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마르기타 구멜은 1941년 6월 29일 독일 마그데부르크에서 마르기타 헬름볼트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초기 생애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운동 재능을 보이며 포환던지기 선수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2. 육상 경력
구멜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국제 육상 무대에서 동독을 대표하는 주요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그녀는 올림픽과 유럽 육상 선수권 대회 등 여러 주요 국제 대회에 참가하여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으며, 특히 나데즈다 치조바와의 치열한 라이벌 관계는 많은 이목을 끌었습니다.
2.1. 올림픽 참가
구멜은 총 세 번의 올림픽에 참가하여 인상적인 기록을 남겼습니다.
- 1964년 도쿄 올림픽: 독일 연합팀 소속으로 처음 올림픽에 참가했지만, 메달을 획득하지는 못했습니다.
-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동독 대표로 참가하여 여자 포환던지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그녀는 19.61 m를 던져 여자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19m 이상을 던지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 1972년 뮌헨 올림픽: 다시 동독 대표로 참가하여 은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그녀는 20.22 m를 던졌지만, 숙명의 라이벌 나데즈다 치조바에게 패배하여 2위에 머물렀습니다.
2.2. 유럽 선수권 대회
구멜은 올림픽 외에도 유럽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꾸준히 메달을 획득하며 기량을 선보였습니다.
- 1966년 유럽 실내 선수권 대회(도르트문트): 포환던지기에서 1위를 차지하며 17.3 m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 1966년 유럽 육상 선수권 대회(부다페스트): 포환던지기에서 17.05 m로 2위를 차지했으며, 나데즈다 치조바가 1위였습니다.
- 1968년 유럽 실내 선수권 대회(마드리드): 포환던지기에서 17.62 m로 2위를 차지하며 치조바에게 패했습니다.
- 1969년 유럽 육상 선수권 대회(아테네): 포환던지기에서 19.58 m로 2위를 차지했으며, 역시 치조바가 1위였습니다.
- 1971년 유럽 실내 선수권 대회(소피아): 포환던지기에서 19.5 m로 2위를 차지하며 치조바에 이어 준우승했습니다.
- 1971년 유럽 육상 선수권 대회(헬싱키): 포환던지기에서 19.22 m로 3위를 차지했으며, 치조바가 1위였습니다.
다음은 마르기타 구멜의 주요 국제 대회 성적을 요약한 표입니다.
연도 | 대회 | 장소 | 종목 | 결과 | 기록 |
---|---|---|---|---|---|
1966 | 유럽 실내 선수권 대회 | 도르트문트 (서독) | 포환던지기 | 1위 | 17.3 m |
1966 | 유럽 육상 선수권 대회 | 부다페스트 (헝가리) | 포환던지기 | 2위 | 17.05 m |
1968 | 유럽 실내 선수권 대회 | 마드리드 (스페인) | 포환던지기 | 2위 | 17.62 m |
1968 |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 멕시코시티 (멕시코) | 포환던지기 | 1위 | 19.61 m |
1969 | 유럽 육상 선수권 대회 | 아테네 (그리스) | 포환던지기 | 2위 | 19.58 m |
1971 | 유럽 실내 선수권 대회 | 소피아 (불가리아) | 포환던지기 | 2위 | 19.5 m |
1971 | 유럽 육상 선수권 대회 | 헬싱키 (핀란드) | 포환던지기 | 3위 | 19.22 m |
1972 | 1972년 뮌헨 올림픽 | 뮌헨 (서독) | 포환던지기 | 2위 | 20.22 m |
2.3. 나데즈다 치조바와의 라이벌 관계
마르기타 구멜은 소련의 나데즈다 치조바와 오랜 기간 동안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두 선수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주요 국제 대회의 포환던지기 종목에서 금메달을 다투는 주요 경쟁자였습니다.
치조바는 여러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구멜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으며,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도 구멜을 꺾고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반면 구멜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치조바를 누르고 금메달을 차지하며 올림픽 챔피언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들의 경쟁은 당시 여자 포환던지기 종목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3. 도핑 및 논란
마르기타 구멜의 선수 경력은 동독 정부의 조직적인 도핑 프로그램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녀는 동독에서 스테로이드를 투여받은 최초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구멜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불과 3개월 앞둔 1968년 7월 28일에 처음으로 투리나볼(Turinabol영어, 4-클로로데하이드로메틸테스토스테론)이라는 스테로이드를 투여받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투여량은 하루 10 mg에 불과했지만, 3개월 만에 그녀의 포환던지기 기록은 17 m에서 19 m로 향상되었습니다.
이후 몇 년 동안 그녀는 더 높은 용량의 투리나볼을 사용했으며, 이에 따라 경기력도 용량에 비례하여 향상되어 20 m를 훨씬 넘는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1997년 학술지 《임상 화학》(Clinical Chemistry클리니컬 케미스트리영어)에 발표된 논문은 1973년 동독 육상 연맹의 과학 보고서에 수록된 차트를 재현하며, 구멜의 1968년, 1969년, 1972년 투리나볼 투여량과 경기 거리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스테로이드 투여를 중단했을 때에도 상당한 "잔류" 효과가 남아있었으며, 여러 차례의 스테로이드 주기 이후에는 약물을 사용하지 않을 때에도 1968년 약물 노출 이전보다 훨씬 뛰어난 경기력을 유지했음을 입증했습니다.
동독 연구자들은 여성 선수들에게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를 사용하는 것이 수년간의 자연 훈련보다 훨씬 우수한 운동 능력 향상을 가져온다고 언급했습니다. 이러한 결과에 따라 동독은 수영과 같은 종목에서 13~14세의 훨씬 어린 여성 선수들에게도 투리나볼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동독 스포츠 시스템이 국가 주도로 조직적인 도핑을 통해 선수들의 경기력을 인위적으로 향상시켰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는 공정 경쟁의 원칙을 훼손하고, 특히 어린 여성 선수들의 인권과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됩니다.
4. 평가 및 유산
마르기타 구멜은 1968년 올림픽 금메달과 19m 이상을 던진 최초의 여성 선수라는 기록으로 한때 동독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밝혀진 조직적인 도핑 사실은 그녀의 업적에 대한 평가를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사례는 동독 스포츠의 어두운 면모를 상징하며, 국가 주도 도핑이 선수 개인의 삶과 스포츠의 진정한 가치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남아 있습니다.
그녀의 유산은 단순히 메달의 개수가 아닌, 동독 스포츠 시스템 내에서 여성 선수들이 겪었던 윤리적, 인권적 문제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구멜의 이야기는 스포츠에서의 공정성과 윤리적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역사적 교훈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5. 관련 항목
- 동독의 도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