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후쿠시마 야스마사(福島安正, 福島安正후쿠시마 야스마사일본어, 1852년 10월 27일 ~ 1919년 2월 19일)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군이자 외교관, 탐험가로서, 일본의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에 걸쳐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10개 국어 이상에 능통했으며, 군부 내에서 뛰어난 지리학자이자 언어학자로 평가받는 정보 장교였다. 보신 전쟁과 세이난 전쟁에 참전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고, 이후 청일 전쟁, 의화단 사건, 러일 전쟁 등 일본 제국의 주요 군사적 충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베이징과 베를린에서 군사 무관으로 활동하며 정보 수집 및 외교 협상에 기여했으며, 시베리아 횡단 말 탐험을 통해 광대한 아시아 대륙을 홀로 횡단하며 일본의 국가적 영웅으로 부상했다. 그의 탐험은 당시 건설 중이던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건설 상황과 지역 기반 시설, 지휘 통제 체계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확보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말년에는 관동주 총독부 총독을 역임하며 일본의 대외 팽창 정책의 최전선에 섰으며, '강건주의'를 주창하며 일본 군사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후쿠시마 야스마사는 뛰어난 능력으로 일본 제국의 확장에 기여했으나, 그의 활동은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확장주의적 면모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후쿠시마 야스마사는 1852년 10월 27일, 시나노국 마쓰모토 번의 성곽 마을(현 나가노현 마쓰모토시)에서 마쓰모토 번의 하급 번사인 후쿠시마 야스히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 이름은 긴주타로였다.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1867년, 그는 에도로 가서 강무소 교사이자 하타모토인 스즈키 쿠니사부로의 사설 학원에서 공부했으며, 동시에 다른 곳에서 피리와 나팔 연주를 익혔고, 1868년 3월에는 네덜란드식 군악대 북 연주법 면허를 취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신 전쟁 중 에치고 지역으로 향하는 마쓰모토 번 병사로 종군 중이던 아버지의 요청으로 귀향했다. 그는 저격병대에 소속되는 한편, 마쓰모토를 지나는 관군 각 번의 야영지를 방문하여 군악을 배우고, 네 번의 악보를 절충하여 마쓰모토 번 군악대 제도를 고안했으며, 이 공로로 번교의 총 지도역으로 발탁되었다.
메이지 원년에 번주 도다 미쓰노리를 따라 도쿄로 상경했을 때 개성학교에서 영어학을 배웠으나 도중에 번주를 따라 귀향했다. 재차 제출한 유학 허가서가 인정되어 학비 지급 유학생으로 개성학교에 다니면서, 1869년에는 우리우 미토라의 사설 학원에서, 1871년에는 와세다의 북문사, 이어서 란주사에서도 영어를 공부했다. 폐번치현으로 번의 학비 지급이 중단되자, 1873년 초부터 일신진사지사에서 번역에 종사했으며, 이어서 권학의숙에서 영어 교사를, 대장성 관료 자택에서는 가정교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인연이 닿아 사법성 경 에토 신페이 자택의 가정교사가 되었고, 같은 해 4월 사법성 13등 출사(명법료 번역과)에 임명되었다. 뛰어난 어학 능력을 인정받아 1874년 9월에는 문관으로서 육군성으로 자리를 옮겼다. 1876년 7월부터 10월까지 미국으로 출장하여 필라델피아 만국박람회에 사이 고 주도를 수행했다. 1877년의 세이난 전쟁에는 토벌군 필기생으로 종군하며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전령사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민첩한 사고와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능력 덕분에 일찍이 일본 제국 육군 참모본부에 배속될 수 있었다.
3. 군 경력 및 해외 활동
후쿠시마는 군 생활 초반부터 해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878년 5월, 육군사관 등용 시험에 합격하여 육군 중위가 되었고, 같은 해 12월 참모본부장 전령사로 취임했다. 1879년 3월에는 육군교도단 보병대대에 소속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참모본부 관서국원으로 발령받았다. 이 시기 그는 몽골을 비롯해 중국, 조선 등지를 직접 조사하며 정보를 수집했다. 1883년 2월 육군 대위로 승진했고, 같은 해 6월 청나라 주재 공사관 무관으로 부임했다. 1882년부터 1884년까지 베이징에서 군사 무관으로 복무하며 정보 수집 활동을 이어갔다.
1884년 11월에는 참모본부 관서국원 겸 전령사로 취임했다. 1885년 2월부터 4월까지 톈진 조약 협상에 수행원으로 배석하기도 했다. 육군대학교에서는 독일에서 초빙된 클레멘스 빌헬름 야콥 메켈에게 사사했다. 1886년에는 인도와 영국령 버마를 시찰하는 등 광범위한 해외 활동을 펼쳤으며, 이듬해인 1887년 육군 소좌로 승진했다. 이후 독일 베를린 주재 공사관에 주재하며 특명전권공사 사이온지 긴모치와 함께 정보 분석 작업을 수행하고, 러시아 제국의 시베리아 철도 부설 정보 등을 일본에 보고했다.
