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니콜라 그루에프스키는 1970년 스코페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가족사는 그리스 내전과 유고슬라비아로의 이주 과정에서 겪은 복잡한 배경을 담고 있다. 학업과 초기 금융 경력을 통해 정치 입문 전부터 전문성을 쌓았다.
1.1. 출생과 가족사
니콜라 그루에프스키는 1970년 8월 31일 스코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가구 및 디자인 분야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간호사였다. 부모가 이혼한 후 그는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4세 때 어머니가 다른 수천 명의 유고슬라비아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리비아로 일하러 가게 되자 그를 데리고 함께 떠났다.
그의 부계 조부모는 오스만 제국령 마나스티르 빌라예트의 크루쇼라디(Krušoradi) 마을 출신으로, 그의 할아버지 니콜라오스 그루이오스(Nikolaos Grouios, 1911년 ~ 1940년)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이 마을은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 이후 그리스에 공식적으로 합병되기 전까지는 불가리아 총대주교의 관할 아래 있었다. 이후 그리스 행정부는 동화적인 반불가리아 정책을 시행하며 현지 주민들의 이름을 그리스식 이름으로 변경했다. 마을 자체도 1926년 그리스 당국에 의해 아흘라다로 개칭되었다. 그루에프스키의 할아버지는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했으며, 그의 이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사망한 현지인들의 이름과 함께 아흘라다의 전쟁 기념비에 새겨져 있다. 몇 년 뒤 그리스 내전이 발발하자 그루에프스키의 할머니와 아버지는 당시 마케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이었던 유고슬라비아 북부로 피난했다. 그들은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정책에 따라 시민권을 얻기 위해 성씨를 그루이오스에서 그루에프스키로 변경했다.
그의 어머니 나데즈다(Nadežda)는 슈티프 출신으로, 북마케도니아의 초대 내무부 장관을 지낸 요르단 미얄코프의 누이이다. 니콜라 그루에프스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그의 사촌인 사쇼 미얄코프는 북마케도니아의 보안방첩국 국장을 역임했다.
1.2. 학력 및 초기 경력
그루에프스키는 스코페에서 초등 및 중등 교육을 마쳤다. 1994년 비톨라에 위치한 성 클레멘트 오흐리드 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했으며, 재학 중에는 아마추어 연극과 복싱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신흥 금융 분야에 진출하여 스코페 증권 거래소에서 최초로 거래를 시작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1995년에는 멀티그룹 소유의 발칸은행(Balkanbank) 부서 이사로 일했으며, 1998년까지 전시회 담당자로 활동했다. 1996년에는 런던 증권 연구소에서 국제 자본 시장 관련 자격을 취득했다. 1998년에는 마케도니아 증권 거래소에서 최초의 거래를 성사시켰고, 마케도니아 중개인 협회를 설립하여 회장으로 취임했다. 2006년 12월 12일에는 스코페의 성 키릴·성 메토디우스 대학교 경제학부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2. 정치 경력
니콜라 그루에프스키는 재무부 장관으로 정계에 입문한 후, VMRO-DPMNE 당 대표를 거쳐 북마케도니아의 총리직에 올랐다. 그의 총리 재임 기간은 다양한 국내 정책 추진과 함께 외교 정책의 변화, 그리고 권위주의 및 부정부패 의혹으로 특징지어진다.
2.1. 재무부 장관
그루에프스키는 1999년부터 2002년까지 류브초 게오르기에프스키 정부에서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재무부 장관으로서 그는 마케도니아 텔레콤을 헝가리의 마자르 텔레콤에, OKTA 정유 공장을 헬레닉 페트롤리움에 매각하는 등 주요 국영 기업 민영화를 추진했다. 또한 재정 개혁을 단행하여 결제 시스템을 개편하고 부가가치세율을 18%로 인상했다. 탈세 방지를 위해 모든 마케도니아 기업에 재정 영수증 제출을 의무화하는 정책을 시행했으며, 이는 그의 고문인 샘 바크닌이 고안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루에프스키는 내각 내에서 가장 강력한 옹호자이자 정책 실행자로 평가받았다. 그의 재임 중 성과 중 하나는 페니마크(Fenimak)의 민영화로, 이는 북마케도니아에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 거의 파산 직전이던 국영 기업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다.
