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야마모토 고지(山本 浩二일본어, 1946년 10월 25일 ~ )는 일본의 전 야구 선수이자 야구 감독, 야구 해설가이자 야구 평론가이다. 본명은 야마모토 고지(山本 浩司)였으며, 1974년까지 등록명으로 사용했다. 현역 시절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외야수로 활약했으며, '미스터 빨간 헬멧'(ミスター赤ヘル미스터 아카헤루일본어)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사랑받았다.
그는 선수 생활 내내 히로시마 카프에서 뛰며 1975년 구단 역사상 첫 리그 우승을 포함해 총 5번의 센트럴 리그 우승과 1979년, 1980년, 1984년 세 차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1977년부터 5년 연속으로 4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오 사다하루와 함께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단 두 명만이 달성한 기록이다. 통산 536홈런으로 NPB 통산 홈런 순위 4위에 올라 있으며, 대학 출신 선수로는 유일하게 500홈런을 달성한 인물이다. 또한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현재의 골든 글러브상)을 센트럴 리그 외야수로는 최초로 수상했으며, 센트럴 리그 최다 기록인 10회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선수 은퇴 후에는 NHK 야구 해설위원을 거쳐 1989년부터 1993년,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친정팀 히로시마의 감독을 역임했다. 특히 1991년에는 팀을 센트럴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2008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2014년부터 2022년까지 이사장직을 수행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팀 코치와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팀을 4강까지 이끌기도 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야마모토 고지는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사에키구 (구 사에키군 이쓰카이치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전 군인이었으며, 전후에는 건축 관련 일을 했다. 어머니와 두 명의 형, 누나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겪은 피폭자였으며, 야마모토 자신은 피폭 2세이다.
2.1. 출생 및 어린 시절
야마모토의 부모님은 카프의 열렬한 팬이었고, 어린 시절 야마모토는 부모님을 따라 당시 히로시마 카프의 홈구장이었던 히로시마현 종합 그라운드 야구장에 오타강 건너편 강가에서 나룻배를 타고 여러 번 다녔다. 이 시기에 그는 히로시마의 주력 선수였던 투수 하세가와 료헤이, 4번 타자 고즈루 마코토, 가나야마 지로 등의 플레이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특히 고즈루의 타격 폼을 따라 할 정도로 동경하며 야구 선수의 꿈을 키웠다.
자신의 힘으로 고시엔 대회에 진출하고, 또한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둔 가족의 뜻에 따라 야구에서는 전혀 무명이었던 히로시마현립 하쓰카이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 학교는 너무나 무명이었기에, 훗날 호세이 대학 시절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전에서 와세다의 에이스 야기사와 소로쿠로부터 결승 적시타를 터뜨려 각광을 받았을 때, 당시 신문에는 "감일시 고등학교 출신"이라고 잘못 보도되기도 했다. 육상부에서 선수를 빌려와야 겨우 9명을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열악한 야구부였으며, 입학과 동시에 팀의 에이스이자 4번 타자가 되었다. 당시 현내 동기 선수로는 다카하시 가즈미, 오가와 구니카즈 등이 있었고, 한 학년 위인 마에하라 도미와도 대결한 경험이 있다. 3학년 때는 주장으로서 여름 고시엔 현 예선에 참가하여 고시엔에 거의 다다랐으나, 준결승에서 에이스 가와모토 가즈아키 (훗날 산케이 스왈로스 1순위 지명을 거부)를 앞세운 강호 고료 고등학교에 17안타를 허용하며 1대9로 패배했다.
2.2. 학력
난카이 호크스의 쓰루오카 가즈토 감독이 오사카와 히로시마에 '초친카이'라는 후원회를 가지고 있었는데, 히로시마 후원회에서 쓰루오카에게 야마모토를 추천했다. 쓰루오카 감독은 하쓰카이치 고등학교의 야구장을 직접 시찰한 후, "투수로서는 부족하지만, 타격은 좋다. 그러나 1군에서 통하려면 몇 년이 걸릴 것 같다"고 판단하여 "지금 프로에 들어와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며 대학 진학을 권유했다. 야마모토는 그 말에 따라 1965년 고등학교 졸업 후, 쓰루오카의 모교인 호세이 대학 문학부 영어영문학과에 진학했다.
호세이 대학 야구부에 투수로 입단했지만, 1학년 신입생만 70~80명에 달하던 당시 호세이 대학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곧바로 엘리트 코스(합숙조)에 들어간 다부치 고이치와 달리, 도미타 마사루, 구와바라 히데노리 등과 함께 일반 부원의 위치에 머물렀다. 1년 반 동안 매일 타격 투수를 하던 중, 고묘 기미오의 타구에 오른팔을 맞아 일주일간 훈련을 쉬게 되었다. 복귀 후 마쓰나가 레이이치 감독이 "너, 한번 쳐봐라"라고 말했고, 다부치가 3, 4학년이 되었을 때 그 전후를 칠 타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마쓰나가 감독은 야마모토와 도미타 두 사람에게만 매일 밤늦게까지 격렬한 노크를 시키며 외야수로 전향시켰다. 2학년 가을부터 레귤러로 정착했으며, 한 학년 후배인 야마나카 마사타케 투수의 입부를 계기로 마쓰나가 감독으로부터 개인 특별 훈련을 받아 타격 재능이 꽃피워 클린업 타자로 발탁되었다. 이후 야마모토는 다부치, 도미타와 함께 '호세이 삼총사'(法政三羽ガラス)라는 별명을 얻으며 호세이 대학 황금 시대를 구축하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서는 재학 중 3차례의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1968년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결승에서 고마자와 대학을 꺾고 우승했다. 리그 통산 65경기에 출전하여 229타수 67안타, 타율 .293 , 8홈런, 30타점의 성적을 남겼고, 베스트 나인에 2회 선정되었다.
야마모토는 고향 팀인 히로시마 카프에 입단하기를 열망했다. 당시 히로시마는 창단 19년 동안 A클래스 진입이 1회에 불과하고 B클래스 18회를 기록한 약체 구단이었지만, 그는 아직 우승 경험이 없는 고향 팀을 우승시키는 꿈을 꾸고 있었다. 프로 입단을 불안해하는 가족들의 걱정도 있었기에, 만약 히로시마가 아닌 다른 팀에 지명된다면 거절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샐러리맨으로서의 삶도 고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야구계의 '풍작년'으로 알려진 1968년 드래프트에서 예비 추첨 2번이었던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1순위로 지명되어 입단했다. 입단 당시 그의 등번호는 27번이었다.
3. 선수 경력
야마모토 고지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상징적인 선수이자 일본 프로 야구의 전설적인 타자로, 그의 선수 경력은 팀의 황금기와 궤를 같이한다. 그는 뛰어난 타격 능력과 견고한 수비, 그리고 팀에 대한 헌신으로 '미스터 빨간 헬멧'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3.1. 프로 입단 및 히로시마 카프 시절
1969년 4월 12일 개막전에서 6번 타자 겸 중견수로 선발 출전하며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이후에도 레귤러 선수로 기용되었고, 8월부터는 클린업 타자를 맡기도 했다. 같은 해 규정 타석을 채우며 타율 .240을 기록했고, 1번부터 9번까지 모든 타순을 경험했다.
1970년에는 주로 3번 타자, 1971년에는 5번 타자로 기용되었다. 1972년에는 1번이나 5번 타자를 맡았으며, 5월 11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는 2대2 동점인 9회 1사 1,2루 상황에서 당시 호시노 센이치로부터 끝내기 안타를 터뜨렸다. 6월 10일 가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다이요 웨일스전에서는 1점 뒤진 9회 2사 만루 상황에서 고타니 마사카쓰로부터 역전 만루 홈런을 기록하며 개인 첫 만루 홈런을 쏘아 올렸다. 네모토 리쿠오 감독, 세키네 준조 타격 코치, 우에다 도시하루 코치 (신인 시절 퇴단), 히로오카 다쓰로 내야 수비 코치 등 여러 지도자들의 지도를 받으며 점차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1971년부터는 야마우치 가즈히로의 은퇴로 그의 등번호 8번을 물려받아 현역 은퇴까지 착용했다.
