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후지야마 이치로는 풍요로운 유년기를 보냈으며, 피아노와 동요 가수로 활동하며 일찍이 음악적 재능을 드러냈다. 도쿄 음악학교에서 정통 성악을 배우면서도 대중음악 활동을 병행하며 일본의 대표적인 가수로 성장했다.
1.1. 유년기 및 학창 시절
후지야마 이치로는 1911년 4월 8일 도쿄시 니혼바시구 가키가라초(현재의 도쿄도 주오구 니혼바시카키가라초)에서 모슬린 도매상 '오미야'의 셋째 아들이자 다섯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마스나가 신자부로는 오미야의 지배인이었으며, 모친 유는 가게 주인의 양녀였다. 모친 유가 주식 투자와 임대 주택 운영으로 상당한 수입을 올려 유년기는 경제적으로 매우 유복했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친척인 작곡가 야마다 겐이치로가 설립한 일본 음악학교에 자주 드나들며 찬미가를 부르거나 악보를 읽는 법을 배웠다. 또한 스미다가와를 오가는 증기선을 타고 아사쿠사에 놀러 다니며 노점상들의 구절이나 변두리 사람들의 정확한 발음을 접했는데, 이는 훗날 그가 명료한 발음을 강조하는 가창법의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1918년 봄 게이오기주쿠 유치원에 입학했으며, 동급생 중에는 훗날 유명한 예술가가 되는 오카모토 다로가 있었다. 이 시기 그는 악보를 능숙하게 읽어 학내외에서 동요 공연에 출연하고 '봄의 들판' 등의 동요를 음반으로 녹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음악 교사 에자와 세이타로의 권유로 한동안 노래를 쉬고 악전과 악보 읽기, 피아노 및 바이올린 훈련에 집중했다. 학업 성적은 음악 과목에서 6년 내내 10점 만점에 9점 이상을 받았고, 다른 과목도 모두 7점 이상을 기록했다.
1924년 봄 게이오기주쿠 보통부로 진학한 후지야마는 보통부 음악 교사인 히로타 류타로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과외 수업에 참여하는 등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럭비부에 입단하여 운동에도 전념했는데, 3학년과 4학년 때는 1929년 전국 중등 학교 축구 대회에서 우승을 경험했다. 다만 이 시기 학업 성적은 음악과 체육을 제외하고는 좋지 않아 졸업 시 학내 순위는 52명 중 51위였다. 최하위는 오카모토 다로였는데, 훗날 오카모토는 후지야마에게 "마스나가는 학교에 자주 나왔는데 뒤에서 두 번째였고, 나는 거의 안 나갔는데 꼴찌였으니, 실제로는 네가 꼴찌였다"고 말한 일화도 있다.
게이오기주쿠 재학 중이던 1927년, 게이오의 응원가 '젊은 피'가 만들어졌을 때, 그는 게이오-와세다전을 앞두고 보통부 재학생으로서 학생들의 가창 지도를 맡았다. 이 과정에서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는 상급생들을 엄격하게 지도하여 시비가 붙어 구타당하기도 했지만, 이후로도 '젊은 피'와의 인연은 오래 지속되었다. 이 시기 후지야마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강조한 봉사 정신을 체득했는데, 이는 훗날 로타리 클럽이나 보이스카우트 활동, 그리고 복지 시설 위문으로 이어졌다.
1.2. 도쿄 음악학교 시절
게이오기주쿠 보통부를 졸업한 후지야마는 1929년 4월, 당시 일본에서 유일한 관립 음악 전문학교였던 도쿄 음악학교 예과 성악부(현 도쿄 예술대학 음악학부)에 입학했다. 당시는 '노래와 춤은 여성의 것'이라는 풍조가 강했기에, 성악부에 입학한 남학생은 후지야마 단 한 명뿐이었다. 입학시험 면접에서 음악의 길을 지망하는 이유를 묻자, 후지야마는 "오페라 가수가 되겠다"고 답했다.
그는 예과 성악부에서 30명 중 15위의 성적을 기록했으며, 곧이어 본과에 진학했다. 1931년 2월에는 성적 우수자 연주회인 '학우 연주회'(토요 연주회)에 출연하여 오페라 '파우스트'의 '이 손을 잡으라', 오페라 '리골레토'의 '아름다운 아가씨여' 사중창에서 바리톤 독창을 선보이는 등 순조로운 학생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음악학교 진학 직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실가인 모슬린 도매상의 경영이 기울기 시작했고, 결국 3.80 만 JPY의 빚을 떠안고 폐업하게 되었다.
후지야마는 가계를 돕기 위해 사보(악보 필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이는 작곡가 야마다 고사쿠의 자필 악보를 정서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입이 적어 음반 녹음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는 학교의 교외 연주 금지 학칙 58조를 위반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그는 '후지야마 이치로'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이 이름은 당시 절친한 친구인 나가후지 히데오(永藤秀雄)의 성을 변형하여 '후지나가'로 하려 했으나, 자신의 본명 '마스나가'의 '나가'가 들어가 정체가 드러날 것을 우려하여 '나가'를 '산'(山야마일본어)으로 바꾸고 '일본 최고'라는 의미에서 '후지산'을 연상하는 '후지야마'와 '이치로'를 조합하여 지었다고 한다. 이 가명은 단 5분 만에 지어졌으며, '하나부사 도시오', '이노우에 시즈오', '미나미 이치로', '후지무라 지로' 등 여러 다른 가명도 사용했다.
후지야마는 1931년부터 1932년까지 약 40곡을 녹음했다. 대표곡은 고가 마사오가 작곡하여 1931년 9월 발매된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로, 1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당시 일본 축음기가 대만과 조선을 포함해 약 20만 대에 불과했던 점을 고려할 때 '광란에 가까운 대히트'였다. 이 곡에서 후지야마는 성량을 억제하고 아름다운 공명음을 살린 크룬 창법을 사용하여 전기 녹음 시대의 마이크 특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했으며, 우울함과 모더니즘이 공존하는 시대상을 반영하려는 고가 마사오의 의도를 완벽하게 구현했다. 같은 1931년에 발매된 고가 작곡의 '언덕을 넘어서' 또한 히트했다. '언덕을 넘어서'는 마이크에서 상당한 거리를 두고 선명하게, 성량을 유지하면서도 넘치지 않게 노래하는 표현으로 고가 멜로디의 청춘을 드높였다. 이 두 곡의 히트로 후지야마와 고가는 스타덤에 올랐다.
