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
히라가 겐나이의 본명은 시라이시 쿠니토모(白石 国倫시라이시 쿠니토모일본어)이며, 후에 '쿠니무네'(国棟쿠니무네일본어)라는 별명도 사용되었다. '겐나이'(源内겐나이일본어)는 그의 통칭이었으나, 한때 다카마쓰 번에 재등용된 이듬해부터 번주의 성인 '미나모토'(源미나모토일본어)의 한자를 피하기 위해 '겐나이'(元内겐나이일본어)로 철자를 변경하기도 했다. 사직 후에는 다시 '겐나이'(源内겐나이일본어)를 사용했다. 그의 자(字아자나일본어)는 시이(士彝시이일본어)였으나, 『희작자고보유』에 실린 '처사구계묘비명'에는 '자이'(子彝자이일본어)로 표기되기도 했다.
겐나이는 수많은 필명과 호를 사용했다. 그의 아호 중 하나인 '큐케이'(鳩渓큐케이일본어)는 시도 마을의 지명인 '하토다니'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희작자로는 '후라이 산진'(風来山人후라이 산진일본어)이 그의 주요 문학 필명이었으며, '고도켄'(悟道軒고도켄일본어)과 '텐지쿠 로닌'(天竺浪人텐지쿠 로닌일본어)도 사용했다. 참고로 '텐지쿠 로닌'과 한 글자 차이인 '텐지쿠 로진'(天竺老人텐지쿠 로진일본어)은 그의 문하생인 모리시마 츄료의 필명이다. 조루리 작가로는 '후쿠치 키가이'(福内鬼外후쿠치 키가이일본어)를, 하이쿠 작가로는 '리잔'(李山리잔일본어)이라는 하이호를 사용했다.
겐나이의 저작 중에는 자신을 모델로 한 '힌카 제니나이'(貧家銭内힌카 제니나이일본어)라는 등장인물이 있다.
2. 생애
히라가 겐나이는 에도 시대 중기에 다방면에서 활약하며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생애는 학문적 탐구, 발명, 문학 및 예술 활동, 그리고 말년의 비극적인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다.
2.1. 출생과 가계
히라가 겐나이는 1729년 사누키국 사누키군 시도우라(현재의 가가와현 사누키시 시도)에서 시라이시 모자에몬(량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야마시타 씨였다. 시라이시 가문은 사누키 다카마쓰 번의 창고지기라는 낮은 신분의 아시가루(혹은 그 이하) 가문이었다. 겐나이 자신은 시나노국 사쿠군에 뿌리를 둔 시나노 겐지 오이 씨 계통의 히라가 씨의 후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료 군감에 따르면, 전국 시대 덴분 5년(1536년) 11월 히라가 겐신 대에 가이국의 다케다 노부토라의 침공을 받아 사쿠군 우미노쿠치 성에서 멸망했다. 이후 히라가 씨는 무쓰국의 시라이시로 이주하여 다테 씨를 섬기며 시라이시 성으로 개명했고, 다시 이요국 우와지마 번을 따라 시코쿠로 내려와 사누키에서 귀농했다는 전승이 있다. 겐나이 대에 시라이시 성을 히라가로 복성했다고 전해진다.
2.2. 어린 시절과 교육
겐나이는 어린 시절 다카마쓰에서 유학과 하이쿠를 공부했으며, 족자에 장난을 쳐서 '오미키 텐진'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 소문이 퍼져 13세부터 번의 의사 밑에서 본초학을 배우고, 유학을 공부했다. 또한 하이카이 그룹에 속해 하이카이 활동도 했다. 174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겐나이는 가문의 가장이 되었다. 1749년에는 창고지기 직책을 이어받았다. 18세에는 지방 다이묘의 약초원에서 공식 직책을 제안받기도 했다.
2.3. 나가사키 시절
1752년경, 겐나이는 1년간 나가사키로 유학을 떠났다. 낮은 신분과 창고지기라는 직업을 가진 겐나이가 어떻게 1년이나 나가사키에서 유학할 수 있었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있으며, 본초학 및 물산학을 좋아했던 다카마쓰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야스의 '내명'이 있었다는 설과, 다카마쓰의 의사이자 본초학 애호가인 쿠보 소칸이 후원자였다는 설 등이 있다. 겐나이가 가독을 상속받기 전후에 번의 약초원에 약방 스님의 하급 관리로 등용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이는 번주 요리야스의 의향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겐나이가 나가사키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사료 부족으로 불분명하지만, 본초학, 네덜란드어, 의학, 유화 등을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나가사키는 외국 선박의 입항이 허용된 몇 안 되는 항구 중 하나였으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많은 중국 상인들이 항구 도시에 거주하며 엄격한 규제 하에 사업을 할 수 있었다. 겐나이가 중국 상인들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구성원들과 교류하면서 도자기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유학을 마치고 나가사키에서 돌아온 후, 1754년 7월 '최근 병약'을 이유로 번에 창고지기 퇴역원을 제출하고, 여동생에게 데릴사위를 들여 가독을 여동생의 남편에게 넘겼다. 1755년에는 측량기(걸은 거리를 측정하는 기구)와 자침기(방향을 측정하는 기구로, 네덜란드인이 제작한 동 기구를 모방한 것)를 제작했다.
2.4. 오사카, 교토, 에도 시절
나가사키 유학을 마친 겐나이는 오사카와 교토에서 한약을 공부했으며, 1757년 에도로 거처를 옮겼다.
2.4.1. 학문 및 연구 활동
에도에서 겐나이는 본초학자 다무라 란스이의 제자가 되어 본초학을 배우고, 한학을 습득하기 위해 하야시가에도 입문하여 성당에 기숙했다. 하야시가의 학숙에서 배운 것은 유학(한학)을 배우는 것이 본래 목적이 아니라, 한문으로 쓰인 본초학과 관련된 고전을 독해하기 위함이었다. 겐나이의 한문 실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으며, 에도 중기의 유학자 시바노 리츠잔은 겐나이를 "학술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두 번째 나가사키 유학에서는 광산 채굴 및 정련 기술을 배웠다.
