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는 파르네세 가문의 일원으로서 스페인 왕가와 깊은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는 그의 성장과 초기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1.1. 유년 시절과 교육

알레산드로는 1545년 8월 27일, 파르마 공작 오타비오 파르네세(교황 바오로 3세의 손자)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인 카를 5세의 사생아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1549년 10월 7일 로마에서 사망한 쌍둥이 형제 카를로가 있었다. 1550년, 알레산드로는 어머니와 함께 로마를 떠나 파르마로 이주했다. 그의 어머니는 펠리페 2세와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의 이복 누이였다. 1556년 마르가레테가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총독으로 임명되자, 알레산드로는 어머니를 따라 브뤼셀로 갔고, 파르네세 가문의 충성을 보장하기 위해 펠리페 2세에게 인계되었다. 그는 국왕의 보호 아래 잉글랜드 왕궁을 방문한 후 스페인으로 건너가 사촌인 아스투리아스 공 카를로스와 이복 삼촌인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와 함께 성장하며 교육받았다. 이들은 모두 알레산드로와 비슷한 연배였다. 특히 그는 알칼라 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1.2. 결혼 및 초기 군사 활동

1565년, 알레산드로와 포르투갈의 마리아 공주와의 결혼식이 브뤼셀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는데, 이는 그가 펠리페 2세의 인질 신분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마리아는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의 손녀딸로, 경건하고 남편에 대한 애정이 깊으며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마드리드 궁정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결혼 후 알레산드로는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3척의 갤리선을 지휘하며 튀르크에 대항하는 전역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다시 발휘할 기회가 찾아오기까지는 7년이 걸렸다. 그동안 네덜란드 지방은 스페인 통치에 대항하여 봉기했다.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총독으로 파견된 돈 후안은 모든 지방을 펠리페 2세에 대한 공동 저항으로 통합하는 데 성공한 침묵공 빌럼을 상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2. 네덜란드 총독으로서의 활동
1578년 장블루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는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의 뒤를 이어 네덜란드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남부 네덜란드 지역을 재정복하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2.1. 총독 임명 및 네덜란드 상황
1577년 가을, 아내 마리아가 사망한 직후 파르네세는 스페인 길을 통해 이탈리아에서 스페인 증원군을 이끌고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와 합류했다. 1578년 초 장블루 전투에서 그의 능숙한 전략과 결정적인 순간의 신속한 판단은 스페인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주었다. 이 전투 직후 지치엠 공성전이 있었는데, 수비대는 학살당하고 도시는 약탈당했다. 이 사건은 파르네세의 기사도적인 경력에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아있다. 이어서 1578년 3월에는 5일간의 니벨 공성전이 벌어졌는데, 지치엠의 사례는 시민들이 빠르게 항복하도록 만들었다. 그해 여름, 파르네세는 레이머남 전투에서의 패배가 결정적이지 않도록 막아냈다.
1578년 10월, 건강이 악화된 돈 후안이 사망했다. 펠리페 2세는 파르네세를 플랑드르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그의 어머니 마르가레테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알레산드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총사령관과 총독직을 모두 맡거나 아니면 사임하여 모든 군사 문제를 어머니에게 맡기겠다고 요구했다. 결국 펠리페는 양보했고, 4년 후 마르가레테는 파르마로 돌아갔다.
2.2. 분열과 정복: 아라스 조약과 남부 네덜란드
돈 후안의 사망 후, 파르네세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그는 상대방이 가톨릭과 개신교, 플랑드르인과 왈롱인으로 나뉘어 있음을 간파하고, 이러한 분열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이를 통해 그는 왈롱 지방의 충성을 국왕에게 되찾았다. 1579년 1월 아라스 조약을 통해 그는 남부의 가톨릭 귀족들인 "말콘텐트(말콘텐트)"의 지지를 왕실에 확보했다. 이에 북부 7개 주는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하고 펠리페의 통치를 공식적으로 거부하며 끝까지 싸울 것을 맹세했다.
