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구리하라 겐타(栗原 健太쿠리하라 겐타일본어, 1982년 1월 8일 출생)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내야수이자 현 치바 롯데 마린스의 1군 타격 코치이다. 그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선수로 활약했으며, 특히 2000년대 초반 히로시마 카프의 주요 클린업 히터이자 센트럴 리그에서 가장 위협적인 파워 히터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부상당한 무라타 슈이치의 대체 선수로 참가하여 일본의 우승에 기여했다. 은퇴 후에는 라쿠텐 골든이글스, 주니치 드래건스를 거쳐 현재 치바 롯데 마린스에서 지도자 경력을 이어가고 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2.1. 출생 및 가족
구리하라 겐타는 야마가타현의 작은 도시 덴도 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덴도 시내에서 야키니쿠 식당을 운영했다.
2.2. 유년 시절과 야구 입문
구리하라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으며, 빠르게 리틀 야구팀의 4번 타자와 에이스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중학교 시절에도 투수로 활약했지만, 육상 종목에서도 뛰어난 운동 능력을 보였다. 그는 시 전체 육상 대회에서 높이뛰기, 100미터 달리기, 포환던지기 세 종목을 모두 제패하며 주목받았다.
2.3. 고교 시절
구리하라는 니혼 대학의 사립 계열 학교인 니혼 대학 야마가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야구부 감독이었던 시부야 요시야는 구리하라의 중학교 시절부터 그를 스카우트하며 투수로 기용할 계획이었으나, 구리하라가 타격 연습에서 손쉽게 공을 펜스 너머로 날려버리는 배트 스피드와 컨트롤에 놀라 내야수로 포지션 변경시켰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여름에 팀의 5번 타자가 되었고, 가을에는 일찌감치 4번 타자를 맡았다.
고등학교 2학년 봄에 열린 도호쿠 지역 토너먼트에서는 타율 7할, 2홈런을 기록하며 팀을 80회 전국 고교야구선수권대회 본선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시카와현 대표인 세이료 고등학교와의 1차전에서 10대1로 패배하며 아쉽게 탈락했다. 이 경기에서 구리하라는 4타수 1안타 1타점을 기록했다. 비록 이 대회가 그의 고교 시절 유일한 전국 무대 출전이었지만, 그는 고등학교 3학년(1999년)이 되면서 뛰어난 파워와 스피드를 겸비한 유망한 야수로 평가받았고, 11개 일본 프로 야구 팀의 스카우트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2.4. 신체 조건 및 스카우트
구리하라는 고교 시절 통산 39개의 홈런을 기록했으며, 벤치프레스는 최대 120 kg, 스쿼트는 최대 330 kg을 들어 올리는 등 남다른 근력을 자랑했다. 또한 50미터를 6.0초, 100미터를 11.7초에 주파하는 등 파워뿐만 아니라 빠른 발도 겸비한 선수로 스카우트들에게 평가받았다. 입단 당시에는 에토 아키라의 뒤를 잇는 '에토 2세'로 불리며 우타 거포로서 큰 기대를 모았다.
3. 프로 선수 경력
3.1. 드래프트 및 프로 입단
1999년 일본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상위 지명을 고려한다는 소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리하라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부터 3순위 지명을 받았다. 그는 계약금 4500.00 만 JPY와 연봉 500.00 만 JPY(추정치)에 계약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등번호는 50번이었다. 당시 그는 야마가타현 출신 선수 중 유일하게 일본 프로 야구에서 활동하는 선수였으며, 이러한 상황은 2002년 시즌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3.2.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 (2000-2015)
3.2.1. 초기 및 마이너 리그 시절 (2000-2003)
프로 입단 후 첫 두 시즌(2000년, 2001년) 동안 구리하라는 주로 히로시마 카프의 2군 팀에서 보냈으며, 잦은 부상에 시달렸다. 2001년에는 웨스턴 리그에서 타율 .306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였다.
2002년 시즌, 구리하라는 2군 팀의 4번 타자로 활약하며 그해 여름 열린 프레시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당시 한신 타이거스 2군 감독이었던 오카다 아키노부는 구리하라를 주목할 선수로 꼽으며 올스타전에서 선발 4번 타자로 기용하는 등 높은 기대를 드러냈다. 비록 경기에서는 무안타에 그쳤지만, 8월 말에 처음으로 1군에 승격되었다. 8월 31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대타로 프로 데뷔전을 치렀고, 9월 4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7번 타자 겸 3루수로 첫 선발 출장했다. 이튿날인 9월 5일, 한신 타이거스의 후지카와 규지를 상대로 프로 첫 안타이자 첫 홈런을 기록했다. 이 시즌 웨스턴 리그에서 타율 .305, 6홈런, 50타점, 6도루를 기록하며 타점왕을 차지했고, 타율은 리그 3위에 올랐다. 시즌 종료 후에는 2002년 아시안 게임 일본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국제 무대 경험을 쌓았다.