1757년, 겐나이는 일본 최초의 약품회(약재 및 물산을 전시하는 회)를 발안했다. 이후에도 에도에서 여러 차례 물산회를 개최하며 신진 본초학자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759년 다카마쓰 번은 의술 수행이라는 명목으로 겐나이에게 3인 부치(세 사람분의 식량을 지급하는 녹봉)를 지급하며 그를 고용했다. 겐나이는 이를 관직으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번은 겐나이를 가신으로 취급했다. 1761년 에도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사직했으며, 이때 '시칸 오카마이'(봉공구, 다른 가문에 출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 처분을 받아 이후 막신 등 다른 가문으로의 출사가 불가능해졌다. 일설에는 겐나이가 대번이나 막부에 출사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으나, 이로 인해 좌절되었다고 한다.
2.4.2. 발명 및 공업 활동

1761년, 겐나이는 이즈국에서 광상을 발견하고 산물 브로커로 활동하며 광산 사업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또한 에도에서 자신의 다양한 발명품을 전시했으며, 도쿠가와 막부의 고위 관료인 다누마 오키쓰구뿐만 아니라 의사 스기타 겐파쿠와 나카가와 준안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1766년부터는 무사시국 가와고에 번의 아키모토 스즈아사의 의뢰로 오쿠치치부 산괴의 가와고에 번 치치부 오타키(현재의 치치부시 오타키)에 있는 나카쓰강에서 광산 개발을 진행하여 석면 등을 발견했다(현재의 닛치쓰 치치부 광산). 이 시기 그는 치치부 지방에서 숯 굽기, 아라카와 통선 공사 등을 지도하기도 했다. 현재도 오쿠치치부의 나카쓰 협곡 부근에는 겐나이가 설계하고 오랫동안 머물렀던 건물이 '겐나이 거'로 남아있다.
1772년, 나가사키 여행 중 겐나이는 점토 광맥을 발견했다. 이는 그가 정부에 대규모 도자기 제조를 허가해달라고 청원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는 수출 및 국내 사용을 위한 도자기 생산을 추진했다. 그는 "일본 도자기가 좋으면 당연히 우리는 외국 상품에 금은을 쓰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중국인과 네덜란드인 모두 이 도자기를 찾아 가져갈 것이니, 이는 영원한 국가적 이익이 될 것이다. 원래 점토이므로 아무리 많은 도자기를 수출해도 자원 고갈에 대한 걱정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겐나이는 직접 만들거나 지시하여 '겐나이 도기'라고 불리는 여러 일본 도자기를 제작했다. 이 스타일은 겐나이의 고향인 시코쿠의 고치 도자기 스타일을 따라 주로 세 가지의 선명한 색상을 사용하는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1773년에는 데와국 구보타 번의 번주 사타케 요시아쓰의 초청으로 광산 개발 기술을 지도하기 위해 아니 광산을 방문했다. 그 도중에 들른 가쿠노다테에서는 아키타 번의 무사 오다노 나오타케에게 서양화 기법을 전수했으며, 가쿠노다테 다음으로 들른 가미히노키나이(아키타현 센보쿠시 니시키정)에서는 아이들에게 열기구 원리를 응용한 놀이를 가르쳤다고 전해지며, 이것이 전통 행사 가미히노키나이 종이 풍선 날리기의 기원이라고 한다.
1776년, 나가사키에서 입수한 엘레키텔(정전기 발생기)을 수리하고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화제가 된 엘레키텔을 고급 전시물로 만들어 사례금을 받고 생활비로 사용했으며, 여흥까지 곁들여 관람객 유치에 힘썼다. 광산 개발 지도나 희작, 조루리 등 문학 활동도 생활비를 벌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치치부 광산 사업이 좌절되고, '분노와 자포자기'(문하생인 교카시 히라츠 토사쿠의 평) 속에서 많은 희문을 쓰는 등 생활이 거칠어졌다. 경제 상황도 악화되어 1778년에는 "공을 이루지 못하고 명성만 얻어 한 해가 저물었다"는 한 구절을 읊기도 했다.
2.4.3. 문학 및 예술 활동
겐나이는 에도에서 과학이나 자연을 주제로 한 책들과 함께 풍자 소설들을 여러 권 집필했다. 특히 『물류품질』을 간행하며 네덜란드 자연사에 관심을 가졌고, 서양 서적 입수에 전념했다. 그는 어학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네덜란드 통역사에게 읽게 하여 독해에 힘썼다. 문학 활동도 활발히 하여 단기본류를 집필했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문학 작품 중 하나는 『방귀에 대하여』로, 에도의 인기 있는 유흥가인 료고쿠에서 상류 문화와 하류 문화의 만남을 탐구한 풍자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겐나이 자신은 방귀 예술가로 명성과 인기를 얻은 농부에 대해 사무라이와 '활기찬' 논쟁을 벌이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겐나이와 그의 친구들은 이 예술가가 공연을 가능하게 하는 약물을 사용하는지 여부를 논한다. 겐나이는 이 재주가 인상적이고 칭찬할 만한 독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이시베 킨키치로라는 유학자 사무라이는 이 행위의 무례함과 관람객의 어리석음 때문에 방귀의 공개 공연을 장려하는 것이 유교 예법에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겐나이는 이 긴 대화를 통해 두 상충하는 가치 체계의 차이를 강조한다. 유학자 사무라이에게 이 공연은 예의와 사회 질서에 대한 심각한 위반을 의미하는 반면, 겐나이는 그것이 지혜와 창의성을 구현한다고 믿는다. 두 사람은 방귀가 쓸모없는 배출물에 불과하며, 도쿠가와 사회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정신적 작업과 같이 전통적으로 '생산적'이라고 분류되는 공식적으로 승인된 작업과 비교할 수 없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배출물의 의미와 함의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킨키치로는 "진정한 현자들"이 인간의 예의와 예절에 대해 가르친 모든 것에 어긋난다고 주장하지만, 겐나이는 방귀 예술가가 그러한 쓸모없는 과잉을 음악으로 만들 수 있는 창의성과 지혜를 본다. 겐나이는 이러한 방식으로 물질과 매체를 상류 또는 하류로 분류하는 문제점을 드러내며, 이야기 전반에 걸쳐 상류 문화의 개념과 그 관리자들의 태도를 계속해서 비판한다.
