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에렌프리트 발터 폰 치른하우스는 1651년 4월 10일 작센 선제후국의 키슬링스발데(Kieslingswalde, 현재 폴란드의 스와니코비체)에서 태어나 1708년 10월 11일 드레스덴에서 사망했다. 그의 삶은 광범위한 학문적 탐구와 당대 주요 지식인들과의 활발한 교류로 특징지어진다.
1.1. 유년기와 교육
치른하우스는 괴를리츠의 김나지움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후 레이던 대학교에 진학하여 수학, 철학, 의학을 공부했다. 레이던 대학교에서의 학업은 그의 폭넓은 학문적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시기였다.
1.2. 초기 활동과 교류
대학 졸업 후 치른하우스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등 유럽 각지를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1672년부터 1673년까지는 네덜란드 군대에서 복무하기도 했다. 이 시기 동안 그는 여러 저명한 학자들과 만나 교류를 시작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스피노자와 호이겐스를 만났고, 영국에서는 아이작 뉴턴을, 파리에서는 라이프니츠를 만났다. 특히 라이프니츠와는 평생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적 교류를 이어갔다. 그는 또한 파리의 왕립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2. 주요 업적
치른하우스는 수학, 철학, 응용 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유럽 자기 발명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2.1. 수학 분야
치른하우스는 대수 방정식의 특정 중간 항을 제거하는 방법인 치른하우스 변형을 고안하여 1683년 과학 학술지 악타 에루디토룸에 발표했다.
1682년에는 카타카우스틱 곡선에 대한 이론을 개발하고, 이 곡선이 정류 가능 곡선임을 보였다. 이는 움직이는 선의 포락선이 결정된 두 번째 사례였다. 포물선의 카타카우스틱 곡선 중 하나는 오늘날에도 치른하우스 삼차곡선으로 알려져 있다.
1696년 요한 베르누이가 악타 에루디토룸 독자들에게 최단 강하 곡선 문제를 제기했을 때, 치른하우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여 답을 제출한 단 5명의 수학자 중 한 명이었다. 베르누이는 이듬해 5월 학술지에 치른하우스의 기여를 포함한 해답들을 자신의 해답과 함께 발표했다.
수학 이론 외에도 치른하우스는 다양한 종류의 렌즈와 거울을 제작했으며, 그중 일부는 현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는 작센 왕국에 대규모 유리 공장을 세워 (1687년~1688년) 뛰어난 품질의 집광 렌즈를 제작하고 실험을 수행했다.
2.2. 철학 분야
치른하우스의 저서 정신의 의학, 즉 발견술의 일반 원칙(Medicina mentis sive artis inveniendi praecepta generali, 1687)은 연역법과 경험주의적 방법을 결합하여 그의 철학이 계몽주의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치른하우스는 오랫동안 철학자로서 잊혀졌으며, 그를 다루는 연구들은 주로 그와 동시대 철학자 및 과학자들과의 연관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레이던 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스피노자와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했으며, 이후 라이프니츠와도 교류했다. 치른하우스는 스피노자의 걸작 에티카의 초판본을 가장 먼저 입수했던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바티칸 도서관에 소장된 유일한 출판 전 사본이 치른하우스의 것일 수 있다고 추정된다. 스피노자와의 보존된 서신에서 그는 에티카의 일부 주장에 대해 여러 이의를 제기했는데, 예를 들어 속성들의 즉각적인 무한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 등이 있었다.
2.3. 도자기 발명
치른하우스는 작센 선제후국으로 돌아온 후,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 고가로 수입되던 자기를 개발하기 위해 다양한 규산염과 흙 혼합물을 여러 온도에서 체계적으로 실험하기 시작했다. 이미 1704년에 그는 라이프니츠의 비서에게 자신이 만든 "자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폴란드의 왕이자 작센의 선제후였던 아우구스트 2세에게 자기 공장 설립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또한 1704년에 치른하우스는 금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던 19세의 연금술사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의 감독관이 되었다. 뵈트거는 마지못해 압력 하에 1707년이 되어서야 치른하우스의 연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슈네베르크에서 채굴된 고령토와 설화 석고의 사용은 연구를 진전시켰고, 이에 아우구스트 2세는 그를 설립 예정인 자기 공장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선제후는 치른하우스에게 2,561 탈러의 지불을 명령했으나, 치른하우스는 공장이 생산을 시작할 때까지 지불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1708년 10월 11일 치른하우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자기 발명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치른하우스 사망 사흘 뒤, 그의 집에서 강도 사건이 발생했으며, 뵈트거의 보고에 따르면 작은 자기 조각이 도난당했다. 이 보고는 뵈트거 자신이 치른하우스가 이미 자기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음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는 뵈트거가 아닌 치른하우스가 자기의 발명가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1709년 3월 20일, 멜히오어 슈타인브뤼크가 사망한 치른하우스의 유산을 평가하기 위해 도착했다. 이 유산에는 자기 제조에 대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었고, 슈타인브뤼크는 뵈트거를 만났다. 1709년 3월 28일, 뵈트거는 아우구스트 2세에게 자기 발명을 발표했다. 뵈트거는 이후 유럽 최초의 자기 제조 공장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슈타인브뤼크는 감사관이 되었고 뵈트거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당대 지식인들의 증언은 치른하우스가 자기를 발명했음을 시사한다. 예를 들어, 1719년 마이센 자기 공장의 사무엘 슈퇼첼은 아직 비밀이었던 제조법을 가지고 빈으로 가서, 그 제조법이 뵈트거가 아닌 치른하우스에 의해 발명되었다고 확인했다. 같은 해 마이센 공장의 사무총장 또한 발명이 뵈트거의 것이 아니라 "고(故) 치른하우스 씨의 것이며, 그의 필기된 과학이 슈타인브뤼크 감사관에 의해 뵈트거에게 전달되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뵈트거의 이름은 자기 발명과 밀접하게 연관되게 되었다.
