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background
사이온지 긴모치는 일본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황실과 가까운 관계를 맺으며 성장했다. 그의 청년기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격동의 시기와 프랑스 유학을 통해 자유주의 사상을 접하며 형성되었다.
1.1. Birth and family background
사이온지 긴모치는 1849년 12월 7일(가에이 2년 10월 23일) 야마시로국 교토 (현재의 교토부 교토시)에서 청화가 중 하나인 도쿠다이지 가문의 28대 당주이자 우대신이었던 도쿠다이지 긴이토와 스에히로 아야코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2세 때 같은 청화가인 사이온지 모로스에의 양자가 되어 사이온지 가문의 가독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모로스에가 그 해 7월 사망했기 때문에 사실상 친부인 긴이토의 강한 영향 아래에서 성장했다. 긴이토는 보수적이면서도 고집스러운 성격이었고, 이러한 고집은 긴모치에게도 계승되었다고 평가된다.
사이온지의 친형인 도쿠다이지 사네쓰네는 훗날 세 차례에 걸쳐 시종장을 역임하고 내대신, 궁내대신을 지낸 궁중의 실력자였다. 또한 그의 남동생인 스미토모 도모이토는 재벌 스미토모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어 제15대 스미토모 기치자에몬으로 이름을 계승하며 오랫동안 재계에 군림했다. 스미토모 가문의 재력은 사이온지의 정치 경력을 대부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또 다른 남동생인 스에히로 다케마로는 외가인 스에히로 가문을 이었다. 이러한 제국 황실과의 긴밀한 인척 관계는 사이온지가 정치계에서 활동하는 데 큰 발판이 되었다.
사이온지 긴모치는 유년기 거주지가 교토 어소와 가까워, 훗날 메이지 천황이 되는 어린 무쓰히토 친왕의 놀이 친구로 자주 궁중에 불려갔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은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는 고메이 천황이 설치한 학습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11세부터는 어소에 출사하여 무쓰히토 친왕의 측근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훗날 절친한 동료가 되는 이와쿠라 도모미와도 친분을 쌓았다. 사이온지는 이토 유사이와 아키타 슈세이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교토 최고의 검객으로 불리던 도다 에이노신과 그의 조카 후시미 슈지로부터 검술을 배웠다. 또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西洋事情서양 사정일본어』을 읽으며 세계 정세에 대한 관심도 갖게 되었다.
1.2. Education and overseas studies

메이지 유신 이후 사이온지는 관직에서 사임했다. 그는 군인이 되기를 열망하여 프랑스 유학을 희망했고, 오무라 마스지로의 지원을 받아 도쿄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1871년 1월 14일, 사이온지는 다른 30명의 일본인 학생들과 함께 증기선 코스타리카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며 일본을 떠났다. 그는 워싱턴 D.C.로 이동하여 당시 미국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랜트를 만났다. 이후 대서양을 건너 런던에서 13일간 머물며 관광을 즐긴 뒤, 1871년 5월 27일 마침내 파리에 도착했다.
사이온지가 도착했을 당시 파리는 파리 코뮌의 혼란 속에 있었고, 도시 전체가 안전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실제로 사이온지의 가정교사는 거리 싸움에 휘말려 총에 맞기도 했다. 그는 스위스와 니스를 거쳐 마르세유에 정착하여 그 지역 방언이 섞인 프랑스어를 배웠다. 파리 코뮌 진압 후 파리로 돌아온 그는 소르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며,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법률 학교를 설립한 에밀 아콜라와 교류했다. 이때는 프랑스 제3공화국 초기로, 프랑스에서는 이상주의적 분위기가 고조되던 시기였다. 사이온지는 매우 보수적인 시각으로 프랑스에 도착했지만, 아콜라(전 평화자유연맹 회원)의 영향을 받아 그의 세대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일본의 주요 정치인이 되었다.
1872년 이와쿠라 사절단이 파리를 방문했을 때, 이와쿠라는 사이온지 및 다른 일본인 유학생들의 급진성에 대해 크게 우려했다. 사이온지는 프랑스에서 프란츠 리스트, 공쿠르 형제, 그리고 소르본 대학교 동문인 조르주 클레망소 등 많은 인물과 교류했다. 특히 훗날 프랑스 총리가 되는 클레망소와는 막역한 친구가 되었으며, 이러한 인맥은 훗날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일본의 입장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클레망소는 당시 사이온지를 "과격하고 사랑스러운 공자"로 회상했다. 사이온지는 공비 유학생으로 연 1400 USD를 지급받았는데, 이는 일반 유학생보다 400 USD 더 많은 금액이었다. 사이온지는 400 USD를 반납했으며, 국가가 공비 유학생을 줄이는 방침을 정하자 공비 지원을 사양하고 사비 유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유학 비용은 사이온지 가문과 도쿠다이지 가문에도 큰 부담이어서, 1878년부터 2년 동안 매년 300 GBP를 메이지 천황의 하사금으로 지급받았다. 또한 주디트 고티에의 요청으로 와카의 프랑스어 번역을 돕기도 했으며, 1885년에 발간된 『잠자리 일기』에는 사이온지의 초역이 수록되어 있다. 고티에의 게이샤를 주제로 한 희곡 『미소를 파는 여자』는 사이온지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1880년 10월 21일, 그는 10년 만에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1.3. Early political activities
사이온지 긴모치는 젊은 나이부터 정치에 참여했으며 뛰어난 재능으로 알려졌다. 그는 도쿠가와 막부를 전복하고 어린 메이지 천황을 (명목상의) 정부 수장으로 옹립한 1867년과 1868년의 일본 혁명인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의 중요한 사건들에 참여했다. 당시 황실 내 일부 귀족들은 이 전쟁을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사무라이와 도쿠가와 측 사무라이 간의 사적인 분쟁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사이온지는 황실 귀족들이 주도권을 잡고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강력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간군의 산인도 진무총독, 동산도 제2군 총독, 북국 진무사, 아이즈 정벌 에치고구 대참모 등 황실 대표로서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그의 초기 전투 중 하나는 가메오카성을 무혈로 점령하는 것이었다. 다음은 사사야마성 전투로, 양측의 수백 명의 사무라이가 인근 도로에서 마주쳤지만, 방어군은 즉시 항복했다. 이어서 후쿠치야마 또한 무혈로 항복했다. 이때 그는 이와쿠라 도모미가 제작한 해와 달이 그려진 붉은색 황실 깃발을 획득했다. 다른 사무라이들은 황실 깃발을 든 군대를 공격하기를 꺼려하며, 즉시 쇼군에게서 이탈했다. 2주 후 사이온지는 기쓰키에 도착했고, 또 다른 무혈 전투 이후 그는 배를 타고 오사카로 돌아왔다. 결국 나가오카성에서 전투가 마무리되었지만, 사이온지는 실제 전투에서 지휘를 해제당하고 에치고의 지사로 임명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사이온지는 관직에서 사임했다. 오무라 마스지로의 지원을 받아 도쿄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1871년에 관비로 프랑스 유학을 떠나(후에 감액 신청), 10년 후 귀국하여 메이지 법률학교(현재 메이지 대학의 전신)를 1880년에 설립했다. 나카에 조민 등과 함께 1881년 3월 18일 『東洋自由新聞도요 지유 신문일본어』을 창간하고 사장이 되었지만, 정부와 메이지 천황의 압력으로 4월 8일 사임하고 4월 30일 신문은 폐간되었다. 1881년 11월 24일 참사원 의관보에 임명되어 관직에 복귀했다. 1882년 이토 히로부미가 헌법 조사를 위해 유럽을 순방할 때, 사이온지는 수행원으로 동행하여 유럽의 헌법 제도를 연구했다. 이 여행에서 그는 이토와 깊은 신뢰 관계를 맺게 되었다. 빈 대학교에서는 로렌츠 폰 슈타인으로부터 헌법 사상을 배웠다.
