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제3대 포틀랜드 공작 윌리엄 헨리 캐번디시벤팅크(William Henry Cavendish Cavendish-Bentinck, 3rd Duke of Portland영어)는 1738년 4월 14일에 태어나 1809년 10월 30일에 사망한 영국의 저명한 정치인이다. 그는 휘그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했으나,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정치적 입장을 전환하여 토리당과 협력하며 후기 조지 시대를 이끌었다.
포틀랜드 공작은 두 차례에 걸쳐 영국의 총리를 역임했다. 첫 번째 총리 재임은 1783년 4월 2일부터 12월 19일까지 폭스-노스 연립 내각의 명목상 수장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총리를 지냈으며, 이 기간 동안 파리 조약이 체결되어 미국 독립 전쟁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두 번째 총리 재임은 1807년 3월 31일부터 1809년 10월 4일까지 영국 총리를 지냈으며, 그의 두 총리 임기 사이의 24년이라는 공백은 역대 영국 총리 중 가장 긴 기록이다. 그는 또한 1792년부터 1809년 사망 시까지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며 학문 분야에도 기여했다.
그는 1762년 작위를 승계하기 전까지는 티치필드 후작(Marquess of Titchfield영어)이라는 의례 칭호로 불렸으며, 공작, 후작, 백작(포틀랜드 백작), 자작(우드스톡 자작), 남작(시런세스터 남작) 등 영국 귀족의 모든 작위를 보유했다. 또한, 그는 찰스 3세 국왕의 증조모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의 선조이기도 하다. 그의 정치 경력은 찰스 제임스 폭스가 이끄는 휘그당 지도부와 결별하고 소(小) 윌리엄 피트와 연합한 '포틀랜드 휘그파'의 리더로 활동한 것이 특징이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윌리엄 헨리 캐번디시벤팅크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2.1. 출생 및 가족 배경
윌리엄 헨리 캐번디시벤팅크는 1738년 4월 14일 버킹엄셔의 불스트로드 파크(Bulstrode Park영어)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2대 포틀랜드 공작 윌리엄 벤팅크(William Bentinck, 2nd Duke of Portland영어)와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으로 알려진 마가렛 캐번디시-할리(Margaret Cavendish-Harley영어)의 장남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외할머니인 존 홀스(John Holles, 1st Duke of Newcastle영어)의 딸 헨리에타 캐번디시 홀스(Henrietta Cavendish Holles영어)로부터 많은 토지를 상속받았다. 외할머니 헨리에타의 유언에 따라 1755년 옥스퍼드 대학교 재학 중 '캐번디시'를 성에 추가했으며, 이는 1801년 10월 5일 국왕의 공식 승인을 받았다.
2.2. 교육 및 해외 여행
그는 1747년부터 1754년까지 웨스트민스터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고, 1755년 3월 4일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에 입학하여 1757년 2월 1일 문학 석사(Master of Arts영어) 학위를 취득했다.
1757년 12월, 19세의 티치필드 경은 데이비드 머레이, 제2대 맨스필드 백작(David Murray, 2nd Earl of Mansfield영어)의 지도 아래 바르샤바에서 1년간 수학하기 위해 그랜드 투어를 떠났다. 그는 스톰온트 경의 비서인 벤자민 랑글루아(Benjamin Langlois영어)와 동행했으며, 랑글루아는 현지 교사를 고용하고 고대사, 근대사, 일반법 등 그의 학업을 지도했다. 1759년, 티치필드 경은 랑글루아와 함께 독일을 거쳐 이탈리아로 여행했으며, 토리노에서 1년을 보낸 후 피렌체로 이동하여 1761년 10월 영국으로 돌아왔다.
3. 결혼 및 자녀

1766년 11월 8일, 포틀랜드 공작은 제4대 데번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William Cavendish, 4th Duke of Devonshire영어)와 샬럿 캐번디시, 하팅턴 후작 부인(Charlotte Cavendish, Marchioness of Hartington영어)의 외동딸인 도로시 캐번디시(Lady Dorothy Cavendish영어, 1750년 8월 27일 ~ 1794년 6월 3일)와 결혼했다. 그들은 9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6명이 성인까지 생존했다.
