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요한 라이히하르트(Johann Reichhart요한 라이히하르트독일어, 1893년 4월 29일 ~ 1972년 4월 26일)는 1924년부터 1946년까지 바이에른에서 활동한 독일의 국가 공인 사형 집행관이다.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군 점령기에 걸쳐 총 3,165명의 사형을 집행하여, 공식적인 사형 집행인 중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을 처형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이는 프랑스 혁명 시기에 약 2,700명을 처형한 샤를 앙리 상송을 능가하는 수치이다.
라이히하르트는 특히 나치 시대에 독일 정부에 저항한 수많은 정치범과 저항 운동가들을 처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백장미단의 한스 숄과 조피 숄 남매의 사형도 그가 집행했다. 전쟁 후에는 미국 군정청에 고용되어 나치 전범들을 처형하는 데 협력했다. 그의 생애와 활동은 국가 폭력의 도구로서 한 개인이 얼마나 깊이 관여할 수 있는지, 그리고 시대적 상황 속에서 법 집행의 윤리적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인권과 국가 폭력의 관점에서 그의 역할은 비판적으로 조명된다.
2. 생애
요한 라이히하르트는 사형 집행인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과 교육을 거쳐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사형 집행관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으며, 초기에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라이히하르트는 1893년 4월 29일 뵈르트 안데어도나우 근처 비헨바흐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인 라이히하르트가는 18세기 중반부터 8대에 걸쳐 바이에른의 도축업자이자 사형 집행인으로 활동해 온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그의 삼촌 프란츠 크사버 라이히하르트와 형 미하엘도 사형 집행인이었다. 1902년에 사망한 그의 아버지는 비헨바흐의 외딴 지역에 작은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전문 도축업자로 부업을 했다.
라이히하르트는 뵈르트 안데어도나우의 국민학교와 직업 학교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후 도축업자로 도제 과정을 거쳤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 군인으로 참전했다.
2.2. 사형 집행관으로서의 경력 시작
1924년 4월, 라이히하르트는 70세의 나이로 은퇴한 삼촌 프란츠 크사버 라이히하르트로부터 바이에른 자유주의 국가 사법 사형 집행관 직책을 인계받았다. 그는 사형 한 건당 150 골트마르크와 일일 경비 10 마르크를 받았고, 3등석 기차표가 제공되었다. 팔츠 지역에서의 사형 집행을 위해서는 특급 열차로 파견되었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사형 집행 건수가 감소하여, 라이히하르트는 이 기간 동안 단 23명(1928년에는 단 1명)만을 처형했으며,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국내외에서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권리를 협상했고, 지역 거주 의무에서도 해제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1925년에는 수레 운송 사업을 포기했고, 1926년에는 마리아힐프플라츠의 여관 사업도 접었다. 그는 오버바이에른 지역에서 순회 판매원으로 가톨릭 논문을 팔기도 했다. 1928년에는 바이에른 법무부와의 계약을 해지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거주지를 헤이그로 옮겨 독립적인 채소 상인으로 성공적인 삶을 시작했다.
1931년 봄과 1932년 7월, 라이히하르트는 뮌헨으로 가서 슈타델하임 교도소에서 사형을 집행했다. 1932년 7월, 여러 네덜란드 신문들이 그의 "다른 활동"을 보도하며 평소 비밀로 유지되던 그의 신분을 공개했다. 그 결과 라이히하르트의 사업은 쇠퇴했고, 1933년 봄 그는 뮌헨으로 돌아와 사형 집행관 일을 그만둘 것을 고려했다.
3. 주요 활동 및 업적
이 섹션에서는 요한 라이히하르트가 나치 독일 시기에 사형 집행관으로서 수행한 역할과 그가 도입한 집행 방식의 변화,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군 점령기 동안 나치 전범 처형에 협력했던 활동을 다룬다.
3.1. 나치 독일 시기 활동
나치당의 권력 장악 이후인 1933년 6월 22일, 라이히하르트는 바이에른 법무부와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여 매월 지급되는 고정적이고 훨씬 높은 연봉을 받게 되었다. 1933년 7월 18일, 작센주 법무부의 요청에 따라 라이히하르트는 작센주에서도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각 건당" 정액 요금을 받았다. 단두대(Fallschwertmaschine팔슈베르트마쉬네독일어)와 조수들은 작센 자유주가 드레스덴과 바이마르의 사형 집행 장소에서 그에게 제공했다. 1934년 1월, 바이에른 사법부는 그의 연 수입을 3,720 라이히스마르크로 인상하여 그의 재정적 안정을 보장했다.
