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Accession
프랑수아 1세는 1494년 9월 12일 프랑스의 샤렝트주에 위치한 코냑 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앙굴렘 백작 샤를 도를레앙과 사보이의 루이즈였으며, 그는 프랑스의 샤를 5세의 고손자이다.
1.1. Birth and Family Background
프랑수아는 오를레앙 가문의 일원으로, 그의 아버지는 앙굴렘 백작 샤를 도를레앙이었고 어머니는 사보이의 루이즈였다. 그는 부모의 둘째 아이이자 외동아들이었다. 그의 가족은 처음에는 왕위 계승 서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의 3촌인 프랑스의 샤를 8세는 그의 출생 당시 젊었고, 그의 아버지의 사촌인 오를레앙 공작이자 훗날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되는 인물 역시 젊었다.
1.2. Childhood and Education
프랑수아 1세는 어린 시절부터 인문주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라틴어 교사인 프랑수아 드 물랭 드 로슈포르와 크리스토프 드 롱게유와 같은 가정교사들은 그에게 새로운 사상을 가르치고 영향을 주려 했다. 그는 산술, 지리, 문법, 역사, 읽기, 쓰기, 철자법을 교육받았으며,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스페인어에 능숙했다. 그는 또한 기사도, 춤, 음악을 배웠고, 양궁, 매사냥, 승마, 사냥, 마상창시합, 진정한 테니스, 레슬링을 즐겼다. 말년에는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예술, 문학, 시, 과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비록 그는 엄격한 인문주의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전의 어떤 프랑스 왕보다도 인문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3. Path to the Throne
1498년 샤를 8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그의 사촌이자 장인이었던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루이 12세 또한 아들이 없었고, 살리카 법에 따라 여성의 왕위 계승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4살의 프랑수아 (이미 2년 전 아버지의 사망으로 앙굴렘 백작이 되었음)는 1498년에 프랑스 왕위의 왕위 계승 추정자가 되었고 발루아 공작 칭호를 받았다.
1505년, 병에 걸린 루이 12세는 그의 딸 프랑스의 클로드와 프랑수아를 즉시 결혼시키도록 지시했으나, 귀족 회의를 통해서야 두 사람은 약혼할 수 있었다. 클로드는 어머니인 브르타뉴의 안을 통해 브르타뉴 공국의 추정 상속녀였다. 1514년 안이 사망한 후, 1514년 5월 18일에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1515년 1월 1일, 루이 12세가 사망하자 프랑수아는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1515년 1월 25일 랭스 대성당에서 프랑스 국왕으로 대관식을 치렀고, 클로드는 그의 왕비가 되었다.
2. Reign and Major Policies
프랑수아 1세의 통치는 문화, 군사, 국내 및 종교 정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과 도전을 특징으로 한다.
2.1. Cultural Patronage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르네상스를 활짝 꽃피우고 예술가와 지식인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인물로 평가된다.
2.1.1. Promotion of French Renaissance

프랑수아 1세는 르네상스가 프랑스에 상륙한 1515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열렬한 예술 후원자가 되었다. 즉위 당시 프랑스 왕궁에는 위대한 그림 몇 점과 고대 또는 현대 조각상 하나도 없었지만, 그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후원하여 프랑스를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는 안드레아 델 사르토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많은 이탈리아 예술가들을 프랑스로 초청했다. 특히 다 빈치는 프랑스에서 말년을 보냈으며, 그의 대표작인 모나리자를 포함한 많은 작품들이 프랑스에 남게 되었다. 프랑수아는 로모랑탱에 거대한 성을 짓고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만들자는 다 빈치의 제안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다 빈치는 프랑스에서 운하도를 설계하는 등 다양한 연구를 정리하다가 1519년 5월 2일 프랑스에서 사망하여 생 플로랑탱 교회에 묻혔다.

그 외에도 금세공인 벤베누토 첼리니, 화가 로소 피오렌티노, 줄리오 로마노, 프리마티초 등 수많은 주요 예술가들이 프랑수아의 후원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프랑수아의 여러 궁전을 장식하는 데 고용되었다. 건축가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 또한 초청되어 프랑스에서 성공적인 말년을 보냈다. 프랑수아는 또한 이탈리아에 여러 중개인들을 두어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라파엘로와 같은 거장들의 주목할 만한 예술 작품들을 구매하고 프랑스로 운송하도록 지시했다.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프랑스 왕실의 품격 있는 예술품 컬렉션은 상당 부분 프랑수아 1세의 통치 기간에 수집된 것이다.