2. Political career before premiership
사이온지 긴모치는 총리가 되기 전부터 다양한 정부 요직을 역임하며 일본의 근대화와 정치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의 측근으로서 그의 신뢰를 받으며 중요한 직책들을 수행했고, 입헌정우회의 총재로서 일본의 의회 정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2.1. Service under Itō Hirobumi
유럽 순방 후 일본으로 돌아온 사이온지는 참사원 의관에 임명되었다. 1885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주재 공사로 부임하며 다시 슈타인에게 배우는 기회를 가졌다. 빈 체류 중에는 무쓰 무네미쓰와 친분을 쌓았고, 그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의 측근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1886년 8월에는 법률 조사 위원을 겸임했으며, 1887년 6월에는 독일 제국 주재 공사 겸 벨기에 공사로 이동했다. 같은 해 9월 20일에는 교황청 파견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일본을 떠났다. 로마를 거쳐 12월 10일 베를린에 도착했지만, 부임 후 4일 만에 첫 딸 신코가 태어났다. 독일에서는 조약 개정 협상 등의 임무를 맡았지만, 6개월 만에 중단되어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공사 시절 사이온지는 1년의 3분의 1을 파리에서 보냈다고 전해진다. 1889년에는 류마티스가 발병하여 평생 지병이 되었다. 이 해외 주재 기간 동안 그는 이토와 끊임없이 연락하며 정책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1891년 8월 마침내 귀국하여 9월에는 상훈국 총재에 임명되었다. 이는 한직이었지만, 이노우에 가오루가 지인 기업인에게 훈장을 수여하라는 압력을 가했을 때 이를 단호히 거절하여 불쾌감을 사기도 했다. 1892년 10월부터는 상훈국 총재와 겸임하여 민법·상법 시행 조사 위원장을 맡았고, 이듬해에는 귀족원 부의장, 법전 조사회 부총재가 되었다. 이후 사이온지는 공무로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조사회 회의에 반드시 참석하며, 참석이 뜸했던 총재 이토 히로부미를 대신하여 실질적인 총재로서 민법과 상법 심사에 임했다. 이 과정에서 사이온지는 호주 제도나 은거 제도가 봉건 시대의 잔재라며 폐지를 제안하기도 했다.
1894년에는 병으로 사임한 이노우에 다케시의 후임 문부대신으로 제2차 이토 내각에 처음으로 입각했다. 사이온지는 지나친 일본 중심주의를 부정하고, 여성 교육 발전을 요구하는 등 일본을 서구 국가들처럼 개명 진보시키는 교육을 주창했다. 이듬해 1895년에는 친우인 무쓰 무네미쓰 외무대신이 병으로 인해 외무대신 임시 대리를 맡아 을미사변 등 한반도 문제에 대응했다. 1896년 5월 무쓰가 외무대신을 사임하자, 사이온지는 정식 외무대신이 되어 문부대신과 겸임했지만, 8월 이토 내각이 무너지고 제2차 마쓰카타 내각에서 며칠간 대신을 지낸 후 두 대신직을 사임했다.
11월에는 법전 조사회 부총재직도 사임하고 프랑스로 떠났다. 사이온지는 프랑스에서 교육 제도와 내각에 의한 군 통제 등을 연구할 계획이었으나, 이듬해 1897년 충수염에 걸려 위독한 상태에 이르렀고,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살할 권리마저 있다"고 주장하며 일본으로 귀국했다. 병이 완치된 후 1898년 1월 제3차 이토 내각이 성립되자 다시 문부대신이 되었다. 문부대신 시절에는 제2차 교육에 관한 칙어 작성을 시도했지만, 실현되지 못한 채 충수염 후유증이 발병하여 4월 30일 사임했다.
2.2. Rikken Seiyūkai presidency

1900년, 이토 히로부미가 입헌정우회를 창당할 때 창립 위원으로 참여하여 최고 간부인 총무 위원 중 한 명이 되었다. 10월 19일 제4차 이토 내각이 발족했지만, 이토는 당시 병중이어서 10월 27일 사이온지가 반열(후의 무임소 대신)로 입각하여 12월 12일까지 내각총리대신 임시 대리로서 이토의 대리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임시 대리 취임과 동시에 추밀원 의장으로도 취임했다.
1903년, 이토가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의 책략으로 정우회 총재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게 되자, 사이온지는 이토의 지명으로 즉시 정우회 총재로 취임하고 추밀원 의장직을 사임했다. 이토의 사임으로 정우회는 동요하여 의원 33%가 탈당할 정도였지만, 간신히 제1당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당무의 실권은 간부인 하라 다카시 등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러일 전쟁 당시에는 야당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활동은 없었고, 1904년 9월에는 상하이 등 청나라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전쟁의 승리가 가까워진 12월이 되자, 가쓰라 타로 총리는 정우회의 협력을 얻기 위해 전후 정권 이양에 대한 비밀 협약(정의투합)을 맺었다.
3. Prime ministerships
사이온지 긴모치는 두 차례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일본 근대 정치의 주요 흐름을 주도하려 했으나, 강력한 군부와 보수 원로들의 압력에 직면하며 헌정 유지를 위한 고군분투를 이어갔다.
3.1. First and second cabinets

사이온지는 1906년 1월 7일부터 1908년 7월 14일까지, 그리고 1911년 8월 30일부터 1912년 12월 21일까지 일본 총리로 재임했다. 그의 두 내각은 모두 사이온지와 강력한 보수 원로인 야마가타 아리토모 간의 지속적인 긴장 관계 속에서 운영되었다. 사이온지와 이토 히로부미는 정치 정당을 정부 기구의 유용한 부분으로 보았지만, 야마가타는 정치 정당과 모든 민주주의 제도를 논쟁적이고 부패하며 비합리적인 것으로 여겼다.
사이온지는 제한된 자원과 많은 요구 사이에서 국가 예산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야마가타는 끊임없이 군비 확대를 추구했다. 사이온지의 첫 내각은 1908년 야마가타가 이끄는 보수파의 압력으로 무너졌다. 이들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성장에 경각심을 느꼈으며, 정부의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 탄압(시위와 폭동 이후)이 충분히 강력하지 않다고 여겼다.