2.3. 주요 공성전과 군사 작전
에노와 아르투아에 작전 기지를 확보하자마자, 파르네세는 마스트리흐트를 시작으로 브라반트와 플랑드르를 무력으로 재정복하는 임무에 착수했다. 파르네세는 1579년 3월 12일 마스트리흐트 공성전을 시작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성벽을 굴착하라고 명령했다. 마스트리흐트 주민들도 스페인군의 터널에 도달하기 위해 굴착 작업을 벌였다. 지하 깊은 곳에서 전투가 계속되었고, 수백 명의 스페인 병사들이 터널에 끓는 기름이 부어져 사망했다. 다른 병사들은 네덜란드 수비수들이 터널 안에서 불을 지르면서 산소 부족으로 사망했다. 또 다른 500명의 스페인 병사들은 성벽을 폭파하기 위해 계획했던 지뢰가 조기에 폭발하면서 사망했다.
6월 29일 밤, 파르네세의 병사들은 지친 수비수들이 잠든 사이에 도시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성벽이 뚫린 후에도 도시가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16세기 전쟁법은 승리자에게 정복된 도시를 약탈할 권리를 부여했다. 스페인군은 3일 동안 도시를 약탈했으며, 이 기간 동안 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약탈은 특히 폭력적이었는데, 아마도 파르네세가 그 3일 동안 열병으로 누워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
아라스 조약에 따라 스페인군은 나라에서 추방되었으므로 알레산드로는 투르네 공성전 (1581년)을 위해 왈롱 병력만 사용할 수 있었다. 이 공성전에서 오합지졸 병력으로 겪은 어려움은 왈롱 귀족들이 외국군, 특히 스페인군의 복귀를 허용하도록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파르네세는 전투보다는 주로 공성전으로 이루어진 전쟁에서 자신의 역량을 입증했다. 그의 전략은 관대한 항복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즉, 대량 학살이나 약탈은 없으며, 역사적인 도시 특권은 유지되고, 완전한 사면과 특사가 주어지며, 가톨릭 교회로의 복귀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경력의 정점은 안트베르펜의 대규모 항구 도시에 대한 공성전이었다. 이 도시는 바다에 개방되어 있었고, 강력하게 요새화되어 있었으며, 시민들의 단호한 결의와 용기로 방어되고 있었다. 시민들은 유명한 마르닉스 판 신트 알데곤데가 이끌었고, 천재적인 이탈리아 기술자 페데리코 잠벨리의 도움을 받았다. 공성전은 1584년에 시작되었고, 파르네세의 모든 군사적 천재성을 요구했다. 그는 포위된 도시 주민들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스헬더강을 가로지르는 부교를 칼로에서 오르담까지 건설하여 안트베르펜의 모든 해상 접근을 차단했다. 제시된 조건에는 모든 개신교도가 4년 이내에 도시를 떠나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이 규율 잡힌 도시 점령과 점유는 1576년 11월 4일의 피비린내 나는 스페인 광란 사건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파르네세는 돈 루이스 데 레케센스를 포함한 전임자들의 실수를 피했다. 안트베르펜의 함락과 더불어 메헬렌과 브뤼셀이 이미 파르네세의 손에 들어오면서, 남부 네덜란드 전체는 다시 펠리페 2세의 권위 아래 놓이게 되었다. 지리적 위치상 수로를 제외하고는 접근할 수 없는 홀란트와 제일란트만이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2.4. 네덜란드에서의 군사적 성과와 한계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는 독일과의 무역을 유지하고 홀란트와 제일란트를 점령하기 위한 관문을 확보하기 위해 마스강과 라인강 지역에서의 작전을 추진했다. 그러나 안트베르펜 정복 이후의 전역에서는 펠리페 2세의 인색한 자금 지출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파르네세의 지휘 아래 스페인군이 처음으로 눈에 띄는 패배를 겪은 것은 그라베를 점령하려는 첫 시도에서였다. 1585년 12월, 식량 부족이 심화되자 파르네세는 플랑드르, 브라반트, 왈롱 지방의 식량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병력을 라인강과 마스강 지역으로 이동시켰고, 그곳에서 강을 통한 무역을 확보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했다. 그 겨울은 엠펠 전투에서의 "엠펠의 기적"이 없었다면 파르네세의 군대에게 거의 재앙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 7일까지 그라베 공성전 (1586년)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한편, 1586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공작이 된 알레산드로에게 다행히도, 엘리자베스 1세가 보낸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잉글랜드군은 파르네세 공작의 군대에 의해 패배했다. 슬라위스 공성전 (1587년)은 무적함대 선박을 위한 안전한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필요했으며 성공적이었다.
