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아이티 공화국, 약칭 아이티는 카리브해의 이스파니올라섬 서쪽 3분의 1을 차지하는 나라이다. 쿠바와 자메이카 동쪽에 위치하며, 바하마와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 남쪽에 있다. 섬의 나머지 동쪽 부분은 도미니카 공화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면적은 2.77 만 km2이며, 카리브해 국가 중 세 번째로 넓고, 인구는 약 1,140만 명으로 카리브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는 포르토프랭스이다.
원래 타이노족 원주민이 거주하던 이 섬은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첫 항해 중 유럽인들에게 발견되었고, 북동쪽 해안에 아메리카 최초의 유럽인 정착지인 라 나비다드가 세워졌다. 이후 스페인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가 1697년 리스윅 조약으로 섬의 서부가 프랑스에 할양되어 생도맹그가 되었다. 생도맹그는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의 노동력에 기반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으로 막대한 부를 창출하며 프랑스의 가장 부유한 식민지 중 하나가 되었다.
1791년부터 1804년까지 이어진 아이티 혁명은 노예 반란으로 시작하여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자 아메리카 대륙에서 두 번째 독립 공화국,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 최초로 노예제를 공식 폐지한 국가를 탄생시켰다. 19세기에는 정치적 불안정, 국제적 고립, 프랑스에 대한 막대한 배상금 문제, 그리고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전쟁 등으로 점철되었다. 1915년부터 1934년까지는 미국의 점령을 겪었으며, 이후 1957년부터 1986년까지 뒤발리에 왕조의 독재 통치가 이어졌다.
아이티는 국제 연합, 미주 기구(OAS), 카리브 국가 연합, 프랑코포니 국제 기구의 창립 회원국이며, 카리브 공동체(CARICOM), 국제 통화 기금(IMF), 세계 무역 기구(WTO), 라틴 아메리카·카리브 국가 공동체(CELAC)의 회원국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빈곤과 정치적 불안정에 시달려온 아이티는 21세기에 들어서도 심각한 경제 및 정치 위기, 2004년 쿠데타와 그에 따른 유엔의 개입, 2010년 대지진과 콜레라 창궐, 그리고 최근에는 대통령 암살과 갱단 폭력 심화로 인해 국가 기능이 마비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선출직 공무원이 없는 상태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아이티는 종종 실패한 국가로 묘사되기도 한다.
2. 국명
아이티라는 국명은 이 섬의 원주민이었던 타이노족의 언어에서 유래했으며, "높은 산들의 땅" 또는 "산이 많은 땅"을 의미한다. 이는 히스파니올라섬 전체를 가리키는 타이노족의 토착 명칭이었다. 이 명칭은 아이티 혁명의 지도자 장자크 드살린이 독립된 생도맹그의 공식 국명으로 채택하면서 부활했는데, 이는 아메리카 원주민 선조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함이었다. 독립 선언문과 초기 공문서에는 'Hayti'로 표기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Haiti'라는 표기가 일반화되었다.
프랑스어에서는 'Haïti'의 'ï'에 분음 부호(tréma)를 사용하여 두 번째 모음이 앞 모음과 분리되어 발음됨을 나타내며, 'H'는 묵음이다. 영어에서는 이러한 발음 규칙이 종종 무시되어 'Haiti'로 표기하며, 'HAY-tee'로 발음하는 것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일반적이다. 아이티 크레올어에서는 'H' 없이 'Ayiti'로 표기하고 발음한다.
프랑스인들은 과거 아이티의 자연적 아름다움과 프랑스 왕국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준 식민지였던 점 때문에 La Perle des Antilles라 페를 데 장티이유프랑스어("앤틸리스 제도의 진주")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아프리카 전통에서 국명의 기원을 찾기도 하는데,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들이 주로 사용하던 폰어로 "아이티-토메(Ayiti-Tomè)"가 "이제부터 이 땅은 우리 땅이다"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설도 있다. 아이티인들 사이에서는 "아이티-토마(Ayiti-Toma)", "아이티 셰리(Ayiti Cheri, 사랑하는 아이티)", "테-드살린(Tè-Desalin, 드살린의 땅)", "라카이(Lakay, 집/고향)" 등 다양한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2.1. 어원
'아이티'(Ayiti)라는 이름은 타이노어로 "산이 많은 땅"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직접 유래했다. 타이노족은 히스파니올라섬 전체를 가리켜 이 이름을 사용했다. 콜럼버스 도착 당시 섬은 다섯 개의 카시카스코(cacicasco, 추장령)로 나뉘어 있었으며, 아이티는 그중 하나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혁명 지도자 장자크 드살린은 1804년 독립을 선언하면서 프랑스 식민지명인 생도맹그 대신 원주민 명칭인 '아이티'를 국명으로 채택했다. 이는 원주민들에 대한 경의와 과거 식민 지배와의 단절을 상징하는 행위였다. 초기에는 영어권에서도 'Hayti'라는 철자가 흔히 사용되었으나, 19세기 후반부터 'Haiti'로 점차 통일되었다. 아이티 크레올어에서는 'Ayiti'로 표기하며, 'H'는 발음하지 않는다.
3. 역사
아이티의 역사는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원주민 사회에서 시작하여 스페인과 프랑스의 식민 통치, 아이티 혁명을 통한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 수립, 그리고 독립 이후 계속되는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 외세의 개입, 최근의 국가적 위기까지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쳐왔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현대 아이티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3.1. 콜럼버스 이전 시대

유럽인이 도착하기 전, 현재 아이티가 위치한 히스파니올라섬의 서부 지역에는 남아메리카에서 이주해 온 타이노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아라와크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했으며, 농경을 기반으로 한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타이노 사회는 카시케(cacique)라고 불리는 추장이 다스리는 여러 개의 추장령(cacicazgo)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히스PA니올라섬 전체에는 다섯 개의 주요 추장령이 존재했다. 북서부의 마리엔(Marien), 북동부의 마과(Magua), 남서부의 하라과(Xaragua), 섬 중앙부 시바오 지역의 마과나(Maguana), 남동부의 이궤이(Higüey)가 그것이다. 현재의 아이티 영토는 주로 마리엔과 하라과 추장령에 해당한다.
타이노족은 고도로 발달된 농업 기술을 보유하여 카사바, 고구마, 옥수수, 콩 등을 재배했으며, 어업과 수렵도 병행했다. 그들은 정교한 도자기와 면직물을 제작했고, 나무와 돌을 이용한 조각 예술도 발전시켰다. 종교적으로는 제미(zemi)라고 불리는 신령과 조상을 숭배했으며, 다양한 의례와 축제를 통해 공동체의 결속을 다졌다. 타이노족의 문화 유적은 동굴 벽화, 암각화, 의례용 광장 유적 등의 형태로 남아 있으며, 이는 아이티의 국가적 상징이자 관광 자원이 되고 있다. 현재의 레오간은 프랑스 식민 도시로 시작되었으며, 과거 하라과 추장령의 수도 인근에 위치해 있다. 기원전 1천년 경, 타이노족의 아라와크어를 사용하는 조상들이 카리브해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고대 민족과는 달리, 그들은 도자기와 농업의 집약적 생산을 실천했다. 히스파니올라섬에서 타이노족 조상의 가장 초기 증거는 기원후 6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스티오노이드 문화이다.
3.2. 식민 시대
스페인과 프랑스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는 아이티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스페인은 섬의 원주민 사회를 파괴하고 초기 식민 체제를 구축했으며, 이후 프랑스가 섬의 서부를 차지하여 아프리카 노예 노동력에 기반한 플랜테이션 경제를 발전시켰다. 이 과정에서 아이티는 극심한 착취와 인권 유린의 현장이 되었으며, 이는 훗날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3.2.1. 스페인 통치 (1492년 ~ 1625년)

1492년 12월 6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끄는 스페인 탐험대가 현재 아이티의 몰생니콜라 지역에 상륙하며 히스파니올라섬에 유럽인이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콜럼버스는 이 섬을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영토로 선포했다. 19일 후, 그의 기함인 산타 마리아호가 현재의 카프아이티엥 인근에서 좌초되자, 콜럼버스는 39명의 선원을 섬에 남겨 1492년 12월 25일 라 나비다드라는 정착지를 건설했다. 초기에는 원주민인 타이노족과의 관계가 우호적이었으나, 곧 갈등이 발생하여 정착민들은 타이노족에 의해 살해되었다.
스페인인들은 금을 찾기 위해 원주민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했으며, 엔코미엔다 제도를 통해 원주민들을 사실상 노예로 만들었다. 유럽에서 온 정복자들은 천연두, 홍역과 같은 구세계 질병을 옮겼고, 면역력이 없던 원주민들은 대규모로 사망했다. 1507년에는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천연두 유행이 히스파니올라섬에서 발생했다. 가혹한 노동과 질병으로 인해 타이노족 인구는 급격히 감소했다. 스페인은 부르고스법(1512년~1513년)을 통과시켜 원주민 학대를 금지하고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장려했지만, 실제로는 원주민 착취가 계속되었다.
스페인이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본토의 더 큰 부에 식민화 노력을 집중하면서 히스파니올라섬은 점차 무역 및 보급 기지로 전락했다. 이로 인해 카리브해의 해적 활동이 만연하게 되었고, 프랑스(주로 토르투가섬에 기반)와 영국 등 스페인에 적대적인 유럽 열강들이 이를 부추겼다. 스페인은 섬의 서부 3분의 1을 거의 포기하고 동부 3분의 2에 식민화 노력을 집중했다. 그 결과, 섬의 서부는 점차 프랑스 버캐니어들에 의해 정착되었는데, 그중 베르트랑 도제롱은 담배 재배에 성공하고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에서 많은 프랑스 식민 가족을 모집했다.
3.2.2. 프랑스 통치 (1625년 ~ 1804년)

1625년부터 프랑스는 히스파니올라섬 서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으며, 1697년 리스윅 조약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 섬의 서부 3분의 1을 공식적으로 할양받았다. 이 지역은 생도맹그(Saint-Domingue)로 명명되었으며, 프랑스 식민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곳 중 하나로 발전했다. 프랑스인들은 광대한 사탕수수와 커피 플랜테이션을 건설하고, 이를 경작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노예를 강제로 데려왔다. 생도맹그는 프랑스 대외 무역의 40%를 차지했으며, 영국 모든 식민지를 합친 것보다 두 배나 많은 부를 창출했다.
1788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생도맹그의 인구는 약 25,000명의 유럽인, 22,000명의 유색 자유민(자유 유색인), 그리고 700,000명 이상의 아프리카 노예로 구성되어, 노예가 자유민을 압도적으로 능가하는 극단적인 인구 구조를 보였다. 노예들은 극도로 잔혹한 환경에서 생활했으며, 높은 사망률과 낮은 출생률을 기록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가 비준하고 장바티스트 콜베르가 준비한 코데 누아르(Code Noir, 흑인 법전)를 제정하여 노예 대우와 허용 가능한 자유에 대한 규칙을 정했지만, 이는 노예들의 비참한 처지를 개선하는 데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 생도맹그는 가장 잔혹하고 효율적인 노예 식민지 중 하나로 묘사되며, 18세기 말에는 유럽 열대 생산물의 3분의 2를 공급했지만, 새로 수입된 아프리카인의 3분의 1이 몇 년 안에 사망했다. 많은 노예들이 천연두와 장티푸스와 같은 질병으로 사망했다. 출생률은 낮았으며, 일부 여성들은 노예 상태에서 아이를 낳기보다는 낙태를 선택했다는 증거도 있다. 식민지의 환경 또한 황폐화되었는데, 플랜테이션을 위한 산림 벌채와 과도한 경작으로 토지가 황폐해졌다.
프랑스 식민 정부는 유럽인 남성 식민주의자와 아프리카 여성 노예(그리고 나중에는 혼혈 여성)의 혼혈 후손인 유색 자유민들에게 일부 권리를 허용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이들이 노예에서 해방되어 별도의 사회 계층을 형성했다. 백인 프랑스 크리올 아버지들은 종종 혼혈 아들들을 교육을 위해 프랑스로 보냈다. 일부 유색인 남성들은 군대에 입대하기도 했다. 더 많은 유색 자유민들이 섬 남부, 포르토프랭스 근처에 살았으며, 그들 공동체 내에서 많이 결혼했다. 그들은 종종 장인과 상인으로 일했으며, 자신들의 노예를 포함한 일부 재산을 소유하기 시작했다. 유색 자유민들은 그들의 권리 확대를 위해 식민 정부에 청원했다.
노예 생활의 잔혹함으로 인해 많은 노예들이 산악 지역으로 도망쳐 자치 공동체를 형성하고 마룬(maroons)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마룬 지도자 중 한 명인 프랑수아 마캉달은 1750년대에 반란을 이끌었으나, 나중에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3.3. 아이티 혁명 (1791년 ~ 1804년)


1789년 프랑스 혁명과 인간의 권리 원칙에 영감을 받은 프랑스 정착민들과 유색 자유민들은 더 큰 정치적 자유와 더 많은 시민권을 요구했다. 1790년 뱅상 오제가 유색 자유민 민병대를 조직했으나 체포되어 고문 후 처형당하면서 이 두 집단 간의 긴장은 갈등으로 이어졌다. 기회를 감지한 1791년 8월, 부두교의 우간(사제) 뒤티 부크만에게 영감을 받고 산토도밍고의 스페인인들의 지원을 받은 투생 루베르튀르의 지도 아래 아이티 북부에 최초의 노예 군대가 조직되었고, 곧이어 식민지 전체에 전면적인 노예 반란이 일어났다.