2.2. VMRO-DPMNE 당 대표
VMRO-DPMNE가 2002년 총선에서 패배한 후 당내에 한동안 내분이 있었다. 이 시기에 그루에프스키는 친유럽 성향의 지도자로 부상했으며, 류브초 게오르기에프스키가 당 대표직에서 물러난 후 2003년 5월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류브초 게오르기에프스키는 이후 자신의 정당인 VMRO-인민당을 창당했지만, VMRO-DPMNE는 여전히 대부분의 지지자들을 유지했다. 그루에프스키는 당 대표로서 민족주의 성향의 집권당을 이끌었다.
2.3. 총리 재임 (2006-2016)
니콜라 그루에프스키는 2006년 8월 25일부터 2016년 1월 18일까지 북마케도니아 총리를 역임했다. 그의 재임 기간은 여러 차례의 선거 승리와 함께 국가 정체성 강화 프로젝트, 경제 정책, 그리고 외교 정책의 중요한 변화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동시에 권위주의적 통치와 부정부패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2.3.1. 선거 승리와 정부 구성
VMRO-DPMNE는 2006년 7월 총선에서 승리하여 8월 25일 그루에프스키가 이끄는 새 정부를 구성했다. 그의 정부는 주요 부처와 직책에 30대 초반의 젊은 인재들을 대거 등용하여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 이 선거에서 그루에프스키는 1970년대에 태어난 인물로는 유럽 최초의 선출직 정부 수반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의 당이 이끄는 연립 정부는 2008년 6월 1일 총선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의회 의석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 선거는 일부 알바니아계 주민이 다수인 지자체에서 폭력 사태와 부정 의혹으로 얼룩졌다. 그루에프스키는 알바니아계 정당인 민주 통합 연합과 연립 정부를 구성했다.
2011년 6월 5일 총선에서도 VMRO-DPMNE가 이끄는 연립 정부는 123석 중 56석을 얻으며 세 번째 연속 승리를 거두었다. 10만 명 이상의 공무원에게 선거 운동을 강요하는 등 국가 자원 남용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이러한 이의 제기는 무시되었고 선거는 유효하다고 선언되었다. 그루에프스키는 다시 민주 통합 연합과 연립 정부를 구성했다. 2014년 4월 27일 총선에서도 VMRO-DPMNE가 승리하여 그루에프스키는 또 한 번 총리직을 연임하게 되었다.
2.3.2. 주요 국내 정책 및 프로젝트
그루에프스키는 2012년 1월 6일 스코페에 건립된 개선문인 "포르타 마케도니아"의 개장식에 참석하며 자신이 "스코페 2014" 프로젝트의 발안자임을 인정했다. 이 프로젝트는 국가 정체성 강화와 도시 개발을 목표로 한 대규모 사업이었다.
2014년, 그루에프스키는 국내외 규제 당국의 감시를 벗어나는 자유로운 무역 지대(tax-free autonomous trade zone)를 설립하기 위한 계획을 의회에서 서둘러 통과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의원들 사이에서 우려를 낳았다. 유럽 연합의 베니스 위원회는 "모든 법률(형사법 제외)이 헌법상 인정된 입법부와 행정부가 아닌 관리 기관에 의해 제정되고 집행된다면, 이 지역은 기존 헌법 구조와 분리된 일종의 '국가 내 국가'가 될 것이며, '검은 돈'의 피난처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한 "마케도니아 제품 구매"(Купувајте македонски производи쿠푸바테 마케돈스키 프로이즈보디마케도니아어) 캠페인을 추진하여 마케도니아 제품 구매를 장려했으며, 태양과 즐거운 얼굴 모양의 로고를 사용했다. 이 프로그램은 국내 수입 증대를 목표로 했다.