1974년에는 주로 3번 타자로 기용되어 타율 .275, 28홈런 (리그 5위), 74타점이라는 좋은 성적을 남겼다. 같은 해 5월 23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전에서는 5회에 호시노 센이치로부터 만루 홈런을 기록했고, 8월 27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는 1대1 동점인 연장 11회에 아사노 게이지로부터 개인 첫 끝내기 홈런을 터뜨렸다. 같은 해 시즌 종료 후, 성명 판단에서 '고지(浩司)라는 이름은 승부사에게 맞지 않는다'는 조언을 받아 이름을 '浩司'에서 '浩二'로 개명했다.
1975년 6월 하순부터 4번 타자로 고정되었고, 그 해 올스타전 1차전(한신 고시엔 구장)에서는 센트럴 리그의 3번 타자로서 4번 오 사다하루, 5번 다부치 고이치와 함께 클린업 타선을 형성했으며, 6번 타자로 출전한 기누가사 사치오와 함께 2타석 연속 아베크 홈런을 기록했다. 8월에는 타율 .300, 7홈런, 19타점을 기록하며 월간 MVP에 선정되었다. 시즌 내내 좋은 타격감을 유지하며 개인 첫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다. 최종적으로 타율 .319, 30홈런, 84타점, 24도루라는 개인 최고 성적을 기록하며 생애 첫 시즌 타율 3할과 30홈런을 동시에 달성했다. 이 해 팀의 창단 첫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으며, 동시에 시즌 MVP에 선정되었다. 리그 우승이 확정된 10월 15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는 감격에 북받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이 시즌부터 히로시마 카프는 빨간 헬멧을 채택했고, 야마모토의 애칭인 '미스터 빨간 헬멧'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6경기에서 24타수 8안타 5타점, 3차전과 4차전에서 홈런을 기록하는 등 활약했으나, 팀은 일본 시리즈 우승에는 실패했다. 이 시리즈에서 그는 감투상에 선정되었다.
1976년에는 잠시 부진했지만, 1977년에는 오 사다하루에 이어 리그 2위인 44홈런과 113타점을 기록했다. 같은 해부터 5년 연속 40홈런 이상을 기록했는데, 이 기록은 오 사다하루와 야마모토만이 보유하고 있는 대기록이다. 5월 22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는 4회에 다카하시 요시마사로부터 역전 만루 홈런을 터뜨렸고, 10월 9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한신 타이거스전에서는 옛 동료였던 아니야 소하치로부터 끝내기 2점 홈런을 쏘아 올렸다.
1978년에는 44홈런으로 개인 첫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하며 구단 역사상 최초의 홈런왕이 되었고, 리그 2위인 112타점을 기록했다. 이 홈런왕 등극은 오 사다하루의 2년 연속 홈런왕 타이틀 획득을 저지한 것이기도 했다.
이듬해 1979년 5월까지 타율이 .230대로 떨어지는 등 슬럼프에 빠졌으나, 아내의 지지에 힘입어 6월 이후 회복세를 보였다. 올스타전 3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는 5대5 동점인 9회 무사 1루 상황에서 야나기다 유타카로부터 끝내기 2점 홈런을 터뜨리며 MVP에 선정되었다. 같은 해 리그 2위인 42홈런을 기록했으며, 113타점으로 개인 첫 타점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는 오 사다하루의 8년 연속 타점왕 획득을 저지한 것으로, 야마모토가 강타자로서 재평가받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팀은 2번째 리그 우승과 첫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으나,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7경기에서 23타수 3안타 2타점 1홈런으로 진가를 발휘하지 못했다.
1980년 7월 8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는 1점 뒤진 6회 1사 만루 상황에서 가토리 요시타카로부터 역전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 시즌에서는 44홈런, 112타점으로 2관왕을 차지했으며, 타율도 리그 3위인 .336를 기록했다. 또한 득점, 루타수, 볼넷, 장타율, 출루율 등 모든 부문에서 리그 최고 성적을 거두었다. 2번째 MVP에도 선정되었으며, 기누가사 사치오와의 500홈런 콤비는 'YK포''라고 불리며, 오 사다하루와 나가시마 시게오 콤비의 ON포 (통산 106홈런)에 이어 일본 프로 야구 역대 2위인 86개의 아베크 홈런을 기록했다. 같은 해 긴테쓰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도 2홈런을 터뜨리며 2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81년 6월 23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한신 타이거스전에서는 6회에 야마모토 가즈유키로부터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시즌에서는 43홈런, 103타점으로 2년 연속 2관왕을 차지했다.
1982년 8월 6일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열린 야쿠르트전에서는 6회에 스즈키 마사유키로부터 만루 홈런을 터뜨렸다.
1983년에는 나가시마 기요유키와 야마자키 류조가 두각을 나타내면서 좌익수로 전향했다. 4월 24일 도쿠야마시 야구장에서 열린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전에서는 9회 1사 만루 상황에서 사이토 아키오로부터 만루 홈런을 기록했고, 4월 30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한신전에서는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했다. 6월 17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전에서는 양 팀 무득점인 연장 12회 무사 무주자 상황에서 우시지마 가즈히코로부터 끝내기 홈런을 터뜨렸다. 7월 5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야쿠르트전에서는 7대7 동점인 9회 무사 무주자 상황에서 구로다 신지로부터 끝내기 홈런을 쏘아 올렸다. 8월 30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한신전에서는 경기 전 타격 연습 중 등 근육 통증으로 인해 결장했다. 이로 인해 1976년 10월 22일 다이요전부터 이어오던 872경기 연속 출장 기록이 중단되었다. 최종적으로 리그 4위인 타율 .316를 기록했으며, 오시마 야스노리와 함께 36홈런으로 개인 4번째 홈런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1984년부터는 타격 코치를 겸임했다. 4월 8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전에서는 2대2 동점인 7회 2사 만루 상황에서 후지사와 기미야로부터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 5월 5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는 4회초 마키하라 히로미로부터 좌전 안타를 터뜨리며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19번째 기록이었다. 올스타전 1차전(고라쿠엔 구장)에서는 1회에 마쓰누마 마사유키로부터 오 사다하루와 타이 기록인 올스타전 통산 13번째 홈런인 3점 홈런을 터뜨렸고, 우수 선수상에 선정되었다. 8월 15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야쿠르트전에서는 1점 뒤진 6회 1사 만루 상황에서 오카와 아키라로부터 통산 10번째 만루 홈런을 기록했고, 같은 달 19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한신전에서는 1회 1사 만루 상황에서 나카니시 기요오키로부터 시즌 3번째 만루 홈런을 쏘아 올렸다. 4번째 우승을 확정한 10월 4일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다이요전에서는 2점 뒤진 6회 무사 1,3루 상황에서 세키네 히로시로부터 역전 결승 3점 홈런을 기록했다.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1차전 3회말 야마다 히사시로부터 동점 적시타, 3차전 2회초 사토 요시노리로부터 선제 솔로 홈런, 4차전 9회초 야마다로부터 결승 적시타를 기록하며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같은 해 오프 시즌인 12월 11일, 오 사다하루(현역 마지막 해인 1980년 당시)를 넘어 야구계 최고액인 추정 연봉 8500.00 만 JPY에 계약을 갱신했다.
