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1.1. 출생 및 가계
헤르베르트 2세는 880년경 노르망디의 베르망두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상리스와 베르망두아 백작이었던 헤르베르트 1세이며, 어머니는 베르타(Bertha) 또는 리우트가르트(Liutgard)로, 트루아 백작 아달레메(Adalelme)의 딸이었다. 헤르베르트 2세의 조부는 상리스 백작 피핀 2세이다.
1.2. 카롤링거 왕조와의 연관성
헤르베르트 2세의 가문인 헤르베르터 왕조는 샤를마뉴의 증손자이자 이탈리아 왕 베른하르트의 서자인 상리스 백작 피핀 2세의 후손이다. 이 가문은 샤를마뉴의 여섯째 아들 경건왕 루이의 후손인 샤를 3세 단순왕과는 먼 친척 관계였다. 818년 피피노 카를로만의 아들 베른하르트가 경건왕 루이에 의해 두 눈이 뽑히고 사망한 사건 이후, 헤르베르트 가문은 경건왕 루이의 후손들에게 대대로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헤르베르트 1세는 서프랑크 왕국의 대머리 카를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봉신이 되었다.
헤르베르트 2세의 큰아버지인 피핀 3세의 딸 발루아의 포파는 노르만 족 지도자이자 노르망디 공작인 롤로에게 시집갔다. 또한 헤르베르트의 누이 베아트릭스(Béatrice)는 네우스트리아의 실력자였던 로베르 1세에게 시집갔다.
2. 작위 및 영지
2.1. 상속 및 획득
907년 5월 21일, 헤르베르트는 자신의 외조카딸이자 서프랑크 왕 로베르 1세의 딸인 아델라와 결혼했다. 아델라와의 결혼을 통해 그는 모 백작령을 지참금으로 받았다. 아델라는 리우트가르트라고도 불렸다.
907년 11월 6일, 그의 아버지 헤르베르트 1세가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2세에게 암살당하자, 헤르베르트 2세는 베르망두아 백작위를 계승했고, 이어서 수아송 백작위도 계승했다. 그는 또한 벡상과 샹파뉴 지역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907년에는 수아송의 성 메다르 평신도 수도원과 생캉탱의 평신도 수도원 원장직을 물려받았으며, 이 직책을 통해 해당 수도원들의 수입을 축적했다. 당시 그의 사촌 베른하르트도 근처 보베와 상리스의 백작이었으며, 이 두 인물은 당시 프랑크 왕국 북서부에서 영향력 있는 영주들이었다.
918년경, 헤르베르트 2세는 메제레 백작을 겸했으며, 벡상 백작 랄프 1세를 축출하고 벡상을 차지하려 했으나, 랄프 1세가 다시 영지를 되찾았다. 그는 카스트룸 테오도리히 지역에 성곽을 수축하여 요새를 구축했으며, 이후 이 지역은 샤토 티에리로 불리게 되었다. 926년에는 아미앵을 점령하고 아미앵 백작 루돌프를 축출하여 아미앵 백작이 되었으나, 931년에는 반납해야 했다. 그러나 헤르베르트 2세는 아미앵을 포기하지 않았고, 나중에 그의 아들 위그가 잠시 아미앵 백작직을 얻게 된다.
3. 주요 활동
헤르베르트 2세는 서프랑크 왕국의 정치적 혼란기를 이용하여 권력을 확장하고 왕권에 도전하는 대담한 행보를 보였다. 그는 샤를 3세 단순왕을 감금하고 아들을 랭스 대주교에 임명하려 시도하는 등 국내외적으로 활발한 정치 및 외교 활동을 펼쳤다.
3.1. 정치적 활동
헤르베르트 2세는 서프랑크 왕국의 정치적 혼란기에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920년경 바이킹족 수용 문제와 로타링기아에 대한 집중으로 네우스트리아에서 단순왕 샤를 3세에 대한 반발이 심화되자, 헤르베르트 2세는 노르만 족을 격퇴한 네우스트리아 후작 로베르 1세를 적극 지지했다. 그는 처남인 위그 르 그랑과 함께 샤를 3세의 군대와 맞서 싸웠다.

