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진 웹스터는 어린 시절부터 강한 모계 중심의 활동적인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이는 그녀의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1. 어린 시절과 가족 배경
앨리스 제인 챈들러 웹스터는 1876년 7월 24일 뉴욕주 프레도니아에서 애니 모펫 웹스터와 찰스 루터 웹스터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가 모두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았던 강한 모계 중심의 활동적인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의 증조할머니는 금주 운동에, 할머니는 인종 평등과 여성 참정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앨리스가 다섯 살 때, 가족은 뉴욕의 큰 갈색 돌집으로 이사했고 롱아일랜드에 여름 별장도 소유하고 있었다. 이는 그녀의 아버지 찰스 루터 웹스터가 마크 트웨인의 사업 관리자이자 출판사 찰스 L. 웹스터 앤 컴퍼니의 성공적인 운영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판사는 점차 어려움을 겪었고, 마크 트웨인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결국 1888년, 그녀의 아버지는 건강 문제로 휴직했고 가족은 프레도니아로 돌아왔다. 그는 1891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자살했다.
1.2. 마크 트웨인과의 관계
진 웹스터의 어머니 애니 모펫 웹스터는 유명한 작가 마크 트웨인의 조카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찰스 루터 웹스터는 1884년에 설립된 찰스 L. 웹스터 앤 컴퍼니를 통해 마크 트웨인의 사업 관리자이자 그의 많은 책을 출판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가족적, 직업적 연관성은 웹스터가 문학적 환경에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지만, 아버지의 출판 사업이 어려움을 겪고 마크 트웨인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가족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기도 했다.
2. 교육
진 웹스터는 초기 교육 기관에서 학업적 기반을 다지고, 바사르 칼리지에서 사회 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을 키우며 작가로서의 시야를 넓혔다.
2.1. 초기 교육
앨리스는 프레도니아 사범학교에 다녔으며 1894년 도자 회화(china painting)를 전공하여 졸업했다. 1894년부터 1896년까지 그녀는 뉴욕주 빙엄턴의 레이디 제인 그레이 학교에 기숙생으로 다녔다. 이 학교는 약 20명의 여학생들에게 학업, 음악, 미술, 편지 쓰기, 발음, 예절 등을 가르쳤다. 레이디 제인 그레이 학교는 웹스터의 소설 《패티의 대학 시절》(Just Patty)에 등장하는 학교의 배경, 방 이름(스카이 팔러, 파라다이스 앨리), 교복, 학생들의 일과표 및 교사 등 많은 세부 사항에 영감을 주었다.
이 학교에서 앨리스는 '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당시 그녀의 룸메이트도 앨리스였기 때문에 학교 측에서 다른 이름을 사용해달라고 요청했고, 그녀는 자신의 중간 이름인 '제인'의 변형인 '진'을 선택했다. 진은 1896년 6월에 이 학교를 졸업하고 프레도니아 사범학교의 대학 과정에 1년간 복귀했다.
2.2. 대학 시절 (바사르 칼리지)
1897년, 웹스터는 바사르 칼리지에 1901년 졸업반의 일원으로 입학했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그녀의 작품 세계와 사회적 관심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2.1. 학업 및 사회적 관심사
웹스터는 바사르 칼리지에서 영어영문학과 경제학을 전공했다. 그녀는 복지 및 형벌 개혁 강좌를 수강하면서 사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학업의 일환으로 그녀는 "비행 및 빈곤 아동"을 위한 시설들을 방문했다. 또한 뉴욕의 빈곤 지역 사회를 돕는 칼리지 세틀먼트 하우스 활동에 참여했으며, 이러한 관심은 평생 동안 지속되었다. 바사르에서의 경험은 그녀의 소설 《패티의 대학 시절》과 《키다리 아저씨》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2.2.2. 친구들과의 교류 및 학내 활동
웹스터는 훗날 시인이 되는 아델라이드 크랩시와 깊은 우정을 쌓았으며, 크랩시가 1914년 사망할 때까지 그 우정을 유지했다. 그녀는 크랩시와 함께 글쓰기, 연극, 정치 등 다양한 교외 활동에 참여했다. 여성에게 아직 투표권이 없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웹스터와 크랩시는 19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주의 후보 유진 V. 데브스를 지지했다.