노래의 히트와 함께 '후지야마 이치로'라는 가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후지야마는 아르바이트비가 곡당 15 JPY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음반이 팔리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는 학교 관계자에게 정체가 발각될 것을 두려워했다. 고가 마사오와 관계가 깊었던 메이지 대학 만돌린 클럽의 정기 연주회에 게스트로 출연했을 때는 무대 뒤에서 숨어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관객들이 불만을 표출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도쿄 음악학교 앞으로 "후지야마 이치로는 귀교의 마스나가 다케오이다"라는 내용의 투서가 도착하여 학교 당국은 후지야마를 추궁했다. 후지야마는 "교수님들도 작곡 등으로 학교 밖에서 돈을 버는데, 학생들이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하는 것을 나무라는 것은 불공평하다"며 반발했고, 자칫하면 퇴학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그를 하이바리톤 성악가로 높이 평가했던 클라우스 프린스하임이 퇴학에 반대했고, 게이오기주쿠 보통부 시절부터 그를 잘 알던 히로타 류타로, 오츠카 준, 야나다 사다시도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아르바이트 수입을 모두 어머니에게 드린다는 점을 들어 옹호했다. 그 결과, 향후 음반 녹음 금지와 한 달 정학 처분으로 마무리되었는데, 이 한 달은 학교의 겨울방학 기간과 겹쳐 실질적인 처벌은 없었다. 이때 후지야마는 아직 녹음하지 않았던 '그림자를 그리워하며'를 이미 녹음했다고 학교에 목록을 제출하여 발매를 가능하게 했다. 정학이 해제되자 후지야마는 음반 녹음을 중단하고 학업에 전념했다.
1932년 당시 도쿄 음악학교는 '풍기'를 이유로 오페라 무대 상연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도쿄 음악학교 소악당에서 예외적으로 무대 상연된 학교 오페라 '자 야자거'(Der Jasager데어 야자거독일어, 쿠르트 바일 작곡)에서 후지야마는 주역 소년 역을 맡았다. (소년 역은 본래 보이 소프라노가 부른다. 다른 주역인 교사 역은 이토 다케오가 연기했다.) 또한 히비야 공회당에서 프린스하임 지휘로 상연된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서는 솔리스트로 나서 헤르만 부하페니히, 마리아 토르 등 외국인 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바리톤 독창을 선보여 기대의 호프로 주목받았다.
1.3. 레코드사 활동
후지야마 이치로는 도쿄 음악학교 졸업 후 각 레코드사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일본 대중음악계의 중심에 섰다. 특히 작곡가 고가 마사오와의 협업은 그의 음악 경력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1.3.1. 빅터 레코드 시기
1933년 3월, 후지야마는 도쿄 음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주간 음악 신문'은 그의 졸업 연주에서 오페라 '광대'의 아리아와 오페라 '밀렵꾼'의 독창을 언급하며 도쿄 음악학교 역사상 최고의 성악가가 될 것이라고 평했다. 그는 실가의 빚을 갚으려는 강한 의지로 졸업 직후 빅터 레코드에 입사하여 전속 가수가 되었다. 빅터는 이미 전년도 봄부터 후지야마와 접촉하여 매달 100 JPY의 학비를 지원하고 있었다.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 등 히트곡이 컬럼비아에서 발매되었기 때문에 컬럼비아 입사도 고려했지만, 컬럼비아가 후지야마가 요구한 월급제를 거부하여 결국 월급 100 JPY와 2%의 음반 인세 지급을 약속한 빅터에 입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933년 3월, 컬럼비아에서 발매된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음반에는 후지야마가 본명 마스나가 다케오로 독창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빅터 입사 후 2년 동안 후지야마는 도쿄 음악학교에 연구과생으로 재적하며 부하페니히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작곡, 편곡, 녹음 등을 하면서도 학교와 부하페니히의 자택을 오갔다. 1933년 4월에는 요미우리 신문사 주최 신인 연주회에 도쿄 음악학교 대표로 출연했고, 같은 해 6월 18일에는 도쿄 음악학교의 히비야 공회당 정기 연주회에도 출연했다. 클라우스 프린스하임 지휘의 베토벤 '합창 교향곡'에서 바리톤 독창을 맡기도 했다. 이 시기 후지야마는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불렀다. 1933년 10월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후지야마 이치로, 마스나가 다케오의 밤' 공연에서는 '후지야마 이치로'로서 재즈와 유행가를, '마스나가 다케오'로서 클래식을 불렀다. 그는 아름다운 울림으로 성량 풍부하게 독창하는 성악가 마스나가 다케오와 마이크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테너 가수 후지야마 이치로를 구분하여 양 분야 음악의 매력을 선보였다. 음반으로도 유행가 외에 클래식(바그너, 슈만)과 재즈 음반을 발표했다.
빅터 시절 후지야마는 '불타는 영산'(18만 7500개 판매), '나의 청춘'(10만 500개 판매) 등이 히트했지만, 음악학교 재학 중 녹음한 고가 멜로디만큼의 대히트곡은 없었다. 그는 이 시기를 회상하며 "내가 나설 차례가 없었다", "음반 판매량을 지상명령으로 삼는 프로 가수들의 벽은 두꺼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관학 출신자의 얄미운 아카데미즘을 배제하고, 저급하고 저속한 취미를 피하고 싶었다. 나는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음악을 소개하고, 그 연주자로서 살겠다"는 생각으로 "슈만을 노래하고, 유럽과 미국의 명곡이나 민요를 노래하며, 물론 유행가도 부르는" 충실한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1.3.2. 데이치쿠 레코드 시기

빅터와의 3년 계약 기간이 만료된 후, 빅터는 후지야마와의 재계약을 원했지만, 당시 컬럼비아에서 테이치쿠 레코드로 이적했던 고가 마사오는 후지야마에게 테이치쿠로의 이적을 권유했다. 후지야마는 테이치쿠의 브랜드 이미지(창업자가 구스노키 마사시게에 심취하여 그의 동상을 레이블 마크로 삼거나 그의 이름을 딴 예명을 가수에게 붙이는 등)에 저항감을 느꼈지만, 실가의 경제적 사정도 있었고, 최종적으로 고가 마사오와 다시 협업하는 매력이 더 컸다. 빅터와의 계약 기간 만료 후 한 달을 기다린 뒤 테이치쿠로 이적했다. 당시 내각총리대신의 월급이 800 JPY이던 시대에 그의 계약금은 무려 1.00 만 JPY에 달했다.
