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프레벤 엘케어 라르센Preben Elkjær Larsen프레벤 엘케어 라르센덴마크어 (1957년 9월 11일 출생)은 덴마크 출신의 전 축구 선수이자 지도자로, 현역 시절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다. 그는 1980년대 가장 뛰어난 공격수 중 한 명으로 널리 평가받으며, 덴마크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엘케어는 이탈리아의 헬라스 베로나 FC에서 선수 경력의 절정기를 보냈으며, 레알 마드리드나 AC 밀란과의 치열한 영입 경쟁 끝에 베로나로 이적했다. 그는 1985년 세리에 A 우승을 이끌며 구단 역사상 유일한 메이저 타이틀을 안겨주었다. 또한, 11년간 덴마크 국가대표팀에서 38골을 기록하며, 제프 피온텍 감독이 이끄는 덴마크 황금세대의 핵심 선수로 UEFA 유로 1984와 덴마크의 첫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이었던 1986년 FIFA 월드컵에서 맹활약했다. 특히 1986년 월드컵에서는 브론즈볼을 수상하며 대회 3위 선수로 인정받았다.
그는 1984년 발롱도르 시상식에서 3위를 차지한 데 이어, 1985년에는 2위, 1986년에는 4위를 기록하는 등 꾸준히 세계 최고 수준의 기량을 선보였다. 베로나에서는 그의 활약을 기리며 "시장"이라는 뜻의 '일 신다코(Il sindaco이탈리아어)'라는 애칭으로 불렸고, 오늘날까지도 일부 베로나 시민들은 시장 선거 투표용지에 그의 이름을 기재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코펜하겐에서는 1986년 월드컵 예선 통과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예수님이 내일 돌아오시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라는 종교적인 그래피티가 벽에 그려지자, 누군가 밤사이에 '그럼 우리는 엘케어를 측면으로 이동시킬 것이다'라고 답변을 추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덴마크 국민들 사이에서 큰 사랑을 받는 스포츠 스타였다.
2. 초기 생애 및 경력 시작
2.1. 유소년 및 초기 활동
프레벤 엘케어 라르센은 1957년 9월 11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소년 시절 프레데릭스보아 BK에서 축구를 시작하며 재능을 키웠다. 이후 1976년, 반뢰세 IF에 입단하며 성인 무대에 데뷔했다. 반뢰세 IF에서는 한 시즌 동안 15경기에 출전하여 7골을 기록하며 자신의 득점력을 선보였다.
3. 클럽 경력
엘케어는 자신의 경력 동안 여러 유럽 리그의 주요 클럽에서 활약하며 인상적인 기록을 남겼다.
3.1. 독일 및 벨기에 리그
반뢰세 IF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엘케어는 1977년 당시 유럽 최고의 클럽 중 하나였던 독일 분데스리가의 1. FC 쾰른으로 이적하며 해외 무대에 진출했다. 그는 쾰른에서 1978년 DFB-포칼 우승을 경험했으나, 정규 리그에서는 9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그는 특히 오쿠데라 야스히코와의 주전 경쟁으로 인해 팀의 주축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그는 팀의 헤네스 바이스바일러 감독이나 독일 클럽 특유의 엄격하고 규율적인 분위기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바이스바일러 감독이 엘케어에게 이른 아침에 나이트클럽에서 위스키 한 병과 함께 여인과 시간을 보냈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사실 여부를 묻자, 엘케어는 그것은 거짓말이고 실제로는 보드카 한 병과 두 명의 여인이었다고 답했다는 일화는 덴마크에서 전설적인 이야기로 회자된다. DFB-포칼 결승전에서는 단 9분만을 뛰었을 정도로 그의 쾰른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결국 그는 1978년 2월, 벨기에의 KSC 로케런으로 이적했다. 로케런에서 엘케어는 선수 경력 중 가장 긴 6년을 보냈으며, 이곳에서 '로케런의 보스(Chefen fra Lokeren덴마크어)'와 '로케런의 미친 남자(Den Gale Mand fra Lokeren덴마크어)'라는 두 가지 별명을 얻었다. 그는 로케런 소속으로 공식 경기에서 100골 이상을 기록했고, 벨기에 1부 리그에서만 98골을 넣으며 주포로 활약했다.