2003년 시즌을 앞두고 히로시마 구단은 구리하라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그는 1군과 2군을 오가며 1군 주전 자리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웨스턴 리그에서는 타율 .315, 13홈런, 53타점을 기록하며 홈런과 타점 부문 2관왕에 올랐고, 타율은 리그 2위를 기록하며 3년 연속 3할 타율을 달성했다. 또한 장타율을 .446에서 .586으로 끌어올렸고, 삼진은 24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1군에서는 26경기 출장에 그쳤고, 타율 .276, 3홈런, 6타점으로 부진했다. 4월 16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는 프로 첫 도루를 기록했다.
3.2.2. 레귤러 확보와 첫 전성기 (2004-2008)
2004년 시범경기에서 구리하라는 타율 .250, 3홈런을 기록했으나 팀 최다인 16타점을 올리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는 이 해 처음으로 개막전 선발 라인업에 6번 타자 겸 1루수로 이름을 올렸다. 시즌 초반에는 타격 부진을 겪었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연이어 홈런을 터뜨리며 주전 자리에 가까워졌다. 최종적으로 90경기에 출전하여 11개의 홈런을 기록했으며, 당시 팀 동료이자 경험이 더 많은 아라이 다카히로보다도 선발 출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10월 2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9회말 2사 2, 3루 동점 상황에서 삼진을 당한 뒤 포수가 공을 놓쳤음에도 1루로 뛰지 않아 아웃되면서 팀의 승리 기회를 놓쳤다. 이 실책으로 인해 그는 이튿날 1군에서 말소되었고, 남은 시즌 동안 젊은 선수들이 기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같은 해 말, 구리하라는 히로시마 카프의 홈 구장인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일하던 배트걸과 결혼했다.
2005년 시즌, 구리하라는 주전 라인업에 확고히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지만, 부상으로 인해 개막전 출장이 불발되었다. 그는 6월 21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에서야 1군에 복귀했고, 6월 28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첫 선발 출장했다. 2군 재활 기간 동안 20경기에서 타율 .275, 5홈런, 18타점, 장타율 .551을 기록하며 2군 감독으로부터 "다시는 2군에서 뛰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노무라 겐지로가 2000안타를 달성한 후 1루수 자리를 이어받아 77경기에 출전, 66경기에서 선발로 나서 타율 .323, 15홈런, 43타점을 기록했다. 특히 8월 한 달 동안 타율 .352, 10홈런, 21타점을 기록하며 맹타를 휘둘렀다. 그의 출루율 .366과 장타율 .563은 모두 개인 최고 기록이었으며, 트리플 크라운 모든 부문에서 커리어 하이를 달성했다. 시즌 종료 후 그의 등번호는 50번에서 5번으로 변경되었다. 그해 7월에는 첫 딸을 얻었고, 12월에는 딸과 함께 결혼 피로연을 열었다.
2006년 1월, 구리하라는 다가오는 시즌을 준비하기 위해 홀로 애리조나주로 건너가 메이저리거들과 함께 훈련했다. 그는 체지방률을 10%에서 9%로 줄이면서 체중을 100 kg까지 늘렸다. 이 해부터 그는 매년 캠프 전에 미국에서 훈련을 하는 것이 연례행사가 되었다. 5월 24일 오릭스 버팔로스와의 인터리그 경기에서 처음으로 4번 타자로 선발 출장했으며, 5월 한 달 동안 타율 .379, 5홈런, 23타점을 기록했다. 7월에도 타율 .305, 7홈런, 19타점으로 뜨거운 타격감을 유지하며 생애 첫 센트럴 리그 월간 MVP를 수상했다. 그러나 8월에 허리 통증을 호소했고, 검사 결과 추간판 탈출증 진단을 받아 8월 23일 수술을 받으며 남은 시즌을 마감했다. 비록 시즌 중도에 이탈했지만, 그의 결승타는 팀 내에서 시마 시게노부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고, 2점 홈런 이상의 비율이 리그 1위를 기록하는 등 승부처에서 강한 타격을 보여주었다.