1985년 올스타전 3차전(후지이데라 구장)에서는 1회에 무라타 조지로부터 중전 적시타, 5회에 무라타 다쓰미로부터 동점 홈런을 기록하며 오 사다하루를 넘어 올스타전 통산 14홈런이라는 신기록을 경신했고, 우수 선수상에 선정되었다. 7월 26일 나고야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전에서는 스기모토 다다시로부터 홈런을 터뜨리며 통산 500홈런을 달성했다.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4번째 기록이었다. 같은 해 통산 200도루도 달성했는데, 두 기록을 동시에 보유한 선수는 장훈, 야마모토, 기누가사 사치오 단 세 명뿐이다. 같은 해 감독직을 사임한 고바 다케시로부터 "고지, 감독을 맡아라. 플레잉 매니저라도 좋다. 갑자기 감독을 맡아도 좋다. 헤드 코치를 붙여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야마모토는 현역 생활을 고집했고, 결국 아난 준로가 감독으로 취임했다.
1986년, 팀의 리그 우승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40세의 나이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마지막 시즌인 1986년 4월에 타율 .377, 8홈런, 19타점을 기록하며 월간 MVP에 선정되는 등 여전히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8월 10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는 1회에 구와타 시게루로부터 3점 홈런을 터뜨리며 13년 연속 20홈런을 기록했다. 9월 11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전에서는 2대2 동점인 연장 11회 무사 무주자 상황에서 스기모토 다다시로부터 끝내기 홈런을 쏘아 올렸는데, 당시 39세 10개월의 나이는 히로시마 구단 역대 최고령 끝내기 홈런 기록이다.
팀은 130경기 중 129번째 경기인 10월 12일 야쿠르트전에서 리그 우승을 확정 지었다.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 히가시오 오사무로부터 동점 홈런을 터뜨렸는데, 이것이 그의 현역 마지막 홈런이 되었다. 일본 시리즈는 역사상 최초로 8차전까지 진행되는 명승부 끝에 세이부 라이온스에게 우승을 내주었지만, 경기 종료 후 히로시마 선수단으로부터 아쉬움과 존경을 담은 헹가래를 받았으며, 히로시마 시민 구장은 만장의 팬들이 외치는 '고지 콜'로 가득 찼다. 다음날 은퇴 기자회견에서 그는 눈물을 흘리며 "야마모토 고지는 행복한 남자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름이 알려진 대선수라도 프로 데뷔 초나 현역 마지막 연도에는 경기 출전이 적거나 부진한 성적을 남기기도 하지만, 야마모토는 신인 시절부터 은퇴할 때까지 거의 모든 경기에 출전하며 성적이 극단적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없었다. 현역 생활 마지막 시즌인 1986년에도 타율 .276와 27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등 꾸준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고질적인 허리 통증의 악화가 결국 야마모토를 은퇴로 이끈 것으로 여겨진다.
1987년 1월 12일, 히로시마현민 영예상을 수상했다. 4월 5일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오픈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이 그의 은퇴 경기로 치러졌다.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에게는 메시지 카드가 배포되었고, 그는 4번 중견수로 출전하여 2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경기 종료 후 세리머니에서의 인사말에서는 기자회견에서의 말에 덧붙여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카프에 의해 길러졌습니다. 야마모토 고지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하며 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대학 출신 선수로서의 통산 536홈런은 일본 프로 야구 최다 기록이다. 야마모토의 위대한 공적을 기려 그의 등번호 8번은 히로시마 구단 역사상 최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3.2. 선수로서의 특징 및 강점
야마모토 고지는 현역 시절 투수의 투구 패턴을 읽는 데 매우 능숙하여 '읽기의 고지'(読みのコージ)라고도 불렸다. 대부분의 타자들이 넥스트 배터스 서클에서 헛스윙을 하며 상대 투수의 타이밍에 맞추려 하는 것과 달리, 야마모토는 헛스윙을 전혀 하지 않고 한쪽 무릎을 꿇고 미동도 없이 투수의 습관을 꼼꼼히 관찰했다. 막 입단한 가와구치 가즈히사가 투구 연습을 하는 것을 몇 구 지켜본 야마모토는 곧바로 직구와 커브를 던질 때의 가와구치의 습관을 간파하여, 투구 전부터 직구와 커브를 정확히 알아맞혔다.
에가와 스구루는 야마모토와의 대결을 특히 어려워했으며, 은퇴 후 라디오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자신이 아마추어 시절 '괴물'로 불리던 때부터 프로 입단 후 "가장 충격받은 타자"로 야마모토의 이름을 꼽았다.
현역 시절 선호했던 투수로는 대학 시절부터 대결했던 호시노 센이치, 호리우치 쓰네오, 에가와, 우시지마 가즈히코 등을 꼽았다. 가장 많은 홈런을 때려낸 투수는 호리우치로 21홈런이며, 대결한 287명의 투수 중 80타석 이상을 기준으로 한 41명 중에서 대결 타율이 가장 좋았던 투수는 다니무라 도모히로로 .436 (장타율 .809), 두 번째는 스즈키 고지로 .416 (장타율 2위인 1.035)였다. 그는 "다니무라는 우완 정통파로 직구 계열의 높은 공이 많았다. 스즈키 고지는 거의 싱커 계열의 볼이었다. 그것을 당겨치면 당한다. 중견수부터 우익 방향으로 쳤다"고 말했다. 가장 많은 안타를 때려낸 투수는 마쓰오카 히로무로 80안타 (15홈런)였으며, 대결 타율은 .310이었다. 호시노에게는 대결 타율 .351, 10홈런, 출루율 .407을 기록했다. 에가와에게는 대결 타율 .346, 14홈런, 장타율 .887을 기록했다. 우시지마는 포크볼을 주무기로 했지만, 야마모토는 "글러브의 열리는 방식으로 알 수 있었다"고 말했으며, 41타석에서 12안타, 2홈런, 타율 .364를 기록했다. 우에다 지로에게는 대결 타율 .324, 10홈런, 장타율 .814를 기록했다. 야마모토 가즈유키에게는 대결 타율 .359, 11홈런 (좌완 투수로는 유일하게 두 자릿수 홈런), 장타율 .880을 기록했다. 니시모토 사토루에게는 대결 타율 .342, 10홈런을 기록했다. 이토 후미타카에게는 대결 타율 .365, 장타율 1.041 (1위)을 기록했다. 미사와 준에게는 17홈런 (호리우치에 이어 2위), 장타율 .762로 강세를 보였다. 가장 많은 대결을 펼친 투수는 마쓰오카로 297타석이었으며, 삼진이 많았던 투수는 마쓰오카와 고바야시 시게루로 각각 34개였다. 어려워했던 투수는 다카하시 가즈미와 고바야시 시게루로, 대결 타율은 각각 .183와 .194였다. 그는 "가즈미는 동갑이지만 좌완의 스크루볼을 전혀 치지 못했다. 스크루볼이 오기 전에 승부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아까 말한 대로 되지 않았다. 고바야시는 폼이 삐걱거리지 않는가. 나도 여러 가지 형태로 타이밍을 잡으려 했지만 전혀 맞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현역 시절 허리 통증에 시달렸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야마우치 가즈히로에게 지도받았던 인사이드 히팅을 30대에 들어서야 익혔다고 회고했다. 허리에 부담을 주지 않고 공을 멀리 날려 보내는 광각 타법을 습득하여 우익 방향으로 밀어치기 홈런의 명수가 되었고, 이를 통해 장거리 타자로 성장했다.
외야수로서 302수비 기회 연속 무실책이라는 센트럴 리그 기록을 세웠다. 호세이 대학 1학년까지 투수였던 덕분에 강견도 그의 강점이었다. 넓은 수비 범위와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한 정교한 수비 능력을 자랑했다. 수비 기회가 많은 것에 비해 통산 실책 수는 39차례로 적었으며, 공을 잡는 기술이 높고 정확무비한 송구를 했다.
신인 시절부터 은퇴하는 해까지 단 한 해도 빠짐없이 규정 타석을 달성한 선수는 나가시마 시게오와 야마모토 단 두 명뿐이다.