3. 스페인 무적함대 작전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파르마 공작이 되었지만, 실제 통치는 하지 않고 아들 라누치오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그는 자신의 영지를 방문하기 위해 휴가를 신청했지만,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에 그를 대체할 적합한 인물이 없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파르네세를 강력한 군대의 지휘관으로 유지하면서도, 그가 그 군대를 이용하여 당시 반군을 지원하던 잉글랜드를 정복하려는 열망은 승인하지 않았다.
파르네세는 이 계획에 열정적이지 않았지만, 1583년 11월에는 잉글랜드 내 가톨릭 반란의 희망에 주로 의존하여 3만 명의 병력으로 네덜란드에서 잉글랜드를 성공적으로 침공할 수 있다고 처음에는 믿었다. 그러나 그는 펠리페 2세에게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째, 절대적인 비밀 유지, 둘째, 네덜란드 지방의 점유 및 방어 확보, 셋째, 프랑스가 평화 협정이나 위그노와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여 간섭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펠리페는 그의 의견을 무시하고 산타크루스 후작 알바로 데 바산에게 침공 계획을 작성하고 제시하도록 요청했으며, 이는 후에 무적함대로 더 잘 알려진 '잉글랜드 원정'으로 발전했다. 전반적인 전역 준비의 일환으로 파르네세는 오스텐더와 슬라위스를 공격했으며, 슬라위스는 1587년 8월에 함락되었다.
계획은 파르네세의 병력이 무적함대의 보호를 받으며 바지선으로 해협을 건너는 것이었다. 산타크루스는 무적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1588년 초 사망했고, 무적함대 지휘는 무능한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에게 넘어갔다. 무적함대는 그해 여름 영국 해협에 진입했지만, 파르네세와 무적함대 사령관 사이의 열악한 통신으로 효과적인 협력이 어려웠다. 알레산드로는 펠리페 2세에게 자신의 바지선은 평저 운송선일 뿐 전함이 아니며, 영국 선박들에 의해 봉쇄되어 니우포르트와 됭케르크를 떠날 수 없다고 보고했다. 파르네세는 무적함대가 자신의 바지선을 위한 통로를 확보해주기를 기대했다. 파르네세의 병력은 또한 바지선을 파괴하고 파르네세의 군대를 바다에 수장시키려던 네덜란드 플라이보트의 존재로 위협받고 있었다. 반대로 메디나 시도니아는 파르네세가 항구에서 싸워 나와 해협에서 자신과 만나기를 기대했다. 1588년 그라블린 해전에서 영국군의 무적함대 공격과 뒤이은 불리한 바람 방향 변화로 인해 연계는 불가능해졌다.
무적함대 실패 이후, 파르마 공작에게 행운은 떠난 것처럼 보였다. 파르네세는 9월에 됭케르크의 진지를 해체하고 랑티 후작 에마뉘엘 필리베르 드 랄랭을 톨렌 섬으로 보내 주로 잉글랜드군이 주둔하고 있던 베르헌옵좀을 포위할 준비를 했다. 랑티는 악천후를 탓하며 톨렌 점령에 실패했고, 이에 파르네세는 자신이 직접 원정을 이끌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88년 9월 19일, 알레산드로는 브뤼헤에서 군대를 이끌고 베르헌옵좀을 포위했다. 6주간의 공성전 끝에 겨울이 다가오자 파르마는 작전을 포기하고 브뤼셀로 철수하며 병력을 겨울 숙영지로 보냈다.