1933년 9월 1일부터 라이히하르트는 국가사회주의 자동차군단 (NSKK), 국가사회주의 전쟁 희생자 복지회 (NSKOV), 국가사회주의 인민복지회 (NSV), 그리고 독일 노동 전선 (DAF)에 가입했다. 1937년 4월에는 나치당 (NSDAP)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독일 법무부는 1937년 8월 25일자 법령으로 책임 구역을 재배정하고 세 명의 사형 집행관을 지명했다. 에른스트 라인델은 베를린, 브로츠와프, 쾨니히스베르크의 중앙 사형 집행 장소를 담당했고, 프리드리히 헤어는 부츠바흐, 함부르크, 하노버, 쾰른에서의 사형 집행을 담당했다. 라이히하르트는 뮌헨, 드레스덴, 슈투트가르트, 바이마르에서의 사형 집행을 담당하게 되었다. 1939년 2월 19일, 안슐루스 이후 법무부 장관은 담당 지역 변경을 명령하여, 라이히하르트는 바이마르를 프리드리히 헤어에게 넘기고 빈과 프랑크푸르트 (부츠바흐 대체)를 그의 담당 지역에 추가했다. 이 시기에 라이히하르트는 일시적으로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라이히하르트는 또한 쾰른, 프랑크푸르트-프로인게스하임, 베를린-플뢰첸제, 브란덴부르크-괴르덴, 브로츠와프 등 중앙 사형 집행 장소가 건설된 곳에서도 사형을 집행했다. 1938년부터 1944년까지 그는 빈과 그라츠의 중앙 사형 집행 장소에서도 활동했다.
3.1.1. 나치 정권 하에서의 대량 처형
라이히하르트는 사형 집행 과정을 가속화하고 사형수에게 "덜 스트레스가 되도록" 만들고자 노력했다. 1939년경부터 그는 단두대의 경사판(bascule바스퀼프랑스어)을 고정식 받침대로 교체했다. 사형수는 도끼날이 떨어질 때까지 조수들이 구속 장치 없이 붙잡았다. 그는 검은색 눈가리개를 없애고 대신 조수 중 한 명이 사형수의 눈을 감겨주도록 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실제 사형 집행 시간을 3~4초로 단축시켰다.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독일 시기인 1924년부터 1945년까지, 그는 총 2,951명을 단두대로 처형했으며, 이 중 250명은 여성이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특히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기간에만 2,876명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또한 59명은 교수형으로 처형했다. 그는 저항 단체 백장미단의 일원인 한스 숄과 조피 숄 남매의 사형(1943년 2월 22일)을 집행했다. 라이히하르트는 훗날 조피 숄만큼 용감하게 죽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언급했다.
1944년 아돌프 히틀러 암살 시도인 7·20 음모 이후 사형 집행 건수가 급증했다. 1944년 12월, 그는 뮌헨-슈타델하임(슈타델하임 교도소), 슈투트가르트 구치소, 브루흐잘 교도소를 포함하는 "제8집행구역의 집행 센터" 사형 집행관으로 지정되었다. 2014년 초, 바이에른 국립박물관에서 발견된 단두대가 숄 남매를 처형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3.2. 연합군 점령기 활동
나치당 당원이었던 라이히하르트는 1945년 5월 미국 육군에 의해 체포되어 탈나치화 목적으로 슈타델하임 교도소에서 일주일간 수감되었다. 그는 사형 집행관으로서의 공식적인 직무 수행에 대해서는 재판받지 않았다.
이후 1946년 5월 말까지 미국 군정청에 고용되어 란츠베르크 암 레흐의 교수대에서 수십 명의 나치 전범(일본어 출처에 따르면 156명)을 처형하는 데 협력했다. 교수형 기술은 그가 1942년에 롱 드롭 방식의 영국식 교수대 설계 제안서를 제출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제안은 독일 법무부에 의해 거부되었다. 교수형은 1933년 3월 29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이후 독일에서 추가적인 사형 방식으로 도입했으며, 당시 사용된 방법은 오스트리아-헝가리식 쇼트 드롭 방식의 폴 방식이었다.
1945년 8월, 라이히하르트가 빌라에서 편안하게 살며 여러 대의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다는 고발이 뮌헨 시 행정부에 접수되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바이에른 자유주의 사형 집행관이었으나 이 직무는 수행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이후 사형 집행관 직에서 은퇴하고 고문으로만 활동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그는 존 C. 우즈 상사의 교수대 관리를 도왔으며, 뉘른베르크에 교수대 건설을 감독하도록 미국 군정청의 위임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서는 그가 뉘른베르크 교수대 건설에 실제로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1946년 10월 16일, 우즈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전범들을 조지프 몰타의 도움을 받아 교수형에 처했다. 라이히하르트는 란츠베르크 교도소에서 미군의 나치 전범 처형을 도왔다.
라이히하르트는 나치와 연합군 양쪽에서 역대 어느 사형 집행관보다 많은 처형을 수행했다. 이는 "과거에는 처형을 명령하던 권력자를 실각 후 처형하고, 처형을 명령하는 위정자는 바뀌어도 실제로 처형하는 집행인은 변하지 않는다"는 샤를 앙리 상송의 사례와 유사한 입장의 변천을 보여준다.