2.1.2. Architectural and Artistic Projects

프랑수아 1세는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그는 선대 왕들이 시작한 앙부아즈 성 작업을 이어갔고, 블루아 성의 개보수도 시작했다. 치세 초반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 양식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어쩌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설계했을지도 모르는 웅장한 샹보르 성의 건설을 시작했다.
그는 루브르 궁전을 재건축하여 중세의 요새였던 건물을 르네상스 양식의 화려한 궁전으로 탈바꿈시켰다. 또한 파리의 새로운 시청인 파리 시청의 건물 설계를 관리하기 위해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마드리드 성을 건축하고 생제르맹 성을 재건축했다. 프랑수아의 건축 프로젝트 중 가장 큰 것은 퐁텐블로 궁전의 재건축과 확장으로, 이곳은 그의 공식적인 애첩인 에탕프 공작부인 안의 거주지이자 그가 가장 좋아하는 거주지가 되었다. 프랑수아의 계획에 따라 궁전의 내외부는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예를 들어 퐁텐블로 궁전의 안뜰에는 와인이 물과 섞여 분출되는 분수도 있었다.
2.1.3. Development of Royal Library and Letters
프랑수아 1세는 '문학의 아버지이자 복원자'(le Père et Restaurateur des Lettres르 페르 에 레스토라퇴르 데 레트르프랑스어)로 불릴 정도로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당대 주요 작가들을 후원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왕실 도서관 확장에 매우 힘썼다. 그는 프랑스의 위대한 인문학자 기욤 뷔데를 수석 사서로 임명하고 소장품을 늘리기 시작했다. 프랑수아는 이탈리아에 대리인들을 고용하여 희귀 서적과 필사본을 찾아 구입하도록 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왕실 도서관의 규모는 엄청나게 커졌다. 그는 단순히 도서관을 확장하는 것을 넘어, 자신이 구입한 책들을 직접 읽었다는 증거도 남아있는데, 이는 왕실 기록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프랑수아는 전 세계 학자들에게 자신의 도서관을 개방하여 지식의 확산을 촉진하는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1537년, 프랑수아는 모든 프랑스 내 서적의 사본 한 부를 왕실 도서관에 제출하도록 하는 몽펠리에 칙령에 서명했다. 그의 누이인 나바라의 왕비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 또한 뛰어난 작가였으며, 고전 단편 소설집인 《엡타메롱》을 저술했다. 프랑수아는 수녀원장이자 철학자인 클로드 드 벡토즈와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그의 서신을 매우 좋아하여 항상 지니고 다니며 궁정의 여성들에게 보여주곤 했다. 그는 누이와 함께 타라스콩에 있는 벡토즈를 방문하기도 했다.
2.2. Military and Diplomatic Activities
프랑수아 1세의 통치는 주요 전쟁과 복잡한 외교 관계로 점철되어 있었다.
2.2.1. Italian Wars and Major Conflicts

프랑수아 1세의 통치 기간은 1494년부터 1559년까지 이어진 이탈리아 전쟁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전임 왕들로부터 이 전쟁을 이어받았고, 그의 후계자인 프랑스의 앙리 2세도 이 전쟁을 물려받게 되었다. 이탈리아 전쟁은 밀라노 공국이 나폴리 왕국의 침략에 맞서 프랑스의 샤를 8세에게 보호를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프랑수아는 1515년 9월 13일부터 15일까지 마리냐노 전투에서 교황령과 구스위스 연방의 연합군을 격파하며 이탈리아의 밀라노 공국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 승리는 그의 군사적 성공 중 가장 돋보이는 업적이었지만, 이것이 유일한 대승리였다. 그러나 1521년 11월, 1521년-1526년 이탈리아 전쟁 중 밀라노 공국 내의 반란과 신성 로마 제국 군의 진격에 직면하여 밀라노를 포기해야만 했다.