네덜란드에서 알레산드로의 마지막 주요 승리는 홀란트의 전략적 관문인 헤르트라위덴베르흐였다. 그곳의 잉글랜드 수비대는 급여 부족으로 전면적인 반란 상태였다. 잉글랜드 대표가 파르마에게 도시를 제안했고, 결국 1589년 4월 9일 그에게 넘겨졌다.
4. 프랑스 종교 전쟁 개입
파르네세는 스페인 무적함대 작전 실패 이후에도 프랑스 종교 전쟁에 개입하며 군사적 역량을 발휘했으나, 이로 인해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4.1. 파리 구원 작전

베르헌옵좀 공성전 실패 후 파르마 공작은 부종의 초기 증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거의 6개월 동안 스파 마을에서 병을 치료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롬바르디아 옛 테르시오가 반란을 일으켰고 파르네세는 이를 해산하라고 명령했다. 이 사건 이후 알레산드로의 부관들은 프리슬란트와 라인베르크에서 패배를 겪었다.
파르네세는 네덜란드 반군이 재집결한 북부 네덜란드로 다시 관심을 돌릴 생각이었으나, 1589년 8월 1일에서 2일 밤 사이에 프랑스 국왕 앙리 3세가 암살당했고, 파르네세는 메옌 공작 샤를과 앙리 4세로 알려진 개신교도 "베아르네즈"에 대한 가톨릭 반대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1576년 이후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네덜란드 반군이 반란의 기세를 되찾는 계기가 되었다. 파르마는 펠리페 2세에게 프랑스 침공이 네덜란드에서 얻은 성과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자신의 조언을 따르지 않아 발생하는 손실이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파르마는 1590년 8월 6일 브뤼셀을 떠나 8월 15일 기즈에 도착했다. 8월 말, 그는 위그노와 앙리 4세에게 충성하는 왕당파가 포위하고 있던 파리를 구원하기 위해 움직였다. 파르네세의 주된 목표는 앙리의 군대를 전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봉쇄를 해제하여 파리에 보급품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앙리는 메옌과 파르네세의 접근 소식을 듣고 진영을 해체하고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나섰다. 파르마는 전투에 참여할 의도가 없었다. 그는 마른강을 따라 여전히 가톨릭 동맹의 손에 있던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라니쉬르마른의 요새를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9월 5일 새벽, 라니는 포격당한 후 스페인군에 의해 습격당했고, 800명의 수비대는 학살당했다. 이 모든 일은 불과 12 km 떨어진 앙리의 진영에서 목격되었다. 앙리는 이틀 후 파리 공성전을 포기했지만, 9월 8일에서 9일 사이에 마지막 "헤일 메리"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다. 마른강의 통행이 완전히 개방되면서, 며칠 동안 파리로 보급품이 쏟아져 들어왔다.
파리에 보급품을 계속 공급하려면 여러 출처에서 식량을 들여와야 했지만, 앙리의 병력 대부분은 센강과 욘강을 따라 있는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에 파르마는 센강의 통행을 복원하기 위해 코르베유에손을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공성전은 9월 22일에 시작되었고, 10월 16일까지 도시는 함락되었다. 수비대는 학살당했고 도시는 철저히 약탈당했다. 파리 공성전이 해제되고 보급로가 확보되자, 파르네세는 11월 3일 마우리츠 판 나사우가 공세를 취하고 있던 네덜란드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알레산드로의 철수는 쉽지 않았다. 그는 악천후 속에서 수천 명의 병력, 마차, 말을 이동시켜야 했고, 베아르네즈는 내내 그를 괴롭혔다. 이러한 어려움을 예상한 공작은 앙리가 그를 격파할 수 없도록 부대를 배치했다. 행군 20일째인 11월 25일 아미앵 근처에서 앙리는 기병대를 이끌고 파르네세의 부대를 대담하게 공격했지만, 오히려 엔강 너머로 격파당했고 후퇴 중에 부상을 입었다. 마지막으로 11월 29일, 앙리가 파르네세로부터 불과 수백 걸음 떨어진 곳에서 한 번 더 실패한 소규모 교전이 벌어졌다.