3. 저서
치른하우스는 여러 학술 저서를 집필했으며, 그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Medicina corporis (Medicina corporis메디치나 코르포리스라틴어), 암스테르담, 1686년.
- 완전한 제목은 Medicina corporis, seu Cogitationes admodum probabiles de conſervandâ Sanitate (신체의 의학, 또는 건강을 매우 높은 확률로 보존하는 기법)이다.
- Medicina mentis (Medicina mentis메디치나 멘티스라틴어), 암스테르담, 1687년.
- 완전한 제목은 Medicina mentis, sive Tentamen genuinæ Logicæ, in quâ diſſeritur de Methodo detegendi incognitas veritates (정신의 의학, 또는 미지(未知)의 진리의 발견법에 대해 논하는 어떤 참된 논리)이다.
- Medicina mentis et corporis (Medicina mentis et corporis메디치나 멘티스 에트 코르포리스라틴어), 1964년 (빌헬름 리세 서문 포함 재판).
4. 사망
치른하우스는 1708년 10월 11일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당시 진행 중이던 자기 발명 프로젝트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사망한 지 사흘 뒤 그의 집에서 자기 샘플이 도난당했다는 뵈트거의 보고는 치른하우스가 이미 생전에 자기 제조법을 거의 완성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았다. 치른하우스의 사망으로 인해 자기 프로젝트는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으나, 그의 연구 노트와 자료는 멜히오어 슈타인브뤼크를 통해 뵈트거에게 전달되었고, 이는 뵈트거가 이듬해 자기 발명을 발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5. 평가와 영향
치른하우스는 다방면에 걸친 재능과 업적에도 불구하고, 특히 자기 발명과 관련하여 역사적 평가에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5.1. 역사적 평가 및 논란

치른하우스는 수학자, 물리학자, 의사, 철학자로서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다양한 분야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그의 수학적 업적인 치른하우스 변형과 카타카우스틱 이론, 그리고 브라키스토크론 문제 해결은 그의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보여준다. 철학 분야에서는 경험주의와 연역법을 결합한 사상으로 계몽주의와 연결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논란은 유럽 자기 발명에 대한 기여와 관련되어 있다. 오랫동안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가 유럽 자기의 발명가로 알려져 왔으나, 많은 증거와 동시대 증언들은 치른하우스가 뵈트거보다 먼저 자기 제조법을 개발했음을 시사한다. 치른하우스는 체계적인 실험을 통해 자기 제조 기술을 거의 완성했으며, 뵈트거는 그의 감독 하에 일하면서 치른하우스의 연구 노트를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이어갔다. 치른하우스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 이후 그의 집에서 자기 샘플이 도난당한 사건, 그리고 뵈트거가 치른하우스의 연구 자료를 넘겨받아 자기 발명을 발표한 정황 등은 치른하우스의 선구자적 역할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뵈트거의 이름이 자기 발명과 더 밀접하게 연관된 것은 역사적 평가에서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5.2. 후대에 미친 영향
치른하우스의 수학적 업적은 대수학 및 기하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특히 치른하우스 변형은 후대 수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철학 저서 정신의 의학은 연역적 추론과 경험적 관찰을 결합하려는 시도로, 계몽주의 시대의 사상적 흐름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기술 분야에서 그의 유리 공장 설립과 고품질 렌즈 및 거울 제작 경험은 광학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유럽 자기 발명에 대한 그의 선구적인 연구는 마이센 자기를 비롯한 유럽 자기 산업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비록 그의 이름이 뵈트거만큼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지라도, 그의 과학적 방법론과 체계적인 실험 정신은 후대 과학자와 기술자들에게 중요한 유산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