사이온지 두 번째 내각의 몰락은 입헌 정부에 큰 타격을 주었다. 다이쇼 위기는 1912년 11월 말, 군사 예산을 둘러싼 지속적인 격렬한 분쟁으로 촉발되었다. 육군 대신 우에하라 유사쿠는 군대의 요구에 내각이 동의하지 않자 사임했다. 사이온지는 우에하라의 후임을 찾으려 했다. 일본의 법률(육군과 해군에 추가적인 권력을 부여하기 위한 목적)은 육군 대신이 현역 중장 또는 대령이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야마가타의 지시로, 모든 자격 있는 장군들이 사이온지 내각에서 복무하기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내각은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육군이 내각을 강제로 사임시킬 수 있다는 전례가 확립되었다. 사이온지의 정치 철학은 그의 배경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황실이 보호되어야 하며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이는 교토의 귀족들과 궁정이 수백 년 동안 사용했던 전략과 동일했다. 이 점 또한 그가 육군의 민족주의자들과 대립했던 부분이었다. 육군 민족주의자들은 천황이 일본 정치에 직접 참여하여 의회와 내각을 모두 약화시키기를 원했다. 민족주의자들은 또한 그를 "세계주의자"라고 비난했다.
3.2. Conflicts with the military and genrō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은 집권 여당인 정우회가 중의원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한 것을 바탕으로 재무 행정 개혁에 착수했다. 1913년(다이쇼 2년) 예산 책정을 대상으로 세출 10% 삭감을 목표로 했지만, 육군은 2개 사단 증설을 요구했고, 해군도 전함 3척 건조를 예산안에 포함시켰다. 육군은 사이온지 내각을 전복시켜서라도 2개 사단 증설을 달성하기 위해 분주했으며, 내각이 끝까지 거부 방침을 고수하자 육군 대신 우에하라 유사쿠는 천황에게 직접 사표를 제출했다. 육군 대신에게는 직접 천황에게 상주하는 유막상주가 제도적으로 인정되었지만, 각료가 총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천황에게 사표를 제출한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또한 육군이 후임 육군 대신을 내지 않는 한 사이온지 내각은 육군 대신을 얻지 못한 채 사임할 수밖에 없었으며, 당시 육군 대신 사임의 영향은 매우 컸다(군부대신 현역 무관제).
사이온지는 이후 다이쇼 천황에게 불려가 천황의 입에서 육군 대신의 사표 제출을 알게 되었다. 그는 후임 육군 대신에 대해 육군의 실력자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상담했지만, 야마가타가 후임 육군 대신을 낼 생각이 없다는 것을 헤아리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총사직했다. 정우회를 통해 내각 총사직의 내막이 널리 알려지면서 국민들 사이에 갑자기 벌족 타파, 헌정 옹호의 분위기가 높아져 제1차 호헌 운동이 일어났다. 정우회는 입헌 국민당의 이누카이 쓰요시 등과 제휴하여 호헌 운동의 선두에서 사이온지 내각의 후임 내각인 제3차 가쓰라 내각과 대립했다. 다만, 정국 제휴나 국민을 향한 연설회 등에는 사이온지가 직접 관여하지 않았고, 이들은 정우회의 간부였던 하라 다카시나 마쓰다 마사히사 등과 국민당의 이누카이 쓰요시, 오자키 유키오가 중심이 되었다.
의회는 원래부터 정우회가 절대 다수였으므로, 의회가 개시되자 정우회와 국민당은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하여 가쓰라 내각은 궁지에 처했다. 벌족 측에서는 영국의 조지 5세가 즉위했을 때, 즉위 직후라는 이유로 자유당과 보수당 간의 정쟁을 금지하기 위한 명령을 실현시켰다는 이야기를 모방하여, 다이쇼 천황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으므로 칙어를 내는 형태로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정쟁을 중지하도록 설득했다. 정우회에서는 천황의 의사라면 따를 수밖에 없다며 불신임안을 철회했고, 일단은 가쓰라 내각에 은혜를 베풀려는 의견이 한때 유력했지만, 이에 국민당의 오자키 유키오가 강하게 반발했다. 이누카이 쓰요시의 조언으로 사이온지는 정우회 총재를 사임했으며, 정우회 자체는 끝까지 내각 퇴진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때 해군의 야마모토 곤베에가 정우회 본부를 격려하기 위해 방문하기도 했다.
결국, 호헌 운동의 고조로 가쓰라 내각은 1913년 2월 11일 총사직했으며, 같은 날 후계 총리를 결정하기 위한 원로 회의가 열렸다. 이때 회의에는 사이온지도 처음으로 원로로서 출석했다. 그러나 정우회 대표로서의 출석은 아니었다. 회의에서는 처음에는 사이온지가 후계 총리로 추천되었지만, 그는 이를 받으면 칙어에 반하게 된다며 사양했다. 결국, 후계 총리는 야마모토 곤베에로 결정되었다. 야마모토 내각 성립 후 정우회 간부들은 집단 지도 체제로 이행할 방침을 정했지만, 사이온지의 유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모호한 상태로 남겨졌다. 사이온지는 교토의 별장 청풍장에 은거하며 사실상 정치 활동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4. Elder statesman (Genrō) period
사이온지 긴모치는 일본의 근대사에서 마지막 원로로서 막중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만년은 일본의 군국주의화가 가속화되는 격동의 시기였으며, 그는 헌정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점차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 영향력에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4.1. Role as the last genrō

사이온지는 1912년 12월에 원로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 원로의 역할은 점차 줄어들고 있었으며, 그들의 주요 기능은 총리를 선정하는 것이었다. 형식적으로는 천황에게 총리 후보를 추천하는 것이었지만, 어떤 천황도 그들의 조언을 거부한 적은 없었다. 1924년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사망하면서 사이온지는 유일하게 생존한 원로가 되었다. 그는 1940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총리를 지명하는 특권을 행사했다. 사이온지는 가능하면 제국의회 다수당의 총재를 총리로 선택했지만, 그의 권한은 항상 육군과 해군의 암묵적인 동의라는 제약에 묶여 있었다. 그는 효과적인 정부를 구성할 만큼 강한 정치 지도자만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는 군인이나 비정당 정치인도 지명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사망 직전 자신의 사설 비서였던 마쓰모토 고키치에게 사이온지에게 봉사하라고 명령했는데, 이는 야마가타가 사이온지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마쓰모토는 사이온지에게 정치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사이온지 자신도 "야마 공(야마가타) 서거 후 마쓰카타 후작도 고령이시고, 자신은 모든 책임을 지고 궁중의 보살핌과 정치상의 일에 신경 쓸 생각이다"라고 말하며 야마가타의 후계자임을 인식했다. 이후 시즈오카현 오키쓰의 별장 좌어장에는 정관계 거물들의 "오키쓰 참배"가 이어졌다.
1920년 10월 문제화된 황태자 히로히토 친왕(후의 쇼와 천황)의 비 후보였던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후의 고준 황후)을 둘러싼 문제(궁중모중대사건)에서, 사이온지는 처음에는 나가코 여왕의 황태자비 사퇴를 유도하려던 야마가타에 동조했지만, 상황이 불리해지자 문제에서 거리를 두었다. 문제 수습 후, 야마가타와 마쓰카타도 사표를 제출하게 되면서 궁중에 대한 두 원로의 발언권이 약화되었다. 이로 인해 하라 다카시 총리와 사이온지의 궁중에 대한 영향력이 강해졌다.