4. 사형 집행 방식
라이히하르트는 사형 집행 과정을 가속화하고 사형수에게 "덜 스트레스가 되도록" 만들고자 노력했다. 1939년경부터 그는 단두대의 경사판(bascule바스퀼프랑스어)을 고정식 받침대로 교체했다. 이 방식은 사형수가 구속 장치 없이 조수들에 의해 붙잡혀 있다가 도끼날이 떨어지도록 했다. 그는 전통적인 검은색 눈가리개를 없애고 대신 조수 중 한 명이 사형수의 눈을 감겨주도록 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실제 사형 집행 시간을 3~4초로 단축시켰다.
그는 사형 집행 절차를 매우 엄격하게 지켰으며, 독일의 전통적인 사형 집행관 복장인 검은색 상의에 흰색 셔츠, 흰색 장갑, 그리고 검은색 나비넥타이를 착용했다. 그의 작업은 폴란드와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점령된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2014년 초, 바이에른 국립박물관에서 발견된 단두대가 한스 숄과 조피 숄 남매를 처형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5. 개인적 삶
사형 집행관이라는 직업으로 인해 라이히하르트는 외로운 삶을 살았으며, 그의 결혼 생활은 실패로 끝났다. 그의 아들 한스(Hans)는 아버지의 직업과 탈나치화 재판으로 인해 깊은 절망감에 빠져 1950년에 자살했다.
이후 라이히하르트는 빈곤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경멸받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로서의 소액 연금으로 생활했다. 그는 한때 알가징 정신병원에 일시적으로 수감되기도 했다.
6. 사상 및 태도 변화
1948년 탈나치화 재판 과정에서 라이히하르트는 "나는 나의 일이 국가에 봉사하고 합법적으로 제정된 법률을 준수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사형을 집행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의 합법성에 대해 결코 의심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직업을 단순히 국가의 명령을 따르는 행위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963년, 택시 운전사 연쇄 살인 사건으로 인해 서독에서 사형 제도 재도입에 대한 대중의 요구가 증가했을 때, 라이히하르트는 놀랍게도 사형 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71세의 나이에 3,010건의 사형 집행을 마친 후 사형 제도에 반대하게 되었다고 직접 말했다. 그는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언급하며 자신의 직업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7. 평가 및 논란
요한 라이히하르트의 생애와 활동은 나치 정권 하에서의 책임 문제와 전후 연합군에 협력한 활동에 대한 윤리적 논란을 야기하며, 국가 폭력과 개인의 역할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7.1. 나치 정권 하에서의 책임
1948년 12월 뮌헨에서 열린 탈나치화 재판에서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2년간의 노동 수용소 수감과 자산의 절반 몰수를 선고받았다. 항소 후 형량은 1년 6개월로 감형되었고, 재산의 30% 몰수로 줄어들었다. 당시 구금 기간이 이미 형량을 초과했기 때문에 라이히하르트는 석방되었다.
그의 나치당 가입과 나치 정권 하에서의 대규모 사형 집행은 국가 폭력에 대한 그의 참여와 그에 따른 윤리적, 역사적 책임을 둘러싼 중요한 논란을 야기한다. 그는 나치 정권의 인권 탄압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도구였다는 비판적 시각이 존재한다. 특히 정치적 반대자와 저항 인사들에 대한 무자비한 처형은 그가 단순히 법을 집행하는 것을 넘어, 국가 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만든다.
7.2. 전후 활동에 대한 비판
전후 미국 군정청에 고용되어 나치 전범들을 처형한 그의 활동은 복잡한 윤리적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한편으로는 나치 정권의 잔혹 행위에 대한 정의를 구현하는 데 기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과거에 봉사했던 체제의 반대자들을 처형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도덕적 입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는 "권력은 바뀌어도 집행인은 변하지 않는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며, 한 개인이 전체주의 정권과 점령군이라는 상이한 권력 아래에서 어떻게 도구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8. 영향
요한 라이히하르트는 생애 동안 총 3,165명의 사형을 집행하며 독일 사형 집행 역사상 가장 많은 사형을 집행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이는 프랑스 혁명 시기 약 2,700명을 처형한 샤를 앙리 상송을 능가하는 수치이다.
그는 서독에서 사형이 폐지되기 전인 1949년 5월 11일, 강도 살인범 베르톨트 베마이어에 대한 단두대형을 집행하며 서독의 마지막 사형 집행관이 되었다. 그의 직업적 삶은 국가 폭력의 도구로서 한 개인이 얼마나 깊이 관여할 수 있는지, 그리고 시대적 상황 속에서 법 집행의 윤리적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분석된다. 그의 생애는 사형 제도 자체의 정당성과 집행인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논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9. 사망
요한 라이히하르트는 1972년 4월 26일, 78세의 나이로 바이에른주 도르펜에 있는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