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Wolfhart Pannenberg독일어)는 1928년 10월 2일 독일 슈테틴에서 태어나 2014년 9월 5일 뮌헨에서 85세의 나이로 사망한 독일의 루터교회 신학자이다. 그는 칼 바르트와 루돌프 불트만 이후 세대를 대표하는 주요 신학자로 에버하르트 융엘, 위르겐 몰트만과 함께 거론된다.
판넨베르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중심으로 한 '계시로서의 역사' 개념을 포함하여 현대 신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의 사상은 개신교와 가톨릭 신학뿐만 아니라 비기독교 사상가들 사이에서도 널리 논의되었다. 그는 역사신학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켰으며, 나사렛 예수의 생애에 대한 비판적 연구에서 출발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논증하는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체계화한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또한 신학이 철학, 역사학, 특히 자연과학과 비판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엄밀한 학문 분야임을 옹호하는 데 평생을 바쳤으며, 에큐메니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 생애 및 배경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의 생애는 제2차 세계대전의 격동 속에서 시작되어, 어린 시절의 종교적 공백과 강렬한 개인적 경험을 거쳐 신학자로서의 소명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그의 학업과 초기 경력은 독일의 여러 명문 대학과 미국에서의 객원 교수 활동을 통해 그의 학문적 깊이와 폭넓은 교류를 보여준다.
2.1. 출생 및 유년 시절
판넨베르크는 1928년 10월 2일 당시 독일의 슈테틴(Stettin, 현재 폴란드의 슈체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세관원이어서 잦은 이사로 인해 어린 시절에는 교회와 거의 접촉하지 못했다. 그는 루터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부모님은 이미 교회와 거리를 두는 상태였다. 1942년에는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10대 시절, 그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상에 심취하여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그러나 16세가 되던 1944년, 그는 훗날 "빛의 경험"이라고 부르게 되는 강렬한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된다. 이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그는 위대한 철학자와 종교 사상가들의 저작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고백교회 소속이었던 고등학교 문학 교사는 그에게 기독교를 진지하게 탐구해 볼 것을 권유했고, 이는 판넨베르크의 "지적 회심"으로 이어졌다. 그는 기독교가 당시 자신에게 가장 최선의 종교적 선택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이로 인해 신학자로서의 소명을 느끼게 되었다. 1944년에는 독일군에 징집되어 전쟁에 참전했으며, 1945년에는 잠시 영국군의 전쟁포로로 지내기도 했다. 이후 독일로 귀국하여 학업을 계속했다.
2.2. 학업 및 초기 경력
판넨베르크는 베를린, 괴팅겐, 하이델베르크, 바젤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바젤 대학교에서는 당대 최고의 신학자였던 칼 바르트 아래에서 수학했다.
195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에드문트 슐링크 교수의 지도 아래 둔스 스코투스의 예정설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이 논문은 이듬해 출판되었다. 1955년에는 유비와 계시의 관계, 특히 하나님 지식에 대한 가르침에서 유비 개념을 다룬 교수 자격 논문(Habilitationsschrift)을 제출했으며, 이 논문은 2007년에 출판되었다. 1956년 7월에는 하이델베르크의 성 베드로 교회 목사로 초빙되어 사역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재학 중에는 게르하르트 폰 라트의 제자들과 함께 '판넨베르크 서클'을 결성하여 활동했으며, 여기에는 롤프 렌토르프, 트루츠 렌토르프, 울리히 빌켄스, 클라우스 코흐 등이 참여했다.
1958년부터 판넨베르크는 여러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는 Kirchliche Hochschule Wuppertal키르힐리헤 호흐슐레 부페르탈독일어에서 조직신학 교수를 역임했다. 1961년부터 1968년까지는 마인츠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시카고 대학교 (1963년), 하버드 (1966년),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1967년) 등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객원 교수로 초빙되어 강의했다. 1968년부터 1993년 은퇴할 때까지 뮌헨 대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했다. 그는 학문적 경력 내내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쳤으며, 2008년 12월 기준으로 645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했다.
3. 신학 사상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역사로서의 계시'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이는 그의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과 신학의 학문성에 대한 강력한 옹호로 이어진다. 그는 동시대 신학자들과 활발히 교류하면서도,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3.1. 역사로서의 계시
판넨베르크 신학의 핵심 개념은 계시가 하나님의 간접적인 자기 계시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적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즉,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 그는 1961년에 자신이 편집한 논문집 역사로서의 계시를 통해, 계시를 초역사적인 것으로 보았던 칼 바르트의 입장과 실존주의적으로 해석했던 루돌프 불트만의 입장을 비판하며 독자적인 '역사신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판넨베르크의 계시에 대한 교의학적 명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신현(神顯)처럼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적 행위를 통해 간접적으로 발생한다.