922년, 서프랑크의 네우스트리아 지방 귀족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로베르 1세를 왕으로 추대할 때 헤르베르트 2세는 이에 가담했다. 내전이 계속되던 중, 923년 초 그의 군대가 레모아(Rémois)를 점령했고, 923년 6월 15일 샤를 3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샤를 3세를 사로잡았다. 헤르베르트 2세는 샤를 3세를 솜의 페로네 성에 유폐했으며, 이후 샤토 티에리 감옥으로 옮겼다가 다시 페로네로 옮겼다. 샤를 3세는 헤르베르트 2세의 아들 중 한 명의 대부(代父)이기도 했다. 교황 요한 10세는 헤르베르트 2세에게 샤를 3세를 즉시 풀어주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경고했으나, 헤르베르트 2세는 이를 무시했다.
923년 6월 15일 로베르 1세가 전사하자, 그의 사위인 라울이 새 왕으로 추대되었다. 헤르베르트 2세는 자신이 샤를 3세를 인질로 잡고 있는 것을 근거로, 외조카사위이자 동서인 라울에게 각종 이권을 요구하며 그를 협박했다. 라울은 죄수 신분이었던 샤를 3세를 만나자 칼을 바치며 군주로 예우했지만, 왕을 납치하고 이권을 요구하는 헤르베르트에게 염증을 느껴 그를 의도적으로 멀리했다.
924년 헤르베르트 2세는 사위인 플랑드르 백작 아르눌프 1세와 함께 북부 해안가로 침입하는 바이킹족과 교전하여 물리쳤다. 같은 해 노르망디를 공격하여 북동부의 에우(Eu)를 점령했다. 924년 라울 왕에 의해 페로네 백작에 임명되었다.
922년 랭스 대주교 세울프는 헤르베르트 2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신의 후계자를 헤르베르트 2세의 아들 중에서 선택할 것을 약속했다. 925년 세울프가 죽자, 헤르베르트 2세는 라울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둘째 아들 위그(당시 5세)를 랭스 대주교로 앉혔다. 926년에는 교황 요한 10세에게 사절을 보내 위그의 대주교직 승인을 받아냈다. 승인 후 위그는 오세르로 보내져 신학 공부를 했고, 실제 권한은 수아송의 아보 주교가 대신 행사했다. 그러나 아르토 등은 위그의 랭스 대주교 임명을 반대했다. 헤르베르트 2세는 교황 요한 10세에게 아들의 주교 서임을 승인하지 않을 경우 교구령을 분할하여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에게 배분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926년 라온의 백작 로저 1세가 사망하자, 헤르베르트 2세는 라울 왕에게 라온 백작직을 자신의 장남 외드에게 줄 것을 요구했으나 라울은 이를 거절했다. 헤르베르트 2세는 감금된 샤를 3세를 위협하며 라온 시내를 점령했으나, 라울은 여전히 거부했다. 927년까지 라온 백작직을 놓고 라울과 갈등했으며, 샤를 3세를 풀어주겠다고 수시로 위협했다. 927년 헤르베르트 2세는 라울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며,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의 도움을 받아 929년에 라온을 확보했다. 927년 헤르베르트 2세는 롤로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하며 아들 외드를 인질로 보냈다.
929년 샤를 3세가 페로네 감옥에서 사망하자, 라울을 반대하는 세력의 구심점이 사라졌다. 샤를 3세의 죽음 소식을 접한 라울은 형제인 보소와 네우스트리아 후작 위그 르 그랑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930년 초 헤르베르트 2세가 점령했던 비트리 성을 공격했다. 931년 라울과 보소, 위그 르 그랑은 헤르베르트 2세의 아들 위그를 물리치고 랭스까지 진격하여 점령, 헤르베르트 2세를 성공적으로 패배시켰다. 이로 인해 헤르베르트 2세는 3년 만에 비트리, 라온, 샤토 티에리, 수아송을 잃었다. 라울은 랭스를 점령한 뒤 위그를 쫓아내고 아르토를 랭스 대주교로 임명했다.
3.2. 외교 및 중재
931년 헤르베르트 2세는 독일 왕 하인리히 1세와 교섭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1세의 개입으로 헤르베르트 2세는 라울 왕에게 복종하는 대가로 랭스와 라온을 제외한 영토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때 헤르베르트 2세는 라울에게 형식적으로 항복했다.
