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호나우지뉴의 어린 시절은 그의 축구 재능이 싹트고 성장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가족의 사랑과 함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축구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1.1. Family and childhood

호나우두 지 아시스 모레이라는 1980년 3월 21일, 브라질 리우그란데두술주의 주도인 포르투 알레그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미겔리나 엘로이 아시스 두스 산투스(Miguelina Elói Assis dos Santos포르투갈어)는 판매원으로 일했으며, 간호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 주앙 지 아시스 모레이라(João de Assis Moreira포르투갈어)는 조선소 노동자이자 지역 클럽인 이스포르치 클루비 크루제이루(Esporte Clube Cruzeiro포르투갈어)의 축구 선수였다. 호나우지뉴가 8살 때, 그의 형 호베르투가 그레미우와 계약하자 가족은 포르투 알레그리 내의 보다 부유한 구아루자 지역으로 이사했으며, 이 집은 호베르투를 클럽에 잔류시키기 위한 그레미우의 선물이었다. 하지만 호베르투의 선수 경력은 부상으로 인해 일찍 끝났다. 호나우지뉴가 8살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새 집의 수영장에서 머리를 부딪혀 익사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호베르투는 호나우지뉴의 매니저 역할을 맡았고, 여동생 데이시는 그의 언론 코디네이터로 일했다.
호나우지뉴는 2005년 2월 25일에 태어난 아들 주앙(João포르투갈어)의 아버지이며, 아들의 이름은 그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주앙은 2019년 4월 14세의 나이로 크루제이루 EC와 프로 계약을 맺으며 축구 선수가 되었다. 호나우지뉴는 2007년에 스페인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는 배우자 프리실라 코엘류Priscila Coelho포르투갈어와 비아투리스 소자Beatriz Souza포르투갈어와 한 명의 자녀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2021년 2월, 그의 어머니는 코로나19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2023년에는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1.2. Early development and talent
호나우지뉴의 축구 실력은 8살 때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했으며, 그는 유소년 클럽 경기에서 종종 가장 어리고 작은 선수였기 때문에 '작은'이라는 뜻의 '이뉴'가 붙어 '호나우지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풋살과 비치 축구에 관심을 가졌고, 이는 나중에 조직적인 축구로 이어졌다. 그의 많은 시그니처 동작, 특히 볼 컨트롤 능력은 풋살에서 유래했다.
그가 처음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13세 때였는데, 당시 그는 지역 팀과의 경기에서 23대0 승리 중 23골 모두를 기록했다. 호나우지뉴는 1997년 이집트에서 열린 FIFA U-17 월드컵에서 떠오르는 스타로 주목받았으며, 이 대회에서 페널티킥으로 2골을 기록했다.
2. Club Career
호나우지뉴는 브라질의 그레미우에서 시작하여 유럽의 명문 클럽인 파리 생제르맹, FC 바르셀로나, AC 밀란을 거쳐 다시 브라질로 돌아오는 등 다채로운 클럽 경력을 쌓았다.
2.1. Grêmio
> "저는 경력 초기의 매우 흥미로운 시기, 19세에서 20세 사이의 훌륭한 선수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선수들에게 존경을 표하면서도, 호나우지뉴는 단연 최고였습니다."
> - 그레미우 감독 셀소 로스.
호나우지뉴의 경력은 그레미우 유소년 팀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1998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성인 팀 데뷔를 했다. 1999년에는 18세의 호나우지뉴가 47경기에서 22골을 기록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인테르나시오나우와의 더비 경기에서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활약을 펼쳤다. 특히 1999년 6월 20일 리우그란데두술 주립 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다. 그는 경기 승리에 기여하는 활약으로 인테르나시오나우의 브라질 전설이자 1994년 월드컵 우승팀의 주장이었던 둥가를 당황시켰는데, 한 번은 공을 그의 머리 위로 띄워 넘겼고, 다른 한 번은 현란한 드리블로 그를 제자리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호나우지뉴는 그레미우에서 코파 술 우승을 차지하며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2001년, 아스널 FC는 호나우지뉴 영입에 관심을 표했지만, 그는 비EU 선수로서 충분한 국제 경기를 뛰지 못해 취업 허가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적은 무산되었다. 그는 스코티시 프리미어리그 팀인 세인트 미렌 FC로 임대 이적을 고려했지만, 브라질에서 연루된 위조 여권 스캔들로 인해 이적은 성사되지 못했다.
2.2. Paris Saint-Germain

2001년, 호나우지뉴는 프랑스 클럽 파리 생제르맹 FC와 5년 계약을 맺고 500.00 만 EUR에 이적했다. 파리에 도착했을 때, 호나우지뉴는 등번호 21번을 받았고, 동료 브라질 선수 알로이시우, 미드필더 제이-제이 오코차, 스트라이커 니콜라 아넬카 등이 포함된 라인업에 합류했다.
2.2.1. 2001-02 season
호나우지뉴는 2001년 8월 4일 AJ 오세르와의 1대1 무승부 경기에서 교체 선수로 출전하며 클럽 데뷔전을 치렀다. 2001-02 시즌 첫 몇 달 동안 호나우지뉴는 주로 벤치와 선발을 오갔다. 그는 10월 13일 올랭피크 리옹과의 2대2 무승부 경기에서 클럽 데뷔골을 기록했는데, 10분 전에 교체 투입된 후 79분에 동점 페널티킥을 성공시켰다. 겨울 휴식기 이후, 호나우지뉴는 새 캠페인을 시작하며 4경기 연속 골을 기록했다. 그는 모나코, 렌, 랑스, 로리앙을 상대로 인상적인 골을 넣었다. 2002년 3월 16일, 그는 강등권에 허덕이던 트루아와의 경기에서 3대1 승리 중 두 골을 기록했다. 그는 4월 27일 메스와의 2대0 승리 경기에서 시즌 마지막 리그 골을 넣었다.
호나우지뉴는 2001-02 쿠프 드 라 리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여 PSG가 준결승에 진출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나, 보르도에 의해 탈락했다. 갱강과의 16강 경기에서 호나우지뉴는 하프타임에 교체 투입된 후 후반에 두 골을 넣었다. 호나우지뉴의 클럽 초창기 성공에도 불구하고, 시즌은 루이스 페르난데스 파리 생제르맹 감독과의 불화로 얼룩졌는데, 감독은 브라질 선수가 축구보다는 파리의 밤문화에 너무 집중하고 있으며, 브라질에서의 휴가가 예정된 시간에 끝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2.2.2. 2002-03 season
페르난데스 감독과의 반복되는 불화에도 불구하고, 호나우지뉴는 등번호를 10번으로 바꾸고 2002-03 시즌 팀에 복귀했다. 클럽에서의 두 번째 시즌 동안 그의 활약은 첫 번째 시즌에 비해 저조했지만, 호나우지뉴는 클럽에서 훌륭한 활약을 펼쳤다. 2002년 10월 26일, 그는 르 클라시크 라이벌 마르세유와의 3대1 승리에서 두 골을 기록했다. 첫 번째 골은 프리킥으로, 18야드 박스 안에서 수많은 마르세유 선수들을 지나 골키퍼 베드란 룬제를 지나쳐 골문 왼쪽 상단으로 휘어져 들어갔다. 다음 경기에서는 스타드 벨로드롬에서 열린 PSG의 3대0 승리 경기에서도 다시 골을 넣었는데, 필드 절반을 달려 골키퍼 위로 공을 띄워 마무리했다. 2003년 2월 22일, 호나우지뉴는 갱강을 상대로 시즌 최고의 골(대중 투표로 선정)을 기록했는데, 그는 한 명의 상대를 제친 후 원투 패스로 또 다른 상대를 제쳤고, 이어서 세 번째 상대 위로 공을 띄웠으며, 네 번째 상대를 스텝 오버로 제치고(어깨를 낮추고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척하다 왼쪽으로 가는 동작) 골키퍼 위로 공을 띄워 마무리했다.
호나우지뉴는 쿠프 드 프랑스에서도 인상적인 활약으로 칭찬받았다. 준결승에서 보르도에 2대0으로 승리하며 PSG를 결승에 진출시키는 데 두 골을 모두 넣었다. 전반 22분에 첫 골을 넣은 후, 호나우지뉴는 81분에 골키퍼 울리히 라메가 유리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8야드 박스에서 공을 정확히 띄워 넘기며 경기를 마무리했다. 그의 활약에 대해 파리 서포터들은 기립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클럽에게는 불행히도, 호나우지뉴와 팀은 결승전까지 진출했던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장-알랭 붐송의 막판 골로 오세르에 2대1로 패했다. 호나우지뉴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클럽은 실망스러운 11위로 시즌을 마쳤다. 시즌 후, 호나우지뉴는 PSG가 유럽 대회 출전권을 획득하지 못하자 클럽을 떠나고 싶다고 선언했다.
