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시메온 보리소프 삭스코부르크고츠키(Симеон Борисов Сакскобургготски불가리아어, Simeon Borisov Saxe-Coburg-Gotha영어)는 1937년 6월 16일 불가리아 왕국 소피아에서 태어난 불가리아의 정치인이자 왕족이다. 그는 1943년부터 1946년까지 불가리아 왕국의 마지막 차르인 시메온 2세로 군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여섯 살의 나이로 즉위한 후 1946년 국민투표로 군주제가 폐지되면서 망명길에 올랐다.
공산주의 붕괴 이후 1996년 불가리아로 귀국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2001년 자신이 창당한 정당인 안정과 진보를 위한 국민운동(NMSP)의 총선 승리를 이끌며 불가리아의 총리로 취임하여 2005년까지 재임했다. 왕위와 총리직을 모두 역임한 그는 역사상 극히 드문 인물 중 한 명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국가원수였던 인물 중 제14대 달라이 라마와 함께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단 두 명의 인물 중 한 명이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NATO 가입과 EU 통합 등 불가리아의 서방 세계 편입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재산 환수 문제 등으로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2. 초기 생애 및 왕족으로서의 삶
시메온 삭스코부르크고츠키는 불가리아 왕국의 마지막 차르로서 유년기에 왕위를 계승하고 망명 생활을 겪으며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2.1. 출생 및 어린 시절

시메온은 1937년 6월 16일 불가리아 왕국 수도 소피아에 위치한 차르의 궁전에서 보리스 3세와 조반나 왕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여동생으로는 마리야 루이자 공주가 있다. 태국어 자료에 따르면, 시메온은 태어날 당시 유럽의 여러 왕실과 연관되어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 조반나 왕비는 사보이아 왕가 출신으로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몬테네그로의 엘레나 왕비의 다섯째 자녀이자 넷째 딸이었다. 시메온의 외가는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 왕가의 분가로, 벨기에와 영국 왕실과도 동족이다.
정교회 신자인 시메온의 세례를 위해 보리스 3세는 요르단강에서 물을 가져오도록 공군 장교를 파견하기도 했다. 불가리아 왕실 자료에 따르면 시메온은 다섯 살 무렵 마리 루이자 누나와 놀던 중, 한 왕실 경호원이 "폐하, 국왕이 서거하셨습니다. 국왕 만세!"라고 말하며 자신을 "Your Majesty"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아버지의 죽음과 자신의 즉위를 인지했다고 회고했다.

2.2. 즉위와 섭정
1943년 8월 28일, 아버지 보리스 3세가 아돌프 히틀러와의 회담을 마치고 불가리아로 돌아온 직후 의문사하자, 시메온은 불과 여섯 살의 나이로 차르 시메온 2세로 즉위했다.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왕권은 섭정단에 의해 행사되었다. 초기 섭정단은 시메온의 삼촌인 키릴 프레슬라프 공작과 니콜라 미호프 장군, 그리고 당시 총리였던 보그단 필로프로 구성되었다.
보리스 3세 치하에서 불가리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추축국에 가입했으나 소련과는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4년 9월 5일 이오시프 스탈린이 불가리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사흘 뒤 붉은 군대가 별다른 저항 없이 불가리아로 진입했다. 1944년 9월 9일, 소련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가 발생하여 키릴 공작을 비롯한 기존 섭정단이 축출되고 체포되었다. 이들 세 명의 섭정은 마지막 세 정부의 모든 구성원, 국회의원, 군 수장, 그리고 저명한 언론인들과 함께 1947년 2월 공산주의 정권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후 토도르 파블로프, 베네린 가네프, 츠베트코 보보셰프스키 등 세 명의 공산주의자가 새로운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2.3. 망명

1946년 9월 15일, 소련군이 주둔한 상황에서 군주제 폐지 및 공화국 선포를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68년간 이어진 군주제를 종식하는 안에 95.6%가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이 국민투표는 차르가 소집한 대국민의회만이 국가 형태 변경을 승인할 수 있다는 타르노보 헌법을 위반한 것이었다.