2.3.3. 경제 정책 및 개혁
그루에프스키 정부는 국가 및 지역 경제 발전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재무부 장관 시절부터 추진했던 민영화와 탈세 방지 정책 외에도, 총리 재임 중에는 외국인 투자 유치에 힘썼으며, "마케도니아 제품 구매" 캠페인을 통해 국내 소비를 진작시키려 노력했다.
2.3.4. 외교 정책 변화 및 국제 관계
그루에프스키의 지도 아래 북마케도니아는 초기에 친유럽 및 NATO 가입 정책을 지향했으나, 점차 친러시아적이고 친세르비아적이며 반서방적인 외교 기조로 변화했다. 그는 2017년 불가리아와의 조약과 2018년 그리스와의 프레스파 협정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2007년 6월에는 알바니아 티라나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살리 베리샤 알바니아 총리, 이보 사나데르 크로아티아 총리와 함께 회담에 참석하기도 했다.
2.3.5. 권위주의 및 부정 의혹
그루에프스키의 총리 재임 기간은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과 각종 부정 의혹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선거 부정 및 선거 운동에 국가 자원을 남용한 혐의를 받았다. 특히 2만 명 이상의 마케도니아 인사들, 주로 공무원들을 불법 도청하도록 승인한 사실이 드러났다. 2015년에는 전 총리이자 VMRO-DPMNE 창립자인 류브초 게오르기에프스키가 그루에프스키 정부가 국가를 "세르비아화"하여 궁극적으로 세르비아에 편입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3. 사임, 법적 문제 및 도피
니콜라 그루에프스키는 전화 도청 스캔들로 인한 대규모 시위 끝에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그는 재임 중 저지른 부패 및 권력 남용 혐의로 여러 차례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수감 명령을 피하기 위해 헝가리로 도피하여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
3.1. 프르지노 협정 및 총리직 사임
2015년 5월, 스코페에서는 그루에프스키와 그의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이 시위는 야당 지도자 조란 자에프가 그루에프스키가 2만 명 이상의 마케도니아 공무원 및 기타 인사를 도청했으며, 2011년 경찰관에 의한 젊은 남성 살해 사건을 은폐했다고 폭로한 이후 시작되었다. 5월 5일에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여 시위대와 경찰 간의 폭력적인 충돌이 있었고 양측 모두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몇 주 동안 야당은 추가적인 반정부 시위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그 달 말에 시위가 이어졌다. 내무부 장관을 포함한 여러 장관이 사임했다. 그루에프스키는 처음에는 "내가 물러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일 것... 나는 공격에 맞설 것이다"라고 말하며 사임을 거부했다. 그러나 2016년 1월 15일 에밀 디미트리에프가 총리로 지명되었고, 그루에프스키는 프르지노 협정의 일환으로 총리직에서 사임한 후 1월 18일 디미트리에프가 취임했다.
3.2. 재판 및 유죄 판결
2017년 7월, 마케도니아 특별 검찰청은 전화 도청 사건과 관련하여 그루에프스키와 전 내무부 장관 고르다나 얀쿨로스카, 전 교통부 장관 밀레 야나키에스키를 포함한 그의 당 소속 고위 관리 4명의 여권을 압수하도록 명령했다.
2017년 1월, 마케도니아 특별 검찰청은 '탱크' 수사를 시작했다. 이 수사에서 두 명의 개인이 2012년 2월부터 10월 사이에 공직을 이용하여 당시 총리였던 그루에프스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60.00 만 EUR 상당의 방탄 메르세데스-벤츠 차량을 불법적으로 공공 조달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2018년 5월 23일, 그루에프스키는 호화 방탄차 구매 과정에서 공무원에게 불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2022년 4월에는 스코페에서 돈세탁과 국가 재산의 불법 취득 및 은닉 혐의로 징역 7년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3.3. 도피 및 헝가리 망명
2018년 11월 9일, 스코페 형사 법원은 그루에프스키의 징역형 집행 유예 요청을 기각했다. 11월 10일, 그는 형 집행 시작일에 출두하지 않았다. 그는 11월 8일 스코페의 한 호텔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마케도니아 당국은 도주한 그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VMRO-DPMNE의 지도자 흐리스티얀 미츠코스키는 그루에프스키를 옹호하며 체포 영장과 경찰 수색을 "정치적 박해"이자 "마녀사냥"이라고 비난했고, VMRO-DPMNE가 "경찰 포위 상태"에 있다고 덧붙였다.