2.3. FC Barcelona
> "호나우지뉴는 바르셀로나의 변화를 책임졌습니다. 당시 구단은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고, 그의 도착과 함께 찾아온 변화는 놀라웠습니다."
> - 리오넬 메시가 호나우지뉴의 바르셀로나 합류가 미친 영향에 대해 언급하며.
새롭게 선출된 FC 바르셀로나 회장 주앙 라포르타는 "나는 바르셀로나를 축구계의 선두로 이끌겠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데이비드 베컴, 티에리 앙리 또는 호나우지뉴 이 세 선수 중 한 명을 영입해야 했다"고 밝혔다. 앙리는 아스널에 남았고, 라포르타는 베컴을 구단에 데려오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후, 바르셀로나는 호나우지뉴 영입 경쟁에 뛰어들어 3000.00 만 EUR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보다 높은 금액을 제시하여 그의 영입에 성공했다.
2.3.1. Golden Era (2003-2006)

그의 전성기와 세계적인 명성의 기반이 되었던 클럽인 바르셀로나에서, 호나우지뉴는 7월 27일 매사추세츠주 폭스버러의 질레트 스타디움에서 열린 유벤투스 FC와의 친선 경기에서 바르셀로나 데뷔전을 치렀으며, 프랭크 레이카르트 감독은 경기 후 "그는 공을 만질 때마다 특별한 무언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2003년 9월 3일 세비야와의 라리가 경기에서 그의 첫 경쟁적 골을 넣었는데, 이 경기는 현지 시간으로 자정 5분에 시작되었다. 골키퍼로부터 자신의 하프라인 안에서 공을 받은 호나우지뉴는 미드필드를 가로질러 두 명의 세비야 선수를 드리블로 제친 후 30 yd 거리에서 공을 차 크로스바 하단을 강타하고 다시 골망 상단으로 들어갔다. 호나우지뉴는 시즌 전반기 동안 부상으로 고생했고, 바르셀로나는 시즌 중반 리그 순위에서 12위로 추락했다. 호나우지뉴는 부상에서 복귀하여 2003-04 시즌 라리가에서 15골을 기록하며 팀이 최종적으로 리그 2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2004년 4월 25일 레알 마드리드 원정 경기에서 차비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는데, 이는 클럽이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7년 만에 거둔 첫 승리였으며, 차비는 이 결과를 "바르셀로나의 상승세"의 시작이라고 평가한다.
호나우지뉴는 2004-05 시즌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2004년 12월 20일 FIFA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바르셀로나의 주장 카를레스 푸욜은 "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그가 바르셀로나에 우리의 정신을 되찾아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를 다시 웃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호나우지뉴의 명성은 라리가와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의 그의 재미있고 생산적인 플레이로 인해 더욱 커졌다. 2005년 3월 8일, 바르셀로나는 첼시에게 두 경기 합계 4대5로 패하며 16강전에서 탈락했다. 호나우지뉴는 런던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열린 4대2 2차전 패배에서 두 골을 기록했는데, 두 번째 골은 환상적인 득점이었다. 그는 슛을 하는 척 페인트를 준 후, 20야드 밖에서 페트르 체흐 첼시 골키퍼를 넘어설 정도로 작은 백스윙으로 공을 강타했다.
> "누군가가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 같았습니다. 3초 동안 모든 선수들이 멈춰 섰고, 저만 움직였습니다."
> - 호나우지뉴가 첼시를 상대로 토 킥 골을 넣은 후 회상하며.
2005년 5월 1일, 호나우지뉴는 리오넬 메시의 바르셀로나 데뷔골을 어시스트했다. 알바세테 수비 위로 공을 띄워 메시가 마무리하도록 했다. 2008년 계약이 만료되는 가운데, 호나우지뉴는 9년 동안 8500.00 만 GBP를 벌 수 있는 2014년까지의 계약 연장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2005년 9월, 그는 바르셀로나에 최소 8500.00 만 GBP의 이적료를 제시하는 클럽이 있으면 떠날 수 있는 최소 이적료 조항이 포함된 2년 연장 계약을 체결했다.
2005년 말까지 호나우지뉴는 수많은 개인상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2005년 9월 첫 번째 FIFPro 월드 플레이어 오브 더 이어를 수상했으며, 2005년 FIFPro 월드 XI에 포함되고 2005년 유럽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또한 그 해, 호나우지뉴는 2년 연속 FIFA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는 3차례 수상자인 호나우두와 지네딘 지단에 이어 이 상을 두 번 이상 수상한 세 번째 선수였다. 그의 세계 최고 축구 선수로서의 지배력은 논쟁의 여지가 없었으며, 그는 또한 그의 경력에서 유일하게 권위 있는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11월 19일, 호나우지뉴는 엘 클라시코 1차전에서 바르셀로나가 레알 마드리드를 원정에서 3대0으로 이기는 데 두 골을 기록했다. 두 번째 골로 경기를 확정 짓자, 마드리드 팬들은 그의 활약에 박수를 보냈다. 이는 1983년 디에고 마라도나 이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바르셀로나 선수로서 기립 박수를 받은 두 번째 선수였다. 호나우지뉴는 "이것은 어떤 축구 선수에게도 상대 팀 팬들로부터 이런 방식으로 박수를 받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에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 "그는 경기를 하면서 많은 기쁨과 즐거움을 전달하며,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그를 사랑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개인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 - 2005-06 시즌 호나우지뉴에 대한 바르셀로나 감독 프랭크 레이카르트.
이 시즌은 호나우지뉴의 경력에서 최고의 시즌 중 하나로 여겨지는데, 그는 바르셀로나가 14년 만에 첫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조별 리그를 압도적으로 통과한 바르셀로나는 16강에서 지난 시즌의 재대결 상대로 첼시를 만났다. 호나우지뉴는 2차전에서 결정적인 골을 넣으며 페널티 지역 가장자리에서 세 명의 첼시 수비수를 제친 후 골키퍼를 제치고 바르셀로나의 다음 라운드 진출을 확정 지었다. 그는 또한 벤피카를 상대로 홈에서 2대0 승리를 거두며 벤피카를 꺾는 데 한 골을 기여했다. 밀란과의 준결승에서 뤼도비크 지울리의 유일한 골을 어시스트하며 1대0 합계 승리를 거둔 후, 바르셀로나는 5월 17일 아스널을 2대1로 꺾고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진출하여 우승을 차지했다. 2주 전, 바르셀로나는 셀타 비고에 1대0으로 승리하며 2년 연속 라리가 우승을 확정 지었고, 호나우지뉴는 그의 경력에서 첫 더블을 달성했다.
시즌 내내 호나우지뉴는 뛰어난 골잡이 카메룬 스트라이커 사뮈엘 에토와 공격에서 호흡을 맞췄고, 34골을 넣은 에토에게 여러 차례 어시스트를 제공했다. 호나우지뉴의 패스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에토가 골문으로 돌파할 수 있도록 했고, 이로 인해 아스널 골키퍼 옌스 레만이 넘어뜨려 퇴장당했다. 호나우지뉴는 라리가 17골, 챔피언스리그 7골을 포함하여 개인 최고 기록인 26골로 시즌을 마쳤고, 3회 연속 UEFA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으며, 2005-06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는 2006년 라우레우스 세계 스포츠상 올해의 남자 선수 6인 후보에 이름을 올렸고, FIFPro 월드 XI에 선정되었다.
2.3.2. Decline and Departure (2006-2008)
> "그와 함께 뛰면서 그가 공으로 무엇을 하는지 보면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습니다. 언젠가 그는 공에게 말을 가르칠 것입니다."
> - 2006년 12월 호나우지뉴에 대한 바르셀로나 팀 동료 에이뒤르 구드욘센.
2006년 11월 25일, 호나우지뉴는 비야레알 CF를 상대로 그의 경력 50번째 리그 골을 넣었으며, 이어서 환상적인 오버헤드 킥으로 두 번째 골을 기록했다. 차비의 크로스를 받아 가슴으로 공을 띄운 후 180도 회전하여 마무리하는 이 골에 바르셀로나 팬들은 감탄하며 흰 손수건을 흔들었다. 경기 후 그는 기자들에게 후자의 골은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골이라고 말했다. 멕시코의 클루브 아메리카를 상대로 4대0으로 승리한 12월 14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FIFA 클럽 월드컵 2006 경기에서 한 골을 넣고 두 골을 어시스트했지만, 바르셀로나는 결승전에서 브라질 클럽 인테르나시오나우에 1대0으로 패했다. 호나우지뉴는 이 대회에서 브론즈 볼을 수상했다.