1792년, 프랑스 정부는 통제권을 회복하기 위해 군대와 함께 3명의 위원을 파견했다. 유색인 및 노예들과 동맹을 맺기 위해 위원인 레제펠리시테 송토나와 에티엔 폴베렐은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폐지했다. 6개월 후,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파가 이끄는 국민공회는 노예제 폐지를 승인하고 모든 프랑스 식민지로 확대했다.
신생 공화국이었던 미국은 누가 대통령이냐에 따라 투생 루베르튀르와 신생 국가 아이티를 지지하거나 지지하지 않는 사이를 오갔다. 노예 소유주이자 고립주의자였던 조지 워싱턴은 미국을 중립으로 유지했지만, 때때로 미국 민간인들은 반란을 진압하려는 프랑스 농장주들에게 원조를 제공했다. 노예제의 강력한 반대자였던 존 애덤스는 1798년부터 외교적 인정, 재정 지원, 군수품 및 군함(USS 컨스티튜션 포함)을 제공함으로써 노예 반란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이 지원은 또 다른 노예 소유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이 취임하여 미 해군을 철수시킨 1801년에 끝났다.
노예제가 폐지되자 투생 루베르튀르는 프랑스에 충성을 맹세하고, 상황을 이용하여 생도맹그를 침공한 영국군과 스페인군을 격퇴했다. 스페인인들은 나중에 1795년 바젤 조약의 조건에 따라 섬의 일부를 프랑스에 할양하여 섬을 단일 정부 아래 통일시켰다. 그러나 동부에서는 프랑스 통치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고, 서부에서는 루베르튀르의 군대와 앙드레 리고가 이끄는 유색 자유민들 사이에 칼의 전쟁(1799년~1800년)이 벌어졌다. 전쟁에서 흑인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그들이 뮬라토를 상대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25,000명 이상의 백인과 자유 흑인이 난민으로 섬을 떠났다.
루베르튀르가 분리주의 헌법을 만들고 자신을 종신 총독으로 선포하자, 1802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그의 매제인 샤를 르클레르 장군 지휘하에 20,000명의 군인과 그만큼의 선원으로 구성된 생도맹그 원정대를 파견하여 프랑스의 통제권을 재확립하려 했다. 프랑스군은 일부 승리를 거두었지만, 몇 달 안에 대부분의 군대가 황열병으로 사망했다. 궁극적으로 50,000명 이상의 프랑스군이 식민지를 탈환하려는 시도에서 사망했으며, 여기에는 18명의 장군이 포함되었다. 프랑스군은 루베르튀르를 체포하여 재판을 위해 프랑스로 이송했다. 그는 주 요새에 수감되어 1803년 노출과 아마도 결핵으로 사망했다.
노예들과 자유 유색인 및 동맹국들은 장군 장자크 드살린, 알렉상드르 페티옹, 앙리 크리스토프의 지휘 아래 독립을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반란군은 1803년 11월 18일 베르티에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여 노예 반란을 통해 성공적으로 독립을 쟁취한 최초의 국가를 수립했다. 드살린의 총지휘 아래 아이티 군대는 공개 전투를 피하고 대신 나폴레옹 군대에 대한 성공적인 게릴라전을 수행했으며, 황열병과 같은 질병과 협력하여 프랑스 군인의 수를 줄였다. 그해 말 프랑스는 섬에서 남은 7,000명의 군대를 철수시켰고 나폴레옹은 북미 제국을 재건하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루이지애나 매입을 통해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했다.
혁명 기간 동안 약 20,000명의 프랑스군이 황열병으로 사망했고, 또 다른 37,000명이 전사했다. 이는 알제리, 멕시코, 인도차이나, 튀니지, 서아프리카 등지에서 벌어진 19세기 다양한 식민지 전역에서 전사한 프랑스군 총 약 10,000명을 훨씬 능가하는 수치이다. 영국군은 45,000명이 사망했다. 또한 35만 명의 해방된 아이티 노예들이 사망했다. 이 과정에서 드살린은 나폴레옹 프랑스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가장 성공적인 군 사령관이 되었다.
3.4. 독립 초기 (1804년 ~ 1915년)
아이티는 독립 이후 제정 수립, 국가 분열과 통일, 프랑스에 대한 막대한 배상금 지급 문제, 주변국과의 갈등, 끊임없는 정치적 혼란 등 험난한 19세기를 보냈다. 이러한 과정은 아이티의 장기적인 발전 저해와 만성적인 불안정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3.4.1. 제1제국 (1804년 ~ 1806년)

1804년 1월 1일 고나이브에서 장자크 드살린은 생도맹그의 독립을 선포하고 원주민의 명칭을 따라 국명을 '아이티'로 정했다. 그는 군대에 의해 종신 황제 자크 1세로 추대되었다. 드살린은 처음에는 백인 농장주와 다른 사람들에게 보호를 제안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후, 그는 남아있는 거의 모든 백인에 대한 학살을 명령했다. 1804년 1월부터 4월까지 3,000명에서 5,000명의 백인이 살해되었는데, 여기에는 흑인 인구에게 우호적이고 동정적이었던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폴란드 군인(일부는 프랑스군에서 탈영하여 아이티 반란군과 함께 싸웠음), 북서부 지역으로 초대된 소수의 독일인 식민지 개척자, 그리고 의료진 및 전문가 집단만이 예외로 살아남았다. 아이티군 장교와 연줄이 있는 사람들과 비백인 남성과 결혼하기로 동의한 여성들도 살아남았다고 전해진다.
노예 반란이 노예주들에게 미칠 잠재적 영향력을 두려워한 토머스 제퍼슨 미국 대통령은 신생 공화국을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미국 의회에서 강력한 투표권을 가진 남부 정치인들은 1861년 남부 연합을 결성하기 위해 탈퇴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승인을 막았다.
혁명은 이민의 물결을 일으켰다. 1809년, 백인 농장주와 유색인 모두를 포함한 생도맹그 출신 난민 9,000명이 쿠바의 스페인 당국에 의해 초기 피난처에서 추방된 후 뉴올리언스에 대거 정착하여 도시 인구를 두 배로 늘렸다. 또한 새로 도착한 노예들은 도시의 아프리카인 인구를 늘렸다.
아이티에서는 플랜테이션 시스템이 임금제로 재정립되었으나, 많은 아이티인들은 소외되었고 이러한 방식이 신생 국가의 정치에서 강압적으로 시행되는 것에 분개했다. 반란 운동은 분열되었고, 드살린은 1806년 10월 17일 경쟁자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3.4.2. 국가 분열과 통일 (1806년 ~ 1844년)


드살린 사망 후 아이티는 둘로 나뉘었다. 북부는 앙리 크리스토프(후에 앙리 1세로 자신을 선포)가 통치하는 아이티 왕국이 되었고, 남부는 포르토프랭스를 중심으로 한 유색인 알렉상드르 페티옹이 이끄는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페티옹의 공화국은 덜 절대주의적이었으며, 그는 농민 계층에게 혜택을 주는 일련의 토지 개혁을 시작했다. 페티옹 대통령은 또한 혁명 지도자 시몬 볼리바르에게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는데, 이는 그가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을 해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 히스파니올라 동부에서 불안정한 통제권을 유지하던 프랑스군은 후안 산체스 라미레스가 이끄는 반란군에게 패배했고, 팔로 인카도 전투 이후 1809년 이 지역은 다시 스페인 통치로 돌아갔다.
1821년부터 페티옹의 후계자이자 역시 유색인이었던 대통령 장피에르 부아예는 앙리 크리스토프의 자살 이후 섬을 재통일했다. 1821년 11월 30일 산토도밍고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부아예는 산토도밍고에서 노예제를 종식시키고 무력으로 섬 전체를 통일하려 침공했다.
상품 작물을 생산하기 위해 농업 경제를 되살리려 애쓰던 부아예는 농촌 법규(Code Rural)를 통과시켰는데, 이는 농민 노동자들이 토지를 떠나거나, 마을로 들어가거나, 자신들의 농장이나 가게를 시작할 권리를 부정하여 많은 반감을 샀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플랜테이션에서 일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농장을 갖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1824년 9월부터 6,000명 이상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아이티로 이주했으며, 교통비는 미국식민협회와 라이베리아에서의 노력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미국 자선 단체에서 지불했다. 많은 사람들이 조건이 너무 가혹하다고 여겨 미국으로 돌아갔다.
1825년 7월, 프랑스 군주정 복고 기간 동안 프랑스 국왕 샤를 10세는 아이티를 재정복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했다. 압력 하에 부아예 대통령은 프랑스가 1억 5천만 프랑을 지불하는 대가로 국가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조약에 동의했다. 1826년 4월 17일 명령에 따라 프랑스 국왕은 주권을 포기하고 아이티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프랑스에 대한 강제적인 지불금은 수년간 아이티의 경제 성장을 저해했으며, 많은 서방 국가들이 아이티에 대한 공식적인 외교적 승인을 계속 거부했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영국은 1833년에 아이티의 독립을 인정했고, 미국은 1862년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아이티는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서방 은행으로부터 극도로 높은 이자율로 막대한 차관을 빌렸다. 배상금 액수는 1838년에 9천만으로 줄었지만, 1900년까지 아이티 정부 지출의 80%가 부채 상환이었고 국가는 1947년까지 상환을 완료하지 못했다.
3.4.3. 동부 지역 상실과 제2제국 (1844년 ~ 1859년)

아이티 엘리트들의 지지를 잃은 후, 부아예는 1843년에 축출되었고 샤를 리비에르에라르가 대통령으로 그를 대신했다. 후안 파블로 두아르테가 이끄는 히스파니올라 동부의 민족주의 도미니카 군대는 1844년 2월 27일 산토도밍고를 장악했다. 상당한 봉기에 대비하지 못한 아이티 군대는 반란군에게 항복하여 사실상 히스파니올라 동부에 대한 아이티의 통치를 종식시켰다. 3월에 리비에르에라르는 그의 권위를 다시 세우려 했지만, 도미니카인들은 큰 손실을 입혔다. 리비에르에라르는 뮬라토 계층에 의해 해임되었고, 1844년 5월 3일 대통령직을 맡은 노장군 필리프 게리에로 교체되었다.
게리에는 1845년 4월에 사망했고, 장루이 피에로 장군이 그 뒤를 이었다. 새 대통령으로서 피에로의 가장 시급한 임무는 아이티 군대를 괴롭히던 도미니카인들의 침입을 막는 것이었다. 도미니카 포함들도 아이티 해안을 약탈하고 있었다. 피에로 대통령은 단순히 반란군으로 간주했던 도미니카인들에 대한 캠페인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지만, 1845년 아이티 공세는 국경에서 중단되었다.
1846년 1월 1일 피에로는 히스파니올라 동부에 대한 아이티의 종주권을 다시 부과하기 위한 새로운 캠페인을 발표했지만, 그의 장교들과 병사들은 이 새로운 소환을 경멸하며 맞이했다. 그리하여 한 달 후인 1846년 2월, 피에로가 그의 군대에게 도미니카인들을 향해 진군하라고 명령했을 때, 아이티 군대는 반란을 일으켰고, 그의 병사들은 그를 공화국 대통령에서 축출했다고 선포했다. 도미니카인들과의 전쟁이 아이티에서 매우 인기가 없어지면서, 새 대통령인 장바티스트 리셰 장군이 또 다른 침공을 감행하는 것은 그의 힘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1847년 2월 27일, 리셰 대통령은 집권 1년 만에 사망했고, 무명의 장교인 포스탱 술루크 장군으로 교체되었다. 술루크 행정부의 첫 2년 동안 그가 권력을 유지하는 데 직면했던 음모와 반대는 매우 다양하여 도미니카인들은 독립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추가적인 여유를 얻었다. 그러나 1848년 프랑스가 마침내 도미니카 공화국을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고 평화, 우호, 통상 및 항해 조약을 잠정적으로 체결하자, 아이티는 즉시 항의하며 이 조약이 자국의 안보에 대한 공격이라고 주장했다. 술루크는 프랑스 정부가 조약을 비준하기 전에 신 공화국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1849년 3월 21일, 아이티 병사들이 라스마타스데파르판의 도미니카 수비대를 공격했다. 사기가 저하된 수비대는 무기를 버리기 전에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술루크는 계속 진격하여 산후안을 점령했다. 이로써 아이티 군대와 수도 사이에 남은 도미니카 요새는 아수아 마을뿐이었다. 4월 6일, 아수아는 18,000명의 강력한 아이티 군대에 함락되었고, 5,000명의 도미니카 반격은 그들을 몰아내는 데 실패했다. 산토도밍고로 가는 길은 이제 명확해졌다. 그러나 포르토프랭스에 불만이 존재한다는 소식이 술루크에게 전해지자, 그의 진격을 막고 군대와 함께 수도로 돌아가게 했다.
아이티 군대의 갑작스러운 퇴각에 용기를 얻은 도미니카인들은 반격했다. 그들의 소함대는 아이티 서해안의 담마리까지 진격하여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1855년 또 다른 아이티 캠페인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하여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한 도미니카인들을 대신하여 휴전을 얻었다.
1855년 캠페인 동안 병사들이 겪은 고통과 어떠한 보상이나 실질적인 결과도 없이 국가에 가해진 손실과 희생은 큰 불만을 야기했다. 1858년 파브르 제프라르 장군이 이끄는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해 12월, 제프라르는 제국군을 격파하고 국가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 결과, 황제는 1859년 1월 15일 퇴위했다. 포스탱은 망명했고 제프라르 장군이 그를 대신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3.4.4.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