겐나이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풍자 작품은 『뿌리 없는 풀』로, 염라대왕이 온나가타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이다. 겐나이의 지옥 묘사에서 지옥은 활기찬 곳이지만, 현재 인구의 엄청난 증가로 인해 공간이 더 필요하여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염라대왕은 용왕에게 자신이 사랑에 빠진 온나가타 킨쿠노조 2세를 데려오라고 명령한다. 용왕은 누가 인간 세상으로 가서 온나가타를 데려올지 결정하기 위해 조정 회의를 연다. 조정은 어떤 신하가 이 임무를 완수해야 할지 논의한다. 결국 용왕은 문지기인 갓파를 보낸다. 갓파는 배우를 유혹한 다음 물에 빠뜨려 지옥으로 데려올 계획이었지만, 갓파는 젊은 배우와 사랑에 빠진다. 연인을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게 하고 싶지 않았던 갓파는 염라대왕을 달래기 위해 덜 매력적인 온나가타를 데려오지만 실패한다. 염라대왕은 직접 인간 세상으로 나가 킨쿠노조를 찾으려 하지만, 위대한 영웅 배우 이치카와 라이조 1세와의 전투에서 패배한다. 그 후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은 라이조의 꿈이었으며, 그의 임박한 죽음을 예고하는 것이었음이 밝혀진다.
풍자 출판물의 주제를 이어가며, 겐나이의 작품 『사랑의 형편없는 여정』은 그의 친구이자 제자인 오타 난포가 사후에 편집하여 출판한 그의 작품집 『흩날리는 꽃잎과 떨어진 잎』의 일부이다. 이 작품에서 독자는 소년의 몸을 가로지르는 두 마리의 이의 여정을 따라간다. 겐나이는 빈번한 말장난과 언어유희를 사용하여 이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의 부조리함과 유머를 더한다.
겐나이는 스즈키 하루노부와 함께 그림 달력 교환회를 개최하여 우키요에의 융성에 일조했으며, 박람회 개최를 제안하여 에도 유시마에서 일본 최초의 박람회인 '도토 약품회'가 개최되었다.
2.4.4. 개인적인 삶과 사상
겐나이는 남색가였기 때문에 평생 결혼하지 않았으며, 가부키 배우들을 후원하고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세가와 키쿠노조 2세와의 관계는 유명하다. 말년의 살상 사건 또한 남색과 관련된 것이 원인이었다는 설도 있다.
강정제의 재료가 되는 음란한 물을 조달하기 위해 젊은 사무라이 100명과 오고쇼(궁중 여관) 100명이 동시에 교합하는 이야기인 『나가마쿠라 시토네 갓센』과 같은 기발한 호색물도 썼다. 또한 수호산인 명의로 1764년(메이와 원년)에 『국화의 연』을, 1775년(안에이 4년)에는 온나마차야 안내서인 『남색 세견』을 저술하는 등 동성애 관련 저작도 남겼다.
겐나이는 '도요노 우시노 히'에 장어를 먹는 풍습의 시초라는 설이 있다. 이 통설은 도요노 우시노 히의 유래이자 히라가 겐나이의 업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 중 하나이지만, 둘을 연결하는 명확한 근거가 되는 1차 사료나 저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1769년(메이와 6년)에는 CM송으로 알려진 치약 『소세키코』의 작사 작곡을 맡았고, 1775년(안에이 4년)에는 오토와야 타키치의 시미즈모찌 광고 문구를 작성하여 각각 보수를 받았으며, 이들을 통해 일본의 카피라이터의 시초로 평가받기도 한다.
킨카라카와지가 유행하며 일본의 금은동 유출이 우려되자, 이를 염려하여 화지 모조품인 킨카라카와지(의혁지)를 발명했다.
2.5. 말년과 죽음
겐나이는 1779년 여름 하시모토초의 저택으로 이사했다. 그의 말년은 미스터리에 싸여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1779년 말, 그가 다이묘 저택 수리 작업을 맡았을 때, 두 명의 목수가 그를 저택 설계도를 훔쳤다고 비난하자 술에 취해 격분하여 그들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듬해 1월 24일 감옥에서 파상풍으로 사망했다. 향년 52세.
옥사한 시신은 히라츠 토사쿠가 인수했다고도 전해진다. 스기타 겐파쿠 등이 장례를 치르려 했으나, 막부의 허가가 나지 않아 묘비도 시신도 없는 장례가 치러졌다. 이로 인해 겐나이가 실제로는 감옥에서 죽지 않고, 다누마 오키쓰구의 개입 등으로 어딘가로 빼돌려져 남은 생애를 은둔하며 살았다는 여러 설이 제기되었다.
2.5.1. 사후 평가 및 논란
겐나이의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그가 급진적인 사상과 행동으로 인해 사회적 비판을 받았으며, 그의 말년의 비극적인 사건이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특히 그의 살상 사건은 그의 천재성 뒤에 숨겨진 기행과 광기를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스기타 겐파쿠와 같은 동시대 학자들은 겐나이의 학문적 업적과 서양 문물 도입에 대한 기여를 높이 평가했다. 겐파쿠의 회고록인 『난학사시』는 겐나이와의 대화에 한 장을 할애하고 있으며, 겐나이의 묘비명도 겐파쿠가 작성했다.
겐나이의 발명품 중 일부는 실용화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후대에는 그의 업적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쇄국 시대에 서양의 과학 기술과 문화를 일본에 소개하고 산업 진흥에 기여한 선구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1924년 다이쇼 13년에는 종5위가 추증되었다.
3. 작품 및 업적
히라가 겐나이는 과학 발명, 산업 공예, 문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며 수많은 작품과 업적을 남겼다.
3.1. 과학 발명 및 발견
- 엘레키텔: 1776년, 나가사키에서 입수한 네덜란드제 정전기 발생 장치인 엘레키텔을 수리하고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겐나이 자신은 그 원리를 잘 알지 못했지만, 복원에 성공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그는 엘레키텔을 고급 볼거리로 만들어 생활비를 벌고 관람객을 유치하는 데 힘썼다.