다음 날, 호나우지뉴는 2006년 FIFA 올해의 선수 투표에서 2006년 FIFA 월드컵 우승팀의 주장이었던 파비오 칸나바로와 지네딘 지단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2007년 3월, 디펜딩 챔피언 바르셀로나는 16강에서 리버풀 FC에 패하며 챔피언스리그에서 탈락했다. 호나우지뉴는 며칠 전 레알 마드리드와의 3대3 엘 클라시코 경기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3월 13일 자선 경기에 결장해야 했다. 비록 호나우지뉴는 개인 최고 기록인 21골을 리그에서 기록했지만, 두 팀 모두 같은 승점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르셀로나는 레알 마드리드에 상대 전적에서 밀려 우승을 놓쳤다.

호나우지뉴는 2008년 2월 3일 오사수나와의 리그 경기에서 바르셀로나 소속으로 200번째 경기를 치렀다. 그러나 그의 2007-08 시즌 전체는 부상으로 얼룩졌으며, 4월 3일 오른쪽 다리 근육 파열로 시즌을 조기에 마감했다. 바르셀로나에서의 엄청난 성공을 거둔 첫 세 시즌 동안 모범적인 프로 선수이자 훈련에 전념했던 호나우지뉴는 파티를 즐기는 생활 방식과 축구에 대한 헌신 부족으로 신체적 상태가 하락했으며, 클럽의 많은 이들은 그가 이미 전성기를 지났다고 믿었다. 2008년 5월 19일, 바르셀로나의 주앙 라포르타 회장은 호나우지뉴가 경력을 되살리려면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며 새로운 클럽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 호나우지뉴는 바르셀로나에 뾰족한 이빨을 드러낸 마법사로 합류하여 세 시즌 동안 구단을 매료시켰습니다. 그는 다소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떠날 것입니다. 그의 마법이 소진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 - 로이터의 사이먼 배스킷, 2008년 7월.
호나우지뉴와 바르셀로나 팀 동료 리오넬 메시는 6월 28일 베네수엘라에서 열린 반인종차별 자선 경기에서 각각 국제 스타팀의 주장을 맡았으며, 경기는 7대7 무승부로 끝났다. 호나우지뉴는 두 골과 두 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이는 바르셀로나 선수로서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2010년 주앙 감페르 트로피 준비를 앞두고, 호나우지뉴는 바르셀로나 팬들과 선수들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카탈루냐 클럽에서 보낸 5년이 그의 최고의 시절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적이 슬픈 순간이었으며, 나중에 인터뷰에서 메시와 충분히 오래 함께 뛰지 못하고 떠난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2.4. AC Milan
2008년 7월, 호나우지뉴는 주급 20.00 만 GBP가 제시된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시티로부터 2550.00 만 GBP의 제안을 거절하고, 이탈리아 세리에 A의 거물 AC 밀란에 합류했다. 그의 계약은 연간 약 510.00 만 GBP (650.00 만 EUR) 가치로 추정되며, 이적료는 2205.00 만 EUR에 매 시즌 105.00 만 EUR의 보너스가 추가되었다(2010년에는 2415.00 만 EUR). 등번호 10번은 이미 팀 동료 클라렌스 세도르프가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출생 연도인 1980년을 따서 80번을 선택했다.
2.4.1. 2008-09 season
호나우지뉴는 9월 28일 인테르 밀란과의 밀란 더비에서 1대0으로 승리하며 밀란에서의 첫 골을 기록했다. 그의 첫 번째 두 골은 10월 19일 삼프도리아와의 3대0 승리 경기에서 나왔다. 그는 11월 6일 UEFA컵 조별리그 브라가와의 경기에서 93분에 결승골을 넣었다. 호나우지뉴는 2008-09 시즌 밀란에서 모든 대회를 통틀어 32경기 출전 10골을 기록했다. 시즌 초반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호나우지뉴는 체력 문제로 고생했고, 종종 벤치에서 경기에 나서면서 밀란에서의 첫 시즌은 실망스럽게 끝났다. 훈련에 대한 헌신 부족과 밤늦게까지 파티를 즐기는 생활 방식으로 인해 비판을 받았고, 그의 밀란 첫 시즌 감독이었던 카를로 안첼로티는 "호나우지뉴의 기량 하락은 나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 그의 신체적 조건은 항상 매우 불안정했다. 하지만 그의 재능은 결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고 언급했다.
2.4.2. 2009-10 season
호나우지뉴의 두 번째 시즌은 좋은 출발을 보이지 못했지만, 그는 곧 자신의 기량을 되찾았고 시즌 최고의 밀란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새로 부임한 레오나르두 감독은 공격적인 4-3-3 포메이션에서 그의 역할을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에서 왼쪽 미드필더로 바꾸었으며, 알레샨드리 파투는 오른쪽에 배치되었다.
2010년 1월 10일, 호나우지뉴는 유벤투스 원정 경기에서 두 골을 기록하며 밀란의 3대0 승리를 확정 지었다. 다음 경기인 1월 17일 시에나와의 경기에서 호나우지뉴는 페널티킥을 성공시키고, 코너킥에서 헤딩골을 넣었으며, 20야드 거리에서 오른쪽 상단 코너로 슈팅을 날려 밀란에서의 첫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이스따두 지 상파울루 신문은 "호나우지뉴가 황금기를 되살렸다"고 보도했다. 2월 16일, 호나우지뉴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챔피언스리그 경기에 출전했다. 그는 산 시로 경기 초반에 골을 넣어 밀란에게 리드를 안겼다. 밀란은 폴 스콜스의 골과 웨인 루니의 두 골로 인해 3대2로 경기를 졌다.
호나우지뉴는 세리에 A 도움왕으로 시즌을 마쳤다. 그러나 긍정적이지 못한 점은, 지난 시즌 한 번의 실축에 더해 이번 시즌 국내 경기에서 세 번의 페널티킥을 놓쳤다는 것이다. 호나우지뉴는 유벤투스 전에서 두 골을 넣으며 세리에 A 캠페인을 마쳤다. 루카 안토니니가 선제골을 넣었고, 레오나르두가 감독으로 마지막으로 지휘한 경기에서 밀란은 3대0으로 승리했다.
2.4.3. 2010-11 season
시즌 전반기 동안 호나우지뉴는 두 명의 새로운 영입 선수인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호비뉴를 포함한 팀의 공격진의 일원이었다. 겨울 휴식기 전까지 그는 16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넣고 여러 번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5. Return to Brazil (Flamengo, Atlético Mineiro, Fluminense)

어린 시절 클럽인 그레미우로 복귀설이 강력히 제기된 후, 호나우지뉴는 2011년 1월 11일 CR 플라멩구와 2014년에 만료되는 계약을 맺었다. 이적 사가 동안, 전 세계 올해의 선수였던 그가 LA 갤럭시와 같은 메이저 리그 사커 클럽, 블랙번 로버스와 같은 프리미어리그 클럽, 그리고 브라질 클럽 코린치앙스와 팔메이라스와 연결되었다는 많은 보도가 있었다. 그는 2011년 1월 13일 새로운 클럽에서의 공개 행사에서 2만 명이 넘는 팬들의 환영을 받았다.
호나우지뉴는 2011년 2월 6일 보아비스타와의 3대2 승리 경기에서 플라멩구에서의 첫 골을 기록했다. 2월 27일, 그는 플라멩구가 보아비스타를 1대0으로 꺾고 타사 구아나바라에서 첫 우승을 차지하는 데 후반 프리킥을 성공시켰다. 호나우지뉴는 엥게냥 경기장에서 71분에 벽 위로 오른발 슛을 감아 넣어 플라멩구의 19번째 타사 구아나바라 우승을 이끌었고, 이는 두 달 후 팀이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와 타사 리우에서도 우승하면서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타이틀을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 2011년 7월 27일, 호나우지뉴는 플라멩구가 30분 만에 3대0으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라이벌 산투스와의 5대4 원정 승리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2012년 5월 31일, 며칠 동안 결근한 후 그는 4개월 동안의 급여 미지급을 주장하며 플라멩구를 고소하고 클럽과의 계약을 해지했다.

호나우지뉴는 플라멩구를 떠난 지 나흘 만인 2012년 6월 4일 아틀레치쿠 미네이루로 6개월 계약으로 이적했다. 그는 2012 시즌에 그의 선호 등번호 10번이 이미 기예르메에게 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의 출생 연도를 참고하여 49번을 선택했다.
호나우지뉴는 2012년 6월 9일 팔메이라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90분간 뛰며 1대0으로 승리하며 갈로에서의 데뷔전을 치렀고, 2012년 6월 23일 나우치쿠와의 경기에서 페널티킥으로 클럽에서의 첫 골을 기록했다. 호나우지뉴는 아틀레치쿠 미네이루를 2012년 좋은 시즌으로 이끌었으며, 클럽은 2012 브라질레이랑에서 2위를 차지하고 2013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진출했다. 호나우지뉴는 리그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어 볼라 지 오우루 상을 수상했다.
