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1.1. 출생과 가족

오토는 912년 11월 23일에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링겔하임의 마틸데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마틸데는 베스트팔렌의 작센 백작 디트리히의 딸이었다. 하인리히는 이전에 906년에 작센 백작의 딸인 메르제부르크의 하테부르크와 결혼했으나, 그녀가 하인리히의 첫 아들이자 오토의 이복형제인 탕크마르를 낳은 후인 909년에 이 결혼은 무효화되었다. 오토에게는 네 명의 친형제자매가 있었다. 누이인 작센의 헤드비히, 작센의 게르베르가, 그리고 남동생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 대 브루노이다. 오토는 또한 929년에 포로로 잡힌 벤드족 귀족 여성과의 사이에서 사생아인 빌헬름을 두었다. 빌헬름은 훗날 마인츠 대주교가 되었다.
1.2. 오토 왕조의 부상
918년 12월 23일,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이자 프랑켄 공작이었던 콘라트 1세가 사망했다. 작센 연대기 작가 코르바이의 비두킨트의 『작센인의 사적(Res gestae saxonicae sive annalium libri tres)』에 따르면, 콘라트는 그의 남동생이자 추정 상속인인 프랑켄의 에버하르트를 설득하여 오토의 아버지 하인리히에게 동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제안하도록 했다. 콘라트와 하인리히는 912년부터 서로 대립했지만, 하인리히는 915년 이후 공개적으로 국왕에게 반대하지 않았다. 더욱이, 콘라트가 독일 공작들과 반복적으로 벌인 전투, 특히 최근 바이에른의 아르눌프 및 슈바벤의 부르하르트 2세와의 전투로 인해 콘라트 왕조의 입지와 자원이 약화되었다. 몇 달간의 망설임 끝에 에버하르트와 다른 프랑켄 및 작센 귀족들은 919년 5월 프리츨라어의 제국 의회에서 하인리히를 국왕으로 선출했다. 이로써 처음으로 프랑켄인이 아닌 작센인이 왕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슈바벤의 부르하르트 2세는 곧 새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바이에른의 아르눌프는 하인리히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잘츠부르크 연대기(Annales iuvavenses)』에 따르면, 아르눌프는 하인리히에 반대하여 바이에른인들에 의해 국왕으로 선출되었으나, 그의 "통치"는 짧았다. 하인리히는 두 차례의 원정에서 그를 격파했다. 921년, 하인리히는 레겐스부르크에 있는 아르눌프의 거주지를 포위하고 그를 복종시켰다. 아르눌프는 하인리히의 주권을 받아들여야 했으며, 바이에른은 바이에른 교회에서 주교를 임명할 권리와 함께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유지했다.
1.3. 왕위 계승 준비

오토는 독일 왕국이 동쪽 국경에서 서슬라브족 부족들과 싸울 때 처음으로 군사 지휘관으로서 경험을 쌓았다. 929년 벤드족/서슬라브족과의 원정 중, 오토의 사생아인 빌헬름, 훗날의 마인츠 대주교가 포로로 잡힌 벤드족 귀족 여성에게서 태어났다. 929년까지 하인리히의 왕국 전체에 대한 지배가 확고해지면서, 국왕은 아마도 왕국의 후계자를 준비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의 준비에 대한 서면 증거는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시기에 오토는 라이헤나우 수도원의 형제단 서적에서 처음으로 '국왕(Latin: rex)'으로 불렸다.
하인리히가 독일 내에서 권력을 공고히 하는 동안, 그는 또한 오토를 위한 신부를 찾아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준비했다. 다른 왕실과의 연합은 하인리히에게 추가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고 두 작센 왕국 간의 유대를 강화할 것이었다.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잉글랜드의 애설스탠 국왕은 하인리히에게 그의 이복 누이 두 명을 보냈고, 하인리히는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한 명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하인리히는 에드기타를 오토의 신부로 선택했고, 두 사람은 930년에 결혼했다.
몇 년 후, 하인리히의 사망 직전, 에르푸르트에서 열린 제국 의회는 국왕의 후계자 지명 계획을 공식적으로 비준했다. 그의 영지와 보물 중 일부는 탕크마르, 하인리히, 브루노에게 분배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카롤링거 왕조의 상속 관습에서 벗어나, 국왕은 다양한 공작들의 사전 공식 선거 없이 오토를 유일한 왕위 계승자로 지정했다.
2. 독일 국왕으로서의 통치
2.1. 대관식

하인리히는 936년 7월 2일 멤레벤에 있는 그의 궁전인 카이저팔츠에서 뇌졸중의 영향으로 사망했으며, 크베들린부르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가 사망할 당시, 모든 독일 부족들은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거의 24세의 나이에 오토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센 공작이자 독일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대관식은 936년 8월 7일 카롤루스 대제의 옛 수도인 아헨에서 거행되었으며, 그곳에서 오토는 마인츠 대주교 힐데베르트에 의해 성유를 바르고 왕관을 썼다. 그는 작센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타링기아 공국에 대한 자신의 주권과 911년에 동프랑크 왕국의 마지막 상속자들이 사망한 후 카롤루스 대제의 진정한 후계자로서의 역할을 보여주기 위해 프랑크 복장을 하고 대관식에 참석했다.
코르바이의 비두킨트에 따르면, 오토는 왕국의 다른 네 공작들(프랑켄, 슈바벤, 바이에른, 로타링기아 공국 출신)에게 대관식 연회에서 그의 개인 시종 역할을 수행하도록 했다. 바이에른의 아르눌프 1세는 마샬 (또는 마구간지기)로, 슈바벤의 헤르만 1세는 컵베어러로, 프랑켄의 에버하르트는 집사 (또는 궁재)로, 로타링기아의 길베르트는 시종관으로 봉사했다. 이러한 전통적인 봉사를 수행함으로써, 공작들은 새 국왕과의 협력을 표명했으며, 그의 통치에 대한 복종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평화로운 권력 이양에도 불구하고, 오토의 초기 통치 기간 동안 왕실 가족은 화합하지 못했다. 오토의 남동생 하인리히는 아버지의 뜻에 반하여 왕위를 주장했다. 그의 어머니 마틸데의 전기인 『Vita Mathildis reginae posterior비타 마틸디스 레기나에 포스테리오르라틴어』에 따르면, 그들의 어머니는 하인리히를 왕으로 선호했다. 오토와 달리 하인리히는 아버지의 통치 기간 동안 "자색으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이름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오토는 또한 여러 지역 귀족들의 내부 반대에 직면했다. 936년, 오토는 헤르만 빌룽을 변경백으로 임명하여 엘베강 북쪽, 작센 변경과 페네강 사이의 변경 지역에 대한 권한을 부여했다. 군사 총독으로서 헤르만은 이 지역에 거주하는 폴라비아 슬라브족으로부터 공물을 징수했으며, 종종 루티치족, 오보트리트족, 바그리족 등 서슬라브 부족들과 싸웠다. 헤르만의 임명은 그의 형제인 위흐만 백작의 분노를 샀다. 두 형제 중 나이가 많고 부유했던 위흐만은 자신이 그 직위에 더 큰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또한 위흐만은 마틸데 태후와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937년, 오토는 게로를 임명하여 그의 형 지크프리트의 뒤를 이어 메르제부르크 주변의 광대한 게로 변경의 백작이자 변경백이 되게 함으로써 귀족들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다. 이 지역은 하부 잘레강의 벤드족과 접해 있었다. 오토의 결정은 오토의 이복형제이자 지크프리트의 사촌인 탕크마르를 좌절시켰는데, 그는 자신이 그 직위에 더 큰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2.2. 권력 공고화
오토 1세는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가족 간의 갈등을 해결하며,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2.2.1. 귀족 및 형제들과의 갈등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는 937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에버하르트가 계승했다. 새 공작은 곧 오토와 갈등을 빚었는데, 에버하르트는 하인리히 국왕과 아르눌프 간의 평화 조약에 따라 바이에른에 대한 국왕의 주권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오토의 우위를 인정하기를 거부한 에버하르트는 국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938년 봄과 가을의 두 차례 원정에서 오토는 에버하르트를 격파하고 왕국에서 추방하며 그의 작위를 박탈했다。그 대신 오토는 에버하르트의 삼촌인 베르톨트를 새로운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했다. 조건은 베르톨트가 공작령 내에서 주교를 임명하고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유일한 권한이 오토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오토는 작센 귀족인 브루닝과 전 국왕 콘라트 1세의 형제인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 사이의 분쟁을 해결해야 했다. 작센인이 왕위에 오른 후, 프랑켄과 작센 국경 지대에 영지를 소유한 지역 영주 브루닝은 비작센 통치자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를 거부했다. 에버하르트는 빌레바데센 근처 페켈스하임에 있는 브루닝의 헬메른 성을 공격하여 모든 주민을 살해하고 불태웠다. 국왕은 싸우는 당사자들을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그의 궁정으로 소환했으며, 그곳에서 에버하르트는 벌금을 내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의 부관들은 공개적으로 죽은 개를 들고 다니는 형벌을 선고받았다. 이는 특히 수치스러운 처벌로 간주되었다.
