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지 2세(George II영어, Georg II. August독일어; 1683년 11월 9일 ~ 1760년 10월 25일)는 1727년 6월 11일부터 1760년 사망할 때까지 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의 국왕이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Electorate of Hanover하노버독일어) 및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였다. 북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지 2세는 그레이트브리튼 밖에서 태어난 마지막 영국 군주이다. 1701년 왕위 계승법과 1707년 연합법에 따라 그의 할머니 하노버의 조피와 그녀의 개신교 후손들이 영국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조지 2세는 안스바흐의 카롤라인과 결혼하여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다.
1727년 즉위한 조지 2세는 영국의 국내 정책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는 거의 행사하지 못했으며, 이는 주로 영국 의회가 통제했다. 선제후로서 그는 12번의 여름을 하노버에서 보냈고, 그곳에서는 정부 정책에 대해 더 직접적인 통제력을 가졌다. 그는 장남인 웨일스 공 프레더릭과 어려운 관계를 맺었으며, 프레더릭은 의회 야당을 지지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데팅겐 전투에 참전하여 영국 군주로는 마지막으로 전투에 직접 참전한 군주가 되었다. 가톨릭 왕위 요구자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지지하는 자코바이트들은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이끄는 1745년 자코바이트 반란을 통해 조지 2세를 폐위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프레더릭이 1751년에 갑자기 사망하자, 조지 2세는 프레더릭의 장남인 조지 3세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은 영국 의회 중심 정치 체제의 확립과 자코바이트 위협의 종식 등 제도적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는 검약하고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후대 역사가들은 그의 외교 정책 및 군 인사에서의 영향력을 재평가하며 그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분석했다.
2. 초기 생애
조지 2세는 출생부터 즉위 전까지 복잡한 가정사와 군사적 경험을 통해 성장했다. 어린 시절 부모의 불화와 어머니의 감금으로 불안정한 환경을 겪었지만, 다국어 학습과 군사 전술에 대한 깊은 관심을 통해 왕실의 일원으로서의 소양을 다졌다.
2.1. 출생과 유년기

조지 2세는 1683년 11월 9일, 독일 하노버시에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세습공 게오르크 루트비히(훗날 조지 1세)와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3년 뒤에는 여동생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가 태어났다. 1692년 할아버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로 책봉되었다. 그의 부모는 모두 혼외정사를 저질렀고, 1694년 조피 도로테아가 남편을 버렸다는 명목으로 결혼이 해소되었다. 그녀는 아흘덴 하우스에 감금되었고, 두 자녀와의 만남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조지 2세는 어머니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2. 교육과 성장 배경
조지 2세는 네 살 때까지 외교 및 궁정의 공용어였던 프랑스어만 사용했다. 이후 그의 가정교사 중 한 명인 요한 힐마르 홀슈타인으로부터 독일어를 배웠다. 프랑스어와 독일어 외에도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습득했으며, 특히 계보학, 군사사, 그리고 전술을 매우 부지런히 공부했다.
1702년 조지 2세의 촌수를 따지면 육촌인 앤 여왕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위를 계승했다. 앤 여왕은 17번의 임신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생존 자녀마저 1700년에 사망했다. 이에 따라 1701년 왕위 계승법에 의거하여 잉글랜드 의회는 앤 여왕의 가장 가까운 개신교 혈족인 조지 2세의 할머니 하노버의 조피와 그녀의 후손들을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위 계승자로 지정했다. 그 결과 조지 2세는 할머니와 아버지 다음으로 세 왕국 중 두 곳의 왕위 계승 서열 3위가 되었다. 1705년 조피 귀화법에 따라 영국 시민으로 귀화했으며, 1706년에는 가터 훈장을 수여받고 잉글랜드 귀족 작위로 케임브리지 공작 및 후작, 밀포드헤이븐 백작, 노설럴턴 자작, 테위크스베리 남작에 서임되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1707년 연합법에 따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을 형성했으며, 잉글랜드 왕위 계승법에 명시된 계승 순서를 공동으로 수용했다.