그러나 1921년 11월 4일 하라가 도쿄역에서 암살당했다(하라 다카시 암살 사건). 교토의 청풍장에서 그 소식을 들은 사이온지는 상경했다. 차기 총리 추천을 위해 소집된 야마가타와 오쿠마 시게노부는 병으로 천황 알현을 하지 않았고, 사이온지는 오다와라시에서 요양 중인 야마가타를 찾아가 협의했다. 이때 야마가타는 사이온지의 총리 취임을 권했지만, 사이온지는 "나는 당신보다 나이가 젊다. 당신은 나보다 먼저 돌아가실 것이다. 그때는 당신을 대신하여 궁중의 일을 돌보겠다. 그러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절했다. 사이온지는 이후 히라타 도스케를 추천하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히라타의 제안도 있어 후임 총리로 정우회 소속 다카하시 고레키요 재무대신을 추천했다. 이로써 정당 내각이 유지되었지만, 사이온지는 당시 "정우회 내각이라 해도, 정우회 내각이 아니다. 폐하의 내각이라고 생각한다"며 정당 내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1922년 2월 야마가타가 병사했다. 야마가타 사망 후 마키노 노부아키 궁내대신이나 마쓰카타에 의한 천황의 총리 하문 범위를 야마모토 곤베에나 기요우라 게이고에게 확대하여 원로 제도를 재 생산하려는 움직임이나 추밀원이 자문 범위에 포함되기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사이온지는 그 움직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병중이었던 히라타 도스케 내대신도 당분간은 사이온지 혼자서 총리 추천 임무를 맡게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며, "원로는 사이온지 공으로 한정하고, 앞으로는 두지 않는 것이 좋다. 하라가 있다면 다르겠지만, 씨가 말랐다"고 여겼다.
히라타가 사임한 후 마키노가 내대신이 되었고, 마키노의 후임 궁내대신에는 사이온지가 추천한 이치키 기토쿠로가 취임했다. 1926년 10월, 사이온지는 총리 추천은 원로 외에 내대신에게도 하문이 있으며, 사이온지 사망 후에는 내대신이 칙허를 받은 후 다른 사람과 상의하여 수행하는 방식을 취하도록 확인시켰다. 요시노 사쿠조는 사이온지가 원로 제도를 자신의 대에서 자연 소멸시키려 한다고 보았고, 이토 다카시, 바바 쓰네고, 마스미 준노스케 등의 연구자들도 그렇게 보고 있다.
4.2. International diplomacy and racial equality proposal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고 파리 강화 회의가 개최되었다. 강대국 정상들이 모이는 이 회의에 일본도 걸맞은 대표를 파견해야 했다. 하라 총리와 우치다 야스야 외무대신은 수석 전권으로 사이온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사이온지는 건강상의 이유로 사퇴하려 했지만, 12월 18일 수락했다. 이때 그는 "무모하지만, 늙은 몸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라에게 밝혔다. 그러나 결정이 늦어진 데다, 사이온지를 위해 선실을 개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사이온지가 출발한 것은 마키노 노부아키나 진다 스테미 등 다른 전권들이 출발한 지 한 달 뒤인 1919년 1월 14일이었다. 사이온지와 동행한 이들은 그의 첩 오쿠무라 하나코, 딸 신코와 양자 하치로 부부, 그리고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 등이었다. 또한 유명 요정 나다만의 주인 구스모토 만스케가 요리사 두 명을 데리고 승선했으며, 선창에는 일본 음식을 위한 식재료가 5톤이나 실려 있었다. 이는 현지에서 일본 음식 파티를 열기 위한 것이었다.
사이온지 일행은 3월 2일 파리에 도착했지만, 프랑스 측의 영접은 없었다. 일본에게 중요한 검토 과제들의 논의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고, 마키노와 진다가 협상의 주역을 맡고 있었다. 더욱이 20년 만의 프랑스 방문이었던 탓에, 옛 친구 클레망소의 프랑스어는 들을 수 있었지만, 말할 수는 없게 되었다. 또한 병약했던 탓에 정력적인 활동도 할 수 없었으며, 회의에는 참석했지만 발언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외무성이 정리한 파리 강화 회의 개요 문서에서 사이온지가 등장하는 것은 4월 27일 클레망소와의 회담뿐이었다. 요시노 사쿠조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사부리 사다오는 산둥반도 문제가 분규에 휩싸였을 때, 일본 대표단 내부에서 귀국하자는 목소리가 나왔을 때, 사이온지가 "국제 연맹 문제는 산둥 문제보다 중요하다"며 "나 혼자라도 파리에 남겠다"고 발언하여 일본 대표단 내부에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
사이온지는 협상 기간 동안 국제 연맹 규약에 "인종 평등 조항"을 추가할 것을 제안했지만, 이는 미국과 호주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두 국가 모두 인종 차별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 채택되지 못했다. 강화 회의가 일단락된 후 7월 10일에는 영국 국왕 조지 5세를 알현했다. 8월 24일 도쿄로 돌아와 해외 체류 중 건설된 스루가다이의 새 저택에 입주했다. 또한 9월에는 스미토모 가문의 자금으로 시즈오카현 오키쓰에 건설된 별장 "좌어장"이 준공되었다. 이후 사이온지는 1년의 4분의 3을 오키쓰에서 보내고, 스루가다이 본가에는 정치적 용무가 있을 때만 머물렀다. 1년 후인 1920년 9월 7일에는 강화 회의에서의 공로로 공작으로 승작했다.
5. Philosophy and ideology
사이온지 긴모치의 사상은 그의 오랜 프랑스 유학 경험과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깊이 성찰한 결과로 형성되었다. 그는 자유주의와 의회주의를 신봉하며 국제 협력을 중시했고, 천황의 정치적 권위를 존중하되 직접적인 정치 개입에는 반대하는 독특한 시각을 가졌다.
5.1. Liberalism and parliamentarism
사이온지는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로 자칭하며 의회 정부를 지지했다. 그는 의회에서 다수당이 내각을 구성해야 한다는 '헌정의 상도'를 관례로 여겼다. 뉴욕 타임스가 그의 사망 소식에 "오래된 '의회주의적 일본'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평했고, 요시노 사쿠조 등도 그를 정당 내각주의자로 평가했던 것처럼, 당시 사이온지는 의회주의의 옹호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대중의 열광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하라 다카시는 정우회 총재로서나 총리로서나 수완이 부족했다고 평가했지만, 사이온지는 원로 시절에 다나카 기이치 내각 붕괴 당시 오가와 헤이키치 철도대신에 대한 태도처럼, 각 파벌에 균형을 맞추고 어느 쪽에게도 중립적인 존재로 인식됨으로써 권위와 영향력을 유지했다. 이러한 태도를 미우라 고로는 "정우회원들을 만나면 삼파연합(호헌삼파)을 칭하고, 정우본당원들을 만나면 본당을 칭하며 아무런 정견도 없이 원로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5.2. Internationalism and anti-militarism
사이온지는 명확한 국제 협조파였으며, 입버릇처럼 "세계의 대세"를 외쳤다. 한때 사이온지가 산조 사네토미의 전기인 그림 두루마리를 집필하여 메이지 천황에게 헌상했을 때, 천황은 "분명 세계의 대세에서부터 쓰여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과연 그대로여서 크게 웃었다고 한다. 사이온지는 무쓰 무네미쓰와의 교류를 통해 이러한 외교 사상을 굳혔으며, "동양의 맹주인 일본"과 같은 좁은 생각보다는 "세계의 일본"에 주목해왔다고 회고했다.