오토의 행동에 격분한 에버하르트는 938년에 오토의 이복형제 탕크마르, 위흐만 백작, 그리고 마인츠 대주교 프리드리히와 합세하여 국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오토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 중 한 명인 슈바벤 공작 헤르만 1세는 오토에게 반란을 경고했고, 국왕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위흐만은 곧 오토와 화해하고 옛 동맹자들에 대항하여 국왕의 군대에 합류했다. 오토는 에레스부르크에서 탕크마르를 포위했고, 탕크마르가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 베드로 교회의 제단에서 마인치아 또는 메긴조라는 일반 병사에 의해 살해되었다. 오토는 이복형제를 애도하고 그의 용기를 칭찬했지만, 살인자는 처벌받지 않았다. 패배 후, 에버하르트와 프리드리히는 국왕과의 화해를 모색했다. 오토는 짧은 힐데스하임 망명 후 둘 다 용서하고 그들의 이전 직위로 복귀시켰다.
2.2.2. 반란 진압
화해 직후, 에버하르트는 오토에 대항하는 두 번째 반란을 계획했다. 그는 오토의 남동생 하인리히가 왕위를 차지하는 것을 돕겠다고 약속하고, 로타링기아 공작 길베르트를 반란에 합류시키도록 설득했다。길베르트는 오토의 누이 게르베르가와 결혼했지만, 서프랑크 왕국의 루이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상태였다. 오토는 하인리히를 동프랑크 왕국에서 추방했고, 하인리히는 루이 국왕의 궁정으로 도피했다. 서프랑크 국왕은 로타링기아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얻기를 희망하며 하인리히와 길베르트와 연합했다. 이에 대응하여 오토는 루이의 주요 국내 경쟁자이자 오토의 누이 헤드비히의 남편인 위그 르 그랑, 파리 백작과 동맹을 맺었다.
하인리히는 메르제부르크를 점령하고 로타링기아에서 길베르트와 합류할 계획이었지만, 오토는 리에주 근처 케르크라데의 셰브르몽에서 그들을 포위했다. 그들을 격파하기 전에, 그는 포위를 포기하고 베르됭을 점령한 루이에 대항하여 움직여야 했다. 오토는 이어서 루이를 그의 수도 랑으로 몰아냈다.
오토는 반군에 대해 초기 승리를 거두었지만, 공모자들을 붙잡고 반란을 끝낼 수는 없었다. 프리드리히 대주교는 전투원들 사이의 평화를 중재하려 했지만, 오토는 그의 제안을 거부했다. 오토의 지시에 따라 슈바벤 공작 헤르만은 프랑켄과 로타링기아로 반군에 대항하는 군대를 이끌었다. 오토는 알자스 공국에서 라인강을 건너 939년 10월 2일 안데르나흐 전투에서 에버하르트와 길베르트를 기습 공격할 동맹군을 모집했다. 오토의 군대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에버하르트는 전투에서 전사했고, 길베르트는 탈출하려다 라인강에서 익사했다. 혼자 남겨진 하인리히는 오토에게 복종했고 반란은 끝났다. 에버하르트가 사망하자 오토는 프랑켄 공국을 직접 통치하고, 이를 더 작은 백작령과 주교구로 해체하여 자신에게 직접 책임지게 했다. 같은 해, 오토는 루이 4세와 평화를 맺었고, 루이는 로타링기아에 대한 오토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그 대가로 오토는 군대를 철수하고 그의 누이 게르베르가(길베르트의 미망인)가 루이 4세와 결혼하도록 주선했다.
940년, 오토와 하인리히는 그들의 어머니의 노력으로 화해했다. 하인리히는 동프랑크 왕국으로 돌아왔고, 오토는 그를 길베르트의 뒤를 이어 새로운 로타링기아 공작으로 임명했다. 하인리히는 독일 왕위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않았고, 그의 형에 대항하는 또 다른 음모를 시작했다. 마인츠 대주교 프리드리히의 도움을 받아, 하인리히는 941년 부활절에 크베들린부르크 수도원에서 오토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오토는 음모를 발견하고 공모자들을 체포하여 잉겔하임에 투옥시켰다. 국왕은 그해 성탄절에 두 사람 모두 공개적으로 참회를 한 후에야 석방하고 용서했다.
2.2.3. 가족 관계를 통한 통치

941년부터 951년까지의 10년은 오토의 논쟁의 여지 없는 국내 권력 행사로 특징지어진다. 공작들을 자신의 권위 아래에 두면서, 오토는 그들의 사전 동의 없이 결정을 내릴 권한을 주장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직위 할당에서 세습 계승을 원했던 귀족들의 주장과 계급을 무시하고, 자신이 선택한 개인들을 왕국의 직위에 자유롭게 임명했다. 오토의 통치 아래에서는 혈통이 아닌 오토에 대한 충성심이 승진의 길이었다. 그의 어머니 마틸데는 이 정책을 승인하지 않았고, 오토의 왕실 고문들은 그녀가 그의 권위를 약화시킨다고 비난했다. 오토가 947년에 그녀를 엥거에 있는 그녀의 베스트팔렌 영지로 잠시 추방한 후, 마틸데는 그의 아내 에드기타의 권유로 다시 궁정으로 돌아왔다.
귀족들은 오토에게 적응하기 어려워했다. 왕국이 이전에는 왕위의 개인 계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전 국왕의 모든 아들들이 왕국의 일부를 받아야 했지만, 하인리히의 계승 계획은 오토를 형제들을 희생시키면서 통일된 왕국의 수장으로 만들었다. 오토의 권위주의적인 스타일은 아버지의 스타일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하인리히는 자신의 백성들에 의한 선출의 상징이자 "우정 협약(Latin: amicitia아미키티아라틴어)"에 기반한 왕국 통치의 상징으로 대관식에서 교회의 성유 도포를 의도적으로 포기했다. 하인리히는 왕국을 공작령들의 연합으로 보았고, 자신을 "동등한 자들 중 첫째"로 여겼다. 카롤루스 대제가 그랬던 것처럼 왕실 대표를 통해 왕국을 관리하려 하기보다는, 하인리히는 공작들이 자신의 우월한 지위가 인정되는 한 자신들의 영지에 대한 완전한 내부 통제권을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반면에 오토는 교회의 성유 도포를 받아들였고, 자신의 왕국을 자신에게 "신성한 권리"가 있는 봉건 군주국으로 여겼다. 그는 다양한 왕국의 귀족 가문들의 내부 계층에 대한 고려 없이 통치했다.
이 새로운 정책은 오토의 왕국 내에서 논쟁의 여지 없는 지배자로서의 위치를 보장했다. 오토에게 반란을 일으킨 그의 가족 구성원들과 다른 귀족들은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그에게 무조건 항복해야 했으며, 국왕의 용서를 기대했다. 귀족들과 다른 고위 관리들에게 오토의 처벌은 일반적으로 가벼웠고, 처벌받은 자들은 보통 그 후에 권위 있는 위치로 복귀되었다. 그의 동생 하인리히는 두 번 반란을 일으켰고, 항복 후 두 번 용서받았다. 그는 심지어 로타링기아 공작과 나중에는 바이에른 공작으로도 임명되었다. 반란을 일으킨 평민들은 훨씬 더 가혹하게 다루어졌으며, 오토는 보통 그들을 처형했다.
오토는 왕으로서의 재임 기간 내내 충성스러운 봉신들에게 그들의 봉사에 대한 보상을 계속했다. 임명은 여전히 그의 재량에 따라 얻어지고 유지되었지만, 점차적으로 왕조 정치와 얽히게 되었다. 하인리히가 "우정 협약"에 의존했던 반면, 오토는 가족 관계에 의존했다. 오토는 왕관을 쓰지 않은 통치자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여기는 것을 거부했다. 오토의 통치 아래에서 중요한 봉신들의 통합은 결혼 관계를 통해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루이 4세 국왕은 939년에 오토의 누이 게르베르가와 결혼했고, 오토의 아들 리우돌프는 947년에 슈바벤의 헤르만 1세의 딸 이다와 결혼했다. 전자는 서프랑크 왕실과 동프랑크 왕실을 왕조적으로 연결시켰고, 후자는 헤르만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이 슈바벤 공작령을 계승하는 것을 확보했다. 오토의 계획은 950년에 리우돌프가 슈바벤 공작이 되고, 954년에는 오토의 조카 로테르가 프랑스 국왕이 되면서 결실을 맺었다.
944년, 오토는 적왕 콘라트를 로타링기아 공작으로 임명하고, 947년에 오토의 딸 리우트가르트와의 결혼을 통해 그를 자신의 확대된 가족으로 편입시켰다. 태생이 잘리어 프랑켄인 콘라트는 전 독일 국왕 콘라트 1세의 조카였다. 947년 오토의 삼촌인 바이에른 공작 베르톨트가 사망하자, 오토는 그의 동생 하인리히의 야망을 바이에른의 유디트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의 딸)와의 결혼을 통해 만족시켰고, 948년에 그를 새로운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했다. 이 조치는 하인리히가 그 후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면서 형제들 사이에 마침내 평화를 가져왔다. 공작들과의 가족 관계를 통해 오토는 왕권의 주권과 왕국 전체의 결속력을 강화했다.
