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기 및 배경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는 독일의 오펜바흐암마인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며, 유서 깊은 브렌타노 가문의 일원으로서 학문적이고 정치적인 배경을 지닌 환경에서 초기 경력을 형성했다.
1.1. 출생 및 가족
브렌타노는 1904년 6월 20일 오펜바흐암마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오토 폰 브렌타노(Otto von Brentano)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중앙당 소속 정치인이자 1919년 바이마르 국민의회 의원이었다. 브렌타노 가문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역에 기원을 둔 가문으로, 17세기에 헤센-다름슈타트 방백국에 정착하여 헤센 귀족으로 인정받았다. 이 가문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프리드리히 카를 폰 사비니, 아힘 폰 아르님 등 독일 낭만주의 시대의 주요 인물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시인 클레멘스 브렌타노 (1778-1842)와 베티나 폰 아르님 (1785-1859)도 그의 친척이었다. 작가 베르나르트 폰 브렌타노 (1901-1964)는 그의 형이었으며, 다른 형인 클레멘스는 외교관으로 이탈리아 주재 대사를 지냈다.
1.2. 교육 및 초기 경력
1922년 아비투어 시험에 합격한 후,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는 뮌헨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재학 중에는 가톨릭계 학생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1925년에 1차 국가고시를, 1929년에 2차 국가고시를 통과했다. 1930년에는 기센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32년부터는 다름슈타트 고등법원에서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1943년부터 1945년까지는 하나우에서 검사로 재직했다. 1945년 이후에는 공증인 겸 변호사로 활동을 이어갔다.
2. 정치 경력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정치의 재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기독교민주연합의 핵심 인물로서 독일연방공화국의 초기 정책 방향을 설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유럽 통합과 외교 분야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다.
2.1. 기독교민주연합 창당 및 주 의회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브렌타노는 헤센주에서 독일 기독교 민주연합 (CDU)의 창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46년에는 헤센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47년부터는 CDU 주 의회 원내대표를 맡아 활동했다. 그는 1948년부터 이듬해까지 의회 점령 지위 위원회 부위원장으로도 재직했다. 또한,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의 초안을 작성하기 위한 의회 평의회에 참여하여 신생 연방 공화국의 헌법 제정 과정에 기여했다. 이후 1949년 8월, 제1회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 베르크슈트라세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그가 사망할 때까지 연방의회 의원직을 유지했다.
2.2. 연방의회 활동
연방의회에 처음 입성한 1949년부터 1955년까지, 그리고 연방 외무장관직에서 사임한 1961년부터 사망한 1964년까지, 브렌타노는 CDU/CSU 연방의회 원내대표를 역임하며 당내외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1952년 다른 CDU 의원들과 함께 다수대표제 도입을 위한 법안을 제출하기도 했으나,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2.3. 유럽 통합에서의 역할
브렌타노는 유럽 운동 독일 지부의 일원이자 유럽 공동 의회 및 유럽 평의회 의원총회의 구성원으로서 유럽 통합 과정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1950년부터 1955년까지 유럽 평의회 의원 겸 부의장을 겸임했으며, 1952년 7월부터 외무장관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유럽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특히 유럽 경제 공동체 (EEC)의 창설에 기여한 바가 크며,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의 전신인 슈만 계획의 헌법 초안을 작성하기 위한 유럽 6개국 회의에서 1952년부터 1953년까지 의장을 맡았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는 유럽 공동체의 기반을 다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4. 연방 외무장관
1955년 6월, 연합군의 점령 규정이 해제되고 서독이 외교 주권을 회복하고 북대서양 조약 기구 (NATO)에 가입한 직후,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의 추천으로 독일연방공화국 외무장관에 임명되었다. 아데나워 총리는 이전에 자신이 직접 외무장관직을 겸임하고 있었다. 브렌타노는 1955년부터 1961년까지 외무장관으로 재직하며 프랑스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반공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등 서독의 외교 정책 방향을 설정했다.
1961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 이후, 아데나워 총리가 자유민주당 (FDP)과 연립 정부를 구성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FDP는 외무부 내 차관직을 요구하며 외교 정책에 대한 관여를 시도했다. 이에 브렌타노는 1961년 10월 외무장관직에서 사임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같은 당 소속인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임명되었다.
3. 개인 생활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1948년 (일부 자료에는 1949년으로도 기록됨) 어머니가 사망할 때까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만년에는 형 클레멘스가 거주하던 이탈리아 로마에 자주 체류했다. 1961년에는 그의 동성애에 대한 소문이 돌았는데, 이에 대해 아데나워 총리는 "나에게는 아직 시도하지 않았다"고 건조하게 답변한 일화가 전해진다.
4. 사망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는 1964년 11월 14일, 60세의 나이로 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 그는 다름슈타트의 발트프리트호프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망 3일 후 독일 연방의회에서 추모 행사가 거행되었다.

5. 서훈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훈장 대십자장 (1956년)
- 그리스도 훈장 대십자장, 포르투갈 (1958년 4월 10일)
6. 유산 및 평가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민주주의를 재건하고 유럽 통합을 추진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기독교민주연합의 창당에 기여하고 독일 연방의회에서 오랜 기간 원내대표를 역임하며 신생 독일연방공화국의 정치적 안정과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연방 외무장관으로서 프랑스와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유럽 경제 공동체 창설에 기여한 것은 전후 유럽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중요한 초석을 놓았다는 점에서 그의 외교적 업적은 높이 평가된다. 또한 소련에 대한 반공주의 정책은 당시 냉전 시대의 국제 정세 속에서 서독의 안보와 서방 세계와의 연대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브렌타노는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경제의 가치를 옹호하며 독일연방공화국이 서유럽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국제 사회에 복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7. 함께 보기
- 독일 기독교 민주연합
- 콘라트 아데나워
- 유럽 통합
- 독일연방공화국 외무장관
- 독일 연방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