- 계시는 계시적 역사의 시작이 아니라 끝에서 발견된다.
- 역사의 계시는 신성의 특별한 현현과 달리,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으며, 보편적인 성격을 지닌다.
- 하나님 신성의 보편적 계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실현되지 않았고, 나사렛 예수의 운명에서 비로소 실현되었는데, 이는 모든 역사의 끝이 선취적으로 발생한 형태로 나타난다.
- 그리스도의 사건은 고립된 사건으로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신성을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역사의 일부인 한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계시한다.
- 이방인 교회에서 비유대적 계시 표상의 형성은 예수의 운명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종말론적 자기 증시의 보편성을 표현한다.
- 말씀은 예언, 훈계, 공고로서의 계시와 관계한다.
그는 헤겔의 역사 개념(역사가 영과 자유가 드러나는 전개 과정이라는 이해)과 바르트의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발생하는 계시 개념을 결합했다. 판넨베르크는 역사 그 자체를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이해하는 헤겔적 관점을 채택하면서도, 예수의 부활이 역사가 전개될 것을 '선취적으로'(proleptic) 계시한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1960년대에 신정통주의와 자유주의, 불트만주의 신학자들로부터 주로 적대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판넨베르크는 자신과 동료들이 이러한 반응에 놀랐다고 언급했다.
그는 칼 뢰비트의 제자로서 한스 블루멘베르크와의 이른바 '세속화 명제' 논쟁을 이어갔다. 블루멘베르크는 진보가 히브리 및 기독교 신념의 세속화라는 뢰비트의 주장을 반박하며, 현대 시대와 그 진보에 대한 믿음이 기독교 전통에 대항하는 문화의 새로운 세속적 자기 긍정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3.2.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
판넨베르크는 1964년에 출판된 그리스도론 요강(Jesus: God and Man)에서 당시 성서학의 성과를 수용하며 독자적인 그리스도론을 전개했다. 그는 예수를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 안에서 신성을 인식해 나가는 방법론을 취한다. 이 과정에서 예수의 부활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판넨베르크에게 부활은 단순히 믿어야 할 대상이기 이전에 역사적 사실이어야 한다. 그는 칼케돈 공의회의 전통적인 '두 본성' 그리스도론을 거부하고, 부활의 빛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역동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핵심으로서 부활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그가 부활의 역사성을 옹호하도록 이끌었으며, 빈 무덤보다는 초기 교회 역사에서 부활한 그리스도의 경험을 강조했다.
3.3. 신학의 학문성과 방법론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신학을 엄밀한 학문 분야로 옹호한 것이다. 그는 신학이 철학, 역사학,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과학과 비판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초기 주요 저서인 1973년의 학문론과 신학(Theology and the Philosophy of Science)에서 그는 당시의 과학철학 성과(특히 칼 포퍼, 루돌프 카르나프 등)를 수용하며 신학의 학문성 문제에 접근했다. 그는 신학이 신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라, 보편적 타당성을 지닌 과학적 학문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또한 새로운 자연 신학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슐링크의 영향을 받은 판넨베르크의 인식론은 그의 신학적 기획에 매우 중요했다. 슐링크는 유비적 진리(서술적 진리 또는 모델)와 송영적 진리(예배에 내재된 진리)를 구분했는데, 판넨베르크는 이 사고방식에서 신학이 송영적 진리를 표현하려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신학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응답이다.
3.4. 주요 신학 개념
판넨베르크는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을 발전시켰다.
- 신학적 인간학**: 1983년의 신학적 관점에서의 인간학(Anthropology in Theological Perspective)에서 그는 당시의 철학적 인간학의 성과(특히 막스 셸러, 아르놀트 겔렌, 헬무트 플레스너 등)를 자신의 신학에 활용했다. 그러나 철학과는 달리, 신학의 입장에서 인간을 역사적 존재로 파악했다.
- 종말론**: 판넨베르크의 종말론적 관점은 새로운 창조에서 시간적 과정의 중요성을 경시하며, 시간을 죄악된 현세와 연결시켰다. 그는 과거, 현재, 미래의 제한된 개념보다는 영원한 현재를 선호했으며, 새로운 창조 안에서 집중된 통일성 속에서 시간의 종말을 보았다. 또한 미국의 수리물리학자 프랭크 J. 티플러의 오메가 포인트 이론을 옹호하기도 했다.
- 조직신학**: 판넨베르크의 평생의 역작은 1988년부터 1993년에 걸쳐 저술된 3권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다. 그는 이 저서를 통해 보편적-역사적 의미 경험의 해석학이라는 틀 안에서 기독교 신앙의 진리성을 변증했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전체 역사적 행위 속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 판넨베르크의 기본적인 입장이며, 이는 직접적인 계시에서 출발하는 바르트의 교의학에 대한 비판을 포함한다. 이러한 판넨베르크의 역사 의식에는 특히 헤겔의 역사철학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 제1권: 서론, 조직신학의 주제로서 기독교 교리의 진리성, 하나님 사상과 그 진리성에 대한 질문, 여러 종교 경험에서의 하나님과 신들의 현실성, 하나님의 계시, 삼위일체 하나님, 하나님의 본질의 통일성과 그 속성.