1936년, 고가 마사오가 작곡한 '도쿄 랩소디'가 35만 개 판매되며 큰 히트를 기록했다. 이로 인해 후지야마는 B면 곡인 '도쿄 아가씨'와 합쳐 2.10 만 JPY의 가창 인세를 손에 쥐게 되었고, 학생 시절부터 짊어졌던 실가의 빚을 모두 청산할 수 있었다. PCL에서 '도쿄 랩소디'를 주제가로 한 동명의 영화도 제작되었고, 후지야마가 주연을 맡았다. '도쿄 랩소디'와 마찬가지로 고가 마사오가 작곡하여 1936년에 발매된 '남자의 순정', 이듬해의 '푸른 양복을 입고', '청춘 일기' 등도 히트했다. 그는 이 시기에 불렀던 곡 중 인상 깊은 곡으로 '도쿄 랩소디'와 함께 '새벽의 노래'(NHK 오사카 방송국이 1936년 기획한, 유명 시인의 작품에 곡을 붙인 '국민 가요', '국민 합창'이라 불린 곡)를 꼽았다. 이 무렵 독일 대사 앞에서 노래했을 때 낡은 프랑스 차를 타고 갔다가 대사 부인으로부터 "이렇게 훌륭한 가수가 이런 차를 타고 다니는군요"라는 말을 듣고, 대사관을 통해 새 독일 차를 특별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고 중일 전쟁이 시작되면서 정부는 국민 정신 총동원을 선언하고 음악 업계에 전의 고취를 위한 곡 발매를 장려하고 유머, 연애, 감상적 내용의 곡 발매를 금지하는 지시를 내렸다. 테이치쿠는 이 방침에 따랐고, 후지야마 또한 '충렬! 야마토혼', '국가 총동원', '눈의 진군', '내달려라 아라와시', '마지막 혈전', '보병의 본령', '애국 행진곡', '야마우치 중위의 어머니' 등 전의 고취를 위한 곡들을 녹음하게 되었다.
테이치쿠 시절 후지야마 이치로의 인기는 매우 높았으며, 폴리도르의 쇼지 다로와 더불어 '단기쿠 시대'를 형성했다. 테이치쿠 시절 후지야마는 바리톤 성악가보다는 테너 가수로서 유행가에 중점을 두었다. 이에 대해 당시 신문 기자이자 음악 평론가였던 가미야마 게이조는 "사랑의 옛집으로 돌아가자, 남자의 순정 같은 유행가는 그만둬라, 목소리가 아깝다, 클래식으로 돌아가라"고 제언하기도 했다.
1.3.3. 콜럼비아 레코드 시기
1939년 테이치쿠와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다. 이 시기 고가 마사오와 테이치쿠가 방침 차이로 대립하고 있었고, 후지야마는 고가와 함께 컬럼비아 레코드로 이적했다. (후지야마는 빅터로 복귀하는 것도 모색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이적 후, 후지야마는 '상하이 야곡'과 핫토리 료이치와의 첫 협업으로 '그리운 볼레로'를 녹음하여 히트시켰다. 1940년에는 고가 마사오 작곡의 '그리운 노랫소리', '봄은 어디에'가 히트했지만, 음악관의 차이로 점차 고가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성악가로서는 1939년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올 일본 신인 연주회 10주년 기념 연주회'에서 베르디의 아리아를 바리톤 독창했으며, 1940년에는 만프레트 구를리트 지휘의 베토벤 '합창 교향곡'(NHK 라디오 방송)에서 바리톤 독창을 맡아 테너의 아름다움을 지닌 바리톤 마스나가 다케오의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마스나가 다케오 명의로는 마쓰오 바쇼의 '거친 바다여 사도에 걸쳐진 은하수'라는 여행의 서정을 주제로 한 국민 가요 '여수'를 녹음하기도 했다.
1.4. 전쟁 시기 활동 및 포로 생활
1941년 12월 대동아 전쟁(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은 영국군, 네덜란드군, 미국군, 오스트레일리아군을 상대로 우세했고, 군은 신문사에 각지에 주둔하는 장병들에게 오락을 제공하기 위해 위문단 결성을 요청했다. 요미우리 신문사가 해군의 요청을 받아 남방 위문단을 결성하자, 후지야마는 이에 참여했다. 후지야마는 음악 선진국인 유럽으로 건너가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싱가포르나 홍콩을 비롯한 유럽 국가의 식민지였던 점령지로 가면 유럽 문화에 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조국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참여를 결정했다.
1943년 2월, 위문단은 옛 네덜란드령 보르네오, 자바 방면의 해군 장병 위문을 위해 배를 타고 요코하마 항을 출발했다. 도중 기항한 가오슝 항에서는 적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후지야마는 처음으로 전황이 내지에서 선전되는 것보다 훨씬 긴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본군은 이 무렵부터 곳곳에서 격전을 치르게 되었지만, 후지야마는 그러한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후지야마는 훗날 당시의 전황을 정확히 파악했다면 남방 위문에는 나서지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해군 촉탁으로 종전까지 각지에서 위문 활동을 계속했다.
3월에 보르네오섬(칼리만탄) 발릭파판에 도착했다. 보르네오섬 외에도 술라웨시섬, 티모르섬 등 주변 일대를 위문했다. 후지야마는 자신의 노래와 군가 외에 현지 민요도 불렀다. (민요 '붕아완 솔로'는 귀국 후 후지야마의 레퍼토리에 추가되어 일본에서 유행가가 되었다.) 해군 사관이 지은 가사에 곡을 붙여 부르기도 했다 ('사마린다 고아타'). 후지야마는 7월에 예정되었던 위문 활동을 마치고 귀국했다.
후지야마는 귀국 후 곧바로 해군으로부터 다시 남방 위문 요청을 받아, 11월에 술라웨시섬으로 출발했다. 그는 유럽 문화를 더 접하고 현지 민요를 채보하고 싶은 마음에서 요청을 수락했다. 이전 위문에서의 대우는 군속이었고, 후지야마는 이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월급 1800 JPY의 해군 촉탁(주임관 5등, 소령 대우) 자격으로 파견되었다. (체류 중 후지야마의 대우는 중령 대우로 격상되었다.)
후지야마의 위문단은 술라웨시섬, 보르네오섬, 소순다 제도의 발리섬, 롬복섬, 숨바와섬, 플로레스섬, 숨바섬, 티모르섬 등을 순회했다. 이 중 숨바섬은 다수의 적기가 날아다니는 최전선 지역으로, 위문을 방문한 연예인은 후지야마 단 한 명뿐이었다. 소순다 제도를 위문하기 위해 간편한 복장으로 부임하라는 요청을 받은 후지야마는 애용하던 이탈리아 달라페사製 아코디언을 술라웨시섬에 둔 채 출발했지만, 그 섬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패전을 맞이하여 아코디언을 잃게 되었다. 이후 후지야마는 자바섬 수라바야에서 구입한 독일 호너사製 아코디언을 애용하게 된다.

