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이타마르 프랑쿠는 브라질의 정치적 격변기에 성장하며 일찍이 정치적 의식을 형성했다. 그의 출생 환경과 교육은 훗날 그의 정치 경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1. 출생 및 가족 관계
프랑쿠는 1930년 6월 28일, 사우바도르와 리우데자네이루 사이를 항해하던 선박 위에서 미숙아로 태어나 사우바도르에 출생 등록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쿠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으며, 어머니는 아들이 태어난 배의 이름인 '이타'와 포르투갈어로 바다를 뜻하는 '마르'를 결합하여 '이타마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프랑쿠의 가계는 아버지 쪽으로 미나스제라이스주의 슈티블러 가문에서 유래한 독일계 혈통이며, 어머니 쪽으로는 양 외조부모가 모두 이탈리아에서 브라질로 이민 온 이탈리아계였다. 특히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포르투갈어로 '이탈리아'를 뜻하는 "이탈리아"였다.
1.2. 교육 및 초기 활동
프랑쿠의 가족은 미나스제라이스주 주이스지포라 출신이었으며, 그는 이곳에서 성장했다. 그는 1955년 주이스지포라 연방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인 주이스지포라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토목기사가 되었다. 1950년대 중반에 정계에 입문하여, 주이스지포라 시의 시의원과 부시장을 지낸 후, 1967년부터 1971년까지, 그리고 1973년부터 1974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주이스지포라 시장을 역임했다.
2. 정치 경력
이타마르 프랑쿠의 정치 경력은 브라질의 군사 독재 시기부터 민주주의의 회복, 그리고 경제적 안정화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펼쳐졌다. 그는 상원의원, 부통령, 대통령을 거치며 국가의 중요한 전환점마다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1. 정치 입문 및 상원의원 활동
1974년 시장직에서 물러난 프랑쿠는 미나스제라이스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으로 성공적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1964년부터 1985년까지 브라질을 통치했던 군사 정권의 공식 야당이었던 브라질 민주 운동(Movimento Democrático Brasileiro모비멘투 데모크라치쿠 브라질레이루포르투갈어, MDB)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1976년과 1977년에는 부당수직을 수행했다.
1982년 상원의원으로 재선된 그는 1986년 자유당(Partido Liberal파르치두 리베라우포르투갈어, PL) 후보로 미나스제라이스주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상원의원 재임 기간 동안 그는 대통령 직접 선거의 즉각적인 부활을 위한 (당시에는 실패했던) 노력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또한 자유당 원내대표를 역임했다.
1987년 2월 1일 소집된 제헌의회의 일원으로서 프랑쿠는 여러 중요한 안건에 투표했다. 그는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같이 인종 차별 정책을 시행하는 국가들과의 관계 단절, 집단 명령적법원의 설립, 주 40시간 근무 이후 초과 근무에 대한 50% 추가 수당 지급, 낙태의 합법화, 근속 기간에 비례하는 6시간의 계속적인 근무 전환 통보, 노동조합 단일성, 국민 주권, 지하 자원의 국유화, 금융 시스템의 국유화, 대외 부채 부담 상한선 설정, 토지 개혁 지원 기금 마련 등에 찬성했다. 반면, 사형 제도의 재도입, 대통령제의 재확인, 그리고 당시 그가 부패 혐의로 비판하고 퇴진을 요구했던 조제 사르네이 대통령의 임기 연장 제안에는 반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쿠가 대통령이 된 후 사르네이는 그의 정치적 동맹 중 한 명이 되었다.
2.2. 부통령 재임 (1990년~1992년)
1989년, 프랑쿠는 자유당을 떠나 소수 정당인 국가 재건당(Partido da Reconstrução Nacional파르치두 다 헤콘스트루상 나시오나우포르투갈어, PRN)에 합류하여 페르난두 콜로르 지 멜루 대통령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되었다. 프랑쿠가 부통령 후보로 선택된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미나스제라이스주와 같은 대규모 주를 대표한다는 점(콜로르는 소규모 주 알라고아스주 출신이었다)과, 당시 부패 혐의로 논란이 되었던 조제 사르네이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며 얻은 대중적 인지도로 꼽힌다.
콜로르와 프랑쿠 조는 훗날 브라질 대통령이 될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후보를 상대로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며 당선되었다. 1990년 3월 15일 프랑쿠는 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취임 후 프랑쿠는 콜로르 대통령의 정책, 특히 민영화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며 여러 차례 사임을 위협하는 등 콜로르와 갈등을 겪었다. 결국 1992년 초 국가 재건당을 탈당했다.
