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사이토 아키오는 유년기부터 학창 시절까지 야구 선수로서의 기량을 다졌으며, 프로 야구 드래프트를 통해 다이요 웨일스에 입단하며 프로의 길을 걷게 된다.
1.1. 유년기 및 학창 시절
사이토 아키오는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의 생선가게 장남으로 태어났다. 교토 시립 모모야마 중학교에서 야구부에 입단하며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하나조노 고등학교 재학 시절 2학년까지는 중견수로 활동하며 마운드에 한 번도 오르지 않았으나, 2학년 가을 감독의 지명으로 투수로 전향했다. 3학년이던 1972년에는 중견수 겸 6번 타자로 봄 선발 대회에 출전했으나, 첫 경기에서 센슈 대학 기타카미 고등학교에 완봉패를 당했다. 같은 해 여름 고시엔 교토부 예선에서는 에이스로서 3경기 연속 완봉승을 기록했으나, 준준결승에서 교토 시립 사이쿄 고등학교의 나카이 야스유키와 연장 16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4대6으로 패배하며 고시엔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오사카 상업대학에 진학하여 구 간사이 6대학 야구 리그에서 1975년 봄 시즌 팀의 첫 우승에 기여하며 에이스로 활약했다. 같은 해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결승에 진출했으나, 모리 시게카즈와 나카하타 기요시가 이끌던 고마자와 대학에 연장 14회 0대1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당시 그는 "동쪽의 에가와 스구루, 서쪽의 사이토"로 불리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76년 봄 시즌에도 팀의 두 번째 우승을 이끌었으나,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엔도 가즈히코와 요시다 야스유키가 속한 도카이 대학에 패배하며 다시 한번 일본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1975년과 1976년에는 일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 일본 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리그 통산 71경기에 등판하여 30승 17패, 평균 자책점 1.70을 기록했으며, 324개의 탈삼진을 잡아냈다. 최우수 선수에 해당하는 간사이 운동 기자 클럽상을 두 차례, 베스트 나인을 두 차례 수상했다. 대학 동기 중에는 다나카 마사히로가 있다. 대학 시절에는 고마자와 대학의 모리 시게카즈, 니혼 대학의 사토 요시노리와 함께 "대학생 투수 삼총사"로 불렸다. 드래프트 이전에는 학창 시절 야구부 감독이 리쓰메이칸 대학 야구부 시절 요시다 요시오와 팀 동료였던 인연과 오랜 팬심으로 한신 타이거스만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1.2. 프로 입단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두 차례 준우승을 차지하며 재능을 인정받은 사이토 아키오는 1976년 가을 일본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다이요 웨일스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구단은 사이토에 대한 큰 기대를 담아 아키야마 노보루나 야마시타 리쓰오 등 구단 에이스들이 사용했던 등번호 17번을 부여했다. 사이토 본인은 당시 한큐 브레이브스의 주력 투수였던 야마구치 다카시를 동경하여 등번호 14번을 원했으나, 이미 17번으로 결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아키야마 (노보루) 선수의 등번호는 무겁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2. 선수 경력
사이토 아키오는 다이요 웨일스에서 데뷔하여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활약했고, 기념비적인 기록들을 달성하며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2.1. 프로 데뷔와 신인 시절
프로 1년 차인 1977년에는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개막부터 1군에 등록되어 활약했다. 특히 8월 30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는 오 사다하루의 통산 홈런 세계 타이 기록(755개) 달성을 저지하며 프로 데뷔 첫 완봉승을 기록,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 해 그는 8승 9패의 성적을 남겼고,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4승을 거두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며 가지마 겐이치와 니시모토 다카시를 제치고 신인왕을 차지했다. 이듬해인 1978년에는 벳토 가오루 감독으로부터 젊음과 담력을 인정받아 새로운 홈구장인 요코하마 스타디움의 개장 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완투승을 거두며 요코하마 스타디움 공식전 승리 투수 1호가 되었다.
2.2. 주요 기록 및 수상
사이토 아키오는 통산 100승 100세이브를 달성하는 등 여러 부문에서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1980년부터는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을 기르기 시작했고, 강렬한 인상 때문에 다이요 팬뿐만 아니라 타 구단의 팬들로부터도 "수염의 사이토"(ヒゲの斉藤일본어) 또는 단순히 "수염"(ヒゲ일본어)으로 불리게 되었다.