오 사다하루는 홈런 아티스트로 불리며 홈런을 양산했지만, 다부치 고이치는 부상이 잦아 경기에 자주 결장했기 때문에 홈런왕 경쟁에서 크게 위협적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동료인 기누가사 사치오와 함께 몸이 튼튼하여 경기에 거의 빠지지 않았고, 또한 우익 방향으로도 강한 타구로 홈런을 칠 수 있는 야마모토의 존재를 홈런왕의 라이벌로서 더 두려워했다고 한다.
3.3. 주요 기록 및 수상 경력
야마모토 고지는 선수 경력 동안 수많은 기록과 타이틀을 달성하며 일본 프로 야구의 전설로 자리매김했다.
- 수위 타자: 1회 (1975년)
- 홈런왕: 4회 (1978년, 1980년, 1981년, 1983년) ※ 센트럴 리그 우타자 기록
- 타점왕: 3회 (1979년 ~ 1981년)
- 최다 출루수: 3회 (1979년, 1980년, 1983년)
- 최우수 선수 (MVP): 2회 (1975년, 1980년)
- 베스트 나인: 10회 (1975년, 1977년 ~ 1984년, 1986년)
- 외야수로서 10회 수상은 역대 2위 타이, 센트럴 리그 최다.
- 외야수로서 8년 연속 수상은 역대 2위 타이 (그 외 아키야마 고지, 마쓰이 히데키)로, 마쓰이와 함께 센트럴 리그 최장 기록.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10회 (1972년 ~ 1981년)
- 외야수로서 통산 10회 수상 및 10년 연속 수상은 모두 센트럴 리그 기록.
- 10년 연속 수상은 역대 2위 타이 (그 외 아키야마 고지, 기쿠치 료스케).
- 1972년에는 다카다 시게루, 시바타 이사오와 함께 외야수 부문에서 센트럴 리그 역사상 최초의 수상자.
- 일본 시리즈 감투상: 1회 (1975년)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1회 (1984년)
- 월간 MVP: 5회 (1975년 8월, 1978년 8월, 1980년 6월, 1983년 4월, 1986년 4월)
- 올스타전 MVP: 2회 (1975년 1차전, 1979년 3차전)
-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1회 (1987년)
- 히로시마현민 영예상: 1987년
3.4. 팀 우승 기여
야마모토 고지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황금기를 이끈 핵심 선수로서, 팀의 여러 차례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975년, 그는 타율 .319, 30홈런, 84타점, 24도루라는 개인 최고 성적을 기록하며 팀의 창단 첫 센트럴 리그 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이 해 그는 수위 타자와 MVP를 동시에 석권하며 팀의 역사적인 순간의 중심에 섰다. 이 시즌부터 히로시마 카프는 상징적인 빨간 헬멧을 채택했고, 야마모토는 '미스터 빨간 헬멧'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팀과 팬들의 상징이 되었다. 비록 일본 시리즈에서는 한큐 브레이브스에 패했지만, 그의 활약은 히로시마 야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후 1979년과 1980년에는 긴테쓰 버펄로스를 상대로 일본 시리즈 2연패를 달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79년에는 타점왕을 차지하며 팀의 2번째 리그 우승과 첫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고, 1980년에는 홈런왕과 타점왕 2관왕을 차지하며 팀의 2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기누가사 사치오와 함께 'YK포''로 불리며 오 사다하루와 나가시마 시게오의 ON포에 이어 일본 프로 야구 역대 2위의 아베크 홈런 기록을 세웠다.
1984년에는 타격 코치를 겸임하며 팀의 4번째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그는 중요한 순간마다 결정적인 홈런과 적시타를 터뜨리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선수 생활 내내 히로시마 카프에서만 뛰며 팀의 5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함께하며 구단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3.5. 통산 기록 및 이정표
야마모토 고지는 18년간의 프로 선수 경력 동안 수많은 통산 기록과 이정표를 달성했다.
- 통산 100홈런: 1974년 6월 13일, 한신 타이거스전 (한신 고시엔 구장), 에나쓰 유타카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 역대 79번째.
- 통산 150홈런: 1976년 5월 7일, 다이요 웨일스전 (가와사키 구장), 다나카 아키라로부터 중월 2점 홈런. 역대 41번째.
- 통산 1000경기 출장: 1976년 10월 5일, 한신 타이거스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4번 중견수로 선발 출장. 역대 187번째.
- 통산 1000안타: 1977년 5월 2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 (고라쿠엔 구장), 사다오카 쇼지로부터 우전 안타. 역대 101번째.
- 통산 200홈런: 1977년 8월 11일, 한신 타이거스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미야타 노리카즈로부터 좌중간 3점 홈런. 역대 27번째.
- 통산 250홈런: 1978년 9월 6일, 주니치 드래건스전 (나고야 구장), 아오야마 히사토로부터 중견수 좌측 2점 홈런. 역대 15번째.
- 통산 300홈런: 1980년 4월 8일,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엔도 가즈히코로부터 우월 선제 2점 홈런. 역대 12번째.
- 통산 1500안타: 1980년 9월 7일, 한신 타이거스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야마모토 가즈유키로부터 중전 안타. 역대 40번째.
- 통산 1500경기 출장: 1980년 9월 11일, 주니치 드래건스전 (나고야 구장), 4번 중견수로 선발 출장. 역대 64번째.
- 통산 350홈런: 1981년 4월 28일, 주니치 드래건스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미사와 준으로부터 좌월 선제 2점 홈런. 역대 10번째.
- 통산 3000루타: 1981년 6월 18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사다오카 쇼지로부터 2루타. 역대 16번째.
- 통산 1000타점: 1981년 8월 2일, 주니치 드래건스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미야코 유지로로부터 좌월 선제 솔로 홈런. 역대 13번째.
- 통산 1000득점: 1981년 8월 20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미즈타니 지쓰오의 선제 결승 2점 적시 2루타로 홈인. 역대 14번째.
- 통산 400홈런: 1982년 6월 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가토리 요시타카로부터 솔로 홈런. 역대 8번째.
- 통산 300 2루타: 1982년 7월 14일,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다케우치 히로아키로부터 우중간 2루타. 역대 21번째.
- 통산 3500루타: 1983년 5월 18일, 주니치 드래건스전 (나고야 구장), 고마쓰 다쓰오로부터 좌전 안타. 역대 11번째.
- 통산 450홈런: 1983년 10월 3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 (하마마쓰 구장), 호리우치 쓰네오로부터 좌익 폴 직격 솔로 홈런. 역대 7번째.
- 통산 2000안타: 1984년 5월 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 (고라쿠엔 구장), 마키하라 히로미로부터 좌전 안타. 역대 19번째.
- 통산 2000경기 출장: 1984년 8월 1일,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4번 좌익수로 선발 출장. 역대 19번째.
- 통산 1000삼진: 1985년 5월 5일,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엔도 가즈히코로부터. 역대 9번째.
- 통산 350 2루타: 1985년 6월 5일,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세키네 히로시로부터. 역대 14번째.
- 통산 4000루타: 1985년 6월 13일, 한신 타이거스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이토 히로미쓰로부터 좌전 안타. 역대 8번째.
- 통산 500홈런: 1985년 7월 26일, 주니치 드래건스전 (나고야 구장), 스기모토 다다시로부터 좌중간 솔로 홈런. 역대 4번째.