2.3. 결혼

조지 2세의 아버지는 자신이 겪었던 사랑 없는 정략결혼을 아들이 겪지 않기를 바라며, 정식 결혼 준비 전에 아들이 신부를 만날 기회를 주고자 했다. 1702년부터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의 미망인이자 섭정이었던 스웨덴의 헤드비그 소피아 공주와의 혼담이 진행되었으나 결렬되었다. 1705년 6월, 조지 2세는 "드 부슈 씨(Monsieur de Bush프랑스어)"라는 가명으로 안스바흐 후국의 여름 별궁인 트리스도르프를 방문하여 자신의 고모 프로이센의 조피 샤를로테가 후견인으로 있던 안스바흐의 카롤라인 공주를 은밀히 탐색했다. 영국 주하노버 특사 에드먼드 폴리는 조지 2세가 그녀에 대해 "다른 누구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매료되었다"고 보고했다. 혼인 계약은 7월 말에 체결되었다. 1705년 9월 2일 카롤라인은 하노버에 도착했고, 같은 날 저녁 헤렌하우젠 정원 예배당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조지 2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플랑드르 전선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하기를 열망했으나, 그의 아버지는 아들 대공이 아들과 상속인을 낳기 전까지는 군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707년 초 카롤라인이 아들 웨일스 공 프레더릭을 낳자 조지 2세의 바람이 이루어졌다. 7월에 카롤라인이 천연두로 위독해졌고, 조지 2세는 그녀의 곁을 헌신적으로 지키다가 자신도 감염되었으나 둘 다 회복되었다. 1708년 조지 2세는 아우데나르데 전투에서 하노버 기병대의 선봉에 서서 참전했으며, 그의 말이 죽고 바로 옆 대령이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지 2세는 무사했다. 영국군 총사령관인 말버러 공작존 처칠은 조지 2세가 "군대의 선봉에서 돌격하고 하노버 군대를 자신의 모범으로 고무시켜 이 행복한 승리에 큰 역할을 했다"고 극찬했다. 1709년부터 1713년까지 조지 2세와 카롤라인은 세 명의 딸, 앤, 아멜리아, 그리고 카롤라인을 낳았다.
1714년 앤 여왕의 건강이 악화되자, 휘그당은 프로테스탄트 계승을 보장하기 위해 하노버 가문의 일원 중 한 명이 잉글랜드에 거주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조지 2세가 (케임브리지 공작으로서) 귀족이었기 때문에 영국 상원에 소집될 것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앤 여왕과 조지 2세의 아버지는 모두 이 계획을 반대했으며, 조지 2세, 카롤라인, 조피만 찬성했다. 결국 조지 2세는 가지 않았다. 같은 해 조피와 앤 여왕이 모두 사망했고, 조지 2세의 아버지가 국왕이 되었다.
3. 웨일스 공 시절
조지 2세가 웨일스 공으로 재임하던 시기는 아버지 조지 1세와의 끊임없는 불화와 이로 인한 정치적 활동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왕세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반대파의 구심점이 되었고, 이는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이어질 의회와의 복잡한 관계의 전조가 되었다.
3.1. 조지 1세와의 불화


1714년 9월 27일, 조지 2세와 그의 아버지는 헤이그에서 잉글랜드로 출항하여 이틀 뒤 그리니치에 도착했다. 다음 날, 그들은 의례적인 행렬과 함께 공식적으로 런던에 입성했다. 조지 2세는 웨일스 공 칭호를 받았다. 카롤라인은 10월에 딸들과 함께 남편을 따라 영국으로 왔지만, 아들 프레더릭은 하노버에 남아 개인 교사에게 교육받았다. 런던은 조지 2세가 이전에 본 어떤 도시와도 달랐다. 런던은 하노버보다 50배나 더 컸고, 행렬을 구경하는 인파는 최대 15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조지 2세는 영국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자신이 영국인의 피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인기를 얻었다.
국왕은 조지 2세의 인기를 불신하거나 질투했고, 이는 그들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는 데 기여했다. 1717년 조지 2세의 둘째 아들 조지 윌리엄이 태어난 것이 가족 불화의 촉매제가 되었다. 국왕은 관례에 따라 뉴캐슬 공작토머스 펠햄 홀스를 아이의 세례 후원자 중 한 명으로 임명했다. 뉴캐슬 공작을 싫어했던 조지 2세가 세례식에서 공작을 언어적으로 모욕하자 국왕은 분노했다. 공작은 이를 결투 신청으로 오해했다. 국왕의 명령으로 조지 2세와 카롤라인은 일시적으로 자택에 감금되었고, 이후 국왕의 거주지인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추방당했다. 웨일스 공과 공주는 궁정을 떠났지만, 자녀들은 국왕의 보살핌 아래 남게 되었다.
조지 2세와 카롤라인은 자녀들을 그리워했고, 그들을 만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한 번은 그들이 국왕의 승인 없이 비밀리에 궁전을 방문했는데, 카롤라인은 실신하고 조지 2세는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국왕은 부분적으로 완화하여 그들이 일주일에 한 번 방문하는 것을 허락했고, 나중에는 카롤라인에게 무조건적인 접근을 허용했다. 1718년 2월, 조지 윌리엄 왕자는 생후 3개월 만에 아버지 곁에서 사망했다.
