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반 및 교육
프리드리히 안톤 빌헬름 미쿠엘은 학문적 길을 걷기 전부터 의학 교육을 받으며 다양한 초기 직업을 경험했다.
1.1. 출생과 배경
미쿠엘은 1811년 10월 24일 당시 네덜란드 국경에서 약 5 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노이엔하우스(Neuenhaus)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라틴어에 능통한 물리학자였으며, 미쿠엘 본인도 네덜란드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여 정부 기관에서 일할 수 있었다.
1.2. 교육과 초기 경력
미쿠엘은 흐로닝언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1833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에는 암스테르담의 보위트카스테르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1835년부터는 로테르담의 임상 학교에서 의학을 가르쳤으며, 1838년에는 왕립 연구소(훗날 네덜란드 왕립 예술 과학 아카데미로 발전)의 통신원이 되었고, 1846년에는 정식 회원이 되었다.
2. 학술 및 전문 경력
미쿠엘은 여러 대학에서 교수직을 역임하고 주요 기관의 책임자로서 네덜란드 식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2.1. 교수 활동
그는 1846년부터 1859년까지 암스테르담 대학교에서 식물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이후 1859년부터 1871년 사망할 때까지 위트레흐트 대학교에서 식물학 교수로 활동했다. 동시에 로테르담(1835년~1846년), 암스테르담(1846년~1859년), 위트레흐트(1859년~1871년)의 식물원을 이끌었다.
2.2. 기관장 및 학회 활동
1862년부터는 레이던에 있는 네덜란드 국립 식물 표본실(Rijksherbarium)의 관장을 맡아 운영을 책임졌다. 또한 1866년에는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며 국제적으로도 학술적 역량을 인정받았다.
3. 주요 연구 및 기여
미쿠엘의 연구는 주로 식물 분류학에 집중되었으며, 특히 열대 지역의 식물상 연구와 고식물학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3.1. 열대 식물상 연구
미쿠엘은 네덜란드 제국의 식물상, 특히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수리남의 식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수행했다. 비록 그 자신이 멀리까지 식물 채집 여행을 떠난 적은 없었지만, 광범위한 서신 교환을 통해 오스트레일리아와 인도 지역의 방대한 식물 표본들을 접하고 연구할 수 있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카수아리나과, 도금양과, 후추과, 마디풀과와 같은 중요한 식물 과에 속하는 수많은 종과 속을 기술했다. 총 7,000여 개의 식물 학명을 발표하며 식물 분류학 분야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3.2. 고식물학 및 지질학적 기여
미쿠엘은 독일의 식물학자 하인리히 괴페르트(Heinrich Göppert)와의 협력을 통해 화석 식물을 연구하는 고식물학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특히 화석 소철류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또한, 그는 야코프 기스베르튀스 사무엘 판 브레다(Jacob Gijsbertus Samuël van Breda), 피터 하르팅(Pieter Harting), 위난트 스타링(Winand Staring)과 함께 요한 루돌프 토르베케(Johan Rudolph Thorbecke)에 의해 1852년에 출판된 네덜란드 최초의 지질도 제작 위원회의 일원이기도 했다.
4. 주요 저작
미쿠엘은 활발한 연구 활동과 함께 수많은 중요한 식물학 저작을 출판했다.
- Genera Cactearum, Rotterdam, 1839
- Monographia Cycadearum, Utrecht, 1842
- Systema Piperacearum, Rotterdam, 1843-1844
- Illustrationes Piperacearum, Bonn, 1847
- Cycadeae quaedam Americanae, partim novae., Amsterdam, 1851
- Flora Indiae batavae, Amsterdam, 1855-1859
- Leerboek der Artensij-Gewassen, Utrecht, 1859
- De Palmis Archipelagi Indici observationes novae., Amsterdam, 1868
- Annales Musei botanici lugduno-batavi. iii vols., Amsterdam, 1865-1869
5. 유산과 기념
미쿠엘은 사후에도 그의 업적과 이름을 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되고 있다.
5.1. 사망과 후임
미쿠엘은 1871년 1월 23일, 59세의 나이로 위트레흐트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망 후 네덜란드 국립 식물 표본실 관장직은 빌럼 프레데릭 레이니어 쉬링아르(Willem Frederik Reinier Suringar)가 승계했다.
5.2. 지속적인 영향과 영예
미쿠엘의 유산에서 비롯된 '미쿠엘 기금'(Miquel fund)이 설립되어 위트레흐트 대학교의 식물학자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위트레흐트 시내 중심부에 있는 식물원장의 옛 거주지는 '미쿠엘 하우스'라고 불리며, 헤이그의 라크크바르티어(Laakkwartier) 지구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그의 학문적 공헌을 기리기 위해 여러 식물 분류군의 학명에 그의 이름이 사용되었다. 1838년 식물학자 칼 마이스너(Carl Meissner)는 이크카시나과 식물 속인 Miquelia를 명명했는데, 이 식물은 열대 인도, 동남아시아, 필리핀 지역에서 발견된다. 또한, 1980년 식물학자 알베르토 보이테흐 프리치(Fric)와 F. 리터(F.Ritter)는 남아메리카 원산의 선인장 속인 Miqueliopuntia를 명명하기도 했다. 식물 학명 명명자 부분에 사용되는 약어 'Miq.'는 미쿠엘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