946년 1월 29일, 에드기타는 35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고, 오토는 그의 아내를 마그데부르크 대성당에 안장했다. 이 결혼은 16년 동안 지속되었고 두 자녀를 낳았다. 에드기타의 죽음과 함께 오토는 자신의 후계자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아버지처럼 오토는 자신의 죽음 시에 왕국의 단독 통치를 아들 리우돌프에게 넘겨줄 의도였다. 오토는 왕국의 모든 주요 인물들을 소집하여 리우돌프에게 충성 서약을 하도록 했고, 이로써 오토의 왕위 계승자로서의 유일한 주장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최근의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바흐라흐는 953년과 954년에 오토가 동원한 군대의 규모가 20,000에서 25,000명 범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30,000명 이상의 군대로 방어되는 마인츠와 같은 도시를 포위하는 데 필요했다.
2.3. 리우돌프의 내전
오토 1세의 아들 리우돌프와 사위 콘라트의 반란 및 그 결과, 그리고 이 사건이 오토 1세의 권력 구조에 미친 영향을 설명한다.
2.3.1. 반란 진압
이탈리아 원정의 굴욕적인 실패와 오토의 아델하이트와의 결혼으로 인해 리우돌프는 아버지와 소원해졌고 반란을 계획했다. 951년 성탄절, 그는 잘펠트에서 왕국 전역의 많은 중요한 인물들, 특히 독일의 수석 주교인 마인츠 대주교 프리드리히가 참석한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리우돌프는 그의 매형인 로타링기아 공작 콘라트를 반란에 끌어들일 수 있었다. 오토의 이탈리아 섭정으로서 콘라트는 베렝가리오 2세와 평화 협정과 동맹을 협상했으며, 오토가 이 조약을 비준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동맹자가 아닌 베렝가리오 2세는 오토의 신하가 되었고 그의 왕국은 축소되었다. 콘라트는 오토의 결정, 특히 하인리히에게 추가적인 권한이 부여된 것에 대해 배신감과 모욕감을 느꼈다. 콘라트와 리우돌프는 오토가 외국 태생의 아내와 권력에 굶주린 동생에게 휘둘린다고 보았고, 그들의 지배로부터 왕국을 해방시키기로 결심했다.
952년 겨울, 아델하이트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녀는 시동생이자 아이의 할아버지인 하인리히 1세의 이름을 따서 하인리히라고 지었다. 오토가 아내와 동생의 설득으로 이 아이를 리우돌프 대신 자신의 후계자로 제안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많은 독일 귀족들에게 이 소문은 오토가 독일 중심 정책에서 이탈리아 중심 정책으로 최종적으로 전환했음을 의미했다. 오토가 리우돌프의 계승권을 철회하도록 요구할 것이라는 생각은 많은 귀족들을 공개적인 반란으로 이끌었다. 리우돌프와 콘라트는 953년 봄에 먼저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에 대항하여 귀족들을 이끌었다. 하인리히는 작센 출신이라는 이유로 바이에른인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그의 봉신들은 빠르게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소식은 잉겔하임에 있는 오토에게 전해졌다.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그는 마인츠에 있는 자신의 거점으로 이동했다. 마인츠는 또한 오토와 반군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던 마인츠 대주교 프리드리히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회의나 협상된 조약에 대한 기록된 세부 사항은 존재하지 않지만, 오토는 곧 반군에게 유리한 평화 조약을 가지고 마인츠를 떠났는데, 이는 리우돌프를 왕위 계승자로 확인하고 콘라트의 베렝가리오 2세와의 원래 합의를 승인하는 내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조건들은 아델하이트와 하인리히의 바람과 양립할 수 없었다.
오토가 작센으로 돌아왔을 때, 아델하이트와 하인리히는 국왕에게 조약을 무효화하도록 설득했다. 프리츨라어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한 오토는 리우돌프와 콘라트를 궐석 재판으로 법외자로 선언했다. 국왕은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와 제국 칭호를 주장하려는 자신의 열망을 재확인했다。그는 로타링기아 공국에 사절을 보내 콘라트의 통치에 대항하여 지역 귀족들을 선동했다. 콘라트는 태생이 잘리어 프랑켄이었고 로타링기아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으므로, 그들은 오토에게 지지를 맹세했다.
의회에서 오토의 행동은 슈바벤과 프랑켄 주민들을 반란으로 이끌었다. 오토에게 초기 패배를 당한 후, 리우돌프와 콘라트는 마인츠의 본부로 후퇴했다. 953년 7월, 오토와 그의 군대는 바이에른에서 온 하인리히의 군대의 지원을 받아 도시를 포위했다. 두 달간의 포위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함락되지 않았고, 독일 남부에서는 오토의 통치에 대항하는 반란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어려움에 직면한 오토는 리우돌프와 콘라트와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오토의 막내 동생이자 940년부터 왕실 재상이었던 대 브루노는 형들과 동행하여 협상 준비를 감독했다. 새로 임명된 쾰른 대주교로서 브루노는 자신의 교회 영토에 속한 로타링기아의 내전을 종식시키기를 열망했다. 반군들은 이전에 오토와 합의했던 조약의 비준을 요구했지만, 회의 중 하인리히의 도발로 인해 협상은 결렬되었다. 콘라트와 리우돌프는 내전을 계속하기 위해 회의를 떠났다. 그들의 행동에 분노한 오토는 두 사람에게서 슈바벤과 로타링기아 공작령을 박탈하고, 그의 동생 브루노를 새로운 로타링기아 공작으로 임명했다.
오토와 함께 군사 원정 중, 하인리히는 바이에른 궁정 백작 아르눌프 2세를 자신의 공작령을 통치하도록 임명했다. 아르눌프 2세는 하인리히가 이전에 공작 자리에서 축출했던 아르눌프 악인공의 아들이었고, 그는 복수를 꾀했다. 그는 하인리히를 버리고 오토에 대항하는 반란에 합류했다. 마인츠 포위를 풀고, 오토와 하인리히는 바이에른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 남쪽으로 행군했다. 지역 귀족들의 지원 없이는 그들의 계획은 실패했고, 그들은 작센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바이에른, 슈바벤, 프랑켄 공작령은 국왕에 대항하는 공개적인 내전에 돌입했고, 심지어 그의 고향인 작센 공국에서도 반란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953년 말까지 내전은 오토를 폐위시키고 카롤루스 대제의 후계자라는 그의 주장을 영구히 끝낼 위협을 가했다.
954년 초, 오토의 오랜 충성스러운 봉신이자 작센의 개인 행정관이었던 변경백 헤르만 빌룽은 동쪽에서 증가하는 슬라브족의 움직임에 직면했다. 독일 내전을 틈타 슬라브족은 인접 국경 지역을 더욱 깊숙이 침략했다. 한편, 불추가 이끄는 헝가리인들은 독일 남부로 광범위한 침략을 시작했다. 슈바벤 공작 리우돌프와 로타링기아 공작 콘라트는 서쪽의 자신들 영토로 헝가리인들이 침략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았지만, 침략자들은 라인강에 도달하여 바이에른과 프랑켄의 많은 지역을 약탈했다.
오토의 동생 하인리히는 콘라트와 리우돌프가 오토에 대항하기 위해 헝가리인들을 독일로 초청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공작령들에서 여론은 빠르게 반군에게 불리하게 돌아섰다. 이러한 여론 변화와 오토의 유일한 딸인 그의 아내 리우트가르트의 죽음으로 인해 콘라트는 오토와 평화 협상을 시작했고, 결국 리우돌프와 대주교 프리드리히도 합류했다. 휴전이 선언되었고, 오토는 954년 6월 15일 랑겐첸에서 제국 의회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가 소집되기 전에 콘라트와 프리드리히는 오토와 화해했다. 의회에서 하인리히가 그의 조카 리우돌프를 헝가리인들과 공모했다고 비난하면서 긴장이 다시 고조되었다. 콘라트와 프리우드리히는 격분한 리우돌프에게 평화를 구하도록 간청했지만, 리우돌프는 내전을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회의를 떠났다.
리우돌프는 그의 부관인 아르눌프 2세(바이에른의 실질적인 통치자)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바이에른의 레겐스부르크 남쪽으로 향했고, 오토가 빠르게 뒤를 따랐다. 군대는 뉘른베르크에서 만나 치명적이지만 결정적이지 않은 전투를 벌였다. 리우돌프는 레겐스부르크로 후퇴했고, 그곳에서 오토에게 포위되었다. 오토의 군대는 도시 성벽을 뚫지 못했지만, 두 달간의 포위 끝에 도시 내에 기아를 초래했다. 리우돌프는 오토에게 평화 협상을 시작하자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국왕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했고, 리우돌프는 이를 거부했다. 아르눌프 2세가 계속되는 전투에서 전사한 후, 리우돌프는 바이에른에서 자신의 영지인 슈바벤으로 도피했고, 오토의 군대가 빠르게 뒤를 따랐다. 적대자들은 슈바벤-바이에른 국경 근처 일러티센에서 만나 협상을 시작했다. 리우돌프와 오토는 제국 의회가 소집되어 평화를 비준할 때까지 휴전을 선언했다. 국왕은 아들의 모든 위반을 용서했고, 리우돌프는 아버지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처벌이든 받아들이기로 동의했다.