> 호나우지뉴의 경력은 명확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그가 우리에게 준 것에 감사해야 할까요, 아니면 너무 빨리 끝난 것에 화를 내야 할까요? 90분 동안 그와 같은 경기장에서 뛰게 된 것에 기뻐하는 라자 카사블랑카 선수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표를 던졌을 것입니다.
> - 팀 비커리가 2013 FIFA 클럽 월드컵에서 전성기가 6년 지났음에도 상대 팀 선수들에게 에워싸인 호나우지뉴에 대해 언급하며.
다음 해, 호나우지뉴는 아틀레치쿠 미네이루가 캄페오나투 미네이루에서 우승하고 클럽 역사상 첫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타이틀을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 호나우지뉴는 아틀레치쿠의 극적인 우승 과정에서 4골을 넣고 8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여기에는 아르헨티나 클럽 뉴웰스 올드 보이스와의 준결승과 파라과이의 올림피아와의 결승전 모두에서 0대2로 뒤지던 1차전 패배를 연속으로 뒤집는 역전극이 포함되었다. 두 경기 모두 아틀레치쿠의 승리로 승부차기에서 결정되었다. 비록 전성기가 6년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호나우지뉴의 활약으로 그는 2013년 남아메리카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12월 모로코에서 열린 2013 FIFA 클럽 월드컵에서 아틀레치쿠는 준결승에서 라자 카사블랑카에 3대1로 패했으며, 호나우지뉴는 프리킥으로 한 골을 넣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라자 카사블랑카 팀은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그에게 달려들어 기념품을 찾기 위해 속옷까지 벗겨냈다. 그는 2014년 1월 아틀레치쿠와의 계약을 갱신했다. 2014 레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 우승한 후, 호나우지뉴는 7월에 상호 합의에 따라 계약을 해지하며 클럽을 떠났다.
2.6. Querétaro (Mexico)
자유 계약 선수가 된 후, 호나우지뉴는 잉글랜드 내셔널리그 사우스 클럽인 배싱스토크 타운 FC와 새로 창설된 인도 슈퍼리그 프랜차이즈 첸나이 타이탄스로부터 계약 제안을 받았지만, 결국 2014년 9월 5일 멕시코 클럽 케레타로 FC와 2년 계약을 맺었다. 호나우지뉴는 티그레스 UANL과의 1대0 패배 경기에서 케레타로 데뷔전을 치렀고, 이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했다. 그러나 다음 경기인 과달라하라와의 경기에서는 카밀로 산베조의 득점을 도왔고, 자신도 페널티킥으로 골을 넣어 4대1 승리에 기여하는 등 훨씬 좋은 경기를 펼쳤다. 2014년 10월 30일, 그는 에스타디오 할리스코에서 열린 아틀라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프리킥 골을 넣었다.
2015년 4월 18일, 호나우지뉴는 리과 MX 우승팀 아메리카를 상대로 에스타디오 아스테카 원정 경기에서 두 골을 기록하며 팀의 4대0 승리를 이끌었다. 대부분 아메리카 서포터들로 구성된 모든 관중들은 그의 골에 감탄하여 호나우지뉴에게 기립 박수를 보냈다. 이는 호나우지뉴의 경력에서 상대 팬들로부터 이러한 박수를 받은 두 번째 사례였으며(2005년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고 마드리드 팬들의 박수를 받은 이후), 경기 후 호나우지뉴는 인터뷰에서 "이것은 더 살아있는 감정이다. 베르나베우에서 기립 박수를 받았고 이제 여기서도 받았다. 이런 일은 상상도 못했다. 멕시코를 더욱 좋아하게 만들고 집처럼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호나우지뉴는 연속 두 경기에서 페널티킥으로 두 골을 넣었고, 두 번째 골은 케레타로의 리과 MX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 지었다. 2015년 5월 17일, 케레타로는 베라크루스를 합계 4대3으로 꺾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2차전에서 호나우지뉴는 상대 골키퍼가 공에 접촉했지만 골로 이어진 프리킥을 성공시켰다. 케레타로는 결국 파추카를 합계 2대2로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에서 산투스 라구나에 1차전 0대5로 패한 후 2차전 3대0으로 승리했지만 합계 3대5로 패했다. 2015년 6월, 35세의 호나우지뉴는 클럽을 떠난다고 발표하며 멕시코 국민들과 케레타로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모든 멕시코 국민들에게 감사드린다. 당신들은 항상 내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갈로스 블랑코스(케레타로의 별명) 팬들에게 정말 감사하다. 이 유니폼을 입고 이 클럽을 지킨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
2.7. Fluminense
2015년 7월 11일, 호나우지뉴는 브라질 복귀를 선언하고 플루미넨시와 18개월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9월 28일, 호나우지뉴는 클럽과의 계약을 상호 합의하에 해지했다. 그는 클럽에서 두 달 동안 9경기에 출전했지만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팬들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 플루미넨시의 스포츠 디렉터 마리오 비텐쿠르트는 "호나우지뉴는 우리에게 미팅을 요청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잘 수행할 수 없다고 느끼며, 이는 자신에게 좋지 않은 상황이라고 정중히 말했다. 그는 지금 당장 자신이 될 수 있는 선수만큼 되지 못한다고 말하는 큰 제스처를 보였다. 나는 그가 은퇴할지 말지에 대해 결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수준의 선수에게 할 말이 아니다. 그는 선수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항상 훌륭했다"고 밝혔다.
2.8. Futsal Career in India

2016년 7월, 호나우지뉴는 인도의 고아주에 위치한 고아 5′s라는 풋살 팀에서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 미셸 살가도, 에르난 크레스포, 그리고 풋살 선수 팔캉과 함께 프리미어 풋살 리그에 참가했다. 두 경기 후, 그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2016년 하계 패럴림픽 홍보대사로 활동하기 위해 인도를 떠났다. 그 자리는 카푸가 대신했다.
2017년 9월부터 10월 초까지, 호나우지뉴는 델리에 위치한 델리 드래곤즈에 합류하여 프리미어 풋살 리그에서 뛰었다. 그는 8경기에서 16골을 기록했다.
3. International Career
호나우지뉴는 브라질 청소년 대표팀에서부터 성인 대표팀에 이르기까지 국가대표로서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특히 2002년 FIFA 월드컵 우승을 이끄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3.1. Youth National Teams
1997년, 호나우지뉴는 이집트에서 열린 1997 FIFA U-17 월드컵에서 브라질 팀 최초로 우승을 차지한 팀의 일원이었으며, 그의 첫 골은 오스트리아와의 첫 조별 경기에서 페널티킥으로 기록한 것으로 브라질은 7대0으로 승리했다. 호나우지뉴는 브라질이 총 21골을 넣고 단 2골만을 내주는 동안 두 골을 기록하고 브론즈 볼 상을 받았다.
1999년은 호나우지뉴에게 국제 경기에서 바쁜 한 해였다. 먼저 그는 1999년 남미 U-20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9경기에서 3골을 기록하며 U-20 대표팀이 3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이어서 나이지리아에서 열린 1999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브라질의 마지막 조별 경기에서 첫 골을 기록했다. 16강전에서는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4대0 승리에서 전반에 두 골을 넣었고, 브라질이 우루과이에 의해 8강에서 탈락하면서 총 3골을 기록했다.
3.2. Early Success and Senior Debut
6월 26일, 1999 코파 아메리카 시작 3일 전, 그는 라트비아와의 3대0 승리 경기에서 브라질 성인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고, 브라질의 코파 아메리카 우승 캠페인 동안 한 골을 넣었다. 코파 아메리카가 끝난 지 일주일 후, 그는 1999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 소집되었고, 결승전을 제외한 모든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와의 8대2 준결승전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결승전에서 브라질은 멕시코에 4대3으로 패했다. 호나우지뉴는 이 대회에서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골든볼 상과 득점왕에게 주어지는 골든 부츠 상을 수상했다.
2000년, 호나우지뉴는 U-23 국가대표팀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열린 하계 올림픽에 참가했다. 그 해 초, 호나우지뉴는 프리-올림픽 토너먼트에서 7경기 9골을 기록하며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올림픽에서는 브라질이 8강전에서 카메룬에 의해 탈락했으며, 카메룬은 나중에 금메달을 획득했다. 호나우지뉴는 네 경기에 출전하여 카메룬과의 8강전 패배에서 한 골만을 기록했다.
3.3. 2002 FIFA World Cup Glory
> 결승전 전날 밤, 호나우두, 히바우두, 호나우지뉴는 요코하마 국제종합경기장에서 일본의 이슬비 속에서 즐겁게 서로를 능가하려는 듯 마법을 부리며 몸을 풀었다.