라울은 936년 1월 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으며, 헤르베르트 2세는 빼앗겼던 샤토 티에리 요새를 되찾았다. 같은 해 서프랑크 왕국 귀족들의 요청으로 루이 4세가 앵글로색슨에서 귀국하여 936년 6월 19일 즉위하자, 위그 르 그랑은 헤르베르트 2세와 루이 4세의 화해를 주선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루이 4세가 로타링기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자, 939년 독일의 오토 1세는 군사를 이끌고 서프랑크로 쳐들어왔다. 헤르베르트 2세는 위그 르 그랑과 함께 오토 1세의 군사에 합류했다. 오토 1세는 루이 4세에게 로타링기아 왕국의 영유권 포기를 강요하여 최종적으로 약속받고 돌아갔다.
939년부터 940년까지 헤르베르트 2세와 프랑크 공작 위그 르 그랑은 루이 4세에 도전하여 랭스를 점령하고 루이 4세를 위협했다. 이때 헤르베르트 2세는 플로도하르트를 체포하여 투옥시키고, 아들 위그를 다시 랭스 대주교에 임명했다. 이에 교황 스테파노 8세가 개입하여 바티칸 특사들을 파리로 파견, 서프랑크 귀족들에게 루이 4세를 국왕으로 인정하고 반역자들을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 위그 르 그랑과 헤르베르트 2세를 지지하던 귀족들은 위축되거나 지지를 철회했다.
941년 헤르베르트 2세는 아르토를 체포하고, 바티칸에 아르토와 플로도하르트의 파문 및 아들 위그의 랭스 대주교 임명을 종용했다. 그러나 위그의 랭스 대주교 임명에 대한 반발이 계속되었고, 루이 4세의 군대는 라온을 점령했다. 941년 헤르베르트 2세는 위그 르 그랑과 윌리엄 1세 롱스워드 등과 동맹을 맺고 루이 4세를 공격했다. 독일의 오토 1세가 개입하여 942년 리에주 근처 비제에서 오토 1세의 중재 하에 갈등은 종결되었다.
4. 사망
헤르베르트 2세의 사망 시기와 장소는 명확하지만, 그의 죽음이 서프랑크의 왕 루이 4세에 의한 교수형이라는 주장은 후대 기록에서 비롯된 허구로 평가된다.
4.1. 사망 시기 및 장소
헤르베르트 2세는 943년 2월 23일 아시네의 생캉탱(베르망두아 백작령의 수도)에서 사망했다.
4.2. 사망 원인
헤르베르트 2세가 루이 4세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이야기는 허구로 알려져 있다. 이 극적인 내용은 960년경 루이 4세의 아들 로타르 3세의 통치 시기에 쓰인 폴크빈(Folcwin)의 생 베르탱 수도원장들의 행적(Deeds of the Abbots of St. Bertin)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 루이 4세의 통치 기간에 대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치적 기록을 제공하는 동시대 연대기 작가인 랭스의 플로도하르트(Flodoard of Reims)의 기록에는 왕이 헤르베르트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어떠한 암시도 없다. 다만 10세기 프랑스의 성직자이자 역사가인 라올 글레버(Raoul Glaber)의 기록에는 루이 4세가 헤르베르트의 교수형을 직접 지시하고 보고받았다고 전해진다.
5. 유산과 평가
헤르베르트 2세의 사후 광대한 영지는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으며, 그의 가문은 11세기 초 남계 직계 후손이 단절되었다. 그는 10세기 서프랑크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영주 중 한 명으로, 약화된 왕권 속에서 지방 귀족의 성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5.1. 영지 분할
헤르베르트 2세의 광대한 영토는 그의 사후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영지 분할을 놓고 3년간 갈등이 있었으나, 위그 르 그랑의 중재로 분할이 확정되었다. 외드는 아미앵과 비엔나를, 위그는 랭스 대주교직과 주변 지역을, 헤르베르트 3세는 오모이를, 로베르 1세는 모와 트루아를 상속받았다. 그러나 로베르 1세가 사망하자 헤르베르트 3세가 그의 영지를 차지했으며, 나중에 로베르 1세의 아들 헤르베르트 4세가 이 모든 영토를 상속했다.