기타 기록
- 시즌 40홈런 이상: 5회 (1977년 ~ 1981년) ※역대 3위 타이
- 시즌 30홈런 이상: 9회 (1975년, 1977년 ~ 1984년) ※역대 3위 타이
- 시즌 100타점 이상: 6회 (1977년 ~ 1981년, 1983년) ※역대 3위
- 5년 연속 시즌 40홈런 이상 (1977년 ~ 1981년) ※역대 2위
- 8년 연속 시즌 30홈런 이상 (1977년 ~ 1984년) ※역대 3위
- 13년 연속 시즌 20홈런 이상 (1974년 ~ 1986년) ※역대 3위 타이
- 5년 연속 시즌 100타점 이상 (1977년 ~ 1981년) ※역대 3위 타이
- 17년 연속 시즌 100안타 이상 (1970년 ~ 1986년) ※역대 4위 타이, 히로시마 구단 기록
- 사이클링 히트: 1983년 4월 30일, 한신 타이거스전 (한신 고시엔 구장) ※역대 36번째
- 9타수 연속 안타 (1972년 7월 6일 ~ 7월 8일)
- 302수비 기회 연속 무실책 (1975년 4월 5일 ~ 9월 24일) ※외야수로서의 센트럴 리그 기록
- 872경기 연속 출장 (1976년 10월 22일 ~ 1983년 8월 28일) ※역대 11위
- 입단 연도부터 은퇴 연도까지 규정 타석 도달 (1969년 ~ 1986년)
- 통산 500홈런·200도루 달성 (1985년 7월 26일) ※역대 2번째
- 통산 만루 홈런: 11개 (1972년, 1974년, 1977년, 1978년, 1980년, 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 ※역대 9위 타이
- 통산 장타율: .5416 (1969년 ~ 1986년) ※역대 10위
- 통산 외야수 척살: 4637개 ※역대 2위, 센트럴 리그 기록
- 통산 외야수 보살: 154개 ※역대 2위, 센트럴 리그 기록
- 통산 외야수 수비 기회: 4830차례 ※역대 2위, 센트럴 리그 기록
- 동일 구장 1000안타 (히로시마 시민 구장)
- 올스타전 출장: 14회 (1973년 ~ 1986년)
- 올스타전 통산 타율: .316 ※100타수 이상에서는 역대 3위
- 올스타전 통산 홈런: 14개 ※역대 1위
- 올스타전 통산 타점: 27타점 ※역대 3위 타이
3.6. 현역 은퇴
야마모토 고지는 1986년, 팀의 센트럴 리그 우승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40세의 나이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마지막 시즌인 1986년 4월에 타율 .377, 8홈런, 19타점을 기록하며 월간 MVP에 선정되는 등 여전히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8월 10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는 1회에 구와타 시게루로부터 3점 홈런을 터뜨리며 13년 연속 20홈런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9월 11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전에서는 2대2 동점인 연장 11회 무사 무주자 상황에서 스기모토 다다시로부터 끝내기 홈런을 쏘아 올렸는데, 당시 39세 10개월의 나이는 히로시마 구단 역대 최고령 끝내기 홈런 기록이다.
팀은 130경기 중 129번째 경기인 10월 12일 야쿠르트전에서 리그 우승을 확정 지었다.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 히가시오 오사무로부터 동점 홈런을 터뜨렸는데, 이것이 그의 현역 마지막 홈런이 되었다. 일본 시리즈는 역사상 최초로 8차전까지 진행되는 명승부 끝에 세이부 라이온스에게 우승을 내주었지만, 경기 종료 후 히로시마 선수단으로부터 아쉬움과 존경을 담은 헹가래를 받았으며, 히로시마 시민 구장은 만장의 팬들이 외치는 '고지 콜'로 가득 찼다. 다음날 은퇴 기자회견에서 그는 눈물을 흘리며 "야마모토 고지는 행복한 남자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름이 알려진 대선수라도 프로 데뷔 초나 현역 마지막 연도에는 경기 출전이 적거나 부진한 성적을 남기기도 하지만, 야마모토는 신인 시절부터 은퇴할 때까지 거의 모든 경기에 출전하며 성적이 극단적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없었다. 현역 생활 마지막 시즌인 1986년에도 타율 .276와 27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등 꾸준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고질적인 허리 통증의 악화가 결국 야마모토를 은퇴로 이끈 것으로 여겨진다.
1987년 1월 12일, 히로시마현민 영예상을 수상했다. 4월 5일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오픈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이 그의 은퇴 경기로 치러졌다.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에게는 메시지 카드가 배포되었고, 그는 4번 중견수로 출전하여 2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경기 종료 후 세리머니에서의 인사말에서는 기자회견에서의 말에 덧붙여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카프에 의해 길러졌습니다. 야마모토 고지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하며 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대학 출신 선수로서의 통산 536홈런은 일본 프로 야구 최다 기록이다. 야마모토의 위대한 공적을 기려 그의 등번호 8번은 히로시마 구단 역사상 최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4. 지도자 경력
야마모토 고지는 선수 은퇴 후에도 야구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지도자로서 활발히 활동하며 그의 야구 철학을 펼쳤다.
4.1. 히로시마 도요 카프 감독
현역 은퇴를 결심했을 때 마쓰다 고헤이 구단주로부터 "선수 겸임 감독을 맡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으나, 그는 이를 고사했다. 은퇴 후 1987년부터 1988년까지 2년간 NHK 야구 해설가와 닛칸 스포츠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다가, 1989년부터 친정팀 히로시마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5년 계약을 맺었으며, 오시타 다케시를 헤드 코치, 이케가야 고지로를 투수 코치, 미즈타니 지쓰오를 타격 코치로 영입했다. 야마모토는 "구단에 '절대 받아들여 달라'고 부탁했다. 가장 중요한 헤드 코치는 만약 감독이 된다면 오시타 씨에게 맡기고 싶다는 생각이 예전부터 있었다. 진짱(미즈타니)도 타격에 관해 고생한 만큼 엄격하게 지도하며 키워주었다. 이케가야는 성실하고 이론을 가지고 있다. 모두 내 뜻을 헤아려 주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감독 첫 해인 1989년과 1990년에는 팀을 센트럴 리그 2위로 이끌며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1991년에는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세이부 라이온스에 3승 4패로 패하며 우승에는 실패했다. 1992년에는 10년 만에 B클래스인 4위에 머물렀고, 1993년에는 리그 최악 타이 기록인 14번의 끝내기 패배를 기록하며 19년 만에 최하위로 추락했다. 결국 같은 해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1994년부터 2000년까지 7년간 니혼 TV, 히로시마 TV, 라디오 일본의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히로시마 구단의 요청으로 2001년부터 다시 히로시마의 감독으로 취임하며 8년 만에 현장으로 복귀했다. 문화방송과 TV 가나가와의 야구 해설자였던 마쓰바라 마코토를 수석 겸 타격 코치로, TV 아사히와 히로시마 홈 TV의 야구 해설자였던 기타베푸 마나부를 투수 코치로 영입했다. 2차 감독 재임 기간 동안에는 단 한 번도 팀을 A클래스에 진입시키지 못했으며, 2005년에는 12년 만의 최하위로 다시 추락하면서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감독으로서의 재임 기간 (1차와 2차를 합쳐)은 총 10년으로, 고바 다케시, 시라이시 가쓰미 (모두 11년간 재임)에 이어 히로시마 구단 역대 3번째 최장수 감독이 되었다. 그는 감독 시절 1기에는 마에다 도모노리, 오가타 고이치, 에토 아키라 등을, 2기에는 아라이 다카히로, 시마 시게노부, 구리하라 겐타 등을 타선의 주력 선수로 육성했다.
4.2. 국가대표팀 감독 및 코치
2006년부터 니혼 TV와 히로시마 TV의 야구 해설자로 복귀했다. 2007년에는 호시노 센이치 일본 대표팀 감독의 지휘 아래 베이징 올림픽 야구 일본 대표팀의 수비·주루 코치로 취임했다. 그러나 이듬해 본선에서는 대한민국과 미국에 패하며 4위에 그쳤다. 당시 경험이 없는 3루 베이스 코치를 맡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그는 "나는 현역 시절 수비와 주루에 남들보다 두 배로 신경 썼다"며 "500개 이상 홈런을 친 선수 중에서 수비와 주루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일 것"이라고 우려를 일축했다.