- 온도계: 1765년 '일본 창제 한열승강기'라는 온도계를 제작했다. 현재는 존재하지 않지만, 겐나이가 참조한 네덜란드 서적 및 그 원전인 프랑스 서적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알코올 온도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온도계에는 '극한', '한', '냉', '평', '난', '서', '극서' 등의 문자열과 함께 숫자열도 기재되어 있었으며, 화씨를 채택했다.
- 화간포 (석면포): 석면을 이용한 불에 타지 않는 천인 화간포를 개발했다.
- 기구 및 전기 연구: 기구와 전기에 대한 연구도 실용화 직전까지 도달했다고 전해진다.
- 죽마 (타케톤보): 일설에는 죽마의 발명자라고도 전해지며, 이를 사상 최초의 프로펠러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는 죽마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
3.2. 산업 및 공예 활동
- 광산 개발: 이즈국에서 광상을 발견하고 광산 사업을 중개했으며, 무사시국 가와고에 번의 의뢰로 치치부 오타키의 나카쓰강에서 광산 개발을 진행하여 석면 등을 발견했다. 또한 데와국 아키타 번의 번주 사타케 요시아쓰의 초청으로 아니 광산의 광산 개발을 지도했다.
- 도자기 (겐나이 도기) 제작: 1772년 나가사키에서 발견한 점토 광맥을 바탕으로 정부에 대규모 도자기 제조를 청원하고, '겐나이 도기'라는 독특한 스타일의 도자기를 제작했다. 이 도기는 주로 세 가지의 선명한 색상을 사용하며 고치 도자기 스타일을 따랐다.
- 박람회 개최: 일본 최초의 약품회(물산회)를 발안하여 에도에서 여러 차례 물산 박람회를 개최했다.
- 금당혁지 (의혁지): 킨카라카와지의 유행으로 일본의 금은동 유출이 우려되자, 이를 모방한 화지 모조품인 금당혁지(의혁지)를 발명했다.
3.3. 문학 작품
겐나이는 다양한 장르의 문학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내용이 특징이다.
- 『물류품질』: 전 6권으로 1763년 7월에 간행된 본초학 서적이다.
- 『번초보』: 고본으로 연대 미상이다.
- 『네나시구사』 (뿌리 없는 풀): 1763년 10월에 간행된 단기본이다.
- 『네나시구사 후편』: 1769년 1월에 간행되었다.
- 『후류 시도켄 덴』: 1763년 11월에 간행된 고케이본으로, 고샤쿠시 후카이 시도켄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 『후라이 로쿠부슈』, 『후라이 로쿠부슈 후편』: 교분집으로, 『방귀론』, 『나에마라 인이쓰덴』 등을 수록하고 있다.
- 『신레이 야구치 와타리』: 1770년 1월 에도 게키자에서 초연된 기타유 조루리 작품이다.
- 『겐지 오조시』: 1770년 8월 에도 히젠자에서 초연되었다.
- 『큐세이 치유 미나토』: 1771년 1월 에도 히젠자에서 초연되었으며, 요시다 나카하루가 보조했다.
- 『와카바 모미지 아이오이 겐지』: 1773년 4월 에도 히젠자에서 초연되었다.
- 『젠타이헤이키 코세키 카가미』: 1774년 1월 에도 유키자에서 초연되었다.
- 『츄신 이로하 지쓰키』: 1775년 7월 에도 히젠자에서 초연되었다.
- 『아라미타마 닛타 신토쿠』: 1779년 2월 에도 유키자에서 초연되었으며, 모리시마 츄료와 나니와의 니이텐사쿠가 보조했다.
- 『레이겐 미야토가와』: 겐나이 사후인 1780년 3월 에도 히젠자에서 상연되었다.
- 『미바에 겐지 카네오자쿠라』: 미완성작으로, 1799년 1월 에도 히젠자에서 상연되었다.
3.4. 예술 작품
겐나이는 그림 작품과 도자기 디자인 등 예술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 「흑노를 동반한 적복란인도」: 그의 대표적인 회화 작품 중 하나이다.
- 「서양 부인도」: 고베 시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겐나이 도기: 독특한 색상과 디자인으로 알려진 도자기이다.
4. 인물 및 평가
히라가 겐나이는 천재성과 기행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당시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삶과 죽음을 둘러싼 비판과 논란도 존재한다.
4.1. 천재성과 기행
겐나이는 '천재' 또는 '이재'의 인물로 불린다. 쇄국을 시행하던 당시 일본에서 난학자로서 유화나 광산 개발 등 외국의 문화·기술을 소개했다. 문학가로서도 희작의 개조로 불리며, 인형 조루리 등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또한 겐나이 야키와 같은 도자기를 제작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그는 비만 체형으로 더위를 많이 탔다고 스스로를 묘사했다. 겐나이의 저서에 실린 삽화 중에는 겐나이 본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상이 있으며, 이는 후대의 초상화와 비교되기도 한다. 『어람선생춘유기』(1781년 간행)의 '춘유기필삭도'에 그려진 인물은 오타 난포, 우테이 엠바, 히라가 겐나이 등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희작자고보유』(1845년 저술)에 실린 '히라가 큐케이 초상'은 겐나이를 아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겐나이 사망 60여 년 후에 그려진 것이다. 이 초상화는 마른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겐나이가 비만이었다는 설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곰방대를 든 모습이 『어람선생춘유기』의 삽화 속 인물과 닮았다는 지적도 있다.
4.2. 영향력과 유산
겐나이는 스기타 겐파쿠를 비롯한 당시 난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겐파쿠의 회고록인 『난학사시』는 겐나이와의 대화에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 겐나이의 묘비명인 '처사구계묘비명'도 겐파쿠가 작성했다.