1946년 9월 16일, 시메온 2세와 그의 어머니 조반나 왕비, 여동생 마리야 루이자 공주는 불가리아에서 추방되었다. 이들은 상당량의 동산을 가지고 떠날 수 있었다. 왕실 가족은 처음으로 이탈리아의 전 국왕이자 조반나의 아버지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망명 중이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향했다. 시메온은 그곳의 빅토리아 칼리지에서 알바니아의 왕세자 레카와 함께 학업을 이어나갔다. 태국어 자료에 따르면, 그는 당시 요르단의 국왕이 된 후세인 빈 탈랄과도 동급생이었다고 한다. 또한 초기 망명 생활은 매우 어려워 가족당 200 USD 정도의 재산만 가지고 있었으나, 조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사망 후 조반나에게 상속된 유산으로 생활이 나아졌다고 한다.
1951년 7월,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 정권하에 있던 스페인이 왕실 가족에게 망명을 허용하면서 그들은 스페인으로 이주했다. 1954년, 시메온은 파블로스 국왕과 프레데리키 왕비가 주최한 '왕들의 크루즈'에 참여했는데, 이 행사에는 유럽 전역에서 100명이 넘는 왕족들이 참석했다.
3. 교육 및 개인적인 삶
망명 기간 동안 시메온은 학업과 사업 활동에 전념하며 개인적인 삶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3.1. 교육 및 군사 훈련
스페인 마드리드로 이주한 시메온은 리세 프랑세 드 마드리드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1955년 6월 16일, 그는 18세가 되자 타르노보 헌법에 따라 불가리아 국민에게 선언문을 발표하며 자신이 불가리아의 차르임을 주장하고, 불가리아 전체의 차르가 되어 당시 불가리아를 통치하던 공산주의 정권의 원칙에 반대하는 원칙을 따르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그는 불가리아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어떠한 문서에도 서명한 적이 없으므로 자신이 여전히 불가리아 국민의 국왕임을 천명했다.
1958년, 그는 미국의 밸리 포지 군사학교 및 대학에 입학하여 "사관생도 릴스키(Cadet Rylski) No. 6883"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소위로 졸업했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스페인에서 다시 법학과 경영학을 공부했다.
3.2. 사업 경력
교육을 마친 후 시메온은 사업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그는 프랑스 국방 및 전자 기업인 톰슨 SA의 스페인 지사 회장으로 13년간 재직했다. 또한 은행, 호텔, 전자, 케이터링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고문으로 활동했다. 태국어 자료에 따르면 그는 망명 중 자신의 직위를 통해 망명 정부를 수립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3.3. 결혼과 자녀
1962년 1월 21일, 시메온은 스페인 귀족이자 코르티나 후작의 딸인 마르가리타 고메스-아세보 이 세후엘라와 결혼했다. 태국어 자료에 따르면 시메온이 정교회 신자이고 마르가리타가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결혼 과정이 순탄치 않았으며, 시메온은 교황을 세 차례나 알현하여 마침내 양측 교회에서 모두 결혼식을 올리는 조건으로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두 부부는 네 아들(카르담, 키릴, 쿠브라트, 콘스탄틴)과 한 딸(칼리나) 등 총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들 모두는 스페인 사람과 결혼했다. 시메온의 아들들은 모두 불가리아 차르의 이름을 물려받았으며, 딸 또한 불가리아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11명의 손주들 중 오직 4명(보리스, 소피아, 미르코, 시메온)만이 불가리아 이름을 가지고 있다.
- 카르담 (1962년~2015년): 미리암 웅그리아 이 로페스와 결혼하여 두 아들 보리스와 벨트란을 두었다.
- 키릴 (1964년 출생): 마리아 델 로사리오 나달 이 푸스테르 데 푸이그도르필라와 결혼하여 세 자녀(마팔다, 올림피아, 타실로)를 두었다.
- 쿠브라트 (1965년 출생): 카를라 마리아 데 라 솔레다드 로요-빌라노바 이 우레스타라수와 결혼하여 세 아들(미르코, 루카스, 티르소)을 두었다.
- 콘스탄틴-아센 (1967년 출생): 마리아 가르시아 데 라 라시야 이 고르타사르와 결혼하여 쌍둥이 움베르토와 소피아를 두었다.