> - 가디언의 에이미 로렌스가 "3R"의 유대감에 대해 언급하며.
호나우지뉴는 2002년 그의 첫 월드컵에 참가했는데, 호나우두와 히바우두와 함께 "3R"로 불리는 강력한 공격진의 일원이었으며, 이들은 1999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팀의 일원이기도 했다. 월드컵은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공동 개최되었으며, 호나우지뉴는 대회 동안 5경기에 출전하여 2골을 넣었고 3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의 첫 골은 중국과의 조별 리그 경기에서 나왔으며, 브라질은 4대0으로 승리했다.
호나우지뉴의 월드컵 경력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6월 21일 잉글랜드와의 8강전이었다. 마이클 오언의 전반 23분 골로 브라질이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호나우지뉴는 경기를 뒤집었다. 자신의 하프라인 안에서 공을 받은 호나우지뉴는 잉글랜드 수비진을 향해 달려갔고, 트레이드마크인 스텝 오버로 스타 수비수 애슐리 콜의 발을 헛디디게 한 후, 페널티 지역 가장자리에 있던 히바우두에게 공을 패스하여 하프타임 직전 동점골을 넣었다. 그리고 50분, 호나우지뉴는 40 yd 거리에서 휘어져 골문 왼쪽 상단 구석으로 들어가는 프리킥을 찼고, 잉글랜드 골키퍼 데이비드 시먼을 완전히 놀라게 하며 브라질에 2대1 리드를 안겼다. 7분 후, 그는 잉글랜드 수비수 대니 밀스에게 파울을 범해 퇴장당했다. 호나우지뉴는 준결승에 출전 정지를 당했지만, 독일과의 결승전 2대0 승리에서 브라질의 선발 라인업으로 복귀하며 브라질은 통산 5번째 월드컵 타이틀을 획득했다.
3.4. 2005 FIFA Confederations Cup Title
호나우지뉴의 다음 국제 대회는 2003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이었지만, 그는 득점 없이 브라질이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음 해, 그는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 감독이 스타 선수들에게 휴식을 주고 주로 후보 선수들로 구성된 팀을 사용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2004 코파 아메리카 스쿼드에서 제외되었다.
1999년과 2003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호나우지뉴는 2005년 브라질의 주장을 맡아 팀의 두 번째 컨페더레이션스컵 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개최국 독일과의 3대2 준결승전에서 페널티킥을 성공시켰고, 6월 29일 결승전에서 숙적 아르헨티나를 4대1로 꺾는 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호나우지뉴는 이 대회에서 3골을 기록하며 멕시코 공격수 콰우테모크 블랑코와 함께 대회 역대 최다 득점자에 9골로 동률을 이루고 있다.
3.5. 2006 FIFA World Cup and Criticism

2006년 월드컵 본선에서 호나우지뉴는 아드리아누, 호나우두, 카카와 함께 브라질의 큰 기대를 모았던 "매직 콰르텟" 공격진의 일원이었으며, 이들은 대회 전 나이키의 대대적인 광고 캠페인의 초점이었던 "조가 보니투(Joga Bonito)" 플레이 스타일의 플레이를 보여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공격진이 너무 많고 불균형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팀은 5경기에서 10골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호나우지뉴 자신은 무득점이며 단 1개의 어시스트(조별 리그 일본과의 4대1 승리에서 지우베르투의 골)만을 기록하는 등 그의 국제 경력에서 최악의 집단적 활약을 펼쳤다. 브라질은 프랑스에 1대0으로 패하며 8강에서 실망스러운 대회를 마쳤는데, 이 경기에서 브라질은 단 한 개의 유효 슈팅만을 기록했다.
> 펠레가 1966년 월드컵에서 실망한 후, 그는 1970년을 위해 좋은 몸 상태를 만들기 위해 사자처럼 싸웠습니다. 호나우지뉴는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훈련장이 아닌 나이트클럽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 - 팀 비커리 ESPN, 2018년 1월.
팀은 귀국 후 브라질 팬들과 언론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7월 3일, 브라질의 탈락 이틀 후, 샤페코에 있던 7.5 m 높이의 호나우지뉴의 유리섬유 및 수지 동상이 파괴자들에 의해 불에 타 소실되었다. 이 동상은 2004년 그가 첫 FIFA 올해의 선수 상을 받은 것을 기념하여 세워진 것이었다. 같은 날, 호나우지뉴는 아드리아누와 함께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자신의 집에서 파티를 열었고, 이는 새벽까지 나이트클럽에서 계속되었다. 이는 많은 브라질 팬들의 분노를 더욱 키웠는데, 그들은 팀의 노력 부족에 배신감을 느꼈다고 믿었다. 2006년 월드컵은 이제 호나우지뉴 경력의 전환점으로 여겨지며, 그의 축구 정상에서의 시간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1970년 브라질 월드컵 우승자 토스탕은 오 템포에 "호나우지뉴에게는 마라도나와 펠레의 중요한 특징인 공격성이 부족하다. 그들은 역경 속에서 스스로를 변화시켰다. 그들은 사로잡혔고, 분노했다"고 썼다.
3.6. 2008 Beijing Olympics Bronze Medal

2007년 3월 24일, 호나우지뉴는 칠레와의 4대0 승리에서 두 골을 기록했는데, 이는 2005년 컨페더레이션스컵 결승전 이후 그의 첫 골이며, 거의 2년 동안 지속된 무득점 행진을 마감했다. 그는 피로를 이유로 대회에서 제외해달라고 요청한 후 2007 코파 아메리카에 소집되지 않았다. 10월 18일, 그는 브라질이 에콰도르에 5대0으로 친선 승리를 거둔 후 스페인으로 늦게 복귀하자 바르셀로나에 의해 논란의 여지 속에 벤치로 밀려났다. 그와 몇몇 브라질 선수들은 리우데자네이루의 고급 나이트클럽에서 밤새도록 파티를 즐기며 승리를 축하했다. 호나우지뉴는 다음 날 아침 11시에 떠났으며, 언론을 피하기 위해 차 트렁크에 숨어 이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7월 7일, 호나우지뉴는 2008년 하계 올림픽 브라질 선수단에 와일드카드 선수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바르셀로나는 처음에는 그의 당시 다가오는 클럽과의 챔피언스리그 경기 때문에 이적을 막았지만, 호나우지뉴가 밀란으로 이적한 후 이 결정은 무효화되었고, 밀란은 그가 베이징으로 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 호나우지뉴는 팀의 주장을 맡았고, 뉴질랜드와의 5대0 승리 경기에서 두 골을 넣었다. 하지만 브라질은 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에 패했다. 브라질은 3위 결정전에서 벨기에를 3대0으로 꺾고 동메달을 차지했다.
3.7. Later Career and World Cup Absences

좋은 기량을 되찾고 2010년 5월 11일 FIFA에 제출된 30인 예비 명단에 이름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회 참가에 대한 강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둥가 감독의 2010년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종 23인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비평가들은 호나우지뉴, 알레샨드리 파투, 아드리아누, 호나우두와 같은 선수들의 제외가 브라질의 고전적인 공격적인 "조가 보니투(Joga Bonito)" 플레이 스타일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이 대회에서 브라질은 8강에서 네덜란드에 의해 탈락했다.
2011년 9월, 호나우지뉴는 마노 메네제스 감독 체제에서 풀럼의 크레이븐 코티지에서 열린 가나와의 친선 경기에서 국가대표팀에 복귀했으며, 브라질의 1대0 승리에서 90분 풀타임을 소화했다. 그는 이어서 같은 달 아르헨티나와의 두 차례 친선 경기에서 견고한 활약을 펼쳤다. 10월에는 멕시코와의 친선 경기에서 다니 아우베스가 퇴장당한 후 프리킥으로 동점골을 넣어 좋은 모습을 보였다. 브라질은 마르셀루의 골로 경기를 승리했다.
호나우지뉴의 좋은 기량은 2013년에도 계속되었고, 1월에는 잉글랜드 축구 협회 (FA)의 150주년 기념 행사 일환으로 2월 6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잉글랜드와의 친선 경기를 위해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감독에게 예상치 못하게 소집되었다. 호나우지뉴는 그의 100번째 출전(비공식 경기 포함)인 이 경기에 선발 출전하여 페널티킥으로 득점 기회를 잡았지만, 그의 슛은 조 하트에게 막혔다. 브라질은 1대2로 패했다. 그는 다시 한번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어 2013년 4월 24일 칠레와의 친선 경기에서 대표팀 주장을 맡았다. 그러나 호나우지뉴는 2013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과 스콜라리 감독의 2014년 월드컵 최종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4. Playing Style
호나우지뉴의 플레이 스타일은 그의 독특한 기술, 창의성, 그리고 예측 불가능성으로 정의된다. 그는 경기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진정한 '마법사'였다.
