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기 및 프로 입단 전
고즈루 마코토는 1922년 12월 17일 후쿠오카현 이즈카시에서 태어났다. 이즈카 상업전수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 야구팀인 야하타 제철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1942년 직업 야구의 나고야군에 입단했는데, 당시 그는 자신의 고향 지명에서 따온 '이즈카 마코토'(飯塚誠いいづか まこと일본어)라는 가명을 등록명으로 사용했다. 이러한 가명 사용에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야하타 제철이 군수 공장이어서 이직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대학 진학을 명목으로 퇴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른 설은 나고야군 이사였던 아카미네 마사시가 고즈루를 강제로 영입하면서 야하타 제철 선수단과 팬들의 거센 반발을 샀고, 이에 아카미네가 성의를 보이기 위해 가명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고즈루 본인도 장내 아나운서가 '이즈카'를 호명할 때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름처럼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는 같은 해 9월 1일부터는 본명인 '고즈루 마코토'를 등록명으로 되찾았다. 이후 고즈루는 니혼 대학 야간부에 다녔는데, 이는 공부보다는 야구를 하기 위함이었으며, 니혼 대학 경제학부를 수료했다.
2. 프로 선수 경력
고즈루 마코토는 19세에 프로에 데뷔하여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여러 팀을 거치며 일본 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들을 세웠다.
2.1. 초기 경력 (1942-1947)
고즈루는 1년차부터 나고야군(현 주니치 드래건스)의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43년 시즌 종료 후 일본 해군에 징집되어 1944년과 1945년 시즌에는 경기에 참가하지 못했다. 1946년 팀이 '주부니혼군'으로 이름을 변경한 후 복귀하여 1947년까지 뛰었다.
2.2. 규에이 이적 및 타격폼 개발 (1948-1949)
1948년, 구단 대표였던 아카미네 마사시가 사임하자 고즈루는 그를 따라 구단을 떠나 규에이 플라이어스로 이적했다. 이 시기에 그는 훗날 쇼치쿠 로빈스의 감독을 맡게 되는 닛타 교이치로부터 타격 지도를 받았다. 닛타는 허리 회전을 이용한 다운 스윙 타법, 일명 '골프 스윙 타법'을 고즈루에게 전수했다. 당시 많은 강타자들이 어깨에 힘을 주고 팔 힘으로 스윙했던 것과 달리, 몸집이 작고 팔 힘이 부족했던 고즈루의 부드러운 허리 회전 스윙은 매우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닛타가 원래 골프 선수였기 때문에 '골프 스윙'이라는 용어는 당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명칭 때문에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는 어퍼 스윙'이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1948년 시즌 고즈루는 타율 .305를 기록하며 아오타 노보루에 불과 1푼 차이로 타격왕 경쟁에서 2위에 올랐다.
1949년에는 다시 아카미네를 따라 다이에이 스타스로 이적했다. 그는 이때 방망이를 힘주지 않고 부드럽게 휘두르는 감각을 익혔으며, 타격 장려를 위해 반발력이 강화된 이른바 '래빗 볼'이라는 공인구가 채택된 것도 그의 타격 성적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그 해 고즈루는 타율 .361을 기록하며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고,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되었다.
2.3. 쇼치쿠 로빈스 및 기록적인 시즌 (1950-1952)
1950년,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 양대 리그 분립 시기에 고즈루는 센트럴 리그 총무로 이적한 아카미네의 알선으로 쇼치쿠 로빈스로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이와모토 요시유키, 오카 도라오, 가나야마 지로 등과 함께 '수소 폭탄 타선'이라 불리는 강력한 타선을 구축했다.
1950년은 고즈루에게 있어 역사적인 시즌이었다. 그는 130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355를 기록했고, 51홈런, 161타점의 압도적인 성적으로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51홈런은 전년도 후지무라 후미오가 세운 46홈런의 일본 기록을 경신한 것이자,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한 시즌 50홈런 달성 기록이었다. 그는 11월 2일 다이요 웨일스와의 경기(닛세이 구장) 3회에 이마니시 렌타로를 상대로 좌월 홈런을 터뜨리며 이 이정표를 세웠다. 51홈런 기록은 1963년 노무라 가쓰야가 52홈런으로 경신하기 전까지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었고, 1964년 오 사다하루가 55홈런으로 경신하기 전까지는 센트럴 리그 기록이었다.
