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기
1.1. 가족 및 성장 배경
이츠하크 "부지" 헤르초그는 1960년 9월 22일 텔아비브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육군 소장 출신으로 1983년부터 1993년까지 제6대 이스라엘의 대통령을 역임했던 하임 헤르초그이며, 모친은 아름다운 이스라엘 위원회의 설립자인 아우라 암바체이다.
헤르초그의 부친은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모친은 이집트에서 태어났다. 그들의 가족은 폴란드, 러시아, 리투아니아 등 동유럽 유대인 혈통을 가지고 있다. 헤르초그에게는 두 명의 형제와 한 명의 누이가 있다. 그의 친조부인 이츠하크 하레비 헤르초그 랍비는 1922년부터 1935년까지 초대 아일랜드 수석 랍비를 지냈으며, 1936년부터 1959년까지 아슈케나즈 유대인의 이스라엘 수석 랍비를 역임했다. 또한 이스라엘의 제3대 외무장관을 지낸 아바 에반은 그의 삼촌이다.
1.2. 교육 및 군 복무
헤르초그는 유년 시절 부친이 유엔 주재 이스라엘 상임대표로 재임하던 시기인 3년간 뉴욕에서 거주하며 라마즈 스쿨에 다녔다. 이후 고등학교에 재학하면서도 코넬 대학교와 뉴욕 대학교에서 고등 학문 교육을 이수했으며, 여름 방학은 라마 캠프에서 보냈다. 그는 또한 부친과 함께 브루클린의 루바비치 랍비를 방문하기도 했다.
1978년 말 이스라엘로 귀국한 후, 그는 이스라엘 방위군(IDF)에 입대하여 이스라엘 정보부대의 엘리트 부대인 8200부대에서 주요 장교로 복무했다.
1.3. 법조계 경력
군 복무를 마친 후, 헤르초그는 텔아비브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에는 그의 부친이 설립한 저명한 법률 사무소인 "헤르초그, 폭스 & 니먼"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며 법조계 경력을 쌓았다.
2. 정치 경력
헤르초그는 법조계 경력을 기반으로 이스라엘 정치의 주요 인물로 성장했다. 그는 크네세트 의원으로서 입법 활동에 참여했으며, 다양한 장관직을 역임하며 주요 정책들을 주도했다. 또한 이스라엘 노동당의 당수와 야당 대표로서 이스라엘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1. 크네세트 의원 및 장관직
헤르초그는 1999년 총선에서 낙선했지만, 이후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에후드 바락 내각에서 정부 비서실장으로 재임하며 행정 경험을 쌓았다. 이 시기에 그는 당 자금법 위반 혐의와 관련된 "아무토트 바락" 스캔들로 조사를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는 이스라엘 마약통제국 의장을 맡아 국가의 마약 퇴치 노력에 기여했다.
2003년 총선에서 이스라엘 노동당 소속으로 크네세트 의원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2005년 1월 10일, 노동당이 아리엘 샤론 총리가 이끄는 연립 정부에 참여하면서 주택건설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첫 장관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2005년 11월 23일, 노동당이 연정 탈퇴를 결정함에 따라 다른 당 소속 각료들과 함께 장관직에서 사임했다.
2006년 총선을 앞두고 노동당 예비선거에서 명부 2위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가 이끄는 카디마 주도 연립 정부에서 관광부 장관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2007년 3월에는 이스라엘 베이테이누가 연정에 참여하면서 관광부 장관직을 넘기고 사회복지부 장관으로 재배치되었다. 동시에 그는 디아스포라, 사회 및 반유대주의 퇴치 담당 장관을 겸임하며 유대인 공동체 문제와 반유대주의에 대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였다.
2009년 총선에서도 당 명부 2위로 재선에 성공했으며, 이후 사회복지부 장관과 디아스포라 담당 장관직을 다시 맡았다. 2009년 1월, 그는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에 의해 가자지구 주민들을 위한 인도적 지원의 이스라엘 정부 조정관으로 임명되어 인도주의적 노력을 이끌었다. 2011년 1월, 에후드 바락이 노동당을 탈당하여 독립당을 창당하자 그는 내각에서 사임했다.
2.2. 야당 대표 및 노동당 당수
2011년 노동당 당수 경선에 출마했으나 셸리 야치모비치와 아미르 페레츠에 이어 3위를 기록하며 낙선했다. 하지만 2013년 11월 22일, 그는 노동당 당수 경선에서 현직 셸리 야치모비치를 58.5% 대 41.5%의 득표율로 꺾고 당수에 당선되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이스라엘의 야당 당수가 되었다.
