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장바티스트 바가자(Jean-Baptiste Bagaza장바티스트 바가자프랑스어)는 1976년 11월부터 1987년 9월까지 부룬디의 대통령이자 사실상의 군사 독재자로 통치했던 부룬디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1946년 투치족으로 태어난 그는 미셸 미콤베로 대통령의 통치 하에 군에서 복무하며 계급을 높였다. 1976년 무혈 쿠데타로 미콤베로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한 바가자는 집권 초기 부패 척결과 봉건적 토지 소유 제도 폐지 등 일부 개혁을 단행하며 후투족 다수에 대한 양보를 시도했다. 그러나 1984년 이후 그의 정권은 점차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으로 변모했으며, 특히 강력한 가톨릭 교회를 표적으로 삼아 탄압했다.
바가자의 통치는 1987년 군사 쿠데타로 전복되었고 그는 망명길에 올랐다. 1994년 부룬디로 귀국한 그는 민족재생당(PARENA)을 창당하며 정치에 복귀했다. 그는 투치 민족주의적 시각을 견지하며 민족 간 권력 분점 합의에 반대하고 심지어 부룬디를 'Tutsiland투치족의 땅영어'과 'Hutuland후투족의 땅영어'으로 분할할 것을 주장하는 등 극단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2016년에 사망했다. 바가자의 통치는 초기 개혁에도 불구하고 인권 침해와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으로 비판받는다.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배경
장바티스트 바가자는 1946년 8월 29일 벨기에령 루안다-우룬디의 부루리주 루토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광범위한 투치족의 한 갈래인 히마족 출신이었다. 그는 부인 파우스타 바가자와 네 명의 딸을 두었다.
2.2. 교육
바가자는 부줌부라의 가톨릭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966년에는 벨기에로 유학하여 브뤼셀에 위치한 벨기에 왕립 육군사관학교에서 1971년까지 수학했다. 그는 이곳에서 사회학 학위를 취득했다.
2.3. 군 경력
벨기에 유학을 마치고 1972년 부룬디로 돌아온 바가자는 새로 독립한 부룬디 왕국의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미셸 미콤베로 대통령의 통치 하에 계급을 높여갔다. 1972년 5월, 그는 대위 계급으로 부룬디 군의 병참 담당 참모부 부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주로 미콤베로와의 가족 관계 덕분이었으며, 숙청된 후투족 장교 마르탱 은다야호제를 대체한 것이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중령으로 진급하여 총참모장이 되었다. 1975년 5월에는 부룬디 대법원 산하 회계 감사원에 임명되었다. 그는 1972년 후투족에 대한 대량학살에 연루되었으나, 그의 개입 정도나 성격은 명확하지 않다.
3. 권력 장악
3.1. 1976년 쿠데타
1976년 11월 1일, 바가자는 미셸 미콤베로 대통령을 상대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이 쿠데타는 무혈로 진행되었다. 30명으로 구성된 군사정권인 최고혁명평의회는 헌법을 일시적으로 정지시켰고, 1976년 11월 10일 바가자를 대통령으로 선포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4. 통치 기간
바가자는 집권 후 여러 개혁을 시작했으며, 특히 1984년 이후에는 정권이 더욱 억압적으로 변모했다.
4.1. 초기 개혁과 정책
바가자는 집권 후 부패를 척결하고 미콤베로 정권 하에서 탄압받았던 후투족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완만한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세금 제도를 개혁하고 행정을 개선했다. 또한 그는 매일 오전 7시 30분에 직접 운전하여 출근하는 등 당시 대부분의 지역 정치인들이 대규모 수행단과 함께 이동했던 것과 달리 근면한 업무 태도로 존경을 받았다.
1972년 부룬디 학살 당시 망명했던 일부 후투족 난민들이 자이르와 탄자니아에서 귀국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바가자는 초기 내각에 두 명의 후투족 장관을 임명하는 등 소수의 후투족에게 정부 직책을 부여했다. 1977년에는 부룬디의 봉건적 토지 소유 제도인 '우부게레르와(Ubugererwa)'가 폐지되었다. 일부 투치족 소유의 토지가 후투족 농민들에게 이전되기도 했다. 우부게레르와 제도의 폐지와 '이코리(ikori)' 인두세 폐지는 후투족 사이에서 바가자에 대한 많은 호의를 얻게 했다.