고즈루는 또한 161타점과 143득점, 376루타를 기록했는데, 이 세 가지 기록은 현재까지도 일본 프로 야구 한 시즌 최다 기록으로 남아 있다. 타점왕과 홈런왕을 차지하며 2관왕에 올랐고, 시즌 MVP도 수상했다. 비록 타율은 .362를 기록한 후지무라 후미오에게 미치지 못해 트리플 크라운은 놓쳤지만, 그의 장타율 .7287은 23년간 일본 기록으로 유지되었으며, 85개의 장타는 52년간 일본 기록이자 현재까지도 센트럴 리그 기록이다. 더욱이 그는 이 해 28도루를 기록하여 50홈런-20도루(51홈런-28도루)라는 일본 야구계 유일무이한 기록을 달성했다(이는 2024년 오타니 쇼헤이가 MLB에서 경신하기 전까지 전 세계적으로도 유일한 기록이었다).
쇼치쿠 로빈스는 초대 일본 시리즈에 진출했으나 마이니치 오리온스에게 2승 4패로 패했다. 고즈루는 이 시리즈에서 23타수 4안타, 무홈런으로 부진했는데, 시즌 막판 발생한 추간판 탈출증 부상이 그의 활약을 저해했다. 이듬해인 1951년부터는 반발력이 낮아진 공인구의 도입과 추간판 탈출증의 악화로 인해 성적이 점차 하락했다. 당시에는 치료법도 마땅치 않아 통증이 너무 심해 허리 감각이 없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2.4. 히로시마 카프 및 은퇴 (1953-1958)
1952년 시즌 후 쇼치쿠 로빈스가 다이요 웨일스와 합병하자, 고즈루는 1953년 가나야마 지로, 미무라 이사오 등 아카미네 파벌의 선수들과 함께 히로시마 카프로 이적했다. 히로시마의 이시모토 슈이치 감독과 '술통 모금'(樽募金)을 통해 자금을 모은 히로시마 시민들의 열의 덕분에 그의 이적이 성사되었으며, 야구계의 대스타 입단에 히로시마는 열광했다.
고즈루는 히로시마에서 왕년과 같은 타격 파워를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1953년 개인 최다인 33도루를 기록하는 등 분투했고, 팬들은 그의 활약에 보답하며 인기 투표 1위로 올스타전에 그를 출전시켰다. 타격력이 부족했던 히로시마에서 그는 부동의 4번 타자로 활약하며 1954년(타율 .297, 9위), 1955년(타율 .285, 6위) 2년 연속 타격 순위 10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6년간 승률이 낮았던 히로시마를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1958년, 35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당시 구단은 '팀 젊은 피 수혈책'이라는 명목으로 그에게 방출을 통보했다. 고즈루는 구단 대표 가와구치 고에게 "나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선수들이 있는데 왜 나인가. 나는 아직 현역으로 뛸 자신감이 있다", "이 구단은 히로시마 출신 파벌이 너무 강하다", "은퇴를 권유한다면 코치 제의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불만을 표출했다. 이에 가와구치는 "당신은 성격적으로 코치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고, 현역 시절보다 급여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면 용퇴하는 것이 깔끔하지 않겠는가"라고 설득했고, 고즈루는 이를 받아들였다. 훗날 가와구치는 구단 간부인 마쓰다 쓰네지로부터 "고즈루를 은퇴시킨 것은 시라이시 가쓰미 감독이 편하게 감독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이후 시라이시 감독이 이끄는 카프는 1960년 구단 최초로 5할 승률을 달성했지만, 1961년부터 1962년 몬젠 마사토가 감독직을 이어받은 후 팀 성적이 부진하고 관중 동원도 줄었다. 이에 구단 사장 이토 노부유키는 고즈루를 감독으로 초빙하려 했으나, 구단 임원들의 뜻이 모이지 못해 이토는 사임했다. 후임 구단 사장 마쓰다 쓰네지는 시라이시를 다시 감독으로 초빙했고, 결국 고즈루가 히로시마 카프로 복귀할 기회는 영원히 사라졌다.
3. 은퇴 후 경력
고즈루 마코토는 프로 선수 은퇴 후에도 야구계에 몸담으며 코치 및 스카우트 활동을 이어갔으며, 이후 사업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3.1. 코치 및 스카우트 활동
은퇴 후 고즈루는 라디오 간토의 해설위원(1959년 ~ 1963년)으로 활동했다. 이후 고쿠테쓰 스왈로스와 산케이 스왈로스의 1군 타격 코치(1964년 ~ 1965년)를 맡아 다카야마 다다카쓰와 후쿠토미 구니오 같은 선수들을 지도했다. 1968년에는 한신 타이거스의 1군 타격 코치로 부임하여 투수로 입단했던 구와노 하카루를 타자로 전향시키기도 했다. 이듬해인 1969년부터 1976년까지 한신 타이거스 도쿄 주재 스카우트를 담당하며, 특히 가케후 마사유키의 입단 테스트를 맡았다.