발명가로서의 업적에는 네덜란드제 정전기 발생 장치인 엘레키텔의 소개와 화간포의 개발이 있다. 기구와 전기에 대한 연구도 실용화 직전까지 도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연구들이 실용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아 후세의 평가가 엇갈리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4.3. 비판과 논란
겐나이는 남색가였기 때문에 평생 결혼하지 않았으며, 가부키 배우들을 총애하고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세가와 키쿠노조 2세와의 관계는 유명하다. 말년의 살상 사건 또한 남색과 관련된 것이 원인이었다는 설도 있다.
엘레키텔 복원 과정에서 겐나이 자신이 그 원리를 잘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원에 성공했다는 점은 그의 천재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의 연구가 이론적 이해보다는 실용적 재능에 더 의존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그의 죽음과 관련된 논란은 그의 삶의 미스터리한 측면을 더욱 부각시킨다. 감옥에서의 죽음과 장례식의 부재는 그를 둘러싼 다양한 추측과 전설을 낳았다.
5. 풍모와 초상화
히라가 겐나이의 풍모와 초상화에 대한 기록은 그의 생애와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논쟁의 대상이다. 겐나이 자신은 비만 체형으로 더위를 많이 탔다고 묘사했지만, 후대에 그려진 초상화 중 일부는 마른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차이를 보인다.
5.1. 18세기 源内 저서 삽화
겐나이의 저서에 실린 삽화 중에는 겐나이 본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상이 있다.



5.2. 기타 초상화










6. 묘소 및 기념
히라가 겐나이의 묘소는 도쿄와 그의 고향인 사누키에 각각 존재하며,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한 기념물과 묘비명은 그의 삶과 업적에 대한 후대의 평가를 담고 있다.
6.1. 도쿄의 묘소
겐나이의 계명은 지켄 레이유(智見霊雄지켄 레이유일본어)이다. 그의 묘소는 도쿄 아사쿠사 하시바(현재 도쿄도 다이토구 하시바 2-22-2)에 있던 소센지에 마련되었다. 소센지가 이타바시로 이전한 후에도 묘소는 하시바의 옛터에 그대로 남아있다. 묘소는 친구 스기타 겐파쿠가 사재를 털어 세웠다고 전해진다. 묘소 뒤편에는 겐나이를 모셨던 종복 후쿠스케의 묘가 나란히 있다.
겐나이의 묘소는 여러 차례 변경된 흔적이 있다. 19세기 전반에 성립된 『큐케이 유지』에 따르면, 묘비에는 '히라가 겐나이 묘', '지켄 레이유 거사', '안에이 8년 기해 12월 18일'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반면, 19세기 전반에 성립된 『우모레기바나』에 따르면, 계명만 새겨져 있고 몰년월일 등은 없었으며, '히라가 겐나이 묘'라는 글자는 새겨진 것이 아니라 먹으로 쓰여 있었다고 한다. 1891년 시점에는 '히라가 겐나이 묘', '안에이 8년 기해년', '12월 18일'이라는 글자도 새겨져 있었다. 묘비의 표면이 부자연스럽게 깎여 있다는 지적도 있다.




소센지의 히라가 겐나이 묘는 1924년 다이쇼 13년에 도쿄부의 사적으로 가 지정되었다. 그러나 1928년 소센지를 이전하고 사적 지정을 해제하려는 계획이 알려지자, 이를 우려한 유지들의 운동으로 히라가 겐나이 묘만은 하시바의 옛터에 남게 되었고, 1929년에 다시 도쿄부의 사적으로 가 지정되었다. 같은 시기에 마쓰다이라 요리나가를 회장으로 하는 히라가 겐나이 선생 현창회가 발족하여 부지 정비, 묘 옆에 기념비 '히라가 겐나이 묘지 수축의 비' 건립, 담장 건설 등을 추진하여 1931년(쇼와 6년)에 완성했다. 1943년(쇼와 18년)에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6.2. 사누키의 묘소
겐나이의 고향인 사누키시 시도의 시도지 내 지쇼인(히라가 씨의 보리사)에도 겐나이의 묘가 있다. 이 묘는 겐나이의 의동생(막내 여동생의 남편)으로 히라가 가문을 계승한 히라가 곤다유가 의형인 겐나이를 일족과 고향의 옛 지인들의 손으로 애도하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진다.
6.3. 스기타 겐파쿠의 묘비명
스기타 겐파쿠는 소센지의 묘와는 별도로 무사시국 가나자와(후의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가나자와구)의 노미도에 비석을 세울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실현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또한 겐파쿠는 겐나이를 찬양하는 약 300자 정도의 '처사구계묘비명'을 저술했다. 이 비명은 『희작자고보유』(1845년 저술)의 사본을 통해 후세에 전해졌다. '비명'은 이 긴 글 전체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글 속에서는 '명'이 말미의 16자로 이루어진 시 부분을 지칭한다.

"아아, 비범한 사람이여, 비범한 일을 좋아하고, 행위도 비범하니, 어찌 비범하게 죽었는가"라는 구절은 전한의 사마천 『사기』 '열전' 사마상여열전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 비명을 새긴 비석이 실제로 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세키네 모쿠안, 미즈타니 후토, 오쓰키 뇨덴 등의 설에 따르면, 한때 묘비에 처사구계묘비명이 새겨졌지만, 죄인의 묘를 세우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묘를 부수거나 깎아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소카가야 시에의 설은 처사구계묘비명은 원고로만 존재했고, 실제로 새겨진 적은 없다고 주장한다. 조후쿠 이사무는 이 비명이 소센지의 작은 묘비가 아니라 노미도의 비석을 상정한 것이 아니냐고 추측했다.
인쇄물로는 1880년 히라가 겐나이 사후 100주년 기념 안내문에 게재되었고, 이후 다양한 전기에서 소개되었으나 문면에 차이가 있다. 초고 및 『희작자고보유』에서는 향년 51세로 기록되어 있지만, 1890년 히라가 가문이 발표한 '히라가 겐나이 이력 조사서 사본' 및 이를 취재한 미야타케 가이코쓰의 전기에서는 향년 48세로 기록되어 있다.
1930년 옛 소센지의 히라가 겐나이 묘 옆에 히라가 겐나이 묘지 수축의 비가 세워졌고, 그 뒷면에 처사구계묘비명 전문이 새겨졌다. 사누키시의 '히라가 겐나이 선생 동상'의 대좌에도 "아아 비범한 사람이여..."로 시작하는 16자 시가 새겨져 있다.
