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피에르 푸르니에는 프랑스 육군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유년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아 피아노 연주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첼로로 전향하였고, 이는 그의 음악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파리 음악원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으며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고, 졸업 후 프랑스와 유럽 전역에서 활발한 연주 활동을 시작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피에르 푸르니에는 1906년 6월 24일 파리에서 프랑스 육군 장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조각가였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나, 9세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의 민첩성을 잃고 피아노 페달 사용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첼로로 악기를 바꾸었다. 그의 동생 장 푸르니에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그는 오데트 크레틀리에게서 초기 교육을 받았고, 1918년 12세의 나이로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앙드레 에킹에게 사사했으며, 이후 폴 바즈레에게 배웠다. 그는 파블로 카잘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1923년 17세의 나이에 파리 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하며 '미래의 첼리스트'라는 찬사를 받았고, 그의 탁월한 기교와 활 긋는 기술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졸업 후 바즈레 밑에서 추가로 기량을 연마한 뒤 1924년 파리에서 정식으로 데뷔했다. 1925년부터 1929년까지는 오데트 크레틀리의 오빠인 로베르 크레틀리가 이끄는 크레틀리 콰르텟의 멤버로 활동했다.
1.2. 국제적인 연주 활동
푸르니에는 1925년 콘세르 콜론 관현악단과 협연하며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고, 1927년에는 이 악단의 솔리스트로 초청되어 프랑스 전역과 유럽 각국에서 연주 활동을 펼쳤다. 1934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의 경력은 더욱 발전하여, 1948년 미국에 데뷔한 이래 매년 미국에서 공연을 가졌다. 뉴욕과 보스턴에서의 공연은 큰 호평을 받았다.
그는 오케스트라와의 협연뿐만 아니라 실내악에도 깊은 열정을 보였다. 1928년에는 바이올리니스트 가브리엘 부이용, 피아니스트 블라도 페를뮐테르와 함께 트리오를 결성했다. 또한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와 바이올리니스트 자크 티보와도 자주 협연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시게티, 비올라 연주자 윌리엄 프림로즈,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과 함께 콰르텟을 결성하여 1947년 제1회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연주했다. 이 콰르텟은 프란츠 슈베르트와 요하네스 브람스의 모든 실내악 작품을 연주했으며, 시게티는 이를 "최고의 음악 경험"이었다고 회고했다. 슈나벨은 1948년 푸르니에의 미국 데뷔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그의 경력 발전을 도왔다.

듀오 연주로는 피아니스트 빌헬름 케ンプ, 빌헬름 바크하우스,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프리드리히 굴다 등과 협연했다. 특히 케ンプ와는 매우 친밀한 관계였으며, 1954년 일본 연주 투어에서는 푸르니에와 별도의 투어로 일본을 방문했던 케ンプ와 합류하여 예정에 없던 특별 연주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50년대에는 알프레도 로시와 함께 남미 투어를 자주 가졌는데, 로시는 푸르니에의 개인적인 친구이자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의 초기 활동 동료였다. 또한 푸르니에는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와도 친분을 쌓아 국제 콩쿠르에서 함께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로스트로포비치의 지휘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돈 키호테』의 독주 첼로를 연주하기도 했다.
1.3. 교육 활동

푸르니에는 1937년부터 3년간 에콜 노르말 음악원에서 첼로와 실내악을 가르쳤으며, 1941년에는 파리 음악원에 초빙되었다. 그러나 바쁜 연주 활동으로 인해 1949년 파리에서의 교육 활동을 중단했다.
1956년 이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 거주하며 연주 활동의 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제네바와 취리히에서 매년 여름 강습회를 열어 피아니스트인 아들 장 폰다(본명 장-피에르)와 함께 전 세계에서 온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의 제자로는 줄리안 로이드 웨버, 로코 필리피니, 마거릿 몽크리프, 리처드 마크슨, 야스다 겐이치로, 간노 히로후미, 야마자키 노부코, 조앤 딕슨, 아마릴리스 플레밍 등이 있다.