5.2. 가문의 계보
헤르베르트 4세의 유일한 아들인 에티엔(Stephen)은 1019년 또는 1020년에 자녀 없이 사망하여, 헤르베르트 2세의 남계 직계 후손은 이때 단절되었다. 그러나 다른 아들인 아달베르트 1세의 아들 치니 백작 치니의 오토 1세의 후손들은 13세기까지 이어졌다. 헤르베르트 2세가 생전에 차지하려고 노력했던 라온은 로저 2세가 938년 복귀했으나, 로저 2세 사후 서프랑크 국왕과 후대 프랑스의 군주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헤르베르트 2세의 딸들 중 한 명이자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 롱스워드의 과부였던 리우트가르트는 메제레를 가져갔다. 그의 아들들 간 유산 분배에 개입한 위그 르 그랑은 블루아를 자신의 측근 테오도발트 1세에게 주었는데, 테오도발트 1세는 리우트가르트의 재혼 상대가 되었다.
943년 헤르베르트 2세에게 아미앵을 잠시 빼앗겼던 벡상의 라울 2세는 헤르베르트 2세의 죽음을 계기로 생캉탱을 점령하려 했으나, 오히려 헤르베르트의 아들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한편 헤르베르트 2세에 의해 투옥당했던 아르토와 플로도하르트는 948년 인겔하임에서 열린 교회 회의에서 교황 아가피토 2세에 의해 파문이 취소되고 복권되었다. 아르토는 랭스 대주교로, 플로도하르트는 랭스의 기록물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1876년 헤르베르트 2세가 안치된 생캉탱 크루아 성당은 바실리카로 정비되었으나, 1917년 8월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략했을 때 성당이 불타면서 그의 토굴 무덤도 파괴되었다.
5.3. 역사적 평가
헤르베르트 2세는 10세기 서프랑크 왕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영주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그는 왕권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샤를 3세를 감금하는 등 대담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이는 당시 카롤링거 왕조의 약화된 왕권과 지방 귀족들의 강력한 성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의 영지 확장과 아들을 대주교에 앉히려는 시도는 중세 초기 귀족들이 세속적, 종교적 권력을 모두 장악하려 했던 경향을 잘 보여준다. 그의 활동은 이후 샹파뉴 지역의 정치적 지형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6. 가족
6.1. 배우자 및 자녀
헤르베르트 2세는 로베르 1세의 딸 아델라(Adele)와 결혼하여 다음과 같은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출생 연도 | 사망 연도 | 비고 |
---|---|---|---|
외드 | 910년경 | 944년/946년 6월 19일 | 아미앵 백작, 비엔나 백작 |
아델라 | 910년경 | 960년 | 934년 플랑드르 백작 아르눌프 1세와 결혼 |
아달베르트 1세 | 915년경 | 987년/988년 9월 8일 | 베르망두아 백작, 로타링기아의 게르베르가와 결혼 |
헤르베르트 '장로' | 910년경 | 980년/985년/993년 | 오모이 백작, 모 백작, 트루아 백작. 951년 에드워드 장로왕의 딸이자 샤를 3세의 과부인 에드기프와 결혼 |
로베르 | 966년/968년 | 모 백작, 트루아 백작, 샬롱 백작 | |
리우트가르트 | 914년/920년 | 977년/978년 2월 9일 | 940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 롱스워드와 결혼; 943년/944년경 블루아 백작 테오도발트 1세와 재혼. 블루아 백작 오도 1세의 어머니 |
위그 | 920년 | 962년 | 랭스 대주교 |
가이 1세 | 919년경 | 986년/989년 6월 13일 | 수아송 백작 |
로베르의 아들인 헤르베르트 4세는 945년/950년경 태어나 995년/996년에 사망했으며, 트루아 백작, 모 백작, 오모이 백작을 지냈다. 그의 딸 아델라(Adele)는 950년경 태어나 974년 3월 6일에 사망했으며, 965년 앙주 백작 제프리 1세 회색드레스 공작과 결혼하여 풀크 3세를 낳았다. 또 다른 딸 아델라(Adele, 언니와 동명)는 하로렌 공작 샤를과 결혼하여 오토와 외드를 낳았다. 로베르의 아들 아치볼드(Arcibaldo)는 968년 8월 29일에 사망했으며, 상스 주교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