파르마와 메옌은 기즈에서 헤어졌고, 알레산드로는 1590년 12월 4일 브뤼셀에 도착했다.
4.2. 루앙 공방전과 부상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는 자신이 프랑스에 있는 동안 페터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를 총독 대행으로 임명했다. 파르네세가 프랑스로 떠난 지 며칠 후, 만스펠트와 프란시스코 베르두고 대령은 프리슬란트에서 펠리페 2세에게 지난 몇 년간 파르네세가 불평했던 돈, 보급품 부족, 병사들의 반란에 대해 한탄하기 시작했다. 파르네세가 돌아왔을 때, 마우리츠는 스테인베르헌, 로센달, 오스터하우트, 튀른하우트, 베스터로를 되찾은 상태였다. 파르네세의 부재는 스페인군의 군사 활동 감소를 가져왔고, 이는 네덜란드군이 적에게 가장 효과적인 정책을 채택할 시간을 주었다. 이것이 네덜란드 군사 개혁의 시작이었고, 이는 마침내 그들이 스페인에 맞설 동등한 기반을 갖추게 했다. 알레산드로는 마침내 마우리츠라는 적수를 만난 것이다.
1591년 7월 24일 밤, 크노드센부르크 공성전에 참여한 지 며칠 만에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는 펠리페 2세로부터 모든 것을 중단하고 가톨릭 동맹을 돕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요새를 점령하는 데 어려움을 깨달은 그는 사실상 불길한 징조 아래 시작된 이 작전을 명예롭게 포기할 수 있게 되어 안도했다. 동맹을 돕기 위한 또 다른 원정을 고려하기도 전에, 그는 아들 라누치오와 함께 8월 1일에 도착한 스파에서 치료를 재개해야 했다. 11월 중순, 알레산드로는 다시 만스펠트에게 임시 총독 지침을 작성했으며, 자신이 없는 동안 네덜란드 방어를 위한 조치를 마련했다. 11월 말까지 공작은 발랑시엔에 있었고 그곳에서 병력을 소집했다. 1592년 1월 중순경, 파르마는 메옌과 합류하여 앙리로부터 루앙을 구원할 준비를 했다.
루앙으로 향하기 전에 파르네세는 뇌샤텔앙브레를 점령하는 전략적 결정을 내렸다. 이는 보급선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마침내 4월 20일, 파르마는 루앙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도착했고, 빌라르가 보낸 50명의 기병대가 그를 맞이했다. 그들은 앙리가 포위를 풀고 퐁들라르슈 방향으로 철수하여 그곳에 참호를 팠다고 알렸다. 루앙은 구원되었다. 파르네세의 조언을 따르고 앙리의 진영을 공격하여 그의 병력을 파괴하는 대신, 동맹군 지도자들은 코드베크앙코를 점령하기로 결정했고, 그곳에서 도시를 정찰하던 중 오른쪽 팔에 머스킷 총상을 입었다. 이 부상은 이미 위태로운 그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고, 그는 아들 라누치오에게 병력 지휘를 맡기도록 강요받았다. 앙리는 이를 루앙 패배에 대한 복수의 기회로 보았다. 동맹군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감행하는 대신, 그는 파르네세의 전술을 본받아 모든 보급로를 차단하고 그들을 굶주리게 하기로 결정했다. 동맹군은 코드베크를 떠나 이베토로 이동했다. 상황은 코드베크보다 더 나빴고, 그동안 파르네세는 심각하게 아팠고 대부분 병상에 누워 있었지만 여전히 정신은 맑았다. 파르마 공작은 마침내 배를 타고 센강을 비밀리에 건너는 계획을 세웠고, 앙리가 전체 군대가 진영에 있다고 믿게 할 만큼의 병력만 남겨두었다. 앙리가 알게 되었을 때, 가톨릭군은 이미 강을 건너 멀리 떠난 상태였다. 네덜란드로 돌아온 후, 알레산드로는 6월 28일 교황 클레멘스 8세로부터 "가톨릭군을 구원한 것에 대한" 축하 편지를 받았다. 파르네세는 다시 스파로 돌아가 추가 치료를 받았다.