푸르니에는 학생들에게 "벨벳처럼 부드럽고 흐르는 듯한 소리"와 "활을 쥔 팔꿈치를 활보다 높이 들 것"을 강조했다. 또한 활을 단단히 쥐면서도 손과 팔을 언제든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으며, 오타카르 셰프치크의 바이올린 연습곡이 활 긋는 기술을 완성하는 데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제자 마거릿 몽크리프는 푸르니에가 학생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지도했으며, 리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루바토의 과도한 사용을 경계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국제 콩쿠르의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57년 파리에서 열린 제1회 파블로 카잘스 국제 콩쿠르에서는 심사위원장 폴 바즈레 아래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엔리코 마이나르디, 모리스 아이젠버그, 가스파르 카사도, 밀로시 사드로, 존 바비롤리 등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카잘스 본인은 심사위원직을 사퇴했으나 모든 연주를 들었다.) 또한 1962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는 로스트로포비치가 심사위원장을 맡은 가운데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 모리스 마레샬, 가스파르 카사도, 스뱌토슬라프 크누셰비츠키, 다니일 샤프란 등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1.4. 연주 악기
푸르니에는 생애 동안 여러 첼로를 연주했다. 그는 1863년 제작된 장-밥티스트 뷔욤 첼로, 1722년 제작된 마테오 고프릴러 첼로(현재는 발렌틴 에르벤이 연주하고 있다)를 사용했다. 특히 1849년 제작된 희귀한 샤를 아돌프 모코텔 첼로는 그의 경력 마지막 18년 동안 주로 사용되었으며, 그의 모든 주요 녹음이 이 악기로 이루어졌다.
1.5. 말년과 사망
1956년 이후 푸르니에는 프랑스 시민권을 포기하지 않고 스위스 제네바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다. 그는 79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2년 전까지 대중 앞에서 연주 활동을 계속했다. 또한 제네바 자택에서 개인 레슨을 통해 후학을 지도했다. 1986년 1월 8일, 그는 현역으로 활동하던 중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1986년에는 일본에서 마지막 리사이틀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그의 사망으로 인해 취소되었다. 그의 장례는 제네바에서 치러졌다.
2. 개인적인 삶
푸르니에는 첼리스트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의 전 부인이었던 리디아 안티크와 결혼했다. 이후 말년에는 일본인 여성과 재혼했다. 그의 아들 장-피에르는 '장 폰다'라는 이름으로 피아니스트로 활동했으며, 아버지와 함께 자주 협연 무대에 올랐다.
푸르니에의 제자 중 한 명인 리처드 마크슨은 그의 성격에 대해 "매우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았으며, 자부심은 충분했지만 그것을 과도하게 드러내는 일은 결코 없었다"고 묘사하면서도 "은근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였다고 덧붙였다. 한 일화로, 푸르니에가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 중 느린 악장을 연주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정말 감동적이었다"고 말하자, 푸르니에는 "모두들 내 느린 악장을 아주 좋아한다고 하는데, 다른 악장에는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는 피아니스트 빌헬름 케ンプ,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라파엘 쿠벨리크와 친밀하게 교류했다. 또한 국제 콩쿠르에서 함께 심사위원을 맡았던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와도 깊은 친분을 유지했다.
3. 레퍼토리와 음반
푸르니에는 매우 폭넓은 레퍼토리를 자랑했다。 그는 고전파와 낭만파 작품뿐만 아니라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도 많이 연주했는데, 보후슬라프 마르티누, 오트마르 셰크, 프랜시스 풀랑크, 장 마르티농, 알베르 루셀, 에드가르 페데르 등의 작품을 연주했다. 특히 마르티누의 첼로 협주곡 1번(1930년 작곡, 1939년 및 1955년 개정)과 풀랑크의 첼로 소나타(1948년 작곡)는 그에게 헌정되었다. 에이토르 빌라로부스는 푸르니에,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가스파르 카사도를 위해 『3대의 첼로를 위한 협주곡』을 작곡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앨런 슐먼이 작곡한 『엘레지: 펠릭스 살몬드의 추억』은 1986년 5월 뉴욕에서 열린 첼로 협회 창립 3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초연되었는데, 이 곡은 그 직전에 사망한 포르투나토 아리코, 야샤 번스타인, 해리 푹스, 프랭크 밀러, 레너드 로즈, 미샤 슈나이더, 그리고 피에르 푸르니에에게 헌정되었다.
1972년에는 자신이 직접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의 연주 악보를 교정하여 미국의 인터내셔널 뮤직 사에서 출판하기도 했다.
그의 주요 음반으로는 요하네스 브람스와 프란츠 슈베르트의 모든 실내악 작품을 BBC를 위해 녹음한 것이 있으나, 이 녹음들은 더 내구성 있는 매체로 옮겨지기 전에 손상되었다. 반면 1960년 12월 하노버의 베토벤 잘에서 녹음된 바흐의 첼로 모음곡은 오늘날까지도 최고의 연주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도이치 그라모폰의 "아르히프(Archiv)" 레이블로 발매되었다. 그 외에도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와 에드워드 엘가의 첼로 협주곡 LP 음반이 있으며, 이들은 오랜 기간 CD로도 발매되어 왔다. 1962년에는 알프레드 발렌슈타인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 B단조, 작품번호 104를 녹음했다.