1982년에는 당시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인 8연속 세이브와 시즌 30세이브를 달성하며 리그 최다 세이브를 기록했다. 또한 규정 투구 이닝을 채우며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까지 획득했다. 1983년에는 10승 8패 22세이브를 기록하며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획득했고, 1986년에는 두 번째로 최우수 구원 투수가 되었다.
1988년 7월 3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는 우완 투수로서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 좌우 투수를 통틀어 역대 세 번째로 통산 100승 100세이브를 동시에 달성하는 위업을 이뤘다. 그의 통산 기록은 128승 133세이브이다. 그는 1978년, 1981년부터 1983년, 1985년, 1987년까지 총 6차례 올스타전에 출장했다. 특히 1982년 올스타전에서는 7회부터 등판하여 연장 11회까지 5이닝을 던졌는데, 이는 올스타전 최다 연속 투구 이닝 일본 기록이며, 현재 규정상 연장전 없이 1투수 최대 3이닝 투구로 제한되어 있어 깨지기 어려운 기록으로 남아있다.
2.3. 투구 스타일 및 특징
사이토 아키오는 1977년부터 1993년까지 다이요 웨일스 한 팀에서만 활약하며 강력한 직구와 느린 커브를 주무기로 사용했다. 그의 직구는 최고 140 km/h대 초반이었고, 구종은 이 두 가지뿐이었지만, 뛰어난 제구력과 완급 조절 능력으로 당대 최고의 강타자들을 막아냈다.
그는 선발 투수와 마무리 투수 모두에서 성공적인 활약을 펼쳤다. 마무리 투수 시절에는 한 이닝만 던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이닝을 던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마무리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규정 투구 이닝에 도달한 해가 있었다. 1982년에는 규정 투구 이닝을 채우면서 30세이브 이상을 달성했는데,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사이토 아키오만이 가진 유일한 기록이다. 이러한 그의 투구 내용 때문에 히라마쓰 마사쓰구 등 일부 야구인들은 그가 명구회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명구회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이토 아키오가 특히 어려워했던 타자들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시노즈카 가즈노리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다카하시 요시히코였다. 시노즈노에게는 프로 첫 안타를, 다카하시에게는 프로 첫 홈런을 허용하기도 했다.
2.4. 역할 변화와 부상
1981년 시즌 도중 엔도 가즈히코와 보직을 맞바꾸며 마무리 투수로 전향하여 5승 15패 10세이브를 기록했다. 그러나 1988년 시즌 개막 직후 오른쪽 무릎 반월상 연골을 다치면서 나카야마 히로아키에게 마무리 자리를 넘겨주고 다시 선발 투수로 전환했다. 당시 주치의는 그의 무릎 상태를 "60대 무릎과 같은 상태"라고 진단할 정도로 심각했다.
2.5. 은퇴
1993년에는 선수 겸 코치로 활동했으나, 고질적인 오른쪽 무릎 통증이 악화되면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10월 20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에서 개인 통산 600경기 등판을 달성했으며, 이틀 뒤인 10월 22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가 그의 현역 마지막 등판이었다.
3. 지도자 및 해설가 경력
사이토 아키오는 선수 은퇴 후에도 야구계에 남아 지도자와 해설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3.1. 지도자 경력
선수 은퇴 후 1994년부터 1995년까지 후지 TV와 닛폰 방송의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다. 이후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친정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1군 투수 코치를 역임했다.
2007년에는 오야 아키히코가 요코하마 감독으로 재취임함에 따라 1군 투수 수석 코치로 복귀했으나, 2008년 시즌에는 투수진이 붕괴되어 센트럴 리그에서 유일하게 팀 평균 자책점이 4.74 (12개 구단 중 최하위)를 기록하는 등 침체에 빠졌다. 이로 인해 한때 2군 투수 코치였던 요시다 아쓰시가 1군에 합류하기도 했다. 결국 2008년 시즌 종료 후 투수진의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코치직에서 해임되었다.
2013년부터는 지바 롯데 마린스의 1군 투수 코치로 부임했다. 같은 해 9월 3일부터 9월 9일까지는 건강 문제로 휴양했으며, 9월 10일부터 불펜 코치로 팀에 복귀했다. 그러나 팀 평균 자책점은 리그 최하위로 떨어지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2014년에는 2군 투수 코치를 맡았으며, 같은 해 10월 5일 구단으로부터 다음 시즌 계약을 맺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고 퇴단했다.