청일 전쟁 이후 대두한 과도한 일본 중심주의적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했으며, 타국의 민족주의를 존중하면서도 국민이 국가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힘을 합치는 건전한 민족주의를 지향했다. 국제 관계에서는 영국이나 미국과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함께해도 일본의 발전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군부 등으로부터 국가주의에 반하는 "세계주의자"로 비난받기도 했다. 또한 독일-이탈리아-일본 3국 동맹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5.3. Views on the Imperial Court
사이온지는 일관되게 천황이 직접 정치에 관여하여 권위를 저하시키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이 때문에 쇼와 천황의 정치 관여 움직임에 여러 차례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고노에 내각 무렵부터는 점차 황실에 의한 의사를 표명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으며, 직궁(천황의 형제)이 그 한 축이 될 필요도 있다고 발언했다.
사이온지는 리쓰메이칸 대학에 기증한 편액에 사이온지 가문의 본성인 후지와라 씨를 살려 후지와라 긴모치(藤原公望)로 서명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이 천 년 이상 황실과 함께 했던 후지와라 씨의 후손이라는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황실과 친분을 맺었기 때문에 "황실의 번병"이라는 의식이 강했으며, 그것이 그의 정치 자세가 되었다. 즉, 절대적인 권력을 지니기 때문에 오류가 용서되지 않는 천황의 친정에 계속 반대했다. 이것은 다나카 기이치가 장쭤린 폭살 사건(만주모중대사건) 상주 과정에서의 불일치로 쇼와 천황에게 질책을 받아 내각이 총사직했을 때, 사이온지가 천황에게 누를 끼치는 것을 구실로 천황에 의한 다나카 질책에 반대하고 있었던 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또한 "입헌 군주로서 신하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쇼와 천황의 신조는 사이온지의 영향을 받은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한편으로 국수주의자나 혁신파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6. Contributions to education
사이온지 긴모치는 일본의 근대 교육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교육 철학은 서구의 과학과 자유주의 사상을 수용하여 일본의 교육을 현대화하려는 노력을 담고 있었으며, 이는 그가 직접 설립하거나 지원한 여러 교육 기관의 토대가 되었다.
6.1. Educational philosophy and reforms
문부대신 시절의 사이온지는 교양 있는 "시민"의 육성을 중시하여, "과학, 영어, 여성 교육을 중시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또한 "인민이 모두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 존경하고, 스스로 생존함과 동시에 타인을 생존시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며 자유주의적인 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90년 이노우에 다케시 등이 만든 교육에 관한 칙어에 대해 "그 교육칙어만으로는 부족하다. 좀 더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교육 방침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며 메이지 천황에게 상주하여 '제2차 교육칙어' 작성을 시도했다. 이 초안에는 "충효"나 "애국"과 같은 단어가 없었고, 여성 교육을 포함하여 일본 신민이 열강 국민과 대등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사이온지가 병에 걸리고, 이토 히로부미 총리가 교육칙어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행위로 난색을 표하면서 결국 성안되지 못하고 초안만 남았다. 이 '제2차 교육칙어' 초안은 사이온지 가문으로부터 리쓰메이칸 대학에 기증되어 현존하고 있다.
6.2. Establishment and support of educational institutions
리쓰메이칸 대학
사이온지는 1869년 10월 27일(메이지 2년 9월 23일) 교토 어소 내 사저에 사숙인 '리쓰메이칸'을 창설했다. 당시 흔히 볼 수 있던 공가 사숙과 마찬가지로 빈사로는 한학자들을 초빙했다. 그러나 '리쓰메이칸 사숙'의 성격은 다른 공가 사숙과는 달리 일반적인 교육 기관의 성격을 갖추고 있었다. 학생들은 사이온지의 문객과 가신뿐만 아니라 많은 젊은이들이 먼 곳에서도 모여들었으며, 사숙은 점차 국내외 시사 문제를 논의하는 장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여러 번에서 모인 젊은 학생들 중에는 지방 향사 출신도 많았으며, 기록에 따르면 사이온지의 측근으로서 끝까지 함께 행동한 나카가와 고주로 (훗날 리쓰메이칸 대학 설립자)의 고향 사람들도 많았다. 사숙은 그 분위기에 불온함을 느낀 교토 부청(태정관 유수관)의 정지 명령에 의해 약 1년 만에 폐쇄되었다. 이는 1870년 5월 23일(메이지 3년 4월 23일)의 일이었다.
사이온지는 사숙 리쓰메이칸을 폐쇄할 때 크게 아쉬워하며 재건을 맹세했다. 그 뒤를 이은 인물이 보신 전쟁 이래 사이온지의 가신으로 봉사했던 단바국 향사 출신 나카가와 고주로였다. 나카가와는 사이온지가 문부대신 및 총리대신이던 시절 공설 비서였으며, 이후로도 평생 사이온지의 측근으로서 공과 행동을 함께했다. 현재의 리쓰메이칸 대학은 나카가와가 1900년에 창설한 교토법정학교가 '리쓰메이칸 사숙'의 명맥을 이어받아 발전한 것으로, 엄밀히 말하면 사이온지의 사숙과 학교 조직으로서의 연속성은 없다.
그러나 사이온지는 나카가와가 창설한 교토법정학교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교토법정학교의 학원 간사에는 사이온지의 친동생인 스에히로 다케마로가 취임했으며, 같은 친동생이자 스미토모 재벌 당주인 스미토모 도모이토로부터 학원에 거액의 기부가 이루어지는 등, 사이온지는 자신의 정치력과 인맥을 동원하여 교토법정학교(리쓰메이칸 대학)에 협력했다. 또한 사이온지가 기부한 다수의 서적은 리쓰메이칸 대학(구제)이 대학령에 의한 승격 조건을 충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현재도 '사이온지 문고'로 리쓰메이칸 대학에 귀중한 컬렉션으로 보존되어 있다. 이 외에도 사이온지 본인 및 사이온지 가문에서 학원에 기증된 물품(학교 부지 기념 식수 등 포함)은 수백 점에 달하며, 이 중 일부는 학교법인 리쓰메이칸이 '학보'로 관리하고 있다.
또한 사이온지는 사이온지 가문의 가몬인 '좌삼점박'을 리쓰메이칸 학원이 사용하는 것을 허가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이를 물들인 깃발이 실제로 학원에서 사용되었다. 사이온지는 나카가와가 '리쓰메이칸'의 명칭과 정신 계승을 자신에게 제안했을 때 이를 크게 기뻐하며, 친필로 쓴 『리쓰메이칸과 유서』 대형 현판을 주었다. 훗날 사이온지는 "내가 건설한 리쓰메이칸의 명칭과 정신을 계승한 귀 학원"이라며 현재의 리쓰메이칸 대학을 언급했으며, 자신이 만든 리쓰메이칸이 재건되어 계승된 것을 기뻐했다. 1932년, 83세가 된 사이온지는 생애 마지막 교토 방문을 했다. 이때 리쓰메이칸 대학 히로코지 캠퍼스를 방문지 중 하나로 선택했다. 9월 22일 아침, 교토시 가미교구에 있는 리쓰메이칸 대학 히로코지 학사를 방문한 사이온지는 교사 홀에 걸려 있는 자신의 친필 '리쓰메이칸' 현판을 보고 한동안 눈길을 멈췄다고 전해진다.