그녀는 교내 문학 잡지인 《바사르 미셀러니》에 단편 소설을 기고했으며, 2학년 영어 수업의 일환으로 포킵시의 지역 신문인 《포킵시 선데이 쿠리어》에 바사르 소식과 이야기를 담은 주간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웹스터는 스스로 "영어에 능숙하다"고 평했지만, 그녀의 철자는 매우 기이했다고 전해진다. 한 교사가 철자 오류에 대해 출처를 묻자, 그녀는 동명의 사전을 빗대어 "웹스터"라고 답했다는 일화도 있다.
2.2.3. 여행 및 초기 문학 활동
웹스터는 3학년 때 한 학기 동안 유럽에서 시간을 보내며 프랑스와 영국을 방문했고, 특히 이탈리아를 주된 목적지로 삼아 로마, 나폴리, 베네치아, 피렌체 등을 여행했다. 그녀는 두 명의 바사르 동료 학생들과 함께 여행했으며, 파리에서는 평생 친구가 될 미국인 에셀린 맥키니와 레나 와인스타인을 만났다.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웹스터는 졸업 논문인 "이탈리아의 빈곤주의"를 위한 자료를 조사했다. 또한 《포킵시 선데이 쿠리어》에 자신의 여행에 대한 칼럼을 썼고, 1901년 《바사르 미셀러니》에 발표된 단편 소설 "빌라 지아니니"의 소재를 수집했다. 그녀는 나중에 이 단편을 확장하여 소설 《밀 공주》(The Wheat Princess)를 집필했다. 4학년 때 바사르로 돌아온 그녀는 학급 연감의 문학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1901년 6월에 졸업했다.
3. 문학 활동
진 웹스터는 대학 시절부터 글쓰기를 시작하여 여성의 삶과 사회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작품들을 발표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3.1. 데뷔작 및 초기 작품
프레도니아로 돌아온 웹스터는 1903년 3월에 출간된 첫 소설 《패티의 대학 시절》(When Patty Went to College)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 여성 대학 생활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냈으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주인공 패티 와이어트는 밝고 유쾌하며 침착한 젊은 여성으로, 순응하기를 싫어한다. 이 책은 그녀의 대학 4학년 시절 캠퍼스에서의 많은 모험을 묘사한다. 패티는 캠퍼스 생활을 즐기며 장난을 치고 자신과 친구들을 즐겁게 하는 데 에너지를 쏟는다. 영리한 젊은 여성인 그녀는 필요한 만큼만 공부하기 위해 창의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패티는 대의를 믿고 약자를 옹호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시험에서 세 과목을 낙제하면 집으로 보내질 것이라고 믿는 향수병에 걸린 신입생 올리비아 코플랜드를 돕기 위해 애쓴다. 책의 마지막에서 패티는 대학 졸업 후의 삶이 어떠할지 숙고한다. 그녀는 예배를 빼먹고 주교를 만난다. 주교와의 대화에서 패티는 어린 시절의 무책임하고 회피적인 태도가 성인으로서의 성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깨닫고 더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웹스터는 단편 소설들을 쓰기 시작했으며, 이 작품들은 나중에 《피터의 문제》(Much Ado About Peter)로 묶여 출간되었다. 1903년에서 1904년 겨울 동안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팔레스트리나의 한 수녀원에서 6주간 머물면서 《밀 공주》를 집필했고, 이 작품은 1905년에 출판되었다.
이후 몇 년 동안 웹스터는 다시 이탈리아를 여행했으며, 에셀린 맥키니, 레나 와인스타인 등과 함께 이집트, 인도, 미얀마,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홍콩, 중국, 일본을 포함한 8개월간의 세계 일주를 했다. 이 시기에 《제리 주니어》(Jerry Junior, 1907)와 《네 개의 웅덩이 미스터리》(The Four Pools Mystery, 1908)가 출판되었다.