5. 군사적 평가 및 유산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는 당대 최고의 장군으로 불리며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전략적 통찰력을 인정받았다.
5.1. 긍정적 평가
파르네세는 뛰어난 지휘 능력, 특히 공성전에서의 성공, 그리고 외교적 수완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마스트리흐트, 안트베르펜 등 주요 도시들을 함락시키면서도, 주민 학살이나 약탈을 금지하고 관대한 항복 조건을 제시하는 등 인도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 이는 당시의 잔혹한 전쟁 관행과는 차별화되는 점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그가 남부 네덜란드 지방의 충성을 되찾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전쟁과 외교를 동시에 능숙하게 다루는 능력을 보여주며, 아라스 조약을 통해 남부 가톨릭 귀족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등 정치적 수완도 뛰어났다. 그의 군사적 성과는 80년 전쟁에서 스페인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두는 데 기여했으며, 이는 벨기에의 기원이 되는 남부 네덜란드의 재정복으로 이어졌다.
5.2. 비판과 논란
파르네세의 군사 작전 중 일부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1578년 지치엠 공성전에서 수비대가 학살당하고 도시가 약탈당한 사건은 그의 경력에 큰 오점으로 남아있다. 이 사건은 그의 기사도적인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잔혹한 측면을 보여준다. 또한, 그에게 사생아가 한 명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6. 개인 생활 및 가족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는 기마랑이스의 마리아, 즉 포르투갈의 인판타 마리아와의 결혼을 통해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마르가리타 파르네세 | 1567년 11월 7일 | 1643년 4월 13일 | 1581년 만토바 공작 빈첸초 1세와 결혼; 자녀 없음 |
라누치오 1세 파르네세 | 1569년 3월 28일 | 1622년 3월 5일 | 파르마 공작 계승; 1600년 마르가리타 알도브란디니와 결혼; 자녀 있음 |
오도아르도 파르네세 | 1573년 12월 7일 | 1626년 2월 21일 | 추기경이 됨 |
6.1. 사생아 문제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는 젊은 플랑드르 귀족 여성인 프랑수아즈 드 랑티(일명 "라 벨 프랑신")와 관계를 가졌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나폴리 국립 도서관의 미공개 서신에서 확인되는데, 파르마가 피에트로 카에타니에게 네덜란드에서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담고 있다:
"공작은 고귀한 여인을 사랑하며, 그의 호의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정중하게 대하고 봉사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이 관계에서 자녀가 태어났다는 것을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베르티니에 따르면 파르네세는 1586년 알레산드로의 가신인 장-샤를 드 가브르 백작이 프랑수아즈와 결혼하도록 주선하고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부부의 첫 아이인 마리-알렉상드린-프랑수아즈 드 가브르가 곧이어 1587년에 태어났고, 그녀의 이름(알렉상드린)이 부모의 조상 중 어느 쪽에서도 발견되지 않으며, 프랑수아즈가 파르네세에게 미친 영향력을 고려할 때, 그가 아이의 생물학적 아버지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7. 사망