술루크 축출 이후부터 세기말까지의 기간은 아이티에게 격동의 시기였으며, 정치적 불안정이 반복되었다. 제프라르 대통령은 1867년 쿠데타로 축출되었고, 그의 후임자인 실뱅 살나브도 1869년에 축출되었다. 미셸 도맹그 대통령(1874년~76년) 재임 기간 동안 양측이 서로의 독립을 인정한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관계가 극적으로 개선되었다. 이 시기, 특히 리시우스 살로몽 대통령(1879년~1888년)과 플로르빌 이폴리트 대통령(1889년~1896년) 재임 기간 동안 경제와 기반 시설의 일부 현대화도 이루어졌다.
아이티의 대외 관계는 종종 긴장 상태였다. 1889년 미국은 아이티에게 몰생니콜라에 해군 기지 건설을 허용하도록 강요하려 했으나, 이폴리트 대통령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1892년 독일 정부는 앙테노르 피르맹의 개혁 운동을 탄압하는 것을 지원했고, 1897년 독일인들은 뤼더스 사건 동안 티레시아스 시몽 삼 대통령(1896년~1902년)의 아이티 정부를 위협하고 굴욕시키기 위해 함포 외교를 사용했다.
20세기 초 수십 년 동안 아이티는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을 겪었고 프랑스, 독일, 미국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다. 단명한 대통령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피에르 노르 알렉시 대통령은 1908년에 권좌에서 물러났고, 그의 후임자인 프랑수아 C. 앙투안 시몽도 1911년에 물러났다. 생시나튀스 르콩트 대통령(1911년~12년)은 국립 궁전에서 (아마도 고의적인) 폭발로 사망했다. 미셸 오레스트(1913년~14년)는 쿠데타로 축출되었고, 그의 후임자인 오레스트 자모르도 1914년에 축출되었다.
3.5. 미국 점령기 (1915년 ~ 1934년)

이 시기 독일은 아이티에서 영향력을 증대시켰으며, 소수의 독일 정착민 공동체가 아이티 경제에 불균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독일의 영향력은 아이티에 막대한 투자를 했고, 먼로 독트린에 따라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외세 간섭에 반대할 권리를 옹호했던 미국의 불안감을 야기했다. 1914년 12월, 미국인들은 아이티 국립은행에서 50만 달러를 인출했는데, 이는 부채 상환을 돕기 위해 압류한 것이 아니라 뉴욕에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미국은 은행을 통제하고 다른 강대국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막았다. 이는 경제를 구축하고 부채를 상환할 수 있는 안정적인 재정 기반을 제공했다.
1915년, 아이티의 새 대통령 빌브룅 기욤 삼은 167명의 정치범을 대량 처형함으로써 그의 불안정한 통치를 강화하려 했다. 이 학살에 대한 분노는 폭동으로 이어졌고, 삼은 군중에게 붙잡혀 살해당했다. 외세의 개입 가능성이나 반미 아이티 정치인 로잘보 보보가 이끄는 새 정부의 출현을 두려워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1915년 7월 미 해병대를 아이티에 파견했다. 윌리엄 뱅크스 캐퍼튼 소장이 지휘하는 USS 워싱턴(ACR-11) 호은 질서를 회복하고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포르토프랭스에 도착했다. 며칠 안에 해병대는 수도와 은행, 세관을 장악했다. 해병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엄격히 검열했다. 몇 주 안에 친미 아이티 대통령 필리프 쉬드르 다르티그나브가 취임했고, 미국의 이익에 유리한 새 헌법이 제정되었다. (미래의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작성한) 이 헌법에는 아이티에서 처음으로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허용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아이티 입법부와 시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점령은 아이티의 일부 기반 시설을 개선하고 포르토프랭스에 권력을 중앙 집중화했다. 1700 km의 도로가 사용 가능하게 되었고, 189개의 다리가 건설되었으며, 많은 관개 수로가 복구되었고, 병원, 학교, 공공 건물이 건설되었으며, 주요 도시에 식수가 공급되었다. 농업 교육이 조직되어 중앙 농업 학교와 전국에 69개의 농장이 생겼다. 그러나 많은 기반 시설 프로젝트는 정부/점령군이 필요하다면 총으로 위협하여 사람들을 집과 농장에서 강제로 데려가 도로, 다리 등을 건설하는 부역 제도를 사용하여 건설되었으며, 이 과정은 일반 아이티인들에게 깊은 반감을 샀다. 사이잘 또한 아이티에 도입되었고, 사탕수수와 목화는 중요한 수출품이 되어 번영을 촉진했다. 농촌 지역에 기반을 둔 아이티 전통주의자들은 미국이 지원하는 변화에 매우 저항했으며, 일반적으로 혼혈인 도시 엘리트들은 경제 성장을 환영했지만 더 많은 정치적 통제를 원했다. 그들은 함께 스테니오 뱅상 대통령(1930년~1941년) 하에서 1934년에 점령을 종식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부채는 번영 증가로 인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남아 있었고, 미국 재정 고문-총괄 수령인은 1941년까지 예산을 처리했다.
미 해병대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라는 은유로 표현되는" 아이티인들에 대한 특별한 종류의 온정주의를 주입받았다. 미국 주둔에 대한 무장 반대는 샤를마뉴 페랄트의 지휘 아래 카코들이 이끌었다. 그의 체포와 1919년 처형은 그에게 국가 순교자 지위를 부여했다. 1921년 상원 청문회에서 해병대 사령관은 20개월간의 적극적인 소요 기간 동안 2,250명의 아이티인이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해군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그는 사망자 수를 3,250명으로 보고했다. 아이티 역사학자들은 실제 숫자가 훨씬 더 높았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아이티 외부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지지되지 않는다.
3.6. 점령 이후 시대 (1934년 ~ 1957년)
1934년 미군이 철수한 후,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는 반아이티 감정을 민족주의적 도구로 사용했다. 1937년, 파슬리 학살로 알려진 사건에서 그는 도미니카 국경 지역에 거주하는 아이티인들을 학살하라고 군대에 명령했다. 총알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대신 20,000명에서 30,000명의 아이티인들이 몽둥이와 총검으로 살해당한 후 바다로 몰려 상어들이 트루히요가 시작한 일을 마무리했다. 이 무차별 학살은 5일 동안 계속되었다.
점점 더 독재적인 행동으로 인해 미국의 압력을 받던 아이티 대통령 스테니오 뱅상은 1941년에 사임했고, 엘리 레스코(1941년~46년)로 교체되었다.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레스코는 일본(12월 8일), 독일(12월 12일), 이탈리아(12월 12일), 불가리아(12월 24일), 헝가리(12월 24일), 루마니아(12월 24일)에 선전포고했다. 이 6개 추축국 중 루마니아만이 같은 날(1941년 12월 24일) 아이티에 선전포고하며 응수했다. 1945년 9월 27일, 아이티는 국제 연합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아이티는 국제 연맹의 창립 회원국이기도 했다).
1946년 레스코는 군부에 의해 축출되었고, 뒤마르세 에스티메가 나중에 새 대통령(1946년~50년)이 되었다. 에스티메는 경제와 교육을 개선하고 흑인 아이티인들의 역할을 증진시키려 했으나, 그 역시 통치를 공고히 하려 하자 폴 마글루아르가 이끄는 쿠데타로 축출되었고, 마글루아르가 그를 대신하여 대통령(1950년~56년)이 되었다. 확고한 반공주의자였던 그는 미국의 지지를 받았고, 정치적 안정이 증대되면서 관광객들이 아이티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포르토프랭스의 해안가 지역은 유람선 승객들이 문화 명소로 걸어갈 수 있도록 재개발되었다.
3.7. 뒤발리에 왕조 (1957년 ~ 1986년)

1956년~57년 아이티는 심각한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마글루아르는 1956년 사임하고 국외로 떠나야 했으며, 그 뒤를 이어 네 차례의 단명한 대통령직이 이어졌다. 1957년 9월 선거에서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아이티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파파 독'으로 알려졌으며 처음에는 인기가 있었던 뒤발리에는 1971년 사망할 때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육받은 도시 엘리트로서 유색인들이 우세했던 공공 부문에서 흑인의 이익을 증진시켰다. 군대를 불신했던 뒤발리에는 불충하다고 여겨지는 장교들을 자주 숙청했음에도 불구하고, 통통 마쿠트(Tontons Macoutes, "도깨비들")로 알려진 사설 민병대를 창설하여 주민과 정치적 반대자들을 공포에 떨게 함으로써 질서를 유지했다. 1964년 뒤발리에는 자신을 '종신 대통령'으로 선포했다. 그해 제레미에서 그의 통치에 반대하는 봉기가 폭력적으로 진압되었고, 주동자들은 공개 처형되었으며 마을의 수백 명의 혼혈 시민들이 살해되었다. 교육받은 전문직 계층의 대부분이 나라를 떠나기 시작했고 부패가 만연했다. 뒤발리에는 아이티 부두교의 로아(lwa) 또는 영혼 중 하나인 바론 사메디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개인 숭배를 만들려고 했다. 그의 통치하에서의 잘 알려진 학대에도 불구하고, 뒤발리에의 확고한 반공주의는 그에게 미국의 지원을 얻게 했고, 미국은 아이티에 원조를 제공했다.
1971년 뒤발리에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장클로드 뒤발리에(애칭 '베이비 독')가 대통령직을 계승하여 1986년까지 통치했다. 그는 국제적 존경을 얻기 위해 최악의 과잉 행위 중 일부를 억제했지만 대체로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갔다. 파파 독 시대에 급감했던 관광 산업은 다시 성장하는 산업이 되었다. 그러나 경제가 계속 쇠퇴하면서 베이비 독의 권력 장악력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 돼지 콜레라 발생으로 아이티의 돼지 개체수가 도살되어 돼지를 투자 수단으로 사용하던 농촌 지역 사회에 어려움을 초래했다. 198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아이티를 방문하여 공개적으로 대통령을 질책하면서 야당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1985년 고나이브에서 시위가 발생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미국의 압력으로 뒤발리에는 1986년 2월 프랑스로 망명했다.
뒤발리에 부자 통치 기간 동안 대략 40,000명에서 60,000명의 아이티인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협박 전술과 처형을 통해 많은 아이티 지식인들이 도피하여 아이티는 아직 회복하지 못한 막대한 두뇌 유출을 겪었다.
3.8. 뒤발리에 이후 시대 (1986년 ~ 현재)
독재 정권 붕괴 이후 아이티는 민주화 시도, 반복되는 정치적 혼란, 자연재해, 국제 사회의 개입, 그리고 현재의 국가적 위기 상황을 겪고 있다. 이 시기는 불안정과 불확실성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아이티 국민들은 지속적인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3.8.1. 아리스티드 정부와 쿠데타 (1986년 ~ 2004년)

뒤발리에의 망명 이후, 군 지도자 앙리 남피 장군이 새로운 국가통치위원회를 이끌었다. 1987년 11월로 예정되었던 선거는 수도에서 수십 명의 주민들이 군인과 통통 마쿠트에게 총격을 당한 후 중단되었다. 1988년에는 부정 선거가 이어졌고, 시민의 4%만이 투표했다. 새로 선출된 대통령 레슬리 마니가는 몇 달 후 1988년 6월 아이티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1988년 9월, 저명한 정부 비판가이자 가톨릭 신부인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이끄는 미사에 참석한 약 13명에서 50명의 사람들이 살해된 생장 보스코 학살 이후 또 다른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후 프로스페르 아브릴 장군은 1990년 3월까지 군사 정권을 이끌었다.
아브릴은 1990년 3월 10일 육군 참모총장 에라르 아브라암 장군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아브라암은 3일 후 권력을 포기하여 20세기 아이티에서 자발적으로 권력을 포기한 유일한 군 지도자가 되었다. 아브라암은 나중에 1990년~1991년 아이티 총선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90년 12월, 아이티 총선에서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의 야심찬 개혁 의제는 엘리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이듬해 9월 그는 라울 세드라스가 이끄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계속되는 혼란 속에서 많은 아이티인들이 나라를 떠나려 했다.
1994년 9월, 미국은 아이티 군 지도자들의 퇴진과 민주주의 유지 작전 하에 20,000명의 미군이 평화적으로 진입하는 것을 협상했다. 이로써 민주적으로 선출된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복권되어 10월에 아이티로 돌아와 임기를 마칠 수 있게 되었다. 협상의 일환으로 아리스티드는 아이티 경제를 개선하기 위해 자유 시장 개혁을 시행해야 했으며, 그 결과는 엇갈렸다. 1994년 11월, 허리케인 고든이 아이티를 강타하여 폭우를 쏟아붓고 산사태를 유발하는 갑작스러운 홍수를 일으켰다. 고든은 약 1,122명의 사망자를 냈지만, 일부 추정치는 2,200명에 달한다.
1995년 선거는 르네 프레발이 낮은 투표율에도 불구하고 88%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아리스티드는 이후 자신의 정당인 판미 라발라스를 창당했고 정치적 교착 상태가 이어졌다. 2000년 11월 선거에서는 아리스티드가 92%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복귀했다. 이 선거는 야당(당시 민주수렴당으로 조직됨)이 5월 총선의 분쟁으로 인해 보이콧했다. 이후 몇 년 동안 경쟁적인 정치 파벌 간의 폭력과 인권 유린이 증가했다. 아리스티드는 새로운 선거에 대해 민주수렴당과 수년간 협상했지만, 민주수렴당이 충분한 선거 기반을 확보하지 못하여 선거가 매력적이지 못했다.
2004년, 아이티 북부에서 반아리스티드 반란이 시작되었다. 반란은 결국 수도에 이르렀고 아리스티드는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사건의 정확한 성격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아리스티드와 그의 경호원 프란츠 가브리엘을 포함한 일부는 미군에 의한 "새로운 쿠데타 또는 현대적 납치"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미국 정부에 의해 부인되었다. 정치적 폭력과 범죄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국제 연합 아이티 안정화 사절단(MINUSTAH)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MINUSTAH는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주기적으로 강압적인 접근 방식과 민간인에 대한 성적 학대 혐의를 포함한 여러 학대 사례로 인해 일반 아이티인들 사이에서 반감과 불신을 불러일으키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보니파스 알렉상드르는 2006년까지 임시 권한을 맡았고, 그 후 선거에 따라 르네 프레발이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3.8.2. 2004년 이후 혼란과 재난

