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오모리 후사키치(大森 房吉Ōmori Fusakichi일본어, 1868년 10월 30일 ~ 1923년 11월 8일)는 일본의 선구적인 지진학자이자 지구과학자로, 도쿄 제국대학 지진학과의 두 번째 학과장이자 일본 제국 지진조사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일본 지진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지진 발생 후 여진의 빈도가 시간에 따라 감소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오모리 법칙'을 발견하고 공식화했으며, 세계 최초로 상시 기록이 가능한 '오모리식 지진계'를 개발하는 등 지진학 분야에 혁혁한 공헌을 했다. 그의 연구는 지진 활동 예측의 기초를 마련하고, 건축물의 내진 설계와 재해 경감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사회 안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모리는 평생에 걸쳐 수많은 지진 현장을 직접 조사하고 데이터를 수집하며 실용적인 지진학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이러한 업적으로 '일본 지진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2. 생애 및 교육
오모리 후사키치는 어린 시절의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도 학업에 정진하여 도쿄 제국대학에서 지진학을 전공했으며, 이후 유럽 유학을 통해 선진 지진학 연구를 접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2.1. 어린 시절과 가정 환경
오모리 후사키치는 1868년 10월 30일(메이지 원년 음력 9월 15일) 일본 에치젠국 아스와군 후쿠이성 아래 신야시키 햐쿠켄 나가야(현 후쿠이현 후쿠이시 테요리 2초메)에서 하급 무사 오모리 도스케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8남매 중 다섯째로, 가세가 매우 어려웠다. 창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후쿠이시 아사히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며, 3학년 때 가족과 함께 도쿄로 이주했다. 1877년에는 관립 사카모토 학교(현 주오구립 사카모토 초등학교) 5학년으로 전학했고, 1881년에는 교리쓰 학교(현 가이세이 중학교·고등학교)에 진학했다. 1883년에는 도쿄 대학 예비문 본학에 입학했다.
2.2. 도쿄 제국대학에서의 학업
1887년, 오모리는 제국대학 이과대학(현 도쿄대학 이학부)에 입학하여 물리학을 전공했다. 1890년에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대학원에서 기상학과 지진학을 전공하며 연구를 이어갔다. 그는 일본에 초빙된 영국인 지진학자 존 밀른과 세키야 세이케이 등의 외국인 교수들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특히 세키야 세이케이는 1880년 도쿄 제국대학에서 최초로 지진학 교수로 임명된 인물이다. 오모리는 세키야와 함께 파괴적인 지진의 첫 명확한 기록을 측정 장치를 통해 얻어 발표하기도 했다. 1891년에는 세키야의 조수로 임명되었고, 1893년에는 제국대학의 지진학 강사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1891년에 발생한 미노-오와리 지진의 여진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2.3. 유럽 유학
오모리는 1894년부터 3년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선진 지진학 연구를 접하고 견문을 넓혔다. 그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추가적인 학업을 수행했으며, 1896년 9월 귀국하는 길에 영국을 잠시 방문하기도 했다.
3. 학술 활동 및 연구
오모리 후사키치는 지진학, 화산학, 지진 공학 분야에서 혁신적인 연구와 발명, 그리고 현장 중심의 조사 활동을 통해 일본 지진학의 기틀을 다지고 전 세계 지진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1. 일본 지진학의 창시자
1896년 1월 9일 세키야 세이케이 교수의 사망 후, 오모리는 도쿄 제국대학의 지진학 교수이자 제국 지진조사위원회의 간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미노-오와리 지진을 계기로 문부성에 설치된 지진조사위원회의 간사를 오랫동안 역임하며 일본 지진학의 지도적인 위치에 올랐고, '일본 지진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오모리는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일본어를 읽고 쓸 수 있었으며, 여러 언어로 논문을 작성하고 전 세계의 많은 지진학자들과 서신 교환을 통해 활발하게 교류했다.
3.2. 오모리 법칙 (여진 감소 법칙)
지진 발생 후 여진의 빈도는 본진이 발생한 후 시간에 따라 점차적으로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경험적인 관계는 오모리 후사키치가 1894년에 최초로 공식화했으며, 이를 오모리 법칙 또는 오모리 공식이라고 부른다. 오모리 법칙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n(t) = k / (c+t)
여기서 `n(t)`는 시간 `t`에서의 여진 발생 빈도이며, `k`와 `c`는 각 지진마다 달라지는 상수이다.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1961년 일본의 지진학자 우쓰 도쿠지가 수정한 오모리 법칙 공식 또는 우쓰-오모리 법칙은 다음과 같다.
n(t) = k / (c+t)p
여기서 `p`는 여진 감쇠율을 보정하는 또 다른 상수이며, 일반적으로 0.7에서 1.5 사이의 값을 갖는다.