3.2. 해설가 경력
사이토 아키오는 여러 차례에 걸쳐 방송 해설가로 활동했다. 1994년부터 1995년까지 후지 TV와 닛폰 방송 야구 해설자로 첫 활동을 시작했다. 요코하마 코치직에서 물러난 후 2000년부터 2006년까지 다시 후지 TV와 닛폰 방송(주로 NRN 계열 지방국으로의 중계 담당)의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으며, 이 기간 동안 TV 가나가와에도 출연했다.
요코하마 투수 코치직에서 해임된 후 2009년부터는 다시 후지 TV, TV 가나가와(tvk), J SPORTS, 닛폰 방송(2009년에 한해 NRN 계열 지방국으로의 중계 담당)의 야구 해설자를 맡았다. 지바 롯데 코치직에서 퇴단한 후인 2015년부터는 후지 TV와 J SPORTS의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6년부터는 TV 가나가와와 스포나비 라이브의 DeNA 경기 해설도 겸하고 있다. 2018년부터는 DAZN의 DeNA 경기 해설도 겸업하고 있다.
그는 또한 2002년부터 2006년까지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의 도쿄 드림스 팀에 참가하여 2002년 시즌 우승에 기여하고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으며, 2연패를 달성한 2003년 시즌에는 우승 투수가 되기도 했다.
4. 개인사 및 에피소드
사이토 아키오는 선수 시절부터 은퇴 후까지 다양한 별명과 에피소드로 팬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는 다이요 웨일스,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등 구단 명칭이 변경되는 모든 시기에 1군 공식 경기에 출장한 유일한 선수이다.
그의 이름인 '明雄'나 '明夫'는 때때로 '昭夫'나 '昭雄'로 잘못 표기되기도 했다.
신인왕을 차지한 프로 1년 차 시즌이 끝난 후, 초등학교 동창회 안내문이 도착했다. 사이토는 프로에서 활약하자마자 연락이 온 것에 분노를 느껴 안내문에 '불참'이라고만 적어 우체통에 넣었다고 한다.
2002년경부터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나 OB 올스타전 등에서 등 뒤로 공 던지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후배 투수 노무라 히로키는 사이토의 캐치볼 연습에 대해 "한 구 한 구가 엄청나게 질이 높았다", "캐치볼을 정말 소중히 여겼다"고 증언했다. 사이토는 여유로운 폼으로 "아~키~오~다요~"(아키오예요~)라고 외치며 공을 던져 후배들의 성대모사 소재가 되기도 했다.
포수 이치카와 가즈마사는 자신의 사인 실수로 사이토가 보크를 범하여 팀이 패배했을 때, 사이토가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마"라고 말한 뒤 다음날 신문에 "모든 것이 내 잘못이었다"고 인터뷰한 것에 감격하여 "평생 따르겠다"고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사이토는 술을 즐겨 마셨기 때문에 '바쿠스'(Bacchus)라는 별명도 있었다. 그러나 1978년에는 금주 대신 책을 많이 읽어 선수들 사이에서는 '북스'(Books)라고 불리기도 했다.
2018년 12월, 그는 히라마쓰 마사쓰구의 뒤를 이어 웨일스·베이스타스 OB회 신임 회장에 취임했으며, 쓰쓰고 요시토모의 미국 진출을 응원하며 "꿈을 쫓아가라"고 격려했다.