1945년 8월 15일, 후지야마는 자바섬 수라바야에서 마디운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일본의 패전 소식을 들었다. 후지야마는 막 독립을 선언한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포로가 되어 자바섬 중부 나우이 형무소에 수용되었고, 이후 솔로강 중류에 위치한 마게탄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1946년, 훗날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되는 수카르노의 명령으로 말랑주 푸종의 산촌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미쓰비시 재벌이 운영하던 농원이 있었고, 옛 일본 제국 해군 장병들이 그 일대를 '구라마 마을'이라 명명하고 자급자족 생활을 하고 있었다. 구라마 마을 체류 중, 후지야마는 휴일이 되면 해군 병사였던 모리타 세이시로와 함께 각지의 수용소를 위문했다. 이 구라마 마을 생활은 몇 달 만에 막을 내렸다. 전쟁 종결 직후부터 진행되던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서 인도네시아 독립군과 네덜란드군, 영국군 사이에 일시적인 휴전 협정이 성립되어, 일본인 포로들을 다른 곳으로 이송한 후 귀국시키기로 했기 때문이다. 후지야마는 리아우 제도의 렘팡섬으로 이송되었다. 이 섬에서 그는 영국군 용무원으로 일하며 영국군 병사들을 위문하며 지냈다. 1946년 7월 15일, 후지야마는 복원수송함으로 개조된 항공모함 가쓰라기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1.5. 전후 활동 재개 및 국민 가수로의 발돋움
1946년 7월 25일, 항공모함 가쓰라기는 히로시마현 오타케 항에 도착했다. 도쿄 자택에 도착한 직후 NHK에서 인터뷰를 오는 등, 후지야마의 귀국은 큰 뉴스거리가 되었다. 그는 8월 4일 NHK 라디오 프로그램 '음악 보물상자'에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에서 가수 활동을 재개했다. 1947년에 들어서면서 전전파 가수들이 본격적으로 부활의 기세를 올렸다. 후지야마 이치로 또한 라디오 가요 '초승달 아가씨', '음악 5인조'의 주제가 '꿈 아련한 도쿄', 일본 가곡으로도 음악적 평가가 높은 '백조의 노래' 등을 히트시켰다.
1949년, 나가이 다카시의 수필을 바탕으로 한 '나가사키의 종'이 히트했다. 1950년에는 이 노래를 주제가로 한 영화 '나가사키의 종'이 제작되었다. 이 곡에 감동한 나가이 다카시와 후지야마, 그리고 작사가 사토 하치로, 작곡가 고세키 유우지 세 사람 사이에 교류가 생겼고, 나가이는 세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단가 '새로운 아침'을 보냈다.
새로운 아침 햇살이 비치기 시작하는 황야에 울려 퍼져라 나가사키의 종
후지야마는 이 단가에 곡을 붙여 '나가사키의 종'을 부를 때 이어서 '새로운 아침'을 부르게 되었다. 후지야마는 1951년 1월 3일 열린 '제1회 NHK 홍백가합전'에 백조의 주장으로 출전하여, 백조의 마지막 곡이자 전체 마지막 곡으로 '나가사키의 종'을 불렀다. 나가이 다카시는 이로부터 4개월 후인 5월 1일에 영면했다. 후지야마는 1951년 제1회부터 1958년 제8회까지 8년 연속으로 출전하는 등, 가수로서 총 11회 홍백가합전에 출연했다.
1949년 7월, 도호는 이시자카 요지로의 소설 '푸른 산맥'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개봉했다. 이 영화의 주제가로 동명의 '푸른 산맥'이 만들어졌고, 후지야마가 나라 미쓰에와 듀엣으로 불렀다. '푸른 산맥'은 영화와 노래 모두 대히트를 기록했다. 이 노래는 오랫동안 세대를 불문하고 사랑받았으며, 발매 40년 후인 1989년 NHK가 방영한 '쇼와 시대의 노래, 마음에 남는 200곡'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나라 미쓰에가 1977년에 사망하자, '푸른 산맥'은 후지야마 이치로의 대표곡이 되었다.
1.6. 국민적 가수 및 지휘자로서의 활약
1954년, 후지야마는 컬럼비아의 전속 가수를 그만두고 NHK의 촉탁(준전속) 가수가 되었다. 그 이유에 대해 후지야마 자신은 "자신의 클래식과 대중음악 중간을 가는 음악 생활을 충실히 하면서, 장차 활약할 신인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의 전기 작가 이케이 유우에 따르면, 그 배경에는 후지야마가 이전부터 음반 회사의 상업주의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었으며, 배우가 대본을 읽고 출연을 결정하듯이 원하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고 한다. 1961년에는 치쿠마쇼보 발행의 '세계 음악 전집' 제13권 성악(3)에서 포스터 가곡을 독창하고, 편곡도 담당했다.
1965년, NHK의 허가를 받아 출연한 도쿄 12 채널(현 TV 도쿄) 제작의 '가요 백년'이 히트했다. '가요 백년'은 베테랑 가수들이 옛 추억의 노래를 부르는 콘셉트의 프로그램으로, 후에 '그리운 노랫소리'로 제목을 바꾸고 '그리운 명곡 붐'을 일으켰다. 후지야마는 클래식 향기가 나는 홈송을 주로 불렀고, 1958년 이후에는 홍백가합전에도 몇 차례를 제외하고는 가수로서가 아닌 지휘자로서 출연했지만, 다시 가수로서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는 홍백가합전에 1950년 제1회부터 1992년 제43회까지 가수 또는 지휘자로서 연속 출연했다.
1.7. 일본 가수 협회 회장 역임
1972년 10월, 초대 회장이었던 쇼지 다로가 뇌출혈로 사망하자, 후지야마 이치로는 일본 가수 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이 협회는 가수들의 입지 강화를 내건 임의 단체였으나, 후지야마의 회장 취임을 계기로 사단법인화가 논의되었다. 문화청과의 협상 결과, 1975년 5월 협회는 사단법인으로 인가되었다. 사단법인이 되면서 일본 가수 협회의 위상은 강화되었고, 그때까지 작사가와 작곡가에게만 지급되던 저작권 수입이 저작인접권으로서 가수에게도 지급되게 되었다. 후지야마는 1979년 5월까지 회장을 지냈고, 이후에는 이사로 활동했다. 후지야마의 사망 후 일본 가수 협회는 NHK와 공동으로 추모 콘서트를 열었다.