이 방정식에 따르면 여진의 발생 비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빠르게 감소한다. 여진의 비율은 본진 발생 이후 시간에 반비례하며, 이 관계를 통해 미래에 여진이 발생할 확률을 추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본진이 일어난 당일에 여진이 일어날 확률이 어떻게 되든, 그 다음 날의 확률은 전날 확률의 1/2이며, 10일 후의 확률은 첫날 확률의 1/10에 해당한다. 이러한 패턴은 여진의 통계학적인 양상만을 표현하며, 여진이 실제로 발생하는 정확한 시각, 횟수 및 위치는 추계학적이며 대략적인 패턴만을 따른다.
오모리 법칙은 경험적인 법칙이기 때문에 각 상수값은 본진 발생 이후 수집한 데이터에 보정하여 얻어지며, 이러한 상수는 특정한 일반적인 물리적 법칙을 항상 따르지는 않는다. 우쓰-오모리 법칙은 여진 활동의 변화를 설명하는 미분방정식의 해를 구해 이론적으로도 얻을 수 있는데, 이 미분방정식을 해석하면 지진의 본진이 있었던 단층이 비활성화된다는 발상에 기초하여 얻어졌다. 또한 이전의 우쓰-오모리 법칙은 지진 발생 당시의 핵형성 과정에서도 얻어졌으며, 훨씬 최근에는 반응형 미분방정식의 유리수형 해를 풀어 구할 수도 있는데, 이중 거듭제곱 법칙 모델은 여러 방향으로 여진 발생 빈도가 감소함을 보여주며 그중에는 우쓰-오모리 법칙과 같은 모습도 존재한다.
3.3. 오모리식 지진계 개발

1890년대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각지의 관측소에 설치되었던 G.M.E.(그레이-밀른-유잉) 일반 지진계는 감진기가 작동해야 기록을 시작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P파를 기록할 수 없는 결함이 있었다. 오모리 후사키치는 이러한 기존 지진계의 한계를 극복하고 1898년경 세계 최초로 상시 기록이 가능한 오모리식 (수평) 지진계를 제작했다.
이 지진계는 그을음 기록 방식(煤書式)으로, 기록지를 원통형으로 감은 드럼을 태엽으로 천천히 움직여 항상 기록을 이어가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P파, S파, L파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별하여 기록하는 것이 가능했다. 1899년 오모리는 자신의 수평 기록 진자(pendulum)를 설명했고, 이는 나중에 오모리 지진계로 불리게 되었다. 독일 슈트라스부르크의 J&A 보쉬(Bosch) 사에 의해 약간의 수정이 가해진 후 '보쉬-오모리 지진계'로 명명되었으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 전 세계 지진 관측망의 중추를 형성했다.
이후 미동계, 간이 미동계 등 다양한 개량형이 만들어져 일본 국내의 대학과 기상대 관측소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현재 마지막으로 작동하는 보쉬-오모리 지진계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펀데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3.4. 주요 지진 조사 및 현장 연구
오모리 후사키치는 주요 지진 발생 시마다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피해 상황을 조사하고 데이터를 수집, 분석하는 현장 중심의 연구 방법론을 고수했다.
3.4.1. 미노-오와리 지진 및 여진 연구
1891년 10월 28일, 일본 미노국과 오와리국은 대규모 지진으로 황폐화되었다. 제국대학의 또 다른 교수였던 고토 분지로는 이 지진의 단층선을 추적하며 최소 64374 m (40 mile) 이상 지표면을 가로지르는 주향 이동 단층을 발견했고, 북동쪽이 다른 쪽보다 1 m에서 2 m 가량 이동했음을 확인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5.5 m에서 6 m 높이의 단층애가 형성되기도 했다. 이 지진은 오모리에게 중요한 초기 데이터 세트를 제공했으며, 그는 이를 다른 지진들과 연관 지어 분석함으로써 오모리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연구 결과는 1894년에 발표되었다.
3.4.2.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 조사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당시, 전 세계적으로 가장 흔한 두 가지 유형의 지진계인 밀른형 지진계와 보쉬-오모리 지진계가 이 지진을 기록했다. 재난 직후 전 세계의 지진학자들이 북부 캘리포니아로 모여들었다.