가장 치명적인 패배는 1525년 2월 24일의 파비아 전투였다. 그는 전장에서 지휘하다가 체사레 헤르콜라니가 그의 말을 쓰러뜨린 후 디에고 다빌라, 알론소 피타 다 베이가, 후안 데 우르비에타에게 생포되었다. 이로 인해 헤르콜라니는 "파비아 전투의 승리자"로 불렸다. 전투 후 포로가 된 왕에게 먹이기 위해 Zuppa alla Pavese주파 알라 파베세이탈리아어가 즉석에서 발명되었다고 전해진다. 프랑수아는 마드리드에 억류되었고, 어머니에게 "내게 남은 것은 명예와 생명뿐이며, 그것마저 안전하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는 "All is lost save honour올 이즈 로스트 세이브 오너영어"라는 유명한 구절로 전해진다.
프랑수아는 마드리드 조약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았는데, 이에 따라 나폴리와 밀라노에 대한 모든 주권을 포기하고, 1477년 부르고뉴 공작 샤를의 사망 이후 프랑스령이 되었던 부르고뉴 공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 또한 카를 5세의 누이인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레와 약혼해야 했다. 1526년 3월 17일 풀려난 프랑수아는 프랑스로 돌아오자마자 조약이 강요에 의해 체결된 것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하며 파기했다. 그의 아들들이 볼모로 잡혀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말만으로는 신뢰할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며 조약을 단호히 거부했다. 잉글랜드와의 새로운 동맹은 그가 마드리드 조약을 파기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2.2.2. Rivalry with Holy Roman Emperor Charles V

프랑수아 1세 치세의 군사 활동 대부분은 그의 숙적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의 대립에 집중되었다. 프랑수아와 카를은 강렬한 개인적 경쟁 관계를 유지했다. 카를은 신성 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스페인, 오스트리아, 그리고 프랑스 국경에 인접한 여러 소규모 영토를 직접 통치하고 있었으므로, 프랑수아의 왕국에 끊임없는 위협이 되었다. 카를은 심지어 프랑수아에게 수차례 결투를 신청하며 도발하기도 했다.
프랑수아는 15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에서 황제 자리를 차지하려 했으나, 카를 5세가 선제후들을 무력으로 위협하는 등 방해 공작으로 인해 실패했다. 1520년 6월 7일, 프랑수아는 영국의 헨리 8세와 금란의 들판에서 유명한 회담을 통해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호화로운 2주간의 외교에도 불구하고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프랑수아와 헨리 8세는 모두 권력과 기사도적 영광의 꿈을 공유했지만, 그들의 관계는 강렬한 개인적, 왕조적 경쟁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프랑수아는 다른 강대국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라노를 탈환하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고, 헨리 8세 역시 프랑스 북부를 탈환하려 했기에 프랑수아는 이를 허용할 수 없었다. 당시 프랑스는 샤를 3세 드 부르봉의 배신으로 내부적 적대감까지 직면하고 있었다. 샤를 3세 드 부르봉은 마리냐노 전투에서 프랑수아와 함께 싸웠던 유능한 사령관이었지만, 부르봉 공작령 상속 문제로 프랑수아의 어머니와 갈등을 겪은 후 카를 5세에게 망명했다.
1520년대 중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탈리아를 외세 지배, 특히 카를 5세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자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어 코냑 동맹을 결성했다. 프랑수아는 1526년 5월 이 동맹에 가입하여 코냑 동맹 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프랑수아의 동맹국들은 약했으며, 전쟁은 1529년 캉브레 조약("귀부인의 평화", 프랑수아의 어머니와 카를 5세의 이모가 협상)으로 종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프랑수아의 두 아들은 풀려났고, 프랑수아는 엘레오노레와 결혼했다.
코냑 동맹의 실패 이후, 프랑수아는 1534년 1월 27일 헤센 방백 필리프 1세와 비밀 동맹을 맺었다. 이는 카를 5세가 1519년 뷔르템베르크 공작 울리히를 축출한 그의 전통적 영지를 되찾는 것을 돕는다는 명분 하에 카를 5세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오스만 제국의 도움을 받았고, 밀라노의 통치자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의 사망 후 1536년-1538년 이탈리아 전쟁에서 이탈리아 영토 분쟁을 재개했다. 이 전투는 큰 결과 없이 니스 휴전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합의가 무너지면서 프랑수아는 1542년-1546년 이탈리아 전쟁에서 이탈리아를 차지하려는 마지막 시도를 했다.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와 헨리 8세의 군대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으며, 카를 5세는 재정적 어려움과 슈말칼덴 동맹과의 갈등으로 인해 크레피 조약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2.2.3. Alliances and International Relations

프랑수아 1세는 당대 유럽의 복잡한 정치 지형 속에서 다양한 동맹과 외교 활동을 펼쳤다. 특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 가문 헤게모니에 맞서기 위해 잉글랜드와 오스만 제국 등 다른 강대국들과의 동맹을 모색했다.