4.1. Technical Skills and Creativity

호나우지뉴는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기술적인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득점과 어시스트 능력이 뛰어나 여러 공격 포지션에서 뛸 수 있었다. 경력 내내 주로 윙어로 배치되었지만, 보통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에서 클래식 넘버 10으로 뛰었다. 그는 본래 오른발잡이지만, 바르셀로나 시절에는 프랭크 레이카르트 감독에 의해 리오넬 메시가 오른쪽에 배치될 때 왼쪽 측면에서 인버티드 윙어로도 기용되었는데, 이는 그가 안쪽으로 파고들어 더 강력한 발로 슈팅을 날릴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또한 세컨드 스트라이커로도 뛸 수 있었다.
주로 패스, 시야, 플레이메이킹으로 유명한 창의적인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호나우지뉴는 페널티 지역 안팎에서 양발로 정확하게 마무리하는 능력이 있었으며, 프리킥과 페널티킥 전문가이기도 했다. 그는 주로 휘어차기로 세트피스에서 공을 다루는 능력으로 알려졌지만, 벽 아래로 강력하게 차거나 동포 주니뉴 페르남부카누가 대중화한 '너클볼' 기술을 때때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역사상 가장 다작의 프리킥 키커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전 팀 동료 메시에게도 영향을 주어 메시 역시 프리킥 전문가가 되었다.
경력 내내 호나우지뉴는 특히 그의 기술적인 능력, 감각, 그리고 창의성, 그리고 탁월한 퍼스트 터치로 전문가들에게 칭찬받았다. 그의 속도, 가속력, 운동 능력, 볼 컨트롤, 그리고 드리블 능력으로 그는 개인 돌파로 상대를 제칠 수 있었으며, 종종 스텝 오버와 넛메그를 포함한 다양한 트릭과 페인트를 사용하여 1대1 상황에서 상대를 제쳤다. 신체적으로 공 소유에 강하며, 리처드 윌리엄스는 "날씬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이 브라질 선수는 만화 같은 미소와는 대조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 그는 또한 백힐, 바이시클 킥, 노룩 패스와 같은 화려한 동작을 그의 플레이 스타일에 통합했다. 그의 기술 레퍼토리 중에는 1970년대 브라질 스타 리벨리노의 비디오를 보며 배운 "엘라스티코"가 있다. 호나우지뉴는 페인트의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으로 알려졌으며, 아프리카 일부 지역, 특히 나이지리아에서는 그가 이 특정 기술의 사용을 대중화했기 때문에 이 동작을 '가우슈'라고 부르기도 한다.
4.2. Vision and Goal Scoring

ESPN은 호나우지뉴를 "천성적으로 능숙하며, 그의 트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발밑에 공이 있을 때 경이롭다. 압박 상황에서 가장 침착한 선수 중 한 명"이자 "빠르고, 건방지고, 능숙하며, 교묘하고, 거리낌 없는 플레이메이커"로 "골, 어시스트, 기술, 그리고 광범위한 교묘한 움직임의 레퍼토리"를 제공한다고 묘사했다. 전 포르투갈 미드필더 루이 코스타는 그의 시야와 패스 능력에 대해 "그처럼 골을 넣을 수 있는 패스를 제공할 수 있는 선수는 많지 않다. 그는 정말 놀랍다. 그는 어디서든 공을 공급할 수 있는 희귀한 어시스트맨이다"라고 말했다. 2010년, 그의 전 바르셀로나 팀 동료 에드가 다비즈는 그에 대해 "기술과 트릭 면에서 호나우지뉴는 내가 함께 뛰어본 선수 중 최고였다"고 말했다. 그의 또 다른 전 바르셀로나 팀 동료 헨리크 라르손도 이러한 견해에 동의했다. 그의 동포 윌리안은 2019년에 그를 역대 최고의 선수로 평가했고, 주니뉴는 그를 자신이 본 선수 중 가장 기술이 뛰어난 선수라고 묘사했다. 2019년 포포투는 그를 "아마도 브라질 축구 역사상 최고의 기술자"라고 묘사하며 "지난 25년 동안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 101인" 목록에서 5위에 올렸다. 2006년, 가디언의 리처드 윌리엄스는 호나우지뉴를 "천재"라고 묘사했고, 그의 전 바르셀로나 팀 동료 실비뉴는 그에 대해 "그는 너무나 똑똑하고, 너무나 지적이어서 때로는 그의 마음을 읽기 어렵다"고 말하며, "그는 놀랍다. 그는 100% 재능이다. 그리고 그는 강력한 선수이므로 그를 막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 브라질의 전설 토스탕은 이렇게 주장했다: "호나우지뉴는 리벨리노의 드리블 능력, 제르송의 시야, 가린샤의 정신과 행복, 자이르지뉴와 호나우두의 속도, 기술, 힘, 지쿠의 기술적 능력, 그리고 호마리우의 창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아주 특별한 능력 하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신을 미소 짓게 만들었습니다.
> - 시드 로우가 2018년 1월 호나우지뉴의 은퇴 후 쓴 글.
전성기 시절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두 번의 FIFA 올해의 선수상과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헌신과 집중의 시기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호나우지뉴는 훈련에서의 규율 부족과 경기장 밖에서의 향락적인 생활 방식으로 인해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이는 그의 경력 수명에 영향을 미쳤다. 호나우지뉴를 "성장하지 못한 브라질의 어린 천재"라고 칭하며, 팀 비커리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갑작스럽게 잃은 것이 호나우지뉴가 정상에 머무르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을 수 있으며, "인생은 짧고 예상치 못하게 끝날 수 있으니, 할 수 있을 때 즐겨라"라는 태도를 갖게 했을 것이라고 썼다.
5. Personal Life
호나우지뉴의 개인적인 삶은 그의 축구 경력만큼이나 다채롭고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가족 관계, 개인적인 신념, 그리고 자유분방한 생활 방식이 그의 이미지를 형성했다.
5.1. Family and Relationships
어린 시절 호나우지뉴의 우상은 FIFA 월드컵 우승 스타들이었다: (1970년) 리벨리노, (1986년) 디에고 마라도나, (1994년) 호마리우, 그리고 그의 미래 국제 팀 동료인 호나우두와 히바우두 (이들은 그와 함께 브라질의 2002년 월드컵 우승팀의 공격 트리오를 형성했다). 호나우지뉴는 2005년 2월 25일 브라질 댄서 자나이나 멘데스(Janaína Mendes포르투갈어)에게서 태어난 아들 주앙의 아버지이며, 아들의 이름은 그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그는 2007년에 스페인 시민권을 획득했다. 2018년 3월, 호나우지뉴는 하나님의 왕국 보편 교회와 연관된 브라질 공화당에 입당했다. 호나우지뉴는 2018년 브라질 대통령 선거에서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 후보를 지지했다.
5.2. Personal Beliefs and Interests
호나우지뉴는 경력 초반에 축구선수로서의 성장을 위해 바르셀로나에서 경기를 하기 전에 '자유로운 섹스'를 자주 가졌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승부에 대한 강한 집착과 쉽게 타오르는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동시에 경기가 끝난 후에는 쉽게 열정이 식는 경향도 있었다. 예를 들어, 2002년 월드컵 우승과 2005-06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 이후 그의 행동 변화는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경기를 즐기는 것을 잊지 않는 선수였으며, 종종 미소를 지으며 플레이했다. 이러한 모습은 과거 브라질 축구의 영웅 가린샤와 비견된다. 그는 치아미백과 잇몸 성형 수술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그의 특유의 웃음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을 표현하는 팬들도 있었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오랜 지지자였으며, 2023년에 세례를 받았다.
6. Controversies and Legal Issues
호나우지뉴는 축구계에서의 뛰어난 업적과 달리, 경기장 밖에서의 행동과 법적 문제로 인해 여러 차례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6.1. Off-field Conduct and Criticism
전성기 이후 호나우지뉴의 훈련 불성실, 잦은 파티 생활, 그리고 기량 저하로 인해 그는 비판에 직면했다. 2006년 월드컵에서의 부진 이후, 브라질의 샤페코에 세워진 7.5 m 높이의 그의 동상이 반달리즘으로 인해 파괴되기도 했다. 또한, 월드컵 탈락 후 바르셀로나에서 파티를 즐긴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브라질 팬들에게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의 경력에 전환점으로 작용했으며, 그의 축구 정상에서의 시간은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6.2. Tax Evasion and Passport Scandal
2019년 7월, 호나우지뉴의 브라질 및 스페인 여권과 함께 57개 부동산이 미납된 세금과 벌금으로 인해 압류되었다. 그는 구아이바 강의 '유산 보호 구역'에 낚시 플랫폼을 무단 건축한 혐의로 850.00 만 BRL의 벌금에 처해졌으나, 법원 판결로 벌금은 600.00 만 BRL로 감액되었다. 호나우지뉴와 그의 형제는 지정된 기간 내에 벌금을 납부하지 못하여 여권이 정지되었다.