오모리 후사키치는 1906년 5월 1일 도쿄를 출발하여 5월 18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나카무라 다쓰타로, 사노 도시카타, 노구치 마고이치 교수 등 건축가와 공학자로 구성된 일본 제국 위원회를 이끌고 샌프란시스코 지진의 여파를 조사하고,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 새로운 지진계를 기증하기 위해 방문했다.
오모리와 그의 동료들은 도시에서 손상된 건물을 측정하고 사진을 찍는 데 시간을 보냈다. 이들은 여러 차례 폭행을 당했다고 보고되었다. 적어도 두 명의 저자는 오모리와 그의 동료들이 샌프란시스코 미션 스트리트에서 갱단에게 공격을 받았으며, 당시 현지 언론은 무작위 일본인 남성들에게 돌을 던지고 폭행한 행위를 반일 감정의 발현으로 칭송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당시의 자료에 따르면 오모리 박사에게 돌을 던진 소년 중 한 명이 우체국 메신저로 일했으며, 미국 일본인 협회의 항의 후 샌프란시스코 우체국장에 의해 해고되었다. 다른 신문에 보도된 사건들은 다른 출처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오모리 자신은 이러한 사건을 용서하기로 선택하며, "샌프란시스코에서 불량배들과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하와이 사람들이 내가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뻤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고, 나는 악의를 품지 않습니다. 모든 나라에는 불량배들이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저를 매우 잘 대접해 주셨고, 저는 제 여행에 매우 만족합니다"라고 기록했다.
오모리는 캘리포니아에서 약 80일 동안 머물렀다. 그는 1906년 7월 6일 유레카에서 비노조 파업 파괴자로 오인되어 폭력배에게 폭행을 당하는 등 북쪽으로 험볼트군까지 증기선을 타고 이동했다. 유레카 시장은 즉시 오모리 박사에게 사과했다.
오모리는 관측을 계속하여 남쪽으로 일강 계곡까지 이동했고, 펀데일에 들러 센터빌 남쪽 펄스케이프에서 거대한 산사태를 목격했다. 이 산사태는 이전 해안 도로를 덮고 태평양으로 새로운 곶을 형성했으며, 지역 재산과 건물에도 피해를 입혔다. 펀데일을 떠난 오모리는 육로로 샌앤드리아스 단층의 흔적을 따라 샌프란시스코까지 남쪽으로 이동하며 인공 및 자연 지형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계속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지진이 땅, 건물, 나무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하며 "심지어 큰 레드우드 나무도 땅의 전단 운동에 의해 쪼개졌다"고 기록했다.
이후 오모리,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그리고 미국 해안 및 측지 조사국은 멘도시노 삼중점 해역과의 근접성 때문에 펀데일에 보쉬-오모리 지진계를 설치할 펀데일 지진관측소를 설립했다. 이 지진계는 현재도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펀데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오모리는 포인트 아레나에서 남쪽으로 산호세까지 약 241401 m (150 mile)에 이르는 단층의 지표면 흔적을 직접 확인하고 글로 남겼으며, 이 선이 북쪽으로 유레카 남쪽 펄스케이프 산사태까지 약 193121 m (120 mile) 동안 수중으로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이 여행에서 오모리가 찍은 많은 사진들이 출판되었다.
오모리는 샌프란시스코 남쪽의 묘비와 산호세의 세인트 제임스 호텔을 포함한 건물 벽의 균열을 연구하여 지반 운동의 방향을 분석했다. 서양식 건축물과 일본식 건축물의 피해를 비교하며, 오모리는 계측기 판독값과 관찰된 효과를 모두 사용하여 피해를 설명하는 최초의 지진 피해 등급을 발표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의 단층 활동이 단층면의 전단 응력으로 인해 단층의 주향과 평행하게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오모리 지진계는 북부 캘리포니아 전역에 빠르게 설치되었고, 샌프란시스코 지진의 여진 목록이 작성되어 출판되었다. 오모리는 1906년 8월 4일 텐요마루호를 타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3.4.3. 기타 해외 지진 조사 (메이산, 메시나 등)
오모리는 1906년 3월 17일 대만에서 발생한 메이산 지진 직후 현장에 도착했다. 그는 액상화 현상과 메이산 마을의 완전한 파괴를 상세히 기술했다. 그는 높은 인명 피해의 원인이 주로 현지 건축 양식인 햇볕에 말린 진흙 벽돌 벽이 진흙으로 느슨하게 접합되고 무거운 지붕 보가 얹혀진 구조물의 붕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1908년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메시나 지진에서는 약 75,000명에 달하는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했음을 주목했다. 그는 사망자의 99%가 주택이 지진에 견딜 수 있도록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망했다고 강조하며, 건축물의 내진 중요성을 역설했다.