프랑수아 1세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의 동맹을 원했다. 1520년 6월 7일, 금란의 들판에서 열린 회담에서 두 왕은 호화로운 외교를 펼쳤지만, 끝내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는 두 사람 모두 권력과 기사도적 영광에 대한 꿈을 가졌지만, 밀라노 탈환을 열망하는 프랑수아와 프랑스 북부 탈환을 노리는 헨리 8세 사이의 깊은 개인적, 왕조적 경쟁 때문이었다.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에 대항할 동맹을 찾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의 협력을 모색하여 프랑스-오스만 동맹을 맺는 역사적 전환점을 만들었다. 이는 기독교 군주에게는 매우 논란이 많은 행보였으며, "불경한 동맹" 또는 "프랑스 백합과 오스만 초승달의 신성모독적 결합"으로 불리기도 했다. 프랑수아는 오스만 제국 내 기독교인의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 목표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이 동맹은 기독교 제국과 비기독교 제국 간 최초의 비이념적 외교 동맹으로 평가받는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동맹은 양측의 객관적인 이익에 부합했기 때문에 수년간 지속되었다. 두 세력은 카를 5세에 대항하여 공모했으며, 1543년에는 니스 공성전에서 합동 해군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 동맹은 오스만 제국이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를 침공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533년 프랑수아 1세는 피에르 드 피통 대령을 모로코에 대사로 파견하여 공식적인 프랑스-모로코 관계를 시작했다. 1533년 8월 13일자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낸 서한에서 페스의 와타시드 왕조 통치자 아메드 벤 모하메드는 프랑스의 제안을 환영하며 프랑스 상인들에게 운송의 자유와 보호를 허가했다.
2.3. Overseas Exploration and Colonialism
프랑수아 1세는 교황 식스토 4세의 칙서와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인한 신대륙 분할에 불만을 표하며,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 제국 세력에 맞서기 위해 신대륙과 아시아와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아메리카와 극동으로 탐험대가 파견되었으며, 르아브르와 같은 새로운 항구 도시가 건설되어 해외 탐험의 기반을 마련했다.
현재 르아브르로 알려진 항구 도시는 프랑수아 통치 초창기인 1517년에 설립되었다. 고대 항구인 옹플뢰르와 아르플뢰르의 효용성이 토사 퇴적으로 인해 감소하면서 새로운 항구 건설이 시급히 필요했다. 르아브르는 처음에는 이를 설립한 왕의 이름을 따서 '프랑시스코폴리스'라고 명명되었으나, 이 이름은 후대에는 이어지지 않았다.
2.3.1. Americas

1524년 프랑수아 1세는 리옹 시민들이 조반니 다 베라차노의 북미 탐험을 후원하는 것을 도왔다. 이 탐험에서 베라차노는 현재의 뉴욕시 지역을 방문하여 '신앙굴렘'이라고 명명했으며, 뉴펀들랜드를 프랑스 왕실의 소유로 주장했다. 1524년 7월 8일 베라차노가 프랑수아에게 보낸 편지는 《셀레르 코덱스》로 알려져 있다.
1531년 베르트랑 도르네상은 브라질의 페르남부쿠에 프랑스 교역소를 설립하려 시도했다.
1534년 프랑수아는 자크 카르티에를 파견하여 퀘벡의 세인트로렌스강을 탐험하고 "막대한 양의 금과 다른 재물이 있다고 전해지는 특정 섬과 땅"을 찾도록 지시했다. 1541년에는 장-프랑수아 드 로베르발을 파견하여 캐나다에 정착하고 "성스러운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도록 했다. 자크 카르티에는 4차례에 걸쳐 북미 대륙을 탐험했지만 혹독한 추위와 괴질로 인해 많은 선원들이 희생되었고,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해 이후 60년간 북미 탐험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의 탐험은 훗날 1604년 사뮈엘 드 샹플랭이 북미를 다시 탐험하고 퀘벡시를 건설하여 프랑스가 캐나다를 식민 통치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2.3.2. Asia

프랑스의 동아시아 무역은 프랑수아 1세 통치 기간 동안 선주 장 앙고의 도움으로 시작되었다. 1527년 7월, 포르투갈의 주앙 드 바루스의 기록에 따르면 루앙 출신의 노르망디 상선이 인도의 디우에 도착했다. 1529년에는 장 파르망티에가 사크르 호와 팡세 호를 타고 수마트라섬에 도달했다. 이 원정의 귀환은 디에프 지도의 발전을 촉발시켰으며, 디에프 출신 지도 제작자 장 로츠의 작업에 영향을 미쳤다.