1892년 귀국 시, 그는 폴란드 베를린에서 출발하여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예카테린부르크를 거쳐 외몽골, 이르쿠츠크를 지나 동시베리아까지 약 1.80 만 km에 달하는 거리를 1년 4개월에 걸쳐 말을 타고 홀로 횡단하는 장대한 탐험을 단행했다. 이 여행은 단순히 모험을 넘어, 건설 중이던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건설 상황과 지역 기반 시설, 지휘 통제 체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중요한 군사적 목적을 포함했다. 여행 중인 1893년 3월 1일, 만주에 진입하기 전에 육군 중좌로 진급했다. 그의 횡단 이야기는 일본에서 국민적 영웅을 만들었으며, 그에게 훈삼등 서보장을 안겨주었다. 아시아 횡단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후, 후쿠시마는 자신의 말들을 우에노 동물원에 기증했고, 이 말들은 곧 유명한 관광 명소가 되었다. 이렇듯 그는 뛰어난 언어 능력(10개국어 이상 능통)과 지리학적 지식을 활용하여 정보 수집과 외교 활동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베를린 체류 시기, 그는 다양한 내기에서 팔의 힘이나 신체적 능력으로 승리하며 명성을 얻었다. 후쿠시마는 러시아를 영국과 일본 양국의 주요 적으로 간주했던 영국 기병 장교 프레데릭 거스타버스 버나비를 존경했으며, 이러한 지정학적 인식은 그의 정보 활동 방향에도 영향을 미쳤다.

4. 주요 전쟁 참전 및 탐험
후쿠시마 야스마사는 일본 제국의 주요 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894년 6월, 경성부 공사관 무관으로 부임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제1군 참모로서 청일 전쟁에 참전했다. 이 전쟁에서 그는 뛰어난 정보 분석 능력과 전술적 기여를 통해 일본의 승리에 일조했다.
1900년 4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며 서부도독부 참모장을 겸임했다. 같은 해 6월, 의화단 사건 진압을 위해 임시 파견대 사령관으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1900년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북청연합군 총사령관 막료로서 작전회의에서 의장 역할을 수행하며,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그리고 베이징 관화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국제 연합군의 중재자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사건 이후 잠시 일본 제국 육군대학교로 돌아와 독일 장군 클레멘스 빌헬름 야콥 메켈 밑에서 다시 수학했다.
러일 전쟁 (1904-1905) 기간에는 1904년 2월 대본영 참모로 취임했으며, 같은 해 6월부터는 만주군 총사령부 참모로서 그동안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첩보 활동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특히, 만주 마적들을 이끌고 싸운 "요서 특별임무반"과 "만주 의용군"의 총지휘를 맡은 사실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전쟁 중인 1904년, 그는 전쟁 자금 지원을 협상하기 위해 캐나다 서스캐처원주를 경유하여 뉴욕으로 향했다. 그는 서스캐처원주 리자이나 동쪽에서 특별 열차를 잠시 세워 대평원을 조망했는데, 그가 정차했던 철도 분기점은 그의 이름을 따서 '후쿠시마'라고 명명되었다.
러일 전쟁 이후, 그는 참모본부 장교로서 이집트, 오스만 튀르크, 페르시아, 아라비아, 인도, 버마, 시암 그리고 투르키스탄 등지를 방문하며 광범위한 시찰 활동을 이어갔다. 1902년에는 메이지 천황을 대리하여 영국의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에 참석했으며, 영일 동맹을 위한 비밀 외교 협상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바스 훈장 명예 기사 사령관(KCB)과 다닐로 1세 왕자 훈장을 수여받는 등 여러 외국 훈장을 받았다.
5. 사상 및 철학
후쿠시마 야스마사는 단순히 뛰어난 군인과 외교관을 넘어, 독자적인 군사적, 정치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특히 '강건주의'(剛健主義고켄슈기일본어)를 주창했는데, 이는 굳세고 건강한 정신과 신체를 강조하며 국가적 강인함을 추구하는 사상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그의 말년 전국 각지를 말을 타고 여행하는 등 개인적인 삶의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상 중 주목할 만한 점은 러시아를 영국과 일본 양국의 주적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영국 장교 프레데릭 거스타버스 버나비와 공유했던 지정학적 인식으로, 그의 정보 수집 활동, 특히 시베리아 횡단 탐험의 주요 동기가 되었다. 그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일본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에 대한 정보 확보에 주력했다.