이 평화 협정 직후, 노쇠하고 병약한 대주교 프리드리히가 954년 10월에 사망했다. 리우돌프의 항복으로 바이에른을 제외한 독일 전역에서 반란은 진압되었다. 오토는 954년 12월 아른슈타트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했다. 왕국의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리우돌프와 콘라트는 오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들의 군대가 여전히 점령하고 있는 모든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했다. 오토는 그들에게 이전의 공작 작위를 돌려주지 않았지만, 그들의 사유지를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의회는 오토의 조치를 비준했다.
- 리우돌프는 이탈리아에 대한 섭정권과 베렝가리오 2세를 폐위시킬 군대 지휘권을 약속받았다.
- 콘라트는 헝가리인에 대항하는 군사 지휘권을 약속받았다.
- 전 슈바벤 공작 부르하르트 2세의 아들인 부르하르트 3세는 슈바벤 공작(리우돌프의 옛 공작령)으로 임명되었다.
- 브루노는 새로운 로타링기아 공작(콘라트의 옛 공작령)으로 남았다.
- 하인리히는 바이에른 공작으로 확정되었다.
- 오토의 장남 빌헬름은 마인츠 대주교이자 독일의 수석 주교로 임명되었다.
- 오토는 작센 공국과 옛 프랑켄 공국의 영토에 대한 직접 통치권을 유지했다.
국왕의 954년 12월 조치들은 마침내 2년간의 내전을 종식시켰다。리우돌프의 반란은 일시적으로 오토의 지위를 약화시켰지만, 궁극적으로는 독일의 절대 군주로서 그의 지위를 강화했다.
2.4. 내정 및 교회 정책

940년대 후반부터 오토는 가톨릭 교회의 직위를 왕실 행정의 도구로 활용하여 내부 정책을 재편했으며, 이로써 오토 왕조의 황실 교회 체제의 방향을 설정했다. 그는 자신의 "신성한 통치권"과 관련하여 자신을 교회의 수호자로 여겼다. 행정 재편의 핵심 요소는 세속 귀족의 희생을 감수하고 독신 성직자, 주로 주교와 수도원장을 세속 직위에 임명하는 것이었다. 오토는 강력하게 독립적이고 권력 있는 왕실 제후들에 대한 비세습적인 균형추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는 임명된 주교와 수도원장에게 토지를 부여하고 "제국 제후"(Reichsfürst라이히스퓌르스트독일어) 칭호를 수여했다. 이로써 세습적 주장은 피할 수 있었는데, 사망 후 직위가 다시 왕실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노먼 칸토어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오토 왕조 제국에서 성직자 선거는 단순한 형식에 불과했고, 국왕은 자신의 친척과 충성스러운 재상 서기들로 주교직을 채웠으며, 이들은 또한 위대한 독일 수도원들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혼합된 왕실-교회 봉사의 가장 저명한 구성원은 그의 친동생 대 브루노였다. 그는 940년부터 오토의 재상이었으며, 953년에는 쾰른 대주교와 로타링기아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오토 정부 내의 다른 중요한 종교 관료로는 빌헬름 마인츠 대주교(오토의 사생아), 브레멘 대주교 아달다그, 그리고 풀다 수도원의 하담르 수도원장이 있었다. 오토는 그의 왕국의 여러 주교구와 수도원에 토지와 왕실 특권, 예를 들어 세금을 징수하고 군대를 유지할 권한 등 수많은 선물을 부여했다. 이러한 교회 토지에 대해 세속 당국은 과세권이나 법적 관할권을 가지지 못했다. 이는 교회를 여러 공작들 위에 두었으며, 그 성직자들을 국왕의 개인 봉신으로 봉사하도록 만들었다. 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오토는 독일의 모든 주민에게 십일조를 의무화했다.
오토는 왕국의 여러 주교와 수도원장에게 백작의 지위와 그들의 영토 내에서 백작의 법적 권리를 부여했다. 오토가 모든 주교와 수도원장을 직접 임명했기 때문에, 이러한 개혁은 그의 중앙 권력을 강화했으며, 독일 교회의 고위 계층은 어떤 면에서는 왕실 관료제의 한 부서 역할을 했다. 오토는 왕국 전역의 주교구에 자신의 개인 채플린들을 정기적으로 임명했다. 왕실 궁정에 소속되어 있는 동안, 채플린들은 왕실 재상을 통해 정부 업무를 수행했다. 왕실 궁정에서 수년간 근무한 후, 오토는 그들의 봉사에 대한 보상으로 교구 승진을 시켰다.
2.5. 대외 관계
2.5.1. 프랑크 왕국과의 관계
서프랑크 왕국의 왕들은 귀족들과의 내부 투쟁 끝에 상당한 왕권을 잃었지만, 동프랑크 왕국도 주장하는 영토인 로타링기아 공국에 대한 권위를 여전히 주장했다. 독일 국왕은 루이 4세의 주요 국내 경쟁자인 위그 르 그랑의 지지를 받았다. 940년에 루이 4세가 로타링기아를 다시 통치하려 한 두 번째 시도는 그의 누이이자 로타링기아 공작 길베르트의 미망인인 게르베르가와의 결혼을 통해 자신이 로타링기아 공작의 정당한 권리자라는 주장에 기반을 두었다. 오토는 루이 4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그의 동생 하인리히를 공작으로 임명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양측은 로타링기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지만, 공국은 오토 왕국의 일부로 남았다.
경쟁에도 불구하고, 루이 4세와 위그는 모두 결혼 관계를 통해 오토의 가족과 연결되어 있었다. 오토는 942년에 평화를 위해 개입하여 두 사람 사이의 공식적인 화해를 발표했다. 합의의 일부로, 위그는 루이 4세에게 복종 행위를 수행해야 했고, 그 대가로 루이 4세는 로타링기아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해야 했다. 짧은 평화 기간 후, 서프랑크 왕국은 946년에 또 다른 위기에 빠졌다. 노르만족이 루이 4세를 붙잡아 위그에게 넘겼고, 위그는 랑 요새의 항복을 조건으로만 국왕을 풀어주었다. 누이 게르베르가의 간청에 따라 오토는 루이 4세를 대신하여 프랑스를 침공했지만, 그의 군대는 랑, 랭스, 파리 같은 주요 도시를 점령할 만큼 강력하지 못했다. 세 달 후, 오토는 결국 위그를 격파하지 못하고 포위를 풀었지만, 베르망두아의 위그를 랭스 대주교 직위에서 해임하고 아르탈드를 그의 이전 직위로 복귀시키는 데 성공했다.
랭스 대주교구에 대한 통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토는 948년 6월 7일 잉겔하임 암 라인에서 시노드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는 독일의 모든 대주교를 포함하여 30명 이상의 주교가 참석했다. 이는 동프랑크와 서프랑크 모두에서 오토의 강력한 위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시노드는 오토의 아르탈드 랭스 대주교 임명을 확인했으며, 위그는 국왕의 왕실 권위를 존중하도록 훈계받았다. 그러나 강력한 봉신이 루이 4세를 국왕으로 받아들인 것은 950년이 되어서였고, 반대파들은 953년 3월까지 완전히 화해하지 못했다.
오토는 서프랑크의 문제 해결을 그의 사위 적왕 콘라트와 나중에는 대 브루노에게 맡겼으며, 오토의 누이 게르베르가와 헤드비히는 그들의 아들인 로테르 국왕과 위그 공작의 섭정 역할을 했다. 오토는 여러 서프랑크 귀족들로부터 봉건적 신하 관계를 받았고, 그의 아버지처럼 서부 왕국에서 왕실 및 주교 계승 분쟁을 해결했다. 브루노는 958년에 서프랑크에 군사적으로 개입했으며, 로타링기아의 레기나르 가문에도 개입했다. 그러나 940년부터 965년까지의 이러한 오토 왕조의 패권은 제도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것이었으며, 987년 위그 카페의 즉위 이후 빠르게 사라졌다.
2.5.2. 부르군디 왕국 및 보헤미아
오토는 그의 아버지가 시작한 독일과 부르군디 왕국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를 이어갔다. 부르군디의 루돌프 2세 국왕은 이전에 922년에 하인리히의 주요 조언자 중 한 명의 딸인 슈바벤의 베르타와 결혼했다. 부르군디는 원래 843년 베르됭 조약에 따른 카롤루스 대제 제국의 중앙 부분인 중프랑크 왕국의 일부였다. 937년 7월 11일, 루돌프 2세가 사망하자 프로방스의 위그, 이탈리아 국왕이자 루돌프 2세의 주요 국내 반대파는 부르군디 왕위를 주장했다. 오토는 계승에 개입했고, 그의 지원으로 루돌프 2세의 아들인 부르군디의 콘라트가 왕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부르군디는 오토의 영향권 내에서 필수적이지만 형식적으로는 독립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독일과 평화를 유지했다.