2.3.3. Ottoman Empire
프랑수아 1세의 통치 아래 프랑스는 유럽에서 최초로 오스만 제국과 공식적인 관계를 수립하고, 기욤 포스텔의 지도 하에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아랍어 교육을 시작했다.
유럽 외교의 전환점에서 프랑수아는 오스만 제국과 프랑스-오스만 동맹을 발전시키는 이해 관계를 형성했다. 프랑수아의 목표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할 동맹을 찾는 것이었다. 프랑수아가 내세운 명분은 오스만 제국 내 기독교인의 보호였다. 이 동맹은 "기독교 제국과 비기독교 제국 간 최초의 비이념적 외교 동맹"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 동맹은 기독교 세계에서 상당한 스캔들을 일으켰으며, "불경한 동맹" 또는 "프랑스 백합과 오스만 초승달의 신성모독적 결합"으로 지칭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양측의 객관적인 이익에 부합했기 때문에 수년간 지속되었다. 두 강대국은 카를 5세에 대항하여 공모했으며, 1543년에는 니스 공성전에서 합동 해군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1533년 프랑수아 1세는 피에르 드 피통 대령을 모로코에 대사로 파견하여 공식적인 프랑스-모로코 관계를 시작했다. 1533년 8월 13일자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낸 서한에서 페스의 와타시드 왕조 통치자 아메드 벤 모하메드는 프랑스의 제안을 환영하며 프랑스 상인들에게 운송의 자유와 보호를 허가했다.
2.4. Domestic Reforms and Language Policy

프랑수아 1세는 라틴어가 지식의 언어로서 독점하는 것을 근절하기 위한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1530년 그는 프랑스어를 왕국의 국어로 선언했으며, 같은 해 인문학자 기욤 뷔데의 추천에 따라 콜레주 데 트루아 랑그, 즉 콜레주 드 프랑스를 설립했다. 이 콜레주에서 학생들은 고대 그리스어, 히브리어, 아람어를 공부할 수 있었고, 1539년부터는 기욤 포스텔의 지도 아래 아랍어도 배울 수 있었다.
1539년, 그는 빌레르 코트레 성에서 빌레르 코트레 칙령으로 알려진 중요한 칙령에 서명했다. 이 칙령은 다른 개혁들 중에서도 라틴어 대신 프랑스어를 왕국의 행정 언어로 지정했다. 이 칙령은 또한 사제들에게 출생, 결혼, 사망을 등록하고 모든 교구에 호적 등기소를 설립하도록 요구했는데, 이는 유럽에서 혈족 관계를 포함한 인구 통계 기록의 시초가 되었다.
또한 프랑수아 1세의 치세에는 의회의 지원 없이도 자금을 쉽게 조달하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이는 연금형 장기 국채를 국왕의 직할 재산과 징세권으로 담보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담보는 인수 간사인 파리시청과 리옹 은행 시단에 이양되었고, 이 담보의 수익이 우선적으로 변제에 충당되었다. 당시 국왕의 신용이 좋지 않아 실제로 발행된 국채의 연이율은 10%를 밑돌지 않았다. 군사적으로는 스페인의 테르시오와 로마군에서 영감을 받아 1534년 7월 24일 칙령을 내려 각 6,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7개 보병 군단을 창설했다. 이 중 42,000명 중 12,000명은 화승총수였으며, 이는 화약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 군대는 국가 상비군으로, 모든 병사는 공석이 생기면 진급할 수 있었고, 계급에 따라 임금을 받았으며, 타유를 비롯한 세금에서 최대 20 수까지 면제받았는데, 이는 국가 예산에 큰 부담이었다.