3.2. 정치적 활동 및 화해
궁전에서 추방당하고 아버지에게 외면당한 웨일스 공은 이후 몇 년간 조지 1세의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과 연합했다. 여기에는 영국 내 종교 자유를 확대하고 스웨덴을 희생하여 하노버의 독일 영토를 확장하려는 정책들이 포함되었다. 그의 새로운 런던 거주지인 레스터 하우스는 1717년에 정부를 떠난 로버트 월폴과 타운젠드 경을 포함한 그의 아버지의 정치적 반대자들의 빈번한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국왕은 1719년 5월부터 11월까지 다시 하노버를 방문했다. 이번에는 조지 2세에게 섭정권을 주지 않고, 섭정 위원회를 설립했다. 1720년, 월폴은 대중적 화합을 위해 국왕과 그의 아들이 화해하도록 독려했고, 그들은 마지못해 화해했다. 월폴과 타운젠드는 정치적 직책으로 복귀하여 내각에 재합류했다. 조지 2세는 화해 조건에 곧 실망했다. 국왕의 보살핌 아래 있던 세 딸은 돌아오지 않았고, 국왕이 부재 중일 때에도 섭정으로 활동하는 것이 여전히 금지되었다. 그는 월폴이 권력을 되찾기 위한 계략의 일환으로 자신을 화해로 속였다고 믿게 되었다. 다음 몇 년 동안, 그와 카롤라인은 조용히 지내며 공개적인 정치 활동을 피했다. 그들은 세 명의 자녀, 윌리엄, 메리, 그리고 루이즈를 더 낳았으며, 이들은 레스터 하우스와 조지 2세의 여름 거주지인 리치먼드 로지에서 양육되었다.
1721년, 남해 거품 사건이라는 경제적 재앙은 월폴이 정부의 최고위직에 오를 수 있게 했다. 월폴과 그의 휘그당은 정치에서 지배적이었다. 국왕은 토리당이 1701년 왕위 계승법에 명시된 왕위 계승을 지지하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휘그당의 권력은 다음 50년 동안 토리당이 집권하지 못할 정도로 막강했다.
4. 재위 기간
조지 2세의 재위 기간은 영국 국내외적으로 중대한 변화와 갈등의 시기였다. 그는 즉위와 함께 강력한 로버트 월폴 수상을 유임하며 의회 중심 정치의 기틀을 다졌고, 가족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도 대외적으로는 여러 전쟁에 참전하며 영국의 국제적 지위 강화에 기여했다.
4.1. 즉위와 초기 정책

1727년 6월 22일, 조지 1세가 하노버 방문 중 사망하자, 그의 아들 조지 2세는 43세의 나이로 국왕과 선제후를 계승했다. 조지 2세는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독일로 가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비판을 받기는커녕 그가 잉글랜드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로 여겨져 영국인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을 무효화했다. 유언은 하노버 계승을 조지 2세의 미래 손자들 사이에 나누려 했으나, 영국과 하노버 양측의 대신들은 조지 1세가 개인적으로 계승을 결정할 법적 권한이 없으므로 유언이 불법적이라고 간주했다. 비평가들은 조지 2세가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는 것을 피하기 위해 유언을 숨겼다고 추정했다.
조지 2세는 1727년 10월 2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대관식을 위해 《사제 사독》을 포함한 네 개의 새로운 찬가를 작곡하도록 위촉받았다.
조지 2세가 아버지의 정부에 합류함으로써 그를 괴롭혔던 월폴을 해임하고 윌밍턴 백작스펜서 컴프턴으로 교체할 것이라는 것이 널리 믿어졌다. 조지 2세는 월폴 대신 컴프턴에게 국왕으로서의 첫 연설을 작성하도록 요청했지만, 컴프턴은 월폴에게 초안 작성을 부탁했다. 카롤라인 왕비는 조지 2세에게 월폴을 유임하도록 조언했다. 월폴은 국왕의 공적 지출을 위한 고정 연간 금액인 80만 파운드(80.00 만 GBP)의 후한 왕실비를 확보함으로써 왕실의 호의를 계속 얻었다. 월폴은 의회에서 상당한 다수 의석을 확보하고 있었고, 조지 2세는 그를 유임하거나 대신들의 불안정성을 감수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거의 없었다. 컴프턴은 다음 해 윌밍턴 경으로 귀족 작위를 받았다.

월폴은 국내 정책을 지휘했으며, 1730년 타운젠드 경이 사임한 후에는 조지 2세의 외교 정책까지 통제했다.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조지 2세가 영국에서 명예로운 역할을 수행했으며, 주요 결정을 내린 월폴과 고위 대신들의 조언을 면밀히 따랐다고 본다. 국왕은 유럽에서의 전쟁을 열망했지만, 그의 대신들은 더 신중했다. 영국-스페인 전쟁에서 휴전이 합의되었고, 조지 2세는 독일 국가들 편에서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참여하도록 월폴에게 압력을 가했으나 실패했다. 1733년 4월, 월폴은 자신의 당 내에서도 강한 반대에 부딪혔던 인기 없는 소비세법을 철회했다. 조지 2세는 법안 반대자들을 궁정 직책에서 해임함으로써 월폴을 지지했다. 1732년에는 월폴에게 다우닝 가 10번지 저택을 하사했으며, 이 저택은 이후 역대 영국 총리들의 관저가 되었다.