- 제2권: 세계의 창조, 인간의 존엄과 비참, 인간론과 그리스도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세계의 화해.
- 제3권: 성령의 부어주심, 하나님의 나라, 교회, 메시아의 교단과 개인, 선택과 역사,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창조의 완성.
- 자연법**: 그는 자연법에 대한 독자적인 이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3.5. 신학적 교류 및 사회적 입장
판넨베르크는 동시대 신학자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명확한 입장을 표명했다.
- 교회일치운동**: 판넨베르크는 교회들이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뮌헨 대학교에 에큐메니즘 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는 개신교와 가톨릭 신학 간의 대화에 크게 기여했다. 1975년부터 1990년까지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 독일 개신교회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흔적을 제거하는 것이 교회 생활에서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이는 교회가 성숙하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이며, 이러한 변혁은 설교, 교육, 교리, 선교, 교회 질서, 에큐메니컬 운동, 타종교와의 관계 등 여러 신앙생활 영역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보았다.
- 동시대 신학자들과의 관계**: 그는 칼 바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바르트의 신학을 넘어서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바르트가 제시한 신론 체계 안에서 신학을 세워나갔지만, 공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완전한 포괄성과 보편성을 추구했으며, 바르트가 주장한 그리스도의 유기(遺棄)도 부정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보편성을 주장했다. 동세대 신학자인 위르겐 몰트만과는 부페르탈 신학대학원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두 사람의 사상에는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았다. 공통점은 종말론 강조, 헤겔주의와 에른스트 블로흐의 영향 등에서 발견되지만, 몰트만은 판넨베르크만큼 역사의 신학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 몰트만은 조직신학자가 아닌 반면 판넨베르크는 스스로를 명확히 조직신학자로 자처했다.
- 철학적 영향**: 그는 철학에 대한 조예가 깊어 독일 관념론을 본격적으로 연구했으며, 특히 헤겔의 영향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또한 칼 뢰비트, 칼 야스퍼스, 니콜라이 하르트만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1963년 시카고 대학교 객원 교수 시절에는 과정 신학과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접했다. 하나님 존재에 대한 생각에서 판넨베르크와 과정 신학 사이에 유사점이 있지만, 판넨베르크 자신은 과정 신학의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고 명확히 밝혔다.
- 동성애 관계에 대한 비판**: 판넨베르크는 독일 복음주의교회의 동성애 관계 승인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동성애를 승인하는 교회는 더 이상 진정한 교회가 아니라고까지 말했다. 그는 독일 연방 공로 훈장이 한 레즈비언 활동가에게 수여된 후 자신의 훈장을 반납하기도 했다.
- 신학자의 역할과 선교**: 그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기원과 역사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전문 신학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교사가 되어 이러한 관심을 유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학자는 기독교 신앙의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신자들이 가능한 한 독자적이고 성숙한 차원에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기독교 선교 역시 과거 권위주의적 전통의 흔적을 제거해야만 오늘날 정상적으로 작동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과거 많은 선교사들이 설득 대신 개종을 강요한 권위주의적 방법 때문에 이 사회에 기독교 선교에 대한 광범위하고 맹렬한 거부 현상이 자리 잡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오늘날의 선교적 과제가 에큐메니컬 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특정 지역의 기독교 공동체들이 그 사회에서 인간 존엄의 진보적 모범이 되고 그것에 동의하는 세력이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4. 주요 저서
판넨베르크는 평생에 걸쳐 수많은 중요한 신학 저작들을 남겼다. 다음은 그의 주요 저서들과 한국어 번역본 목록이다.