3.2. 만년 및 사업 활동
1976년 한신 타이거스를 떠난 후, 고즈루는 야구계를 완전히 떠나 도쿄도 네리마구에서 건물 관리 회사를 직접 경영했다. 그는 야구 선수 생활을 마친 뒤에도 야구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아, 환갑이 될 때까지 배팅 센터에 꾸준히 다니며 매일 약 200구씩 공을 쳤을 정도로 타격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기울인 '타격의 장인'이었다.
4. 선수 특징 및 인물
고즈루 마코토는 야구 선수로서 뛰어난 기량과 더불어 성실하고 연구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4.1. 선수 특징
그는 '야구벌레'(野球の虫)라고 불릴 정도로 연구열이 뛰어났다. 특히 약점으로 꼽히던 커브를 철저한 연습으로 극복했으며, 전후 홈런 붐이 도래하자 비거리를 늘리는 골프 스윙 타법에 몰두하여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었고, 이는 전례 없는 홈런 기록으로 이어졌다. 또한, 통산 240도루를 기록할 정도로 뛰어난 주루 능력을 지녔으며, 강한 어깨를 활용한 수비 실력도 높이 평가받았다.
4.2. 인물
고즈루는 사적인 자리에서는 물靜하고 온화한 성격이었으며, 농담을 즐기는 신사와 같았다고 전해진다.
5. 유산 및 영예
고즈루 마코토는 일본 야구사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그의 공헌은 수많은 영예와 기록으로 기억되고 있다.
5.1.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고즈루 마코토는 1980년에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일본 야구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5.2. 별명 및 영향
그는 아름다운 타격 폼과 조 디마지오를 연상시키는 풍모로 인해 '일본의 조 디마지오'(和製ディマジオ와세이 디마지오일본어)라는 별명으로 얻었다. 이는 그의 우아하고 파워풀한 타격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별명이었다.
특히 1950년에 세운 161타점, 143득점, 376루타 기록은 현재까지도 일본 프로 야구 역대 최다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일본인 선수 최초로 한 시즌 50홈런을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또한, 51홈런-28도루라는 기록은 일본 야구 역사상 유일한 50홈런-20도루 달성 기록으로, 2024년 오타니 쇼헤이가 MLB에서 이를 경신하기 전까지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일무이한 기록이었다. 이처럼 그는 일본 야구의 초기 시대에 독보적인 타격 능력과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며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6. 사망
고즈루 마코토는 2003년 6월 2일, 80세의 나이로 도쿄도 도시마구에 있는 병원에서 심실세동으로 사망했다.
7. 상세 정보
7.1. 타이틀 및 수상 내역
고즈루 마코토는 현역 시절 다음과 같은 타이틀과 수상을 기록했다.
- 수위 타자: 1회(1949년)
- 홈런왕: 1회(1950년)
- 타점왕: 1회(1950년)
- 최다 출루수: 1회(1949년)
- MVP: 1회(1950년)
- 베스트 나인: 2회(외야수 부문: 1949년, 1950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1980년)
7.2. 기록 및 이정표
고즈루 마코토가 프로 경력 동안 달성한 주요 기록 및 이정표는 다음과 같다.
- 통산 100홈런: 1950년 9월 10일, 대 히로시마 카프 13차전(히로시마 종합 구장), 나카야마 마사요시로부터 홈런 (역대 3번째)
- 통산 1000안타: 1952년 7월 27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4차전(오사카 구장), 니시다 도루로부터 안타 (역대 11번째)
- 통산 1000경기 출장: 1953년 4월 28일 (역대 17번째)
- 시즌 최다 득점: 143(1950년, 일본 프로 야구 기록)
- 시즌 최다 타점: 161(1950년, 일본 프로 야구 기록)
- 시즌 최다 루타: 376(1950년, 일본 프로 야구 기록)
- 시즌 50홈런 이상: 1회(1950년,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
- 시즌 40홈런 이상: 1회(1950년, 일본 프로 야구 사상 2번째)
- 10경기 연속 타점: 1950년 5월 17일 ~ 5월 31일
- 올스타전 출장: 3회(1951년, 1953년, 1956년)
- 48개 구장에서의 홈런 기록
7.3. 등번호 및 등록명
고즈루 마코토는 프로 경력 동안 다음과 같은 등번호와 등록명을 사용했다.