보헤미아 공작 볼레슬라프 1세는 935년에 보헤미아 왕위를 계승했다. 이듬해, 오토의 아버지 하인리히 1세가 사망하자, 볼레슬라프는 하인리히가 볼레슬라프의 형이자 전임자인 바츨라프 1세와 맺은 평화 조약을 위반하고 독일 왕국(동프랑크 왕국)에 대한 조공 지불을 중단했다. 볼레슬라프는 936년에 북서 보헤미아에 있는 작센인들의 동맹국을 공격하고, 튀링겐과 메르제부르크에서 온 오토의 두 군대를 격파했다. 보헤미아에 대한 이 초기 대규모 침공 이후, 주로 국경 습격 형태로 적대 행위가 계속되었다. 전쟁은 950년이 되어서야 오토가 볼레슬라프의 아들이 소유한 성을 포위하면서 끝났다. 볼레슬라프는 평화 조약에 서명하기로 결정하고, 조공 지불을 재개하겠다고 약속했다. 볼레슬라프는 오토의 동맹이 되었고, 그의 보헤미아 군대는 955년 레흐 강에서 공통의 마자르족 위협에 대항하여 독일군을 도왔다. 나중에 그는 메클렌부르크에서 두 슬라브 공작(스토이그니에프와 나코)의 봉기를 진압했는데, 이는 아마도 보헤미아 영지가 동쪽으로 확장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함이었다.
2.5.3. 슬라브족과의 전쟁
오토가 939년에 그의 동생의 반란을 진압하는 조치를 마무리하고 있을 때, 엘베강의 슬라브족이 독일 지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928년에 오토의 아버지에게 복속되었던 슬라브족은 하인리히의 반란을 독립을 되찾을 기회로 보았다. 동작센에 있는 오토의 부관, 메르제부르크 백작 게로는 이교도인 폴라비아 슬라브족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비두킨트에 따르면, 게로는 약 30명의 슬라브족 족장들을 연회에 초대했고, 연회 후 그의 병사들은 방심한 취한 손님들을 공격하고 학살했다. 슬라브족은 복수를 요구하며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게로에 대항하여 진격했다. 오토는 그의 반란을 일으킨 동생 하인리히와 짧은 휴전에 동의하고 게로를 지원하기 위해 움직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그들의 연합군은 진격하는 슬라브족을 격퇴할 수 있었다. 오토는 그 후 서쪽으로 돌아가 동생의 반란을 진압했다.
941년, 게로는 슬라브족을 진압하기 위한 또 다른 계획을 시작했다. 그는 헤벨리족의 족장인 투구미르라는 포로 슬라브인을 자신의 대의에 끌어들였다. 게로는 투구미르가 나중에 오토를 자신의 상위 군주로 인정한다면, 그가 헤벨리족의 왕위를 주장하는 것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투구미르는 동의하고 슬라브족에게 돌아갔다. 게로의 학살로 인해 남아있는 슬라브족 족장은 거의 없었고, 슬라브족은 빠르게 투구미르를 자신들의 왕자로 선포했다. 왕위에 오른 투구미르는 자신의 주요 경쟁자를 살해하고 오토에게 충성을 선언하며 자신의 영토를 독일 왕국에 편입시켰다. 오토는 투구미르에게 "공작" 칭호를 부여하고, 투구미르가 독일 공작들과 같은 방식으로 오토의 종주권 아래에서 자신의 백성을 다스릴 수 있도록 허용했다. 게로와 투구미르의 쿠데타 이후, 슬라브 연맹은 해체되었다. 핵심적인 헤벨리족 요새인 브란덴부르크를 장악한 게로는 분열된 슬라브 부족들을 공격하고 격파할 수 있었다。오토와 그의 후계자들은 군사 식민지화와 교회 설립을 통해 동유럽으로 통제력을 확장했다.
2.6. 헝가리 침입 격퇴
2.6.1. 레흐펠트 전투

헝가리인(마자르족)은 헝가리의 유럽 침략의 일환으로 오토의 영토를 침략했으며, 리우돌프의 내전 동안 독일 남부의 많은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오토는 왕국의 북부와 북동부 국경에 변경백 헤르만 빌룽과 게로를 배치했지만, 남동쪽의 헝가리 공국은 독일 안보에 영구적인 위협이었다. 헝가리인들은 왕국의 내전을 이용하여 954년 봄 바이에른 공국을 침공했다. 슈바벤 공작 리우돌프와 로타링기아 공작 콘라트는 헝가리인들이 서쪽의 자신들 영토로 침략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았지만, 침략자들은 라인강에 도달하여 바이에른과 프랑켄의 많은 지역을 약탈했다.
성공적인 습격에 고무된 헝가리인들은 955년 봄에 독일로 또 다른 침략을 시작했다. 이제 내전으로 방해받지 않는 오토의 군대는 침략을 격파할 수 있었고, 곧 헝가리인들은 오토와 평화를 구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다. 사절은 미끼로 판명되었다. 오토의 동생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는 헝가리인들이 남동쪽에서 그의 영토로 넘어왔다는 소식을 오토에게 전했다. 헝가리 주력군은 레흐 강을 따라 진을 치고 아우크스부르크를 포위했다. 도시가 울리히 주교에 의해 방어되는 동안, 오토는 군대를 집결시키고 남쪽으로 행군하여 헝가리인들과 대치했다.
오토와 그의 군대는 955년 8월 10일 레흐펠트 전투에서 헝가리 군대와 싸웠다. 오토의 지휘 아래에는 슈바벤 공작 부르하르트 3세와 보헤미아 공작 볼레슬라프 1세의 보헤미아 군대가 있었다. 수적으로 거의 두 배나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토는 헝가리 군대를 자신의 영토에서 몰아내기로 결심했다. 코르바이의 비두킨트에 따르면, 오토는 "아우크스부르크 시의 영토에 진을 치고, 그곳에서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던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의 군대와 프랑켄 기사 대군을 이끌고 온 콘라트 공작과 합류했다. 콘라트의 예상치 못한 도착은 전사들을 너무나 고무시켜 즉시 적을 공격하기를 원했다."

헝가리인들은 강을 건너 즉시 보헤미아인들을 공격했고, 이어서 부르하르트 휘하의 슈바벤인들을 공격했다. 화살 세례로 방어군을 혼란시킨 그들은 보급품을 약탈하고 많은 포로를 잡았다. 오토는 공격 소식을 듣자마자 콘라트에게 반격으로 후방 부대를 구원하도록 명령했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콘라트는 주력 부대로 돌아왔고, 국왕은 즉시 공격을 개시했다. 화살 세례에도 불구하고, 오토의 군대는 헝가리 전선을 강타하여 근접 전투를 벌일 수 있었고, 전통적으로 유목민 전사들에게 선호되는 사격 후 도주 전술을 사용할 공간을 주지 않았다. 헝가리인들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무질서하게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코르바이의 비두킨트에 따르면, 오토는 이어진 승리 축하 행사에서 "조국의 아버지"이자 "황제"로 선포되었다. 전투가 헝가리인들에게 결정적인 패배는 아니었지만, 오토가 도망치는 군대를 헝가리 영토로 추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전투는 거의 100년간의 헝가리인들의 서유럽 침략을 종식시켰다.
오토가 주력 군대를 독일 남부에 배치하여 헝가리인들과 싸우는 동안, 북부의 오보트리트 슬라브족은 반란 상태에 있었다. 936년에 오토가 위흐만에게 변경백 칭호를 부여하기를 거부한 것에 대해 여전히 오토의 반대파였던 위흐만 소년 백작은 빌룽 변경 내 오보트리트족 영토를 약탈하여 슬라브족 왕자 나코의 추종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오보트리트족은 955년 가을 작센을 침공하여 무장 가능한 연령의 남성들을 살해하고 여성과 어린이들을 노예로 끌고 갔다. 레흐펠트 전투 이후, 오토는 북쪽으로 서둘러 그들의 영토 깊숙이 진격했다. 슬라브족 사절단은 직접적인 독일 통치 대신 독일의 종주권 아래 자치를 허용하는 대가로 연간 조공을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오토는 이를 거부했고, 양측은 10월 16일 렉니츠 전투에서 만났다. 오토의 군대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전투 후 수백 명의 포로로 잡힌 슬라브족이 처형되었다.
이교도 헝가리인과 슬라브족에 대한 오토의 승리를 기념하는 축하 행사가 왕국 전역의 교회에서 열렸으며, 주교들은 이 승리를 신의 개입이자 오토의 "신성한 통치권"의 증거로 여겼다. 레흐펠트와 렉니츠 전투는 오토 통치의 전환점을 이룬다. 헝가리인과 슬라브족에 대한 승리는 공작령들이 확고히 왕실 권위 아래 놓이면서 독일에 대한 그의 권력 장악을 확고히 했다. 955년부터 오토는 자신의 통치에 대한 또 다른 반란을 겪지 않았으며, 그 결과 중앙유럽 전역에서 자신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오토의 사위인 전 로타링기아 공작 콘라트는 레흐펠트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국왕의 동생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그 해 11월 1일에 몇 달 후 사망했다. 하인리히의 사망으로 오토는 그의 네 살 된 조카 하인리히 2세를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작으로 임명했으며, 그의 어머니 바이에른의 유디트를 섭정으로 두었다. 오토는 956년에 리우돌프를 이탈리아 국왕 베렝가리오 2세에 대항하는 원정의 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그는 957년 9월 6일에 열병으로 사망했다. 빌헬름 대주교는 그의 이복형제를 마인츠 근처 성 알반 수도원에 안장했다. 하인리히, 리우돌프, 콘라트의 죽음은 오토에게 그의 왕위 계승자를 포함하여 왕실 가족의 가장 저명한 세 구성원을 앗아갔다. 또한, 이탈리아의 아델하이트와의 결혼에서 낳은 그의 첫 두 아들인 하인리히와 브루노는 모두 957년까지 어린 시절에 사망했다. 오토의 아델하이트와의 세 번째 아들인 두 살 된 오토는 왕국의 새로운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3. 이탈리아 정복 및 황제 즉위
3.1. 이탈리아 왕위의 분쟁
카롤루스 3세 비만왕이 888년에 사망하자,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은 동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하부르군디와 상부르군디의 왕국, 그리고 이탈리아 왕국으로 나뉘었고, 각 왕국은 자체 국왕에 의해 통치되었다. 로마의 교황은 이탈리아 국왕들을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로 계속 임명했지만, 이 "이탈리아 황제"들은 알프스산맥 북쪽에서는 어떤 권한도 행사하지 못했다. 베렝가리오 1세가 924년에 암살되자, 카롤루스 대제의 마지막 명목상 상속자는 사망했고, 황제 칭호는 공석으로 남았다.