계속되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일련의 자연재해가 아이티를 강타했다. 2004년 열대폭풍 잔이 북부 해안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주로 고나이브 시에서 홍수와 산사태로 3,006명이 사망했다. 2008년 아이티는 다시 열대성 폭풍의 타격을 받았다. 열대폭풍 페이, 허리케인 구스타브, 허리케인 해나, 허리케인 아이크 모두 강풍과 폭우를 동반하여 331명이 사망하고 약 80만 명이 인도적 지원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폭풍으로 인한 상황은 이미 높은 식량 및 연료 가격으로 인해 2008년 4월 식량 위기와 정치적 불안을 야기했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2010년 1월 12일 현지 시간 오후 4시 53분, 아이티는 규모 7.0의 지진의 강타를 받았다. 이는 200년 이상 만에 발생한 가장 강력한 지진이었다. 지진으로 16만 명에서 30만 명 사이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최대 16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여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자연재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는 또한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지진 중 하나이다. 상황은 유엔 평화유지군 주둔지에서 발생한 콜레라에 오염된 폐기물이 국가의 주요 강인 아르티보니트강을 오염시키면서 발생한 대규모 콜레라 발병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2017년에는 약 1만 명의 아이티인이 사망하고 거의 100만 명이 병에 걸린 것으로 보고되었다. 수년간의 부인 끝에 2016년 유엔은 사과했지만, 2017년 현재까지도 책임을 인정하지 않아 재정적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2010년 1월로 예정되었던 총선은 지진으로 인해 연기되었다. 2010년 11월 28일 상원, 의회 및 대통령 선거 1차 투표가 실시되었다. 미셸 마르텔리와 미를란드 마니가 간의 결선 투표는 2011년 3월 20일에 치러졌으며, 4월 4일에 발표된 예비 결과에서 미셸 마르텔리가 승자로 지명되었다. 2011년, 전 독재자 장클로드 뒤발리에와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모두 아이티로 귀국했다. 뒤발리에의 통치 기간 동안 저지른 범죄에 대한 재판 시도는 2014년 그의 사망 이후 중단되었다. 2013년 아이티 정부는 유럽 정부에 노예제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고 과거의 잘못을 해결하기 위한 공식 위원회를 설립할 것을 촉구했다. 한편, 야당과의 계속되는 정치적 논쟁과 선거 사기 혐의 이후 마르텔리는 2016년 후임자 없이 물러나기로 합의했다. 부분적으로 파괴적인 허리케인 매튜의 영향으로 수차례 연기된 후, 2016년 11월에 선거가 치러졌다. 아이티 테트 칼레당의 조브넬 모이즈가 승리하여 2017년에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2018년 7월 7일 연료 가격 인상에 대응하여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시위는 모이즈 대통령의 사임 요구로 발전했다.
2021년 7월 7일, 모이즈 대통령이 자택에서 공격을 받아 암살되었고, 영부인 마르틴 모이즈는 병원에 입원했다. 정치 위기 속에서 아이티 정부는 2021년 7월 20일 아리엘 앙리를 총리 대행으로 임명했다. 2021년 8월 14일, 아이티는 또 다른 거대한 지진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지진은 또한 아이티의 경제 상황을 악화시켰고, 2021년 9월까지 장기적인 전면적인 갱단 전쟁과 기타 폭력 범죄로 확대된 갱단 폭력의 증가로 이어졌다. 2022년 3월 현재, 아이티는 여전히 대통령이 없고, 의회 정족수가 미달되며, 판사 부족으로 인해 고등 법원이 기능 불능 상태였다. 2022년에는 정부와 연료 가격 상승에 대한 시위가 격화되었다.
2023년 납치 사건은 전년도 1분기보다 72% 급증했다. 의사, 변호사 및 기타 부유한 사회 구성원들이 납치되어 몸값을 요구받았다. 몸값 요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많은 희생자가 살해되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나라를 떠나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더욱 방해했다. 위기 속에서 2023년 말까지 자격을 갖춘 의료진의 최대 20%가 아이티를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2024년 3월, 아리엘 앙리는 케냐 방문 후 갱단에 의해 아이티 귀국이 저지되었다. 앙리는 과도 정부가 구성되면 사임하기로 합의했다. 그 달 현재, 세계 식량 계획에 따르면 아이티 인구의 거의 절반이 극심한 식량 불안정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2024년 4월 25일, 과도 대통령 위원회가 아이티 통치를 인수했으며 2026년까지 집권할 예정이다. 미셸 파트리크 부아베르가 임시 총리로 임명되었다. 2024년 6월 3일, 위원회는 가리 코니유를 총리 대행으로 임명했다. 2024년 11월 10일, 알릭스 디디에 필스에메가 코니유를 대신하여 총리 대행이 되었다.
4. 지리
아이티는 카리브해의 앤틸리스 제도에 속하는 히스파니올라섬 서쪽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도미니카 공화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안가를 따라 좁은 평야와 하천 유역이 발달해 있다. 기후는 열대성 기후로, 고도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인다.
4.1. 지형과 기후
아이티는 카리브해에서 가장 산이 많은 나라로, 지형은 작은 해안 평야와 강 계곡이 산재한 산들로 이루어져 있다. 기후는 열대성이며 고도에 따라 약간의 변화가 있다. 가장 높은 지점은 픽 라 셀로, 해발 2680 m이다.

북부 지역 또는 마리엔 지역은 마시프뒤노르(북부 산괴)와 플렌뒤노르(북부 평야)로 구성된다. 마시프뒤노르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코르디예라 센트랄의 연장선이다. 아이티 동부 국경, 과야무크강 북쪽에서 시작하여 북부 반도를 통해 북서쪽으로 뻗어 있다. 플렌뒤노르의 저지대는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북부 국경을 따라 마시프뒤노르와 북대서양 사이에 놓여 있다.
중부 지역 또는 아르티보니트 지역은 두 개의 평야와 두 개의 산맥으로 구성된다. 플라토 상트랄(중앙 고원)은 과야무크강 양쪽, 마시프뒤노르 남쪽을 따라 펼쳐져 있다.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진다. 플라토 상트랄의 남서쪽에는 몽타뉴누아르가 있으며, 이 산맥의 가장 북서쪽 부분은 마시프뒤노르와 합쳐진다. 아이티에서 농작물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계곡은 아르티보니트 평야로, 몽타뉴누아르와 셴 데 마퇴 사이에 있다. 이 지역은 아이티에서 가장 긴 강인 아르티보니트강을 지탱하며, 이 강은 도미니카 공화국 서부 지역에서 시작하여 중앙 아이티 대부분을 거쳐 고나브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또한 이 계곡에는 1950년대 중반 펠리그르댐 건설 결과로 형성된 아이티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인 펠리그르호가 있다.
남부 지역 또는 하라과 지역은 플렌뒤퀼드삭(남동부)과 산악 지형의 남부 반도(티뷔롱반도)로 구성된다. 플렌뒤퀼드삭은 트루카이망과 아이티에서 가장 큰 호수인 소마트르호와 같은 염호를 품고 있는 자연적인 함몰지이다. 도미니카 공화국 남부 산맥(시에라 데 바오루코)의 연장선인 셴 드 라 셀 산맥은 동쪽의 마시프 드 라 셀에서 서쪽의 마시프 드 라 오트까지 뻗어 있다.
아이티는 여러 개의 외딴 섬도 포함한다. 토르투가섬은 아이티 북부 해안에 위치한다. 라 고나브 군은 고나브만에 있는 같은 이름의 섬에 위치한다. 아이티에서 가장 큰 섬인 고나브섬은 농촌 주민들이 드문드문 거주한다. 일라바슈는 남서부 해안에 위치한다. 카예미트 제도 또한 아이티의 일부로, 페스텔 북쪽 고나브만에 위치한다. 아이티 남서부 반도의 제레미에서 서쪽으로 40 nmi 떨어진 나배사섬은 현재 미국이 관리하고 있으며, 미국과의 영유권 분쟁이 진행 중이다.
포르토프랭스의 1월 평균 최저 기온은 23 °C, 평균 최고 기온은 31 °C이다. 7월에는 25 °C에서 35 °C 사이이다. 강우 패턴은 다양하며, 일부 저지대와 산의 북쪽 및 동쪽 경사면에는 비가 더 많이 내린다. 아이티의 건기는 11월부터 1월까지이다. 포르토프랭스는 연평균 강우량이 1370 mm이다. 우기는 4월~6월과 10월~11월 두 차례이다. 아이티는 주기적인 가뭄과 홍수의 영향을 받으며, 이는 삼림 벌채로 인해 더욱 심화된다. 허리케인도 위협적이며, 홍수와 지진에도 취약하다.
4.2. 지질
아이티는 엔리키요-플랜테인 가든 단층대와 관련된 맹단층 위에 놓여 있다. 2010년 지진 이후 지표 파열의 증거는 없었으며, 지질학자들의 발견은 지진학적, 지질학적, 지반 변형 데이터를 기반으로 했다.
단층의 북쪽 경계는 카리브판이 북아메리카판에 대해 연간 약 20 mm 동쪽으로 이동하는 곳이다. 이 지역의 주향이동단층 시스템은 아이티에서 두 개의 가지로 나뉘는데, 북쪽의 셉텐트리오날-오리엔테 단층대와 남쪽의 엔리키요-플랜테인 가든 단층이다.
2007년 지진 위험 연구에서는 엔리키요-플랜테인 가든 단층대가 지진 주기의 끝에 있을 수 있다고 언급했으며, 최악의 경우 1692년 자메이카 지진과 유사한 규모인 7.2 Mw 지진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단층 시스템의 위험 평가를 수행한 연구팀은 이 단층이 완전히 잠겨 있고 지난 40년 동안 지진 기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최우선 순위"로 역사적 지질 파열 연구를 권고했다. 2010년 1월 12일 규모 7.0의 2010년 아이티 지진이 이 단층대에서 발생했다.
아이티에는 몽오르가니제 금광에서 발견될 수 있는 금과 같은 희귀 원소도 있다.
아이티에는 현재 활동 중인 화산이 없다. "테르뇌브 산맥, 오부아뉴에서 약 12km 떨어진 곳에서는 최소한 올리고세 후기, 아마도 마이오세 시대의 작은 관입암이 알려져 있다. 다른 온천 근처에서는 이보다 늦은 시기의 화산 활동은 알려져 있지 않다."
4.3. 환경

상부 집수역에서 방출된 토양 침식과 삼림 벌채는 주기적이고 심각한 홍수를 유발했으며, 예를 들어 2004년 9월 17일에 경험한 바와 같다. 그해 5월 초에는 홍수로 인해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 남부 국경에서 3,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아이티 숲은 국토의 60%를 덮고 있었지만, 현재는 절반으로 줄어들어 나무 피복률이 30%로 추정된다. 이 추정치는 아이티의 환경 상태에 관한 담론에서 자주 인용되는 2%라는 잘못된 수치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아이티는 2019년 산림경관 완전성 지수 평균 점수가 4.01/10으로, 172개국 중 137위를 차지했다.
컬럼비아 대학교 국제 지구과학 정보 네트워크 센터와 유엔 환경 계획의 과학자들은 생태계 복원과 지속 가능한 자원 관리를 통해 빈곤과 자연재해 취약성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아이티 재생 이니셔티브에 참여하고 있다.
4.3.1. 생물 다양성