1992년 9월 29일 화요일, 콜로르 대통령은 부패 혐의로 기소되어 의회에서 탄핵되었다. 브라질 헌법에 따라 탄핵된 대통령의 권한은 180일 동안 정지된다. 이에 따라 프랑쿠는 1992년 10월 2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했다. 콜로르는 상원이 자신을 유죄로 판결하고 해임할 것이 분명해지자 12월 29일에 사임했고, 프랑쿠는 이 날 공식적으로 대통령직에 취임했다. 부통령으로서 3년 가까이 재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을 당시 여론조사에서는 대다수 국민이 그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3. 대통령 재임 (1992년~1995년)
프랑쿠는 취임과 동시에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했으나, 강력한 리더십과 과감한 정책으로 브라질의 안정화를 이끌었다. 그의 임기 동안 브라질은 민주주의와 경제적 측면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2.3.1. 국내 정책 및 리더십
프랑쿠가 정권을 잡았을 당시 브라질은 심각한 경제 위기 속에 있었으며, 인플레이션율은 1992년에 1,110%에 달했고, 1993년에는 거의 2,400%로 치솟았다. 프랑쿠는 다소 변덕스러운 지도자라는 평판을 얻었지만, 그는 재무부 장관으로 페르난두 엔히키 카르도주를 임명했고, 카르도주는 경제를 안정시키고 인플레이션을 종식시킨 '헤알 플랜'(Plano Real플라누 헤아우포르투갈어)을 시행했다.
취임 직전, 프랑쿠는 상원의원들에게 자신의 개인 순자산과 재산 목록을 적은 종이를 건네는 이례적인 행동을 보였다. 이는 정치적 혼란이 극에 달했던 당시 브라질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초기 지지율은 60%에 달했다. 콜로르 전 대통령의 혼란스러운 재임 기간 이후, 프랑쿠는 신속하게 정치적으로 균형 잡힌 내각을 구성하고 의회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다.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인 1993년 4월, 브라질은 정치 체제(공화제 유지 또는 군주제 복원)와 정부 형태(대통령제 또는 의원 내각제)를 결정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투표 결과 공화제와 대통령제가 각각 압도적인 다수로 채택되었다. 프랑쿠는 개인적으로 의원 내각제를 선호했지만, 국민의 선택을 존중했다. 1993년, 프랑쿠는 군과 민간 사무실에서 의회 폐쇄를 요구하는 목소리(일부 소식통은 "쿠데타 시도"로 묘사)에 저항하며 단호하게 이를 거부했다.
프랑쿠 행정부는 특히 콜로르의 문제 많았던 재임 이후 정부의 청렴성과 안정성을 회복한 공로를 인정받는다. 프랑쿠 대통령 자신도 정직한 평판을 유지했으며, 그의 개인적인 스타일은 "제왕적이고 의례적인 대통령 역할"을 수행했던 콜로르와 매우 다르다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프랑쿠의 개인적인 행동은 때때로 변덕스럽거나 기이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1993년 말, 프랑쿠는 조기 선거를 촉구하기 위해 사임을 제안했으나, 의회는 이를 거부했다. 임기 말에는 프랑쿠의 국정 지지율이 80~90%에 육박하며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는 2016년 5월 미셰우 테메르가 취임하기 전까지, 직접 선거로 당선되지 않은 마지막 브라질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2.3.2. 외교 정책
때때로 "외교 능력이 제한적인 인물"로 묘사되기도 했으나, 프랑쿠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같은 국제 지도자들로부터 칭찬받았던 남아메리카 전역을 아우르는 자유 무역 지대 구상을 제시한 공로를 인정받는다.
또한 그의 정부 기간 동안 브라질은 중요한 국제 협약들을 비준했다. 여기에는 트라테롤코 조약과 아르헨티나 및 국제 원자력 기구(IAEA)가 참여하는 포괄적 안전 조치에 관한 4자 협정이 포함되며, 이는 브라질이 핵 비확산의 길을 걷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4. 대통령 퇴임 이후의 활동
대통령직 퇴임 후에도 이타마르 프랑쿠는 다양한 공직을 수행하며 브라질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외교관과 지방 정부의 수장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프랑쿠는 1994년 대선에서 정식 임기 출마가 금지되었다. 브라질에서는 부통령이 대통령 임기의 일부를 대행할 경우 완전한 임기를 채운 것으로 간주되었고, 당시 브라질 대통령은 즉시 재선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페르난두 엔히키 카르도주는 프랑쿠의 후임으로 지명된(때로는 프랑쿠가 직접 선택했다고 묘사되기도 하는) 공식 후보가 되어 1994년 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프랑쿠는 곧 카르도주 정부의 열렬한 비판자가 되었으며, 특히 민영화 프로그램에 반대했다.