4.2. 재위 기간 중 가족 관계
조지 2세와 그의 아들 웨일스 공 프레더릭의 관계는 1730년대에 악화되었다. 프레더릭은 부모가 영국으로 올 때 독일에 남겨졌고, 그들은 14년 동안 만나지 못했다. 1728년, 그는 영국으로 왔고, 빠르게 정치적 반대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다. 조지 2세가 1729년, 1732년, 1735년 여름에 하노버를 방문했을 때, 그는 아들 대신 아내에게 영국 섭정 위원회를 주재하도록 했다. 한편, 조지 2세와 그의 매제이자 사촌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사이의 경쟁은 프로이센-하노버 국경을 따라 긴장을 초래했으며, 결국 국경 지역에서의 군대 동원과 두 국왕 간의 결투 제안으로 이어졌다. 웨일스 공과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딸 프로이센의 빌헬미네 사이의 결혼 협상은 여러 해 동안 끌었지만, 양측 모두 상대방이 요구하는 양보에 동의하지 않아 결국 무산되었다. 대신, 프레더릭은 1736년 4월 작센고타의 아우구스타 공주와 결혼했다.
1736년 5월, 조지 2세가 하노버로 돌아가자 영국 내에서 불만이 커졌다. 심지어 세인트 제임스 궁전 문에는 "아내와 여섯 자녀를 빈곤 속에 남겨두고 집을 떠나거나 사라진 남자"라는 풍자적인 공고문이 붙었다. 국왕은 12월의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려 했으나, 그의 배가 폭풍에 갇히자 런던에는 그가 익사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결국 1737년 1월에 그는 영국으로 돌아왔다. 곧바로 그는 열병과 치질에 걸려 병상에 누웠다. 웨일스 공은 국왕이 곧 죽을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그 결과 조지 2세는 소문꾼들의 이야기를 반박하기 위해 억지로 일어나 사교 행사에 참석했다.
웨일스 공이 의회에 자신의 수당 인상을 요구하자 공개적인 싸움이 벌어졌다. 인색한 것으로 유명했던 조지 2세는 사적인 합의를 제안했지만, 프레더릭은 이를 거부했다. 의회는 그 법안에 반대했지만, 조지 2세는 월폴의 조언에 따라 마지못해 아들의 수당을 인상했다. 1737년 7월 프레더릭이 그의 딸을 출산할 때 산통을 겪는 아내를 한밤중에 마차에 태워 떠남으로써 국왕 부부를 배제하자, 그들 사이의 긴장은 더욱 커졌다. 조지 2세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프레더릭과 그의 가족을 왕실 궁정에서 추방했지만, 프레더릭에게 자녀 양육권을 유지하도록 허용했다는 점이 달랐다.
그 직후, 조지 2세의 아내 카롤라인 왕비가 1737년 11월 20일 사망했다. 그는 아내의 죽음에 깊이 상심했으며, 많은 이들의 놀라움 속에서 "세상이 그에게는 전에 전혀 없다고 생각했던 부드러움"을 보였다. 그녀는 임종 자리에서 흐느끼는 남편에게 재혼하라고 말했지만, 조지 2세는 "아니, 나는 애첩을 둘 것이다!"(Non, j'aurai des maîtresses!프랑스어)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조지 2세가 결혼 생활 중에도 이미 애첩을 두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고, 그는 카롤라인 왕비에게 그 사실을 알려왔다. 서퍽 백작부인헨리에타 하워드는 앤 여왕 재위 시절 남편과 함께 하노버로 이주했으며, 카롤라인 왕비의 침실 시녀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조지 1세 즉위 전부터 1734년 11월까지 조지 2세의 애첩이었다. 그 뒤를 이은 아말리에 폰 발모덴은 훗날 야머스 백작부인이 되었는데, 그녀의 아들 요한 루트비히 폰 발모덴은 조지 2세의 자녀일 가능성이 있다. 요한 루트비히는 아말리에가 남편과 결혼한 상태에서 태어났으며, 조지 2세는 그를 자신의 아들로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조지 2세는 하노버 선제후를 겸했기 때문에 하노버에 머물며 영국을 비울 때 카롤라인 왕비가 사망한 1737년까지 종종 섭정으로 활동했다. 또한 북아메리카 대륙에 13번째 식민지인 조지아주가 건설된 것도 이 시기였는데, 조지아는 조지 2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하노버에도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괴팅겐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4.3. 주요 전쟁과 반란
조지 2세 재위 기간 동안 영국은 여러 주요 전쟁과 국내외 반란에 휘말리며 국제적 지위와 국내 정치 체제의 변화를 겪었다.