1.8. 국민영예상 수상

1992년 5월 28일, 후지야마는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수상 이유는 "정통한 음악 기술과 지적인 해석으로 가요곡 가창에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했다", "오랫동안 가요곡을 통해 국민에게 희망과 격려를 주고, 아름다운 일본어 보급에 공헌했다"는 것이었다.
이케이 유우에 따르면, 후지야마의 수상을 결정지은 것은 1992년 3월 28일 NHK 종합에서 방송된 TV 프로그램 '수많은 언덕을 넘어서 - 후지야마 이치로, 80세, 청춘의 노랫소리'이다. (방송을 위해 후지야마는 NHK 라디오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노래와 자신이 작곡한 '라디오 체조의 노래'를 포함한 총 24곡을 녹음했다.) 이 프로그램을 본 시마무라 노부테루 중의원 의원이 당시 자유민주당 간사장이었던 와타누키 다미스케에게 국민영예상 수여를 제안하면서 정부가 검토에 들어가게 되었다. 또한 NHK 아나운서 출신의 참의원 의원이자 과거 고가 마사오의 국민영예상 수상에 힘썼던 다카하시 게이조도 후쿠다 다케오를 통해 정부에 협조를 요청했다.
후지야마는 딸을 통해 수상 제의를 받고 수락했다. 당초 시상식은 4월 25일로 예정되었으나, 당시 후지야마는 좌골신경통으로 입원 중이었기에 퇴원 후인 5월 28일로 연기되었다. 시상식장인 총리 관저에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후지야마는 안으로 들어가자 휠체어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걸었다. 그는 도쿄 음악학교 시절 은사였던 클라우스 프린스하임의 지휘 아래 성악가 마스나가 다케오로서 히비야 공회당에서 독창했던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반주 없이 불렀고, 수십 년 만에 클래식 음악의 마스나가 다케오와 대중음악의 후지야마 이치로의 모습을 동시에 선보였다. 그는 스포츠 선수 외 국민영예상 수상자 중 최초의 생존 중 수상자가 되었다. (다른 비스포츠 선수 생존 중 수상자로는 배우 모리 미츠코, 쇼기 기사 하부 요시하루, 바둑 기사 이야마 유타 등이 있다.) 1996년 우에노 온시 공원 내에 설치된 '일본 스포츠 문화상 영예 광장'에는 국민영예상 수상자들의 손도장이 전시되어 있으며, 후지야마의 손도장도 있다.
2. 음악 철학 및 창법
후지야마 이치로는 일본어 발음의 명료성을 특히 강조하는 가창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후배 가수들에게 명확한 발음과 정통적인 발성법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유명한 일화로, 언어학자 긴다이치 하루히코는 홍백가합전에서 '반딧불이 빛'이 불릴 때 지휘를 맡았던 후지야마가 노래 시작 부분의 '악센트에 맞지 않는 멜로디'를 이유로 자신은 절대로 소리 내어 부르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실제로는 도쿄 12채널의 '그리운 노랫소리' 등의 프로그램에서는 가창했다.) 음이름을 이탈리아식으로 발음할 때도 "라는 la이고, 레는 re이다"라고 엄밀하게 발음을 구분했다. 긴다이치는 후지야마의 엄격함이 언어의 악센트에 엄격했던 작곡가 모토오리 조세이의 집을 자주 드나들면서 길러진 것이라고 추측했다.
후지야마는 프로 가수에게 중요한 것은 정식으로 성악을 배우고 기본적인 발성을 습득하여, 기본에 충실하고 확실한 발성으로 가사를 명료하게 부르는 것이며, 기교를 부리는 것은 그 다음 이야기라고 밝혔다.
그는 후배 가수들 중에서 이토 히사오, 오미 도시로, 오카모토 아쓰로, 후세 아키라, 오자키 기요히코, 유키 사오리, 세리 요코, 바이쇼 치에코, 아이 조지 등을 "단순히 크룬(croon)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싱(sing)도 할 수 있는 양수겸장(兩手兼將)이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싱어송라이터 야노 아키코는 NHK 경음악 오디션에서 후지야마의 '언덕을 넘어서'를 불렀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후지야마는 "훌륭한 피아노 반주에 실어 과감한 표현으로 노래했다. 이에 깜짝 놀랐다. 반주하며 노래하는 것이 쉽다고 말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평가한 뒤, "더욱 도전하고, 젊음은 도전이다. 부딪혀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라. 꼭 그렇게만 해야 한다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조언했다.
3. 인물상 및 에피소드
후지야마 이치로는 음악 외적으로도 다채로운 면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특히 그의 까다로운 성격과 자동차에 대한 남다른 애정은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알려져 있다.
- 어린 시절부터 성질이 급하고 손이 빨랐다. 이 성격 때문에 유치원을 전학하고, 게이오기주쿠 보통부 시절에는 3주간 기숙사 생활을 명령받기도 했다. 이때 외로움 때문에 익힌 뜨개질은 후지야마의 특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말년에도 그의 격렬한 기질은 변치 않아, 택시 운전사와 싸워 피투성이가 된 채 스튜디오에 들어선 적도 있다.
- 자동차를 좋아하기로 유명하며, 어린 시절부터 자동차에 익숙하게 자랐다. 초등학교 4, 5학년 무렵에는 실가 모슬린 도매상에 있던 배달용 화물 자동차를 주차하고, 오토바이 운전도 마스터했다. 도쿄 음악학교 재학 중에 자동차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유행 가수가 된 후에도 무대 이동 시에는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전전에 독일 대사 앞에서 노래했을 때, 초라한 프랑스 차를 타고 온 것을 대사 부인에게 지적당했고, 훗날 독일 차를 특별 가격으로 제공받기도 했다. 소유 차량은 종전 직후 탔던 닷선을 제외하고 모두 수입차였다. 운전 매너도 훌륭하여, 우수 운전자로서 1972년 녹십자 교통영예상 동상, 1982년 녹십자 교통영예상 은상을 수상했다. 한편 다른 사람의 운전 매너에는 엄격하여, 끼어들기한 차를 향해 소리치기도 했다. 후지야마는 1949년 7월 간농양(간에 고름이 생기는 질병)을 앓아 입원한 적이 있는데, 이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낀 그는 아내를 사장으로 하여 '미키 모터스'라는 세차·정비·급유 점을 부업으로 열기도 했다.