4.2. 민족 정책 및 사회적 영향
바가자는 공식적으로는 모든 민족 언급을 금지하고 모든 국민이 그저 부룬디인이거나 더 넓게는 아프리카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국가의 민족적 긴장을 해소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연구자 나이젤 와트는 이러한 움직임이 투치족 엘리트의 지속적인 지배를 위장하는 것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바가자는 투치족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계속 지배적인 위치를 유지하도록 했다. 실제로 바가자 통치 기간 동안 경제와 교육 분야에서 후투족의 소외는 심화되었다. 이는 급진적인 팔리페후투당(PALIPEHUTU)과 무장 단체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4.3. 권위주의 통치와 억압
바가자 정권은 1981년 새로운 국가 헌법을 도입하여 민족진보연합(UPRONA)의 일당제 독재 체제로 부룬디를 공고히 했고, 그는 이 당을 자신의 지도 하에 재편성했다. 1984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99.6%의 득표율로 재선되었다. 재선 이후 바가자는 자신의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 가톨릭 교회에 대한 군사 작전을 조직했다. 정권이 점차 억압적으로 변하면서 교회는 더욱 표적이 되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추방되었고, 대중 및 교육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바가자는 가톨릭 언론과 교회 예배를 금지하고, 교회 운영 문맹 퇴치 센터를 폐쇄하며, 교회 운영 학교를 국유화하고, 성직자들을 체포하고 고문할 것을 명령했다. 그는 기테가 대성당을 포함한 87개 교회의 폐쇄를 명령했다. 개신교 언론 또한 표적이 되었다. 그는 또한 주점 개방을 제한하고 부룬디인들이 전통적인 약혼식과 애도 의식에 허용되는 시간과 돈을 공식적으로 제한하는 등 다른 "기이한" 정책들을 시행하려 했다. 밥 크루거(Bob Krueger)는 이러한 정책들이 결국 너무 많은 부룬디인들을 소외시켰고 바가자의 실각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으며, 와트 또한 이 견해에 동의했다.
4.4. 경제 발전 및 국제 관계
바가자 통치 하에 경제 현대화 프로그램이 시작되어 소작농 중심의 자본주의적 농업이 발전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두 개의 새로운 수력 발전 댐이 건설되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도 부룬디의 에너지 기반 시설의 근간을 이룬다. 그는 또한 도로 건설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식수 공급을 확대하며, 탕가니카호에 항구를 개발했다. 그의 기반 시설 투자는 커피, 차, 설탕에 의존하는 부룬디의 수출 경제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국제적으로 바가자는 다양한 정치 블록 사이에서 성공적으로 외교를 펼쳐 서방 블록, 동방 블록, 중국, 그리고 아랍 세계로부터 경제 원조를 확보했다. 그는 또한 부룬디에 거주하던 대규모 콩고 이주민 공동체가 자발적으로 떠났다고 주장하며 이들을 추방했다.
5. 실각과 망명
5.1. 1987년 쿠데타
1987년 9월, 바가자가 캐나다 퀘벡에 머무는 동안 피에르 부요야 소령이 주도하는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부요야는 바가자의 정권을 성공적으로 전복시키고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5.2. 망명 생활
6. 정치 복귀와 활동
6.1. 민족재생당(PARENA) 창당
바가자는 1993년 부룬디 총선을 통해 후투족의 권한이 강화되는 것에 반대했으며, 부룬디의 첫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인 멜키오르 은다다예에 대한 1993년 쿠데타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쿠데타 세력은 은다다예를 살해했지만 통제권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고, 권력은 다시 민간의 민주 정부로 돌아갔다. 바가자는 이후 쿠데타에 대한 어떠한 연루도 부인했다. 쿠데타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룬디로 돌아와 1994년 민족재생당(Parti pour le Redressement National파르티 푸르 르 르드레스망 나시오날프랑스어, PARENA)을 창당했다. PARENA는 투치족 "극단주의 정당"으로 묘사되었다.