이 '리쓰메이칸' 현판에 대해 훗날 리쓰메이칸 대학 기념식에 참석한 사이온지 유타카 (사이온지 긴모치의 증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증조할아버지는 만년에 다소 여성스러운 글씨를 쓰셨습니다. 그러나 약관 20세에 쓰신 '관명립' 서예는 매우 남성적이고 박력이 있었습니다. 이 강인함은 당시 지향했던 '새로운 나라 만들기=인재 양성'에 대한 마음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 현판의 원본은 학교법인 리쓰메이칸 총장실에 걸려 있다. 또한 학교법인 리쓰메이칸 '나카가와 회관'(교토시 나카교구) 현관에도 걸려 있다.
그 외에도 캠퍼스 내에는 사이온지와 연고가 있는 물품들이 남아 있다. 리쓰메이칸 대학 기누가사 캠퍼스 내에는 1935년 사이온지가 리쓰메이칸 대학에 기증한 치자나무와 남천죽이 심겨 있다. 또한 리쓰메이칸 대학 사이온지 기념관 정원에는 한때 사이온지의 도쿄 스루가다이 본가에 놓여 있다가 훗날 학교법인 리쓰메이칸에 기증된 석등이 설치되어 있다.
사이온지가 서거한 1940년에 리쓰메이칸 대학은 설립과 그 후의 교육에 크게 공헌한 사이온지 긴모치를 리쓰메이칸 학원의 '학조'로 지정하는 법인 결의를 했다. 사이온지 가문과 리쓰메이칸 대학의 교류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으며 대학 행사에 사이온지 가문의 사람들이 참석하고 있다.
교토 제국 대학
1894년 문부대신에 취임한 사이온지가 '고등 교육 확장 계획'을 입안했다. 첫째 항목에 도쿄 제국 대학과 상호 협력하여 국가의 수요에 부응할 수 있는 고등 교육 기관을 교토에도 설치할 필요성을 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성 내에 설치한 교토 제국 대학 '창립 준비 위원'이 1897년 '교토 제국 대학에 관한 건'(대학 설치령)을 공포하여 교토 대학 창설의 흐름이 확립되었다. 당시 문부성 전문학무국 근무에서 문부대신 비서관으로 사이온지 문부대신 직속이 되었고, 사이온지의 사설 비서이기도 했던 나카가와 고주로가 교토 제국 대학 초대 사무국장으로 임명되어 대학 업무를 총괄했다. 또한 건학 초기부터 '자유로운 학풍'을 학풍으로 삼고 있는 이 대학은 사이온지와 나카가와가 학문의 정신으로 내세운 '자유'를 공통 이념으로 가지고 있는 리쓰메이칸 대학과 2007년에 학술 교류 및 산학관 연계 사업에 관한 대학 간 협정을 체결했다.
메이지 법률 학교

1881년, 프랑스 유학 중 사이온지의 동료였던 기시모토 다쓰오, 미야기 고조, 야시로 미사오 등이 창설한 메이지 법률학교(메이지 대학의 전신)의 강사로 초빙되어 행정법 강의를 담당하고 법론회 회장도 맡았다. 이 학교에서의 강의는 『東洋自由新聞도요 지유 신문일본어』 사장직을 사임한 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고, 이듬해 3월 이토 히로부미의 수행원으로 유럽에 건너갈 때 중단했다고 한다. 그 후에는 메이지 대학 관련 행사(창립 30주년 기념식 등)에 가끔 모습을 보였고, 만년에 이르러서도 명예 교수의 직함을 유지했다.
이 학교가 발행한 『명법 잡지』 제1호에서는 창립자 중 한 명으로 다루어졌고, 메이지 법률학교 설립 취지에 기시모토 등과 연명되어 있으며, 『20세기 일본인명사전』, 『신정 정치인명사전』 등에는 메이지 대학의 창립자로 기재되어 있지만, 메이지 대학 공식 웹사이트에는 사이온지가 창립자로 게재되어 있지 않으며, 이 대학 교수의 논문이 실린 대학사 출판물에서도 창립자가 아닌 공로자, 협력자로 다루고 있다.
일본 여자 대학
1901년, 여자 대학 설립을 위한 지원을 요청하며 나카가와 고주로 저택을 자주 방문했던 나루세 진조를 후원하여, 일본 여자 대학의 설립 발기인, 창립 위원으로 취임했다. 나카가와를 일본 여자 대학 창립 사무 간사 촉탁으로 두었다.
7. Personal life and anecdotes
사이온지 긴모치는 그의 공적인 업적만큼이나 풍부한 사생활과 흥미로운 일화들을 남겼다. 그의 사생활은 일본 근대사의 격변기 속에서도 묘한 여유와 품격을 잃지 않았던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7.1. Family and personal relationships
사이온지는 평생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고, 법적인 아내는 없었다. 대신 네 명의 사실혼 관계에 있는 여성들이 있었다. 1880년, 교토 기온 이즈쓰야의 게이샤 에라 가요(당시 18세)를 도쿄로 데려와 결혼하려 했으나, 친족의 반대로 단념했다. 일설에는 사이온지 가문의 수호신이 변재천이어서 질투심이 강하며, 사이온지 가문은 대대로 정식 아내를 두지 않는다는 가풍이 있다는 속설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 고바야시 기쿠코: 전 신바시 게이샤 '다마하치'로, 1881년 술자리에서 만났다. 아버지는 오와리 다케고시 씨 가로인 다카노세 가즈토였다. 기품 있는 미인이었으며, 기지도 뛰어난 여성이었다. 사이온지와 동거하던 시절에는 2층에 함께 살던 나카에 조민의 보살핌도 맡았다. 사이온지가 공사 시절에는 그의 어머니인 아야코와 동거했다. 딸 신코를 낳았다. 기쿠코는 오이소의 사이온지 별장의 주인이었으며, 사이온지가 교토나 오키쓰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소원해졌다. 1917년 오이소 별장이 이케다 시게아키에게 매각된 후에는 딸 신코와 그 남편 사이온지 하치로의 저택 근처에 살게 되었다. 이후 사이온지와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사이온지가 임종을 앞둔 1940년 6월 14일 면회했다. 1941년 1월 16일, 신우신염으로 77세에 사망했다.
- 나카니시 후사코: 전 신바시 나카무라야의 '후사노'로, 딸 소노코를 낳았다. 스루가다이의 사이온지 본가에 살았으며, 사이온지가 "아내와 같은 사람"이라고 형용했고, 신문 보도에서는 "북쪽 부인"으로도 불렸다.
- 오쿠무라 하나코: 사이온지 가문의 여인장 '오쿠무라 하나코'는 파리 강화 회의에 동반되어 화제가 되었다. 요시노 사쿠조는 하나코를 동반한 것을 비판했다. 현지 보도에서는 "가장 품위 있고 겸손한 미인", "애첩" 등으로 평가되었다. 1924년에는 딸 가요코를 출산했지만, 사이온지는 완강히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 가요코는 이후 하나코의 남동생 부부가 양육했다. 1928년 은행원과의 사이에서 임신하여, 집사 구마가이 야스미, 딸 소노코, 양자 하치로 등이 공동으로 하나코를 추방할 것을 사이온지에게 권고했고, 3월 2일 사이온지 가문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4월 6일에는 친모와 함께 좌어장을 방문하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후 하나코는 복막염에 걸려 1929년 2월 3일 사망했다.