2.5. Religious Policies and Conflicts

프랑수아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서유럽 기독교 내부의 분열은 지속적인 국제적 균열을 야기했다. 마르틴 루터의 설교와 저술은 종교 개혁을 촉발시켰고, 이는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초기에는 프랑수아 1세가 새로운 프로테스탄티즘 운동에 비교적 관대했다. 1523년 플라스 모베르에서 몇몇 이단자들을 화형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랑하는 누이 나바라의 마르그리트의 영향을 받았다. 마르그리트는 루터의 신학에 진심으로 매료되어 있었다. 프랑수아는 이 운동이 그의 적 카를 5세에 대항하여 많은 독일 제후들을 돌아서게 하는 정치적 이득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1534년 10월 17일 밤에 일어난 "벽보 사건" 이후 프랑수아의 개신교에 대한 태도는 악화되었다. 개신교도들은 파리와 다른 주요 도시의 거리 곳곳에 가톨릭 미사를 비난하는 벽보를 붙였고, 심지어 왕의 침실 문에까지 붙였다. 이 벽보는 개신교 목사 앙투안 마르코르트가 작성한 것이었다. 이 벽보의 주장에 격분한 열렬한 가톨릭 신자들은 분노했으며, 프랑수아 자신도 이 운동을 자신에 대한 음모로 간주하고 추종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개신교도들은 투옥되고 처형되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마을 전체가 파괴되기도 했다. 파리에서는 1540년 이후 에티엔 돌레와 같은 이단자들이 고문당하고 화형당했다. 인쇄술은 검열되었고, 장 칼뱅과 같은 주요 개신교 개혁가들은 망명을 강요당했다. 이 박해로 인해 수천 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집을 잃었다.
개신교 박해는 프랑수아가 발표한 1540년 퐁텐블로 칙령에서 법적으로 명문화되었다. 1545년에는 프랑수아가 역사적인 전(前)루터교 그룹 중 하나인 발도파를 근절하라고 명령하면서 메랭돌 학살과 같은 대규모 폭력 행위가 계속되었다.
3. Personal Life
프랑수아 1세의 개인적인 삶은 두 번의 결혼과 여러 애인 관계를 특징으로 한다.
3.1. Marriages and Children
1514년 5월 18일, 프랑수아는 그의 2촌이자 루이 12세와 브르타뉴의 안 공작부인의 딸인 프랑스의 클로드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7명의 자녀가 있었다.
- 루이즈 (1515년 8월 19일 - 1518년 9월 21일): 어린 나이에 사망했으며, 태어날 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약혼했다.
- 샤를로트 (1516년 10월 23일 - 1524년 9월 8일): 어린 나이에 사망했으며, 1518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카를 5세와 약혼했다.
- 프랑수아 (1518년 2월 28일 - 1536년 8월 10일): 어머니 클로드의 뒤를 이어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으나, 18세에 미혼으로 자녀 없이 사망했다.
- 앙리 2세 (1519년 3월 31일 - 1559년 7월 10일): 아버지 프랑수아 1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이 되었고, 형 프랑수아의 뒤를 이어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마들렌 (1520년 8월 10일 - 1537년 7월 2일):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와 결혼했으나 자녀 없이 사망했다.
- 샤를 (1522년 1월 22일 - 1545년 9월 9일): 미혼으로 자녀 없이 사망했다.
- 마르그리트 (1523년 6월 5일 - 1574년 9월 14일): 사보이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1530년 7월 4일, 프랑수아 1세는 포르투갈의 왕비(미망인)이자 카를 5세 황제의 누이인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레와 두 번째로 결혼했다. 이 부부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3.2. Mistresses and Other Relationships
프랑수아 1세는 재위 기간 동안 두 명의 공식적인 왕의 정부를 두었는데, 그는 프랑스 왕으로는 처음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애첩에게 '공식적인 왕의 정부'(maîtresse-en-titre메트레스 앙 티트르프랑스어)라는 칭호를 부여한 인물이다. 첫 번째는 샤토브리앙 백작부인 프랑수아즈 드 푸아였다. 1526년, 그녀는 금발의 교양 있는 에탕프 공작부인 안 드 피슬뢰 데일리로 대체되었다. 클로드 왕비가 2년 전에 사망한 후, 안은 이전의 애첩보다 훨씬 더 많은 궁정 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영국의 헨리 8세의 애인이자 훗날 헨리의 아내가 될 앤 불린의 언니인 메리 불린도 그의 초기 애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자케트 드 랑삭과의 사이에서 서자 루이 드 생젤레 (1512/1513년-1593년)를 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루이 드 생젤레는 잔 드 라 로슈-앙드리와 결혼한 후 가브리엘 드 로슈슈아르와 재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4. Death
프랑수아 1세는 1547년 3월 31일,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프랑스의 앙리 2세의 28번째 생일에 랑부이예 성에서 사망했다. 그는 "자신이 처음에는 신의 선물로 여겼던 왕관의 무게에 대해 불평하며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첫 번째 아내인 브르타뉴 공작부인 클로드와 함께 생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앙리 2세가 왕위에 올랐다.