상부르군디의 루돌프 2세 국왕과 프로방스의 위그, 하부르군디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프로방스 백작은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얻기 위해 군사적 수단으로 경쟁했다. 926년, 위그의 군대는 루돌프를 격파했고, 위그는 이탈리아반도에 대한 사실상의 통제권을 확립하고 이탈리아 국왕으로 대관했다. 그의 아들 로타리오는 931년에 공동 통치자로 승격되었다. 위그와 루돌프 2세는 결국 933년에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4년 후 로타리오는 루돌프의 어린 딸 아델하이트와 약혼했다.
940년, 전 국왕 베렝가리오 1세의 손자인 이탈리아의 베렝가리오 2세, 이브레아 변경백은 그의 삼촌 위그에 대항하여 이탈리아 귀족들의 반란을 이끌었다. 로타리오의 경고를 받은 위그는 베렝가리오 2세를 이탈리아에서 추방했고, 변경백은 941년에 오토의 궁정으로 도피하여 보호를 받았다. 945년, 베렝가리오 2세는 돌아와 이탈리아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위그를 격파했다. 위그는 아들에게 양위하고 프로방스로 은퇴했다. 베렝가리오 2세는 로타리오와 협정을 맺고 자신을 막후 실세로 확립했다. 로타리오는 947년에 16세의 아델하이트와 결혼했고, 948년 4월 10일 위그가 사망하자 명목상의 국왕이 되었지만, 베렝가리오 2세는 궁재 또는 부왕으로서 계속 권력을 유지했다.
로타리오의 짧은 "통치"는 950년 11월 22일 그의 죽음으로 끝났고, 베렝가리오 2세는 12월 15일에 아들 아달베르트를 공동 통치자로 하여 국왕으로 대관했다. 광범위한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한 베렝가리오 2세는 자신의 통치를 합법화하려 했고, 지난 세 명의 이탈리아 국왕의 딸이자 며느리이자 미망인인 아델하이트를 아달베르트와 강제로 결혼시키려 했다. 아델하이트는 맹렬히 거부했고, 베렝가리오 2세에 의해 가르다호에 투옥되었다. 카노사의 아달베르트 아토 백작의 도움으로 그녀는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카노사에서 베렝가리오 2세에게 포위된 아델하이트는 알프스 너머로 사절을 보내 오토의 보호와 결혼을 요청했다. 아델하이트와의 결혼은 이탈리아 왕위와 궁극적으로 황제 칭호를 주장하는 오토의 입지를 강화했을 것이다. 그녀의 뛰어난 지성과 막대한 부를 알고 있던 오토는 아델하이트의 결혼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탈리아 원정을 준비했다.
3.2. 제1차 이탈리아 원정
951년 초여름, 오토가 알프스를 넘기 전에 그의 아들 슈바벤 공작 리우돌프는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를 침공했다. 리우돌프의 행동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불분명하며, 역사가들은 여러 가지 가능한 동기를 제시했다. 리우돌프는 자신의 아내 이다의 먼 친척인 아델하이트를 돕거나, 왕실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려 했을 수도 있다. 젊은 후계자는 또한 독일 문제와 이탈리아 북부에서 그의 삼촌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와 경쟁하고 있었다. 리우돌프가 원정을 준비하는 동안, 하인리히는 이탈리아 귀족들이 리우돌프의 원정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영향을 미쳤다. 리우돌프가 롬바르디아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아무런 지원도 찾지 못했고, 군대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의 군대는 오토의 군대가 알프스를 넘을 때까지 거의 전멸 직전이었다. 국왕은 아들의 독립적인 행동에 화를 내면서도 마지못해 리우돌프의 군대를 자신의 지휘 아래 받아들였다.

오토와 리우돌프의 군대는 951년 9월 베렝가리오 2세의 저항 없이 이탈리아 북부에 도착했다. 그들이 포강 계곡으로 내려가자, 이탈리아 귀족과 성직자들은 베렝가리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오토와 그의 진격하는 군대에 지원을 제공했다. 자신의 약화된 위치를 인식한 베렝가리오 2세는 그의 수도 파비아에서 도피했다. 오토가 951년 9월 23일 파비아에 도착했을 때, 도시는 기꺼이 독일 국왕에게 문을 열었고, 오토는 롬바르드족의 왕으로 대관되었다. 오토는 10월 10일부터 그의 문서에서 Rex Italicorum(이탈리아인의 왕)과 Rex Langobardorum(롬바르드인의 왕) 칭호를 사용했다. 그 이전에 카롤루스 대제가 그랬던 것처럼, 오토는 이제 독일 국왕과 이탈리아 국왕을 겸하게 되었다. 오토는 바이에른에 있는 그의 동생 하인리히에게 카노사에서 파비아로 그의 신부를 호위하도록 메시지를 보냈고, 그곳에서 두 사람은 결혼했다.
아버지가 파비아에서 결혼한 직후, 리우돌프는 이탈리아를 떠나 슈바벤으로 돌아갔다. 독일의 수석 주교이자 오토의 오랜 국내 경쟁자였던 마인츠 대주교 프리드리히도 리우돌프와 함께 독일로 돌아갔다. 독일 북부의 소요 사태로 인해 오토는 952년에 그의 군대 대부분과 함께 알프스를 다시 넘어 돌아가야 했다. 오토는 그의 군대 중 소규모 병력을 이탈리아에 남겨두고, 그의 사위인 로타링기아 공작 콘라트를 그의 섭정으로 임명하고, 베렝가리오 2세를 진압하는 임무를 맡겼다.
3.3. 외교 및 봉건 협정

소수의 병력으로 군사적으로 약한 위치에 있던 오토의 이탈리아 섭정은 외교적 해결책을 시도하며 베렝가리오 2세와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콘라트는 군사적 대결이 독일에게 인력과 재정 모두에서 큰 비용을 초래할 것이라고 인식했다. 왕국이 북쪽에서는 덴마크인의 침략, 동쪽에서는 슬라브족과 헝가리인의 침략에 직면하고 있던 시기에, 모든 가용 자원은 알프스 북쪽에 필요했다. 콘라트는 이탈리아와의 종속국 관계가 독일의 최선의 이익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베렝가리오 2세가 이탈리아 국왕으로 남아있되, 오토를 자신의 상위 군주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제안했다. 베렝가리오 2세는 동의했고, 두 사람은 합의를 확정하기 위해 오토를 만나러 북쪽으로 여행했다.
콘라트의 조약은 아델하이트와 하인리히의 경멸을 받았다. 아델하이트는 태생이 부르군디인이었지만, 이탈리아인으로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 부르군디의 루돌프 2세는 폐위되기 전에 잠시 이탈리아 국왕이었고, 그녀 자신도 남편 로타리오 2세의 사망까지 잠시 이탈리아의 왕비였다. 베렝가리오 2세는 그녀가 아들 아달베르트와 결혼하기를 거부하자 그녀를 투옥했다. 하인리히는 평화 조약을 반대할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이에른 공작으로서 그는 독일-이탈리아 국경의 북쪽 영토를 통제했다. 하인리히는 베렝가리오 2세가 폐위되면, 자신의 봉지가 알프스 남쪽 영토를 편입함으로써 크게 확장될 것이라고 희망했다. 콘라트와 하인리히는 이미 사이가 좋지 않았고, 제안된 조약은 두 공작을 더욱 멀어지게 했다. 아델하이트와 하인리히는 콘라트의 조약을 오토가 거부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함께 공모했다.
콘라트와 베렝가리오 2세는 오토를 만나기 위해 마그데부르크에 도착했지만, 접견이 허락되기까지 사흘을 기다려야 했다. 이는 오토가 자신의 섭정으로 임명했던 사람에게는 굴욕적인 모욕이었다. 아델하이트와 하인리히는 조약의 즉각적인 거부를 촉구했지만, 오토는 이 문제를 추가 논의를 위해 제국 의회에 회부했다. 952년 8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의회에 출석한 베렝가리오 2세와 그의 아들 아달베르트는 오토에게 봉신으로서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그 대가로 오토는 베렝가리오 2세에게 이탈리아를 그의 봉지로 부여하고 "이탈리아 국왕" 칭호를 복원했다. 이탈리아 국왕은 막대한 연간 조공을 지불해야 했고, 알프스 남쪽의 프리울리 공국을 할양해야 했다. 오토는 이 지역을 베로나 변경으로 재편하고, 하인리히의 충성에 대한 보상으로 그의 통제 아래 두었다. 이로써 바이에른 공국은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영지가 되었다.