4. 논란과 비판
푸르니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 시기 활동으로 논란에 휩싸였다. 1949년 그의 미국 투어 중, 그가 프랑스 점령 기간 동안 독일 방송국인 Radio-Paris프랑스어에서 82회 공연을 하고 총 19.24 만 FRF를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프랑스의 "국가 정화 위원회 드라마 및 서정 예술가 및 공연 음악가 전문 지부"는 그에게 협력 혐의를 적용하여 6개월간의 공연 금지 처분을 내렸다. 이 사실이 미국에서 공개되면서 푸르니에는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또한 그의 후기 연주에 대해서는 일부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바이올리니스트 나탄 밀스타인은 푸르니에를 "훌륭한 첼리스트이지만,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에 필적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음정이나 활 긋는 기술에서 다소 약점이 보였다는 지적도 있었다.
5. 평가와 명성

피에르 푸르니에는 그의 우아한 음악성과 장엄한 소리로 인해 '첼로의 왕자' 또는 '첼리스트의 귀족'으로 칭송받았다. 그의 연주는 매우 전아하고 세밀하면서도 따뜻한 표현과 음색으로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다. 그는 작은 곡에서부터 큰 곡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소화하며 뛰어난 실내악 연주자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의 첼로 연주자였던 율리우스 베키는 "장-루이 뒤포르에서 시작된 프랑스 첼로 예술은 피에르 푸르니에에 의해 완전한 명인 기교의 경지로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같은 프랑스 출신의 첼리스트인 폴 토르틀리에와는 친한 라이벌 관계였다고 전해진다. 토르틀리에의 연주회 후 푸르니에가 "폴, 자네의 왼손이 나에게 있었으면 좋겠네"라고 말하자, 토르틀리에는 "피에르, 자네의 오른손이 나에게 있었으면 좋겠네"라고 응수했다는 일화가 있다.
6. 수상 및 영예
피에르 푸르니에는 그의 뛰어난 음악적 업적을 인정받아 여러 권위 있는 상과 영예를 얻었다.
- 그랑프리 뒤 디스크 (Grand Prix du Disque):
- 1955년 녹음된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 음반 (지휘: 라파엘 쿠벨리크)
- 그래미상 최우수 실내악 연주 부문 (Grammy Award for Best Chamber Music Performance):
- 1976년: 프란츠 슈베르트의 『피아노 트리오 1번 B플랫장조, 작품번호 99』 및 『2번 E플랫장조, 작품번호 100』 (협연: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헨리크 셰링)
- 1975년: 요하네스 브람스의 『트리오 전곡』 / 로베르트 슈만의 『트리오 1번 D단조』 (협연: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헨리크 셰링)
- 레지옹 도뇌르 훈장 (Legion of Honour):
- 1963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수여되었다.
7. 유산과 영향력
피에르 푸르니에는 첼로 연주사에 지대한 유산을 남겼다. 특히 그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녹음은 오늘날까지도 이 작품의 최고 해석 중 하나로 꼽히며, 수많은 첼리스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그의 연주는 우아함과 깊이, 그리고 완벽한 기교의 조화를 보여주며 프랑스 첼로 악파의 정수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교육 활동 또한 중요한 유산이다. 파리 음악원과 에콜 노르말 음악원, 그리고 제네바에서의 마스터클래스를 통해 그는 줄리안 로이드 웨버, 로코 필리피니 등 여러 뛰어난 첼리스트들을 길러냈다. 그의 교육 철학은 단순히 기술적인 면을 넘어 음악적 표현과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이는 제자들의 음악 세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푸르니에는 첼로 연주의 예술적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렸으며, 그의 음악적 공헌은 후대 첼리스트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8. 관련 항목
- 첼로
- 파리 음악원
- 앙드레 에킹
- 폴 바즈레
- 소아마비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 안토닌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
- 요하네스 브람스 (실내악)
- 프란츠 슈베르트 (실내악)
- 루트비히 판 베토벤 (첼로 소나타)
- 에드워드 엘가 (첼로 협주곡)
- 보후슬라프 마르티누 (첼로 협주곡)
- 프랜시스 풀랑크 (첼로 소나타)
- 알프레드 코르토
- 자크 티보
- 요제프 시게티
- 윌리엄 프림로즈
- 아르투르 슈나벨
- 빌헬름 케ンプ
-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 헨리크 셰링
-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제2차 세계 대전
- 나치 독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