아이티에는 히스파니올라 습윤림, 히스파니올라 건조림, 히스파니올라 소나무숲, 대앤틸리스 맹그로브 등 4개의 생태 지역이 있다.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아이티의 산악 지형과 그로 인한 다양한 기후대는 다양한 식물상을 만들어냈다. 주목할 만한 수종으로는 빵나무, 망고나무, 아카시아, 마호가니, 코코넛야자, 왕실야자, 서인도 삼나무 등이 있다. 과거에는 숲이 훨씬 더 광범위했으나 심각한 삼림 벌채의 대상이 되었다.
대부분의 포유류 종은 토종이 아니며, 식민지 시대 이후 섬으로 유입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토종 박쥐 종과 고유종인 히스파니올라후티아 및 히스파니올라솔레노돈이 서식한다. 아이티 해안에서는 고래와 돌고래 종도 발견할 수 있다.
260종 이상의 조류가 서식하며, 그중 31종은 히스파니올라 고유종이다. 주목할 만한 고유종으로는 히스파니올라트로곤, 히스파니올라앵무새, 회색머리탄자나, 히스파니올라아마존앵무 등이 있다. 또한 여러 맹금류와 펠리컨, 따오기, 벌새, 오리도 서식한다.
파충류는 흔하며, 코뿔소이구아나, 아이티보아뱀, 미국악어, 도마뱀붙이와 같은 종이 서식한다.
5. 정치

아이티의 정부는 이원집정부제 공화국이며, 대통령이 국가 원수이고 5년마다 열리는 직접 국민 선거로 선출되는 다당제이다. 총리는 행정부 수반 역할을 하며, 대통령이 국회 다수당에서 선택하여 임명한다. 행정권은 대통령과 총리가 함께 정부를 구성하여 행사한다.
입법권은 정부와 아이티 국회의 양원인 원로원(Sénat)과 대의원(Chambre des Députés) 모두에게 있다. 정부는 단일제로 조직되어 중앙 정부가 헌법적 동의 없이 주(데파르트망)에 권한을 위임한다. 아이티 정치 체제의 현재 구조는 1987년 3월 29일 아이티 헌법에 명시되었다.
아이티 정치는 논쟁의 여지가 많았다. 독립 이후 아이티는 32번의 쿠데타를 겪었다. 아이티는 성공적인 노예 혁명을 겪은 서반구 유일의 국가이지만, 프랑수아 뒤발리에와 그의 아들 장클로드 뒤발리에와 같은 독재자들에 의한 오랜 압제의 역사는 공화국의 통치와 사회에 현저하게 영향을 미쳤다. 뒤발리에 시대가 끝난 이후 아이티는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고 있다.
5.1. 정부 구조
아이티는 대통령 중심제 공화국으로, 대통령은 국가 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의 역할을 겸한다. 대통령은 국민 직접 선거를 통해 5년 임기로 선출되며 연임은 불가능하다. 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고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되며, 내각을 구성하고 정부 정책을 집행한다.
입법부는 양원제로, 상원(Sénat)과 하원(Chambre des Députés)으로 구성된다. 상원의원은 30명으로 6년 임기이며, 2년마다 3분의 1씩 개선된다. 하원의원은 현재 119명으로 4년 임기이다.
사법부는 대법원(Court of Cassation)을 최고 법원으로 하며, 항소 법원, 제1심 법원, 치안 법원 등으로 구성된다. 사법부의 독립은 헌법에 보장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정치적 영향력과 자원 부족으로 인해 그 기능이 약화되는 경우가 많다. 만성적인 정치 불안과 잦은 정권 교체, 그리고 자연재해는 아이티 정부 구조의 안정성과 효율성을 저해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5.2. 군사
아이티는 독립 이전 투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강력한 군사 역사를 가지고 있다. 토착군은 국가 건설, 토지 및 공공 재정 관리에 필수적이었다. 20세기까지 모든 아이티 대통령은 군 장교였다. 미국 개입 기간 동안 군대는 아이티 헌병대(Gendarmerie d'Haiti)로, 나중에는 아이티군(Force Armée d'Haiti, FAdH)으로 개편되었다. 1990년대 초, 군대는 위헌적으로 해체되고 아이티 국가경찰(PNH)로 대체되었다. 2018년,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은 FAdH를 재활성화했다.
아이티 국방부는 군대의 주요 기관이다. 이전의 아이티군은 1995년에 해체되었으나, 현재 재건 노력이 진행 중이다. 현재 아이티의 국방군은 아이티 국가경찰이며, 고도로 훈련된 SWAT 팀을 보유하고 아이티 해안경비대와 협력한다. 2010년, 아이티 국가경찰은 7,000명 규모였다.
2023년 현재, 아이티 육군은 창설 중인 1개 보병대대를 포함하여 7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5.3. 치안과 범죄

아이티의 법체계는 나폴레옹 법전을 수정한 버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아이티는 부패인식지수에서 지속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국가 중 하나로 선정되어 왔다. 2006년 부패인식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아이티의 부패와 빈곤 사이에는 강력한 상관관계가 있다. 아이티 공화국은 국내 부패 인식 수준에서 조사 대상 모든 국가 중 1위를 차지했다. "베이비 독" 뒤발리에 대통령과 그의 아내 미셸 베네트, 그리고 그들의 대리인들은 1971년부터 1986년까지 국고에서 미화 5억 4백만 달러를 훔친 것으로 추정된다. 마찬가지로, 1995년 아이티군이 해체된 후, 아이티 국가경찰(HNP)은 아이티 시민에 대한 유일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 많은 아이티인들과 관찰자들은 이 독점적인 권력이 부패한 경찰력을 야기했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일부 언론 매체는 전 대통령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수백만 달러를 훔쳤다고 주장했다. BBC는 또한 2002년 아이티인들이 수억 달러를 잃은 피라미드 사기를 아리스티드 시대의 "유일한 실질적인 경제 계획"이라고 묘사했다.
반대로, 2013년 유엔 마약 범죄 사무소(UNODC) 보고서에 따르면, 살인율(10만 명당 10.2명)은 지역 평균(10만 명당 26명)보다 훨씬 낮으며, 자메이카(10만 명당 39.3명)의 4분의 1 미만이고 도미니카 공화국(10만 명당 22.1명)의 거의 절반 수준으로, 이 지역에서 더 안전한 국가 중 하나이다. 이는 주로 2012년에 시작된 4개년 계획인 국가 경찰을 매년 50%씩 증원하겠다는 공약을 이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매년 신병 모집 외에도 아이티 국가경찰(HNP)은 범죄 단속을 위해 혁신적인 기술을 사용해 왔다. 최근 몇 년간 주목할 만한 단속은 웨스트포인트 출신 아이티 관리가 개발한 첨단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국내 최대 규모의 납치 조직을 해체한 것으로, 이 프로그램이 매우 효과적이어서 외국 고문들이 문의할 정도였다.
2010년, 뉴욕 경찰국(NYPD)은 수사 기법, 납치 방지 전략 및 지역 사회 봉사 활동에 대한 특별 훈련을 통해 경찰력 재건을 지원하기 위해 아이티에 경찰관 팀을 파견했다. 또한 HNP가 포르토프랭스의 한 동네인 델마스에 경찰 부대를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2012년과 2013년에는 150명의 HNP 경찰관이 미국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전문 교육을 받았으며, 이는 또한 라디오 용량 업그레이드와 포르토프랭스에서 가장 폭력적인 지역인 시테 솔레이유와 그랑드 라빈에서 카라콜의 새로운 북부 산업 단지까지 새로운 경찰서를 건설함으로써 기반 시설 및 통신 지원에 기여했다.
유엔에 따르면 아이티는 극심한 폭력, 정치적 불안정, 심화되는 인도주의적 비상사태로 특징지어지는 악화되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유엔 특별대표 버지니아 감바는 무장 단체에 의한 아동 이용을 비난하며, 성폭력을 전쟁 무기로 강조했다. 가리 코니유 임시 총리의 해임은 통치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무장 단체들은 학교와 병원을 표적으로 삼아 수천 명을 난민으로 만들고 30만 명의 어린이가 교육을 받지 못하게 했다. 유엔은 270만 명 이상이 갱단의 통제 하에 살고 있기 때문에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긴급한 인도주의적 지원, 강화된 안보 노력, 정치적 단결을 촉구하고 있다.
5.4. 교도 행정
포르토프랭스 교도소는 아이티 수감자의 절반을 수용하고 있다. 이 교도소의 수용 능력은 1,200명이지만, 2017년 11월 현재 교도소는 4,359명을 수용해야 했으며, 이는 수용률 363%에 해당한다.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지 못하여 치명적인 영양실조 사례가 발생했으며, 비좁은 생활 환경과 결합하여 결핵과 같은 전염병의 위험을 증가시킨다.
아이티 법에 따르면 체포되면 48시간 이내에 판사 앞에 서야 하지만, 이는 매우 드문 일이다. 가족들이 수감자가 판사 앞에 설 수 있도록 필요한 자금을 제공할 수 없다면, 수감자가 평균 10년 이내에 재판을 받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하루 22~23시간 동안 감금된 생활 공간에서 수감자들은 화장실을 제공받지 못하고 비닐봉지에 배변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은 2008년 미주 인권 재판소에서 비인간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2024년 3월 3일, 무장 갱단이 포르토프랭스의 주요 교도소를 습격하여 약 3,700명의 수감자가 탈출했고, 12명이 사망했다.
6. 행정 구역
아이티는 10개의 주(département)로 구성되며, 각 주는 여러 군(arrondissement)과 코뮌(commune)으로 세분된다. 수도인 포르토프랭스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은 각 주의 행정 및 경제 중심지 역할을 한다.
아이티는 행정적으로 10개의 주(département)로 나뉜다. 각 주는 주도(괄호 안에 표시)를 가지고 있다.
# 북서부주 (포르드페)
# 북부주 (카프아이티엥)
# 북동부주 (포르리베르테)
# 아르티보니트주 (고나이브)
# 중앙주 (앵슈)
# 서부주 (포르토프랭스)
# 그랑당스주 (제레미)
# 니프주 (미라고안)
# 남부주 (레카이)
# 남동부주 (자크멜)
주는 다시 42개의 군(arrondissement), 145개의 코뮌(commune), 그리고 571개의 코뮌 구역(section communale)으로 나뉜다. 이들은 각각 2차 및 3차 행정 구역의 역할을 한다.
6.1. 주요 도시


