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수 경력
알레한드로 스코페지는 아르헨티나와 유럽, 그리고 남아메리카의 여러 클럽에서 선수 생활을 보냈으며, 두 국가의 국가대표팀에서도 활약한 다재다능한 공격수였다.
1.1. 클럽 경력

라플라타에서 태어난 스코페지는 아르헨티나의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 플라타에서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이 팀에서 "로스 프로페소레스"(Los Profesores로스 프로페소레스스페인어, '교수단'이라는 의미)로 불리던 전설적인 공격진의 일원이 되었다. 1931년에는 소속팀에서 31골을 기록하는 뛰어난 득점력을 보여주었으나, 33골을 넣은 동료 알베르토 소사야에게 밀려 득점왕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에스투디안테스 소속으로 총 68경기에 출전하여 45골을 기록했다.
1933년, 스코페지는 이탈리아로 이적하여 AS 로마에서 활약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이탈리아 시민권(이른바 오리운도(oriundo오리운도이탈리아어))을 취득하였고, 이후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에도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 로마에서 그는 63경기에 출전하여 24골을 넣었다. 1936년에는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라싱 클루브에 입단하여 60경기에 출전, 44골을 기록했다.
그의 후기 선수 경력은 유럽에서 이어졌다. 그는 프랑스의 레드 스타 생투앙에서 뛰었으며, 이곳에서 24골을 기록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무렵, 그는 중립국인 포르투갈로 이동하여 벨레넨스스와 SL 벤피카에서 활동했다. 1942년에는 남아메리카로 복귀하여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며, 27경기에 출전하여 11골을 기록했다. 이 외에도 우니온 데 산타페에서 6경기 1골을 기록한 바 있다.
1.2. 국가대표팀 경력
알레한드로 스코페지는 두 국가의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한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1929년부터 1941년까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뛰었고, 총 8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기록했다. 특히 우루과이에서 열린 1930년 FIFA 월드컵의 초대 대회에 아르헨티나 대표로 참가하여 팀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또한 1937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이탈리아 시민권을 취득한 후인 1935년에는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1경기에 출전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다.
2. 감독 경력
선수 은퇴 후, 알레한드로 스코페지는 곧바로 감독으로 전향하여 여러 클럽팀과 국가대표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2.1. 클럽 감독
스코페지는 다양한 클럽팀에서 감독직을 수행했다. 그는 멕시코의 아메리카, 스페인의 발렌시아, 에스파뇰, 데포르티보 라코루냐, 포르투갈의 벨레넨스스, 스포르팅 리스본, 포르투, 그리고 칠레의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 등 여러 팀의 지휘봉을 잡았다.
특히 스포르팅 리스본 감독 시절에는 1955년 9월 4일 FK 파르티잔과의 유러피언컵 초대 경기에서 팀을 이끌었다.
2.2. 국가대표팀 감독
스코페지는 클럽 감독 외에도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그리고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을 지휘하며 국제적인 경험을 쌓았다.
3. 경력 통계
3.1. 국가대표팀 득점 기록
다음은 알레한드로 스코페지의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에서의 득점 기록이다. 아래의 점수에서 왼쪽의 점수가 아르헨티나의 점수이다.
4. 수상 기록
알레한드로 스코페지는 선수와 감독으로서 여러 중요한 우승을 경험했다.
4.1. 선수 시절
- 코파 아메리카
- 우승: 1937 (아르헨티나)
- FIFA 월드컵
- 준우승: 1930 (아르헨티나)
4.2. 감독 시절
-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 우승: 1961-62, 1962-63 (발렌시아)
- 코파 MX
- 우승: 1963-64, 1964-65 (아메리카)
- 칠레 프리메라 디비시온
- 우승: 1967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
5. 최후
알레한드로 스코페지는 1987년 10월 23일, 향년 79세의 나이로 멕시코시티에서 영면에 들었다.
6. 평가 및 유산
알레한드로 스코페지는 20세기 중반 축구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과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모두 뛰는 등 독특한 국제 경력을 가졌으며, 이는 당시 오리운도 선수들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진다. 선수 시절 "로스 프로페소레스"의 일원으로서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 플라타의 전설적인 공격진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고, 1930년 FIFA 월드컵 준우승과 1937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의 주역이었다.
감독으로서도 그는 유럽과 남아메리카의 여러 리그에서 성공을 거두며 다수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특히 발렌시아 CF의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우승, 클루브 아메리카의 코파 MX 우승, 그리고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의 칠레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은 그의 지도력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업적이다. 다양한 국가와 문화권에서 선수 및 감독으로 활동하며 쌓은 풍부한 경험은 그를 국제 축구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만들었다. 그의 축구에 대한 깊은 이해와 다재다능함은 후대에 큰 유산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