4.3.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및 자코바이트 반란


월폴의 뜻에 반하여, 조지 2세가 기뻐한 것은 영국이 1739년에 스페인과 다시 적대 관계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영국의 스페인과의 분쟁인 젠킨스의 귀 전쟁은 1740년 신성 로마 황제카를 6세의 사망 후 유럽의 주요 분쟁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일부가 되었다. 이 전쟁의 핵심은 카를 6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그의 오스트리아 영토를 계승할 권리였다. 조지 2세는 1740년과 1741년 여름을 하노버에서 보냈는데, 그곳에서 선제후로서 유럽 외교 문제에 더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다.
프레더릭 왕자는 1741년 영국 총선에서 야당을 위해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을 벌였고, 월폴은 안정적인 다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월폴은 프레더릭에게 수당 인상과 부채 상환을 약속하며 매수하려 했지만, 프레더릭은 거부했다. 지지 기반이 약화되자 월폴은 20년 이상의 재임 후 1742년에 은퇴했다. 그를 대신하여 1727년 조지 2세가 처음 총리로 고려했던 윌밍턴 백작스펜서 컴프턴이 취임했다. 그러나 윌밍턴 백작은 명목상의 인물이었고, 실제 권력은 월폴 다음으로 조지 2세가 총애했던 대신인 그랜빌 백작존 카터레트 등 다른 인물들에게 있었다. 1743년 윌밍턴 백작이 사망하자 헨리 펠햄이 정부의 수장 자리를 차지했다.
카터레트가 이끄는 주전파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면 프랑스의 세력이 증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지 2세는 표면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를 지원하기 위해 1만 2천 명의 헤센 및 덴마크 용병을 유럽으로 파견하는 데 동의했다. 조지 2세는 영국 대신들과 협의 없이 이들을 하노버에 주둔시켜 적대적인 프랑스 군대가 선제후령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영국군은 20년 이상 주요 유럽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고, 정부는 군대의 유지보수를 심각하게 방치했다. 조지 2세는 군대 내 전문성을 높이고 계급 매매 대신 실력에 따른 승진을 추진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오스트리아, 영국, 네덜란드, 하노버, 헤센 연합군은 1743년 6월 27일 데팅겐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교전했다. 조지 2세는 직접 이들을 이끌고 승리했으며, 이로써 전투에서 군대를 직접 지휘한 마지막 영국 군주가 되었다. 그의 전투에서의 행동은 칭찬받았지만, 전쟁 자체는 영국 대중에게 불인기를 얻었다. 대중은 국왕과 카터레트가 영국의 이익을 하노버의 이익에 종속시킨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카터레트는 지지를 잃고 1744년에 조지 2세의 실망 속에 사임했다.
조지 2세가 카터레트의 조언을 계속 따르고 대피트를 내각에 포함시키라는 다른 대신들의 압력을 거부하자 펠햄 내각과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국왕은 대피트가 이전에 정부 정책에 반대하고 친하노버적인 조치들을 공격했기 때문에 그를 싫어했다. 1746년 2월, 펠햄과 그의 지지자들은 사임했다. 조지 2세는 배스 백작윌리엄 풀트니와 카터레트에게 내각 구성을 요청했지만, 48시간도 채 안 되어 충분한 의회 지지를 확보할 수 없다며 공직 인장을 반납했다. 펠햄은 승리하여 다시 집권했고, 조지 2세는 마지못해 대피트를 내각에 임명해야 했다.
조지 2세의 프랑스 적들은 가톨릭 왕위 요구자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노(老)왕위 요구자)를 지지하는 자코바이트의 자코바이트 반란을 부추겼다. 스튜어트는 1688년에 폐위되고 개신교 친척으로 대체된 제임스 2세의 아들이었다. 이전의 1715년과 1719년 두 차례의 반란은 실패했다. 1745년 7월, 노(老)왕위 요구자의 아들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보늬 프린스 찰리 또는 소(少)왕위 요구자)가 스코틀랜드에 상륙했는데, 그곳에서 그의 대의에 대한 지지가 가장 높았다. 하노버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던 조지 2세는 8월 말 런던으로 돌아왔다. 자코바이트들은 9월 프레스턴팬스 전투에서 영국군을 물리친 후 남쪽으로 잉글랜드로 진격했다. 그러나 자코바이트들은 추가적인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고, 프랑스도 도움 약속을 어겼다. 사기가 저하된 자코바이트들은 스코틀랜드로 퇴각했다. 1746년 4월 27일, 찰스는 조지 2세의 군인적 성향을 지닌 아들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과 컬로든 전투에서 맞붙었으며, 이는 영국 본토에서 벌어진 마지막 대규모 전투였다. 패배한 자코바이트 군대는 정부군에 의해 완전히 격멸되었다. 찰스는 프랑스로 도망쳤지만, 그의 많은 지지자들은 붙잡혀 처형되었다. 자코바이트주의는 거의 진압되었고, 이후 스튜어트 왕조의 복원을 위한 심각한 시도는 더 이상 없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1748년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대공비로 인정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평화는 런던의 그린 파크에서 열린 축제로 기념되었으며, 이를 위해 헨델은 《왕궁의 불꽃놀이》를 작곡했다.