2007년, 구리하라는 2년 연속으로 애리조나에서 시마 시게노부와 요시다 게이와 함께 개인 훈련을 시작했다. 부상으로 인해 13%까지 올랐던 체지방률을 다시 9%로 낮추고, 하루 6끼 식사 요법으로 체중을 92 kg까지 감량했다. 그는 팔꿈치에 골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데뷔 후 처음으로 144경기 전 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310(리그 5위), 25홈런, 92타점을 기록하며 훌륭한 시즌을 보냈다. 이 해 센트럴 리그에서 장타율 5할 이상을 기록한 우타자 중 삼진이 두 자릿수인 선수는 구리하라가 유일했다. 그는 또한 좌투수와 우투수 모두에게 강한 모습을 보였는데, 좌투수를 상대로 타율 .307, 10홈런, 장타율 .564를, 우투수를 상대로 타율 .311, 15홈런, 장타율 .490을 기록했다. 특히 9월 13일 한신 타이거스의 마무리 투수 후지카와 규지를 상대로 터뜨린 2점 홈런은 후지카와가 그 시즌에 허용한 첫 홈런이었다. 시즌 종료 후 그는 장래에 메이저 리그에 진출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2008년, 아라이 다카히로가 FA로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함에 따라 구리하라는 개막전부터 팀의 4번 타자로 공식 임명되었다. 시즌 초반에는 타율 .290, 2홈런, 6타점에 그치며 고전했지만, 교류전을 기점으로 컨디션을 끌어올려 7월에는 월간 타율 .408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했다. 그는 144경기 전 경기에 4번 타자로 선발 출장하여 타율 .332, 23홈런, 103타점을 기록하며 히로시마 카프가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 경쟁을 벌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타율(리그 3위), 안타 수(185개, 리그 2위), 타점(리그 4위)에서 개인 최고 기록을 경신했으며, 타석 수(616개)는 리그 3위를 기록했다. 또한 68개의 삼진은 100경기 이상 출장한 시즌 중 가장 적은 수치였다. 시즌 종료 후 그는 아라이 다카히로와 함께 1루수 부문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이는 1993년 투수 부문에서 이마나카 신지와 구와타 마스미가 공동 수상한 이후 15년 만에 두 명의 선수가 같은 포지션에서 골든 글러브를 수상한 사례였다. 오프 시즌에는 팔꿈치 관절경 수술을 받아 최대 1.5 cm 크기의 유리 연골 4개를 제거했다.
3.2.3. WBC 참가와 부상, 그리고 절정 (2009-2011)
2009년 시즌을 앞두고 3월에 열린 제2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일본 국가대표팀 최종 후보에 선발되었다. 수술 직후의 팔꿈치 상태를 고려하여 처음에는 예비 등록 선수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3월 20일(일본 시간) 한국과의 경기에서 무라타 슈이치가 오른쪽 다리를 다치면서, 무라타의 대체 선수로 급히 대표팀에 소집되었다. 그는 준결승전 전날부터 대표팀에 합류했다. 일본 대표팀 감독 하라 다쓰노리는 구리하라를 부르며 "이번에는 탈락했지만, 너는 장차 일본의 4번 타자가 될 인물이다"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다른 탈락 선수들이 통보 후 바로 대표팀 캠프를 떠난 것과 달리, 구리하라는 끝까지 남아 특별 타격 훈련을 했다. 하라 감독은 이러한 구리하라의 연습 자세를 보고 무라타의 부상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구리하라의 추가 소집을 결정했다. 급박한 일정 속에서 구리하라는 시차와 피로에 시달리며 미국과의 준결승전에서 3타수 무안타 2삼진 1병살타로 부진했지만, 일본은 미국을 9대4로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이어서 한국을 5대3으로 누르고 2회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구리하라도 우승 멤버의 일원이 되었다.
시즌에 돌입한 구리하라는 WBC 우승의 기세를 이어받아 도쿄 돔에서 열린 개막전에서 2홈런을 터뜨리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이후 요통에 시달리며 3년 만에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되는 경험도 했다. 최종적으로 홈런을 제외한 모든 타격 지표가 전년보다 하락했으며, 특히 타율은 .257로 떨어졌다. 그는 이 시즌에 4번의 타격 방해를 기록했는데, 이는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오프 시즌에는 새로 부임한 노무라 겐지로 감독의 의사에 따라 가을 캠프 첫날부터 3루수 수비 훈련을 시작하며 다시 3루수로 포지션 변경되었다.