7. 대중문화에서의 등장
히라가 겐나이는 소설, 만화,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게임, 연극 등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다채로운 모습으로 묘사되고 활용되었다.
7.1. 문학 및 만화
- 소설:
- 사쿠라다 츠네히사 『히라가 겐나이』: 겐나이가 스기타 겐파쿠의 노력으로 몰래 옥에서 탈출한 후의 이야기를 다룬다.
- 무라카미 모토조 『히라가 겐나이』
- 요시카와 에이지 『나루토 비첩』: 겐나이가 등장한다.
- 나스 마사모토 『즈코케 시간 표류기』
- 히사오 주란 『히라가 겐나이 포물장』
- 야마모토 마사요 『겐나이 선생 출항 축하』
- 난조 노리오 『무뢰 무사도』
- 히로세 마사시 『이문 후라이 산진』
- 아카마쓰 미츠오 『에도의 대야마시 천재 발명가 히라가 겐나이』
- 시미즈 요시노리 『겐나이 만화경』
- 오누마 히로유키, 와타나베 준이치 『오에도 난학사시』
- 츠츠이 야스타카 『하늘을 나는 표구사』: 세계 최초의 유인 비행을 했다고 알려진 우키타 고키치를 후원하는 역할로, 흥미 위주로 경거망동하는 현대 언론인을 겹쳐 그려냈다.
- 이자와 모토히코 『은마전 겐나이 사투의 권』
- 유메마쿠라 바쿠 『오에도 공룡전』
- 마나베 아키히토 『만약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총리가 된다면』
- 이누이 로쿠로 『뿌리 없는 풀 히라가 겐나이의 살인』
- 이누이 로쿠로 『극장국의 괴인』
- 만화:
- 이시노모리 쇼타로 『히라가 겐나이 해국신서』: 겐나이가 다누마 오키쓰구의 일대기 저자로 그려진다.
- 우에무라 카즈오 『봄의 폭풍』
- 미나모토 타로 『풍운아들』 다누마 시대 편: 난학자들의 오피니언 리더 중 한 명으로 그려지며, 시대가 자신을 너무 따라오지 않아 고뇌하는 천재로 묘사된다.
- 호리 노부유키 『에도 무라사키 특급』: 시대극 패러디 4컷 개그 만화. 겐나이는 '엘레키텔' 연구에 집착하지만, 그 '엘레키텔'은 어째서인지 전기 안마이다.
- 미즈키 시게루 『동서 기괴 신사록』: 고정관념적인 역사관에 기반하여 기인으로 다루어진다.
- 아오야 핑크 『오니가이 카르테 시리즈』: 허공을 떠돌며 현대를 살아가는 오니가이라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시리즈 그 14(최종장)'에서는 오니가이(히라가 겐나이)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 호시노 유키노부 『쇠사슬의 나라』: 과학자와 희작자 형제라는 형태로 겐나이 이인설을 그린다.
- 요시나가 후미 『오오쿠』: 8권부터 등장. 남장 여자로 그려진다.
- 하세가키 나루미 『도네가와 리리카의 실험실』(원작: 아오야기 미도리토): 'NOTE 8. 짧은 인생, 꿈꾸는 소녀'에서 등장한다.
- 나카마 료 『이소베 이소베에 이야기 ~세상은 괴로워~』
- 쿠로사와 아키요/요코우치 켄스케 『기상천외☆가부음곡극 겐나이』
- 토메 케이 『쿠로가네』: 주인공 진테츠를 사이보그로 만든 것이 겐나이를 모델로 한 겐키치라는 난학자이다.
- 소라치 히데아키 『은혼』: 겐나이를 모델로 한 '에도 제일의 발명가'를 자칭하는 기계공 히라가 겐가이가 등장한다.
7.2. 영화 및 드라마
- 영화:
- 『나루토 비첩 전편 본토편』 『후편 나루토편』(1936-1937년, 겐나이 역: 미즈노 히로시)
- 『쇼기 다이묘』(1960년, 겐나이 역: 미즈노 히로시)
- 『(비)고쿠라쿠 베니벤텐』(1973년, 겐나이 역: 나가 히로시)
- 『우타마로 꿈이라 알았더라면』(1977년, 후라이 산진 역: 우치다 료헤이)
- 『유메 십야 제10야』(2007년, 겐나이 역: 이시자카 코지)
- 『벼룩 잡는 사무라이』(2018년, 겐나이 역: 쇼후쿠테이 츠루코)
- 텔레비전 드라마:
- 『등불, 지금도 꺼지지 않고 「히라가 겐나이」』(1959년, 니혼 TV, 겐나이 역: 반도 고타로)
- 『천하어면』(1971년, NHK, 겐나이 역: 야마구치 타카시): 현대를 에도 시대로 바꾸어 겐나이를 안내역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며 풍자적인 요소를 담았다.
- 『키카이다 01』 제36화 「4차원의 괴물 공포의 타임 여행」(1973년, NET, 이시노모리 쇼타로 원작, 겐나이 역: 노노 코스케): 악의 조직 섀도우가 겐나이를 납치하려 타임 터널로 에도 시대로 이동하고, 01과 비진다(비진더)가 이를 쫓아 막는 이야기가 있다. 배경은 겐나이가 엘레키텔을 복원한 1776년경이다.
- 『나루토 비첩』(1977년, NHK, 겐나이 역: 야마구치 타카시): 요시카와 에이지의 원작을 드라마화. 극중 겐나이가 촛불을 열원으로 화지와 곤약으로 만든 미니어처 기구를 날리는 장면이 있다.
- 『모모타로 사무라이』(1981년, 니혼 TV, 겐나이 역: 이누즈카 히로시): 제226화 '엘레키를 먹은 두 도깨비'에 게스트로 등장했다.
- 『그림자 군단 II』(1981년, 간사이 TV, 겐나이 역: 야마무라 소) : 도쿠가와 이에시게 시대 말기, 1760년경이 배경. 겐나이는 주인공 이가 닌자 그룹에 과학적인 면에서 협력하는 역할이었다.