3.2. 헬라스 베로나에서의 전성기
1984년 여름, 27세의 엘케어는 이탈리아 세리에 A의 헬라스 베로나 FC로 이적했다. 그는 이적 당시 구단 역사상 가장 비싼 영입 선수였다. 그는 유벤투스 FC와의 경기에서 보여준 역사적인 장면으로 유명하다. 당시 그는 왼쪽 측면을 돌파하던 중 태클로 인해 오른쪽 축구 부츠가 벗겨졌음에도 불구하고, 부츠 없이도 공을 계속 몰고 가서 슈팅을 성공시켰다. 이 골은 그의 커리어를 대표하는 가장 인상적인 득점 중 하나로, 그는 이로 인해 '신데렐라'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엘케어는 헬라스 베로나에서 이적 첫 시즌인 1984-85 세리에 A에서 한스-페터 브리겔과 같은 동료들과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세리에 A 우승(스쿠데토)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984년에는 발롱도르 투표에서 3위에 올랐고, 1985년에는 미셸 플라티니에 이어 2위를 차지하는 등 유럽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올랐다. 베로나에서 4년간 활약하며 그는 한 시즌에 리그 10골을 넘긴 적은 없었지만, 매 시즌 7골 미만으로 득점한 적도 없었으며, 총 48골을 기록했다.
3.3. 덴마크 리그 복귀 및 선수 은퇴
1988년, 엘케어는 베이레 BK에 입단하며 덴마크 축구 무대로 복귀했다. 그는 당시 덴마크 축구계의 가장 큰 스타였기에 그의 복귀는 많은 관중을 경기장으로 불러 모았다. 하지만 31세의 나이에 베이레 BK에서 수많은 부상에 시달렸고, 대중의 높은 기대에 부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그는 2년 뒤인 1990년에 현역에서 은퇴했으며, 베이레 BK에서는 총 26경기에 출전하는 데 그쳤다.
4. 국가대표 경력
엘케어는 유소년 국가대표팀에서부터 성인 국가대표팀에 이르기까지 덴마크 대표팀의 주요 선수로 활약하며 여러 국제대회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4.1. 유소년 국가대표팀
유소년 시절 프레데릭스보아 BK에서 뛰던 엘케어는 1975년 10월, 덴마크 19세 이하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그는 1975년 UEFA 유럽 19세 이하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3골을 포함해 19세 이하 대표팀에서 총 11경기에 출전해 6골을 기록했다.
1976년 6월에는 덴마크 21세 이하 국가대표팀에 데뷔하여 9경기에서 9골을 넣는 뛰어난 득점력을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1978년 UEFA 유럽 21세 이하 축구 선수권 대회 8강 불가리아전에서 기록한 3골이 포함되지만, 덴마크는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아쉽게 탈락했다.
4.2. 성인 국가대표팀
1977년 6월 22일, 만 19세 284일의 나이로 성인 국가대표팀에 데뷔한 엘케어는 핀란드와의 경기에서 2-1 승리를 이끄는 두 골을 모두 기록하며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UEFA 유로 1984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4경기에서 2골을 기록했고, 이는 이탈리아 리그로 이적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덴마크는 매력적인 공격 축구를 선보였지만, 스페인에 승부차기로 패하며 아쉽게 준결승에서 탈락했다. 엘케어는 덴마크의 마지막 승부차기 시도를 실축하며 공을 골대 위로 높이 날려 보냈다.
엘케어는 덴마크의 사상 첫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이었던 1986년 FIFA 월드컵에도 출전했다. 덴마크는 조 1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했지만, 또 다시 스페인에게 패하여 탈락했다. 엘케어는 이 대회에서 4골을 기록했는데, 우루과이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는 대회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강력한 스트라이커로 평가받았으며, 브론즈볼을 수상하며 대회 3위 선수로 인정받았다.
UEFA 유로 1988은 엘케어의 마지막 국가대표팀 국제대회 출전이었다. 1988년 6월 14일, 그는 만 30세 277일의 나이에 서독과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이 경기에서 덴마크는 0-2로 패하며 조별 리그 3패로 대회를 마쳤다. 그는 총 69번의 국제 경기에 출전하여 38골을 기록했다.