3.4. 제2차 이탈리아 원정 및 황제 대관식
957년 가을 리우돌프의 죽음은 오토에게 이탈리아 국왕 베렝가리오 2세에 대항하는 원정의 후계자와 지휘관 모두를 잃게 했다. 베렝가리오 2세는 항상 반항적인 부하였고, 리우돌프와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의 죽음, 그리고 오토가 독일 북부에서 원정을 벌이는 틈을 타 958년에 오토가 952년 조약에 따라 통제권을 박탈했던 베로나 변경을 공격하고, 그곳에서 카노사의 아달베르트 아토 백작을 포위했다. 베렝가리오 2세의 군대는 또한 교황령과 교황 요한 12세 휘하의 로마 시를 공격했다. 960년 가을, 이탈리아가 정치적 혼란에 빠지자, 교황은 오토에게 베렝가리오 2세에 대항하는 도움을 요청하는 전갈을 보냈다. 밀라노 대주교, 코모 주교, 노바라 주교, 밀라노의 오베르토 변경백 등 몇몇 다른 영향력 있는 이탈리아 지도자들도 오토의 궁정에 비슷한 호소를 가지고 도착했다.
교황이 자신을 황제로 대관하는 데 동의하자, 오토는 이탈리아로 진격할 군대를 집결시켰다. 두 번째 이탈리아 원정과 황제 대관식을 준비하면서, 오토는 왕국의 미래를 계획했다. 961년 5월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오토는 여섯 살 된 아들 오토 2세를 왕위 계승자이자 공동 통치자로 지명하고, 961년 5월 26일 아헨 대성당에서 그를 대관시켰다. 오토 2세는 쾰른의 브루노 1세, 마인츠의 빌헬름, 트리어의 하인리히 1세 대주교에 의해 성유를 바쳤다. 국왕은 그의 후계자의 이름으로 칙서를 발행하기 위한 별도의 재상부를 설치했으며, 그의 동생 브루노와 사생아 빌헬름을 독일에서 오토 2세의 공동 섭정으로 임명했다.
오토의 군대는 961년 8월 트렌토의 브레너 고개를 통해 이탈리아 북부로 내려갔다. 독일 국왕은 이탈리아의 옛 롬바르드족 수도인 파비아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성탄절을 기념하고 스스로 "이탈리아 국왕" 칭호를 취했다. 베렝가리오 2세의 군대는 오토와의 전투를 피하기 위해 요새로 후퇴했고, 오토는 저항 없이 남쪽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오토는 962년 1월 31일 로마에 도착했다. 사흘 후, 그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요한 12세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대관되었다. 교황은 또한 이탈리아 원정에 오토와 동행했던 오토의 아내 이탈리아의 아델하이트를 황후로 성유를 바쳤다. 오토의 황제 대관식으로 독일 왕국과 이탈리아 왕국은 하나의 공통된 왕국으로 통합되었고, 나중에 신성 로마 제국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3.5. 교황 정치

962년 2월 12일, 오토 1세 황제와 교황 요한 12세는 로마에서 그들의 관계를 법적으로 확립하기 위한 시노드를 소집했다. 시노드에서 교황 요한 12세는 오토가 오랫동안 원했던 마그데부르크 대교구를 승인했다. 황제는 헝가리인에 대한 레흐펠트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고 지역 슬라브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대교구 설립을 계획했다. 교황은 옛 왕실 수도원인 성 마우리츠 수도원을 새 대교구의 임시 중심지로 지정하고, 독일 대주교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다음 날, 오토와 요한 12세는 『오토 특권』을 비준하여 요한 12세를 교회의 영적 수장으로, 오토를 세속적 보호자로 확인했다. 칙서에서 오토는 754년에 단신왕 피핀, 프랑크인의 왕과 교황 스테파노 2세 사이에 체결된 이전의 피핀의 기증을 인정했다. 오토는 교황령에 대한 요한 12세의 세속적 통제권을 인정했으며, 라벤나 총독부, 스폴레토 공국, 베네벤토 공국 및 몇몇 작은 소유지를 포함하여 교황의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오토는 이 영토들이 다른 이들에게 정복될 경우 군사적 지원을 제공할 의무는 없었으며, 이 확인된 주장에도 불구하고 오토는 이 추가 영토들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을 결코 양도하지 않았다. 칙서는 로마의 성직자와 백성에게 교황을 선출할 독점적 권리를 부여했다. 선출된 교황은 교황으로 확정되기 전에 황제에게 충성 서약을 해야 하는 봉건법에 기반한 합의였으며, 이는 황제가 교황에 대해 권력을 가졌고 그 반대는 아니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칙서가 서명되자, 새 황제는 이탈리아를 재정복하기 위해 베렝가리오 2세에 대항하여 진격했다. 산 레오에서 포위된 베렝가리오 2세는 963년에 항복했다. 오토의 원정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자, 요한 12세는 이탈리아에서 황제의 커지는 권력을 두려워했고, 베렝가리오 2세의 아들 아달베르트와 오토를 폐위시키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교황은 또한 헝가리인과 동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황제에 대항하는 동맹에 합류하도록 했다. 오토는 교황의 음모를 발견했고, 베렝가리오 2세를 격파하고 투옥한 후, 로마로 진격했다. 요한 12세는 로마에서 도피했고, 오토는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공의회를 소집하여 요한 12세를 교황직에서 폐위시키고, 레오 8세를 그의 후계자로 임명했다.
3.6. 로마인들의 황제 선출 결정에 대한 대응
오토는 963년 말까지 대부분의 군대를 독일로 돌려보냈으며, 이탈리아와 로마 내에서의 통치가 안전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이전의 교회 훈련을 받지 않은 평신도인 레오 8세를 교황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겼다. 964년 2월, 로마인들은 레오 8세를 도시에서 도피하도록 강요했다. 그가 부재한 동안, 레오 8세는 폐위되었고 요한 12세가 성 베드로의 좌로 복귀되었다. 964년 5월 요한 12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로마인들은 베네딕토 5세를 그의 후계자로 선출했다. 로마인들의 행동에 대한 소식을 들은 오토는 새로운 군대를 동원하여 로마로 진격했다. 964년 6월 도시를 포위한 후, 오토는 로마인들에게 자신이 임명한 레오 8세를 교황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베네딕토 5세를 추방했다.
3.7. 제3차 이탈리아 원정

오토는 965년 1월 이탈리아에서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믿고 독일로 돌아왔다. 965년 5월 20일, 동부 전선에서 오랫동안 봉사했던 황제의 부관인 변경백 게로가 사망했고, 북쪽의 빌룽 변경에서 남쪽의 보헤미아 공국까지 뻗어 있는 광대한 변경을 남겼다. 오토는 이 영토를 다섯 개의 별도 변경으로 나누어 각각 변경백이 통치하도록 했다. 노르트마르크는 할덴슬레벤의 디트리히, 작센 동부 변경은 오도 1세, 마이센 변경은 비그베르트, 메르제부르크 변경은 귄터, 차이츠 변경은 비거 1세가 통치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폐위된 이탈리아 국왕 베렝가리오 2세의 아들 아달베르트는 이탈리아 왕국에 대한 오토의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다. 오토는 그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 중 한 명인 슈바벤의 부르하르트 3세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부르하르트 3세는 965년 6월 25일 포 전투에서 아달베르트와 만나 반군을 격파하고 이탈리아를 오토 왕조의 통제하에 되돌렸다. 교황 레오 8세는 965년 3월 1일에 사망하여 성 베드로의 좌가 공석이 되었다. 교회는 오토의 승인을 받아 965년 10월 요한 13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요한 13세의 오만한 행동과 외국 지원은 곧 그를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싫어하게 만들었다. 같은 해 12월, 그는 로마 시민들에게 구금되었지만 몇 주 후 탈출할 수 있었다. 교황의 도움 요청에 따라 황제는 세 번째 이탈리아 원정을 위해 군대를 준비했다.
966년 8월 보름스에서 오토는 자신이 부재하는 동안 독일 통치에 대한 계획을 발표했다. 오토의 사생아인 마인츠 대주교 빌헬름은 독일 전역에 대한 그의 섭정 역할을 수행할 것이며, 오토의 신뢰받는 부관인 변경백 헤르만 빌룽은 작센 공국에 대한 그의 개인 행정관이 될 것이었다. 준비가 완료되자 오토는 그의 후계자를 빌헬름의 보호 아래에 두고 스트라스부르와 쿠어를 통해 이탈리아 북부로 군대를 이끌었다.
3.8. 로마에서의 통치
오토가 이탈리아에 도착하자, 요한 13세는 966년 11월 중순에 로마 시민들의 반대 없이 교황좌로 복귀되었다. 오토는 교황을 폐위하고 투옥했던 반란군 민병대의 지도자 12명을 붙잡아 교수형에 처했다. 로마에 영구 거주지를 마련한 황제는 교황과 함께 라벤나로 여행하여 967년 부활절을 기념했다. 이어진 시노드에서는 마그데부르크의 논란이 되는 지위를 기존 독일 대교구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새로운 대교구로 확정했다.