- 윌리엄 헨리 캐번디시-스콧-벤팅크, 제4대 포틀랜드 공작(William Henry Cavendish-Scott-Bentinck, 4th Duke of Portland영어, 1768년 6월 24일 ~ 1854년 3월 27일): 제4대 포틀랜드 공작을 계승했다.
- 윌리엄 헨리 캐번디시-벤팅크 경(Lord William Henry Cavendish-Bentinck영어, 1774년 9월 14일 ~ 1839년 6월 17일): 인도 총독을 역임했다. 1803년 2월 19일, 제1대 고스포드 백작 아서 애치슨의 딸 메리 애치슨과 결혼했다.
- 샬럿 캐번디시-벤팅크(Lady Charlotte Cavendish-Bentinck, 1775년 10월 2일 ~ 1862년 7월 28일): 1793년 3월 31일 찰스 그레빌(Charles Greville (1762-1832)영어)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메리 캐번디시-벤팅크(Lady Mary Cavendish-Bentinck, 1779년 3월 13일 ~ 1843년 11월 6일)
- 윌리엄 찰스 오거스터스 캐번디시-벤팅크 경(Lord William Charles Augustus Cavendish-Bentinck영어, 1780년 5월 20일 ~ 1826년 4월 28일): 제6대 포틀랜드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벤팅크(William Cavendish-Bentinck, 6th Duke of Portland영어)와 엘리자베스 왕대비의 선조이다. 1808년 9월 21일 조지아나 오거스타 프레데리카 시모어와 결혼하여 1녀를 두었고, 1816년 7월 23일 앤 압디와 재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프레데릭 캐번디시-벤팅크 경(Lord Frederick Cavendish-Bentinck영어, 1781년 11월 2일 ~ 1828년 2월 11일): 제8대 포틀랜드 공작 퍼디난드 캐번디시-벤팅크(Ferdinand Cavendish-Bentinck, 8th Duke of Portland영어)와 제9대 포틀랜드 공작 빅터 캐번디시-벤팅크(Victor Cavendish-Bentinck, 9th Duke of Portland영어)의 선조이다. 1820년 9월 16일 메리 라우더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4. 정치 경력
포틀랜드 공작의 정치 경력은 영국 의회 입문부터 두 차례의 총리 재임, 그리고 다양한 내각 직책 수행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펼쳐졌다.
4.1. 정계 입문

포틀랜드 공작은 1761년 영국 의회 웨이블리 선거구(Weobley (UK Parliament constituency)영어)에서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이듬해인 1762년 5월 1일 부친의 사망으로 포틀랜드 공작 작위를 계승하며 귀족원에 진입했다. 그의 하원 의원 재임 기간은 짧았고, 투표나 연설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4.2. 초기 정치 활동
귀족원에 입성했을 당시 24세에 불과했지만, 많은 재산과 흠잡을 데 없는 명성 덕분에 휘그당의 여러 파벌로부터 환영받았다. 그는 제2대 로킹엄 후작 찰스 왓슨-웬트워스(Charles Watson-Wentworth, 2nd Marquess of Rockingham영어)의 귀족 휘그당 파벌인 로킹엄 휘그파(Rockingham Whigs영어)에 합류했다.
1765년 7월, 제1차 로킹엄 후작 내각이 출범하자 궁내장관(Lord Chamberlain of the Household영어)에 임명되었고, 7월 10일에는 추밀고문관에 임명되었다. 1766년 6월 5일에는 왕립학회 펠로(Fellow of the Royal Society영어)로 선출되었다. 1766년 3월 로킹엄 후작 내각이 붕괴하자 포틀랜드 공작도 사임하려 했으나, 로킹엄파와 당시 총리였던 제1대 채텀 백작 윌리엄 피트 사이의 협상 역할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수락하며 잠시 유임했다. 그러나 11월 협상이 결렬되자 포틀랜드 공작은 소수의 귀족들과 함께 관직을 사임했다. 이 경험은 그가 채텀 백작을 철저히 싫어하게 만들었고, 로킹엄파에 완전히 충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궁내장관과 같은 의례적이고 실권 없는 관직에 다시 취임하는 것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사임 후 그는 귀족원에서 야당으로 활동하며 제1대 재무경 제3대 그래프턴 공작 오거스터스 피츠로이(Augustus FitzRoy, 3rd Duke of Grafton영어)를 강력히 비판했다. 이로 인해 그는 당시 그래프턴 공작을 비판하던 익명의 작가 주니어스의 정체로 의심받기도 했으나, 영국인명사전은 이 의혹을 '터무니없다'고 평가했다. 또한, 로킹엄파는 연립 내각을 구성하더라도 로킹엄 후작이 총리를 맡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에 장기간 야당에 머물렀지만, 이는 동시에 자파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포틀랜드 공작의 부친은 선거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지만, 제3대 포틀랜드 공작은 선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예를 들어, 1768년 영국 총선에서는 자신의 파벌 후보 8명을 당선시켰다.