2020년 3월, 그는 자선 행사 및 도서 홍보를 위해 파라과이에 입국하면서 위조 여권을 사용한 혐의로 파라과이 경찰의 심문을 받았다. 호나우지뉴와 그의 형제는 모두 파라과이에서 구금되었다. 호나우지뉴 측 변호사는 그들이 위조 여권을 사용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는데, 브라질 국민은 메르코수르 회원국을 방문할 때 여권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수감 중 그는 교도소 풋살 토너먼트에 참가하여 그의 팀이 우승했다. 결승전에서는 11대2로 승리했으며, 호나우지뉴는 5골 6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는 구금 명령에 항소하려 했지만, 그의 형제와 함께 가택 연금 상태를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020년 8월 24일, 호나우지뉴와 그의 형제는 파라과이 판사가 형제에게 각각 9.00 만 USD와 11.00 만 USD의 벌금을 부과하는 유죄 협상을 동의함에 따라 파라과이 교도소에서 풀려났다.
7. Endorsements and Media Presence
호나우지뉴는 축구 실력뿐만 아니라 상업적 활동과 미디어에서의 존재감으로도 세계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그의 다양한 홍보 활동과 사회적 영향력은 그를 단순한 운동선수 이상으로 만들었다.
7.1. Commercial Endorsements

호나우지뉴는 나이키, 펩시, 코카콜라, EA 스포츠, 다논을 포함한 많은 회사들과 홍보 계약을 맺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입을 올리는 선수 중 한 명이었던 그는 2006년에 홍보 계약으로 1900.00 만 USD 이상을 벌었다. 경력 대부분 동안 펩시를 홍보하고 데이비드 베컴, 티에리 앙리, 리오넬 메시와 함께 광고에 출연했던 호나우지뉴는 2011년 코카콜라와 계약했지만, 2012년 7월 기자회견에서 펩시를 마시는 모습이 포착된 후 계약이 해지되었다.
7.2. Gaming and Digital Ventures
호나우지뉴는 EA 스포츠의 FIFA 비디오 게임 시리즈에 출연하여 FIFA 풋볼 2004, FIFA 스트리트 (2005 비디오 게임), FIFA 06, FIFA 07, FIFA 스트리트 3, FIFA 08, FIFA 09의 표지 모델로 등장했다. 경력 초기에 호나우지뉴는 스포츠웨어 회사 나이키와 수익성이 좋은 10년 계약을 맺었다 (나이키 티엠포 R10 축구화는 그를 위해 디자인되었다). 그는 나이키 광고에 출연했으며, 테리 길리엄이 감독한 2002년 "시크릿 토너먼트" 광고 ("스콜피온 KO"라는 이름)에도 출연했다. 2005년 그의 나이키 광고는 새 축구화를 받고 축구공을 저글링하며 공이 땅에 닿지 않고 골대의 크로스바를 계속해서 맞추는 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이 영상은 유튜브에서 바이럴 영상이 되었고, 사이트 최초로 1백만 조회수를 달성한 영상이 되었다. 2010년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가 감독한 나이키 광고 Write the Future는 호나우지뉴가 여러 스텝 오버를 선보이는 장면을 담고 있으며, 이는 수백만 번 재연되고 공유된 바이럴 영상이 되었다.
7.3. Social and Cultural Impact
호나우지뉴의 밀랍 인형은 2007년 12월 마담 투소 홍콩에 공개되었다. 호나우지뉴는 2006년 2월부터 유니세프, 유엔 아동 기금의 공식 대사 역할을 맡았다. 2011년에는 유엔 합동 에이즈 계획에 의해 젊은이들에게 에이즈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예방 방법을 홍보하는 데 참여했다. 2015년 3월, 호나우지뉴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리오넬 메시, 데이비드 베컴, 네이마르, 카카에 이어 페이스북에서 여섯 번째로 인기 있는 스포츠인이었으며, 3천1백만 명의 페이스북 팬을 보유했다. 호나우지뉴는 또한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5천만 명이 넘는다.
2017년 2월 2일, 바르셀로나는 호나우지뉴가 구단의 기관 행사 대사로 10년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2018년 7월 6일, 호나우지뉴는 월드 사커 코인(WSC) 회사와 새로운 암호화폐인 '호나우지뉴 사커 코인'을 개발하기 위한 파트너십을 발표했으며, WSC는 이 코인의 수익이 "호나우지뉴 디지털 스타디움"과 같은 축구 프로젝트에 사용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2020년 10월 29일, 호나우지뉴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아제르바이잔 국민과의 연대를 표명했다. 2021년 7월 말, 그는 레바논 베이루트를 방문하여 2020년 베이루트 폭발 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화환을 놓았다.
소설에서는 루퍼트 톰슨의 2021년 소설 바르셀로나 드리밍에 호나우지뉴가 등장한다. 2018년에는 알랭 무시와 장클로드 반담과 함께 미국 무술 영화 킥복서: 리탈리에이션에 출연했다. 또한, 호나우지뉴 가우슈 (만화)는 마우리시오 지 소자의 브라질 유명인 만화로, 호나우지뉴의 가상 어린 시절을 다룬다. 이 만화는 2006년 2006년 FIFA 월드컵이 독일에서 열릴 때 만들어졌으며 2015년까지 연재되었다. 이는 이탈리아 스튜디오 GIG 이탈리아 엔터테인먼트가 MSP (마우리시오 지 소자 프로듀시온스)와 공동 제작한 애니메이션 TV 시리즈 호나우지뉴 가우슈 팀으로 각색되기도 했다.
8. Retirement
호나우지뉴는 2018년 공식적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며, 축구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남게 되었다. 은퇴 후에도 그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축구 팬들과 소통하고 있다.
8.1. Official Retirement
2018년 1월 16일, 호나우지뉴는 그의 형이자 에이전트인 호베르투를 통해 축구 선수 은퇴를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그는 멈췄습니다. 끝났습니다. 아마도 8월에 2018년 FIFA 월드컵 이후에 아주 크고 멋진 무언가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기념 행사는 플루미넨시에서의 마지막 경기 이후 3년 만에 열릴 예정이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그는 FIFA 월드컵, UEFA 챔피언스리그, 그리고 발롱도르를 모두 우승한 단 8명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은퇴했다.
8.2. Post-Retirement Activities
호나우지뉴는 7월 15일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년 FIFA 월드컵 폐회식에 참석하여 오페라 가수 아이다 가리풀리나가 부른 러시아 민요 "칼린카"의 몇 소절을 아프리카 드럼으로 연주했다.
9. Legacy and Reception
호나우지뉴는 그의 독창적인 플레이 스타일과 경기장 밖에서의 모습으로 축구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그의 빛나는 재능과 함께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들을 동시에 담고 있다.
9.1. Positive Reception
호나우지뉴는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기술적인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마법사" 또는 "외계인"과 같은 별명으로 불리며, 그의 독창적인 플레이에 대한 찬사는 끊이지 않았다. 그는 "아름다운 게임"인 "조가 보니투(Joga Bonito)"의 진정한 구현자로서 축구의 즐거움을 가장 잘 보여준 선수로 평가받는다. 그의 플레이는 리오넬 메시를 포함한 다른 선수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ESPN은 호나우지뉴를 "천성적으로 능숙하며, 그의 트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발밑에 공이 있을 때 경이롭다. 압박 상황에서 가장 침착한 선수 중 한 명"이자 "빠르고, 건방지고, 능숙하며, 교묘하고, 거리낌 없는 플레이메이커"로 "골, 어시스트, 기술, 그리고 광범위한 교묘한 움직임의 레퍼토리"를 제공한다고 묘사했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는 "전성기의 호나우지뉴는 경이로웠다. 그는 상대 선수들을 어린아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전 포르투갈 미드필더 루이 코스타는 그의 시야와 패스 능력에 대해 "그처럼 골을 넣을 수 있는 패스를 제공할 수 있는 선수는 많지 않다. 그는 정말 놀랍다. 그는 어디서든 공을 공급할 수 있는 희귀한 어시스트맨이다"라고 말했다. 2010년, 그의 전 바르셀로나 팀 동료 에드가 다비즈는 그에 대해 "기술과 트릭 면에서 호나우지뉴는 내가 함께 뛰어본 선수 중 최고였다"고 말했다. 그의 또 다른 전 바르셀로나 팀 동료 헨리크 라르손도 이러한 견해에 동의했다. 그의 동포 윌리안은 2019년에 그를 역대 최고의 선수로 평가했고, 주니뉴는 그를 자신이 본 선수 중 가장 기술이 뛰어난 선수라고 묘사했다. 2019년 포포투는 그를 "아마도 브라질 축구 역사상 최고의 기술자"라고 묘사하며 "지난 25년 동안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 101인" 목록에서 5위에 올렸다.