헤르초그는 당수로서 야치모비치가 사회경제적 문제에 초점을 맞춘 것과 달리, 안보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당선 10일 후, 그는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만나 두 국가 해법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며 평화 정착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또한 그는 샤스 당수 아리예 데리에게도 협력 증진을 제안하는 등 야당 진영 내의 연대를 모색했다.

2014년 6월, 헤르초그는 당시 총리였던 벤야민 네타냐후가 국제사회와의 소통에 실패하고,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제안을 제시하지 않으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효과적으로 협력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특히 네타냐후의 오바마에 대한 "혐오와 적대감"이 이스라엘 안보를 위협하는 가장 큰 실패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2015년 3월 총선을 앞두고 헤르초그는 하트누아와 카디마 당에 자신의 노동당과 연합할 것을 촉구하며, "네타냐후를 대체할 수 있으며, 선거 전에 (새로운) 블록을 형성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2014년 12월에는 치피 리브니와 함께 시오니스트 연합이라는 공동 선거 명부를 발표하며, 2015년 총선에서 네타냐후의 네 번째 총리 임기를 저지하려는 시도를 했다. 2015년 총선에서 시오니스트 연합은 24석을 얻어 리쿠드의 30석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야당 세력이 되었다.


2017년 7월, 그는 노동당 당수 경선 1차에서 탈락했지만, 아비 가베이가 당선된 후에도 가베이가 크네세트 의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야당 대표직을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유대인 기구 의장으로 선출된 후 그는 야당 대표직과 크네세트 의원직을 사임했으며, 야당 대표직은 치피 리브니가, 크네세트 의원직은 로베르트 티비아예프가 승계했다.
2.3. 유대인 기구 의장
2018년 6월, 이츠하크 헤르초그는 이스라엘 유대인 기구 의장으로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그는 의장으로서 유대인 민족과 이스라엘 국가 간의 격차를 해소하는 것을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삼았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유대인과 비유대인 간의 혼혈혼을 "해결책이 필요한 재앙"으로 간주한다고 언급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18년 10월 24일, 헤르초그는 유대인 기구 이사회에 이스라엘 독립선언문에 명시된 민주적 이스라엘 원칙에 대한 약속을 재확인하는 결의안 통과를 주도했다. 피츠버그 회당 총격 사건 이후 그는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는 반유대주의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명했으며, 브뤼셀의 유럽 의회에서 열린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의 날 행사에서는 유럽 국가 지도자들에게 반유대주의에 맞서 싸우고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 연맹의 반유대주의 정의를 채택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특히 2019년 3월, 유대인 기구는 이스라엘에서 최초로 직원들이 해외 대리모 서비스를 통해 부모가 될 수 있도록 재정 지원을 시작했는데, 이는 동성애자와 독신 부모도 포함하는 파격적인 조치로 사회적 포용성을 확대하려는 그의 노력을 보여주었다.

3. 이스라엘 대통령 재임
3.1. 당선과 취임
2021년 5월 19일, 이츠하크 헤르초그는 2021년 이스라엘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다. 이후 2021년 6월 2일, 그는 크네세트에서 이스라엘의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경쟁자였던 미리암 페레츠 후보의 26표에 비해 87표를 얻어 이스라엘 역사상 대통령 후보로서 가장 많은 득표를 기록했다. 2021년 7월 7일, 그는 공식적으로 취임했으며, 이로써 그는 전직 대통령의 아들로서 대통령이 된 첫 사례로 기록되었다.