2012년 10월 10일, '사무라이 재팬 매치 2012 일본 대표팀 VS 쿠바 대표팀'을 시작으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는다고 발표되었다. 11월 13일에는 등번호 88번을 배정받았다고 발표되었다. 투수 총괄 코치로는 히가시오 오사무를 영입했다. 다른 인재들이 낮은 급여 등의 이유로 고사하는 상황에서 야마모토가 자원하는 형태로 감독직을 수락했다.
2013년 3월에 개최된 제3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과거 대회 중 최고의 성적으로 결승 라운드까지 진출했으나, 준결승에서 푸에르토리코에 1대3으로 패배하며 대회 3연패 달성에는 실패했다. 특히 8회말 중도루 실패에 대해서는 내야 수비 주루 코치를 맡았던 다카시로 노부히로에 따르면, 그린 라이트 사인이 있었지만 야마모토에게 강하게 추진한 것은 자신이었다고 한다. 야마모토는 기자회견에서 "그린 라이트 사인을 보내 주루시킨 것은 틀리지 않았다.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다카시로는 자신의 저서에서 "스태프의 책임도 선수의 실수도, 그 모든 것을 짊어져 주었다"고 야마모토를 평가했다.
5. 은퇴 후 활동
야마모토 고지는 선수 및 지도자 은퇴 후에도 야구계와 미디어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2006년부터 니혼 TV와 히로시마 TV의 야구 해설가로 복귀하여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예를 안았다. 2010년부터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 부회장으로 취임했으며, 2014년부터 2022년까지 이사장직을 역임했다. 현재는 명구회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외에도 스카이퍼펙트 JSAT 그룹 프로그램 심의회 위원을 맡고 있다.
2019년 봄에 건강이 악화되어 장기간 휴양에 들어갔다. 2020년에는 오랜 친구인 다부치 고이치가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는데, 1월 18일 열린 호세이 대학 OB회에서 다부치는 "오늘 아침 (야마모토와) 전화 통화를 했는데, 현재 체중은 줄었지만 30~40분 정도 산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4월부터 해설에 복귀할 수도 있다"고 야마모토의 근황을 전했다. 2020년 2월 7일, 야마모토 자신도 미야자키시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캠프 시찰을 위해 방문했을 때 기자들에게 "전년 (2019년)에 방광암과 폐암을 앓아 수술했다"고 밝혔다. 그는 총 7차례의 수술을 받았으며, 투병 생활을 이겨내고 해설가로 복귀하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6. 개인사 및 인간 관계
야마모토 고지는 야구계에서의 활약뿐만 아니라, 그의 개인적인 성격과 인간 관계, 그리고 가족사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느긋한 성격으로, 훗날 아내가 될 가가미코가 진구 구장에 자신이 동경하는 야마모토 본인을 보러 온 것을 보면서도 "저 사람 (가가미코)은 누구 여자친구일까?"라고 느낄 정도로 태평했다고 한다. 프러포즈는 "부모님을 만나 달라"는 말이었다고 회고했다.
현역 시절 오 사다하루, 다부치 고이치, 호시노 센이치, 히라마쓰 마사지, 마쓰오카 히로무와 함께 호소카와 다카시의 '여섯 개의 별'이라는 노래에 백 코러스로 참여한 적이 있다.
현역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였던 야마모토 고지와 동음이의어였기 때문에, 히로시마 경기에서 야마모토 고지 (요미우리)가 출전할 때 '가짜 고지'(ニセこうじ)라는 야유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히로시마 선수 시절, 동성 선수가 없었던 시즌은 야마모토 가즈요시 은퇴 직후인 1976년뿐이었다 (같은 해 오프 시즌에 야마모토 조가 입단하여 1982년까지 재적했으며, 1980년 오프 시즌에 야마모토 가즈오가 입단하여 야마모토 고지 은퇴 후인 1988년까지 재적했다).
현역 시절 이동 시 착용했던 검은색 정장 (줄무늬 등), 펀치 파마 등은 기누가사 사치오, 에나쓰 유타카 등과 함께 신칸센 플랫폼에 서면 위압감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프로 야구 선수들의 사복은 이러한 야쿠자풍의 스타일이 주류였다. 네즈미 센파이 (오카야마현 아카이와시 출신)도 자신의 펀치 파마와 야쿠자풍 정장 패션이 현역 시절 야마모토와 기누가사를 의식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야마자키 제빵의 '에이트 도넛' 봉지에 그려진 야구 선수 모델이 야마모토라는 설이 있다.
원 다쓰노리와는 공사적으로 친분이 깊으며, 원은 그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배 중 한 명이자, 영웅"이라고 칭찬했다.
2022년, 그의 셋째 아들이자 프로 골프 선수 (티칭 프로)인 야마모토 다카후미가 연예인 센다 미쓰오의 장녀인 센다 루카와 결혼했다.
7. 평가 및 영향력
야마모토 고지는 선수와 지도자로서 일본 야구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미스터 빨간 헬멧'이라는 상징적인 존재로 대중문화와 지역 사회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7.1. 야구계에서의 평가
그는 대학 출신 선수로는 유일하게 통산 500홈런을 달성한 인물로,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또한 통산 홈런 536개는 NPB 역대 4위에 해당한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그의 타격 타이틀 대부분이 30세 이후에 획득되었다는 것이다. 통산 홈런의 65% 이상인 350개 이상의 홈런이 30세를 넘어서 기록되었으며, 이는 그가 전형적인 대기만성형 선수였음을 보여준다. 신인 시절부터 은퇴할 때까지 단 한 해도 빠짐없이 규정 타석을 달성한 선수는 나가시마 시게오와 야마모토 단 두 명뿐이라는 사실은 그의 꾸준함과 강인한 체력을 증명한다.
오 사다하루는 홈런 아티스트로 불리며 홈런을 양산했지만, 다부치 고이치는 부상이 잦아 경기에 자주 결장했기 때문에 홈런왕 경쟁에서 크게 위협적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동료인 기누가사 사치오와 함께 몸이 튼튼하여 경기에 거의 빠지지 않았고, 또한 우익 방향으로도 강한 타구로 홈런을 칠 수 있는 야마모토의 존재를 홈런왕의 라이벌로서 더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는 야마모토의 꾸준함과 다재다능함이 당대 최고의 타자에게도 위협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외야수로서도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그는 302수비 기회 연속 무실책이라는 센트럴 리그 기록을 세웠으며, 넓은 수비 범위와 강견을 바탕으로 한 정교한 수비 능력을 자랑했다. 통산 외야수 척살 4637개, 보살 154개, 수비 기회 4830차례는 모두 센트럴 리그 기록이자 일본 프로 야구 역대 2위에 해당한다. 이는 그가 공격뿐만 아니라 수비에서도 리그 최정상급 선수였음을 입증한다.
지도자로서도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센트럴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마에다 도모노리, 아라이 다카히로 등 팀의 핵심 선수들을 육성하는 데 기여했다.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4강 진출을 이끈 경험은 그의 지도력을 국제 무대에서도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7.2. 문화적 상징성 및 사회적 영향
야마모토 고지는 단순한 야구 선수를 넘어 '미스터 빨간 헬멧'이라는 애칭과 함께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히로시마 지역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1975년 팀의 첫 리그 우승 당시 빨간 헬멧을 착용하고 흘린 눈물은 히로시마 시민들에게 깊은 감동과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현재 야구장에서 팬들이 선수 이름을 외치며 응원하는 '○○ 콜'은 야마모토가 '미스터 빨간 헬멧'으로서 팀을 이끌게 되면서 타석에 설 때마다 '고지! 고지!'라는 팬들의 큰 함성이 터져 나왔고, 언론이 이를 '고지 콜'이라고 명명하며 확산시킨 것이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또한 트럼펫 등 관악기를 이용한 '나리모노' 응원 역시 야마모토의 타석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응원가 가사는 "날려라 고지, 하늘 높이"였으며, 전반부 멜로디는 와세다 대학의 '컴뱃 마칭'에서 따왔다. 이는 야마모토가 일본 야구 응원 문화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현역 은퇴 후인 1999년 6월 27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과거 히로시마에 재적했던 가네시로 모토야스의 시구에서 타석에 섰을 때, 초구를 보낸 후 2구째를 좌익수석으로 홈런을 날린 일화는 그의 변치 않는 실력과 팬 서비스 정신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아있다. 당시 다쓰카와 아키노리 감독은 망연자실했다고 한다.