4.2.1. 아일랜드 총독
포틀랜드 공작은 1782년 4월부터 8월까지 제2차 로킹엄 후작 내각에서 아일랜드 총독(Lord Lieutenant of Ireland영어)을 역임했다. 당시 영국은 미국 독립 전쟁에서 패배한 직후였고, 아일랜드의 자치를 주장하는 아일랜드 애국당(Irish Patriot Party영어)은 이 기회를 틈타 아일랜드의 자치권 확대를 강력히 요구했다. 포틀랜드 공작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자치권을 부여하는 대신 어떤 대가를 얻어내려 했다. 그러나 로킹엄파가 내각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도록 제2대 셸번 백작 윌리엄 페티(William Petty, 2nd Earl of Shelburne영어)와 조지 3세가 이를 방해했다. 결국 아일랜드에 대한 양보만 이루어졌고, 그레이트브리튼 측은 아무런 반대급부도 얻지 못했다. 로킹엄 후작이 사망하자 포틀랜드 공작은 찰스 제임스 폭스의 다른 지지자들과 함께 셸번 백작 내각에서 사임했다.
4.3. 제1차 총리 재임 (1783년)
1783년 4월, 셸번 백작의 사임에 따라 찰스 제임스 폭스(Charles James Fox영어)와 노스 경(Frederick North, Lord North영어)의 폭스-노스 연립 내각이 수립되자, 포틀랜드 공작은 명목상의 총리이자 제1대 재무경(First Lord of the Treasury영어)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그해 12월 내각이 붕괴할 때까지 재임했다.
이 내각의 재임 기간 동안 미국 독립 전쟁의 종전 조약인 파리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이 외에 중요한 정책은 폭스의 동인도 회사 개혁 법안뿐이었다. 이 법안은 하원에서는 큰 차이로 가결되었으나, 귀족원에서는 제3대 템플 백작 조지 뉴젠트-템플-그렌빌(George Nugent-Temple-Grenville, 1st Marquess of Buckingham영어)의 위협으로 인해 1783년 12월 17일 찬성 76표, 반대 95표로 부결되었다. 템플 백작은 조지 3세의 허가를 받아 "동인도 법안에 찬성표를 던진 자는 국왕의 친구가 아닐 뿐만 아니라, 국왕에 의해 적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발언했다. 조지 3세는 다음 날 연립 내각을 해산했다.
1784년 영국 총선에서 연립 내각 지지자들 다수가 낙선한 것은 폭스, 노스, 포틀랜드의 인기가 낮았음을 보여주었지만, 내각의 붕괴로 포틀랜드 공작은 다시 한번 정쟁의 희생자로 비춰지게 되었고, 그의 총리 재임은 휘그당 재건의 절대적인 조건이 되었다.
4.4. 정치적 입장 변화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을 때, 포틀랜드 공작은 처음에는 소(小) 윌리엄 피트나 폭스와 마찬가지로 혁명에 동정적이었다. 그러나 혁명이 급진화되면서 그는 다른 대지주들과 마찬가지로 혁명이 영국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휘그당 내부도 1791년 5월 에드먼드 버크가 폭스를 비판하고, 1792년 4월 의회 개혁을 목표로 하는 국민의 벗 협회(Society of the Friends of the People영어)가 설립되는 등 분열의 조짐을 보였다.