- 칼리나 (1972년 출생): 스페인 탐험가 키틴 무뇨스와 결혼하여 아들 시메온 하산 무뇨스를 두었다.
그는 독실한 불가리아 정교회 신자이다.
4. 불가리아 복귀 및 정치 활동
공산주의 붕괴 후 시메온은 불가리아로 돌아와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며, 총리로서 불가리아의 민주주의와 서방 통합에 기여했다.
4.1. 불가리아 귀국
1990년, 동유럽 혁명으로 공산주의가 몰락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시메온은 새로운 불가리아 여권을 발급받았다. 1996년, 군주제 폐지 50년 만에 시메온은 불가리아로 귀국했고, 많은 곳에서 환영 인파를 만났다. 당시 그는 어떠한 정치적 발표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고, 1990년 TV 인터뷰에서 불가리아에 대한 어떠한 물질적 재산권 주장도 없다고 부인한 바 있다. 태국어 자료에 따르면 대중들은 "우리의 차르를 원한다!"고 외치며 환영했다고 한다. 그러나 총리 재임 이후, 시메온이 1945년 이전 군주제 하에 있던 불가리아의 광대한 지역이나 부동산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이러한 사회적 호의적인 감정은 점차 사라지기도 했다. 그는 브라나 궁전과 차르스카 비스트리차 궁전을 포함한 많은 재산을 돌려받았으나, 일부는 국민의 자산으로 정부에 반환했다.
4.2. 안정 진보 국민운동(NMSP) 창당
2001년, 시메온은 자신의 성을 "삭스코부르크고츠키"로 사용하여 불가리아로 돌아와 "개혁과 정치적 통합"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정당인 안정 진보 국민운동 (National Movement Simeon II, 이후 NMSP로 개명)을 창당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불가리아 국민들이 800일 안에 자신의 정부가 가져올 실질적인 긍정적 효과를 느끼고 훨씬 더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릴 것이라고 약속했다.
4.3. 불가리아 총리 재임

NMSP는 2001년 6월 17일 실시된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의회 240석 중 120석을 차지하며 기존의 두 주요 정당을 물리쳤다. 시메온은 7월 24일 불가리아의 총리로 취임했으며, 권리와 자유 운동 (MRF)이라는 소수 민족 터키계 정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했다. 그는 자신의 정부에 테크노크라트와 서구 교육을 받은 경제 전문가들을 주로 기용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그는 2002년 평화의 길 재단으로부터 '평화의 길 상(Path to Peace Award)'을 수상했다. 불가리아는 NATO에 가입했으며, 미국 주도의 이라크 전쟁 연합군에 참여했다. 이 시기 불가리아는 페터르 스토야노프와 게오르기 퍼르바노프 대통령의 임기 기간에 해당한다.
4.4. 총리 퇴임 이후
2005년 총선에서 시메온의 정당은 2위를 차지했으며, 불가리아 사회당이 이끄는 대연정 정부에 참여했다. 시메온은 연합 협의회 의장이라는 비공식적인 의례직을 맡았다. 2009년 총선에서 NMSP가 의회 의석을 하나도 얻지 못하자, 그는 7월 6일 NMSP 당수직에서도 사임하며 정계를 은퇴했다.