프랑수아 1세와 그의 아내, 어머니의 무덤은 다른 프랑스 왕들과 왕실 가족의 무덤과 함께 프랑스 혁명이 한창이던 공포 정치 시기인 1793년 10월 20일에 훼손되었다.
5. Legacy and Historical Assessment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역사상 중요한 인물로 남아 있으며, 그의 통치는 후대에 다양한 영향과 평가를 남겼다.
5.1. Image and Reputation

프랑스에서 프랑수아 1세는 다소 부정적인 평판을 가지고 있는데, 그의 500주년인 1994년에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대중적, 학술적 역사 기억은 그가 지은 수많은 아름다운 성들, 그의 예술 컬렉션, 학자들과 예술가들에 대한 그의 호화로운 후원 등을 무시하고 있다. 그는 파비아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가 되어 프랑스의 명예를 실추시킨 플레이보이로 여겨진다. 역사가 쥘 미슐레가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프랑수아 1세의 개인적인 상징은 도롱뇽이었고, 그의 라틴어 좌우명은 Nutrisco et extinguo누트리스코 에트 엑스팅고라틴어 ("나는 (좋은 것을) 키우고 (나쁜 것을) 없앤다")였다. 그의 긴 코 때문에 그는 '긴 코의 프랑수아'(François du Grand Nez프랑수아 뒤 그랑 네프랑스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구어적으로는 '그랑 콜라'(Grand Colas그랑 콜라프랑스어) 또는 '봉옴 콜라'(Bonhomme Colas봉옴 콜라프랑스어)라고도 불렸다. 전투에 직접 참여한 그의 개인적인 성향 때문에 그는 '기사 왕'(le Roi-Chevalier르 루아 슈발리에프랑스어) 또는 '전사 왕'(le Roi-Guerrier르 루아 게리에르프랑스어)으로도 알려졌다.
영국의 역사가 글렌 리처드슨은 프랑수아 1세를 성공적인 군주로 평가한다. 그는 "프랑수아 1세는 통치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나라를 다스린 왕이었다. 그는 위대한 전사 왕으로서의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데 전쟁과 높은 국제적 위상의 중요성을 알았다. 전투에서는 용감했으나, 다소 성급하여 승리와 재앙을 모두 초래했다. 국내적으로 프랑수아는 왕실 특권의 정신과 문자를 최대한 행사했다. 그는 이익 집단과 세금 및 다른 문제들에 대해 강하게 협상했으며, 종종 전혀 협상하지 않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그렇게 했다. 그는 왕실 권력을 강화하고 의사 결정을 긴밀한 개인 집행부에 집중시켰지만, 넓은 범위의 관직, 선물,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인 카리스마를 활용하여 그의 통치에 의존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선택적인 개인적 친밀감을 구축했다. ...프랑수아 치하에서 프랑스 궁정은 16세기 동안 그 위신과 국제적 영향력의 정점에 있었다. 그의 사망 이후 수세기 동안 평가는 상당히 다양했지만, 프랑스와 그 르네상스에 대한 그의 문화적 유산은 엄청났으며, 이는 그를 가장 위대한 왕들 중 한 명으로 평가받게 할 것이다."라고 평했다.