원제 및 출판 연도 | 한국어 번역 제목 및 출판 연도 | 주요 내용 또는 의의 |
---|---|---|
Die Prädestinationslehre des Duns Scotus (1954) | (한국어 번역 없음) | 둔스 스코투스의 예정설에 대한 박사 학위 논문. |
Offenbarung als Geschichte (1961) | 역사로서의 계시 (1994) | 자신이 편집한 논문집. 계시를 하나님의 역사적 행위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보며, 칼 바르트와 루돌프 불트만의 계시론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역사신학을 전개하는 출발점이 됨. |
Was ist der Mensch? (1962) | 인간이란 무엇인가 (1975) |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탐구. |
Grundzüge der Christologie (1964) | 그리스도론 요강 (1983) |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체계화한 그의 대표작. 예수의 부활을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식하는 핵심으로 강조. |
Gottesgedanke und menschliche Freiheit (1967) | 조직신학의 근본문제 (1984) | 신학의 근본적인 질문들을 다룸. 성서 원리의 위기, 구원 사건과 역사, 해석학과 보편사, 신앙과 이성, 철학적 신 개념의 수용, 무신론의 유형과 신학적 의미, 하나님에 대한 질문 등을 논의. |
Theologie und Reich Gottes (1971) | 신학과 하나님의 나라 (1972) | 신학의 목적과 하나님의 나라의 관계를 탐구. |
Glaubensbekenntnis im Lichte der heutigen Fragen (1972) | 사도신경 해설 | 현대의 질문에 비추어 사도신경을 해석하고 변증. |
Wissenschaftstheorie und Theologie (1973) | 학문론과 신학 (2014) | 과학철학 및 해석학과의 관계 속에서 신학의 학문적 성격을 고찰. |
Gottesgedanke und menschliche Freiheit (1974) | 하나님의 사상과 인간의 자유 (1991) | 하나님 개념과 인간 자유의 관계를 탐구. |
Glaube und Wirklichkeit (1975) | 믿음과 현실 (1990) | 세속화된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이 부족한 현실 속에서 신학의 의미를 논함. |
Ethik und Ekklesiologie (1977) | 기독교 사회윤리 (1992, 전반부) 현대에 사는 교회의 사명 (2009, 후반부) | 윤리학과 교회론의 관계를 다룸. |
Anthropologie in theologischer Perspektive (1983) | 인간학 (2008) | 철학적 인간학의 성과를 활용하여 신학적 관점에서 인간을 역사적 존재로 파악. |
Christliche Spiritualität (1986) | 현대 기독교의 영성 (1987) | 기독교적 영성의 본질과 현대적 의미를 탐구. |
Metaphysik und Gottesgedanke (1988) | 형이상학과 하나님의 사상 (1990) |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하나님 사상을 고찰. |
Systematische Theologie Band 1 (1988) | 조직신학 제1권 (2019) | 그의 평생 역작인 조직신학 3부작 중 첫 권. 신학의 정의, 하나님론, 삼위일체론 등을 다룸. |
Systematische Theologie Band 2 (1991) | (한국어 번역 없음) | 조직신학 3부작 중 두 번째 권. 창조론, 인간론, 그리스도론 등을 다룸. |
Systematische Theologie: Ein Studienbuch (1991) | 조직신학 입문 (1996) | 조직신학 3부작의 도입부로 쓰인 짧은 저서. |
Systematische Theologie Band 3 (1993) | (한국어 번역 없음) | 조직신학 3부작 중 마지막 권. 성령론, 교회론, 종말론 등을 다룸. |
Beiträge zur Theologie der Natur (1993) | 자연과 신 (1999) | 자연의 신학을 향한 시론으로,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탐구. |
Grundlagen der Ethik (1996) | 왜 인간에게 윤리가 필요한가 (2003) | 세속화된 사회에서 윤리의 근거를 신학적, 철학적으로 고찰. |
Analogie und Offenbarung (2007) | (한국어 번역 없음) | 그의 교수 자격 논문에 두 장을 추가한 저서. 하나님 인식에서 유비 개념에 대한 논의를 비판적으로 고찰. |
5. 평가 및 영향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20세기 후반 신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사상은 개신교와 가톨릭 신학 모두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비기독교 사상가들에게도 널리 논의되었다.
그는 칼 바르트와 루돌프 불트만 이후의 세대를 대표하는 신학자로, 에버하르트 융엘, 위르겐 몰트만과 함께 언급된다. 특히 '역사로서의 계시'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통해 역사신학 분야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의 핵심 사상인 예수의 부활을 중심으로 한 계시 개념은 신학적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으며, 그는 부활의 역사성을 옹호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판넨베르크는 신학이 철학, 역사학, 자연과학과 비판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엄밀한 학문 분야임을 강력히 옹호했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신학의 학문적 위상을 재정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조직신학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성을 보편적-역사적 의미 경험의 해석학이라는 틀 안에서 변증하려는 시도로, 그의 학문적 역량과 깊이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평가된다.
또한 그는 에큐메니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개신교와 가톨릭 신학 간의 교류를 증진하는 데 기여했다. 뮌헨 대학교에 에큐메니즘 연구소를 설립하고 세계교회협의회 활동에 참여한 것은 그의 이러한 노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사회적 입장은 논쟁의 여지가 있었다. 특히 동성애 관계에 대한 그의 비판적 시각과 이로 인한 독일 연방 공로 훈장 반납 사건은 그의 보수적인 사회적 관점을 드러내며, 사회적 진보와 인권에 대한 논의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넨베르크는 현대 신학의 주요 흐름을 형성하고 다양한 학문 분야와의 대화를 촉진한 중요한 사상가로 기억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