소 피트는 알렉산더 웨더번, 제1대 로슬린 백작(Alexander Wedderburn, 1st Earl of Rosslyn영어)을 중개자로 삼아 포틀랜드 공작과 협상하며 그를 폭스로부터 이간시키려 했다. 그러나 포틀랜드 공작은 폭스의 내각 참여를 연립 내각의 전제로 삼았기 때문에 협상이 난항을 겪었다. 더욱이 제5대 리즈 공작 프랜시스 오스본(Francis Osborne, 5th Duke of Leeds영어)이 1792년 7월부터 8월에 걸쳐 조지 3세에게 자신을 명목상의 총리로 하는 소 피트와 폭스의 연립 내각에 대해 타진했고, 조지 3세로부터 "야당 휘그당에게는 아첨하는 정도의 제스처만 허용하라"는 언질을 얻어내면서 소 피트의 이중적인 태도가 드러나게 되었다.
소 피트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지만, 프랑스 혁명의 진행과 함께 휘그당은 더욱 깊이 분열되었다. 1792년 12월에는 길버트 엘리엇-머레이-키닌마운드, 제1대 민토 백작(Gilbert Elliot-Murray-Kyninmound, 1st Earl of Minto영어)이 폭스의 프랑스 제1공화국 승인을 이유로 포틀랜드 공작과 폭스의 결별을 발표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포틀랜드 공작의 허락 없이 발표된 것이어서 며칠 후 철회되었다. 포틀랜드 공작은 심정적으로는 보수파였지만, 최대한 많은 의원들을 자신의 파벌로 끌어들이기 위해 폭스와의 결별을 1794년 1월까지 미루었으며, 1793년 28명이었던 포틀랜드파를 1794년에는 60명으로 두 배 늘렸다. 그러나 포틀랜드파는 소 피트와의 연립 내각 시기에 해체되었다.
야당 시절 포틀랜드 공작은 정부로부터의 혜택 수령을 거부했고, 가터 훈장 수여 제안도 사양했다. 하지만 1792년 9월 27일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10월 7일에는 민법학 박사(Doctor of Civil Law영어) 명예 학위를 수여받았다.
4.5. 내각 직책 수행
포틀랜드 공작은 총리직 외에도 다양한 내각 직책을 수행하며 정부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
4.5.1. 내무장관

포틀랜드파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자 소 피트는 방향 전환을 할 수밖에 없었고, 1794년 7월 포틀랜드 공작을 내무장관(Secretary of State for the Home Department영어)으로 임명했다. 포틀랜드 공작은 1794년 7월 16일 가터 훈장을 수여받았고, 1795년 6월 노팅엄셔 주지사(Lord Lieutenant of Nottinghamshire영어)에 임명되었다. 또한, 포틀랜드 공작의 장남인 티치필드 후작 윌리엄 캐번디시-스콧-벤팅크(William Cavendish-Scott-Bentinck, 4th Duke of Portland영어)도 미들섹스 주지사(Lord Lieutenant of Middlesex영어)에 임명되었다.
내무장관 취임 전후로 1793년 외국인법(Aliens Act 1793영어), 1795년 반역법(Treason Act 1795영어), 1795년 선동 집회법(Seditious Meetings Act 1795영어)이 제정되면서 내무장관의 재량권이 크게 확대되었다. H. 모스 스티븐스(H. Morse Stephens영어)는 영국인명사전에서 포틀랜드 공작이 재량권을 남용하지 않아 정부의 악평을 초래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그는 정부에 대한 분노가 "의회 개원식으로 향하는 국왕의 마차가 창문이 깨지는" 정도에 그쳤다고 언급하며, 이는 초대 시드머스 자작 헨리 애딩턴(Henry Addington, 1st Viscount Sidmouth영어)의 내무장관 재임 기간(1812년 ~ 1822년)에 발생한 피털루 학살(1819년)이나 케이토 스트리트 음모(Cato Street Conspiracy영어)와 대조적이라고 보았다.
아일랜드와 관련해서는 1798년 아일랜드 반란(Irish Rebellion of 1798영어)이 발발했고, 1800년 연합법이 가결되는 등 큰 사건들이 이어졌다. 특히 1800년 연합법은 1799년에 한 차례 부결되었기 때문에, 두 번째 부결을 피하기 위해 포틀랜드 공작은 아일랜드 의회 의원들을 대대적으로 매수했다. 1799년 10월부터 1800년 5월까지 3.08 만 GBP가 그레이트브리튼에서 아일랜드로 송금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왕실비법(Civil List Act영어)을 위반하는 행위였다.