대통령직 퇴임 후 프랑쿠는 리스본 주 포르투갈 대사를 지냈고, 1998년까지 워싱턴 D.C.의 미주 기구 대사로 활동했다. 1998년 대선 출마를 고려하기도 했으나, 헌법 개정으로 카르도주가 재선할 수 있게 되자 결국 출마를 철회했다.
그러나 1998년 미나스제라이스주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카르도주가 지지하는 현직 주지사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취임 직후 그는 주 정부 부채 상환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여 국가 경제 위기를 악화시켰다. 이는 그의 정적이었던 카르도주 대통령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정치적 행위였다는 해석도 있다. 이타마르 프랑쿠는 2003년까지 주지사직을 수행했으며(재선 출마를 포기하고 최종 당선자인 아에시오 네베스를 지지했다), 이후 2005년까지 이탈리아 대사로 근무했다. 2002년 대선에서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후보를 지지했고, 룰라 다 시우바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76세의 나이로 2006년 브라질 민주운동당(Partido do Movimento Democrático Brasileiro파르치두 두 모비멘투 데모크라치쿠 브라질레이루포르투갈어, PMDB) 대통령 후보 지명을 모색했으나 실패했고, 룰라에 맞서 제라우두 아우키민을 지지했다. 이후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2010년 대선 후보로 다시 거론되기도 했다.
2010년에는 미나스제라이스주의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아에시오 네베스와 함께 당선되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3. 개인 생활
이타마르 프랑쿠는 그의 공개적인 정치 활동 외에도 사생활 측면에서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관심사를 표현하기도 했다.
프랑쿠는 1978년에 이혼하여 두 딸을 두었다. 대통령 재임 전후로 그는 '여성 편력가'라는 평판을 얻었으며, 그의 사생활은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았다. 그는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논의부터 단편 소설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룬 약 19권의 저서를 남겼다.
4. 사망
이타마르 프랑쿠는 말년에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합병증으로 사망하여 브라질 사회에 깊은 애도를 남겼다.
프랑쿠는 백혈병 진단을 받고 2011년 5월 21일 상파울루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병원에 입원했다. 6월 28일, 그의 81세 생일에 상태가 악화되어 심한 폐렴이 발병했고, 중환자실로 옮겨져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는 2011년 7월 2일 토요일 아침,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은 7일간의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그의 시신은 정치적 기반이었던 주이스지포라와 미나스제라이스주의 주도인 벨루오리존치에서 조문을 받은 후, 2011년 7월 4일 월요일 벨루오리존치 대도시권에 위치한 콘타젱에서 화장되었다.
5. 평가 및 유산
이타마르 프랑쿠는 브라질의 민주주의와 경제 회복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되지만, 그의 재임 중 발생한 일부 논란 또한 함께 언급된다.
5.1. 주요 업적 및 긍정적 평가
프랑쿠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단연 '헤알 플랜'의 성공적인 도입이다. 이 정책은 연간 2,400%에 달했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효과적으로 억제하고 브라질 경제를 안정화시켜, 수백만 명의 브라질 국민에게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이는 그의 후임인 페르난두 엔히키 카르도주 대통령의 성공에도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또한 그는 페르난두 콜로르 지 멜루 대통령의 탄핵으로 얼룩졌던 정부의 청렴성과 안정성을 회복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의 정직하고 소박한 리더십 스타일은 대중의 신뢰를 얻었으며, 1993년 군부의 의회 해산 시도에 단호히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한 점도 중요한 긍정적 평가 요소이다. 임기 말에 80~90%에 달하는 높은 지지율은 그의 리더십이 대중에게 긍정적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외교적으로는 남아메리카 자유 무역 지대 구상을 제안하고 핵 비확산 조약 비준에 기여하는 등 브라질의 국제적 위상을 강화하는 데도 일조했다.
5.2. 비판 및 논란
프랑쿠의 재임 중 발생한 주요 논란 중 하나는 1999년 미나스제라이스주 주지사로 재임하면서 주 정부 부채 상환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사건이다. 이 결정은 브라질 전국적인 경제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으며, 그의 정치적 정적인 페르난두 엔히키 카르도주 당시 대통령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그의 리더십 스타일은 때때로 '변덕스럽고 기이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개인적 특성은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일부 언론과 대중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