이탈리아 북부에서의 문제가 정리되자, 황제는 남쪽으로 영토를 계속 확장했다. 967년 2월부터 베네벤토 공작인 롬바르드인 판돌프 철두는 오토를 자신의 상위 군주로 받아들이고 스폴레토와 카메리노를 봉지로 받았다. 이 결정은 이탈리아 남부 공국들에 대한 주권을 주장했던 동로마 제국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동로마 제국은 또한 오토의 "황제" 칭호 사용에 반대했으며,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 비잔티움 황제만이 고대 로마 제국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믿었다.
비잔티움인들은 오토가 자신들의 영향권 내에서 확장 정책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오토와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오토는 아들이자 후계자인 오토 2세를 위한 황실 공주를 신부로 원했으며, 서방의 오토 왕조와 동방의 마케도니아 왕조 간의 연결을 통한 정당성과 위신을 원했다. 그의 왕조 계획을 더욱 발전시키고 아들의 결혼을 준비하기 위해 오토는 967년 겨울 로마로 돌아와 967년 성탄절에 교황 요한 13세에 의해 오토 2세를 공동 황제로 대관시켰다. 오토 2세는 이제 명목상의 공동 통치자였지만, 아버지의 사망 전까지는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다.
이후 몇 년 동안 두 제국은 여러 원정을 통해 이탈리아 남부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 969년, 요한 1세 치미스케스는 군사 반란으로 비잔티움 황제 니케포로스를 암살하고 계승했다. 마침내 오토의 황제 칭호를 인정한 새로운 동방 황제는 972년에 조카 테오파노를 로마로 보냈고, 그녀는 972년 4월 14일 오토 2세와 결혼했다. 이러한 화해의 일환으로 이탈리아 남부 분쟁은 마침내 해결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카푸아, 베네벤토, 살레르노 공국에 대한 오토의 지배를 받아들였고, 그 대가로 독일 황제는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의 비잔티움 영토에서 철수했다.
4. 문화
4.1. 오토 시대의 르네상스

10세기 후반에 예술과 건축의 제한적인 오토 왕조의 르네상스는 오토와 그의 직계 후계자들의 궁정 후원에 의존했다. 오토 왕조의 르네상스는 쾰른 대주교 브루노 1세의 대성당 학교와 같은 일부 부활된 대성당 학교에서, 그리고 936년 오토가 설립한 크베들린부르크 수도원과 같은 소수의 엘리트 필사실에서 시대의 주요 예술 형태인 채색 필사본 제작에서 나타났다. 이 시대의 현존하는 필사본으로는 『오토 특권』, 『테오파노 황후의 결혼 헌장』, 그리고 969년경 게로 대주교를 위해 제작된 복음서인 『게로 코덱스』가 있다. 황실 수도원과 황실 궁정은 종교적, 영적 삶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간더스하임 수도원과 크베들린부르크와 같은 명망 높은 수녀원들은 왕실 가문의 여성들이 이끌었다.
게르만어권 최초의 여성 작가, 최초의 여성 역사가,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라틴 서방에서 드라마를 쓴 최초의 인물, 그리고 최초의 독일 여성 시인인 흐로츠비타는 오토의 궁정에서 자랐으며, 그곳에서 고전 작가들의 작품을 들으며 성장했다. 성인이 된 그녀는 법률 체계, 오토 왕조의 역사, 그리고 그들의 계승 계보에 능통했다. 흐로츠비타는 이슬람과 이슬람 제국에 대해 쓴 최초의 북유럽인이었다. 그녀가 왕실 수녀원에 들어간 후, 그녀는 로마 희극과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결합한 연극을 썼다.
5. 말년 및 죽음
5.1. 독일로의 귀환 및 마지막 해
아들의 결혼이 완료되고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가 체결되자, 오토는 972년 8월 황실 가족을 이끌고 독일로 돌아왔다. 973년 봄, 황제는 작센을 방문하여 마그데부르크에서 성지주일을 기념했다. 전년도 같은 의식에서 오토가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작센의 신뢰받는 부관이자 개인 행정관이었던 변경백 헤르만 빌룽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아달베르트로부터 국왕처럼 영접받았는데, 이는 황제가 독일을 오랫동안 비운 것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
크베들린부르크에서 성대한 집회로 부활절을 기념하며, 오토 황제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었다. 메르제부르크의 티트마르에 따르면, 오토는 "미에슈코 (폴란드)와 볼레슬라프 (보헤미아) 공작들, 그리고 그리스 (비잔티움), 베네벤토 (로마), 마자르, 불가르, 덴마크, 슬라브족의 사절단"을 맞이했다. 잉글랜드와 알안달루스의 사절단은 같은 해 늦게 도착했다. 성가대를 기념하기 위해 오토는 그의 궁전이 있는 멤레벤으로 여행했는데, 그곳은 37년 전 그의 아버지가 사망했던 곳이다. 그곳에 있는 동안, 오토는 열병으로 심하게 병들었고, 병자성사를 받은 후 973년 5월 7일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5.2. 죽음

17세의 아들 오토 2세로의 권력 이양은 순조로웠다. 973년 5월 8일, 제국의 영주들은 오토 2세를 새로운 통치자로 확정했다. 오토 2세는 성대한 30일간의 장례식을 준비했고, 그의 아버지는 마그데부르크 대성당에 그의 첫 번째 아내 에드기타 옆에 안장되었다.
6. 가족 및 자녀
오토 왕조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오토의 아버지 하인리히 1세는 비록 황제는 아니었다. 오토 1세는 하인리히 1세의 아들이자 오토 2세의 아버지, 오토 3세의 할아버지, 그리고 하인리히 2세의 종조부이다. 오토 왕조는 919년부터 1024년까지 한 세기 이상 독일(후에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했다.
오토는 두 명의 아내와 최소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한 명은 사생아였다.
- 신원 미상의 슬라브 여성과의 사이에서:
- 빌헬름 (929년 - 968년 3월 2일) - 954년 12월 17일부터 사망 시까지 마인츠 대주교
- 대 에드워드 국왕의 딸인 잉글랜드의 에드기타와의 사이에서:
- 리우돌프 (930년 - 957년 9월 6일) - 950년부터 954년까지 슈바벤 공작, 947년부터 사망 시까지 오토의 예상 후계자
- 리우트가르트 (932년-953년) - 947년 로타링기아 공작 콘라트와 결혼
- 부르군디의 루돌프 2세 국왕의 딸인 이탈리아의 아델하이트와의 사이에서:
- 하인리히 (952년-954년)
- 브루노 (아마도 954년-957년)
- 마틸데 (954년-999년) - 966년부터 사망 시까지 크베들린부르크 수도원장
- 오토 2세 (955년 - 983년 12월 7일) - 973년부터 사망 시까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7. 유산 및 평가
7.1. 현대 사회
오토 1세는 2008년 오스트리아 조폐국에서 발행된 고액 기념 주화인 100 유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 기념 주화의 주요 모티프로 선정되었다. 앞면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로마의 옛 성 베드로 대성전을 배경으로 오토 1세 황제가 묘사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2001년, 2006년, 2012년에 마그데부르크에서 열린 세 차례의 전시회는 오토의 삶과 중세 유럽 역사에 미친 그의 영향을 기록했다.
7.2. 역사적 평가
오토 1세는 카롤루스 대제 이후 서유럽에 안정적인 황제 통치 체제를 재건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통치는 독일 왕국의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고, 황실 교회 체제를 통해 세속 귀족의 권력을 견제하며 왕권을 공고히 했다. 특히 955년 레흐펠트 전투에서 마자르족의 침략을 종식시킨 것은 그에게 '기독교 세계의 구원자'라는 명성을 안겨주었고, 이는 그의 황제 즉위에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그의 이탈리아 원정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하나의 제국으로 묶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비록 그의 제국이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만큼 광범위하지는 않았고, 이탈리아에 대한 통치권은 그의 사후에도 불안정했지만, 그는 중세 유럽의 정치 지형을 재편하고 새로운 제국적 이상을 제시했다.
오토의 통치 방식은 때때로 권위주의적이었으며, 그의 형제들과 아들을 포함한 귀족들의 반란을 단호하게 진압했다. 그러나 그는 반란자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다시 중요한 직책을 맡기는 등 실용적인 면모도 보였다. 이러한 정책은 왕실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시대는 또한 '오토 왕조의 르네상스'로 불리는 문화적 부흥기였다. 그는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여 대성당 학교를 발전시키고 채색 필사본 제작을 장려했다. 이는 중세 유럽의 지적, 예술적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오토 1세를 강력한 군사 지휘관이자 유능한 통치자로 인정하면서도, 그의 통치가 단순히 무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합의와 다양한 행위자들의 역할을 고려한 복합적인 과정이었음을 강조한다. 그의 업적은 10세기부터 13세기 중반까지 독일이 유럽의 주요 왕국으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는 오토 왕조가 카롤링거 왕조로부터 물려받은 행정 체계를 발전시킨 결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