2010년 시즌 초반, 구리하라는 3루수로 선발 출장했지만, 그가 비운 1루 자리에 새로 영입된 저스틴 휴버의 활약이 부진하자 4월 중순부터 다시 1루수로 선발 출장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나 6월 10일 치바 롯데 마린스와의 경기에서 오미네 유타의 몸에 맞는 볼에 맞아 오른 손목 골절상을 입고 약 2개월간 전열에서 이탈했다. 그는 올스타전 팬 투표에서 선발되었지만 부상으로 인해 출전을 포기했다. 복귀 후에는 젊은 선수인 이와모토 다카히로의 활약이 좋았기 때문에 다시 3루수로 선발 출장하는 기회가 늘었지만, 결과적으로 3루수 출장은 46경기에 그쳤고, 10개의 실책과 .906의 낮은 수비율을 기록했다. 타격에서는 타율과 출루율이 전년보다 개선되었지만, 홈런은 15개로 5년 만에 20개에 미치지 못했다.
2011년, 이 해부터 도입된 통일구의 영향 등으로 시즌 초반 부진을 겪었다. 그러나 올스타전 이후 컨디션을 회복하여 후반기에는 타율 .309, 15홈런, 50타점을 기록했고, 8월과 9월 월간 MVP를 수상했다(히로시마 야수로는 최초의 연속 수상). 최종적으로 타율 .293, 17홈런, 83타점, OPS .793의 성적을 남겼으며, 1루수로서 골든 글러브상과 생애 첫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이 해 국내 FA권을 취득했지만 행사하지 않고 1년 계약을 맺어 잔류했다. 그의 연봉은 생애 최고액인 1.60 억 JPY가 되었다. 이듬해 이후 취득할 것으로 예상되는 해외 FA권을 행사하여 메이저 리그로 이적하는 것에 대해서는 "가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있지만, 가서 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가족도 있어서 나만의 꿈만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언급했다.
3.2.4. 부상으로 인한 기량 저하 및 퇴단 (2012-2015)
2012년 3월 10일 열린 동일본 대지진 부흥 지원 베이스볼 매치에 일본 대표팀으로 5번 타자 겸 1루수로 선발 출장하여 2번째 타석에서 홈런을 터뜨리며 일본 대표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 해 시즌 초반부터 잦은 부상을 겪었던 오른쪽 팔꿈치에 통증이 재발하여 4월 26일 1군에서 말소되었다. 이후 '변형성 팔꿈치 관절염' 진단을 받고 5월 초 수술을 받으면서 남은 시즌을 통째로 날리게 되었다. 오프 시즌에는 부상자 특례 조치 제도를 통해 해외 FA권을 취득했지만, 이를 행사하지 않고 2000.00 만 JPY 삭감된 연봉 1.40 억 JPY에 1년 계약을 맺고 잔류했다.
2013년, 전년도 오른쪽 팔꿈치 수술에서 완벽하게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2월 스프링 캠프에 임했지만, 허리 통증을 호소하며 도중에 이탈했다. 3월에는 코뼈 골절과 오른쪽 대퇴부 부상으로 인해 시범경기에 일시적으로 불참하기도 했다. 개막전에는 1군에서 시작하여 이마무라 다케시의 대타로 출장하여 안타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후 이와모토 다카히로나 마쓰야마 류헤이 등의 젊은 선수들의 활약으로 5월 6일 출장 선수 등록이 말소되었고, 그대로 2군에서 시즌을 마쳤다. 시즌 종료 후 계약 협상에서는 NPB의 야구 협약상 감액 제한(40%) 적용을 구단으로부터 제시받았고, 연봉 8400.00 만 JPY에 계약을 갱신했다.
2014년, 만성적인 오른쪽 팔꿈치 통증의 영향으로 연간 내내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2001년 이후 처음으로 1군 출장 없이 시즌을 마쳤다. 11월 14일에는 팔꿈치 불안정 해소를 위해 세 번째로 오른쪽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2015년에도 앞서 언급된 오른쪽 팔꿈치 수술과 젊은 선수 육성에 중점을 둔 팀 방침 등의 영향으로 2군 생활에 전념했다. 웨스턴 리그 공식전에서는 30경기 출장에 타율 .132, 1홈런, 2타점에 그쳤다. 시즌 막바지인 9월 27일에는 "구리하라가 구단의 다음 시즌 전력 구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일부 보도를 공식 블로그를 통해 부정했다. 그러나 구단은 이후 구리하라와의 협상에서 다음 시즌 계약 조건으로 앞서 언급된 감액 제한을 초과하는 비율의 감봉을 제시했다. 이 제시에 동의하지 않은 구리하라는 다른 구단에서의 현역 생활을 이어갈 의사를 밝히며 자유 계약을 요청했고, 구단은 10월 9일 구리하라의 퇴단을 발표했다.