- 32 (1942년 ~ 1943년, 1946년 ~ 1947년)
- 24 (1948년)
- 3 (1949년 ~ 1952년)
- 15 (1953년 ~ 1958년)
- 61 (1964년 ~ 1965년)
- 57 (1968년)
- 이즈카 마코토 (飯塚誠いいづか まこと일본어, 1942년 ~ 1942년 8월 31일)
- 고즈루 마코토 (小鶴誠こづる まこと일본어, 1942년 9월 1일 ~ 1958년, 1964년 ~ 1965년, 1968년)
7.4. 연도별 타격 성적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번트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 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42 | 나고야 주부니혼 | 102 | 417 | 370 | 35 | 80 | 9 | 9 | 2 | 113 | 29 | 8 | 7 | 1 | -- | 45 | -- | 1 | 49 | -- | .216 | .303 | .305 | .608 |
1943 | 80 | 349 | 314 | 31 | 65 | 10 | 4 | 3 | 92 | 21 | 4 | 4 | 3 | -- | 32 | -- | 0 | 20 | -- | .207 | .280 | .293 | .573 | |
1946 | 96 | 427 | 374 | 54 | 102 | 21 | 7 | 10 | 167 | 63 | 6 | 7 | 1 | -- | 50 | -- | 2 | 40 | -- | .273 | .362 | .447 | .808 | |
1947 | 114 | 432 | 375 | 43 | 79 | 17 | 5 | 9 | 133 | 38 | 9 | 2 | 0 | -- | 57 | -- | 0 | 49 | -- | .211 | .315 | .355 | .669 | |
1948 | 규에이 | 113 | 483 | 429 | 57 | 131 | 14 | 7 | 16 | 207 | 65 | 27 | 9 | 1 | -- | 52 | -- | 1 | 66 | -- | .305 | .382 | .483 | .864 |
1949 | 다이에이 | 129 | 577 | 501 | 112 | 181 | 26 | 8 | 24 | 295 | 92 | 15 | 6 | 0 | -- | 75 | -- | 1 | 45 | -- | .361 | .445 | .589 | 1.034 |
1950 | 쇼치쿠 | 130 | 606 | 516 | 143 | 183 | 28 | 6 | 51 | 376 | 161 | 28 | 8 | 0 | -- | 89 | -- | 1 | 53 | 16 | .355 | .450 | .729 | 1.179 |
1951 | 97 | 441 | 387 | 68 | 101 | 16 | 4 | 24 | 197 | 85 | 20 | 3 | 0 | -- | 54 | -- | 0 | 43 | 11 | .261 | .351 | .509 | .861 | |
1952 | 119 | 504 | 450 | 57 | 128 | 24 | 0 | 17 | 203 | 49 | 19 | 7 | 0 | -- | 51 | -- | 1 | 44 | 14 | .284 | .359 | .451 | .810 | |
1953 | 히로시마 | 130 | 557 | 488 | 80 | 138 | 32 | 2 | 14 | 216 | 74 | 33 | 5 | 0 | -- | 68 | -- | 1 | 57 | 14 | .283 | .372 | .443 | .814 |
1954 | 121 | 503 | 454 | 67 | 135 | 25 | 3 | 15 | 211 | 72 | 21 | 7 | 0 | 2 | 47 | -- | 0 | 48 | 16 | .297 | .362 | .465 | .827 | |
1955 | 130 | 549 | 494 | 62 | 141 | 17 | 7 | 18 | 226 | 67 | 26 | 7 | 5 | 4 | 46 | 11 | 0 | 68 | 15 | .285 | .344 | .457 | .801 | |
1956 | 122 | 482 | 428 | 48 | 111 | 12 | 0 | 11 | 156 | 43 | 16 | 4 | 3 | 2 | 48 | 5 | 1 | 60 | 4 | .259 | .334 | .364 | .699 | |
1957 | 107 | 422 | 387 | 31 | 99 | 12 | 0 | 8 | 135 | 38 | 7 | 4 | 1 | 5 | 28 | 5 | 1 | 70 | 10 | .256 | .304 | .349 | .653 | |
1958 | 65 | 200 | 174 | 21 | 43 | 4 | 0 | 8 | 71 | 26 | 2 | 2 | 2 | 5 | 19 | 1 | 0 | 29 | 8 | .247 | .313 | .408 | .721 | |
통산 : 15년 | 1655 | 6949 | 6141 | 909 | 1717 | 267 | 62 | 230 | 2798 | 923 | 240 | 82 | 17 | 18 | 761 | 22 | 10 | 741 | 108 | .280 | .359 | .456 | .815 |
각 연도별 굵은 글씨는 해당 연도 리그 최고 성적을 나타낸다.
나고야(나고야군)는 1944년 산교(산교군)로, 1946년 주부니혼(주부니혼군)으로 구단 이름을 변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