6.2. 이념 및 정치적 입장
바가자는 전직 국가원수로서 종신 상원의원이 되었다. 당시 바가자는 부룬디 민주전선(FRODEBU)과 같은 후투족 파벌과의 어떠한 권력 분점 합의에도 일반적으로 반대하는 등 극단적인 견해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결국 부룬디를 "Tutsiland투치족의 땅영어"과 "Hutuland후투족의 땅영어"으로 분할할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6.3. 후기 정치 활동
1997년 1월 18일, 바가자는 부요야 대통령에 대한 음모를 꾸미기 위해 무기를 모은 혐의로 가택 연금되었다. 두 달 후 가택 연금은 징역형으로 바뀌었지만, 그는 곧 석방되었다. 바가자는 이후 부룬디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평화 협상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와 PARENA는 후투족 반군과의 권력 분점 협정 이행에 반대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2002년 11월부터 2003년 5월까지 바가자를 가택 연금하고 PARENA를 금지시켰다. 2005년에는 바가자의 급진적인 추종자들이 "Justice and Liberity United Front정의와 자유 연합 전선영어"이라는 반군 단체를 조직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PARENA가 새로 구성된 연립 정부에서 장관직을 수락하면서 긴장은 완화되었다. 바가자는 2010년 대통령 선거에서 PARENA의 후보로 출마했지만, 부룬디 야당이 선거를 보이콧하자 후보직을 철회했다. 그는 2014년 3월 PARENA 대표직에서 물러났고, 제농 님보나가 그의 뒤를 이었다. 그는 부룬디 상원에서 주요 야당 지도자로 남아 있었으며, 2015년 선거의 야당 보이콧에 동참했다. 2015년 선거를 앞두고 국내에서 대규모 소요 사태가 발생했을 때, 바가자와 다른 세 명의 생존 전직 대통령들은 국제 개입을 촉구했다.
7. 사망
바가자는 2016년 5월 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69세의 나이로 자연사했다. 그의 장례식은 2016년 5월 17일 부줌부라에서 거행되었다.
8. 평가 및 영향
8.1. 비판과 논란
장바티스트 바가자의 통치는 여러 측면에서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1972년 후투족 대량학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으며, 그의 집권 후 특히 1984년 재선 이후 정권은 점차 억압적으로 변모했다. 그는 가톨릭 교회를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여 선교사 추방, 언론 및 학교 폐쇄, 성직자 체포 및 고문 등 광범위한 탄압을 가했다. 이러한 종교 탄압과 함께 주점 개방 제한, 전통 의례 시간 및 비용 제한과 같은 "기이한" 정책들은 많은 부룬디인들의 반감을 샀고, 결국 그의 실각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있다. 또한 그는 후투족과의 권력 분점 합의에 지속적으로 반대하고 심지어 부룬디를 민족별로 분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극단적인 투치 민족주의적 입장을 고수하여 민족 갈등을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1993년 부룬디의 첫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인 멜키오르 은다다예에 대한 쿠데타에 연루되었다는 의혹 또한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로 지적된다.
8.2. 긍정적 평가
바가자의 통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일부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그는 집권 초기에 부패 척결, 행정 개혁, 그리고 봉건적 토지 소유 제도인 '우부게레르와'와 '이코리' 인두세 폐지 등 개혁 정책을 추진하여 후투족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고 농민들로부터 호의를 얻었다. 또한 그는 근면한 업무 태도를 보이며 국가 발전에 기여하려 했다. 경제적으로는 소규모 자본주의적 농업 발전을 위한 현대화 프로그램을 시작했으며, 두 개의 중요한 수력 발전 댐 건설, 도로 확장, 식수 공급 개선, 탕가니카호 항구 개발 등 기반 시설 확충에 투자하여 부룬디의 수출 경제 기반을 다졌다. 국제 관계에서는 서방 블록, 동방 블록, 중국, 아랍 세계 등 다양한 정치 블록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성공적으로 확보하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