- 필살 시리즈(아사히 방송): 시대적으로 맞지 않지만 현대적인 기구나 글라이더를 등장시킬 때 겐나이를 등장시키는 경향이 있다.
- 『시골 아편 전쟁에 가다 날아라! 열기구여 홍콩으로』(1983년, 겐나이 역: 미야구치 세이지): 겐나이가 옥중에 있었다(아편 전쟁 당시 일본에서 투옥된 난학자로는 다카노 초에이가 있다. 극중 히라가는 113세로 설정되었다).
- 『필살 시키리닌』(1984년) 제5화 '만약 새 인간 대회에서 우승한다면': 겐나이가 에도 시대의 비행 콘테스트에서 심사위원으로 등장한다.
- 『부부 쥐 오늘 밤이 승부!』(1984년, TV 도쿄, 겐나이 역: 와카바야시 고)
- 『날아라! 히라가 겐나이』(1989년, TBS, 겐나이 역: 니시다 토시유키): 겐나이는 풍부한 지식을 구사하여 에도에서 일어난 사건의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탐정 같은 역할의 주인공이다.
- 『비이도로데소로 ~나가사키야 꿈 일기~』(1990년, NHK, 겐나이 역: 야마구치 타카시): 앞서 언급된 『천하어면』의 후일담이다.
- 『도노사마 후라이보 카쿠레타비』(1994년, TV 아사히, 겐나이 역: 히노 쇼헤이)
- 『다마시에 우타마로 III~IV』(2013-2014년, TV 아사히, 겐나이 역: 사사노 타카시)
- 『오에도 수사망 2015 ~은밀 동심, 악을 베다!』(2015년, TV 도쿄, 겐나이 역: 고바야시 넨지): 앞서 언급된 생존설에 기반한 해석으로 그려지며,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에 의해 실각 몰락 붕괴한 다누마 가문의 '숨겨진 공주'인 사나에의 감시역으로 등장한다.
- 『풍운아들 ~난학혁명편~』(2018년, NHK 종합, 겐나이 역: 야마모토 코지): 앞서 언급된 만화 『풍운아들』(미나모토 타로)을 원작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이다.
- 『나루토 비첩』(2018년, NHK 종합, 겐나이 역: 마사나 보쿠조)
- 『오에도 스팀펑크』(2020년, TV 오사카, 겐나이 역: 롯카쿠 세이지)
- 『오오쿠』(2023년, NHK 종합, 겐나이 역: 스즈키 안): 앞서 언급된 만화 『오오쿠』를 원작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 남녀가 역전된 세계를 그리고 있으며, 겐나이는 남장 여자로 설정되어 있다.
- 『베라보 ~츠타주 에이가노 유메바나시~』(2025년, NHK 종합 텔레비전/BS1, 대하드라마, 겐나이 역: 야스다 켄): NHK 대하드라마 64번째 작품. 츠타야 주자부로의 생애를 그린다. 대하드라마에 겐나이가 등장하는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다.
- 애니메이션:
- 『21에몬』(제15화 '오에도 5에몬 모닝? 수수께끼의 주게무 성인!!', 1991년 8월 29일, TV 아사히): 이 작품에 등장하는 가상의 오래된 여관 츠즈레야에 에도 시대에 히라가 겐나이가 숙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원작 만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 『은혼』(2006년~, TV 도쿄): 앞서 언급된 만화 『은혼』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작품. 히라가 겐나이를 모델로 한 '에도 제일의 발명가'를 자칭하는 기계공 히라가 겐가이가 등장한다.
- 『영화 고양이 고양이 일본사 ~료마의 엉망진창 타임 트래블이다냥!~』(2020년 2월 22일 공개): 만화 『고양이 고양이 일본사』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
- 『마스크 오브 제규이』 OVA: 히라가 겐나이는 미키(유명한 무녀 샤무스의 후손)를 보호하고 전설의 가면이 잘못된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T.P. 사쿠라』 OVA: 히라가 겐나이가 그의 엘레키텔과 함께 등장한다.
- 『오! 에도 로켓』 에피소드 10: 은퇴한 거주자가 겐나이임이 밝혀진다. 그가 자신의 것이라고 말하는 후라이 로우하우스 블록도 그의 필명 중 하나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 『제로의 사역마』: 히라가 사이토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사이토가 일본 출신이므로, 겐나이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 『리드 오어 다이』: 많은 다른 역사적, 전설적 인물들의 복제본과 함께 겐나이가 등장한다. 『리드 오어 다이』에서 겐나이는 자신의 엘레키텔을 매우 강력한 파괴 무기로 사용하여 백악관을 파괴하고 전투 헬리콥터 함대 전체를 전멸시킨다.
- 『마이히메』: 거대한 기계 개구리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플린트 타임 탐정』: 타임 시프터 엘레킨과 함께 등장하여 거대 로봇을 만든다.
- 『데마시타! 파워퍼프걸 Z』(제30화 '걸즈와 그놈!'): 히라가 켄나이라는 캐릭터가 원시적인 형태의 케미컬 Z와 오에도 차키차키 무스메를 만든 책임자로 등장한다. 그는 또한 엘레키텔을 사용하여 그놈의 영혼(검은 빛)을 몸에서 분리시킨다.
- 『디지몬 어드벤처』(제13화 '엔젤몬 각성!'): 겐나이라는 노인이 선택받은 아이들/디지데스티드 앞에 나타나 그들의 여정을 돕는다. 그는 두 번째 시즌인 『디지몬 어드벤처 02』에서 젊은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그의 『디지몬 어드벤처』 디자인은 옛 일본 스타일을 기반으로 하며, 그의 이름 또한 역사적인 겐나이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 『비탄의 아리아』 라이트 노벨: 겐나이는 암도 부테이 아야 히라가의 유명한 조상이다.
- 『센고쿠 컬렉션』 제6화: 천재적이고 서투른 소녀로 구현된다.
- 『바람에 실려 온 츠키카게 란』: 겐나이가 제7화에 등장한다.