그는 히로시마현민 영예상을 수상하며 지역 사회에서의 높은 위상을 인정받았고,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과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 이사장 역임을 통해 일본 야구계 전반에 걸친 그의 영향력과 존경을 입증했다. 그의 삶과 경력은 히로시마 카프의 역사와 함께하며, 많은 야구팬들에게 영원한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8. 수상 및 영예
야마모토 고지는 선수 및 지도자 경력을 통해 수많은 수상과 영예를 안았다.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08년)
- 히로시마현민 영예상 (1987년)
선수 시절
- 최우수 선수 (MVP): 2회 (1975년, 1980년)
- 베스트 나인: 10회 (1975년, 1977년 ~ 1984년, 1986년)
- 외야수로서 10회 수상은 역대 2위 타이, 센트럴 리그 최다.
- 외야수로서 8년 연속 수상은 역대 2위 타이 (그 외 아키야마 고지, 마쓰이 히데키)로, 마쓰이와 함께 센트럴 리그 최장 기록.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10회 (1972년 ~ 1981년)
- 외야수로서 통산 10회 수상 및 10년 연속 수상은 모두 센트럴 리그 기록.
- 10년 연속 수상은 역대 2위 타이 (그 외 아키야마 고지, 기쿠치 료스케).
- 1972년에는 다카다 시게루, 시바타 이사오와 함께 외야수 부문에서 센트럴 리그 역사상 최초의 수상자.
- 일본 시리즈 감투상: 1회 (1975년)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1회 (1984년)
- 월간 MVP: 5회 (1975년 8월, 1978년 8월, 1980년 6월, 1983년 4월, 1986년 4월)
- 올스타전 MVP: 2회 (1975년 1차전, 1979년 3차전)
-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1회 (1987년)
타이틀 홀더
- 수위 타자: 1회 (1975년)
- 홈런왕: 4회 (1978년, 1980년, 1981년, 1983년) ※ 센트럴 리그 우타자 기록
- 타점왕: 3회 (1979년 ~ 1981년)
- 최다 출루수: 3회 (1979년, 1980년, 1983년)
9. 저서 및 미디어 출연
야마모토 고지는 선수 및 지도자 은퇴 후에도 다양한 저술 활동과 미디어 출연을 통해 대중과 소통했다.
저서
- 『인간 야마모토 고지 - 경쟁 사회를 끈질기게 살아가기 위해』(人間山本浩二-競争社会をしぶとく生きるために일본어, 1984년, 교통 타임스사)
- 『영광의 등번호 8: 이것이 나의 야구 인생이다』(栄光の背番号8:これがオレの野球人生だ일본어, 1986년, 교통 타임스사)
- 『고지의 친구들』(コージのなん友かん友일본어, 1987년, 닛칸 스포츠 출판사)
- 『고지의 빨간 헬멧 야구』(浩二の赤ヘル野球일본어, 1989년, 분게이슌주)
- 1987년~1988년 주간 분슌에 연재된 칼럼을 가필 수정하여 수록.
- 『야구와 히로시마』(野球と広島일본어, 2015년, 가도카와 신쇼)
- 『히로시마 카프의 혈맥』(広島カープの血脈일본어, 2016년, KADOKAWA) - 노무라 겐지로와 공저.
미디어 출연
- 야구 해설가로서의 출연
- NHK 시절
- NHK 프로 야구
- 선데이 스포츠 스페셜 (1986년 11월 ~ 1988년 10월)
- 니혼 TV·히로시마 TV 시절
- 드라마틱 베이스볼 (현행 명칭)
- 스스메! 스포츠 겡키마루 (히로시마 TV)
- NHK 시절
- 드라마
- 『마지막 스트라이크』 (후지 TV, 2000년 7월 28일) - 쓰다 쓰네미를 소재로 한 드라마. 호텔 이벤트 치프 역으로 출연.
- 영화
- 『BADBOYS』 (전력 에이전시, 2011년) - 특별 출연.
- 『코이노와 콘카츠 크루징』 (가도카와 영화, 2017년)
- 버라이어티
- 『나카이 마사히로의 블랙 버라이어티』 (니혼 TV, 비정기 출연)
- 『비밀의 켄민 SHOW』 (요미우리 TV 방송)
- 2016년 7월 14일 - 다나카 다쿠시와 함께 스튜디오 출연.
- 2016년 12월 1일 - 드라마 '사령은 갑자기...' 히로시마 편에 동네 회장 역으로 특별 출연.
- 『야마모토 고지 & 조지의 도레미파 스타디움』 (가요 팝스 채널) - 야마모토 조지와의 야구X음악 오리지널 버라이어티 특별 방송 (2019년 3월 24일 방송).
- 『프로 야구 레전드 당』 (2024년 4월 2일, BS 후지)
- 라디오
- 『다케다 와카코의 피탓토』 (ABC 라디오, 2014년 12월 4일) - '후쿠모토 유타카의 그 사람은 지금 전 프로 야구 선수 명감' 코너에 전화 출연.
- CM
- 현역 시절
- 히로우운 '리그 스타 야구 용품'
- 마스야 미소 된장 (히로시마 지역. '누룩의 장점이 결정적'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쓰다 쓰네미에게 "우리 팀과 같네요! 야마모토 씨!"라는 농담을 들었다.)
- 골드 모미지 (히로시마 지역. '골드 모미지는 과자 홈런왕입니다'라는 문구를 말한다.)
- 은퇴 후
- 아지노모토 '혼다시 이리코다시'
- 산와 홈 (1987년)
- 일본항공 '도쿄 - 히로시마선'
- 로토 제약 '신V·로토' (1987년 ~ 1990년)
- 브리지스톤 자전거 (아사노 유코와 공동 출연)
- 산토리 '몰츠' - 이 CM의 "저는 드라이하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후지 TV '카노사의 굴욕'에서 본인의 초상화와 함께 '나마무기 사건'으로 다루어졌다.