프레벤 엘케어 라르센의 국가대표팀 득점 목록
No. | 날짜 | 장소 | 상대 | 스코어 | 결과 | 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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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977년 6월 22일 | 헬싱키 올림픽 스타디움, 헬싱키, 핀란드 | 핀란드 | 1-0 | 2-1 | 1972-77 북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
2 | 2-0 | |||||
3 | 1978년 5월 31일 | 울레볼 스타디움, 오슬로, 노르웨이 | 노르웨이 | 2-1 | 2-1 | 1978-80 북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
4 | 1979년 6월 6일 | 쾨벤하운 이드레츠파르크, 코펜하겐, 덴마크 | 북아일랜드 | 1-0 | 4-0 | UEFA 유로 1980 예선 |
5 | 2-0 | |||||
6 | 4-0 | |||||
7 | 1979년 9월 26일 | 이드레츠파르크, 코펜하겐, 덴마크 | 핀란드 | 1-0 | 1-0 | 1978-80 북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
8 | 1979년 11월 14일 | 에스타디오 라몬 데 카란사, 카디스, 스페인 | 스페인 | 1-0 | 3-1 | 친선 경기 |
9 | 3-1 | |||||
10 | 1980년 6월 4일 | 이드레츠파르크, 코펜하겐, 덴마크 | 노르웨이 | 3-1 | 3-1 | 1978-80 북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
11 | 1980년 11월 19일 | 이드레츠파르크, 코펜하겐, 덴마크 | 룩셈부르크 | 3-0 | 4-0 | 1982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
12 | 1981년 5월 1일 | 시립 경기장, 룩셈부르크 시, 룩셈부르크 | 룩셈부르크 | 1-1 | 2-1 | 1982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
13 | 1981년 5월 14일 | 말뫼 스타디온, 말뫼, 스웨덴 | 스웨덴 | 2-0 | 2-1 | 1981-85 북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
14 | 1981년 9월 9일 | 이드레츠파르크, 코펜하겐, 덴마크 | 유고슬라비아 | 1-1 | 1-2 | 1982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
15 | 1981년 9월 23일 | 이드레츠파르크, 코펜하겐, 덴마크 | 노르웨이 | 1-0 | 2-1 | 친선 경기 |
16 | 1981년 10월 14일 | 하릴라오 그라운드, 테살로니키, 그리스 | 그리스 | 3-1 | 3-2 | 1982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
17 | 1982년 5월 27일 | 이드레츠파르크, 코펜하겐, 덴마크 | 벨기에 | 1-0 | 1-0 | 친선 경기 |
18 | 1983년 6월 1일 | 이드레츠파르크, 코펜하겐, 덴마크 | 헝가리 | 1-0 | 3-1 | UEFA 유로 1984 예선 |
19 | 1983년 10월 12일 | 이드레츠파르크, 코펜하겐, 덴마크 | 룩셈부르크 | 3-0 | 6-0 | UEFA 유로 1984 예선 |
20 | 4-0 | |||||
21 | 1983년 11월 16일 | 아테네 올림픽 스타디움, 아테네, 그리스 | 그리스 | 1-0 | 2-0 | UEFA 유로 1984 예선 |
22 | 1984년 6월 6일 | 울레비, 예테보리, 스웨덴 | 스웨덴 | 1-0 | 1-0 | 친선 경기 |
23 | 1984년 6월 16일 | 스타드 드 제를랑, 리옹, 프랑스 | 유고슬라비아 | 4-0 | 5-0 | UEFA 유로 1984 |
24 | 1984년 6월 19일 | 스타드 드 라 마이노, 스트라스부르, 프랑스 | 벨기에 | 3-2 | 3-2 | UEFA 유로 1984 |
25 | 1984년 9월 26일 | 이드레츠파르크, 코펜하겐, 덴마크 | 노르웨이 | 1-0 | 1-0 | 1986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
26 | 1984년 11월 14일 | 이드레츠파르크, 코펜하겐, 덴마크 | 아일랜드 공화국 | 1-0 | 3-0 | 1986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
27 | 2-0 | |||||
28 | 1985년 6월 5일 | 이드레츠파르크, 코펜하겐, 덴마크 | 소련 | 1-0 | 4-2 | 1986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
29 | 2-0 | |||||
30 | 1985년 10월 16일 | 울레볼 스타디움, 오슬로, 노르웨이 | 노르웨이 | 3-1 | 5-1 | 1986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
31 | 1985년 11월 13일 | 랜즈다운 로드, 더블린, 아일랜드 공화국 | 아일랜드 공화국 | 1-1 | 4-1 | 1986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
32 | 4-1 | |||||
33 | 1986년 5월 16일 | 이드레츠파르크, 코펜하겐, 덴마크 | 폴란드 | 1-0 | 1-0 | 친선 경기 |
34 | 1986년 6월 4일 | 에스타디오 네사 86, 네사왈코요틀, 멕시코 | 스코틀랜드 | 1-0 | 1-0 | 1986년 FIFA 월드컵 |
35 | 1986년 6월 8일 | 에스타디오 네사 86, 네사왈코요틀, 멕시코 | 우루과이 | 1-0 | 6-1 | 1986년 FIFA 월드컵 |
36 | 4-1 | |||||
37 | 5-1 | |||||
38 | 1987년 10월 14일 | 이드레츠파르크, 코펜하겐, 덴마크 | 웨일스 | 1-0 | 1-0 | UEFA 유로 1988 예선 |
5. 플레이 스타일 및 개성
엘케어는 덴마크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악명 높은 흡연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지칠 줄 모르는 바위 같은 투지로 특징지어졌다. 그는 공을 잃더라도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었으며, 때로는 이러한 집념이 득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피지컬적인 경합과 뛰어난 드리블 능력이 혼합된 비정통적인 방식이었다. "강력하고 역동적"이라고 묘사된 엘케어는 단독으로 돌파할 때 거의 막을 수 없는 선수였으며, 이는 그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였다. 그의 저돌성은 소수의 선수만이 필적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골을 등지고 공을 받을 때면 즉시 몸을 돌려 골문으로 향하려 시도했다.