- 『코로코로 소시』: 신타로 카고의 만화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캐릭터이다.
- 드라마 사랑의 시 시리즈 및 TV 애니메이션판 『즈코케 삼인조』의 『즈코케 시간 표류기』(겐나이 역: 후지오카 히로시(드라마판), 마츠야마 타카시(애니메이션판))
- 애니메이션 『라쿠고 텐뇨 오유이』(겐나이 역: 테라소마 마사키)
- 애니메이션판 『안미츠히메』
- 『날아라! 호빵맨』: 카라쿠리 군나이라는 발명가 캐릭터가 등장한다.
7.3. 게임
- 캡콤 『에도탄』
- 사이쿄 『전국 에이스』: 그를 모티브로 한 '히라노 겐나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 빅터 인터랙티브 소프트웨어 『오에도 르네상스』: 그의 발명으로 에도를 발전시키는 막부 운영 게임이다.
- 겐키 『닌쿄덴 도세이닌 일대기』: 겐나이를 호위하는 임무가 있으며, 특정 캐릭터를 동료로 만들기 위한 중요한 플래그가 된다.
- 세가 『에이케츠 대전』: 엘레키텔에서 영감을 받아 번개로 피해를 주는 무장으로 자군에 추가되었다.
- 스퀘어 『라이브 어 라이브』: 바쿠마츠 챕터에서 기계 함정을 만드는 책임자인 겐나이라는 기계공이 등장한다. 챕터의 배경이 바쿠마츠 시대이므로 그의 등장은 시대착오적이지만, 이시카와 고에몬, 요도도노, 아마쿠사 시로 토키사다의 추가 등장으로 미루어 볼 때 이 게임 섹션은 인기 있는 일본 역사를 의도적으로 혼합하여 설계된 것이 분명하다.
- 크리티컬 롤 웹 시리즈 『크툴루의 부름 RPG』 원샷: 겐나이는 세상의 모든 구석에 빛을 비춰 '굶주린 밤의 마을'을 굶겨 죽이려는 비밀 결사의 일원이다. 이다 코드웰 박사는 겐나이의 엘레키텔을 사용하여 잠시 수정궁의 불을 켜 '굶주린 밤의 마을'을 막아낸다.
- 발키리 크루세이드 모바일 카드 턴제 비디오 게임: 여성 버전의 히라가가 카드로 존재한다. 엘레키텔도 '그녀'와 함께 언급된다.
- 오니기리 무료 MMORPG: 여성 버전의 히라가 겐나이가 등장한다. 그녀는 메인 퀘스트 라인 스토리의 일부이다. 특별 파트너 캐릭터로서 플레이어는 '뱅가드 스왑' 기능을 사용하여 그녀를 조작할 수도 있다.
7.4. 연극
- 이노우에 히사시 작 『표리 겐나이 개합전』: 1970년 쿠마쿠라 카즈오 연출, 야마다 야스오 주연으로 테아토르 에코 신장 개관 기념 공연으로 초연되었다. 방대한 자료를 구사하고 언어유희를 극대화한 음악극으로, 센세이셔널한 평판을 얻어 희곡이 즉시 신초샤에서 출판되는 이례적인 전개를 보였다. 1992년에도 야스하라 요시토 주연으로 에비스로 이전한 같은 극장의 개관 기념 공연으로 재연되었다. 2008년에는 작가가 희곡을 개정하여 니나가와 유키오 연출, 카미카와 타카야 주연으로 분카무라 시어터 코쿤 등에서 상연되었다.
- 작/작사/연출: 요코우치 켄스케, 작곡: 후카사와 케이코, 안무: 럭키 이케다/아야키 에리 봇짱 극장 제8작 『기상천외☆가부음곡극 「겐나이」』: 주연: 칸 토시아키, 미야가와 히로시(모두 봇짱 극장판), 미에노 아오이(와라비자, 전국 공연판). 2013년 4월 13일부터 2014년 3월 16일까지 봇짱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 뮤지컬 『겐나이 - 오다노 나오타케를 키운 남자』(와라비자)
8. 관련 시설 및 행사
히라가 겐나이를 기념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시설과 행사가 존재한다.
- 히라가 겐나이 기념관, 히라가 겐나이 선생 유품관: 가가와현 사누키시 시도에 위치하며, 그의 발명품, 저작물, 스기타 겐파쿠와 겐나이의 서한 등이 전시되어 있다. 2009년 3월 22일에 히라가 겐나이 기념관이 개관했으며, 히라가 겐나이 축제의 장소이기도 하다. JR 시도역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다.
- 히라가 겐나이 묘: 도쿄도 다이토구 하시바 2초메 옛 소센지 묘지에 위치하며, 1943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부지 내에는 그의 종복이었던 후쿠스케의 묘도 있다.
- 히라가 겐나이 선생 묘: 가가와현 사누키시 시도 미운굴 지쇼인에 위치한다. 이 절은 히라가 가문의 보리사이며, 묘는 의동생인 히라가 곤다유가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매년 12월에는 법요가 거행된다.
- 히라가 겐나이 생사당: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 도모노우라에 위치하며, 히로시마현 지정 사적이다.
- 겐나이 상: 히라가 겐나이의 위업을 기리고 발명 고안을 진흥하기 위한 기금을 엘레키텔 오자키 재단이 1994년에 기증했다. 이 기금을 바탕으로 가가와현 사누키시(옛 시도정)와 엘레키텔 오자키 재단이 시코쿠 내 과학 연구자를 대상으로 하는 겐나이 상과 장려상을 제정하여 매년 3월에 표창한다.
- 히라가 겐나이 전: 도쿄도 에도 도쿄 박물관(2003년 11월 29일 ~ 2004년 1월 18일), 도호쿠 역사 박물관(2004년 2월 14일 ~ 3월 21일), 오카자키시 미술 박물관(2004년 4월 3일 ~ 5월 9일), 후쿠오카시 박물관(2004년 5월 27일 ~ 7월 4일), 가가와현 역사 박물관(2004년 7월 17일 ~ 8월 29일)에서 개최되었다. 이 전시회에서는 엘레키텔 등의 복원품도 전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