취임 연설에서 헤르초그는 이스라엘 사회 내 분열을 치유하고, 이스라엘 내부 및 이스라엘과 해외 유대인 디아스포라 간의 다리를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초래한 것은 근거 없는 증오였다. 오늘날에도 매일 우리에게 큰 대가를 치르게 하는 동일한 근거 없는 증오, 동일한 파벌주의와 양극화다. 가장 큰 대가는 우리 국가 회복력의 침식이다"라고 언급하며 사회 통합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그는 기후 위기 대응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3.2. 주요 활동 및 정책
이스라엘 대통령 취임 후, 헤르초그는 여러 차례 중요한 국빈 방문을 수행하며 외교적 역할을 강화했다. 2022년 1월 30일, 그는 아랍에미리트에 역사적인 국빈 방문을 단행하여 지역 내 메시지를 전달했다. 같은 해 3월에는 그리스, 키프로스를 포함한 지중해 인근 국가들을 순방했으며, 영부인 미할 헤르초그와 함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 부부의 초청으로 튀르키예를 국빈 방문했다. 앙카라의 대통령궁에서 열린 정상회담은 양국 간의 긴장 관계를 해소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상징했다. 헤르초그는 이 방문에서 "과거의 짐"이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고 언급하며, 이스라엘-튀르키예 관계가 양국의 행동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튀르키예 방문 후반에는 이스탄불의 유대인 공동체를 방문하여 해외 디아스포라와의 관계 강화라는 그의 외교 정책 기조를 이어갔다.
2022년 3월 29일, 헤르초그는 이스라엘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요르단 암만을 공개 방문하여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두 정상은 이스라엘-요르단 관계를 심화하고, 역내 안정 유지 및 평화와 정상화를 증진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국내적으로는 이스라엘 사회 내 통합을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2021년 10월 29일, 그는 1956년에 발생한 카프르 카심 학살 희생자 추모식에 참석하여 이스라엘 국가를 대표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이는 카프르 카심에서 정부 차원의 사과를 한 첫 이스라엘 고위 인사로 기록되었다. 그는 연설에서 "무고한 이들의 살해와 부상은 절대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 이들은 모든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발언했다.
환경 문제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2021년 10월, 헤르초그는 대통령실 산하에 이스라엘 기후 포럼 설립을 발표하고, 도브 헤닌 전 크네세트 의원을 의장으로 임명했다. 이 포럼은 기후 위기 대응 노력을 조율하기 위해 공무원과 시민들을 모으는 여러 실무 그룹을 감독한다. 그는 또한 하레츠 기후변화 포럼에서 "재생 가능한 중동"이라는 연설을 통해 기후 위기가 중동 및 지중해 분지 전역의 지역 협력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2021년 11월 28일, 헤르초그는 헤브론의 조상들의 동굴에서 하누카 첫날 촛불을 점화했는데, 이는 일부 좌파 진영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헤브론에 대한 유대 민족의 역사적 애착 인식이 "모든 논쟁을 초월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2021년 12월에는 메타 플랫폼스와 협력하여 사이버 괴롭힘 방지를 목표로 하는 "선한 생각" 캠페인을 시작하며 온라인에서의 존중하고 포괄적인 담론을 장려했다. 2025년에는 전 세계 유대인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모아 유대인들이 직면한 문제와 과제를 논의하고, 이 대화를 실행 가능한 전략으로 전환하기 위한 "국민의 목소리" 이니셔티브를 진행할 예정이다.


3.3. 논란 및 사건
이츠하크 헤르초그의 대통령 재임 중 일부 발언과 행동은 국내외적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023년 10월,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한 후, 그는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에 대해 가자지구 주민들이 집단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며 "가자에는 무고한 민간인이 없다"고 발언했다. 그는 "우리는 국제법에 따라 군사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책임을 지는 것은 국민 전체이다. 민간인은 알지 못하거나 관련이 없다는 수사는 진실이 아니다. 결코 진실이 아니다. 그들은 일어설 수도 있었고, 쿠데타로 가자를 장악한 사악한 (하마스) 정권과 싸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전쟁 중이며, 고향을 지키고 있으며, 그것이 진실이며, 국가가 고향을 지킬 때는 싸울 것이며, 우리는 그들의 등뼈를 부러뜨릴 때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2023년 12월 29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노사이드 협약 위반 혐의로 소송을 제기했을 때,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헤르초그의 이러한 발언을 제노사이드 의도의 증거 중 하나로 제출했다.
2023년 10월 17일, 그는 알아흘리 아랍 병원 폭발의 원인이 이스라엘이라는 주장에 대해 "21세기 피의 비방"이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같은 달 22일, 그는 스카이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에 붙잡힌 하마스 대원들이 알카에다로부터 화학 무기 제조법(화학 폭탄 포함) 지시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우리는 ISIS, 알카에다, 하마스와 싸우고 있다"고 발언했다.