3.3.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시절 (2016)

2015년 11월 12일부터 구리하라의 고향 팀인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가을 캠프에 입단 테스트를 겸해 참가했다. 이 캠프에는 가와모토 료헤이(전 치바 롯데 마린스), 야마우치 소마(전 주니치 드래건스), 김무영(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도 참가했다. 다음 날인 11월 13일, 캠프를 시찰한 구단 부회장 호시노 센이치는 "구리하라가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입단 테스트는) 합격이다"라고 밝히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11월 15일 홍백전 종료 후, 1군 감독 나시다 마사타카는 약 4200명의 관중 앞에서 구리하라를 포함한 4명 전원의 합격을 발표했다. 그의 등번호는 0번이었다. 참고로 라쿠텐은 호시노가 1군 감독을 맡았던 2011년 시즌 종료 후에도 국내 FA권을 취득한 구리하라의 영입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구리하라는 이스턴 리그 공식전 47경기에 출전했다. 고향인 덴도 시에 위치한 덴도 시 스포츠 센터 야구장에서 열린 공식전에도 출장했지만, 통산 성적은 타율 .188, 4홈런, 15타점에 그쳤고, 1군 공식전 출장 기회는 없었다. 젊은 야수들의 성장으로 다음 시즌 전력 구상에서 제외된 것과, 라쿠텐에서는 1년 승부라고 결심했음에도 기대했던 타격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9월 하순에 그 해를 끝으로 현역 은퇴를 결심했다. 9월 29일, 1군 정규 시즌 중 구단을 통해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10월 1일 1군 홈 구장인 라쿠텐 코보 스타디움 미야기에서 열린 은퇴 기자회견에서는 "라쿠텐에서는 1군에 올라가지 못했지만, 여러분 덕분에 좋은 경험을 쌓았다"고 말하면서도, "프로 야구 생활에서 유일하게 후회하는 것은 리그 우승을 경험하지 못했고, (이 시즌에 25년 만에 우승을 달성한) 히로시마의 센트럴 리그 우승 속에 함께하지 못했던 것"이라며 "히로시마의 우승은 팬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이어서 나에게도 기뻤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4. 국제 대회 경력
4.1. 2002년 아시안 게임
구리하라는 2002년 부산에서 열린 제14회 아시안 게임에서 처음으로 국제 무대에 나섰다. 그는 산업 리그 및 마이너 리그 선수들로만 구성된 일본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10월 5일 중국과의 예선 라운드에서 선발 1루수 겸 6번 타자로 출장하여 홈런을 터뜨리는 등 활약하며 일본의 동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이 대회에는 후에 팀 동료가 되는 기다 쓰요시도 파견되었다.
4.2.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구리하라는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의 예비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2월 중순 미야자키에서 열린 훈련 캠프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최종 28인 명단에서는 제외되었다. 이는 오프 시즌에 팔꿈치 수술을 받은 그의 상태가 고려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팀의 주요 백업 선수 중 한 명으로 지명되었고, 3월 19일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한국과의 2라운드 순위 결정전에서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의 강타자 무라타 슈이치가 1루를 돌다가 햄스트링을 다치면서 기회를 얻었다.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 하라 다쓰노리는 즉시 구리하라를 대표팀에 소집했다. 하라 감독은 미야자키 캠프에서 구리하라의 헌신과 열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무라타의 부상 심각성을 알게 된 지 5분 이내에 구리하라에게 연락했다고 한다.
구리하라는 3월 21일, 미국과의 준결승전 전날 샌디에이고에 도착했다. 그는 장거리 여행으로 인한 시차증과 피로에 시달리며 경기에서 3타수 무안타 2삼진 1병살타를 기록하며 부진했다. 그러나 일본은 준결승에서 미국을 9대4로 꺾고, 3월 23일 결승에서 한국을 5대3으로 물리치며 2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5. 선수 특징
5.1. 타격
구리하라는 키 183 cm, 체중 97 kg의 건장한 체격을 가진 우타자로, 당겨치기에 능한 풀 히터였다. 그는 뛰어난 선구안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2009년 5월 16일 기준 통산 출루율 .352), 다른 파워 히터들에 비해 삼진을 적게 당하는 편이었다. 특히 변화구를 잘 공략했으며, 해마다 직구 대처 능력도 점진적으로 향상되었다. 그는 또한 밀어치기에도 능숙하여 일본 프로 야구에서 모든 방향으로 타구를 날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치바 롯데 마린스, 주니치 드래건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닛폰햄 파이터스에서 뛰며 1982년, 1985년, 1986년에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던 오치아이 히로미쓰의 스윙을 모델로 삼았다고 언급했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6시즌 동안 5번이나 타율 2할 9푼 이상, 4번이나 20홈런 이상을 기록하며 전성기에는 타율을 유지할 수 있는 우타 거포로 활약했다. 그러나 잦은 부상에 시달렸고, 특히 오른쪽 팔꿈치는 2008년, 2012년, 2014년에 걸쳐 세 차례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부상들이 그의 선수 생명을 단축시키는 큰 요인이 되었다. 그는 또한 몸에 맞는 볼이 많은 타자이기도 했는데, 2008년에는 리그 1위인 12개의 몸에 맞는 볼을 기록했다. 통산 8번의 타격 방해를 기록했으며, 2009년 시즌에는 한 시즌 4번의 타격 방해를 기록하기도 했다.