아이티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는 포르토프랭스이다. 포르토프랭스는 서부주에 위치하며, 국가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인구는 약 120만 명(광역권 포함 시 약 260만 명)으로 추정된다.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지진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티의 주요 관문이자 활동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두 번째로 큰 도시는 북부주의 주도인 카프아이티엥이다. 인구는 약 53만 명으로 추정되며, 식민지 시대에는 "앤틸리스의 파리"로 불릴 만큼 중요한 도시였다. 역사적인 건축물과 아름다운 해변으로 유명하며, 인근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시타델 라페리에르와 상수시 궁전이 있다.
그 외 주요 도시로는 고나이브(아르티보니트주의 주도, 아이티 독립 선언이 이루어진 역사적인 도시), 레카이(남부주의 주도, 농업 및 무역 중심지), 자크멜(남동부주의 주도, 독특한 건축 양식과 카니발로 유명) 등이 있다. 이들 도시는 각 지역의 행정, 경제, 문화 중심지로서 기능하며, 아이티의 다양한 지역적 특색을 보여준다.
7. 경제
아이티는 서반구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만성적인 빈곤, 낮은 경제 성장률, 높은 실업률, 그리고 극심한 소득 불균형에 시달리고 있다. 정치적 불안정, 부패, 취약한 기반 시설, 자연재해의 빈번한 발생, 그리고 낮은 교육 수준 등이 경제 발전의 주요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경제는 주로 농업, 경공업(특히 의류 제조업), 그리고 해외 거주 아이티인들의 송금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국제 사회의 원조 또한 아이티 경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원조의 효과성과 지속 가능성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7.1. 경제 구조와 현황
아이티의 1인당 GDP는 1,800달러이며, GDP는 199억 7천만 달러(2017년 추정)이다. 아이티는 아이티 구르드를 통화로 사용한다. 관광 산업에도 불구하고 아이티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이며, 부패, 정치적 불안정, 열악한 기반 시설, 의료 서비스 부족, 교육 부족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실업률이 높고 많은 아이티인들이 이민을 모색한다. 2010년 지진과 그에 따른 콜레라 발병 이후 무역이 급격히 감소했으며, 국가의 구매력 평가 GDP는 8%(미화 121억 5천만 달러에서 111억 8천만 달러로) 감소했다. 아이티는 2010년 유엔 인간 개발 지수에서 182개국 중 145위를 차지했으며, 인구의 57.3%가 HDI의 빈곤 측정 기준 중 적어도 세 가지에서 박탈당했다.
논란이 된 2000년 선거와 아리스티드 대통령의 통치에 대한 비난 이후, 아이티 정부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2001년에서 2004년 사이에 중단되었다. 2004년 아리스티드가 떠난 후 원조가 복원되었고, 브라질 육군이 유엔 아이티 안정화 임무 평화 유지 작전을 이끌었다. 거의 4년간의 경기 침체 후, 2005년 경제는 1.5% 성장했다. 2009년 9월, 아이티는 IMF와 세계 은행의 과다채무빈곤국 프로그램이 정한 조건을 충족하여 외채 탕감 자격을 얻었다.
2015년에는 정부 예산의 90% 이상이 베네수엘라 주도의 석유 동맹인 페트로카리브와의 협정에서 나왔다.
7.2. 대외 원조
아이티는 1990년부터 2003년까지 미국으로부터 미화 15억 달러를 포함하여 미화 40억 달러 이상의 원조를 받았다. 가장 큰 공여국은 미국이며, 그 뒤를 캐나다와 유럽 연합이 잇고 있다. 2010년 1월 지진 이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미화 11억 5천만 달러의 지원을 약속했다. 유럽 연합은 4억 유로(미화 6억 1천 6백만 달러) 이상을 약속했다. 이웃 국가인 도미니카 공화국 또한 아이티에 광범위한 인도적 지원을 제공했는데, 여기에는 공립 대학 자금 지원 및 건설, 국경 지역의 인적 자본, 무료 의료 서비스, 2010년 지진 이후의 물류 지원 등이 포함된다.
유엔은 2020년까지 지진 후 복구를 위해 미화 133억 4천만 달러가 책정되었다고 밝혔지만, 2010년 지진 발생 2년 후에는 그 금액의 절반 미만이 실제로 지급되었다. 2015년 현재 미국 정부는 미화 40억 달러를 할당했고, 30억 달러는 이미 지출되었으며, 나머지는 장기 프로젝트에 투입될 예정이다.
7.3. 무역
2015년 CIA 월드 팩트북에 따르면, 아이티의 주요 수입 상대국은 도미니카 공화국 35%, 미국 26.8%, 네덜란드령 안틸레스 8.7%, 중국 7%(2013년 추정)이다. 아이티의 주요 수출 상대국은 미국 83.5%(2013년 추정)이다. 아이티는 2011년에 30억 달러의 무역 적자를 기록했으며, 이는 GDP의 41%에 해당한다. 주요 수출품은 의류, 망고, 코코아, 커피 등이며, 주요 수입품은 식량, 연료, 기계류 등이다. 만성적인 무역 적자는 아이티 경제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이다.
7.4. 에너지
아이티는 에너지 수요의 상당 부분을 페트로카리브와의 석유 동맹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수력, 태양광 및 풍력 에너지가 가능한 지속 가능한 에너지원으로 탐색되었다.
2017년 현재 아메리카 대륙의 모든 국가 중에서 아이티는 가장 적은 에너지를 생산하고 있다. 국가의 4분의 1 미만이 전력 공급을 받고 있다. 에너지가 공급되는 아이티의 대부분 지역은 발전기로 전력을 공급받는다. 이러한 발전기는 종종 비싸고 많은 오염을 발생시킨다. 전기가 공급되는 지역은 매일 정전을 겪으며 일부 지역은 하루 12시간으로 전기 공급이 제한된다. 전기는 소수의 독립 회사인 Sogener, E-power 및 Haytrac에서 제공한다. 국가 전력망은 없다. 가장 일반적인 에너지원은 목탄과 함께 나무이다. 매년 약 4백만 미터톤의 목재 제품이 소비된다. 목탄 및 나무와 마찬가지로 석유도 중요한 에너지원이다. 아이티는 자체 연료를 생산할 수 없으므로 모든 연료를 수입한다. 매년 약 691,000톤의 석유가 국가로 수입된다.
2018년에는 24시간 전기 공급 프로젝트가 발표되었다. 이를 위해 포르토프랭스에만 236MW가 설치되어야 하며, 다른 모든 지역에는 추가로 75MW가 필요하다. 현재 인구의 27.5%만이 전기를 이용할 수 있다. 더욱이 국가 에너지 기관인 아이티 전력청(Ed'H)은 전체 전력 수요의 62%만 충족할 수 있다.
7.5. 주요 산업
아이티 경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산업은 농업과 봉제업이다. 농업은 여전히 많은 인구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지만, 낮은 생산성과 자연재해 취약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봉제업은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수출 중심 산업으로 성장했으나, 국제 경쟁 심화와 정치적 불안정의 영향을 받고 있다. 관광업은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독특한 문화유산으로 잠재력이 크지만, 치안 불안과 인프라 부족으로 충분히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와 재생 에너지 분야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으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7.5.1. 농업

아이티는 고급 향수, 에센셜 오일 및 향료 제조에 사용되는 뿌리 식물인 베티버의 세계 주요 생산국으로, 전 세계 공급량의 절반을 제공한다. 아이티인의 약 40~50%가 농업 부문에서 일한다. 그러나 1980년대 초 미국 농무부의 토양 조사에 따르면 토지의 11.3%만이 농작물 재배에 매우 적합했다. 아이티는 식량 수요의 절반과 쌀의 80%를 수입에 의존한다.
아이티는 망고, 카카오, 커피, 파파야, 마호가니 견과류, 시금치, 물냉이와 같은 작물을 수출한다. 농산물은 전체 수출의 6%를 차지한다. 또한 현지 농산물에는 옥수수, 콩, 카사바, 고구마, 땅콩, 피스타치오, 바나나, 기장, 비둘기콩, 사탕수수, 쌀, 수수, 목재 등이 포함된다. 낮은 생산성, 토양 침식, 기후 변화로 인한 잦은 자연재해는 아이티 농업의 주요 문제점이다. 식량 안보 확보와 농촌 경제 활성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7.5.2. 관광업

아이티의 관광 시장은 미개발 상태이며 정부는 이 부문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아이티는 백사장 해변, 산악 풍경, 연중 따뜻한 기후 등 다른 카리브해 목적지로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과장된 해외에서의 국가 이미지 악화는 이 부문의 발전을 저해했다. 2014년 아이티는 125만 명의 관광객(대부분 크루즈선 이용)을 유치했으며, 이 산업은 2014년에 미화 2억 달러를 창출했다.
2014년에는 고급 베스트 웨스턴 프리미어, 페티옹빌에 있는 옥시덴탈 호텔 앤 리조트의 5성급 로열 오아시스 호텔, 포르토프랭스 투르고 지역의 4성급 메리어트 호텔 등 여러 호텔이 문을 열었으며, 포르토프랭스, 레카이, 카프아이티엥, 자크멜 등지에서도 새로운 호텔 개발이 이루어졌다.
아이티의 풍부한 문화유산, 특히 부두교 문화와 독특한 예술, 음악은 관광객들에게 매력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역사 유적으로는 시타델 라페리에르, 상수시 궁전 등이 있으며, 아름다운 해변과 자연경관도 풍부하다. 그러나 만성적인 정치 불안, 높은 범죄율, 열악한 인프라(도로, 통신, 숙박 시설 등)는 관광 산업 발전에 큰 장애물이다. 정부는 관광객 유치를 위해 안전 개선, 인프라 확충, 국제 홍보 강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기까지는 많은 과제가 남아있다.
7.5.3. 카라콜 산업단지
2012년 10월 21일, 미셸 마르텔리 아이티 대통령,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 빌 클린턴, 리처드 브랜슨, 벤 스틸러, 숀 펜 등이 카리브해에서 가장 큰 600 acre 규모의 카라콜 산업단지 개장식에 참석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미화 3억 달러가 소요되었으며, 10메가와트 발전소, 정수 처리장, 노동자 주택이 포함되었다. 이 단지 계획은 2010년 지진 이전에 수립되었으나, 아이티 복구를 돕기 위한 미국 대외 원조 전략의 일환으로 신속하게 추진되었다. 이 단지는 아이티 북부 및 북동부 지역의 "마스터 플랜"의 일부였으며, 여기에는 대형 국제선 항공편을 수용할 수 있도록 카프아이티엥 국제공항 확장, 포르리베르테에 국제 항구 건설, 2012년 1월 12일 리모나드(카프아이티엥 인근)에 5천만 달러 규모의 루아 앙리 크리스토프 신규 대학 캠퍼스 개교 등이 포함되었다.
2012년, USAID는 이 단지가 완전히 개발되면 최대 65,0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이 단지의 유일한 주요 입주업체인 한국 의류 제조업체 세아상역은 예상했던 20,000개 중 5,000개의 정규직 일자리를 창출했으며, 5,000채의 주택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했지만 2014년까지 카라콜 인근에는 750채의 주택만 건설되었다.
10년 후, 이 단지는 클린턴 부부가 약속했던 변화를 가져오는 데 실패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미국은 항만 프로젝트에 수천만 달러를 투자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이 단지를 설립하기 위해 수백 가구의 소농, 총 약 3,500명이 토지에서 쫓겨나야 했다. 미국 정부회계감사원의 감사 결과 항만 프로젝트에는 "항만 계획, 건설 및 감독에 대한 기술 전문 지식을 갖춘 직원이 부족"했으며, USAID는 1970년대 이후 항구를 건설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15년 USAID 타당성 조사에서는 "다양한 기술적, 환경적, 경제적 이유로 새로운 항구가 실행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으며, 미국은 예상 비용의 대부분을 충당하기 위한 자금 중 미화 7,200만 달러가 부족했고, USAID가 유치하고자 했던 민간 기업들은 "아이티 북부에 새로운 항구를 건설하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7.6. 통화
아이티의 공식 통화는 아이티 구르드(HTG, 기호: G)이다. "아이티 달러"는 5구르드(goud)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사업 부문과 개인은 미국 달러도 사용하지만, 노점 시장에서는 구르드가 선호될 수 있다. 현지인들은 미국 달러를 "미국 달러"(dola ameriken) 또는 "US 달러"(oo-es로 발음)라고 부를 수 있다. 중앙은행은 아이티 공화국 은행(Banque de la République d'Haïti, BRH)이다. 구르드는 역사적으로 프랑스 프랑에 고정되었으나, 현재는 변동 환율제를 채택하고 있다. 높은 인플레이션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구르드의 가치는 불안정한 편이며, 일상생활에서는 미국 달러가 널리 통용되기도 한다.
7.7. 인프라
아이티의 사회 기반 시설은 전반적으로 매우 열악하며, 국가 발전의 주요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교통, 통신, 에너지, 상하수도 등 모든 분야에서 심각한 부족과 낙후를 겪고 있으며, 이는 잦은 자연재해와 만성적인 정치 불안정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고 있다.
7.7.1. 교통


아이티에는 국토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이어지는 두 개의 주요 고속도로가 있다. 북부 고속도로인 국도 1호선(Route Nationale No. 1)은 포르토프랭스에서 시작하여 몽트루이와 고나이브 해안 마을을 지나 북부 항구 카프아이티엥에서 끝난다. 남부 고속도로인 국도 2호선(Route Nationale No. 2)은 포르토프랭스를 레오간과 프티고아브를 거쳐 레카이와 연결한다. 아이티의 도로 상태는 일반적으로 열악하며, 많은 도로에 움푹 파인 곳이 많고 악천후에는 통행이 불가능해진다.
포르토프랭스 항구인 포르토프랭스 국제항은 아이티의 다른 12개 항구보다 등록된 선박이 더 많다. 항구 시설에는 크레인, 대형 부두, 창고 등이 있지만, 이 시설들은 상태가 좋지 않다. 항구는 과도하게 높은 항구 요금 때문에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생마르크 항은 현재 소비재의 주요 수입항이다.
과거 아이티는 철도 운송을 사용했지만, 철도 기반 시설은 사용 당시 제대로 유지 관리되지 않았고 복구 비용은 아이티 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2018년 도미니카 공화국 지역 개발 위원회는 양국 간 "트랜스-히스파니올라" 철도를 제안했다.
아이티의 주요 공항은 수도 포르토프랭스 인근 타바르에 위치한 투생 루베르튀르 국제공항으로, 대부분의 국제선 항공편을 처리한다. 카프아이티엥 국제공항 또한 국제선 일부를 담당한다. 자크멜, 제레미, 레카이, 포르드페 등에는 소규모 공항이 있으나 접근성이 낮다. 2013년에는 일라바슈에 국제공항을 개발할 계획이 발표되었다. 2024년 5월, 폭력 사태로 3개월간 폐쇄되었던 투생 루베르튀르 국제공항이 재개장하여 의약품 및 기본 물품 부족 완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탑탑(Tap tap)"은 화려하게 칠해진 버스나 픽업트럭으로, 합승 택시 역할을 한다. "탑탑"이라는 이름은 승객들이 내리고 싶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버스 차체를 두드리는 소리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임대 차량은 종종 개인 소유이며 광범위하게 장식되어 있다. 고정된 노선을 운행하며, 승객이 가득 찰 때까지 출발하지 않고, 승객은 보통 어느 지점에서나 내릴 수 있다. 장식은 전형적인 아이티 예술 형식이다.
7.7.2. 통신
아이티의 통신 인프라는 매우 취약하다. 유선 전화 보급률은 매우 낮으며, 대부분의 통신은 이동 통신에 의존한다. 인터넷 보급률 또한 카리브해 지역에서 가장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주로 도시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잦은 정전과 열악한 네트워크 품질은 통신 서비스의 안정성을 저해하는 주요 요인이다. 세계 경제 포럼의 네트워크 준비 지수(NRI)에서 아이티는 북미 국가 중 최하위를 기록했으며, 2014년 NRI 전체 순위에서는 148개국 중 143위를 차지하여 2013년 141위에서 하락했다. 정보통신기술(ICT) 발전은 경제 성장과 사회 발전에 필수적이지만, 아이티에서는 투자 부족과 인프라 미비로 인해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7.7.3. 상하수도
아이티의 안전한 식수 공급 및 위생 시설(상하수도) 보급률은 극히 낮다. 대다수의 가구가 깨끗한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지 못하고 있으며, 적절한 하수 처리 시설의 부재는 심각한 위생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는 수인성 질병(특히 콜레라)의 주요 원인이 되며, 국민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특히 도시 빈민가와 농촌 지역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2010년 대지진 이후 국제사회의 지원으로 일부 개선 노력이 있었으나, 여전히 많은 주민들이 오염된 물에 의존하고 있으며, 기본적인 위생 환경조차 갖추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상하수도 인프라 구축 및 개선은 아이티의 공중 보건 향상과 삶의 질 개선을 위한 시급한 과제이다.
8. 사회
아이티 사회는 극심한 빈곤, 높은 실업률, 심각한 소득 불평등, 만성적인 식량 부족, 열악한 주거 환경 등 다양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아프리카계 주민이 대다수를 이루며, 아이티 크레올어와 프랑스어가 공용어로 사용된다. 종교적으로는 로마 가톨릭과 부두교의 영향이 혼재하며, 교육 및 보건 시스템은 매우 취약하여 국민들의 삶의 질을 저해하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8.1. 인구