4.5.2. 추밀원 의장

소 피트는 가톨릭 해방 문제로 어려움을 겪다가 1801년 사임했다。 포틀랜드 공작 또한 아일랜드 문제를 놓고 아일랜드의 가톨릭 교회에 보조금을 지급하여 국교회 중 하나로 만들려 했으나, 조지 3세와 소 피트의 후임인 헨리 애딩턴(Henry Addington, 1st Viscount Sidmouth영어)의 설득으로 내각에 잔류했다. 그는 1801년 7월 추밀원 의장(Lord President of the Council영어)에 임명되어 1805년까지 재임했다.
그러나 1803년 나폴레옹 전쟁이 발발하자, 포틀랜드 공작은 의지가 약한 애딩턴 대신 소 피트가 총리직에 재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후 소 피트는 1804년 제2차 피트 내각을 조직했다. 이때 소 피트는 포틀랜드 공작 외에도 폭스나 초대 그렌빌 남작 윌리엄 그렌빌(William Grenville, 1st Baron Grenville영어)을 입각시켜 연립 내각을 구성하려 했으나, 조지 3세가 폭스의 입각을 거부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파만으로 약한 기반의 내각을 구성했다. 포틀랜드 공작은 계속해서 추밀원 의장을 맡았으며, 조지 3세의 폭스 입각 거부를 환영했다.
장남 티치필드 후작의 아내 헨리에타 벤팅크의 여동생 조앤 캐닝이 조지 캐닝의 아내였기 때문에, 티치필드 후작은 캐닝과 친해졌고, 캐닝이 원래 소 피트를 지지했으므로 티치필드 후작도 이를 따랐다. 부친인 제3대 포틀랜드 공작도 이에 따라 소 피트를 지지하게 되었고, 1805년 소 피트가 애딩턴을 입각시키려 하자 추밀원 의장 자리를 애딩턴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무임소 장관(Minister without portfolio영어)으로 전환할 정도였다.
4.5.3.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
포틀랜드 공작은 1792년 9월 27일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어 1809년 사망 시까지 그 직책을 수행했다. 그는 1792년 10월 7일 명예 민법학 박사(Doctor of Civil Law영어) 학위를 수여받았다.
4.5.4. 기타 내각 직책
포틀랜드 공작은 1805년부터 1806년까지 무임소 장관을 역임했으며, 1793년부터 1809년까지 고아원(Foundling Hospital영어)의 원장을 지냈다. 이 자선단체는 당시 가장 유행하는 곳 중 하나였으며, 여러 저명인사들이 이사회에서 활동했다. 설립 50년 전, 포틀랜드 공작의 아버지인 제2대 포틀랜드 공작 윌리엄 벤팅크(William Bentinck, 2nd Duke of Portland영어)는 조지 2세가 부여한 자선단체의 왕실 헌장(royal charter영어)에 창립 이사 중 한 명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이 병원은 런던의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임무를 가졌으며, 감동적인 사명, 후원 예술가들이 기증한 미술품 컬렉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인기 있는 자선 콘서트를 통해 빠르게 명성을 얻었다. 1793년, 포틀랜드 공작은 노스 경으로부터 이 자선단체의 회장직을 이어받았다.
또한 그는 1795년부터 1809년까지 노팅엄셔 주지사(Lord Lieutenant of Nottinghamshire영어)를 역임했으며, 사망 시까지 노팅엄의 레코더(Recorder of Nottingham영어) 직을 수행했다.
4.6. 제2차 총리 재임 (1807-1809년)

1806년 소 피트가 재임 중 사망하자, 윌리엄 그렌빌(William Grenville, 1st Baron Grenville영어)이 거국 내각(Ministry of All the Talents영어)을 조직했고, 포틀랜드 공작은 퇴임하여 불스트로드 파크(Bulstrode Park영어)로 은퇴했다.