엘케어의 저돌적인 플레이 스타일은 미카엘 라우드루프의 침착함과 넓은 시야와 잘 어우러져 국가대표팀에서 시너지를 냈다. 두 선수는 1986년 월드컵에서 "가장 효과적인" 공격 듀오로 평가받았다. 헬라스 베로나에서 엘케어는 세리에 A에서 특정 역할에 얽매이지 않는 몇 안 되는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득점 외에는 오스발도 바뇰리 감독으로부터 거의 전적인 자유를 부여받았다.
엘케어는 선수 생활 동안 여러 별명으로 불렸다. 벨기에 KSC 로케런 시절에는 '로케런의 보스(Chefen fra Lokeren덴마크어)'와 '로케런의 미친 남자(Den Gale Mand fra Lokeren덴마크어)'로 불렸다. 그의 자서전 제목이기도 한 굴케어Guldkjær덴마크어 (황금 엘케어)'와 몰케어Målkjær덴마크어 (골 엘케어)'는 덴마크에서 그를 부르던 애칭이었다. 헬라스 베로나 FC 시절에는 도시 시장처럼 영향력이 크다는 의미에서 '일 신다코(Il sindaco이탈리아어)'로 불렸으며, 유벤투스 FC전에서 한쪽 신발이 벗겨진 채 골을 넣은 뒤 '신데렐라'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그의 굴강한 체격과 저돌적인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야규野牛일본어 (들소)' 또는 '크레이지 호스'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자서전인 '굴케어'를 저술했는데, 이 책에서는 주로 헬라스 베로나에서의 생활을 회상한다. 엘케어는 여러 대의 차를 소유했으며, 그중 한 대는 포르쉐였다. 이 차량은 그가 헬라스 베로나의 세리에 A 우승에 기여한 것에 대한 식당 종업원의 감사의 선물로 받았다. 그의 과속 운전 습관은 유명했으며, 한스-페터 브리겔은 엘케어와 드라이브 후 "살아남아 다행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984년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덴마크가 준결승에 진출한 후, 덴마크 문화부 장관 미미 스틸링 야콥센은 엘케어에게 리셉션에서 춤을 청했고, 그는 흔쾌히 응하기도 했다.
6. 은퇴 이후 활동
선수 생활 은퇴 후, 엘케어는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덴마크 수페르리가 소속의 실케보르 IF에서 감독으로 활동했다. 1996년 12월, 그는 구단을 떠나 새로운 TV 스포츠 채널인 'TVS'의 수장을 맡았다. 이 채널은 덴마크 국영 방송국인 DR과 TV2, 덴마크 축구 협회, 그리고 통신사 TDC A/S 간의 합작 법인이었다. 그러나 TVS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개국 1년 만에 폐쇄되었다.
이후 그는 UEFA 챔피언스리그의 해설가로 활동하며 덴마크 TV3+에서 미카엘 라우드루프와 피터 그뢴보르그와 함께 출연했다. 2019년 10월에는 벨기에에서 담석 제거 수술을 받기도 했다.