2018년 아이티의 인구는 약 10,788,000명으로 추정되었다. 2006년에는 인구의 절반이 20세 미만이었다. 1950년 첫 공식 인구 조사에서는 총인구가 310만 명이었다. 아이티는 약 350 명의 인구 밀도를 보이며, 인구는 도시 지역, 해안 평야, 계곡에 가장 집중되어 있다.
수백만 명의 아이티계 후손들이 미국, 도미니카 공화국, 쿠바, 캐나다(주로 몬트리올), 바하마, 프랑스, 프랑스령 안틸레스,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 자메이카, 푸에르토리코, 베네수엘라, 브라질, 수리남, 프랑스령 기아나 등 해외에 거주하고 있다. 2015년 미국에는 약 881,500명의 아이티계 미국인이 있었으며, 2007년 도미니카 공화국에는 약 800,000명이 있었다. 2013년 쿠바에는 300,000명, 2006년 캐나다에는 100,000명, 2010년 프랑스 본토에는 80,000명, 2009년 바하마에는 최대 80,000명이 있었다.
2018년 출생 시 기대 수명은 63.66세였다.
8.2. 민족 구성
아이티 인구의 약 95%가 아프리카계 흑인이며, 나머지 5%는 주로 뮬라토(백인과 흑인의 혼혈)와 소수의 유럽계, 레반트 아랍계 등으로 구성된다. 식민지 시대에 프랑스인과 아프리카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뮬라토는 전통적으로 아이티 사회에서 소수 엘리트 계층을 형성해 왔으며, 정치 및 경제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려왔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현대 아이티 사회의 복잡한 인종 및 계층 구조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때로는 사회적 긴장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흑인 인구 내에서도 피부색의 미묘한 차이에 따른 차별이 존재한다는 지적도 있다. 아랍계 이민자들은 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유입되어 상업에 종사하며 독자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8.3. 언어
아이티의 공용어는 아이티 크레올어와 프랑스어이다. 프랑스어는 주요 문자 언어이자 행정적으로 공인된 언어(언론의 주요 언어이기도 함)이며, 아이티인의 42%가 사용한다. 모든 교육받은 아이티인이 프랑스어를 구사하며, 대부분의 학교에서 교육 매체로 사용되고 비즈니스 부문에서도 사용된다. 결혼식, 졸업식, 교회 미사와 같은 의례 행사에서도 사용된다. 아이티는 프랑스어를 공식 언어로 지정한 아메리카 대륙의 두 독립 국가 중 하나이다(다른 하나는 캐나다). 다른 프랑스어 사용 지역은 모두 프랑스의 해외 데파르트망 또는 집합체이다(예: 프랑스령 기아나). 아이티 크레올어는 거의 모든 아이티 인구가 사용한다. 아이티 크레올어의 기본 언어인 프랑스어는 아이티 엘리트와 상류층 사이에서 인기가 있다. 프랑스어는 비즈니스 부문에서도 인기가 있으며, 미국의 영향으로 인해 훨씬 적은 정도로 영어가 사용된다. 스페인어는 아이티-도미니카 국경을 따라 거주하는 일부 아이티인들이 사용한다. 영어와 스페인어는 미국 및 다양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 추방된 아이티인들도 사용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아이티인의 약 90~95%는 아이티 크레올어와 프랑스어만 유창하게 구사하며, 절반 이상은 크레올어만 알고 있다.
현지에서 크레욜(Kreyòl)이라고 불리는 아이티 크레올어는 최근 표준화되었으며 거의 모든 인구가 사용한다. 프랑스어 기반 크리올 중 하나인 아이티 크레올어는 어휘의 대부분이 프랑스어에서 파생되었지만 문법은 일부 서아프리카 언어와 유사하다. 또한 타이노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의 영향도 받았다. 아이티 크레올어는 다른 프랑스 크레올어, 특히 앤틸리스 크리올 및 루이지애나 크리올 프랑스어 변종과 관련이 있다.
8.4. 종교
2018년 CIA 월드 팩트북에 따르면 아이티인의 55%가 가톨릭 신자이고 29%가 개신교 신자(침례교 15.4%, 오순절교 7.9%,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3%, 감리교 1.5%, 기타 0.7%)였다. 다른 자료에서는 개신교 인구가 더 높다고 하며, 2001년에는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했을 수도 있다고 시사한다. 퓨 리서치 센터의 2010년 자료에 따르면, 아이티의 종교 구성은 로마 가톨릭 56.8%, 개신교 29.6%, 무교 10.6%, 기타 종교 3%로 나타났다.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아이티는 전반적인 개신교 확장을 목격했으며, 이는 주로 복음주의와 오순절주의 성격이다.
아이티의 추기경 시블리 랑글루아는 가톨릭 교회의 전국 주교회의 의장이다.
서아프리카에 뿌리를 둔 쿠바나 브라질의 종교와 유사한 부두교는 인구의 2.1%가 공식적으로 신봉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티인의 50~80%가 부두교 신앙이나 관습의 일부 요소를, 특히 가톨릭과 혼합하여 종교 생활에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부두교의 식민지 기원을 반영하는데, 당시 노예들은 혼합주의라는 과정을 통해 전통적인 로아(lwa) 또는 영혼을 가톨릭 성인으로 위장해야 했다. 따라서 아이티에서 부두교 신자 수를 추정하기는 어려운데, 특히 역사적 박해와 대중 매체 및 문화에서의 왜곡된 표현, 그리고 성장하는 개신교 인구 일부 사이의 현대적 낙인찍기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두교는 2003년 아이티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부두교 문화와 신앙의 보편성을 반영하여, 아이티의 많은 가톨릭 신자와 개신교 신자들이 부두교를 악마 숭배라고 비난하면서도 그 영혼의 힘이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기독교 기도를 통해 개입이 필요한 "악"하고 "사탄적인" 적으로 간주된다. 개신교 신자들은 가톨릭의 성인 숭배를 우상숭배로 여기며,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종종 조각상과 기타 가톨릭 용품을 파괴하기도 한다.
아이티의 소수 종교로는 이슬람교, 바하이 신앙, 유대교, 불교 등이 있다.
8.5. 교육

아이티의 교육 제도는 프랑스 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다. 교육부의 책임하에 있는 고등 교육은 대학 및 기타 공립 및 사립 기관에서 제공한다.
초등학교의 80% 이상이 비정부 기구, 교회, 지역 사회 및 영리 사업자가 최소한의 정부 감독하에 사립으로 운영한다. 2013년 새천년 개발 목표 보고서에 따르면, 아이티는 초등 교육 순 취학률을 1993년 47%에서 2011년 88%로 꾸준히 높여 남녀 학생의 교육 참여 동등성을 달성했다. 푸드 포 더 푸어와 아이티 보건 재단을 포함한 자선 단체는 어린이를 위한 학교를 짓고 필요한 학용품을 제공하고 있다.
2015년 월드 팩트북에 따르면 아이티의 식자율은 60.7%이다.
많은 개혁가들이 아이티의 모든 초등학생을 위한 무료 공립 보편 교육 시스템 창설을 주장해 왔다. 미주 개발 은행은 정부가 적절하게 자금이 지원되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최소 미화 30억 달러가 필요할 것으로 추정한다.
중등학교를 성공적으로 졸업하면 학생들은 고등 교육으로 진학할 수 있다. 아이티의 고등 교육 기관에는 아이티 대학교가 있다. 또한 아이티 대학교와 해외 모두에서 의과대학과 법과대학이 제공된다. 브라운 대학교는 소아과 의료 커리큘럼을 조정하기 위해 아이티의 생 다미앵 병원과 협력하고 있다.
6세부터 11세까지의 초등 교육이 무상 의무 교육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2003년 추계에 따르면 15세 이상 국민의 문해율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낮은 52.9%이다. 국가 재정 부족으로 공교육 시스템이 매우 취약하며, 사립학교 의존도가 높다. 그러나 높은 학비로 인해 많은 아동이 교육 기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교사 부족, 교육 시설 미비, 교재 부족 등도 심각한 문제이다. 2010년 대지진으로 많은 학교 건물이 파괴되어 교육 환경은 더욱 악화되었다. 고등 교육기관으로는 아이티 대학교 등이 있으나, 교육의 질과 연구 환경은 열악한 편이다.
8.6. 보건
2012년 현재 아이티 10세 미만 어린이의 60%가 예방 접종을 받았으며, 다른 나라의 93~95%에 비해 낮다. 최근에는 특정 질병(이 경우 홍역과 풍진)에 대해 대상 인구의 91%까지 예방 접종을 주장하는 대규모 예방 접종 캠페인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티 병원으로 갈 교통수단이나 접근성이 없다.
세계 보건 기구는 설사병, HIV/AIDS, 수막염, 호흡기 감염을 아이티의 일반적인 사망 원인으로 꼽는다. 아이티 어린이의 90%가 수인성 질환과 장내 기생충으로 고통받고 있다. HIV 감염은 아이티 인구의 1.71%(2015년 추정)에서 발견된다. 2017년 보고서에 따르면, 아이티의 결핵(TB) 발병률은 10만 명당 약 200건으로 이 지역에서 가장 높다. 매년 약 3만 명의 아이티인이 말라리아에 걸린다.
아이티 가구의 약 75%가 수돗물이 부족하다. 안전하지 않은 물과 부적절한 주택 및 비위생적인 생활 환경은 전염병 발생률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의료 인력이 만성적으로 부족하고 병원에는 자원이 부족하며, 이러한 상황은 2010년 1월 지진 이후 명확하게 드러났다. 2019년 아이티의 영아 사망률은 출생아 1,000명당 48.2명으로, 미국의 1,000명당 5.6명과 비교된다.
2010년 지진 이후, 파트너스 인 헬스는 세계에서 가장 큰 태양광 발전 병원인 미르발레 대학 병원을 설립했다.
아이티의 보건 시스템은 서반구에서 가장 열악한 수준이다. 만성적인 영양실조, 높은 영유아 사망률, 낮은 평균 수명, 전염병 창궐(특히 콜레라, HIV/AIDS, 결핵, 말라리아) 등이 주요 문제로 지적된다. 의료 시설과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며, 특히 농촌 지역의 의료 접근성은 매우 낮다. 안전한 식수와 위생 시설 부족은 수인성 질병 확산의 주요 원인이다. 2010년 대지진과 이후 콜레라 유행은 이미 취약했던 보건 시스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국제사회의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근본적인 개선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8.7. 사회 문제
아이티 사회는 극심한 빈곤, 심각한 소득 불평등, 높은 실업률, 만성적인 식량 부족(기아), 열악한 주거 환경 등 다층적인 사회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정치적 불안정, 부패, 잦은 자연재해, 취약한 국가 시스템과 맞물려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갱단 폭력의 심화는 사회 불안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으며, 국민들의 기본적인 안전과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8.7.1. 빈곤과 소득

아이티는 숙련 노동력 부족, 광범위한 실업 및 불완전 고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노동력의 대부분은 비공식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다. 인구의 4분의 3이 하루 미화 2달러 이하로 생활한다.
해외 거주 아이티인들의 송금은 주요 외화 수입원으로, 2012년 기준 GDP의 5분의 1(20%)에 해당하며 수출 수입의 5배 이상이다. 2004년에는 아이티 대학 졸업자의 80% 이상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었다.
때때로 자녀를 돌볼 수 없는 가족들은 그들을 더 부유한 가정에 레스타베크 또는 가정부로 보낼 수 있다. 그 대가로 가족은 아이가 교육을 받고 음식과 거처를 제공받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제도는 학대의 소지가 있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어 일부에서는 아동 노예제와 유사하다고 비판한다.
아이티는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국가 중 하나로, 인구의 대다수가 절대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 소득 불평등 또한 극심하여, 소수의 부유층이 국가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대다수 국민은 기본적인 생계유지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만성적인 식량 부족과 기아는 일상적인 문제이며, 특히 어린이들의 영양실조는 심각한 수준이다. 이러한 빈곤은 교육, 보건, 주거 등 삶의 모든 영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사회 불안과 범죄 증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빈곤 완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지원과 정부의 노력이 지속되고 있지만, 구조적인 문제 해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8.7.2. 주거
농촌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골함석 지붕을 얹은 나무 오두막에 사는 경우가 많다. 변소는 오두막 뒤편에 있다. 포르토프랭스에서는 화려한 판자촌이 도심을 둘러싸고 산비탈까지 이어진다.
중산층과 상류층은 교외나 대도시 중심부의 아파트에 거주하며, 도시 계획이 되어 있는 곳이다. 그들이 사는 집 중 다수는 금속 못, 철조망, 깨진 유리, 때로는 이 세 가지 모두가 박힌 벽 뒤에 위치한 작은 요새와 같다. 전기 공급망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집에는 예비 발전기가 있다. 일부는 옥상에 물 저장 탱크까지 갖추고 있다.
아이티의 주거 환경은 매우 열악하며, 특히 도시 빈민가의 상황은 심각하다. 과밀하고 비위생적인 판자촌이 무질서하게 형성되어 있으며, 기본적인 상하수도 시설이나 전기 공급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2010년 대지진으로 인해 수많은 주택이 파괴되었고, 이재민들은 임시 거처나 난민촌에서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주택 재건 사업은 더디게 진행되고 있으며, 건축 자재 부족과 높은 비용, 토지 소유권 문제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한, 허리케인 등 잦은 자연재해는 주거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다. 안전하고 적절한 주거 환경 확보는 아이티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시급한 과제이다.
9. 문화