5.2. Positive Evaluations and Achievements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의 첫 번째 르네상스형 군주로 평가되며, 그의 치세에 프랑스는 거대한 문화적 진보를 이룩했다. 그는 특히 예술과 학문의 열렬한 후원자로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많은 이탈리아 예술가들을 프랑스로 초청하여 프랑스 르네상스를 활짝 꽃피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왕실 도서관을 확장하고 콜레주 드 프랑스를 설립하여 히브리어, 고대 그리스어, 아랍어 등 인문학 연구를 장려함으로써 '문학의 아버지이자 복원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또한 그는 빌레르 코트레 칙령을 통해 프랑스어를 왕국의 공용어로 지정하고, 출생, 결혼, 사망 기록을 의무화하여 근대적인 행정 시스템의 기반을 다졌다. 군사적으로는 마리냐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밀라노 공국을 점령하는 등 초반에는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자크 카르티에의 북미 탐험을 지원하여 프랑스 식민제국의 초석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중앙집권적 국가의 기반을 다져 절대왕정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5.3. Criticisms and Controversies
프랑수아 1세의 통치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여러 비판과 논란을 야기했다. 가장 큰 비판 중 하나는 그의 이탈리아 전쟁 정책의 실패이다. 초기 마리냐노 전투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파비아 전투에서 대패하여 포로가 되었고, 이는 프랑스의 국제적 명예를 실추시켰다. 이탈리아를 둘러싼 카를 5세와의 지속적인 전쟁은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며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고, 결국 이탈리아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그의 과도한 궁전 건축과 예술 후원 역시 국가 재정 악화의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또한 그의 종교 정책은 심각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초기에는 개신교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보였으나, 1534년 벽보 사건 이후 급격히 태도를 바꿔 개신교 박해를 주도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개신교도들이 투옥되거나 처형되었고, 메랭돌 학살과 같은 잔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인쇄술 검열과 장 칼뱅 같은 개혁가들의 망명은 프랑스 내 종교적 자유를 억압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 종교적 탄압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수천 명의 사망자와 수만 명의 이재민을 발생시켰다.
6. In Popular Culture
프랑수아 1세는 문학, 오페라, 영화 등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 속에서 묘사되었다.
패니 켐블의 1832년 희곡 《프랑수아 1세》는 그의 연애 행각에서 영감을 받았다. 빅토르 위고의 1832년 희곡 《왕은 즐긴다》(Le Roi s'amuse르 루아 사무즈프랑스어)는 프랑수아 1세의 광대 트리불레를 주인공으로 하여 왕에 의해 딸이 능욕당하자 복수를 꾀하는 비극을 그린다. 이 작품은 1832년 11월 22일 초연되었으나, 당시 특권층의 부패와 비판적 내용으로 인해 바로 다음 날 상연 금지되었고, 1882년까지 다시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이 희곡은 훗날 주세페 베르디의 1851년 오페라 《리골레토》에 영감을 주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서문에서는 화자가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 사이의 경쟁에 대해 쓴 책을 언급한다.
프랑수아 1세는 조르주 멜리에스의 단편 영화 《프랑수아 1세와 트리불레》(1907년)에서 익명의 배우가 연기했으며, 이 배우는 멜리에스 자신일 가능성이 있다. 이후 여러 배우들이 그를 연기했는데, 클로드 가리 (1910년), 윌리엄 파월 (1922년), 에메 시몬-지라르 (1937년), 사샤 귀트리 (1937년), 제라르 우리 (1953년), 장 마레 (1955년), 페드로 아르멘다리스 (1956년), 클로드 티트르 (1962년), 베르나르 피에르 도나디유 (1990년), 티모시 웨스트 (1998년), 에마뉘엘 르콩트 (2007년-2010년), 알폰소 바사베 (2015년-2016년), 콜름 미니 (2022년) 등이 그를 연기했다.
7. Ancestry
프랑수아 1세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프랑수아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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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프랑수아 1세 |
2 | 샤를 도를레앙, 앙굴렘 백작 |
3 | 사보이의 루이즈 |
4 | 장 도를레앙, 앙굴렘 백작 |
5 | 로앙의 마르그리트 |
6 | 사보이아 공작 필리포 2세 |
7 | 부르봉의 마르그리트 |
8 | 루이 1세 도를레앙 공작 |
9 | 발렌티나 비스콘티 |
10 | 알랑 9세 드 로앙 |
11 | 브르타뉴의 마르그리트 |
12 | 사보이 공작 루이 |
13 | 키프로스의 안 |
14 | 부르봉 공작 샤를 1세 |
15 | 부르봉 공작부인 아녜스 드 부르고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