- 하우스 식품 '카레는 하우스' 캠페인 (1994년), '카레로 파이팅!' 캠페인 (2008년) (모두 다부치 고이치, 호시노 센이치와 공동 출연)
- 고와 '반테린' (2000년대)
디스코그래피
- 7인치 EP '히토리' (A면: 히토리 / B면: 비 오는 밤 이야기) (1975년 CBS 소니 레코드 SOLB-355)
- 양면 모두 작사: 아리마 미에코, 작곡: 가와구치 마코토, 편곡: 진보 마사아키
등장 작품
- 『야구광의 시』 (만화, 작: 미즈시마 신지)
- 『미라클 자이언츠 돔군』 (만화·애니메이션, 원작: 이시노모리 쇼타로) - 목소리: 사와키 이쿠야
- 현역 시절
10. 관련 항목
- 히로시마현 출신 인물 목록
- 호세이 대학 출신 인물 목록
-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선수 목록
- 1991년 일본 시리즈
11. 상세 정보
11.1. 연도별 타격 성적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번트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69 | 히로시마 | 120 | 404 | 366 | 38 | 88 | 20 | 1 | 12 | 146 | 40 | 9 | 5 | 8 | 1 | 23 | 1 | 6 | 74 | 7 | .240 | .295 | .399 | .694 |
1970 | 128 | 514 | 461 | 67 | 112 | 8 | 4 | 22 | 194 | 56 | 21 | 12 | 4 | 0 | 41 | 1 | 8 | 77 | 7 | .243 | .316 | .421 | .737 | |
1971 | 123 | 484 | 431 | 42 | 108 | 19 | 0 | 10 | 157 | 52 | 25 | 10 | 4 | 4 | 39 | 1 | 6 | 56 | 7 | .251 | .319 | .364 | .683 | |
1972 | 130 | 557 | 485 | 73 | 125 | 27 | 0 | 25 | 227 | 66 | 18 | 11 | 10 | 5 | 52 | 1 | 5 | 55 | 9 | .258 | .333 | .468 | .801 | |
1973 | 126 | 526 | 449 | 68 | 121 | 24 | 1 | 19 | 204 | 46 | 10 | 12 | 12 | 3 | 59 | 1 | 3 | 75 | 10 | .269 | .356 | .454 | .810 | |
1974 | 127 | 529 | 476 | 74 | 131 | 23 | 2 | 28 | 242 | 74 | 18 | 8 | 6 | 2 | 41 | 5 | 4 | 72 | 18 | .275 | .337 | .508 | .845 | |
1975 | 130 | 526 | 451 | 86 | 144 | 21 | 0 | 30 | 255 | 84 | 24 | 9 | 1 | 5 | 67 | 6 | 2 | 39 | 6 | .319 | .406 | .565 | .971 | |
1976 | 129 | 535 | 464 | 79 | 136 | 26 | 3 | 23 | 237 | 62 | 14 | 7 | 3 | 2 | 62 | 2 | 4 | 57 | 13 | .293 | .380 | .511 | .890 | |
1977 | 130 | 552 | 448 | 102 | 138 | 24 | 4 | 44 | 302 | 113 | 22 | 4 | 0 | 6 | 94 | 6 | 4 | 64 | 12 | .308 | .428 | .674 | 1.102 | |
1978 | 130 | 563 | 473 | 114 | 153 | 28 | 0 | 44 | 313 | 112 | 12 | 4 | 0 | 4 | 84 | 9 | 2 | 74 | 10 | .323 | .425 | .662 | 1.086 | |
1979 | 130 | 556 | 467 | 90 | 137 | 20 | 0 | 42 | 283 | 113 | 15 | 5 | 0 | 6 | 81 | 10 | 2 | 71 | 8 | .293 | .396 | .606 | 1.002 | |
1980 | 130 | 539 | 440 | 91 | 148 | 28 | 3 | 44 | 314 | 112 | 14 | 12 | 0 | 7 | 87 | 11 | 5 | 52 | 13 | .336 | .445 | .714 | 1.159 | |
1981 | 130 | 553 | 473 | 102 | 156 | 21 | 0 | 43 | 306 | 103 | 5 | 3 | 0 | 4 | 73 | 7 | 3 | 56 | 12 | .330 | .420 | .647 | 1.066 | |
1982 | 130 | 544 | 448 | 84 | 137 | 21 | 0 | 30 | 248 | 90 | 8 | 3 | 0 | 7 | 87 | 9 | 2 | 56 | 14 | .306 | .415 | .554 | .969 | |
1983 | 129 | 558 | 462 | 86 | 146 | 19 | 2 | 36 | 277 | 101 | 5 | 6 | 0 | 8 | 85 | 11 | 3 | 62 | 11 | .316 | .419 | .600 | 1.019 | |
1984 | 123 | 508 | 437 | 64 | 128 | 15 | 0 | 33 | 242 | 94 | 5 | 4 | 0 | 5 | 64 | 2 | 2 | 59 | 12 | .293 | .382 | .554 | .936 | |
1985 | 113 | 460 | 382 | 57 | 110 | 15 | 1 | 24 | 199 | 79 | 2 | 2 | 0 | 6 | 71 | 5 | 1 | 55 | 14 | .288 | .396 | .521 | .917 | |
1986 | 126 | 501 | 439 | 48 | 121 | 13 | 0 | 27 | 215 | 78 | 4 | 2 | 0 | 4 | 58 | 6 | 0 | 69 | 10 | .276 | .367 | .490 | .857 | |
통산 : 18년 | 2284 | 9409 | 8052 | 1365 | 2339 | 372 | 21 | 536 | 4361 | 1475 | 231 | 119 | 48 | 79 | 1168 | 94 | 62 | 1123 | 193 | .290 | .381 | .542 | .923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11.2. 연도별 수비 성적
연도 | 구단 | 경기 | 척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
1969 | 히로시마 | 118 | 255 | 8 | 3 | 2 | .989 |
1970 | 127 | 262 | 13 | 4 | 3 | .986 | |
1971 | 123 | 280 | 4 | 0 | 3 | 1.000 | |
1972 | 129 | 337 | 8 | 5 | 2 | .986 | |
1973 | 126 | 288 | 8 | 7 | 0 | .977 | |
1974 | 127 | 316 | 14 | 2 | 4 | .994 | |
1975 | 130 | 322 | 9 | 1 | 1 | .997 | |
1976 | 128 | 282 | 10 | 1 | 1 | .997 | |
1977 | 129 | 313 | 16 | 2 | 5 | .994 | |
1978 | 130 | 322 | 8 | 2 | 1 | .994 | |
1979 | 130 | 222 | 5 | 3 | 1 | .987 | |
1980 | 130 | 284 | 8 | 0 | 0 | 1.000 | |
1981 | 130 | 218 | 7 | 2 | 1 | .991 | |
1982 | 130 | 239 | 3 | 1 | 1 | .996 | |
1983 | 128 | 214 | 10 | 1 | 1 | .996 | |
1984 | 122 | 167 | 8 | 2 | 0 | .989 | |
1985 | 111 | 153 | 6 | 0 | 1 | 1.000 | |
1986 | 125 | 163 | 9 | 3 | 1 | .983 | |
통산 | 2273 | 4637 | 154 | 39 | 28 | .992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 굵은 글씨 연도는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수상 연도.
11.3. 연도별 감독 성적
연도 | 순위 | 경기수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게임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구단 |
---|---|---|---|---|---|---|---|---|---|---|---|---|
1989 | 2위 | 130 | 73 | 51 | 6 | .589 | 9 | 101 | .271 | 3.01 | 43세 | 히로시마 |
1990 | 2위 | 132 | 66 | 64 | 2 | .508 | 22 | 140 | .267 | 3.57 | 44세 | |
1991 | 1위 | 132 | 74 | 56 | 2 | .569 | - | 88 | .254 | 3.23 | 45세 | |
1992 | 4위 | 130 | 66 | 64 | 0 | .508 | 3 | 122 | .260 | 3.60 | 46세 | |
1993 | 6위 | 131 | 53 | 77 | 1 | .408 | 27 | 155 | .253 | 4.29 | 47세 | |
2001 | 4위 | 140 | 68 | 65 | 7 | .511 | - | 155 | .269 | 3.82 | 55세 | |
2002 | 5위 | 140 | 64 | 72 | 4 | .471 | 21 | 154 | .259 | 4.36 | 56세 | |
2003 | 5위 | 140 | 67 | 71 | 2 | .486 | 20 | 153 | .259 | 4.23 | 57세 | |
2004 | 5위 | 138 | 60 | 77 | 1 | .438 | 20 | 187 | .276 | 4.75 | 58세 | |
2005 | 6위 | 146 | 58 | 84 | 4 | .408 | 29.5 | 184 | .275 | 4.80 | 59세 | |
통산 : 10년 | 1359 | 649 | 681 | 29 | .488 | A클래스 3회, B클래스 7회 |
- 1989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제.
- 2001년부터 2004년까지는 140경기제.
- 2005년부터는 146경기제.
11.4. 등번호
- 27 (1969년 ~ 1970년)
- 8 (1971년 ~ 1986년, 2001년 ~ 2005년) -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영구 결번.
- 88 (1989년 ~ 1993년)
11.5. 등록명
- 山本 浩司(やまもと こうじ야마모토 고지일본어) (1969년 ~ 1974년)
- 山本 浩二(やまもと こうじ야마모토 고지일본어) (1975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