3.5. 화산 지진학 연구
오모리는 1893년 아즈마산 분출에 대한 초기 논문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여러 화산들을 연구했다. 그는 일본 중부의 아사마산 정기 분출, 1910년 우수산 분출, 그리고 1914년 1월 12일 사쿠라지마 분출에서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여러 유형의 화산성 지진을 분류하고 설명했다. 1910년 우수산 분화 당시에는 직접 시제작한 지진계를 소베쓰정에 설치하여 화산성 지진을 상세히 관측했으며, 세계 최초로 화산성 미동을 기록하는 등 기존 화산학에 새로운 지견을 제공했다. 1911년에는 "대분화 예측은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라고 언급하며, 분화 예측을 위한 상시 관측을 수행하는 화산 관측소의 설치를 제안하고 우수산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1914년 1월 12일 아침, 오모리는 전날부터 사쿠라지마 주변에서 작은 지진이 다발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주의를 촉구하는 전보를 보내려던 중 사쿠라지마 다이쇼 대분화가 발생했다. 그는 1월 16일 해상에서 사쿠라지마를 시찰한 후, 같은 날 19시에 가고시마시에는 위험이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를 발표하여 당시 혼란 상태에 있던 시내를 진정시켰다. 또한 그는 하와이 빅 아일랜드에 화산 관측소를 설립할 계획이던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의 토머스 재거를 만난 후, 하와이 화산 관측소의 일부가 된 휘트니 지진학 연구소(Whitney Laboratory of Seismology)의 기초와 지진계 설치를 설계했다. 1912년 오모리는 특별히 제작된 기초 위에 설치될 오모리식 수평 트로모미터와 지진계 두 대를 하와이로 보냈다. 1년 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는 두 대의 보쉬-오모리 지진계를 하와이 화산 관측소에 추가로 기증했다. 이 시기에 그는 노벨상 물리학 위원회로부터 논문 제출 요청을 받기도 했으나, 실제 논문은 제출되지 않았다.
3.6. 지진 공학 및 재해 영향 연구
오모리 후사키치는 지진이 건축 구조물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지진 공학 분야에서도 선구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1889년, 그는 존 밀른과 함께 도쿄대학 공과대학에서 수평으로 가해지는 운동에 의해 벽돌 및 기타 기둥이 전복되고 파괴되는 현상을 조사하는 실험을 기록했다. 당시 밀른은 메이지 유신 시기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적인 가벼운 목조 구조물이 붉은 벽돌 건물과 철교로 대체되는 것에 대해 큰 우려를 표명했다.
오모리는 이러한 연구를 이어가, 진동대 실험을 통해 인공 구조물에 대한 지진의 영향을 연구하고 실험 결과를 실제 지진 관측 데이터와 비교한 최초의 인물로 지진 공학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다. 그는 1900년에 기둥의 파괴 및 전복에 대한 지진 실험 결과를 담은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1908년 메시나 지진 당시 약 75,000명에 달하는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을 보고, 오모리는 사망자의 99%가 주택이 지진에 견딜 수 있도록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건물의 안전성과 재해 경감의 중요성을 강력히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연구는 사회 안전과 직결되는 중요한 분야에 기여했다.
4. 사상 및 학풍
오모리 후사키치의 학문적 입장은 지진 예측에 대한 그의 신중한 태도와 이마무라 아키쓰네와의 논쟁을 통해 명확히 드러났다. 1905년, 같은 지진학과 조교수였던 이마무라 아키쓰네는 앞으로 50년 이내에 도쿄에 거대 지진이 발생할 것을 경고하며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기사를 잡지 『태양』에 기고했다. 이 기사는 신문에 선정적으로 보도되면서 사회 문제로 비화되었다.
오모리는 지진 재해 대책의 필요성 자체는 이해하고 있었으나, 그로 인해 사회에 혼란이 발생하는 것을 우려했다. 따라서 그는 이마무라의 기사를 근거 없는 주장으로 일축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오모리의 태도는 과학적 예측의 불확실성과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 했던 그의 학풍을 보여준다. 그는 지진 예측에 대해 매우 신중하고 과학적인 접근 방식을 고수했으며, 검증되지 않은 정보로 인한 사회적 동요를 경계했다.
5. 개인적인 삶
오모리 후사키치는 하급 무사 가문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8남매 중 한 명으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가세가 넉넉하지 못했다. 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그는 여러 언어(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일본어)를 구사하며 전 세계 지진학자들과 활발히 교류하는 등 학자로서의 삶에 전념했다.