- 우루시바 아야코: 교토 다이센지 주지 우루시바 호운의 딸로, 한 번 결혼하여 자식을 낳았으나 이혼했다. 화도와 다도, 고토에 능통했으며, 하나코가 여인장을 맡고 있던 시기에 사이온지 가문에 봉사하기 시작했고, 하나코와는 불화가 있었다. 하나코의 뒤를 이은 여인장 야기 에쓰코와도 반목하며, 함께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사이온지는 "네가 가면 이쪽이 곤란하다"며 야기 에쓰코만을 해고했다. 그 후 여인장이 되었고, 젊은 여인들과 간호사, 심지어 남성 경찰관까지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으며, 사이온지가 중재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자녀
- 신코: 1887년 고바야시 기쿠코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 사이온지는 2살 무렵부터 영어 또는 프랑스어를 배우게 할 생각으로 교육에 열심이었다. 양자 하치로와 결혼하여 사이온지 고이치, 사이온지 후지오 등 3남 3녀를 낳았다. 총리 시절 사이온지가 외국인을 초청한 파티를 열면, 호스트 역할을 맡아 능숙한 프랑스어를 선보였다. 1920년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사이온지는 "말끔히 녹아내렸구나 눈이 두껍게"라는 애도의 시를 읊었다.
- 소노코: 나카니시 후사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다카시마 쇼이치에게 시집갔다.
- 모토코: 사이온지의 양녀.
- 사이온지 하치로: 전 조슈번 번주 모리 모토노리의 여덟째 아들로, 1899년 사이온지의 양자가 되었다. 제2차 가쓰라 내각의 비서관을 지낸 후 궁내성에 들어가 황태자 히로히토 친왕의 유럽 방문 등에 동행했다. 그러나 신코 사망 후, 하치로가 사이온지와 제휴 관계에 있던 마키노 노부아키 내대신 배척 움직임에 가담한 것 때문에 사이온지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22년 이후로는 편지 내용도 매우 간결해졌다. 하지만 사이온지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점차 관계가 개선되었다.
- 동거인: 친우 미쓰데라 사부로가 죽자, 그의 유자 미쓰사부로(훗날 아즈마야 사부로)를 데려와 양육했다. 또한 일족인 하시모토 사네후미도 한때 양육했다. 두 사람은 평소 하치로와 함께 교세이 학교의 기숙사에 있었지만, 주말마다 사이온지 집에 머물렀다.
7.2. Personality and notable anecdotes
- 사이온지에게 정치인이 될 것을 권유한 이는 프랑스 유학 시절의 스승 아콜라였지만, 사이온지는 "정치가는 항상 생각하는 바를 말할 수 없고, 때로는 거짓말을 해야 한다"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아콜라는 "일본 정치가는 때로는 거짓말을 해야 할 뿐인가? 프랑스 정치가는 항상 거짓말을 한다"며 크게 웃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친밀했으며, 사이온지는 아콜라와 클레망소가 극비 정치 팸플릿을 프랑스 국내로 반입해야 했을 때 운반책 역할을 맡았고, 아콜라의 여행 때에는 그의 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 이토 히로부미의 저택을 오자키 유키오와 함께 방문했을 때, 이토가 자리를 비우자 "정치 같은 것은 여기 주인장 같은 속물이 하는 짓이다"라고 내뱉듯이 말했다고 한다.
- 메이지 천황은 사이온지의 총리 취임을 "공가에서 처음으로 총리가 나왔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 궁중 알현 외에는 거의 항상 와소를 입었다고 한다.
- 이토 히로부미나 이노우에 가오루에 못지않게 매우 여색을 밝히는 사람이었으며, 화류계에서는 '오테라상(お寺さん)'으로 유명한 통인이었다고 전해진다.
- 1869년, 프랑스 유학생으로 추천해 준 오무라 마스지로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그의 여관을 방문하기 직전, 친우 마리오코지 미치후사가 급히 달려와 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스지로가 습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 프랑스에서의 맹장염 이후 다병이 되어, 여러 차례 큰 병으로 고통받았다고 한다. 만성적인 류마티스와 당뇨병도 지병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몸을 돌보게 되어 장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 매우 미식가였으며, 교황청 방문 시에는 접대 담당자에게 요리 전문가라고 칭찬받았다. 사이온지 가문에는 고급 요정 나다만에서 요리사가 파견되었지만, 대개 1년을 채우지 못했고, 4년을 계속한 사람이 드물 정도로 진귀했다고 한다. 스테이크나 연어 버터구이 등을 좋아했지만, 서민적인 꽁치도 좋아했다고 한다. 기타오지 로산진도 "음식에는 꽤나 까다로운 사람", "통인"이라고 평가했다. 1931년부터 3년간 사이온지의 전속 요리장을 사이온 마쓰가 맡았다. 사이온지의 아침 식사는 한 잔의 현미를 한 그릇의 죽으로 만드는 것이 관례였는데, 쌀이 깨져 있으면 안 되고, 낱알 하나하나가 반짝거려야 먹었다고 한다.
- 사생활에서는 지극히 완고하고 화를 잘 내는 성격이었으며, 가족이 같은 것을 두 번 물어보면 소리를 질렀다. 그의 '아내' 중 한 명인 고바야시 기쿠코는 "꾸중받지 않으려면 보통 이상의 고생이 아니었고, 잘해도 입으로 칭찬하는 일은 없었으며,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 대단한 독서가이기도 하여 고노에 후미마로는 "한적에 대해서는 여느 학자들도 당해내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또한 프랑스어, 영어 서적도 소장하고 있었으며, 현재는 리쓰메이칸 대학의 사이온지 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다만 전통적인 공가의 기초 교양인 와카는 별로 잘하지 못했으며, 『잠자리 일기』 번역 시 번역한 와카에도 기본적인 사실 오류가 여러 군데 포함되어 있었다.
- 호신용으로 길고 거대한 지팡이와 철심으로 보강된 지팡이를 사용했다고 한다.
8. Death
1939년 2월 이후, 사이온지는 여러 차례 건강이 악화되었고, 1940년 여름에는 늘 하던 고텐바 별장으로의 피서도 가지 않고 좌어장의 거실에 냉방 시설을 설치했다. 사이온지는 죽음을 직감하고 친한 사람들에게 유품으로 금전을 주었다. 7월 16일 요나이 미쓰마사 내각이 붕괴하고 후임으로 고노에 후미마로가 추천될 움직임을 보였다. 7월 17일 이시와타 소타로 내각 비서관장이 사이온지를 방문하여 동의를 구했지만, 사이온지는 "이 봉답만은 사양하고 싶다"며 봉답을 거부했다. 사이온지는 "지금쯤, 인기로 정치를 하려 하다니, 그런 시대착오적인 사람은 안 된다", "발을 들여놓아도 할 만큼의 각오가 있는가"라며 고노에의 자질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는 그가 계속 반대했던 독일-이탈리아-일본 3국 동맹이 성립되었고, 그는 "정말 어리석은 일투성이로, 어째서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리석다"며 탄식했다.
11월, 사이온지는 신우신염을 앓았고, 그 자체는 완치되었지만 11월 24일 오후 9시 54분 쇠약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사망했다. 향년 92세(만 90세). 종1위가 추서되었다. 사이온지는 "나는 죽어도 승려나 신주의 도움을 받지 않을 것"이라며 국장도 사양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지만, 결국 히비야 공원에서 성대한 국장이 치러졌다. 수만 명이 참여했으며, 같은 날 공개된 좌어장에도 8천 명의 참관객이 방문했다. 묘소는 다마 영원에 마련되어 도고 헤이하치로와 마주보도록 세워져 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서한, 자료류는 소각되었다.