- 후지야마가 음대생이었던 시절에는 악보가 귀하여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빌려 사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때문에 후지야마는 악보를 함부로 다루는 사람에게 매우 엄격했다.
- 전쟁 중, 남방 위문에서 귀국한 후지야마가 작곡가 야마다 고사쿠의 저택에 인사하러 가자, 야마다가 후지야마가 신고 있던 남방에서 구한 신발을 마음에 들어 "나에게 줘"라며 실랑이가 벌어졌다. 후지야마도 거절할 수 없어 야마다의 신발과 교환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이야기를 후지야마에게 들은 음악 평론가 모리 이치야가 "그 신발은 언젠가 본 신발이네요"라고 노래하자 후지야마도 "아, 그래"라고 받아 노래했다.
4. 사회 활동
후지야마 이치로는 게이오기주쿠 재학 시절부터 영향을 받은 봉사 정신을 바탕으로 1950년대 중반부터 다양한 사회 활동에 참여했다.
4.1. 보이스카우트
후지야마는 봉사를 중시하는 보이스카우트 정신에 공감하여 보이스카우트 일본 연맹의 자문위원을 지냈다. 1971년 제13회 세계 잼버리가 일본(시즈오카현 후지노미야시)에서 개최되었을 때, 주제가 '밝은 길을'을 작곡했다. 1988년 스카우트 송을 수록한 카세트테이프가 제작되었을 때는 녹음에 참여하여 직접 연맹가 '꽃은 향기롭네'나 '빛의 길' 등 7곡을 불렀다. 1992년, 오랜 공로를 기려 연맹으로부터 최고 공로상인 '기지쇼'를 받았다. 후지야마의 장례식에는 보이스카우트 블레이저와 기지쇼를 착용한 사진이 영정으로 선택되었다.
4.2. 로타리 클럽
1958년 6월, 후지야마는 로타리 클럽 (도쿄 니시 로타리 클럽)에 입회했다. 그는 회원으로서 정력적으로 활동했으며, 정기 모임에 결석한 적이 없었다. 사망 전날인 1993년 8월 19일에도 지팡이를 짚고 휠체어를 탄 채 참석했다. 모임 운영에도 열심이었으며, 1986년부터 1987년까지 도쿄 니시 로타리 클럽 회장을 지냈다. '도쿄 니시 로타리 클럽의 노래'를 비롯하여 로타리 클럽 관련 노래를 작곡하고 회원들에게 가창 지도를 하기도 했다.
5. 주요 수상 내역
후지야마 이치로는 생전에 수많은 문화적, 사회적 공로를 인정받아 다양한 상을 수상했다.
- 일본 적십자사 특별 유공장 (1952년)
- NHK 방송 문화상 (1958년)
- 사회 교육 공로장 (1959년)
- 자수포장 (1973년)
- 일본 레코드 대상 특별상 (1974년)
- 서보장 3등 금경 중광장 (1982년 4월 29일)
- 기지쇼 (1992년, 보이스카우트 일본 연맹)
- 국민영예상 (1992년 5월 28일)
- 종사위 (1993년 8월 21일, 사후 추서)
6. NHK 홍백가합전 출전 기록
후지야마 이치로는 1951년 제1회부터 1958년 제8회까지 8년 연속으로 출전하는 등, 가수 또는 지휘자로서 총 11회 홍백가합전에 출연했다. 그는 홍백가합전 역사상 마지막 메이지 시대 출생 가수이며, 78세에 가수로 출전하여 최고령 출전 기록을 세웠으나, 이 기록은 2014년 제65회 홍백가합전에서 미와 아키히로가 경신했다.
연도/방송회 | 방송일 | 장소 | 회차 | 곡목 | 출연 순서 | 대결 상대 | 비고 |
---|---|---|---|---|---|---|---|
1951년(쇼와 26년)/제1회 | 1월 3일 | NHK 도쿄 방송회관 제1 스튜디오 | 첫 | 나가사키의 종 | 7/7 | 와타나베 하마코 | 대미 장식 |
1952년(쇼와 27년)/제2회 | 1월 3일 | NHK 도쿄 방송회관 제1 스튜디오 | 2 | 올림픽의 노래 | 12/12 | 와타나베 하마코 (2) | 대미 장식 (2) |
1953년(쇼와 28년)/제3회 | 1월 2일 | NHK 도쿄 방송회관 제1 스튜디오 | 3 | 도쿄 랩소디 | 11/12 | 쓰키오카 유메지 | 대미 장식 전 |
1953년(쇼와 28년)/제4회 | 12월 31일 | 니혼게키조 | 4 | 언덕은 꽃 만발 | 17/17 | 아와야 노리코 | 대미 장식 (3) |
1954년(쇼와 29년)/제5회 | 12월 31일 | 히비야 공회당 | 5 | 켄터키의 나의 집 | 05/15 | 마쓰다 토시 | |
1955년(쇼와 30년)/제6회 | 12월 31일 | 산케이 홀 | 6 | 니콜라이의 종 | 16/16 | 후타바 아키코 | 대미 장식 (4) |
1956년(쇼와 31년)/제7회 | 12월 31일 |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 | 7 | 아! 목장은 초록 | 10/25 | 후타바 아키코 (2) | |
1957년(쇼와 32년)/제8회 | 12월 31일 |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 | 8 | 붕아완 솔로 | 18/25 | 와타나베 하마코 (3) | |
1964년(쇼와 39년)/제15회 | 12월 31일 |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 | 9 | 나가사키의 종 (2회) | 04/25 | 와타나베 하마코 (4) | 7년 만의 출전 |
1973년(쇼와 48년)/제24회 | 12월 31일 | NHK홀 | - | 나가사키의 종 (3회) | - | (와타나베 하마코) | 9년 만의 출전, 특별 출연 |
1979년(쇼와 54년)/제30회 | 12월 31일 | NHK홀 | - | 후지야마 이치로 메모리얼 메들리 ('언덕을 넘어서', '나가사키의 종', '푸른 산맥' 포함) | - | (미소라 히바리) | 6년 만의 출전, 특별 출연 |
1989년(헤이세이 원년)/제40회 | 12월 31일 | NHK홀 | 10 | 푸른 산맥 (2회) | 7/7 (제1부) | (미야코 하루미) | 가수로서 생애 마지막 출전. 이후 '반딧불이 빛' 지휘자로 출연 (1990년 제41회 ~ 1992년 제43회 등) |
7. 주요 작품
후지야마 이치로는 가수로서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작곡가로서도 학교 교가, 회사 사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품 활동을 펼쳤다.