11월 13일, 그루에프스키는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헝가리로 도피하여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고 발표했다. 그루에프스키는 피데스 당의 수장이자 헝가리 총리인 오르반 빅토르와 특히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오르반 총리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간의 프레스파 협정에 반대하고 VMRO-DPMNE의 강경한 입장을 지지했다. 오르반은 그루에프스키의 도피를 "흥미로운 이야기, 모든 범죄 이야기처럼 흥미진진하다"고 묘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이 압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루에프스키는 성공적으로 도피했으며, 그가 불가리아 여권을 사용했을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불가리아 당국은 그루에프스키가 불가리아 시민권을 신청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후 알바니아 경찰은 헝가리 정부의 도움을 받아 헝가리 외교 차량을 이용해 그루에프스키가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를 거쳐 헝가리에 도착했음을 확인했다.
3.4. 송환 요청 및 제재
인터폴은 그루에프스키에 대한 국제 체포 영장을 발부했으며, 북마케도니아 정부는 공식적인 송환 요청을 제출했다. 헝가리 야당은 헝가리 정부에 도피한 전 총리를 체포하여 신속히 북마케도니아로 송환할 것을 촉구했다.
2018년 11월 20일, 그루에프스키는 헝가리 당국으로부터 정치적 망명을 승인받았다. 2019년 6월 27일, 그루에프스키는 북마케도니아의 송환 요청에 대한 청문회를 위해 부다페스트 법원에 수갑을 찬 채 출두했으나, 비공개로 진행된 청문회에서 부다페스트 법원은 그의 송환을 거부했다. 에바 바르헤기(Éva Várhegyi) 판사는 그의 송환에 필요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2022년 4월, 그루에프스키는 미국 재무부의 발칸 관련 제재 대상인 특별 지정 국민 명단(Specially Designated Nationals List)과 미국 국무부의 부패 관련 제재 대상에 추가되었다.


4. 총리 퇴임 이후 활동 및 논란
총리직 사임 이후 니콜라 그루에프스키는 당 대표직에서 물러났으며, 도피 생활 중에도 여러 법적 문제와 논란에 계속 연루되었다.
4.1. 당 지도부 사임
2017년 지방 선거에서 사회민주연합에 크게 패배한 후, 그루에프스키는 2017년 12월 VMRO-DPMNE 당 대표직에서 사임했다. 2020년 7월 21일, VMRO-DPMNE는 당의 민주화를 위한 변화의 일환으로 그루에프스키의 명예 총재직을 박탈했다.
4.2. 로비 스캔들 및 추가 조사
2020년 10월, 북마케도니아 당국은 그루에프스키가 연루된 새로운 돈세탁 수사를 시작했다. 2021년 3월 19일, 독일 정치인 토비아스 제흐는 전 마케도니아 총리 니콜라 그루에프스키를 위해 로비 활동을 하며 거액을 받았다는 의혹으로 분데스탁 의원직을 사임했다. 그루에프스키가 헝가리로 도피한 후에도 제흐는 북마케도니아의 전 방첩국 장교인 즐라트코 케스코프스키(Zlatko Keskovski)와 파트너십을 맺은 대마초 관련 회사 팜칸 도이칠란트 AG(PharmCann Deutschland AG)를 통해 북마케도니아와의 사업 관계를 이어갔다.
5. 사상 및 이념
니콜라 그루에프스키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며, 그의 외교 정책 기조는 친유럽 및 NATO 지향에서 친러시아 및 반서방으로 전환되었다. 그는 또한 논란이 많은 "고대화"(Antiquization)라는 정체성 정책을 추진했다. 이 정책은 마케도니아의 고대 역사를 강조하며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시도였으나, 특히 그리스와의 역사적 주권 논란을 야기했다. 그루에프스키는 프레스파 협정을 비난하며, 조란 자에프 총리가 국가 명칭 변경과 관련하여 마케도니아 국민을 "속이고 기만했다"고 주장했으며, 그리스 정치인들이 "고대 역사"에 대한 배타적 주장을 담은 불리한 협정을 마케도니아에 강요했다고 비판했다.
