 | 1902년 |
성 안나 훈장 | 2급 | 러시아 제국 | 1904년 |
성 스타니스와프 훈장 | 2급 | 러시아 제국 | 1904년 |
용맹 황금 무기 | 러시아 제국 | 1906년 | |
성 블라디미르 훈장 | 4급 | 러시아 제국 | 1909년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장교 | 프랑스 | 1910년 |
성 안나 훈장 | 1급 | 러시아 제국 | 1914년 |
성 스타니스와프 훈장 | 1급 | 러시아 제국 | 1914년 |
성 블라디미르 훈장 | 3급 | 러시아 제국 | 1914년 |
성 게오르기 훈장 | 4급 기사 | 러시아 제국 | 1914년 |
성 블라디미르 훈장 | 2급 | 러시아 제국 | 1916년 |
철십자장 | 1급 및 2급 | 독일 제국 | 1918년 |
자유십자장 | 검 사령관 대십자 | 핀란드 | 1918년 |
검 훈장 | 사령관 대십자 | 스웨덴 | 1918년 |
세라핌 훈장 | 기사 | 스웨덴 | 1919년 |
코끼리 훈장 | 기사 | 덴마크 | 1919년 |
독수리 십자 훈장 | 검 1급 | 에스토니아 | 1930년 |
리투아니아 비티스 십자 훈장 | 2급 2등 | 리투아니아 | 1933년 |
에스토니아 적십자 훈장 | 대십자 | 에스토니아 | 1933년 |
독일 적십자 훈장 | 곡엽 대십자 | 나치 독일 | 1937년 |
대영 제국 훈장 | 기사 대십자 | 영국 | 1938년 |
라트비아 적십자 명예 십자장 | 라트비아 | 1938년 |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대십자 | 프랑스 | 1939년 |
자유십자장 | 검 금강석 사령관 대십자 | 핀란드 | 1940년 |
미하이 용감공 훈장 | 1급 | 루마니아 | 1941년 |
만네르헤임 십자장 | 1급 및 2급 | 핀란드 | 1941년 |
헝가리 왕국 공로 훈장 | 성 이슈트반 왕관 대십자 | 헝가리 | 1942년 |
크로아티아 왕 즈보니미르 왕관 훈장 | 검 대십자 | 크로아티아 | 1942년 |
독일 수리 훈장 | 별 황금 대십자 | 나치 독일 | 1942년 |
사보이 군사 훈장 | 대장교 | 이탈리아 | 1942년 |
욱일동화대수장 | 일본 | 1942년 | |
곡엽 기사십자 철십자장 | 기사십자 | 나치 독일 | 1942년 |
곡엽 기사십자 철십자장 | 곡엽 기사십자 | 나치 독일 | 1944년 |
핀란드 백장미 훈장 | 칼라, 검, 금강석 대십자 | 핀란드 | 1944년 |
핀란드 사자 훈장 | 검 대십자 | 핀란드 | 1944년 |
9.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19년 선거 | 핀란드의 대통령 | 1대 | 무소속 | 25.64% | 50표 | 2위 | 낙선 |
1943년 선거 | 핀란드의 대통령 | 5대 | 무소속 | 0.36% | 1표 | 4위 | 낙선 |
1944년 선거 | 핀란드의 대통령 | 6대 | 무소속 | 단독후보 | 무투표 | 1위 | 당선 |
10. 저술
만네르헤임이 남긴 회고록과 아시아 여행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 C. G. 만네르헤임, 1906년 ~ 1908년 서쪽에서 동쪽으로 아시아 횡단 (1969년)
-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만네르헤임 원수의 회고록 (195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