브라질의 전설 토스탕은 호나우지뉴가 리벨리노의 드리블 능력, 제르ソン의 시야, 가린샤의 정신과 행복, 자이르지뉴와 호나우두의 속도, 기술, 힘, 지쿠의 기술적 능력, 그리고 호마리우의 창의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묘사했다. 무엇보다 그는 모든 이들을 미소 짓게 만드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고 평가된다.
9.2. Criticism and Controversies
전성기 시절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호나우지뉴는 훈련에 대한 규율 부족과 경기장 밖에서의 향락적인 생활 방식으로 인해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이는 그의 경력 수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팀 비커리는 호나우지뉴를 "성장하지 못한 브라질의 어린 천재"라고 칭하며,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갑작스럽게 잃은 것이 그가 정상에 머무르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을 수 있으며, "인생은 짧고 예상치 못하게 끝날 수 있으니, 할 수 있을 때 즐겨라"라는 태도를 갖게 했을 것이라고 썼다. 또한 2006년 월드컵에서의 부진한 활약과 경기 후 논란이 된 파티는 브라질 팬들과 언론의 혹독한 비판을 불러왔다. 그의 정치적 입장(자이르 보우소나루 지지) 또한 그의 전 소속팀 바르셀로나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은 그의 재능과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력에 아쉬운 부분으로 남았다.
10. Honours
호나우지뉴가 선수 경력 동안 획득한 주요 트로피와 개인 수상 내역은 다음과 같다.
10.1. Club Honours
- 코파 술: 1999
- 캄페오나투 가우슈: 1999
- UEFA 인터토토컵: 2001
- 라리가: 2004-05, 2005-06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005, 2006
- UEFA 챔피언스리그: 2005-06
- 세리에 A: 2010-11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2011
- 캄페오나투 미네이루: 2013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013
-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2014
10.2. International Honours
- 남미 U-17 축구 선수권 대회: 1997
- FIFA U-17 월드컵: 1997
- 코파 아메리카: 1999
- FIFA 월드컵: 2002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2005
- 준우승: 1999
- 하계 올림픽 동메달: 2008
10.3. Individual Awards
- 캄페오나투 가우슈 득점왕: 1999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골든볼: 1999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골든 부츠: 1999
- 남미 올해의 팀: 1999
- CONMEBOL 프리-올림픽 토너먼트 득점왕: 2000
- 볼라 지 프라타: 2000, 2011, 2012
- FIFA 월드컵 올스타 팀: 2002
- 리그 1 올해의 골: 2003
- FIFA 100: 2004
- 돈 발롱 어워드: 2003-04, 2005-06
- 트로페오 EFE: 2003-04
- FIFA 올해의 선수: 2004, 2005
- UEFA 올해의 팀: 2004, 2005, 2006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2004, 2005
- UEFA 클럽 풋볼 어워드 최우수 공격수: 2004-05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브론즈볼: 2005
- 발롱도르: 2005
- 옹즈도르: 2005
- FIFPro 월드 플레이어 오브 더 이어: 2005, 2006
- FIFPro 월드 XI: 2005, 2006, 2007
-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 2005-06
- 라리가 최다 어시스트: 2005-06
- UEFA 챔피언스리그 최다 어시스트: 2005-06
- FIFA 클럽 월드컵 브론즈볼: 2006
- FIFA 올해의 선수 브론즈 어워드: 2006
- 골든풋: 2009
-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2000년대 팀: 2009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2000년대: 2009
- 세리에 A 최다 어시스트: 2009-10
-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이 A 올해의 팀: 2011, 2012
-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이 A 팬 선정 최우수 선수: 2012
-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이 A 최다 어시스트: 2012
- 볼라 지 오우루: 2012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최다 어시스트: 2012, 2013
- FIFA 클럽 월드컵 득점왕: 2013
- 남아메리카 올해의 선수: 2013
- UEFA 궁극의 팀 (대체 선수): 2015 (2015년에 발표)
- 브라질 축구 박물관 명예의 전당
- AC 밀란 명예의 전당
- 발롱도르 드림팀 (실버): 2020
- 글로브 사커 어워드 선수 경력상: 2021
- Eulaema quadragintanovem (브라질 꿀벌 신종) 명칭: 2012년 호나우지뉴의 등번호 49번을 기려 Eulaema quadragintanovem으로 명명되었다.
11. Career statistics
클럽 | 시즌 | 리그 | 지역 리그 | 컵 | 대륙 대회 | 기타 | 합계 | |||||||
---|---|---|---|---|---|---|---|---|---|---|---|---|---|---|
디비전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
그레미우 | 1998 | 브라질레이랑 | 14 | 1 | 7 | 2 | 2 | 0 | 15 | 3 | - | 38 | 6 | |
1999 | 브라질레이랑 | 17 | 4 | 17 | 15 | 3 | 0 | 4 | 2 | 6 | 1 | 47 | 22 | |
2000 | 브라질레이랑 | 21 | 14 | 13 | 11 | 3 | 3 | - | - | 37 | 28 | |||
2001 | 브라질레이랑 | - | - | - | - | 3 | 2 | 3 | 2 | |||||
합계 | 52 | 19 | 37 | 28 | 8 | 3 | 19 | 5 | 9 | 3 | 125 | 58 | ||
파리 생제르맹 | 2001-02 | 리그 1 | 28 | 9 | - | 6 | 2 | 6 | 2 | - | 40 | 13 | ||
2002-03 | 리그 1 | 27 | 8 | - | 6 | 3 | 4 | 1 | - | 37 | 12 | |||
합계 | 55 | 17 | - | 12 | 5 | 10 | 3 | - | 77 | 25 | ||||
바르셀로나 | 2003-04 | 라리가 | 32 | 15 | - | 6 | 3 | 7 | 4 | - | 45 | 22 | ||
2004-05 | 라리가 | 35 | 9 | - | - | 7 | 4 | - | 42 | 13 | ||||
2005-06 | 라리가 | 29 | 17 | - | 2 | 1 | 12 | 7 | 2 | 1 | 45 | 26 | ||
2006-07 | 라리가 | 32 | 21 | - | 4 | 0 | 8 | 2 | 5 | 1 | 49 | 24 | ||
2007-08 | 라리가 | 17 | 8 | - | 1 | 0 | 8 | 1 | - | 26 | 9 | |||
합계 | 145 | 70 | - | 13 | 4 | 42 | 18 | 7 | 2 | 207 | 94 | |||
AC 밀란 | 2008-09 | 세리에 A | 29 | 8 | - | 1 | 0 | 6 | 2 | - | 36 | 10 | ||
2009-10 | 세리에 A | 36 | 12 | - | - | 7 | 3 | - | 43 | 15 | ||||
2010-11 | 세리에 A | 11 | 0 | - | - | 5 | 1 | - | 16 | 1 | ||||
합계 | 76 | 20 | - | 1 | 0 | 18 | 6 | - | 95 | 26 | ||||
플라멩구 | 2011 | 브라질레이랑 | 31 | 14 | 13 | 4 | 5 | 1 | 3 | 2 | - | 52 | 21 | |
2012 | 브라질레이랑 | 2 | 1 | 10 | 4 | - | 8 | 2 | - | 20 | 7 | |||
합계 | 33 | 15 | 23 | 8 | 5 | 1 | 11 | 4 | - | 72 | 28 | |||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 2012 | 브라질레이랑 | 32 | 9 | - | - | - | - | 32 | 9 | ||||
2013 | 브라질레이랑 | 14 | 7 | 6 | 4 | 2 | 0 | 14 | 4 | 2 | 2 | 38 | 17 | |
2014 | 브라질레이랑 | 2 | 0 | 4 | 0 | - | 7 | 1 | 2 | 0 | 15 | 1 | ||
합계 | 48 | 16 | 10 | 4 | 2 | 0 | 21 | 5 | 4 | 2 | 85 | 27 | ||
케레타로 | 2014-15 | 리과 MX | 25 | 8 | - | 4 | 0 | - | - | 29 | 8 | |||
플루미넨시 | 2015 | 브라질레이랑 | 7 | 0 | - | 2 | 0 | - | - | 9 | 0 | |||
커리어 합계 | 441 | 165 | 70 | 40 | 47 | 13 | 121 | 41 | 20 | 7 | 699 | 2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