3.2. 《키다리 아저씨》와 《내일의 적》
진 웹스터는 1911년 《패티의 대학 시절》을 출간한 후, 매사추세츠주 타이링햄의 한 오래된 농가에 머물면서 소설 《키다리 아저씨》(Daddy-Long-Legs)를 쓰기 시작했다. 웹스터의 가장 유명한 이 작품은 원래 《레이디스 홈 저널》에 연재되었으며, 익명의 후원자의 도움으로 여자 대학에 다니게 된 고아 제루샤 애벗(Jerusha Abbott)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론을 제외하고 소설은 새롭게 이름 붙여진 주디가 후원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 작품은 1912년 10월에 출간되어 대중과 비평가 모두에게 큰 호평을 받았다.
1915년 11월, 《키다리 아저씨》의 속편인 《내일의 적》(Dear Enemy)이 출간되었으며, 이 또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작품 역시 편지 형식으로 쓰였으며, 주디가 자란 고아원의 원장이 된 그녀의 대학 친구 샐리 맥브라이드의 모험을 다룬다.
3.3. 희곡 각색 및 공연
웹스터는 1913년에 《키다리 아저씨》를 희곡으로 각색했으며, 1914년에는 젊은 루스 채터턴이 주디 역을 맡은 이 연극의 순회 공연에 4개월간 참여했다. 애틀랜틱 시티, 워싱턴 D.C., 뉴욕주 시러큐스, 뉴욕주 로체스터,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 시카고 등지에서 시험 공연을 거친 후, 1914년 9월 뉴욕 게이티 극장에서 막을 올렸고 1915년 5월까지 공연되었다. 이 연극은 미국 전역에서 널리 순회 공연을 펼쳤다. 책과 연극은 자선 활동과 개혁 노력의 중심이 되었으며, "키다리 아저씨" 인형이 판매되어 고아들의 입양 기금을 마련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4. 개인사 및 결혼
진 웹스터의 성공적인 문학 활동은 개인적인 삶의 중요한 변화와 비극적인 사건들 속에서 이루어졌다.
4.1. 글렌 포드 맥키니와의 관계
진 웹스터는 에셀린 맥키니의 오빠인 글렌 포드 맥키니와 관계를 시작했다. 변호사였던 그는 부유하고 성공한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내일의 적》의 한 부수적인 줄거리와 유사하게, 그는 아내 아네트 레이노가 조울증으로 고통받아 자주 입원하는 등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맥키니의 자녀 존 또한 정신적 불안정의 징후를 보였다. 맥키니는 이러한 스트레스에 대처하기 위해 잦은 사냥 및 요트 여행과 알코올 남용으로 도피했으며, 그 결과 여러 차례 요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맥키니 부부는 1909년에 별거했지만, 당시에는 이혼이 흔하지 않고 얻기 어려웠기 때문에 1915년이 되어서야 이혼이 성립되었다. 별거 후에도 맥키니는 알코올 중독과 씨름했지만, 1912년 여름 웹스터, 에셀린 맥키니, 레나 와인스타인과 함께 아일랜드로 여행했을 때는 중독을 상당히 통제할 수 있었다.
4.2. 결혼 및 가족
웹스터의 성공은 대학 친구인 아델라이드 크랩시가 결핵으로 투병하다가 1914년 10월에 사망하면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1915년 6월, 글렌 포드 맥키니는 이혼을 허락받았고, 그와 웹스터는 9월 코네티컷주 워싱턴에서 조용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퀘벡 시티 근처 맥키니의 캠프에서 신혼여행을 보냈는데,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방문하기도 했다. 루스벨트는 스스로를 초대하며 "저는 항상 진 웹스터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오두막에 칸막이를 설치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미국으로 돌아온 신혼부부는 센트럴 파크가 내려다보이는 웹스터의 아파트와 뉴욕주 더치스군에 있는 맥키니의 타이머 농장을 함께 사용했다. 웹스터는 임신했고, 가족의 전언에 따르면 임신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그녀는 입덧으로 심하게 고통받았지만, 1916년 2월에는 상태가 호전되어 사회 행사, 교도소 방문, 고아원 개혁 및 여성 참정권 관련 회의 등 그녀의 많은 활동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녀는 또한 스리랑카를 배경으로 한 책과 연극을 시작했다. 친구들은 그녀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고 전했다.