1806년 퇴임 당시 그는 70세에 가까운 고령이었고 통풍으로 고통받고 있어 평온한 은퇴 생활을 원했다. 그러나 거국 내각이 잇따른 실패로 퇴진하게 되자, 소 피트 지지자들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조지 캐닝과 캐슬레이 자작 로버트 스튜어트(Robert Stewart, Viscount Castlereagh영어)와 같이 성격이 강한 인물들도 납득할 만한 총리로 포틀랜드 공작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조지 3세와의 좋은 관계와 소 피트 지지자로서의 명망도 총리 취임의 한 원인이었으며, 특히 후자로 인해 휘그당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토리당의 표면적인 얼굴로 내세워졌다.
결국 1807년 3월 31일 그는 다시 총리에 취임했다. 이미 고령이었던 포틀랜드 공작은 바쁜 총리직에 적합하지 않았고, 실제로는 외무장관 캐닝과 육군·식민지 장관 캐슬레이 자작이 권력을 장악했으며, 재무장관 스펜서 퍼시벌(Spencer Perceval영어)이 제1대 재무경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했다.
제2차 포틀랜드 공작 내각 재임 기간 동안 나폴레옹 전쟁의 진전이 있었다. 1807년 코펜하겐 해전에서의 승리, 1809년 발헤렌 원정(Walcheren Campaign영어)의 패배, 반도 전쟁에서의 비메이루 전투(Battle of Vimeiro영어, 1808년 8월), 신트라 협정(Convention of Cintra영어, 1808년 8월), 탈라베라 전투(Battle of Talavera영어, 1809년 7월) 등이 발생했으나, 이들 중 어느 것도 포틀랜드 공작이 직접적으로 칭찬받거나 책임을 져야 할 일은 아니었다.
캐닝과 캐슬레이 자작은 서로 앙숙이었기 때문에, 캐닝이 캐슬레이 자작을 해임하지 않으면 자신이 사임하겠다고 말했을 때, 포틀랜드 공작은 캐슬레이 자작의 해임을 승낙했지만 결국 망설이다가 미루기만 했다. 결국 캐닝과의 협상이 캐슬레이 자작에게 알려지면서 두 사람이 캐슬레이-캐닝 결투(Castlereagh-Canning duel영어)를 벌인 후 모두 사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포틀랜드 공작도 총리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5. 개인 생활 및 재산
포틀랜드 공작은 당대 최고 명문가 출신으로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으나, 개인적인 생활 방식과 정치 활동으로 인해 상당한 부채를 안고 있었다.
5.1. 재산 및 부채
1766년 결혼 당시 그의 영지 수입은 연 9000 GBP 정도였으며, 이 중 1600 GBP는 어머니에게 할당되었다. 1785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그는 연 1.20 만 GBP의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영지를 상속받았다. 어머니로부터 상속받은 영지에는 노팅엄셔의 웰벡 수도원(Welbeck Abbey영어)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약 1.50 만 acre에 달하는 광대한 토지였다.
그러나 사망 당시 그의 영지 연 수입은 약 1.70 만 GBP로 감소했으며, 약 5.20 만 GBP에 달하는 상당한 규모의 빚을 남겼다. (이는 2005년 기준 약 176.00 만 GBP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 막대한 부채로 인해 그의 아들인 제4대 포틀랜드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스콧-벤팅크(William Cavendish-Scott-Bentinck, 4th Duke of Portland영어)는 불스트로드 파크(Bulstrode Park영어)를 포함한 일부 재산을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6. 사망

포틀랜드 공작은 1809년 10월 30일 피카딜리의 벌링턴 하우스(Burlington House영어)에서 신장 결석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11월 9일 런던 세인트 메릴본 교구 교회(St Marylebone Parish Church영어)에 안장되었다.
그는 로버트 필, 제4대 애버딘 백작 조지 해밀턴 고든(George Hamilton Gordon, 4th Earl of Aberdeen영어), 벤저민 디즈레일리, 제3대 솔즈베리 후작 로버트 개스코인-세실(Robert Gascoyne-Cecil, 3rd Marquess of Salisbury영어), 헨리 캠벨-배너먼 경(Sir Henry Campbell-Bannerman영어), 보나 로(Bonar Law영어), 네빌 체임벌린과 함께 자신의 직계 후임자가 재임 중 사망한 8명의 영국 총리 중 첫 번째 인물이었다.