5. 상세 기록
사이토 아키오의 선수 경력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통계 자료와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5.1. 연도별 투수 성적
연도 | 소속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무4구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 4구 | 몸맞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 자책 | WHIP |
---|---|---|---|---|---|---|---|---|---|---|---|---|---|---|---|---|---|---|---|---|---|---|---|---|---|
1977년 | 다이요 요코하마 | 38 | 20 | 3 | 1 | 0 | 8 | 9 | 0 | -- | .471 | 624 | 141.1 | 156 | 17 | 61 | 5 | 3 | 87 | 0 | 0 | 87 | 69 | 4.39 | 1.54 |
1978년 | 47 | 26 | 12 | 2 | 3 | 16 | 15 | 4 | -- | .516 | 1001 | 241.0 | 234 | 24 | 67 | 9 | 6 | 162 | 0 | 0 | 90 | 84 | 3.14 | 1.25 | |
1979년 | 37 | 27 | 10 | 2 | 1 | 11 | 6 | 0 | -- | .647 | 826 | 196.1 | 198 | 25 | 56 | 5 | 3 | 138 | 1 | 1 | 94 | 88 | 4.03 | 1.29 | |
1980년 | 35 | 33 | 17 | 1 | 2 | 14 | 17 | 1 | -- | .452 | 1024 | 247.1 | 245 | 24 | 72 | 5 | 3 | 165 | 1 | 4 | 111 | 104 | 3.78 | 1.28 | |
1981년 | 47 | 19 | 3 | 0 | 0 | 5 | 15 | 10 | -- | .250 | 743 | 169.1 | 195 | 18 | 61 | 9 | 4 | 100 | 0 | 1 | 92 | 81 | 4.31 | 1.51 | |
1982년 | 56 | 1 | 0 | 0 | 0 | 5 | 6 | 30 | -- | .455 | 542 | 134.2 | 109 | 12 | 35 | 10 | 1 | 80 | 0 | 0 | 36 | 31 | 2.07 | 1.07 | |
1983년 | 54 | 0 | 0 | 0 | 0 | 10 | 8 | 22 | -- | .556 | 496 | 116.0 | 113 | 14 | 45 | 14 | 2 | 67 | 3 | 1 | 52 | 46 | 3.57 | 1.36 | |
1984년 | 43 | 2 | 1 | 1 | 0 | 11 | 6 | 10 | -- | .647 | 419 | 94.0 | 115 | 10 | 31 | 12 | 2 | 53 | 1 | 0 | 54 | 51 | 4.88 | 1.55 | |
1985년 | 55 | 0 | 0 | 0 | 0 | 9 | 5 | 18 | -- | .643 | 444 | 109.2 | 93 | 9 | 22 | 4 | 0 | 72 | 2 | 0 | 40 | 26 | 2.13 | 1.05 | |
1986년 | 44 | 0 | 0 | 0 | 0 | 5 | 6 | 23 | -- | .455 | 301 | 78.0 | 62 | 10 | 13 | 4 | 0 | 49 | 0 | 0 | 18 | 16 | 1.85 | 0.96 | |
1987년 | 39 | 0 | 0 | 0 | 0 | 4 | 1 | 15 | -- | .800 | 279 | 70.2 | 57 | 6 | 16 | 2 | 0 | 36 | 4 | 0 | 19 | 17 | 2.17 | 1.03 | |
1988년 | 24 | 17 | 2 | 0 | 1 | 5 | 4 | 0 | -- | .556 | 439 | 105.2 | 114 | 4 | 27 | 4 | 2 | 38 | 0 | 2 | 45 | 41 | 3.49 | 1.33 | |
1989년 | 18 | 18 | 5 | 2 | 1 | 8 | 6 | 0 | -- | .571 | 496 | 117.1 | 127 | 12 | 34 | 7 | 2 | 49 | 1 | 0 | 44 | 42 | 3.22 | 1.37 | |
1990년 | 24 | 22 | 6 | 1 | 2 | 10 | 7 | 0 | -- | .588 | 615 | 150.1 | 144 | 15 | 39 | 3 | 2 | 98 | 0 | 0 | 71 | 68 | 4.07 | 1.22 | |
1991년 | 17 | 16 | 1 | 1 | 0 | 4 | 6 | 0 | -- | .400 | 419 | 99.2 | 103 | 10 | 28 | 2 | 0 | 57 | 1 | 0 | 45 | 40 | 3.61 | 1.31 | |
1992년 | 17 | 15 | 4 | 0 | 2 | 3 | 8 | 0 | -- | .273 | 368 | 91.1 | 92 | 12 | 11 | 1 | 4 | 66 | 0 | 0 | 42 | 37 | 3.65 | 1.13 | |
1993년 | 6 | 2 | 0 | 0 | 0 | 0 | 0 | 0 | -- | ---- | 55 | 10.2 | 20 | 3 | 1 | 0 | 2 | 4 | 0 | 0 | 13 | 9 | 7.59 | 1.97 | |
통산 : 17년 | 601 | 218 | 64 | 11 | 12 | 128 | 125 | 133 | -- | .506 | 9091 | 2173.1 | 2177 | 255 | 619 | 96 | 36 | 1321 | 14 | 9 | 953 | 850 | 3.52 | 1.29 |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 다이요(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는 1993년에 요코하마(요코하마 베이스타스)로 구단명을 변경.