4.3.2. 7년 전쟁


1747년 영국 총선에서 웨일스 공 프레더릭은 다시 야당을 위해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을 벌였지만, 펠햄 당은 쉽게 승리했다. 그의 아버지처럼 프레더릭은 레스터 스퀘어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야당 인사들을 접대했다. 프레더릭이 1751년에 갑자기 사망하자, 그의 장남인 조지 3세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국왕은 프레더릭의 미망인인 아우구스타에게 조의를 표하고 그녀와 함께 울었다. 그의 손자가 1756년까지 성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영국 섭정법이 통과되어 조지 2세 사망 시 아우구스타가 섭정이 되고 프레더릭의 동생 윌리엄이 이끄는 위원회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국왕은 또한 새로운 유언장을 작성하여 윌리엄이 하노버의 단독 섭정이 되도록 규정했다. 그 해 말 딸 루이즈가 사망하자, 조지 2세는 "올해는 우리 가족에게 비극적인 해였다. 나는 장남을 잃었다 - 하지만 기쁘다... 이제 루이즈도 떠났다. 나는 어렸을 때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들이 내 방에 뛰어들어오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아버지들처럼 그들을 사랑한다."고 한탄했다.
1754년 펠햄이 사망하자, 그의 형인 뉴캐슬 공작토머스 펠햄 홀스가 뒤를 이었다. 특히 북아메리카 식민지화 문제를 둘러싼 프랑스와 영국의 적대 관계는 계속되었다. 하노버에 대한 프랑스의 침략을 우려한 조지 2세는 오스트리아의 적국인 프로이센(Frederick the Great프리드리히 대왕독일어)과 동맹을 맺었다. 러시아와 프랑스는 그들의 옛 적국인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의 영국령 미노르카섬 침략은 1756년 7년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갈등 초기 영국군의 실패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뉴캐슬 공작의 사임과 데번셔 공작윌리엄 캐번디시의 총리 임명, 그리고 대피트의 남부 국무장관 임명으로 이어졌다. 다음 해 4월 조지 2세는 자신의 뜻에 더 맞는 행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대피트를 해임했다. 이어지는 세 달 동안 안정적인 내각 구성을 위한 시도는 실패했다. 6월에는 월데그레이브 백작제임스 월데그레이브가 불과 4일 동안만 공직 인장을 맡았다. 7월 초에는 대피트가 다시 소환되고 뉴캐슬 공작이 총리로 복귀했다. 국무장관으로서 대피트는 전쟁 관련 정책을 지휘했다. 그레이트브리튼, 하노버, 프로이센과 그들의 동맹인 헤센카셀 방백국과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후국은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작센 선제후국을 포함한 다른 유럽 강대국들과 맞서 싸웠다. 전쟁은 유럽에서 북아메리카와 인도에 이르는 여러 전선에서 벌어졌으며, 로버트 클라이브가 아르콧 공방전과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그 동맹군에게 승리하면서 영국의 지배력이 강화되었다.
조지 2세의 아들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은 북독일에서 국왕의 군대를 지휘했다. 1757년 하노버가 침략당하자 조지 2세는 아들에게 단독 평화를 체결할 전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9월에 조지 2세는 윌리엄이 협상한 합의에 대해 크게 분노했는데, 그는 그것이 프랑스에 크게 유리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조지 2세는 아들이 "나를 망치고 자신을 욕보였다"고 말했다. 윌리엄은 자의로 군직에서 사임했고, 조지 2세는 프랑스가 휴전 후 헤센군을 무장 해제함으로써 협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평화 조약을 철회했다.
1759년의 기적적인 해(Annus Mirabilis영어)에 영국군은 에이브러햄 평원 전투에서 퀘벡을 점령하고 과들루프를 점령했으며, 라고스 해전과 키브롱 만 해전에서 해전 승리 후 프랑스의 영국 침공 계획을 좌절시켰다. 또한 하노버에 대한 프랑스의 재개된 진격을 민덴 전투에서 저지했다.
5. 말년과 죽음
조지 2세의 말년은 노쇠와 건강 문제로 점철되었지만, 그의 죽음은 그가 통치했던 시대의 끝을 알리며 새로운 왕조의 시작을 예고했다.