5.2. 수비
구리하라는 프로 입단 당시 3루수였지만, 2군 시절 1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2006년부터는 거의 1루수로만 출장했다. 그는 수비적으로 특별히 뛰어나다고 평가받지는 않았으며, 2008년 1루수 부문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을 때도 많은 이들이 그의 공격력 덕분에 수상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선수 경력 초반에는 만성적으로 어깨 관절이 헐거워 고생했는데, 2군 시절에는 마이너 리그 경기에서 어깨 탈골로 인해 다이빙 캐치를 금지당하기도 했다.
6. 지도자 경력
6.1. 라쿠텐 골든이글스 코치 (2017-2019)
선수 은퇴 후, 구리하라는 라쿠텐 구단의 요청을 받아 2017년부터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2군 타격 코치로 취임했다. 같은 해 11월 25일부터 대만에서 개최된 2017년 아시아 윈터 베이스볼 리그에서는 NPB 이스턴 선발팀의 타격 코치를 맡았다. 2018년에도 2군 타격 코치를 계속 맡았지만, 1군 팀 타율이 12개 구단 중 최하위인 .216으로 부진하자 4월 30일 경기 종료 후 다카스 요스케와 교체되어 1군 타격 코치로 보직 변경되었다. 2019년을 끝으로 라쿠텐을 떠났다.
6.2. 주니치 드래건스 코치 (2020-2021)
2020년부터는 주니치 드래건스의 1군 타격 코치로 취임했다. 그의 등번호는 73번이었다. 2021년 10월 29일, 그 해를 끝으로 주니치를 떠날 것이 발표되었다.
6.3. 롯데 마린스 코치 (2023-현재)
2022년에는 라쿠텐의 스카우트부 프로 스카우트 그룹에서 근무했다. 같은 해 12월 10일 라쿠텐을 퇴단했고, 이튿날인 12월 11일 2023년부터 치바 롯데 마린스의 2군 타격 코치를 맡을 것이 발표되었다. 그의 등번호는 77번이다. 2025년부터는 1군 타격 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7. 개인사
7.1. 결혼 및 가족
구리하라 겐타는 2004년 12월 히로시마 카프의 홈런 걸과 결혼했다。2005년 7월에는 첫 딸을 얻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딸과 함께 결혼 피로연을 열었다. 그의 아내는 네일 살롱을 운영하고 있으며, 일반인임에도 불구하고 공식 블로그를 운영하고 카프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한다.