5.2. 타이틀 및 수상 경력
사이토 아키오가 선수 시절 획득한 주요 타이틀과 수상 내역은 다음과 같다.
- 타이틀
- 최우수 평균 자책점: 1회 (1982년)
- 최우수 구원 투수: 2회 (1983년, 1986년)
- 최다 탈삼진: 1회 (1978년) ※당시에는 연맹 표창이 없었으며, 센트럴 리그에서는 1991년부터 정식 타이틀로 제정되었다.
- 표창
- 신인왕: 1회 (1977년)
- 파이어맨상: 2회 (1983년, 1986년)
5.3. 개인 기록
사이토 아키오가 달성한 주요 개인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 첫 기록
- 첫 등판: 1977년 4월 19일, 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3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6회말에 4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2이닝 무실점
- 첫 탈삼진: 상동, 6회말에 마쓰오카 히로무로부터
- 첫 선발: 1977년 4월 24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5차전(이시카와 현립 야구장), 3이닝 1실점
- 첫 승리·첫 선발 승리: 1977년 5월 8일, 대 한신 타이거스 8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7이닝 1실점
- 첫 완투 승리·첫 완봉 승리: 8월 30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1차전(고라쿠엔 구장)
- 첫 세이브: 1978년 4월 8일, 대 한신 타이거스 1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7회말 2아웃에 2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마무리, 2와 1/3이닝 무실점
- 기록 달성 경력
- 통산 1000 투구 이닝: 1982년 4월 3일, 대 한신 타이거스 1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5회초 2아웃에 달성
- 통산 100 세이브: 1986년 5월 1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5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역대 3번째
- 통산 1500 투구 이닝: 1986년 8월 3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18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8회초 3아웃에 달성
- 통산 1000 탈삼진: 1987년 8월 22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7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8회초에 릭 란셀로티로부터 ※역대 72번째
- 통산 500경기 등판: 1988년 6월 7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8차전(나고야 구장), 5회말에 6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2이닝 무실점
- 통산 100승: 1988년 7월 3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2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선발 등판으로 5이닝 3실점 ※역대 96번째
- 통산 2000 투구 이닝: 1991년 5월 30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8차전(하마마쓰 구장), 2회말 1아웃에 달성 ※역대 70번째
- 통산 600경기 등판: 1993년 10월 20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26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9회초에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1/3이닝 3실점
- 기타
- 100승 100세이브 달성: 역대 3번째 (과거 달성자는 에나쓰 유타카, 야마모토 가즈유키이며, 후에 오노 유타카, 가쿠 겐지, 사사오카 신지 등도 달성했다.)
- 규정 투구 이닝에 도달하고 30세이브 이상 기록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유일한 달성자)
5.4. 등번호 및 등록명
사이토 아키오가 선수 및 지도자 시절 사용했던 등번호와 등록명 변경 이력은 다음과 같다.
- 등번호
- 17 (1977년 ~ 1993년)
- 77 (1996년 ~ 1999년, 2007년 ~ 2008년)
- 85 (2013년 ~ 2014년)
- 등록명
- 斉藤 明雄(斉藤 明雄사이토 아키오일본어): 1977년 ~ 1981년
- 斉藤 明夫(斉藤 明夫사이토 아키오일본어): 1982년 ~ 1993년, 1996년 ~ 1999년, 2007년 ~ 2008년
- 齊藤 明雄(齊藤 明雄사이토 아키오일본어): 2013년 ~ 2014년
6. 평가
사이토 아키오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선발과 구원을 모두 성공적으로 소화하며 독보적인 족적을 남긴 투수로 평가받는다. 특히 우완 투수 최초의 100승 100세이브 달성은 그의 다재다능함과 꾸준함을 증명하는 기록이다. 당시 마무리 투수가 여러 이닝을 소화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시기에 그는 구원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규정 투구 이닝을 채우는 등, 현대 야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전천후 투수로서의 역량을 보여주었다.
비록 명구회 가입 기준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그의 독특하고 뛰어난 활약은 히라마쓰 마사쓰구와 같은 동료 및 선배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으며 명구회 입회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은퇴 후 지도자 및 해설가로서도 꾸준히 야구계에 기여하며, 특히 친정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의 OB회 회장직을 맡는 등 팀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선수 시절 별명인 "수염의 사이토"는 강렬한 인상과 함께 팬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으며, 야구에 대한 진지한 자세와 동료를 아끼는 인간적인 면모는 많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