5. 주제 및 사회 참여
진 웹스터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회 개혁, 여성 문제, 그리고 당대의 과학적 논의였던 우생학에 대한 복합적인 시각을 드러내며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보여주었다.
5.1. 사회 개혁 및 활동
대학 시절부터 웹스터는 개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주 자선 단체 지원 협회(State Charities Aid Association)의 회원이었다. 그녀는 고아원을 방문하고, 의존 아동을 위한 기금을 모금하며, 입양을 주선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녀의 소설 《내일의 적》에서는 웹스터가 직접 방문했던 오두막 기반의 고아원인 플레전트빌 코티지 스쿨(Pleasantville Cottage School)을 모델로 삼아 제도 개혁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그녀의 작품들은 이러한 사회적 참여와 개혁 의지를 반영하며, 특히 아동 복지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5.2. 여성 문제
진 웹스터는 여성 참정권과 여성 교육을 강력히 지지했다. 그녀는 여성의 투표권을 지지하는 행진에 참여했으며, 바사르 칼리지에서의 교육을 통해 얻은 혜택을 바탕으로 대학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의 소설들 또한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주요 등장인물들은 여성 참정권을 명시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웹스터는 작품과 실제 활동을 통해 여성의 사회적 역할 확대와 권리 신장을 위한 목소리를 냈다.
5.3. 우생학과 유전학에 대한 관점
우생학 운동은 진 웹스터가 소설을 집필하던 시기에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특히 리처드 L. 더그데일의 1877년 저서 《주크스 가문》과 헨리 H. 고다드의 1912년 연구 《칼리카크 가문》은 당시 널리 읽혔다. 웹스터의 《내일의 적》은 이 책들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언급하고 요약하지만, 주인공 샐리 맥브라이드는 아이들이 양육 환경에서 자란다면 궁극적으로 "유전에 한 가지도 믿을 것이 없다"고 선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과학적 진리'로서의 우생학 개념은 소설 전반에 걸쳐 나타나며, 웹스터의 복합적인 입장을 보여준다.
6. 사망
진 웹스터는 1916년 6월 10일 오후 뉴욕의 슬론 여성 병원에 입원했다. 프린스턴 대학교 25주년 동창회에서 돌아온 글렌 맥키니는 웹스터가 밤 10시 30분에 2.8 kg (6.25 lb)의 딸을 출산하기 90분 전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으나, 진 웹스터는 병세가 악화되어 1916년 6월 11일 오전 7시 30분 산욕열로 사망했다. 그녀의 딸은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진'(리틀 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7. 문학적 유산 및 영향
진 웹스터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여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그녀의 사회 개혁에 대한 헌신은 문학적 유산과 함께 중요한 사회적 기여로 평가된다.
7.1. 작품의 지속적인 인기
진 웹스터의 대표작 《키다리 아저씨》와 《내일의 적》은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독자들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특히 《키다리 아저씨》는 고아 소녀의 성장과 자립을 다루면서도 유머와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아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녀의 작품들은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넘어, 여성의 교육과 자아 발견,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7.2. 사회 운동에 대한 기여
웹스터는 단순히 글을 쓰는 것을 넘어, 자신의 작품과 활동을 통해 사회 개혁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그녀의 소설들은 아동 복지, 고아원 개혁, 여성 참정권, 여성 교육의 중요성 등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키다리 아저씨》의 성공은 고아 입양 기금 마련 운동으로 이어지는 등 실제적인 사회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녀의 진보적인 시각과 사회 참여는 문학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긍정적인 영향력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8. 관련 항목
- 마크 트웨인
- 키다리 아저씨 (소설)
- 내일의 적 (소설)
- 바사르 칼리지
- 여성 참정권
- 아동 문학
- 우생학
- 산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