이러한 강건주의와 반러시아적 시각은 당시 일본 제국의 대륙 침략 정책 및 군국주의적 경향과 맥을 같이 했다. 후쿠시마의 사상은 일본의 군사적 팽창과 강력한 국력 건설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데 일조했으며, 그의 정보 활동과 군사적 기여는 궁극적으로 일본의 확장주의적 야망을 실현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사상은 일본의 군사 정책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강력한 군사력과 정보력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일조했다.
6. 관직 및 공직
후쿠시마 야스마사는 군인으로서의 경력 외에도 여러 중요한 관직과 공직을 역임했다. 1906년 4월, 그는 참모본부 차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7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1907년 9월에는 그의 군공을 인정받아 남작 작위를 수여받아 화족의 반열에 올랐다. 1908년 12월에는 참모차장(명칭 변경)으로 발령받았다.
가장 중요한 공직 중 하나는 1912년 4월부터 1914년 9월 15일까지 관동주 총독부 총독으로 재임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관동주의 행정 및 군사적 통치를 총괄하며 일본의 만주 지배 강화를 위한 정책을 수행했다. 1914년 9월 15일, 그는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는 동시에 후비역으로 편입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제국재향군인회 부회장으로 취임하여 군 은퇴 후에도 공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말년에 '강건주의'를 내세우며 전국 기마 여행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후쿠시마 야스마사가 생전에 받은 주요 영전은 다음과 같다.
분류 | 날짜 | 내용 |
---|---|---|
위계 | 1890년 7월 3일 | 종6위 |
1893년 4월 11일 | 정6위 | |
1895년 11월 15일 | 종5위 | |
1900년 7월 10일 | 정5위 | |
1905년 7월 20일 | 종4위 | |
1910년 8월 10일 | 정4위 | |
1913년 8월 20일 | 종3위 | |
1914년 9월 30일 | 정3위 | |
1919년 2월 19일 | 종2위 | |
훈장 및 기타 | 1889년 11월 22일 | 훈6등 서보장 |
1895년 10월 18일 | 공4급 금치훈장 | |
1895년 11월 18일 | 종군기장 (메이지 27·28년 종군기장) | |
1906년 4월 1일 | 공2급 금치훈장 및 종군기장 (메이지 37·38년 종군기장) | |
1907년 9월 21일 | 남작 서작 | |
1907년 11월 13일 | 훈1등 서보장 | |
1914년 9월 15일 | 욱일대수장 | |
1915년 11월 10일 | 대례기념장 |
분류 | 날짜 | 수여 기관 | 내용 |
---|---|---|---|
외국 훈장 패용 허가 | 1889년 11월 21일 | 작센 왕국 | 알브레히트 훈장 2등 코만되르 |
1892년 3월 30일 | 독일 제국 | 적수리 3등 훈장 | |
1892년 3월 30일 | 벨기에 왕국 | 레오폴드 4등 훈장 | |
1897년 2월 16일 | 카자르 왕조 페르시아 | 사자와 태양 2등 훈장 | |
1898년 5월 18일 | 청나라 | 3등 1쌍룡보성 | |
1899년 7월 4일 | 청나라 | 2등 3쌍룡보성 | |
1901년 10월 25일 | 프로이센 왕국 | 성장 부착 적수리 2등 훈장 | |
1901년 12월 5일 | 네덜란드 왕국 | 오라녜 나사우 훈장 그루트 오피서 | |
1901년 12월 25일 | 벨기에 왕국 | 레오폴드 훈장 그랑 오피서 | |
1902년 1월 16일 | 프랑스 제3공화국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 오피서 | |
1902년 4월 23일 | 러시아 제국 | 신성 스타니슬라프 칼 부착 1등 훈장 | |
1903년 3월 28일 | 스페인 왕국 | 군공 훈장 카바예로 그란 크루스 | |
1903년 3월 28일 | 청나라 | 2등 1쌍룡보성 | |
1903년 5월 9일 | 대영제국 | 에드워드 7세 및 알렉산드라 황후 폐하 대관 기념장 | |
1903년 5월 16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전투 장식 부착 철관 1등 훈장 | |
1903년 6월 8일 | 독일 제국 | 독일 군대 동아사변 기념장 | |
1903년 7월 6일 | 대영제국 | 바스 훈장 나이트 커맨더 | |
1903년 12월 21일 | 이탈리아 왕국 | 왕관 2등 훈장 | |
1907년 12월 26일 | 프랑스 공화국 | 캄보디아 훈장 그랑 오피서 | |
1908년 8월 22일 | 청나라 | 1등 3쌍룡보성 | |
1910년 4월 22일 | 대한제국 | 훈1등 태극장 | |
1910년 8월 20일 |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 하인리히 사자공 1등 훈장 | |
1914년 6월 8일 | 중화민국 | 1등 문호훈장 |
7. 개인적인 삶
후쿠시마 야스마사는 다방면에 걸쳐 활약한 공적인 인물이었지만, 개인적인 삶 또한 복잡하고 흥미로운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배우자는 막부 신하인 다카노 데이케쓰의 딸인 후쿠시마 사다코였다.