7. 평가 및 유산
7.1. 긍정적 평가 및 기여
프레벤 엘케어 라르센은 1980년대를 풍미한 가장 뛰어난 공격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히며, 덴마크 축구의 '황금 세대'를 이끈 핵심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헬라스 베로나 FC에 구단 역사상 유일한 세리에 A 우승 타이틀을 안겨주며 축구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강렬하고 독특한 플레이 스타일은 많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경기장에서 보여준 지치지 않는 투지와 저돌적인 돌파는 현대 축구에서도 높이 평가받는 자질이다. 특히 미카엘 라우드루프와의 공격 조합은 1986년 월드컵에서 가장 효율적인 파트너십으로 꼽힐 정도로 시너지를 창출했다.
엘케어는 단순히 뛰어난 선수에 그치지 않고, 그라운드 밖에서도 특유의 개성과 자유분방함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베로나에서 '일 신다코(시장)'라는 애칭을 얻으며 도시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고, 덴마크에서는 그의 이름을 이용한 그래피티가 등장할 정도로 전국적인 사랑을 받았다. 이러한 인기는 그가 덴마크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고, 월드사커 (잡지)에서 선정한 '20세기 위대한 축구선수 100인'에 이름을 올린 것으로도 입증된다. 그의 성공과 대중적 인기는 덴마크 축구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후대 선수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7.2. 비판 및 논란
프레벤 엘케어 라르센은 자유분방하고 개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몇 가지 일화들이 회자되는데, 이는 그를 비판한다기보다는 그의 독특한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로 더 많이 인식된다. 예를 들어, 1. FC 쾰른 시절 헤네스 바이스바일러 감독과의 불화는 그가 클럽의 엄격한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성향을 드러냈다. 감독이 그에게 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여인과 함께 밤을 보냈다는 소문에 대해 묻자, 그가 실제로는 보드카 한 병과 두 명의 여인과 함께 있었다고 답한 일화는 그의 솔직하고 엉뚱한 면모를 보여준다.
또한, 1984년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준결승 스페인전에서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와 공을 골대 위로 실축한 것은 아쉬운 장면으로 남았다. 그의 흡연 습관과 과속 운전(일부에서 '크레이지 호스'라는 별명을 부여할 정도)은 프로 선수로서 다소 부적절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이러한 면모들이 오히려 그의 예측 불가능하고 매력적인 개성을 부각시키는 요소로 작용하며 대중적 인기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그의 플레이 스타일과 마찬가지로 틀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삶의 방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8. 수상 및 명예
프레벤 엘케어 라르센은 선수와 감독으로서 다양한 클럽 및 개인 타이틀을 획득하며 그의 뛰어난 경력을 증명했다.
8.1. 클럽 수상
- 1. FC 쾰른
- 분데스리가: 1977-78
- DFB-포칼: 1976-77, 1977-78
- 헬라스 베로나 FC
- 세리에 A: 1984-85
8.2. 개인 수상
- 덴마크 올해의 축구 선수: 1984
- 발롱도르:
- 1984년 3위
- 1985년 2위
- 1986년 4위
- 1987년 21위
- 옹즈 드 브론즈: 1984
- 옹즈 다르장: 1985
- FIFA 월드컵 브론즈볼: 1986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86
- 덴마크 축구 명예의 전당
- 월드사커 (잡지) '20세기 위대한 축구 선수 100인' 선정 (98위)
9. 헌정 및 기념
프레벤 엘케어 라르센은 그의 업적과 독특한 개성으로 인해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되고 헌정되고 있다. 특히 이탈리아 베로나에서는 그가 헬라스 베로나 FC에 역사적인 세리에 A 우승을 안겨준 공로로 "시장"이라는 뜻의 '일 신다코(Il sindaco이탈리아어)'라는 애칭을 얻었다. 이 애칭은 단순히 별명에 그치지 않고, 현재까지도 일부 베로나 시민들은 시장 선거 투표용지에 실제 후보자 이름 대신 '프레벤 엘케어'라고 기재하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이는 그가 베로나 시민들에게 얼마나 깊은 애정과 존경을 받고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이다.
또한, 덴마크에서는 그의 인기와 영향력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진다. 1986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을 기념하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코펜하겐의 한 벽에 '예수님이 내일 돌아오시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라는 종교적인 내용의 그래피티가 그려졌다. 그런데 밤사이에 누군가 그 아래에 '그럼 우리는 엘케어를 측면으로 이동시킬 것이다'라고 답을 추가하여, 그의 존재감과 축구 실력이 종교적인 상징에 견줄 만큼 중요하게 여겨졌음을 시사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엘케어가 단순한 스포츠 선수를 넘어 덴마크와 이탈리아 양국 문화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