5.1. 계승 계획과 건강
1747년 영국 총선에서 웨일스 공 프레더릭은 다시 야당을 위해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을 벌였지만, 펠햄 당은 쉽게 승리했다. 그의 아버지처럼 프레더릭은 레스터 스퀘어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야당 인사들을 접대했다. 프레더릭이 1751년에 갑자기 사망하자, 그의 장남인 조지 3세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국왕은 프레더릭의 미망인인 아우구스타에게 조의를 표하고 그녀와 함께 울었다. 그의 손자가 1756년까지 성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영국 섭정법이 통과되어 조지 2세 사망 시 아우구스타가 섭정이 되고 프레더릭의 동생 윌리엄이 이끄는 위원회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국왕은 또한 새로운 유언장을 작성하여 윌리엄이 하노버의 단독 섭정이 되도록 규정했다. 그 해 말 딸 루이즈가 사망하자, 조지 2세는 "올해는 우리 가족에게 비극적인 해였다. 나는 장남을 잃었다 - 하지만 기쁘다... 이제 루이즈도 떠났다. 나는 어렸을 때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들이 내 방에 뛰어들어오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아버지들처럼 그들을 사랑한다."고 한탄했다. 1760년 10월에는 한쪽 눈이 실명하고 청력도 약해졌다. 또한 그는 당뇨병을 앓고 있었다.
5.2. 죽음
1760년 10월 25일 아침, 조지 2세는 평소처럼 오전 6시에 일어나 뜨거운 초콜릿 한 잔을 마시고 혼자서 간이 변기로 향했다. 몇 분 후, 그의 시종이 큰 소리를 듣고 방으로 들어갔을 때, 국왕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조지 2세는 침대로 옮겨졌고 아멜리아 공주가 불려왔지만,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그는 사망했다. 거의 77세의 나이로 그는 이전의 어떤 잉글랜드 또는 영국 군주보다 오래 살았다. 부검 결과 조지 2세는 흉부 대동맥 박리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그의 손자 조지 3세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11월 11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자신과 아내의 관 옆면을 제거하여 그들의 유해가 섞일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남겼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힌 마지막 국왕이 되었다. 조지 2세의 사망은 7년 전쟁과 프랑스와의 일련의 식민지 전쟁이 1763년 파리 조약으로 끝나기 약 3년 전이었으나, 이때 영국의 승리는 거의 확실시되었다.
6. 유산과 평가
조지 2세의 통치 기간은 영국과 세계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의회 중심 정치의 확립과 영국의 전 세계적 세력 확장에 기여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초기에는 부정적이었으나, 후대에 이르러 그의 영향력이 재평가되었다.
6.1. 문화 및 제도적 기여


조지 2세는 대영박물관 설립 4년 후인 1757년에 왕립 도서관 장서를 대영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는 독서나 예술, 과학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여가 시간에는 말을 타고 사슴 사냥을 하거나 카드놀이를 즐겼다. 1737년 그는 하노버 선제후국 최초의 대학인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괴팅겐 대학교를 설립했으며, 1748년에 이 대학을 방문했다. 1902년에는 그를 기려 소행성 359가 조지아로 명명되었다. 그는 1716년부터 1727년까지 더블린 대학교의 총장을 지냈고, 1754년에는 뉴욕시의 킹스 칼리지(나중에 컬럼비아 대학교가 됨)에 칙허장을 부여했다. 1732년 왕실 칙허장으로 설립된 조지아 식민지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조지 2세의 재위 기간 동안 영국의 이익은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었고, 하노버 왕조에 대한 자코바이트의 위협은 종식되었으며, 영국에서 대신들과 의회의 권력이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같은 예술가들이 왕실의 후원을 받아 번성했다. 1743년 헨델의 《메시아》가 런던 왕립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당시, '할렐루야' 합창 부분에서 조지 2세가 감격하여 일어섰고, 이에 따라 다른 관객들도 기립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6.2. 역사적 평가와 비판
허비 경이나 호러스 월폴과 같은 동시대인들의 회고록에서 조지 2세는 아내와 대신들에게 좌우되는 약하고 어리석은 인물로 묘사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쓰인 조지 2세의 전기들은 이러한 편향된 기록에 의존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현존하는 서신들에 대한 학술적 분석을 통해 조지 2세가 이전에 생각했던 것만큼 무능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대신들이 보낸 편지에는 조지 2세가 적절한 논평을 달아 놓았으며, 이는 그가 특히 외교 정책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싫어하는 대신이나 지휘관의 임명을 막거나, 그들을 한직으로 밀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술적 재평가에도 불구하고 조지 2세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약하고 우스꽝스러운 왕"이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그의 검약함은 종종 조롱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의 전기 작가들은 낭비보다는 검약이 낫다고 지적했다。 찰러몬트 백작제임스 콜필드는 조지 2세의 다혈질적인 성격을 변호하며, 감정에 솔직한 것이 기만보다 낫다고 설명했다. "그의 성격은 충동적이고 다혈질적이었지만, 그는 성품이 좋고 진실했다. 왕족으로서 위장을 하는 기술은 전혀 없었고, 그는 항상 겉으로 보이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사람을 화나게 할 수도 있었지만, 결코 속이지는 않았다." 월데그레이브 백작제임스 월데그레이브는 "시간이 흘러 가장 빛나는 인물들조차도 피할 수 없는 흠과 오점이 지워지면, 그는 국민이 가장 큰 행복을 누린 애국적인 왕들 중 한 명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나는 전적으로 확신한다"고 썼다.