7.1. 대표곡
- '봄의 들판・산의 축제' (1921년)
- '한돈・무엇을 하며 놀까' (1921년)
- '도개교' (1921년)
- '일본 알프스의 노래' (1930년)
- '아름다운 에스파뇰' (1930년)
- '유치원가' (1930년)
- '게이오 보통부가' (1930년)
- '북태평양 횡단비행 행진곡' (1931년)
- '캠프 소곡' (1931년)
- '언덕을 넘어서' (1931년)
-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 (1931년)
- '엔코의 육' (1931년)
- '스키의 노래' (1932년)
- '그림자를 그리워하며' (1932년)
- '비둘기 피리를 부는 여자의 노래' (1932년)
- '붉은 꽃' (1933년)
- '나의 청춘' (1933년)
- '불타는 영산' (1933년)
- '추억의 기타' (1933년) (공동 가창: 토쿠야마 히렌)
- '나고야 축제' (1933년)
- '황태자 전하 탄생 봉축가' (1934년) (공동 가창: 토쿠야마 히렌)
- '체리오!' (1934년) (공동 가창: 코바야시 치요코)
- '오샤카상' (1934년) (작곡도 담당)
- '강변 비둘기라면' (1934년)
- '항상 명랑하게' (1934년) (공동 가창: 이치마루)
- '푸른 달 (페일 문)' (1934년)
- '고전장의 가을' (1934년)
- '춤추는 태양' (1935년) (작곡도 담당)
- '사랑의 꽃다발' (1935년)
- '계곡의 오두막' (1935년)
- '영원의 맹세' (1935년)
- '밤바람' (1935년)
- '두 사람의 청춘' (1936년) (공동 가창: 와타나베 하마코)
- '게이오 온도' (1936년) (작곡도 담당, 공동 가창: 토쿠야마 히렌)
- '도쿄 랩소디' (1936년)
- '도쿄 아가씨' (1936년)
- '남자의 순정' (1936년)
- '청춘의 사육제' (1936년)
- '회상보' (1937년)
- '푸른 양복을 입고' (1937년)
- '청춘 일기' (1937년)
- '백호대' (1937년) (공동 가창: 스즈키 긴료 (시吟))
- '애국 행진곡' (1937년)
- '야마우치 중위의 어머니' (1937년)
- '상하이 야곡' (1939년)
- '그리운 볼레로' (1939년)
- '기원 2600년' (1940년) (공동 가창: 마츠다이라 아키라, 이토 히사오, 키리시마 노보루, 마쓰바라 미사오, 후타바 아키코, 와타나베 하마코, 카토리 미호코)
- '그리운 노랫소리' (1940년) (공동 가창: 후타바 아키코)
- '봄은 어디에' (1940년) (공동 가창: 후타바 아키코)
- '하늘의 용사' (1940년) (공동 가창: 키리시마 노보루, 마쓰바라 미사오, 후타바 아키코, 와타나베 하마코)
- '불타는 드넓은 하늘' (1940년) (공동 가창: 키리시마 노보루)
- '삼색기 아래에' (1940년) (작곡도 담당)
- '흥아 행진곡' (1940년) (공동 가창: 이토 히사오, 후타바 아키코)
- '현상 당선가: 바다의 노래' (1940년)
- '1억의 저력을 내라' (1941년) (공동 가창: 후타바 아키코)
- '곤륜을 넘어서' (1941년)
- '영국 동양함대 궤멸' (1941년)
- '바다의 진군' (1941년) (공동 가창: 이토 히사오, 후타바 아키코)
- '대동아 결전의 노래' (1942년)
- '날개의 개선가' (1942년) (공동 가창: 키리시마 노보루)
- '푸른 목장' (1943년) (공동 가창: 나라 미쓰에)
- '결전의 드넓은 하늘로' (1943년)
- '도쿄 룸바' (1946년) (공동 가창: 나미키 미치코)
- '고향의 마차' (1946년)
- '긴자 세레나데' (1946년)
- '붉은 열매' (1947년) (공동 가창: 와타나베 하마코)
- '초승달 아가씨' (1947년)
- '꿈 아련한 도쿄' (1947년)
- '백조의 노래' (1947년) (공동 가창: 마쓰다 토시)
- '장미 피는 오솔길' (1947년)
- '보거나 듣거나 시험하거나' (1947년) (공동 가창: 나미키 미치코)
- '아사쿠사의 노래' (1947년)
- '젊은이의 노래' (1947년)
- '초록의 노래' (1948년) (공동 가창: 안자이 아이코)
- '푸른 달의 밤은' (1948년)
- '유라리로의 노래' (1948년)
- '푸른 산맥' (1949년) (공동 가창: 나라 미쓰에)
- '나가사키의 종' (1949년)
- '꽃의 맨얼굴' (1949년) (공동 가창: 안도 마리코)
- '산 너머에' (1950년)
- '후쿠자와 유키치 선생님을 찬양하는 노래' (1951년)
- '젊은이의 노래' (1951년) (도호 영화 '젊은이의 노래' 주제가)
- '나가사키의 비' (1951년)
- '도쿄의 비' (1951년)
- '라디오 체조의 노래 (2대째)' (1951년)
- '니콜라이의 종' (1952년)
- '밤의 호수' (1957년)
- '서리 내린 밤의 시계' (1952년) (작곡도 담당)
- '별 그림자 왈츠' (1952년) (작곡도 담당, 공동 가창: 카토 레이코)
- '바다는 살아있다 (바다의 노래)' (1952년)
- '언덕은 꽃 만발' (1952년)
- '먼 불꽃' (1952년) (작곡도 담당)
- '올림픽의 노래' (1952년) (공동 가창: 아라이 에이코)
- '장미빛 달' (1953년)
- '초록 비' (1953년)
- '라디오 체조의 노래 (3대째)' (1956년, 음반 발매는 1958년) (작곡도 담당)
- '파도' (1959년) (작곡도 담당)
- '바다를 넘어 친구여 오라' (1963년)
- '딸이 시집간다고 말하네' (1972년)
- '젊은 도쿄' (1974년)
- '추억' (1974년)
- '향수' (1974년)
- '젊은이의 거리' (1974년)
- '오월의 노래' (작곡도 담당), '성정' (1981년) (작곡도 담당)
- '고향에 노래하는 쓰가루 곶' (작곡도 담당), '기타가 나의 가슴에서' (1981년)