5. 사상 및 영향력
시메온은 불가리아 왕정 복고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피하면서도, 그의 정치 활동은 불가리아의 민주주의와 사회 개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5.1. 왕정 복고에 대한 견해
시메온은 불가리아 왕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포기하지 않았지만, 불가리아 정계에서 왕정 복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일관되게 밝히지 않았다. 망명 기간 동안에는 자신의 정치적 성명에서 "불가리아인의 차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가리아 귀국 후 총리직에 취임하면서 공화국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선서했다. 이는 그의 당명(시메온 2세 국민 운동)이 그의 왕위를 지칭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가리아 군주제 복원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2015년 5월 1일, 불가리아 총대주교청은 웹사이트를 통해 불가리아 정교회의 모든 공적 및 사적 예배에서 시메온 삭스코부르크고츠키를 불가리아의 차르로 칭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로센 플레브넬리에프 당시 불가리아 대통령은 "불가리아의 기독교인들을 군주제 지지자와 공화제 지지자로 분열시킬 우려가 있다"며 불가리아 정교회의 결정에 대한 재고를 요청했다. 시메온 본인도 2015년 5월 6일 불가리아 총대주교에게 서한을 보내 "불가리아 국왕 시메온 2세"를 위한 기도를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5.2. 정치적 영향력 및 평가
시메온의 불가리아 정계 복귀는 그가 서방 세계에서 쌓은 사업 경력과 '전 국왕'이라는 상징적인 지위 덕분에 당시 경제 개혁에 어려움을 겪던 불가리아 국민들에게 큰 기대를 안겨주었다. 그가 총리로서 추진한 NATO 가입과 EU 통합 정책은 불가리아를 유럽의 주류 정치 및 경제 체제로 편입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불가리아의 민주주의 발전과 사회 안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그의 정치적 행보는 동유럽 혁명 이후 왕위를 잃었던 다른 전 왕족들에게도 고국 정계 복귀에 대한 희망을 주었지만, 시메온 2세처럼 총리직에 오르는 등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시메온의 사례가 매우 이례적이며, 그의 개인적인 자질과 불가리아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이 결합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의 망명 중 재산권 주장을 부인했으나 총리 재임 이후 재산 환수 움직임을 보인 점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25년 1월 15일 기준으로 시메온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국가원수였던 인물 중 제14대 달라이 라마와 더불어 생존해 있는 단 두 명의 인물 중 한 명이다. 이는 그가 정부 내에서 주로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긴 생애와 독특한 경력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6. 명예 및 칭호
시메온은 왕족이자 정치인으로서 다양한 국내외 훈장과 명예 칭호를 받았다.
6.1. 왕족으로서의 칭호 및 훈장
- 1937년 6월 16일 - 1943년 8월 28일: 타르노보 공작 전하
- 1943년 8월 28일 - 1946년 9월 15일: 불가리아인의 차르 폐하
- 1946년 9월 15일 - 현재: 불가리아인의 차르 시메온 2세 폐하 (명목상 칭호 및 예우)
그는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 왕가의 수장으로서 다음과 같은 왕조 훈장의 기사 및 대수장을 역임했다.
- 키릴과 메토디우스 성인 훈장 대수장
- 알렉산더 성인 왕실 훈장 대수장
- 용맹 왕실 훈장 대수장
- 시민 공로 왕실 훈장 대수장
- 군사 공로 왕실 훈장 대수장
- 차르 시메온 2세의 성인식 기념 메달
6.2. 정치인으로서의 훈장 및 표창
총리 재임 기간 및 정치 활동과 관련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국내외 훈장 및 표창을 받았다.
불가리아 국내 훈장:
- 스타라 플라니나 훈장 대십자장
- 불가리아 국방부의 정의 훈장 목걸이
- 불가리아 국가위병부대 명예 학위
- 불가리아 치탈리슈테(도서관 및 문화회관) 공동체 명예 뱃지
외국 훈장:
- 벨기에: 왕관 훈장 대십자장
-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십자장
- 오를레앙 왕가 (프랑스 왕실): 성 라자로 훈장 기사 대십자장
- 그리스 왕실: 구세주 왕실 훈장 기사 대십자장
- 이탈리아 왕실: 지극히 거룩한 성모영보 훈장 기사
- 바티칸: 성묘 기사단 훈장 기사 대십자장
- 몰타 기사단: 몰타 주권 군사 훈장 공로 및 헌신 기사 대십자장
- 양시칠리아 부르봉 왕가:
- 성 야누아리우스 왕실 훈장 기사
- 성 조지 왕실 성스러운 군사 콘스탄티니안 훈장 대십자 기사
- 요르단:
- 최고 르네상스 훈장 대綬장
- 독립 훈장 대綬장
-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 국가 대훈장 기사, 대수 목걸이
- 포르투갈 왕가: 빌라 비소사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녀 훈장 기사 대십자장
- 러시아 제국 왕가: 성 안드레아 훈장 기사
- 스페인:
- 카를로스 3세 훈장 기사 대십자장
- 황금양털 훈장 기사
해외 표창:
7.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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