8. 수상 및 영예
8.1. 주요 수상 경력
- 베스트 나인: 1회 (1루수 부문: 2011년)
- 골든 글러브상: 3회 (1루수 부문: 2008년, 2009년, 2011년)
- 월간 MVP: 3회 (2006년 7월, 2011년 8월, 2011년 9월)
- 우수 JCB·MEP상: 1회 (2007년)
- 베스트 파더 옐로우 리본상 in "프로 야구 부문" (2009년)
8.2. 기타 수상 및 기록
- 첫 기록
- 첫 출장: 2002년 8월 31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23차전(나고야 돔), 9회초 다마키 시게오의 대타로 출장
- 첫 타석: 상동, 9회초 야마이 다이스케로부터 유격수 땅볼
- 첫 선발 출장: 2002년 9월 4일, 대 한신 타이거스 23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7번·3루수로 선발 출장
- 첫 안타·첫 홈런·첫 타점: 2002년 9월 5일, 대 한신 타이거스 24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2회말 후지카와 규지로부터 중월 솔로 홈런
- 첫 도루: 2003년 4월 16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4차전(도쿄 돔), 7회초 2루 도루(투수: 다카하시 히사노리, 포수: 아베 신노스케)
- 기록 달성 경력
- 통산 100홈런: 2009년 4월 7일, 대 한신 타이거스 1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5회초 구보 야스토모로부터 좌월 2점 홈런 ※역대 253번째
- 통산 1000안타: 2011년 8월 26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6차전(MAZDA Zoom-Zoom 스타디움 히로시마), 1회말 사와무라 히로카즈로부터 좌전 적시타 ※역대 266번째
- 통산 150홈런: 2011년 9월 10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차전(도쿄 돔), 3회초 후지이 슈고로부터 좌월 2점 홈런 ※역대 156번째
- 통산 1000경기 출장: 2012년 4월 21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5차전(MAZDA Zoom-Zoom 스타디움 히로시마), 4번·1루수로 선발 출장 ※역대 449번째
- 기타 기록
- 통산 피타격 방해: 8회 (역대 10위 타이)
- 시즌 피타격 방해: 4회 (2009년, 역대 3위 타이)
- 1경기 2회 피타격 방해: 2009년 8월 28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8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5회초·7회초 기록(포수: 다케야마 신고)
- 올스타전 출장: 3회 (2007년, 2009년, 2011년) ※2010년은 출장 사퇴
- 등번호
- 50 (2000년 ~ 2005년)
- 5 (2006년 ~ 2015년)
- 0 (2016년)
- 85 (2017년 ~ 2019년)
- 73 (2020년 ~ 2021년)
- 77 (2023년 ~ )
- 별명
- 야성적인 외모와 이름에서 따온 '쿠리 원인'이라는 별명이 있었으나, 2006년 별명 공모를 통해 '콩(구리하라)'으로 결정되었다. 2005년 홈런왕 아라이 다카히로와 함께 '킹콩포'로 불리기도 했다. 한신 타이거스에서 이적한 기다 쓰요시와 얼굴이 닮아 야구 팬들에게 구리하라 본인이나 형제로 오해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 홈런 기록
- 2008년 구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의 마지막 홈런, 2009년 신 홈 구장인 마쓰다 스타디움에서의 팀 첫 홈런을 기록했다. 또한 이 해 신설된 히로시마현 미요시시의 미요시 운동 공원 야구장과 니가타현 니가타시의 니가타 현립 야구장에서 각각 구장 프로 1호 홈런을 기록했다.
9. 통계
9.1. 연도별 타격 성적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번트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4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2002 | 히로시마 | 10 | 23 | 22 | 2 | 4 | 2 | 0 | 1 | 9 | 1 | 0 | 0 | 0 | 0 | 0 | 0 | 1 | 7 | 0 | .182 | .217 | .409 | .626 |
2003 | 26 | 77 | 76 | 7 | 21 | 1 | 0 | 3 | 31 | 6 | 1 | 0 | 0 | 0 | 1 | 0 | 0 | 15 | 1 | .276 | .286 | .408 | .694 | |
2004 | 90 | 282 | 270 | 26 | 72 | 7 | 1 | 11 | 114 | 32 | 2 | 1 | 1 | 1 | 8 | 0 | 2 | 60 | 5 | .267 | .292 | .422 | .714 | |
2005 | 77 | 274 | 254 | 31 | 82 | 16 | 0 | 15 | 143 | 43 | 0 | 1 | 1 | 1 | 17 | 0 | 1 | 63 | 12 | .323 | .366 | .563 | .929 | |
2006 | 101 | 397 | 373 | 44 | 110 | 19 | 0 | 20 | 189 | 69 | 2 | 1 | 0 | 3 | 21 | 1 | 0 | 90 | 7 | .295 | .330 | .507 | .837 | |
2007 | 144 | 622 | 565 | 77 | 175 | 37 | 1 | 25 | 289 | 92 | 3 | 4 | 0 | 6 | 46 | 2 | 3 | 94 | 13 | .310 | .361 | .512 | .873 | |
2008 | 144 | 616 | 557 | 69 | 185 | 31 | 1 | 23 | 287 | 103 | 5 | 4 | 0 | 4 | 42 | 2 | 12 | 68 | 18 | .332 | .389 | .515 | .904 | |
2009 | 140 | 582 | 521 | 68 | 134 | 21 | 0 | 23 | 224 | 79 | 1 | 6 | 0 | 2 | 48 | 1 | 7 | 82 | 11 | .257 | .327 | .430 | .757 | |