7.1.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의 해임
잉글랜드에 대한 무적함대 작전이 실패한 이후, 펠리페 2세 궁정의 스페인 요원들과 궁정인들은 파르네세의 성공을 질투하여 그를 국왕의 눈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악의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파르네세가 두 번째 프랑스 원정에서 돌아온 후, 항상 조카 알레산드로를 총애했던 국왕은 이러한 불평과 비난이 자신의 의견에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했다. 이러한 감정 변화로 인해 국왕은 공작을 네덜란드 총독직에서 해임하라고 명령했다. 국왕은 1592년 2월 20일, 파르네세가 루앙으로 진군하고 있을 때 소환 서한을 작성했으며, 세랄보 후작 후안 파체코 데 톨레도에게 플랑드르로 돌아오는 공작에게 직접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세랄보는 도중에 사망했다. 이후 국왕은 푸엔테스 백작 페드로 엔리케스 데 아세베도에게 이 임무를 수행하도록 지시했다. 소환 서한의 날짜는 1592년 6월 28일로 변경되었다. 펠리페 2세의 이중적인 책략을 고려할 때, 국왕은 파르네세에게 모든 것이 괜찮다고 안심시키면서도 플랑드르에서 그를 소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공작은 이러한 음모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10월에는 건강이 충분히 회복되어 브뤼셀로 돌아왔으나, 다시 동맹을 도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7.2. 프랑스로의 마지막 원정
자신의 건강 상태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르마 공작은 스페인 국왕의 강력한 대표자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대출을 마련하고 파리에 호화로운 숙소를 준비하며 이 원정을 준비했다. 그는 유언장을 작성하고, 여러 번 고해성사를 하고 성찬식을 받았으며, 자신의 아들을 파르마로 돌려보내 자신의 사망 시 파르네세 영지가 통치자를 잃지 않도록 했다.
공작은 11월 11일 브뤼셀을 떠나 아라스에 도착했으며, 그곳에서 1592년 12월 2일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카푸친 수도사 복장을 하고 파르마로 옮겨져 아내의 무덤 옆 카푸친 교회에 안장되었다. 후에 그들의 유해는 마돈나 델라 스테카타 대성당의 지하 묘지로 옮겨져 오늘날까지 그곳에 안치되어 있다. 그의 죽음은 그가 총독직에서 해임되는 조항을 보지 않게 해주었다.
2020년 1월, 공작의 유해가 발굴되어 사망 원인을 명확히 밝히려는 시도가 있었고, 최종적으로 폐렴으로 판명되었다.
8. 주요 전투 및 작전 목록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참여하거나 지휘한 주요 전투, 공성전, 작전 목록은 다음과 같다.
오스만-베네치아 전쟁 (1570년-1573년)
- 레판토 해전 (1571년)
- 코로니 전투 (1572년)
- 나바리노 공성전 (1572년)
80년 전쟁
- 장블루 전투 (1578년)
- 지치엠 공성전
- 니벨 공성전
- 림부르크 공성전
- 달렘 점령
- 보르헤르하우트 전투
- 마스트리흐트 공성전 (1579년)
- 캉브레 공성전 (1581년)
- 투르네 공성전 (1581년)
- 아우데나르데 공성전
- 리르 공성전 (1582년)
- 에인트호번 공성전 (1583년)
- 스테인베르헌 전투 (1583년)
- 알스트 점령 (1584년)
- 헨트 공성전 (1583년-1584년)
- 브뤼셀 공성전 (1584년-1585년)
- 코우벤스테인세데이크 전투
- 안트베르펜 함락
- 그라베 공성전 (1586년)
- 펜로 공성전 (1586년)
- 노이스 파괴
- 라인베르크 공성전 (1586년-1590년)
- 쥐트펀 전투
- 슬라위스 공성전 (1587년)
- 베르헌옵좀 공성전 (1588년)
- 헤르트라위덴베르흐 점령 (1589년)
- 크노드센부르크 공성전
프랑스 종교 전쟁
- 파리 공성전 (1590년)
- 루앙 공성전 (1591년-1592년)
- 코드베크 공성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