2023년 12월 1일, 그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열린 COP28 기후 정상회담에 참석하여 카타르의 에미르 타밈 빈 하마드 알 타니와 회담을 가졌다. 2024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 경제 포럼 기간 동안, 스위스 연방 검찰청은 헤르초그에 대한 형사 고발을 조사 중이라고 발표했는데, 고발의 성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2024년 2월, 헤르초그는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출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제노사이드 소송을 유대인에 대한 "피의 비방"이라고 비난하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자신의 말을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3월 28일, 그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이스라엘의 위대한 친구"라고 언급하며 양국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24년 9월 22일, 그는 2024년 레바논 무선 호출기 폭발에 이스라엘의 개입을 부인했다. 2024년 11월 12일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헤르초그는 "성경에 요셉이 이스라엘을 강화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분명히 대통령께서 그렇게 해 주셨다"고 발언하며 바이든 대통령에게 감사를 표했다.
2024년 11월 21일, 유엔 지원을 받는 국제형사재판소가 벤야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요아브 갈란트 전 국방장관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하자, 헤르초그는 ICC의 결정을 강하게 비난했다. 그는 "이는 하마스가 자국민을 인간 방패로 냉소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무시한다. 이는 이스라엘이 야만적인 공격을 받았고 자국민을 방어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는 기본 사실을 무시한다. 이는 이스라엘이 국제 인도법에 따라 행동하는 활기찬 민주주의 국가이며, 민간인 인구의 인도적 필요를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그는 ICC가 함께 기소한 하마스 지도자 3명(이후 이스라엘 공격으로 사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4.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2021년 선거 | 이스라엘의 대통령 | 11대 | 무소속 | 76.99% | 87표 | 1위 | 당선 |
5. 개인 생활
이츠하크 헤르초그는 변호사인 미할 헤르초그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고 있다. 그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텔아비브의 차할라 지역에 있는 집에서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6. 평가와 유산
6.1. 긍정적 평가
이츠하크 헤르초그는 이스라엘 사회 내의 분열을 치유하고 다양한 공동체 간의 통합을 도모하는 데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이스라엘 사회의 "근거 없는 증오"로 인한 분열을 경고하며 통합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실제 활동에서도 이스라엘 내의 다양한 민족적, 종교적 그룹과의 소통을 강화했다.
특히 2021년 카프르 카심 학살 희생자 추모식에 참석하여 이스라엘 국가를 대표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한 것은 과거사에 대한 이스라엘 고위 인사의 첫 번째 사과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아랍계 이스라엘 시민들에 대한 화해와 신뢰 구축의 상징적인 행위로 평가된다.
또한 그는 기후 위기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실질적인 대책 마련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통령실 산하에 이스라엘 기후 포럼을 설립하고, "재생 가능한 중동"이라는 비전을 제시하며 지역 내 기후 협력의 가능성을 모색한 점은 미래 지향적인 리더십으로 평가받는다.
유대인 디아스포라와의 연대 강화에도 주력했으며, 이스라엘 유대인 기구 의장 재임 시절에는 성소수자를 포함한 직원들의 해외 대리모 서비스 비용을 지원하는 등 사회적 포용성을 확대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메타 플랫폼스와 협력하여 사이버 괴롭힘 방지를 위한 "선한 생각" 캠페인을 통해 온라인 담론 개선에도 기여했다. 외교적으로는 아랍에미리트, 튀르키예, 요르단 등 주변국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중요한 만남을 주도하며 이스라엘의 외교적 입지를 다지는 데 기여했다.
6.2. 비판
이츠하크 헤르초그는 대통령으로서 비교적 중립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정치적, 사회적 현안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발언을 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후,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집단 책임을 언급하며 "가자에는 무고한 민간인이 없다"고 발언한 것은 국제사회와 인권 단체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발언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제기한 국제사법재판소의 제노사이드 소송에서 이스라엘의 의도를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로 제시되기도 했다.
또한 2021년 헤브론의 조상들의 동굴에서 하누카 촛불을 점화한 행위는 좌파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는 논쟁적인 팔레스타인 영토 내의 유대인 정착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24년 11월 국제형사재판소가 이스라엘 총리와 전 국방장관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했을 때, 헤르초그가 이를 강하게 비난하면서 하마스 지도자들에 대한 기소는 언급하지 않은 점은, 국제적 법 집행기관의 결정에 대해 이중 잣대를 적용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었다. 2024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관련하여 그에 대한 형사 고발이 조사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도 국제사회에서 이스라엘의 행동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는 움직임이 존재함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