6. 사망
1923년 가을, 오모리 후사키치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개최된 제2차 범태평양 학술회의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그는 시드니의 리버뷰 천문대 에드워드 피곳(Edward Pigot) 소장과 함께 1923년 9월 1일 요코하마와 도쿄를 파괴하고 약 140,000명의 사망자와 1,900,000명의 이재민을 발생시킨 간토 대지진이 지진계에 기록되는 것을 목격했다.
일본에서 대지진이 발생했음을 알게 된 오모리는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1923년 10월 4일 멜버른에서 텐요마루호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귀국 직후 뇌종양 진단을 받았고, 곧바로 도쿄대학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사망 며칠 전 일본 제국으로부터 서보장을 수여받았다. 오모리는 1923년 11월 8일, 향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묘소는 다마 영원에 있다.
7. 평가 및 유산
오모리 후사키치는 지진학 분야에서의 혁신적인 업적과 공헌으로 역사적, 과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으며, 그의 연구는 후대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7.1. 주요 업적에 대한 평가
오모리 후사키치는 일본 지진학의 기틀을 마련하고 현대 지진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선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도쿄 제국대학 지진학과의 두 번째 학과장이자 일본 제국 지진조사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하며 국가적인 지진 연구를 이끌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인 오모리 법칙은 지진 발생 후 여진의 빈도 변화를 수학적으로 설명하여 지진 활동 예측의 기초를 제공했다. 또한 그가 개발한 오모리식 지진계는 세계 최초로 상시 기록이 가능한 지진계로서 전 세계 지진 관측망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으며, P파, S파, L파를 명확히 구별하여 기록할 수 있게 함으로써 지진파 연구에 혁명을 가져왔다.
오모리는 지진 공학 분야에서도 진동대 실험을 통해 건축물에 대한 지진의 영향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내진 설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사회 안전과 재해 경감에 기여했다. 이러한 다방면의 공헌으로 그는 '일본 지진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그의 과학적 기여는 오늘날까지도 지진학 연구의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7.2. 비판 및 논란
오모리 후사키치의 학문적 활동에는 몇 가지 비판적 시각과 사회적 논란이 존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05년 동료 지진학자 이마무라 아키쓰네와의 지진 예측 관련 논쟁이다. 이마무라는 도쿄에 대규모 지진이 닥칠 것을 경고하며 대책 마련을 촉구했지만, 오모리는 사회적 혼란을 우려하여 이마무라의 주장을 근거 없는 것으로 일축했다. 이러한 오모리의 신중한 태도는 당시로서는 과학적 예측의 한계와 사회적 파급력을 고려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간토 대지진 발생 후 이마무라의 경고가 재조명되면서 오모리의 판단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또한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조사차 미국을 방문했을 때, 오모리와 그의 동료들은 당시 만연했던 반일 감정으로 인해 샌프란시스코와 유레카 등지에서 여러 차례 인종차별적인 폭행을 겪었다. 비록 오모리 본인은 이러한 사건들을 "모든 나라에 불량배는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용서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이는 당시 일본인 이민자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인종차별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8. 기념 및 추모
오모리 후사키치의 업적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한 다양한 기념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의 생가가 있던 후쿠이현 후쿠이시 테요리 2초메의 테요리 공원에는 오모리 후사키치의 동상과 오모리식 지진계를 형상화한 부조가 세워져 있다. 또한 그의 생애와 업적을 다룬 여러 서적들이 출판되어 그의 연구와 공헌이 후대에 계속해서 전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서적으로는 우에야마 아키히로의 『지진학을 만든 남자 오모리 후사키치』, 『간토 대지진을 예지한 두 남자 오모리 후사키치와 이마무라 아키쓰네』 등이 있다.
9. 관련 항목
- 존 밀른
- 세키야 세이케이
- 고토 분지로
- 나카무라 다쓰타로
- 사노 도시카타
- 노구치 마고이치
- 토머스 재거
- 에드워드 피곳
- 이마무라 아키쓰네
- 우쓰 도쿠지
- 오모리 법칙
- 오모리식 지진계
- 여진
- 초기미동 계속시간
- 진동대 실험
- 액상화
- 화산성 지진
- 단층선
- 미노-오와리 지진
- 메이산 지진
- 메시나 지진
-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 간토 대지진
- 아즈마산
- 아사마산
- 우수산
- 사쿠라지마
- 멘도시노 삼중점
- P파
- S파
- L파
- 지구과학자