조지 2세는 역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때로는 영향력을 행사했고 입헌 정부를 지지했다. 엘리자베스 몬태규는 그에 대해 "그와 함께 우리의 법과 자유는 안전했다. 그는 국민의 신뢰와 외국 정부의 존경을 크게 받았고, 그의 안정적인 성격은 이러한 불안정한 시기에 큰 중요성을 가졌다. 그의 성격은 서사시의 주제가 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역사의 차분한 페이지에서는 잘 보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7. 칭호, 경칭 및 문장
7.1. 칭호와 경칭
조지 2세가 생애 동안 사용했던 주요 칭호와 경칭은 다음과 같다.
- 1706년부터: 케임브리지 공작 및 후작, 밀포드헤이븐 백작, 노설럴턴 자작, 테위크스베리 남작(Duke and Marquess of Cambridge, Earl of Milford Haven, Viscount Northallerton and Baron of Tewkesbury영어)
- 1714년 8월부터 9월까지: 전하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그레이트브리튼 왕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자, 콘월 공작 및 로스시 공작 등 (His Royal Highness George Augustus, Prince of Great Britain, Electoral Prince of Brunswick-Lüneburg, Duke of Cornwall and Rothesay, etc.)
- 1714년부터 1727년까지: 전하 웨일스 공 (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of Wales)
- 1727년부터 1760년까지: 폐하 국왕 (His Majesty The King)
조지 2세의 완전한 칭호는 "조지 2세, 신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프랑스 및 아일랜드의 국왕, 신앙의 수호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신성 로마 제국의 대(大)재무관 및 선제후"였다.
7.2. 문장
조지 2세가 1714년 웨일스 공이 되었을 때, 그는 왕실 문장에 하노버를 나타내는 붉은색의 인에스커천이 더해졌고, 세 개의 은색 레이블로 구별되었다. 크레스트에는 그의 지위를 나타내는 하나의 아치형 코로넷이 포함되었다. 국왕으로 즉위한 후에는 그의 아버지와 동일한 왕실 문장을 변경 없이 사용했다.
8. 가족
조지 2세의 가계도는 그의 조상과 자녀들을 통해 그의 혈통을 보여준다.
8.1. 조상
조지 2세 | 아버지: 조지 1세 | 할아버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하노버 선제후) | 증조할아버지: 브라운슈바이크칼렌베르크 공작 게오르크 |
---|---|---|---|
증조할머니: 헤센다름슈타트의 안나 엘레오노레 | |||
할머니: 하노버의 조피 | 증조할아버지: 프리드리히 5세 (팔츠 선제후) | ||
증조할머니: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 |||
어머니: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 | 할아버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게오르크 빌헬름 | 증조할아버지: 브라운슈바이크칼렌베르크 공작 게오르크 | |
증조할머니: 헤센다름슈타트의 안나 엘레오노레 | |||
할머니: 엘레오노르 데스미에르 돌브뢰즈 | 증조할아버지: 알렉상드르 | ||
증조할머니: 자케트 |
8.2. 자녀
카롤라인 왕비는 10번 또는 11번의 임신으로 8명의 자녀를 출산했으며, 이 중 7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웨일스 공 프레더릭 | 1707년 2월 1일 | 1751년 3월 31일 | 1736년 작센고타의 아우구스타와 결혼; 훗날 조지 3세를 포함한 자녀를 둠. |
프린세스 로열 앤 | 1709년 11월 2일 | 1759년 1월 12일 | 1734년 오라녜 공 빌럼 4세와 결혼; 자녀를 둠. |
아멜리아 소피아 | 1711년 6월 10일 | 1786년 10월 31일 | 미혼, 자녀 없음. |
카롤라인 엘리자베스 | 1713년 6월 10일 | 1757년 12월 28일 | 미혼, 자녀 없음. |
사산된 아들 | 1716년 11월 20일 | 1716년 11월 20일 | |
조지 윌리엄 왕자 | 1717년 11월 13일 | 1718년 2월 17일 | 유아기에 사망. |
유산 | 1718년 | 1718년 | |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 1721년 4월 26일 | 1765년 10월 31일 | 미혼, 자녀 없음. |
메리 왕녀 | 1723년 3월 5일 | 1772년 1월 14일 | 1740년 헤센카셀 방백 프리드리히 2세와 결혼; 자녀를 둠. |
루이즈 왕녀 | 1724년 12월 18일 | 1751년 12월 19일 | 1743년 덴마크와 노르웨이 국왕 프레데리크 5세와 결혼; 자녀를 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