6. 개인 생활
그루에프스키는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한 후 2007년 5월 보르키차 그루에프스카(Borkica Gruevska)와 재혼했다. 슬하에 아나스타시야(Anastasija)와 소피야(Sofija) 두 딸을 두고 있다.
7. 평가 및 논란
니콜라 그루에프스키의 통치 기간과 퇴임 이후의 행보는 북마케도니아의 민주주의, 인권, 사회 정의 측면에서 심각한 비판과 논란을 야기했다. 그의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과 만연한 부패는 국내외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7.1. 권위주의 통치와 민주주의 저해
그루에프스키의 통치는 권위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의 정부는 선거 부정, 언론 통제, 사법부 독립성 침해, 그리고 시민 사회 탄압 등의 의혹에 휩싸였다. 2만 명 이상의 공무원과 주요 인사들을 불법 도청한 사실은 민주주의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한 사례로 지적되었다. 또한, 그는 국가 자원을 선거 운동에 남용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며, 전 총리 류브초 게오르기에프스키는 그루에프스키 정부가 국가를 "세르비아화"하여 세르비아에 편입시키려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가 추진했던 무세금 자율 무역 지대 계획은 "국가 내 국가"가 될 수 있으며 "검은 돈"의 피난처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7.2. 부패 및 사법 처리
그루에프스키는 재임 중 및 퇴임 후 밝혀진 여러 부패 사건으로 인해 법적 책임을 져야 했다. 특히 60.00 만 EUR 상당의 고급 방탄 차량을 불법 구매한 이른바 '탱크 사건'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돈세탁과 국가 재산의 불법 취득 및 은닉 혐의로 징역 7년을 추가로 선고받는 등 그의 부패 혐의는 지속적으로 드러났다. 2022년에는 미국 재무부와 미국 국무부로부터 부패 관련 제재 대상에 포함되면서 국제 사회에서도 그의 사법적 책임 문제가 강조되었다.
7.3. 외교 정책 논란
그루에프스키 정부의 외교 정책은 친유럽 및 NATO 지향에서 친러시아 및 반서방으로 전환되면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급격한 외교 기조 변화는 북마케도니아의 지정학적 위치와 국제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2017년 불가리아와의 조약과 2018년 그리스와의 프레스파 협정에 대한 그의 반대 입장은 지역 안정과 유럽 통합 과정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7.4. 문화 및 역사 왜곡 논란
그루에프스키가 추진한 "고대화"(Antiquization) 정책은 국가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역사적, 문화적 왜곡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정책은 마케도니아의 고대 역사를 강조하며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려 했으나, 이웃 국가인 그리스와의 역사적, 문화적 유산에 대한 분쟁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역사적 사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국가 정체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사회적, 역사적 논란을 야기했다.
8. 수상 및 인정
니콜라 그루에프스키는 총리 재임 기간 중 또는 그의 업적을 인정받아 다음과 같은 훈장과 상을 받았다.
- 2014년: 슈티프 시의 최고상인 성 니콜라스 훈장
- 2015년: 성 요반 비고르스키 수도원으로부터 세례자(Preteca) 훈장
- 2011년: 빈 경제 포럼(Vienna Economic Forum) 상 - 국가 및 지역 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로
9. 저술 활동
니콜라 그루에프스키는 여러 서적을 직접 저술하거나 공동 저술했다.
- 마케도니아 경제의 기로(Macedonian Economy on a Crossroads영어), 1998년. 샘 바크닌과 공동 저술했다.
- 탈출구(The Way Out영어)
- 미래를 위한 경험: 다양한 국제 자본 흐름의 경제적 효과, 특히 마케도니아 공화국과 관련하여(Experiences for the Future: Economic Effects of Different Types of International Capital Flows, With Particular Reference to the Republic of Macedonia영어),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