7. 유산 및 평가
포틀랜드 공작은 당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이름은 여러 장소와 예술품에 남아 그의 유산을 기리고 있다.
7.1. 명명된 장소 및 기념
로마 시대의 유리 공예품인 포틀랜드 바즈(Portland Vase영어)는 포틀랜드 공작이 불스트로드 파크(Bulstrode Park영어)에 있는 그의 가족 저택에서 소유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붙여졌다.
자메이카의 포틀랜드 패리시(Portland Parish영어)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786년에 설립된 티치필드 스쿨(Titchfield School영어)도 이 패리시에 위치하며 그의 이름을 기리고 있다. 이 학교의 문장은 그의 개인 문장에서 유래한다.
메릴본의 두 주요 거리인 포틀랜드 플레이스(Portland Place영어)와 그레이트 포틀랜드 스트리트(Great Portland Street영어)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두 거리 모두 그가 한때 소유했던 토지에 건설되었다. 1863년에 개통된 그레이트 포틀랜드 스트리트 역(Great Portland Street tube station영어)은 후자의 거리에서 이름을 따왔다.
조지 밴쿠버는 1793년 벤팅크 가문(Bentinck family영어)의 이름을 따서 노스 벤팅크 암(North Bentinck Arm영어)과 사우스 벤팅크 암(South Bentinck Arm영어)을 명명했으며, 포틀랜드 운하(Portland Canal영어)와 포틀랜드 해협(Portland Channel영어)과 같은 다른 지명들도 브리티시컬럼비아 해안에 붙여졌다.
호주 빅토리아주의 포틀랜드 만(Portland Bay영어)은 1800년 영국 항해사 제임스 그랜트(James Grant (navigator)영어)에 의해 명명되었다. 포틀랜드 (빅토리아주) 시는 이 만에 위치해 있다.
노팅엄 대학교의 필사본 및 특별 컬렉션 부서(Manuscripts and Special Collections, The University of Nottingham영어)는 그와 관련된 여러 문서를 소장하고 있다. 그의 개인 및 정치 문서(Pw F)는 포틀랜드(웰벡) 컬렉션의 일부이며, 포틀랜드(런던) 컬렉션(Pl)에는 그의 서신과 공식 문서, 특히 Pl C 시리즈가 포함되어 있다. 노팅엄셔 기록 보관소에 보관된 포틀랜드 영지 문서에도 제3대 공작의 재산과 관련된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할리 갤러리(Harley Gallery영어)의 포틀랜드 컬렉션(Portland Collection영어)에는 조지 스텁스(George Stubbs영어)의 그림을 포함하여 그가 소유하고 의뢰한 미술품 및 장식 예술품이 소장되어 있다.
7.2. 역사적 평가
H. 모스 스티븐스(H. Morse Stephens영어)는 영국인명사전에서 포틀랜드 공작에 대해 "두 차례의 총리 재임 기간보다 1794년부터 1801년까지 내무부를 이끌었던 시기를 더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내무장관으로서 막대한 권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관용적이었다고 평가하며, 정부에 대한 불만이 최소화되었던 시기였다고 언급했다. 이는 1812년부터 1822년까지 내무장관을 역임한 초대 시드머스 자작 헨리 애딩턴(Henry Addington, 1st Viscount Sidmouth영어)의 재임 기간과 비교했을 때 사회 불안이 적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옥스퍼드 영국인명사전은 포틀랜드 공작의 공헌으로 장기간의 야당 시절 동안 휘그당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그 조직력을 강화한 점을 꼽았다. 또한, 내무장관으로서의 그의 정책이 반동적이었다고 평가하며, 이것이 그가 말년에 토리당의 명목상 지도자로 추대된 이유였다고 분석했다.
8. 관련 항목
- 윌리엄 벤팅크, 제2대 포틀랜드 공작
- 윌리엄 캐번디시-스콧-벤팅크, 제4대 포틀랜드 공작
- 찰스 제임스 폭스
- 소(小) 윌리엄 피트
- 프랑스 혁명
- 미국 독립 전쟁
- 파리 조약 (1783년)
- 나폴레옹 전쟁
- 반도 전쟁
- 캐슬레이-캐닝 결투
- 옥스퍼드 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