9. Legacy and historical assessment
사이온지 긴모치는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변혁의 시기를 보낸 인물로, 그의 생애와 업적은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받는다. 그는 자유주의적 가치와 의회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군국주의의 물결에 저항했지만, 시대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9.1. Overall evaluation and positive reception
사이온지는 총명하고 국제적인 시야를 지녔으며, 학식이 깊고 문화적으로도 세련된 인물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또한 민주주의의 흐름을 지지했지만, 한편으로는 대중의 열광에는 비판적이었다. 뉴욕 타임스는 사이온지 사망 소식을 보도하며 그를 "오래된 '의회주의적 일본'을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했고, 요시노 사쿠조 등도 그를 정당 내각주의자로 평가했다.
『하라 다카시 일기』의 기술로 인해 사이온지는 권력에 대한 집착이 적고 정치적 수완이 부족하다는 시각도 있었지만, 이토 유키오 등은 그가 원숙한 정치적 수완을 지녔다고 평가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사이온지는 냉담하고 만사에 담백하다는 이미지를 비서인 마쓰모토 고키치로부터도 받았지만, 이는 중립적인 인물임을 인식시키기 위해 사이온지 스스로 퍼뜨린 이미지였다. 그는 궁중, 재계와의 혼인 관계를 배경으로, 원로로서 궁중과 국무, 군부의 조정자 역할을 맡아 일본 정치를 계속 이끌었다. 또한 문부대신 재임 중 교육에 관한 칙어 개정을 시도하는 등 쇼와 초기 국가주의적 정치인들과는 일선을 긋는 언행을 산발적으로 보였지만, 군부의 세력 확대에 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힘만으로는 전쟁 회피를 이뤄낼 수 없었다.
사이온지는 리쓰메이칸 대학에 기증한 편액에 '후지와라 긴모치'라고 사이온지 가문의 본성을 살려 서명한 것처럼, 자신이 천 년 이상 황실과 함께 해 온 후지와라 씨의 후손이라는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황실과 친분을 맺었기 때문에 "황실의 번병"이라는 의식이 강했고, 그것이 그의 정치 자세가 되었다. 즉, 절대적인 권력을 지녔기 때문에 오류가 허용되지 않는 천황의 친정에 계속 반대했다. 이는 다나카 기이치가 장쭤린 폭살 사건(만주모중대사건) 상주 과정의 불일치로 쇼와 천황에게 질책을 받아 내각이 총사직했을 때, 사이온지가 천황에게 누를 끼치는 것을 구실로 천황에 의한 다나카 질책에 반대하고 있었던 점에서 분명하다. 또한 "입헌군주로서 신하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쇼와 천황의 신조는 사이온지의 영향을 받은 측면도 있다.
9.2. Criticism and controversies
사이온지는 프랑스 유학의 영향으로 친서방적이었고, 군부 등으로부터 국가주의에 반하는 인물로 "세계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의 정치 수완에 대한 비판도 존재하는데, 하라 다카시는 『하라 다카시 일기』에서 정우회 총재 시절 사이온지를 "의지가 의외로 확고하지 못하고, 주의가 소홀하여 종종 잘못이 있다"고 비판했다. 미우라 고로는 "정우회원들을 만나면 삼파연합(호헌삼파)을 칭하고, 정우본당원들을 만나면 본당을 칭하며 아무런 정견도 없이 원로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사이온지는 사이토 마코토 내각 성립 이후 점차 강경파에게 소외되기 시작했고, 구라토미 유자부로 추밀원 의장이나 히라누마 기이치로 추밀원 부의장 등은 그의 은퇴나 죽음을 바라기 시작했다. 그의 영향력도 점차 명확히 저하되어, "보고만 받을 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고,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내정도 외교도 이제 전혀 알 수 없다", "일본인의 수준이 아직 너무 낮다. 역시 도저히 외국인에 미치지 못한다"며 기력을 잃기도 했다. 또한 조르게 사건으로 인해 그의 손자 사이온지 고이치가 1941년에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
10. Honours
사이온지 긴모치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다양한 작위와 훈장을 수여받았다.
작위명 | 수여일 |
---|---|
백작 | 1884년 7월 7일 |
후작 | 1911년 |
공작 | 1920년 9월 7일 |
훈장명 | 수여일 |
---|---|
훈삼등 욱일중수장 | 1882년 3월 11일 |
훈일등 서보장 | 1895년 6월 21일 |
훈일등 욱일대수장 | 1896년 6월 5일 |
훈일등 욱일동화대수장 | 1907년 9월 14일 |
대훈위 국화대수장 | 1918년 12월 21일 |
대훈위 국화장경식 | 1928년 11월 10일 |
국가 | 훈장명 | 수여일 |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 | 2등 백금 훈장 | 1882년 9월 29일 |
바티칸 시국 | 비오 9세 훈장 대십자 | 1888년 2월 25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1등 철관 훈장 | 1888년 5월 9일 |
네덜란드 | 네덜란드 사자 훈장 대십자 | 1891년 3월 16일 |
독일 제국 | 붉은 독수리 훈장 1등 | 1891년 10월 15일 |
벨기에 | 레오폴드 훈장 대십자 | 1892년 7월 5일 |
오스만 제국 | 1등 메디디예 훈장 | 1894년 3월 8일 |
이탈리아 왕국 | 성 마우리치오 라자로 훈장 대십자 기사장 | 1896년 3월 6일 |
러시아 제국 | 백수리 훈장 | 1896년 3월 17일 |
프랑스 제3공화국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 오피시에 | 1896년 7월 24일 |
스페인 왕국 | 카를로스 3세 훈장 대십자 | 1896년 11월 10일 |
덴마크 왕국 | 1등 다네브로 훈장 | 1898년 2월 10일 |
영국 | 성 미카엘과 성 조지 훈장 명예 기사 대십자 | 1906년 3월 3일 |
프랑스 제3공화국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 크루아 | 1907년 10월 23일 |
러시아 제국 | 성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훈장 대수장 | 1907년 10월 30일 |
청나라 | 1등 2등 쌍용보성 | 1907년 12월 17일 |
위계 | 수여일 |
---|---|
종5위하 | 1852년 12월 20일 |
종5위상 | 1853년 1월 27일 |
정5위하 | 1854년 1월 22일 |
종4위하 | 1855년 1월 22일 |
정4위하 | 1856년 2월 5일 |
종3위 | 1861년 4월 25일 |
정3위 | 1862년 1월 5일 |
정3위 (복위) | 1878년 12월 19일 |
종2위 | 1893년 12월 11일 |
정2위 | 1898년 12월 20일 |
종1위 (추서) | 1940년 11월 24일 |
11. Works
사이온지 긴모치는 그의 폭넓은 식견과 경험을 바탕으로 저작 활동을 했다.
- 『陶庵随筆도안 수이히쓰일본어』 (1903년, 신세샤 출판)
- 잡지 『세계의 일본』에 기고한 수필들을 엮은 것으로, 표제 수필 외에 '회구담', '유럽 기행 발췌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과거 사이온지 저택에서 서생으로 지냈던 국기다 돗포가 편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