그에게는 여러 자녀가 있었다. 장남 후쿠시마 쇼이치는 육군 소좌로 복무했다. 차남 후쿠시마 지로는 육군 중위였으나 러일 전쟁에서 전사하는 비극을 겪었다. 삼남 후쿠시마 사부로는 히타치 제작소 영업부장으로 활동했다. 4남 후쿠시마 시로는 육군 중좌였으며,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가독을 상속하고 남작 작위를 이었다. 5남 후쿠시마 고로는 육군에 입대했으나, 후에 성을 이토로 바꾸었다. 장녀 후쿠시마 마사코는 소노다 고키치의 아들인 소노다 다다오와 결혼했다.
후쿠시마는 동료 시인이자 장군인 아카시 모토지로와 친분이 있었으며, 두 사람은 아시아 지역 일본 비밀 정보국의 장기적인 필요성에 대한 아이디어를 공유했다. 또한 후쿠시마는 정보 수집 활동을 통해 애국자가 된 한 매춘부를 기리는 "떨어진 꽃잎에서 떠오르는 별로(From Fallen Petal to Rising Star)"라는 시를 직접 썼을 정도로 비범한 면모를 보였다.
8. 사망 및 유산
후쿠시마 야스마사는 1919년 2월 19일, 도쿄시 교외의 다카다촌 (현 도쿄도 도시마구 조시가야 부근) 자택에서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묘소는 도쿄도 미나토구의 아오야마 영원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고향인 나가노현 마쓰모토에 위치한 마쓰모토 시립박물관에는 그가 생전에 사용했던 승마 채찍을 비롯한 일부 개인 소장품들이 보존되어 있다. 그의 삶과 업적을 다룬 여러 전기 작품들이 출간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오타 아야마의 『후쿠시마 장군 유적』 (1941), 시마누키 시게세쓰의 『후쿠시마 야스마사와 단기 시베리아 횡단』 상하 (1979), 사카이 후지오의 『시베리아 횡단 - 후쿠시마 야스마사 대장전』 (1992) 등이 있다. 이러한 저작들은 그의 영웅적인 면모와 군사적 업적을 주로 다루며, 일본 내에서 그의 역사적 위상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후쿠시마 야스마사는 뛰어난 능력과 과감한 행동으로 일본 제국의 확장에 기여했지만, 그의 유산은 제국주의 시대의 복잡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비판적으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9. 평가 및 역사적 재조명
후쿠시마 야스마사에 대한 평가는 당대에는 주로 그의 뛰어난 군사적 업적, 비범한 어학 능력, 그리고 영웅적인 탐험가로서의 면모에 초점을 맞추어 긍정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그의 시베리아 횡단은 국가적 영웅주의를 고취시키고 일본인의 진취적인 기상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군사 정보 분야에서의 그의 공헌, 특히 러시아의 군사적 동향과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에 대한 정보 수집은 일본의 대외 전략 수립에 필수적인 요소로 평가받았다. 의화단 사건 당시 국제 연합군 내에서의 능숙한 중재자 역할 또한 그의 외교적 수완을 보여주는 사례로 칭송되었다.
그러나 후대적 관점에서 그의 활동을 재조명할 때, 후쿠시마 야스마사의 군사적, 정치적 역할은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 정책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비판적으로 분석될 필요가 있다. 그는 청일 전쟁, 의화단 사건, 러일 전쟁과 같은 일본의 대외 침략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일본의 대륙 진출을 위한 군사적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특히 관동주 총독으로서의 재임은 일본이 만주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고 군국주의적 식민 통치를 확립하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했음을 의미한다. 그의 '강건주의' 사상과 반러시아적 시각은 당시 일본이 추구하던 '국강병(富國強兵)' 정책을 정당화하고, 주변국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배경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뛰어난 언어 능력과 지리학적 지식은 단순한 학문적 성과가 아니라, 일본의 정보 수집 및 침략 전쟁 수행을 위한 효과적인 도구로 활용되었다. 그의 활약이 곧 일본의 제국주의적 확장을 뒷받침한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국제 관계적 측면에서 그의 활동은 동아시아 정세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의 세력 확장을 가속화하는 데 일조했다. 그가 캐나다 서스캐처원주에 '후쿠시마'라는 지명을 남긴 사실은 그의 국제적 명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러일 전쟁이라는 제국주의적 갈등 속에서 얻어진 명예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결론적으로, 후쿠시마 야스마사는 일본 근대사에서 빼어난 능력과 독특한 행보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지만, 그의 업적은 당대 일본의 팽창주의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의 군사적, 외교적 성공은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국가적 목표 달성에 기여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로 인해 초래된 동아시아 지역의 불안정성과 희생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