2010 | 105 | 450 | 386 | 62 | 114 | 22 | 0 | 15 | 181 | 65 | 3 | 3 | 0 | 6 | 51 | 2 | 7 | 70 | 10 | .295 | .382 | .469 | .851 | |
2011 | 144 | 596 | 536 | 56 | 157 | 29 | 0 | 17 | 237 | 87 | 0 | 1 | 0 | 7 | 40 | 3 | 12 | 84 | 11 | .293 | .351 | .442 | .793 | |
2012 | 21 | 84 | 76 | 5 | 16 | 0 | 0 | 0 | 16 | 5 | 0 | 0 | 0 | 2 | 6 | 0 | 0 | 15 | 1 | .211 | .262 | .211 | .472 | |
2013 | 24 | 69 | 59 | 3 | 12 | 1 | 0 | 0 | 13 | 4 | 0 | 0 | 0 | 0 | 10 | 0 | 0 | 12 | 3 | .203 | .319 | .220 | .539 | |
통산:12년 | 1026 | 4072 | 3695 | 450 | 1082 | 186 | 3 | 153 | 1733 | 586 | 17 | 21 | 2 | 32 | 290 | 11 | 45 | 660 | 92 | .293 | .349 | .469 | .818 |
9.2. 연도별 수비 성적
연도 | 구단 | 1루수 | 3루수 | ||||||||||
---|---|---|---|---|---|---|---|---|---|---|---|---|---|
경기 | 척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경기 | 척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
2002 | 히로시마 | - | 8 | 3 | 6 | 2 | 0 | .818 | |||||
2003 | 1 | 6 | 1 | 0 | 1 | 1.000 | 20 | 15 | 35 | 3 | 1 | .943 | |
2004 | 40 | 284 | 23 | 1 | 24 | .997 | 50 | 18 | 61 | 6 | 5 | .929 | |
2005 | 56 | 452 | 39 | 3 | 39 | .994 | 15 | 9 | 20 | 2 | 1 | .951 | |
2006 | 96 | 937 | 47 | 9 | 75 | .991 | 1 | 0 | 1 | 0 | 0 | 1.000 | |
2007 | 144 | 1348 | 85 | 8 | 119 | .994 | - | ||||||
2008 | 144 | 1357 | 78 | 7 | 111 | .995 | - | ||||||
2009 | 138 | 1230 | 92 | 13 | 87 | .990 | - | ||||||
2010 | 71 | 565 | 31 | 3 | 50 | .995 | 46 | 32 | 64 | 10 | 5 | .906 | |
2011 | 144 | 1238 | 100 | 6 | 79 | .996 | - | ||||||
2012 | 21 | 207 | 16 | 0 | 16 | 1.000 | - | ||||||
2013 | 15 | 144 | 8 | 1 | 12 | .993 | - | ||||||
통산 | 870 | 7768 | 520 | 51 | 613 | .994 | 140 | 77 | 187 | 23 | 12 | .920 |
9.3. WBC 타격 성적
연도 | 대표팀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번트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4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
2009 | 일본 | 2 | 3 | 3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2 | 1 | .000 | .000 | .000 |
10. 평가 및 영향
구리하라 겐타는 2006년부터 2011년까지 6시즌 동안 꾸준히 높은 타율과 20홈런 이상을 기록하며 센트럴 리그의 우타 거포로서 활약했다. 그는 '전 경기 출장이 선수의 최대 사명'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2007년, 2008년, 2011년 세 시즌 동안 전 경기 출장을 달성한 것을 가장 큰 자부심으로 여겼다. 그는 "자신이 경기에 나가지 않을 때 다른 누군가가 활약하면 자신의 자리가 없어진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1년 내내 경기에 나설 수 있는 체력을 기르고, 이를 위해 충분한 연습량을 쌓는 것", 그리고 "한 시즌만의 활약에 그치지 않고 최소 3시즌 연속 전 경기 출장을 해야 비로소 어엿한 야구 선수"라는 것을 지도자로서의 기본 방침으로 삼고 있다.
그는 '노력하는 사람'으로 평가받았으며, 라쿠텐 시절 스프링 캠프에서는 팀에서 가장 먼저 구장에 도착하고 가장 늦게 떠나는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팀 동료였던 오카지마 다케로는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이다. 야구인으로서, 인간으로서 정말 훌륭한 사람"이라고 구리하라를 평가했다. 그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과 향상심을 가지는 것"이 야구인으로서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고 말한다.
선수 시절 잦은 부상, 특히 오른쪽 팔꿈치에 세 차례나 수술을 받아야 했던 고난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꾸준한 기량을 유지하며 팀의 중심 타자로 활약했다. 은퇴 후에는 코치로서 젊은 선수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철학을 전수하며 일본 야구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11. 관련 항목
- 야마가타현 출신 인물 목록
-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선수 목록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선수 목록
- 주니치 드래건스
- 치바 롯데 마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