- '붕아완 솔로' (1981년) (번역도 담당, '붕아완 솔로'는 전지(현지)에서 불리던 민요에 자신이 번역 가사를 붙인 것으로 귀국 후 후지야마의 레퍼토리에 추가되었다.) '고향의 구름' (1981년)
- '상쾌하게 뜨겁게', '브라이덜 베일' (1982년)
- '아스카는 가버렸다', '고케시의 노래' (1983년) (작곡도 담당)
- '가마쿠라 서정', '가마쿠라 송' (1988년)
- '고향이여 마음도 모습도 아름답게' (1990년) (작곡도 담당)
- '할머니의 어머니의 노래' (1990년) (작곡도 담당)
- '달려라 뛰어라 던져라' (1990년) (작곡도 담당)
- '마음의 문' (1992년)
- '아카사카 요이마치구사' (작곡도 담당), '환희의 송가' (번역도 담당) (1992년)
- '오늘도 행복 고마워' (1993년) (작곡도 담당)
7.2. 주요 작곡 작품
- '라디오 체조의 노래 (3대째)'
- '싱가포르 일본인 학교 교가'
- '가와고에시립 가스미가세키 초등학교 교가'
- '가와고에시립 가스미가세키 서초등학교 교가'
- '가와고에시립 가스미가세키 서중학교 교가'
- '아사카시립 아사카 제1초등학교 교가'
- '아사카시립 아사카 제6초등학교 교가'
- '니자시립 니자 중학교 교가'
- '시마시립 와구 중학교 교가'
- '하마마츠시립 스나즈카 중학교 교가'
- '스와시립 스와미나미 중학교 교가'
- '니자 온도'
- '게이오기주쿠 여고 교가'
- '슨다이 코후 고등학교 교가'
- '에이메이칸 중고등학교 교가'
- '한큐 브레이브스 응원가'
- '니시테츠 라이온스 노래'
- '생일 축하 노래' (파르나스 제과 광고송)
- '메이테쓰 운수 주식회사 사가'
- '다이닛폰 인쇄 주식회사 사가'
- '도요토키 주식회사 사가'
- '미쓰코시 사가'
- '마쓰시타 전기 주식회사 사가' (파나소닉 전기로 사명 변경 시 다른 곡으로 변경됨)
- '메구로 모두의 노래' (메구로구 노래)
- '가네보 우리들' (가네보 사가, 동사 영업 최종일에 사원들이 제창하는 모습이 보도됨)
- '어머니의 얼굴'
- '히로시마현립 히로 고등학교 학생가'
- '오비히로 오타니 고등학교 교가'
- '전일본 연식 야구 연맹 연맹가'
- '홋카이도 시카오이 고등학교 교가'
- 'K라인의 노래'
- '가이시립 시키시마 미나미 초등학교 교가'
- '가이시립 류오 기타 초등학교 교가'
- '니자시립 제5중학교 교가'
8. 죽음과 추모
후지야마 이치로는 1993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유산은 후세에 길이 기억되고 있다.
1993년 5월 20일, 후지야마는 아카사카 어용원에서 열린 원유회에 참석했다. 7월 22일에는 NHK홀에서 공개 녹화된 '제25회 추억의 멜로디'에 출연하여 '푸른 산맥'을 불렀다. 이 프로그램은 8월 14일 NHK 종합에서 방송되었다. 7월 28일, 도쿄 시내 스튜디오에서 레코딩에 참여하여 자신이 작곡한 '오늘도 행복 고마워'를 불렀다. 다음 날인 7월 29일에는 자택에서 TV 도쿄의 인터뷰를 녹화했다. 8월 21일,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3일 후인 8월 24일에 장례식이 엄수되었다. 사후 그의 공적을 인정받아 종사위에 서임되었다.
후지야마의 유품은 유족으로부터 NHK에 기증되어, NHK 방송박물관의 '후지야마 이치로 작곡실'에 전시되어 있다. NHK 외에도 사이타마현 요노시의 시가 '요노 시민가'를 불렀던 인연으로 요노시에도 유품이 기증되었고, 그 일부는 요노시 도서관(현재의 사이타마 시립 요노 도서관)과 사이타마시 요노 향토 자료관에 전시되어 있다.
후지야마의 묘는 시즈오카현의 후지 영원에 있으며, 묘비에는 후지산 그림과 한자 '一', 히라가나 'ろ'가 새겨져 있어 합쳐서 '후지야마 이치로'로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한, 후지야마가 작곡한 '라디오 체조의 노래'의 악보(2마디 분량)와 가사도 새겨져 있다.
9. 연표
- 1911년(메이지 44년) 4월 8일: 도쿄시 니혼바시구 가키가라초(현 도쿄도 주오구 니혼바시카키가라초)에서 출생.
- 1929년(쇼와 4년) 4월: 도쿄 음악학교 예과 성악부에 입학.
- 1931년(쇼와 6년) 7월: 후지야마 이치로라는 이름으로 음악학교 재학 중 컬럼비아에서 데뷔.
- 1933년(쇼와 8년) 3월: 도쿄 음악학교 본과 성악부를 수석 졸업, 빅터의 전속 가수가 됨.
- 1936년(쇼와 11년): 테이치쿠의 전속 가수가 됨.
- 1939년(쇼와 14년): 컬럼비아의 전속 가수가 됨.
- 1940년(쇼와 15년) 4월: 결혼.
- 1943년(쇼와 18년) 2월: 남방 위문단에 참여 (7월까지 활동).
- 1943년(쇼와 18년) 11월: 다시 남방 위문단에 참여 (1945년 8월까지 활동).
- 1945년(쇼와 20년) 8월 ~ 1946년 7월: 인도네시아에서 포로 생활.
- 1946년(쇼와 21년) 7월 25일: 귀국.
- 1952년(쇼와 27년): 일본 적십자사 특별 유공장 수상.
- 1954년(쇼와 29년): 컬럼비아 전속 계약을 마치고 NHK의 촉탁(준전속) 가수가 됨.
- 1958년(쇼와 33년): NHK 방송 문화상 수상.
- 1959년(쇼와 34년): 사회 교육 공로장 수상.
- 1973년(쇼와 48년): 자수포장 수상.
- 1974년(쇼와 49년): 일본 레코드 대상 특별상 수상.
- 1982년(쇼와 57년): 춘계 서훈에서 서보장 3등 수상.
- 1992년(헤이세이 4년) 5월 28일: 국민영예상 수상.
- 1993년(헤이세이 5년) 8월 21일: 사망 (향년 82세). 종사위에 서임됨.
10. 대중문화 속 묘사
- 카키자와 하야토 (2020년, NHK 종합 연속 TV 소설 '엘'에서 야마토 타로 역으로 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