아이티는 아프리카, 프랑스, 그리고 토착 타이노 문화가 혼합된 독특하고 풍부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음악, 미술, 문학, 종교, 요리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아이티인들의 삶과 정신세계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특히 부두교는 아이티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예술과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9.1. 예술
아이티 미술은 특히 회화와 조각을 통해 독특하게 표현된다. 선명한 색채, 순박한 시각, 교활한 유머가 아이티 미술의 특징이다. 아이티 미술에서 자주 다루는 주제는 크고 다양한 음식, 풍경, 시장 활동, 정글 동물, 의식, 춤, 신들이다. 깊은 역사와 강력한 아프리카 유대감의 결과로, 상징은 아이티 사회 내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많은 예술가들이 카프아이티엥파(도시의 일상생활을 묘사), 자크멜파(해안 도시의 가파른 산과 만을 반영), 또는 생솔레이파(추상화된 인간 형태를 특징으로 하며 부두 상징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음)와 같은 회화 '학파'로 모인다.
1920년대에는 아이티 문화와 아프리카 뿌리에서 영감을 받은 표현주의 회화로 국제적인 찬사를 받은 토착주의(indigéniste)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의 주목할 만한 화가로는 엑토르 이폴리트, 필로메 오뱅, 프레페트 뒤포 등이 있다. 최근의 주목할 만한 예술가로는 에두아르 뒤발카리에, 프란츠 제피랭, 르루아 엑실, 프로스페르 피에르루이, 루이지안 생 플뢰랑 등이 있다. 조각 또한 아이티에서 행해지며, 이 분야의 유명 예술가로는 조르주 리오토와 세르주 졸리모가 있다.
9.2. 음악과 춤
아이티 음악은 이곳에 정착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광범위한 영향을 결합한다. 이는 프랑스, 아프리카, 스페인 요소 및 히스파니올라섬에 거주했던 다른 민족들, 그리고 소수의 토착 타이노 영향을 반영한다. 아이티 문화 고유의 음악 스타일에는 부두교 의식 전통에서 파생된 음악, 라라 행진 음악, 트루바두 발라드, 미니재즈 록 밴드, 라신 운동, 힙합 크레욜, 메렝게, 그리고 콩파가 포함된다. 젊은이들은 디스코라고 불리는 나이트클럽에서 파티에 참석하고, 발(무도회)에 참석한다.
콩파(konpa)는 아프리카 리듬과 유럽 무도회 춤에서 발생하여 아이티의 부르주아 문화와 혼합된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음악이다. 이는 메렝게를 기본 리듬으로 하는 세련된 음악이다. 아이티는 1937년 재즈 기냐르가 비상업적으로 녹음될 때까지 녹음된 음악이 없었다.
9.3. 문학
아이티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시, 소설, 희곡을 꾸준히 배출해 온 문학적 국가이다. 프랑스 식민 경험은 프랑스어를 문화와 명성의 매개체로 확립시켰고, 그 이후로 프랑스어는 문학계와 문학 생산을 지배해 왔다. 그러나 18세기부터 아이티 크레올어로 글을 쓰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있었다. 크레올어가 공식 언어로 인정되면서 크레올어로 된 소설, 시, 희곡이 확대되었다. 1975년, 프랑케티엔은 전적으로 아이티 크레올어로 쓰인 최초의 소설 데자피(Dezafi)를 출판하며 프랑스 소설 전통을 처음으로 깨뜨렸다. 다른 유명한 아이티 작가로는 장 프라이스마르스, 자크 루맹, 자크 스테판 알렉시스, 마리 비외쇼베, 피에르 클리탕드르, 르네 데페스트르, 에드위지 당티카, 리오넬 트루요, 다니 라페리에르 등이 있다.
9.4. 영화
아이티는 작지만 성장하는 영화 산업을 가지고 있다. 주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분야에서 활동하는 잘 알려진 감독으로는 라울 펙과 아르놀트 안토냉이 있다. 극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으로는 파트리샤 브누아, 윌켄슨 브뤼나, 리샤르 세네칼 등이 있다. 이들은 아이티의 사회, 문화, 역사적 문제들을 다루며 국제 영화제에서 주목받기도 한다. 하지만 제작 환경과 배급망이 열악하여 산업 규모는 아직 작은 편이다.
9.5. 요리
아이티는 크리올 요리(케이준 요리와 관련됨)와 수프 주무로 유명하다. 아이티 요리는 아프리카, 프랑스, 타이노 원주민, 스페인, 그리고 카리브해 지역의 다양한 영향을 받아 독특한 풍미를 자랑한다. 주요 식재료로는 쌀, 콩, 옥수수, 카사바, 플랜틴, 고구마, 돼지고기, 닭고기, 해산물 등이 사용되며, 고추, 마늘, 양파, 허브 등 다양한 향신료를 활용하여 맛을 낸다. 대표적인 요리로는 독립 기념일에 먹는 호박 수프인 '수프 주무'(soup joumou), 쌀과 콩을 함께 지은 '디리 콜레 아 프와'(diri kole ak pwa), 돼지고기 튀김 요리인 '그리오'(griot), 플랜틴 튀김인 '바난 페제'(bannann peze) 등이 있다. 매콤하고 풍미가 강한 것이 특징이며, 다양한 열대 과일도 즐겨 먹는다.
9.6. 건축

아이티의 건축은 식민지 시대의 유럽 양식, 특히 프랑스풍 건축과 아프리카 및 토착 문화의 요소가 혼합된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대표적인 역사 건축물로는 198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상수시 궁전과 시타델 라페리에르가 있다. 이들은 아이티 북부 국립 역사 공원 내에 위치하며 19세기 초 아이티 독립 직후에 건설된 건축물들로, 아이티의 자주성과 저항 정신을 상징한다. 시타델 라페리에르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요새로, 일부 아이티인들은 이를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기도 한다.
국립 문화유산 보호 연구소(ISPAN)는 33개의 역사적 기념물과 카프아이티엥의 역사 지구를 보존하고 있다. 식민 도시인 자크멜은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되었으나 2010년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전통 가옥은 목조 구조에 화려한 색채의 장식이 특징이며, 도시 지역에서는 현대적인 콘크리트 건물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잦은 자연재해와 경제난으로 인해 많은 건축물이 제대로 유지 보수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9.7. 박물관
아이티에는 국가의 역사, 예술, 문화를 조명하는 여러 박물관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은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위치한 아이티 국립 판테온 박물관(MUPANAH)이다. MUPANAH는 아이티의 역사적 영웅들을 기리고,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아이티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과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가장 큰 배였던 산타 마리아호의 닻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그 외에도 아이티 미술을 전문으로 하는 미술관들과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다루는 소규모 박물관들이 존재하지만, 전반적으로 박물관 시설과 유물 보존 환경은 열악한 편이다.
9.8. 민속과 신화
아이티는 풍부한 민속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그 대부분은 아이티 부두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부두교는 서아프리카의 종교적 신앙과 관습이 카리브해 지역의 토착 문화 및 가톨릭 신앙과 혼합되어 형성된 독특한 종교 체계이다. 부두교에는 다양한 로아(loa) 또는 영혼(lwa)에 대한 믿음이 있으며, 이들은 인간사와 자연 현상에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진다.
좀비에 대한 믿음 또한 일반적이다. 아이티 민속에서 좀비는 주술사에 의해 죽음에서 되살아나 의지 없이 조종당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 외 민속적인 존재로는 루가루(loup-garou, 늑대인간 또는 변신하는 존재) 등이 있다. 이러한 민간 신앙, 구전 설화, 신화적 존재들은 아이티인들의 세계관과 전통적인 의례에 깊숙이 관여하며, 아이티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9.9. 국경일과 축제
아이티의 주요 국경일은 1월 1일 독립기념일로, 1804년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날을 기념한다. 또 다른 중요한 날은 1월 2일 '조상의 날'(Jour des Aïeux)이다.
매년 열리는 가장 대표적인 문화 축제는 아이티 카니발이다. 사순절 전에 열리는 이 카니발은 화려한 의상, 음악, 춤, 퍼레이드로 유명하며, 아이티 전역에서 열리지만 특히 자크멜과 포르토프랭스의 카니발이 규모가 크고 다채롭다. 2010년 이후 정부는 매년 다른 도시에서 전국 카니발을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자크멜 카니발은 전국 카니발보다 일주일 앞서 2월이나 3월에 열린다.
라라(Rara)는 부활절 전에 열리는 축제로, 주로 농촌 지역에서 행해진다. 전통 악기 연주와 함께 행진하며 춤을 추는 것이 특징이며, 부두교와 관련된 요소도 많이 포함하고 있다. 라라 축제는 독특한 카니발 음악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국경일과 축제는 아이티인들의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고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9.10. 스포츠

축구는 아이티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수백 개의 소규모 클럽이 지역 수준에서 경쟁하고 있다. 농구와 야구의 인기도 높아지고 있다. 실비오 카토르 경기장은 포르토프랭스에 있는 다목적 경기장으로, 현재 주로 축구 경기에 사용된다. 1974년, 아이티 축구 국가대표팀은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두 번째 카리브해 팀이었다. 국가대표팀은 2007년 카리브컵에서 우승했다.
아이티는 1900년부터 올림픽에 참가해 왔으며 여러 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아이티 축구선수 조 개천스는 1950년 FIFA 월드컵에서 미국 대표팀으로 출전하여 잉글랜드를 1-0으로 꺾는 결승골을 기록했다.
10. 대외 관계
아이티는 유엔, CARICOM, 라틴 아메리카·카리브 국가 공동체, 국제 통화 기금, 미주 기구, 프랑코포니, OPANAL, 세계 무역 기구 등 광범위한 국제 및 지역기구의 회원국이다.
2012년 2월, 아이티는 아프리카 연합(AU)의 참관국 지위를 정회원국 지위로 격상시키려 할 것이라고 밝혔다. AU는 2013년 6월 정상회담에서 아이티의 지위를 참관국에서 준회원국으로 격상시킬 계획이라고 보도되었으나, 2016년 5월까지도 신청서가 비준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아이티는 주변국 및 강대국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어왔다. 독립 초기에는 국제 사회로부터 고립되었으며, 특히 프랑스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받아 국가 경제에 큰 부담을 안았다. 미국과는 지리적으로 가깝고 경제적으로 의존도가 높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으나, 미국의 군사 점령(1915년~1934년)과 정치적 개입 등으로 인해 갈등을 겪기도 했다. 이웃 국가인 도미니카 공화국과는 국경 문제, 이민 문제 등으로 인해 긴장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 쿠바와는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 관계가 소원해졌으나, 최근 의료 지원 등을 통해 교류가 재개되고 있다.
대한민국과는 1962년 수교하였으며, 아이티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당시 대한민국은 국제구조단을 파견하고 경제적 지원을 제공했다. 나배사섬에 대한 영유권은 현재 미국과 분쟁 중이다. 아이티는 1950년대부터 중화민국과 수교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외교 관계는 없다.
10.1. 주요 국가와의 관계
아이티는 역사적으로 미국, 프랑스, 캐나다 등과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미국은 아이티의 최대 교역 상대국이자 주요 원조 공여국이며, 정치·경제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프랑스는 과거 식민 모국으로서 문화적 유대감을 공유하고 있으나, 독립 과정에서의 갈등과 배상금 문제로 인해 복잡한 관계를 이어왔다. 캐나다는 프랑스어권 국가로서 아이티와 언어적·문화적 공통점을 바탕으로 꾸준한 교류와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이웃 국가인 도미니카 공화국과는 히스파니올라섬을 공유하며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역사적 갈등과 이민 문제 등으로 인해 긴장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 쿠바와는 지리적으로 가까우며, 특히 의료 분야에서의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대한민국과는 1962년 9월 22일 수교하였다. 아이티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했으며, 대한민국은 2010년 아이티 지진 당시 긴급 구조 및 구호 지원을 제공한 바 있다. 한국 전쟁 당시 아이티는 대한민국에 자금을 지원한 적이 있다. 현재 주도미니카 공화국 대한민국 대사관이 아이티를 겸임하고 있으며, 아이티는 주일 아이티 대사관을 통해 대한민국 관련 업무를 보고 있다.
기타 아시아 국가들과의 교류는 활발하지 않으나, 대만(중화민국)과는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